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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새로운 幻影[환영]
흡사 닭 쫓던 강아지 모양이었다. 은주와 박인해가 사라진 쪽으로 영훈은 털썩털썩 걸어갔다. 옛날 백연숙을 놓쳐 버렸을 때와 꼭 같은 허무감 속에서 영훈의 서글프고도 괴로운 영혼의 방랑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오후의 태양이 눈부시게 거리에 범람하고 있었다. 거리도 가로수도 사람도 자동차도 모두가 다 그 눈부신 가을 햇빛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영훈의 시각에는 은주의 환영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낡은 환영과 새로운 환영이 영훈의 머리속에서 그 위치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연숙에의 환영이 살아 있을 무렵에는 은주에의 환영이 색채를 띠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주에의 환영이 발랄하게 살아 온 현재에 있어서 연숙에의 환영은 차차 퇴색하여 갔다.
이것은 실로 영훈 자신은 예기치도 못했던 정신생활의 변모를 의미하고 있었다.
『나라는 인간이 불량한 탓일가?……』
영훈은 그렇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연숙에의 환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켜 불량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고영훈의 성실성을 가지고 이러한 환영의 고체가 야기되었다는 것을 영훈 자신 슬퍼할 도리 밖에 없었다.
연숙과의 관계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십년 동안에 걸친 환영을 그대로 고히고히 기르므로써 은주에 대한 새로운 환영의 싹을 문질러 버리는 것이 도의적이고 또한 사건을 처리하는데 순서적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은주에 대한 환영은 차츰 더 강렬해져 가는 것이었다.
광교 다릿목에 있는 판자집으로 들어가서 영훈은 꼬치 안주와 함께 벌컥벌컥 대포 술을 연거퍼 들이켰다. 몸의 심지가 빠져 나가 자즈러들 것만 같던 기력이 차차 밑힘을 얻으면서 기분이 조금 너그러워 졌다.
박인해와 달려 간 은주의 모습이 아까처럼 신경을 갈구라지게 긁어 쥐지는 차츰 않아 왔다.
그러한 갈구라진 신경을 은주도 가졌을 것이라고, 자기 몸을 한번 뒤채어 봄으로서 지나간 날의 은주의 불행했을 감정을 저울질하여 보는 마음의 여유가 점점 생겨 왔다.
『술이란 이래서 좋다.』
술기운을 빌어 은주에의 환영을 영훈은 한사코 축소시키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연숙을 열심히 생각하자!』
은주를 재빨리 잊어버릴 수 있는 길만이 자기의 이 불행한 감정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훈의 의욕일 뿐, 감정은 아니었다.
『은주가 그처럼 재빨리 몸을 뒤챌 줄은 정말 몰랐다.』
판자집을 나서서 을지로 쪽으로 휘청휘청 걸어가면서 영훈은 중얼거려 보았다.
『그처럼 재빨리 몸을 뒤챌 수 있는 한은주야 말로 가장 현대적인 여성의 한 타잎 일는지 모른다.』
자기가 연숙에의 환영을 안고 있던 것처럼 은주도 박인해의 환영을 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가?……둘이가 다 딴 환영을 지닌 채 이루워졌던 결합 같이만 생각키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은 자기의 한낱 망상일 것이라고, 영훈에 대한 은주의 애정에 허위가 섞여 있었던 것 같지는 또한 않았기에 은주는 다만 자기의 불행한 감정을 한시바삐 처리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은주를 대할 면목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인제 새삼스럽게도 은주의 무릎 앞에 머리를 숙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댔자 모난 은주의 성격으로서 용서할 감정도 나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또한 영훈 자신의 욕망의 제시로서 상대편의 관용을 빌려는 뻔뻔스런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자기의 과오를 절실히 느끼고 깨끗한 유리그릇에서 이미 엎지러진 물일진대 그 물이 시궁창으로 흘러 들어가건 뒷간으로 흘러 들어가건 흘러 가는대로 흘러 갈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백연숙과의 금후의 관계가 아무리 불행한 결과를 맺을지언정……』
자기의 행동으로서 취해진 결과일진대 그 곳에 안주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결국은 연숙의 환영을 십년 동안 안고 살아 온 것처럼 한은주의 환영을 일생 동안 안고 살아 나갈 수밖에 나에게는 없다.』
백연숙의 과오를 영훈은 결국에 있어서 용서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영훈 자신의 과오를 은주에게 용서받을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했다. 남을 관용하는 수는 가끔 있어도 남에게 관용을 받을 생각은 도시 못하는 영훈이었다.
고영훈의 삶의 방도가 그만큼 옹졸하다면 옹졸했지만 자기 손으로 이루워진 비극은 자기 자신이 감수할 줄 밖에 영훈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아, 한은주는 정말로 가버린 것일가?』
은주가 자꾸만 그리워졌다. 애정의 주류(主流)가 단 하루 동안에 이처럼 급변할 줄은 꿈에도 영훈은 몰랐다.
을지로 네거리까지 영훈은 왔다.
『어디로 갈가?……』
영훈은 걸음을 멈추고 어지러운 네길어름에서 두리번거렸다.
『갈 데가 없다. 한 곳도 없다.』
영훈의 마음은 완전히 주인을 잃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영훈의 마음속에는 연숙과 은주의 두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여성이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홀랑 날아 가 버리고만 것이다.
연숙은 인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숙을 만난다는 것은 엎지러진 물이 마치 시궁창으로 흘러 들어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자꾸만 주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십자로 한 모통이에 멍하니 서서 갈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는데
『고선생님!』
맞은 편 「신여신」사 이층에서 소리가 났다. 머리를 후딱 들었더니 들창 밖으로 깍아중이 머리를 내밀고 사동이 열심히 손을 내졌고 있었다.
『어이.』
영훈도 손을 들어 보였다.
『사장이 부르셔요! 빨리 올라오세요!』
그러는데 사동의 등 뒤로 백연숙의 얼굴이 나타났다. 말은 없이 연숙은 사동의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연숙의 그 은근한 인사가 영훈의 허둥거리던 마음 한 구석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네거리를 건너 영훈은 다소 취기 있는 걸음으로 층층대를 올라가면서 후딱 연숙의 육체를 생각하였다. 십년 동안에 걸친 아름다웠던 환영은 이미 완전히 사멸(死滅)해 버리고 있었다.
환영보다도 먼저 육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고, 영훈은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면서 격렬히 돌이돌이를 했다.
문을 열고 편집실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연숙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사장님의 심부름으로 고선생님 댁에 갔었더랬어요.』
들어서기가 바쁘게 소년은 보고를 해 왔다.
『그래?』
『바쁜 일이 계시다고 사장님이……어서 들어가 보셔요.』
영훈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사무탁자 앞에 앉아 있던 연숙이가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까보다도 좀 더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영훈은 얼굴이 확근 달아 왔다. 그러나 고개를 든 연숙의 얼굴은 태연하였다.
『편히 쉬시는데 모시러 보내서 죄송합니다.』
익살맞은 동글동글한 목소리를 연숙은 냈다. 표정하나 까딱없다.
닳아 올라오는 얼굴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영훈은 천천히 연숙의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영훈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왜 다방에는 나오시지 않았어요?』
까딱없던 표정을 그제서야 풀면서 연숙은 반만큼 웃었다.
『………………』
대답은 없이 영훈은 연숙의 꽃피는 얼굴을 정면으로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잊었어요?』
『아니오.』
영훈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럼……?』
『………………』
『그럼 왜 안 나오셨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제 물음은 왜 안 나오셨냐는 말이예요.』
『공연히 나오기가 싫었습니다.』
솔직한 대답을 영훈은 했다.
순간, 연숙의 반만큼 웃고 있던 표정이 후딱 굳어지며, 그리고 가만히 얼마 동안 석고상처럼 서 있다가
『알아 들을 것 같애요.』
했다.
『무슨 뜻인가요?』
『서로가 너무 솔직한 말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설명은 그만 두겠어요.』
무슨 뜻인지, 영훈도 알아 들을 것 같아서 잠자코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 한 꼬치……』
연숙은 손을 뻗쳐 영훈의 담배 갑에서 캬멜을 한 꼬치 빼 물며 영훈의 코앞으로 바싹 닥아 섰다.
라이타를 켜 대려는 영훈의 손을 막고 영훈이가 문 담배 불에 자기 것을 갖다 대며
『빨아요, 힘껏!』
연숙도 담배를 빨아 불을 옮기며 영훈의 두 눈동자를 말끄럼이 쏘아 보고 있었다.
『빨리 붙여요.』
담배를 문 연숙의 빨간 입술이 너무도 눈앞에 가깝다. 아름답던 환영은 이미 없고 연숙의 입술에 먼저 관능이 왔다. 건들여도 아끼지 않을 입술이기에 일부러 그런 포오즈를 취하는지도 몰랐다.
『왜 자꾸만 투정이야?』
담배를 빼 들기가 바쁘게 빨간 입술에서 영훈의 얼굴을 향하여 홱 연기를 뿜어 왔다.
『담배는 또 언제부터 피웠소?』
『지금 이 순간부터……』
『왜?……』
『지나치게 솔직한 표정에는 연기라도 뿜어 줘야 개원해서……』
『………………』
영훈은 또 대답을 잃었다.
『말을 안 해도 다 알아』
『뭘 알아요?』
『환영이 깨진 게지.』
『………………』
『십 년간의 아름답던 환영이 하루 밤 사이에 조각조각이야?』
『………………』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연숙이가 차츰차츰 무서워졌다.
『그렇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응?……』
영훈은 몰랐다.
『놀랄 것이 뭐가 있어요? 피장파장인 걸!』
영훈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기 시작하였다.
『그럼 연숙은 역시 장난으로……?』
『천만의 말씀이예요.』
『그럼……?』
『장난은 분명 아니지만……결과에 있어서 환영이 깨어진 것만은 나 역시 사실이야. 영훈 씨의 환영이 아름답던 것처럼 내 환영도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그 사지판인 삼팔선을 넘어 온 연숙이었으니까요.』
『잘 됐소!』
영훈은 퉁명스런 대답을 뱉았다.
『잘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지요. 사람이란 누구든지 다 자기의 아름다운 환영을 실현 시켜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 뿐이니까요. 노력의 결과가 어떠 하리라는 것은 해 봐야만 아는 일이구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요부다!』
『노오!』
연숙은 격렬하게 부정을 하며
『나는 다만 나의 아름다운 이상을 실현시켜 봤을 따름이예요. 내 행동에 단 한 가지도 거짓은 없었으니까요. 장난이라든가 누구를 일부러 유혹한다든가, 그런 허위의 감정은 추호도 없었어요. 모두가 다 다급하리만큼 진실한 감정 문제였으니까요.』
『옛날의 백연숙이와 똑 같다.』
영훈은 그 어떤 의분을 느끼면서 배앝듯이 말했다.
『인간의 성격이라든가 취미라든가 좀처럼 변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 순간에 와서야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아요.』
『당신은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다』
『아냐요. 비극의 제조가(製造家)일는지 몰라요.』
『불행한 성격이다.』
『그렇지만 별반 불행을 느끼지도 않는 성격이기도 한가 봐요.』
『연숙씨!』
영훈은 그 때, 다소 엄숙한 어조로 존칭을 써서 불렀다.
『네?』
연숙은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버리면서 미소 띤 얼굴을 가만히 돌렸다.
『이 순간에 있어서의 연숙 씨의 명확한 마음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마음고생을 했을는지도 모르니까요.』
『과히 뇌심하지 마세요. 영훈 씨에게 대해서 취해진 내 행동이 어디까지나 순수했다는 건만 알아주면 정말 나는 행복해요.』
『연숙 씨의 또 하나의 색다른 행복을 빌며 연숙 씨 옆에서 나는 영원히 떠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지 않아요? 왜 내 옆에서 떠나야만 한다는 말이예요? 예기했던 환영이 다소는 깨졌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영훈 씨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예요.』
『……?』
영훈은 다시 한 번 놀람을 금지 못했다.
『너무 심각히 놀랄 필요는 없어요. 영훈 씨 역시 한은주만 없다면 나에 대한 환영이 다소 깨어졌다고 하더라도 백연숙의 존재를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못할만한 가치는 있으리라고 믿으니까 하는 말이예요.』
백연숙이라는 한 여성이 이처럼 자기 자신에 철저하고 또한 상대방의 심정을 이렇게도 이해하여 줄 수 있는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영훈은 오늘에 와서야 분명히 깨달은 것 같았다. 십년 전의 백연숙의 어림보다 십년이라는 세월의 애정의 경험을 쌓은 오늘의 연숙의 성장이 인간적인 깊이를 가지고 영훈의 관념적인 상식을 문지러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영훈의 연륜(年輪)에서 오는 어림과 남녀 관계에 대한 무경험은 백연숙의 경지를 이해는 하여도 도저히 몸소 보조를 맞추어 나갈만한 확고한 인생관의 형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훈 씨가 내 옆에서 떠나야만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요. 그렇지만 구태여 그래야만 되겠다면 그것 역시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지금 영훈 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영훈 씨가 제 입술에 다소간의 유혹을 받을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나도 그런 것을 영훈 씨에게서 요망한다는 말이예요. 담배를 버려요.』
백연숙에 대한 새로운 환영 하나를 그 순간, 영훈은 불현듯 발견하였다.
그냥 물고 있는 담배를 손을 뻗쳐 연숙은 빼앗아 가지고 휙 재떨이에 던졌다.
『나는 이 순간, 영훈 씨의 포옹을 원하고 있어요.』
영훈은 한 걸음 닥아서며 아무런 저항 없이 연숙의 상반신을 품 안에 넣었다.
『힘껏!』
『………………』
『입술!』
『………………』
둘이는 그러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