일제와 독재에 맞선 돌베개의 삶 “일제하에서도 내가 왜군과 싸우다 죽지 못한 광복군 출신인데, 어디 광복된 조국에서 왜놈 군관 출신 독재자 놈의 전기고문 맛을 좀 보자.”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기 1주일 전, 장준하는 수상한 사람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할 위기에 놓인 상태에서 이렇게 호통을 쳐 오히려 수사관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35년간 조선을 통치해온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 군대를 탈출, 6천리의 길을 마다않고 장정에 나서 임정에 도착, 광복군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장준하가 꿈에도 그리고 갈망했던 해방 조국에서 일제 군관 출신의 명령으로 일제와 다를 바 없는 고문의 위협에 놓여야 한다니. 장준하는 이때 특유의 당당함으로 전기고문은 면했지만 불과 몇 해 뒤,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아주 오랜 기간 잊혀질 것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그랬던 장준하 선생이 홀연 37년 만에 유골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해머 같은 도구의 흔적으로 보이는 상처가 거의 한 세대를 넘어서야 겨우 우리에게 보여진 것이다. 장준하 하면 사상계, 그리고 의문사의 두 단어만 떠올리던 나는 문득 내가 장준하에 대해, 그리고 또 사상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책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을 집었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이름, 돌베개는 원래 장준하의 책 제목이다. 일본군에서 탈출, 광복군이 되기 위해 떠난 6천리 길 장정을 비롯한 항일운동 과정을 써내려간 책 이름으로 하나님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야곱의 ‘돌베개’에서 따온 것이다. 출판사 이름 <돌베개>도 장준하 선생의 책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책으로 만난 장준하는 걸출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큰 사람> 이었다. 항상 옳은 길만을 좇는 성정에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 어쩌면 광복군의 길은 당연한 숙명이었을 것이다. 장준하는 평안북도에서 항일 정신이 강한 집안과 학교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반일 감정을 가지게 된다. 미리 탈출을 각오하고 일본군으로 만주에 가서 다시 임정으로 향한 장준하 선생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일단 그 스케일에 놀라고 두려움을 모르는 배포가 낳은 숱한 일화들이 안겨주는 예상치 못한 감동과 재미에 빠져든다. 함석헌 옹은 장준하 선생(이하 장준하)을 일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준하를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다. 참사람이 되는 데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다. 도무지 겁이 없고 무서운 것이 없다.” ▲ OSS 훈련을 받을 당시의 장준하(맨 오른쪽). 맨 왼쪽은 노능서, 가운데는 김준엽 장준하의 본격적인 항일운동은 중학교 시절에 시작된다. 평안북도 선천군 신성중학교 5학년 시절 일본경찰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장을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가 두들겨 맞고 해산됐다. 장준하는 이에 격분, 전교생을 이끌고 동맹시위를 시작한다. 학생 대표들을 모아 일본어로 된 책을 모두 찢어버리자는 제안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일경에 쫓기는 대오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산상시위까지 했다. 중학교 졸업 후 진학을 하지 못한 장준하는 여차저차 소학교 교원이 된다. 그곳서 친구 김용묵과 함께 3년을 지내다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를 1년 다니고 다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일본이 학도병을 모집할 때 장준하는 피하기보다 군대를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집안걱정을 해서였다. ‘일인들이 가장 주목하고 또 가장 미워하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나의 아버님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선천 신성중학교 교직에서 축출당한 뒤에도 계속 요시찰 인물로 형사들이 뒤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내던져버렸다. 내가 지금 일본 병영 안에 학병으로 있는 이유는 나의 집안에 닥칠 불행을 예감했기 때문에 그 방파제가 되기로 스스로를 설득시킨 결과다.’ 마취제 없는 손가락 수술 참고 일 병사 잔반 거부하고... 일본군 시절, 장준하를 엿보게 하는 일화 하나. 혹한에 맨손으로 마구간 청소를 하다가 왼쪽 엄지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크게 앓았다. 며칠을 참다가 못견뎌 군의관에게 가니 그걸 째야 하는데 마취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 군의관이 엉뚱한 곳을 자꾸 찢어 다섯 군데나 상처를 냈다. 마취제도 없이. 장준하는 <삼국지>에서 관우가 팔의 곪은 창상을 명의 화타로 하여금 긁어내게 하면서 바둑을 둔 일을 상상하며 참았다고 한다.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없이. 결국 군의관이 지독한 독종이라며 며 혀를 내둘렀는데 이때를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인 군의관은 손가락을 돌아가며 다섯 군데를 쨌다. 문자 그대로 난자질이었다. 머리끝으로 모여오는 신경의 긴장이 겨우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나의 손가락은 이제 내 것이 아니고 인내로 맞서서 일본 군의관을 당황하게 하는 피투성이가 된 우리 민족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일 그런 생각이 끝까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 기절 상태 쓰러졌거나 아픔을 못 참고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은 가슴속 깊은 강물 속으로 잠겨 버리고 나의 표정은 물의 수면처럼 잔잔했다. 지금도 그 다섯 군데의 칼자국은 내 엄지손가락 끝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엄지손가락은 끝내 병신이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 칼자국들은 내가 최초로 일인 군의관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 훈장으로 빛나고 있다’ ▲ 스물 여섯 살 광복군 시절.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www.peacewave.or.kr)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인내와 정신력, 그리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이 이렇게 힘든 상황도 견디게 해준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일제에 맞서고 민주주의 탄압에 맞서 싸우며 이상적인 나라에의 꿈을 놓지 않고 계속 전진해갔던 그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더 높고 먼 곳을 내다보고 달려갔던 것 같다. 처음엔 평양 42연대에 들어갔던 장준하는 몇 개월 뒤 중국 쓰카다 부대로 간다. 탈출을 꿈꾸던 장준하에게 절망적이게도 조선인 탈출병이 가장 적다는, 그때까지 단 한 명만 탈출했다는 악명높은 부대였다. 장준하는 탈출 기회를 좀 뒤로 잡았던 것 같다. 그러면 조용히 지내는 게 인지상정일텐데 이 부대에서 또 '잔반거부 운동'을 벌인다. 당시 부대에서 일본군 고참이나 하사관들이 밖에서 먹을 기회가 많아 군대의 식사를 대충 하고 남은 음식을 선심 쓰는 척 조선 병사에게 밀어주고 조선인 병사들은 또 평소 배식량이 부족했던 터라 그 잔반을 서로 받아 가로채려고까지 했다. 모욕감을 참다못한 장준하는 일본군이 남긴 배식분을 모두 '잔반통'에 들이부어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미운 털이 박혔으나 재치 있게 자신을 괴롭힌 고참을 골탕먹이기까지 한 장준하는 마침내 다른 동료 3명과 함께 탈출을 한다. “붙잡히기만 하면 일본도로 목을 쳐서 연병장에 내걸고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는 살벌한 부대에서 탈출하는 부분은 정말 책을 읽는 내가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폭염과 갈증에 시달리고 발각될 위기까지 무사히 넘긴 장준하 일행은 운 좋게 중국군 부대 쪽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쓰카다 부대의 유일한 탈주병이자 장준하와 오랜 친구가 되는 김준엽을 만난다. 중국군 부대가 생각지도 못한 피습을 당해 그곳을 떠나와야 했던 장준하는 이제 김준엽까지 포함한 다섯 명 일행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떠난다. 이렇게 가야했던 길이 장장 6천리. 한반도를 왕복하는 거리인 셈이다. 40여 일을 걷고 걸어 이 장정의 중간쯤 임천이란 도시에서 광복군이 되는 첫 훈련을 받는다. 광복군이 되는 훈련이라 기대가 컸지만 기대보다 시시한 교육에 실망했던 장준하는 이때 함께 왔던 일행들과 강습을 자청하고 ‘사상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잡지 ‘등불’을 만든다. 임천의 중국 군관학교에 편입한 장준하와 일행은 여기에 특설된 한광반(한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교육과정을 마치고 소위가 되어 중경으로 향한다. ▲ 사상계 시절. 앞줄 맨 왼쪽이 함석헌옹.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www.peacewave.or.kr) 임천으로 올 때보다 훨씬 많은 인원으로, 쓰카다 부대를 탈출한 지 5개월 24일 만에 중경에 도착한다. 꿈에도 그리던 임시정부, 일행들은 말할 수 없는 감격에 겨웠다. “저희는 왜놈들의 통치 아래에서 태어났고 또 그 밑에서 교육 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국기조차 본 일이 없는 청년들입니다. 저희는 우리나라의 국기가 보고 싶었습니다. 전국에 나부끼는 것이 일장기가 아니고 우리의 국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던 그 마음이 오늘 이 중경에서 더구나 우리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다시 살아나 깊은 감회에 젖게 합니다.” 그러나 이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임정에는 7개의 정당 단체가 난립했고 경쟁하듯 이 젊은 일행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도착한 임정의 당파 정쟁에 실망하다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로 쓰고 있는 형편에 그 정파의 수는 의자 수효보다 많았다.’고 개탄하던 장준하는 결국 사고(?)를 친다. 한 월례 모임에서 연단에 나서 폭탄발언을 한 것이다.
중경 도착 20일 만에 임정에서 반골로 낙인찍힌 장준하는 중경 교외 토교라는 마을로 가서 군사 임무를 기다리며 주둔한다. 여기서 장준하는 또 ‘등불’을 발행하기도 하고 목회를 맡기도 한다. 김구의 요청으로 이때 만든 ‘한국 기독교 실태 보고서’로 유명해져서 당시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소개될 정도였으니 일을 맡으면 성심을 다하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4월 29일, 장준하와 김준엽을 비롯한 19명이 군사 작전을 위해 서안으로 간다. 여기서 이들은 미국의 OSS 대원이 되기 위해 3개월간 고도의 훈련을 받는다. 광복군 중위로 진급한 장준하는 이 기간에도 잡지를 발행한다. 이번엔 더 비장한 이름 ‘제단’으로 2호까지 발간한다. 마침내 1945년 7월 말, 정규 교육을 마치고 8월 20일 국내 잠입 완료 일정을 잡았다. 일정은 조금 앞당겨진다고 했다. 장준하는 7권의 일기와 5권의 ‘등불’, 2권의 ‘제단’을 묶어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고 국내 진입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국내 침투 계획은 끝내 실행되지 못한 채 8월 15일 외세에 의한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이 되고 석 달을 넘긴 뒤에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는 임정 요원 일행을 태울 비행기를 보낸다. 이때 장준하는 김구 주석의 수행 비서격으로 함께 수송기에 오르게 되었다. ▲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장준하.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원들과 함께 해방된 조국의 김포 공항에 도착한 장준하는 그러나 크게 실망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모두 허공에 사라져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가 않았다. 너무나 허탈한 상태에서 몇 번이나 활주로의 땅바닥을 힘주어 밟아 보았다.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인가. 나는 소처럼 땅바닥을 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태극기도 환상의 환영 인파도 목이 아프게 불러줄 만세 소리도 그런 것들은 어디론가 가버린 것들이 되고 검푸레하고 싸늘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미 군정 당국은 이들의 입국 사실을 국내에 미리 알리지 않았고 비행기 착륙 장소도 간이 비행장으로 개설한 지 2년밖에 안된, 한적한 김포로 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임정 요인의 입국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갑작스런 해방 정국으로 혼란이 이어지고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임정에서의 정파적이고 사치스럽던, 그래서 장준하를 실망시켰던 모습은 이 해방정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광복군 환영회가 있다고 해서 가니 그 장소는 국내 제일의 요정이고 기녀까지 동석하는 식이었다. 장준하는 큰 환멸을 느꼈다. “이런 식의 초대 향응이 매일 매야 바뀌는 명목들로 벌어졌다. 누구누구를 초대하든 같은 명월관이나 국일관 등 주지육림 속에서 놀아나며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었다. 요릿집 경기는 장안을 누르고, 해방된 기쁨이라고 사회와 인심은 둥둥 들떠 있었다. 이 혼잡 속에서도 불순한 정치 세력은 칡넝쿨처럼 이권과 이해와 정치 목적을 따라 뻗어나갔고 국민들은 깨어나야 할 혼돈 속에서 각성을 몰랐다. 임정을 위요하고 있는 밖의 정치 세력들도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임정과 연결을 가지려는 이들 악착스러운 움직임에 빠져, 국무위원들은 각자 자기대로 외적인 파벌과 결탁을 하기에 바쁜 것이 현저한 그들의 행태였다.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잠시 광복군 시절 총사령관이었던 이범석을 따라 민족청년단(족청) 교무처장을 맡았지만 이범석이 예전의 이범석이 아님을 알게 된 장준하는 족청에서 나와 ‘한길사’라는 출판사를 잠시 운영하다 접고 1948년 한국 신학대학에 편입, 만학에 열중한다. 전쟁의 비극 딛고 피난지 부산에서 창간한 ‘사상’ 그러다 맞은 6·25 전쟁은 장준하의 부친과 조부, 어린 딸을 앗아가고 유엔군 통역관으로 들어갔던 아우마저 실종되는 비극을 맞는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민이었던 장준하는 이 와중에서도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백낙준의 도움으로 1952년 9월 피난 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을 창간한다. ‘사상’이 4호를 끝으로 폐간하자 장준하는 집필자를 찾아다니며 외상 원고를 청탁했고 사람들은 그를 믿고 원고를 써주었다.
▲ 思想界 시절. 1965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강연장에서의 장준하.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36세 무일푼으로 장준하는 다시 ‘사상계’를 냈다. 발행 허가 신청 절차도 까다로웠으나 외상으로 조판, 인쇄처를 찾아야 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시대도 그렇거니와 당시 상황도 그렇고 엄밀히 따지자면 엄두도 내기 힘들었을 일을, 장준하는 밀어붙였다. ‘되지 않는 일을 서두르고 다니는 것처럼 피곤한 일은 없다. 그 무렵 나는 아주 밤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어쩌다 잠깐 눈을 붙였다 하면 잠꼬대로 곧 잠이 깨곤 하였다. 만약 나의 이 고민과 노력이 허사로 끝난다면 나의 생애도 같이 끝날 것만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맘이 통해서였는지 운명이었는지 거짓말처럼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렇게 1953년 4월 ‘사상계’ 창간호가 탄생했다. ‘사상계’ 창간호는 예상 외로 큰 호응을 얻었다. 여기에는 당시의 혼란스런 정국 영향이 컸다. 국회의원에 대한 협박과 납치가 예사로 벌어졌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급기야 김시현, 유시태 두 독립투사가 이승만을 저격해 살해하려 한 사건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니 시민들에게 시국 상황과 사회의 앞날에 대해 속시원히 말하는 ‘사상계’의 탄생이 반가웠을 것이다. 1953년 11월, 서울에 온 장준하는 종로 종각 앞 한청빌딩에 사상계 사무실을 연다. 1954년 7월부터는 사상계가 순탄히 나오고 사상계사는 국내 저명 학술단체 학술지 출간도 맡는 등 세를 부풀렸다. 이 무렵 이승만 정부가 담화문까지 내며 ‘한글 간소화 파동’을 일으켰다. 구식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야만적 발상이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8월호 권두언에서 이를 비판하고 9월호에서는 아예 전 지면의 절반 이상을 할애해 ‘독립투쟁 사상에서 본 한글 운동의 위치’라는 제목의 특집을 낸다. 그렇게 한동안 한글에 관한 찬반논란이 사상계를 통해 불붙었고 국어학자들이 대거 동조, 결국 이승만은 1955년 9월에 취소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1955년 6월에는 김준엽이 새 편집위원으로 합류했고 1956년에는 함석헌을 만난다. 함석헌은 1956년 1월호 첫 기고문부터 큰 반향과 물의를 일으키는데 그 내용이 기독교 신구교를 싸잡아 비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가 이에 반박문을 실었고 그렇게 논쟁이 이어져 나가며 1957년에는 발행부수가 4만 부에 달했다.(‘사상계’의 발행 부수는 5만 부 선이었고 4.19를 전후해서는 최고 9만 7,000부까지 발행했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 부수는 8만 부 정도였다.)
▲ 思想界 시절.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기간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장준하.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사상계의 시련도 시작된다. 1958년 광복 14주년을 맞아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 글이 나가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함석헌을 잡아 20일간 가둔 것이다. 어떤 글이었을까.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이 됐다고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상전이 하나던 대신 지금은 둘셋인 것이다. 일본 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매는 나라의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가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가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가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그러니 6·25는 꼭두가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는 될 것이 없지 않은가. 6·25 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도 아니다. 그러니까 서울을 빼앗겼을 때 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그랬듯이 이승만도 국민은 다 버리고 민중 잡아 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 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야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을 간 것이다.’ 당시에는 이승만을 부를 때 초소한 ‘이 박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승만’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할 때. 그런데 함석헌이 ‘미국의 꼭두가시 이승만’이라고 지칭했고 ‘사상계’는 그것을 그대로 실었으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이 8월호는 경찰이 배포를 막고 독자들은 더 구하려고 해 반품이 단 하나도 없는 진귀본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잘못을 거침없이 까발리다 그해 12월 24일 자유당 정권이 무술 경위 3백여 명을 국회의사당에 돌입시켜 야당 의원을 끌어내 5시간 동안 지하실에 감금하고 국가보안법을 개악 통과시킨 치욕스런 ‘보안법 파동’이 터졌다. 야당 의원들은 개처럼 끌려 나와 방망이 든 이들에게 무참히 얻어맞았다. ‘사상계’는 1959년 2월호를 내면서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의 ‘백지 권두언’을 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승만의 독재는 결국 4. 19 혁명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당시 시위대들은 종로 한청빌딩의‘사상계’깃발을 보며 환호했다고 하니 ‘사상계’가 당시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을지 짐작이 간다. 4.19 이후 장준하와 동인들은 사회의 혼란으로부터 새로 들어설 질서에 공헌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제연구소’를 두고 다양한 분야의 주요 인사 30여 명을 연구원으로 위촉해 활동했다. 여기서 가장 활발히 논의된 명제가 국토 건설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장면 정권 출범 후 장준하는 반관반민단체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았다. 장준하는 대학 졸업자 2천 명을 ‘국토 건설 요원’으로 공개 채용해 일정 기간 훈련을 한 뒤 전국의 농어촌에 배치, 본부에서 또 그들의 보고를 받아 사업 계획에 반영하는 야심찬 장기적 국정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일을 막 추진하려던 1961년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장준하의 국토건설본부는 그대로 ‘군사혁명위원회’에 접수되었다. ▲ 장준하의 연설을 들으러 온 사람들.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군사정부는 국토건설사업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영 달랐던 모양이다.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추진했던 장준하는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가 요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자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자를 공개 시험으로 선발하여 그 위에 또 일정한 훈련을 가한 연후에 현장으로 보낸 데 반하여 그들은 깡패들을 모아 그 현장을 불량배의 강제 노동장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사명감을 가진 이 나라의 엘리트로 건설의 주역으로 삼으려한 데 반하여 그들은 깡패들을 모아 그 현장을 불량배의 강제 노동장으로 전락시켰다.’ 장준하는 훗날 자신의 국토 건설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비교하면서 농촌 부유화 정책을 먼저 실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시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 바른 순서이지, 5.16 세력이 한 것 같이 도시의 공업화를 서두름으로써 농촌을 망하게 한 후 농촌 운동을 벌이는 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유당 정권에서도 탄압을 당해온 장준하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장준하는 정권은 건재한데 ‘사상계’가 쓰러져 버린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독재나 그에 따르는 언론 탄압 방법도 세월과 함께 발달하는 것이어서 옛 식의 독재는 이미 골동품 독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의미인가.’ 라고 분석했다. 제일 먼저 언론부터 두드려 잡은 군사정권은 1962년 장준하를 부패언론인으로 몰았다. 집 문서까지 내주고 받은 빚을 문제 삼은 것이다. 장준하가 ‘부패 언론인’이라고 소문 나면서 ‘사상계’ 부수도 떨어진다.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던 ‘사상계’는 그해 7월 권두언으로 ‘군정의 영원한 종말을 위하여’ 특집을 냈다. 눈엣가시 같은 ‘사상계’에 대한 군사정부의 대응은 기상천외하고도 졸렬한 ‘반품 작전’. 지방의 서적상들에게 계속 주문을 하게 해 책을 도매상 창고에 쌓아놓고 풀지 않았다가 다음 호가 나오면 반품하는 작전이었다. 이 조용한 탄압은 무려 3년이나 계속돼 장준하는 이를 두고 ‘무원의 고군(孤軍)이 대적을 상대로 피투성이 혈전’을 했다고 표현했다. 정권의 졸렬한 ‘반품 작전’...그리고 막사이사이상 수상 하지만 뜻밖의 원군도 있었다. 1962년 8월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장준하에게 막사이사이상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주었다.”고 이야기했고 이 수상으로 장준하는 ‘부패언론인’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 백만인 서명 운동으로 끌려가서 15년 형을 선고받는 장준하. 왼쪽은 백기완.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막사이사이상을 타러 가기 직전 박정희와의 면담이 주선되었다. ‘사상계’동인들도 넌지시 권유했지만 장준하는 “상 타러 간다고 그 사람을 찾아 갔다 하면 후세에 누가 나를 장준하로 보겠는가.”라며 거절했다. 박정희가 민정 이양 약속을 번복하자 ‘사상계’는 이를 통렬히 비난했는데 정권의 압력이 더 심해져 기어이 도산 위기에 몰렸다. 반품 작전은 더 심해졌고 장준하는 돌아온 책이 혹시라도 길거리에서 헐값으로 팔리며 그 품위를 잊을까 우려해 아예 표지를 뜯어 파지업자에게 보냈다. 결국 정권 차원의 졸렬한 ‘반품작전’은 주한 미 대사의 개입으로 3년 만에 끝이 났지만 그 사이 ‘사상계’는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독재 정권의 탄압이 무서워 섣불리 나서 도와주는 이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준하가 심혈을 기울였던 국토건설본부가 군사정부에서 국토건설청이 되고 장준하의 ‘경제 개발안’이 5.16 이후 발족한 경제 기획원의 중심과제가 된다. 그리고 장준하가 ‘사상계’로 끌어들였던 많은 인재들이 군사정부에 발탁된다. ‘사상계’가 어려워지면서 장준하는 뜻하지 않게 시국 강연자가 된다. 사람들은 장준하의 예리한 시각과 거리낌 없는 연설에 열광했다. 1964년과 65년, 장준하는 한. 일 굴욕 외교 반대에 발 벗고 나서 70여 차례의 대중 연설을 하게 된다. ‘사상계’도 마치 한·일 국교 관계의 연구원인 것처럼 한·일 외교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함석헌은 ‘매국 외교를 반대한다’ 는 제목으로 ‘툭하면 한·일 회담을 조속히 해야 한다고 서두는 너, 제 2의 이완용을 자처하면서 하겠다는 너, 말마다 방정맞게 국운을 걸고라도 하겠다는 너는 정말 이 나라의 정부냐? 왜의 정부냐?’고 강하게 비난했다. ‘사상계’에서는 한·일 회담을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싣고 장준하는 부산에서부터 서울로 올라오며 군중집회 연설을 한다. 1964년 3월 22일 장충단 공원에서는 70만 명이 모인 가운데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연설을 한다. 뒤이어 3. 24 데모가 일어나고 6월 3일엔 서울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두 달 동안 숨어 지내던 장준하는 계엄령이 해제되자 다시 순회 강연에 나선다. 그 다음해 군사 정권은 ‘사상계’에 대한 두 번째 세무 사찰을 실시한다. 그러나 사찰을 해보니 오히려 장준하가 환불 받아야 할 지경. 그런데도 정권은 기어이 열흘 뒤 재사찰을 하더니 ‘사상계’가 세금 백 수십만원을 포탈했다는 판정을 내렸다. ‘사상계’의 재정 상태는 엉망이 되어 갔다.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 규탄대회에서 장준하는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란 사람입니다.”라며 직격탄을 쏘았다.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란 사람이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해 결국 옥살이를 했다. 출옥후 장준하는 박정희와 맞설 야권 후보 단일화에 몰두한다. 당시 대통령 예비 후보 인사는 윤보선, 백낙준, 이범석, 허정, 유진오. 모두 출마하겠다고 해 장준하가 나선 것이다. ‘사상계’ 사무실은 다시 ‘후보 단일화 추진 사무실’이 되어 버렸다. 단일화가 하도 진행이 안되자 제일 먼저 후보를 양보한 백낙준이 장준하를 후보로 하자고 말해 이때부터 장준하의 별칭이 ‘재야 대통령’이 된다. 결국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로 했고 장준하는 유세 최일선에 나선다. 이때 장준하는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권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라며 강하게 공격한다. 이 발언으로 장준하는 또 투옥되고 연설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신민당의 동대문 을구 후보로 옥중 출마를 하게 된다. 당시 적수는 민주공화당 강상욱 후보. 서울시 당위원장으로 쟁쟁한 사람이었다. 이런 장준하의 유세에 연사로 등장한 사람이 함석헌. 함석헌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라고 호소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유신 이후 첫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선언 함석헌은 진솔하고도 호소력 짙은 연설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고 사람들의 석방 여론이 높아지자 급기야 공화당 후보가 장준하의 석방을 독촉할 지경이었다. 장준하와 함석헌은 함께 다니며 연설을 했고 장준하는 큰 표 차로 강상욱을 따돌리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장준하는 국회의원이 되어 좀 여유로워졌을까. 아니다. 그간 ‘사상계’를 유지하게 위해 얻어 쓴 빚의 채권자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장준하의 국회의원 세비가 가압류되어 국회의원 4년 동안 세비 한 푼 수령할 수 없었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박정희도 영구 집권 수순을 밟아나갔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시도한다. 언론과 야당은 연일 반대 입장을 쏟아냈다. ▲ 1975년 10월 49제를 맞이하여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소장의원 박영록과 함께 재야 세력 주축의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만들어 전단 50만 장을 서울 시내에 살포하고 학생들과 함께 3선 개헌 반대운동을 별였다. 조그만 불의도 참지 못하는 장준하는 정당 체질이 아니었다. 등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부가 야당에 보낸 비자금 중 자기 몫이 전해지자 놀란 장준하는 봉투를 들고 당수 유진오를 찾아가 돌려주면서 “이런 돈을 받아 나누어 주는 일이나 하시려고 총재가 되셨습니까?”라며 쏘아붙였다. 결국 신민당을 나와 무소속으로 변신했다가 민주통일당에 참여, 최고위원이 되지만 이도 맞지 않아 ‘민주 회복을 위한 일에는 정당 소속이 불가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와 재야 민주 세력과 연대한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겸직 금지 조항 탓에 ‘사상계’는 발행인을 부완혁으로 바꾸고 야당 의원 김세영의 도움으로 겨우 발간해 나갔다. 그러다 1970년 5월 김지하의 ‘오적’을 실어 세상을 뒤흔든 뒤 강제 폐간되었다. 함석헌은 이보다 조금 앞선 4월 그의 집에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다. 장준하는 편집위원이 되어 함께 하지만 이마저 유신 체제가 강화되면서 1973년 폐간된다.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장준하는 1973년12월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개헌 청원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을 선언했다.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유신 반대 개헌 청원운동이었고 감시와 탄압의 위협 속에서도 시민들은 참여했다. 그러자 5일 후 박정희는 ‘유신 체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그 다음해 1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고 장준하는 백기완과 함께 구속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1974년 12월 장준하는 건강 악화로 인한 형 집행 조치로 풀려나 두 달간 입원했다. 좀 쉴 법도 한데 그런 법을 모르는 듯 병상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 발표했다. ‘파괴된 민주 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 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 헌법으로 하여, 이 헌법에 의해 자신의 거취를 지혜롭고 명예롭게 스스로 택함은 물론, 앞으로 모든 집권자들의 규범으로 삼게 할 것.’ 등의 내용이었고 박정희는 이를 묵살했다. 1975년 2월 퇴원한 장준하는 몸이 채 낫기도 전에 민주 회복 세력의 힘을 묶는데 나선다. 각계 재야지도자들과 연통, 극비리에 ‘민주 헌장’을 선포하며 민주화 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는데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이 양심 선언 후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학생 시위가 확산된다. 1975년 4월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긴급조치 7호에서 9호까지 잇따라 발동시킨다. ‘사회안전법’이라는 악법까지 통과시킨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냥 두고서는 대통령을 못해 먹겠단다.’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즈음. 그리고 운명의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보라” 말하는 듯 마치 순교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내던져 광복된 조국을 보고자 했고 그렇게 광복된 조국에서는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또 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글과 말과 행동으로 싸워왔던 이 민족지도자의 죽음을 사람들은 숨죽여 애도했다. 그리고 37년…. 37년이 지나도록 장준하 죽음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이 시대, 박정희는 아직도 서슬 퍼렇게 어디엔가 살아있는 것일까. 최근 묘지의 담장이 무너지는 우연한 사고로 유골로 다시 나타난 모습을 보면서 숙연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은 그 모습이 그대로 ‘내가 독재와 맞서다 어떻게 죽어갔는지 두 눈 똑똑히 보라’고 그리고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왜 나라가 아직 이 모양이냐’고 한심해 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다. “일제하에서도 내가 왜군과 싸우다 죽지 못한 광복군 출신인데, 어디 광복된 조국에서 왜놈 군관 출신 독재자 놈의 전기고문 맛을 좀 보자.”는 장준하의 일갈은 일제의 과거 청산을 제대로 못한 탓에 생긴 모든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 단면이면서 아직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글 김진경 http://www.georeport.net/news/articleView.html?idxno=13889 |
출처: 사람이 희망이다 원문보기 글쓴이: ...
첫댓글 아 좋은 기사입니다.
우와, 말이 안나옵니다. 부끄럽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