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3
12월25일[주님 성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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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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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EDc0GyN6jM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강수근 바오로마리아(국약성가연구소 소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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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이토록 외진 시골에서, 저희끼리만 지내면, 세상 울적한 분위기일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가족 같은 동네 주민들, 먼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피정객들과 함께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 그 사이로 분명히 탄생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이런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이 대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엄숙한 순간이어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유능한 의료진이나, 그도 아니라면 탈 없는 출산에 도움을 줄 분들의 보살핌 아래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 여건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출산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 성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소와 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극일 호의적이지 않은 출산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너무나 독특하고 이해되지 않는 육화강생의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제가 자주 타고 다니는 모닝 승용차가 27만 킬로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는데, 꼭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도 생활 40년째로 폐차장 가기 직전 중고차인데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아직 잘 달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프고, 고장 나고, 매일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네 삶 한가운데도 탄생하시고 길이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연세 들었다고 우울해 할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큰 고통 속에 계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에 허덕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 없어 답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의 힘겨운 일상 그 한 가운데 매일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쓰라린 상처 그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면 즉시 탄생하신 구세주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탄생하신 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란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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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kYrH2IeQ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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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낮 미사)
<자기처럼 될 것을 믿지 않으면 구하러 내려가지 않는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올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둠에 속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이들이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높여줄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루마니아의 14세 소년 크리스티안 마리안 베키아노(Christian Marian Vecchiano)의 이 이야기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를 보여줍니다.
아주 좁은 우물 파이프에 세 살 아기가 버려진 우물에 빠졌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였지만, 아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물 입구가 30cm로 어른은 들어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기는 줄을 붙잡고 올라올 수도 없었습니다. 깊이가 15m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이프를 깨면 아기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굴착기로 11시간 동안 팠지만, 15m 깊이까지 주위를 파며 내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모여있는 이곳을 구경하러 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다리를 묶고 거꾸로 내려가 아기를 잡고 올라오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어른들은 말렸지만,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 어둡고 좁은 통로로 내려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옵니다. 부모는 기뻤고 크리스티안도 행복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영웅이자 루마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현재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은 이 일로 국가의 보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의 어둠으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면 분명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면, 인간도 당신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그런데 누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아들일까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큼 자신도
올라갈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고 하늘에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에만 갇혀있어야 하는 존재라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위해 이 어둠 속까지 내려와야 하셨을까요? 가톨릭 교리서(460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니, 이는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또 난간에 걸린 아기를 목숨을 걸고 구한 영웅들도 많습니다. 이수연 씨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남의 나라 땅에서 선로에 쓰러진 취객을 도우려다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믿었던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도 살 수 있고,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구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곳에 살 자격을 얻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에 한 불법 체류자가 5층 높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 아기를 구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를 프랑스에 살 자격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 시민으로 삼고 직장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낳을 수 있어야 살 자격도 얻습니다.
6살 워커라는 아이는 4살 자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얼굴에 90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셰퍼드와 싸웠습니다. 이는 자신도 회복될 수 있고 여동생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될 자격을 스스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동의하여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착한 뜻’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무엇보다 엄마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도 창조자 하느님 구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착한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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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달라스 성당에 와서 첫 번째 맞이하는 성탄입니다. 오늘 ‘예수 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예: 예수님 사랑이 가득한 밤,/ 수: 수줍게 웃는 얼굴들 가득하네./ 성: 성탄의 종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탄: 탄생의 기쁨이 온 세상을 채우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겨울, 유럽의 참호 전선은 추위와 공포로 가득했습니다. 병사들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12월 24일 밤, 서부전선의 한 구역에서 독일 병사들이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들은 영국 병사들이 화답하듯 자신의 언어로 같은 노래를 부르며, 참호 사이에 따뜻한 연대의 기운이 피어올랐습니다. 다음 날, 양측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참호에서 나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담배, 초콜릿, 심지어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축구 경기를 하며 잠시나마 전쟁을 잊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총성이 멈추고, 적대감 대신 형제애가 넘쳤습니다.
오늘만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선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평화도 도시 예루살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대한민국의 정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온 인류를 위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참된 빛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분은 위엄 있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로 인해 어두웠던 세상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 빛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받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빛은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혼란스럽더라도,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 굶주린 이들을 배를 불리시는 곳으로,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일깨우시는 곳으로 오십니다. 흠이 있고, 주름이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진정한 이유입니다. 화려한 궁전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그 기쁨을 찬미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짜별을 본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진실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던 동방박사들, 오늘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탄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라면 우리 모두도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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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낮 미사)
복음: 요한 1,1-18: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려 하심이다.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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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으로 당신 자리로 삼으신 곳은 ‘구유’였습니다. 구유는 ‘여물통’입니다. 더럽고 냄새납니다. 볼품없고 너무나 하찮은 곳입니다. 결코 메시아가 누울 자리가 아니지만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가장 거룩한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구유 안에 담겨 있는 이 신비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구유’와 같은 장소가 있습니다. 죄로 더러워지고 얼룩져 보여 주기 싫은 곳, 바로 그곳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거처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더럽던 그곳이 가장 거룩한 곳,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빛이 되어 주셨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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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성탄 대축일 낮미사)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1)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거나 이단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복음서 저자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책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18절에서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말은 ‘하느님이신 그분’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8-9)
2)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냥 하느님을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 구원에 직결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옛날의 위대한 예언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그런데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바로 지금 이곳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신 날이고, 우리가 성탄절을 경축하는 것은 그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3)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17)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되지 않으셔도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오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내려가 주는 것.”이고, 또 “사랑이란, 같아지는 것”입니다.>
4) 만일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내려오신 것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그냥 허무하게 끝나버린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신 다음에는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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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산교구 손삼석 요셉 주교님]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를...>
2021년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유럽연합 사무국이 종교 차별의 이유로 “크리스마스” 대신 “공휴일”(holiday)이라는 단어를 쓸 것을 권장한 데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강하게 질타하셨지요. 그 이후 이 권장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고, 며칠 만에 철회되는 소동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참 의미는 잊고 단순한 축제로만 여기는 듯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탄을 2천년 전 이스라엘 한 지방,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성탄이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목자들 역시 성탄이 오면 강론 준비 등 여러 일에 마음을 쏟다 보니 성탄의 참다운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교우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라지만 예년 같은 설렘과 기대는 없었다. 그렇게 대림절 4주가 지나고 드디어 성탄 대축일을 맞았다. 조심스레 성탄 밤 미사엘 가고, 오늘 성탄 낮 미사에 참례했다.” 어느 교우가 쓴 글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인 듯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예수님의 성탄을 한평생 자신의 화두로 삼고 사셨던 분입니다. “아무리 성탄이 수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강조하셨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내 안에 잉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자렛 마리아가 그리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유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항상 낮은 곳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본능과 이기적 삶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불우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 안에 예수님은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잡하고, 소음이 가득 차고, 온갖 세상의 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탄생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낮은 자리에서 기도해보십시오. 그분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시 “성탄을 일흔 번도 넘어”를 일부 인용합니다.
“성탄을 일흔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권능의 천주만을 모시고 있어
저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신
그 무한한 당신의 사랑 앞에
양을 치던 목동들처럼
순수한 환희로 조배할 줄 모르옵네.”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어 가장 미천하게 오신 그 크신 사랑에 고개 숙여 경배드립시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도록 편안한 자리를 마련합시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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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성탄을 축하드리며, 교구민 한 분 한 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탄생하시듯, 충만한 은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아주 긴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 후손인 다윗에게 구원자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주시고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긴 시간을 기다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의 기적적인 탈출과 황량한 광야에서 40년 힘든 여정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식을 베풀어주시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뼛속 깊이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주변의 나라가 부러워할 만한 문화를 이루어주시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등을 돌리고 타락한 역사에 빠져 유배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 고통의 시간에, 지난 긴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돌아보고 깊이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몸속 깊이 새겨져 있던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시절에도, 부유함을 누리며 하느님의 뜻을 잊고 살던 때에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서 눈을 돌린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유배의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 반성하면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해주신 약속 곧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다윗 가문에서 영원한 왕권을 세워주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태어날 한 아기에게 왕권이 주어지고 그 이름이 용맹한 하느님이요 평화의 군왕으로 불릴것이라며,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라고 예고합니다.(이사 9,5-6)
그런데 그 아기는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이를 낳는데,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아기는 말구유에서 태어납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리에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낮추어 오신 주님은 그 태어나신 자리도 이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다 보면,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이 땅에는 그분의 탄생을 겸손되이 받아들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비천한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말에 더할수 없이 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는 데에서, 마리아가 평소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 탄생에 관해 목동들이 전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루카 2,19.49-51)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처럼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한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리아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보내 주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착한 사람이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인간의 선한 생각도 하느님의 뜻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기꺼이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통해 하실 일에 자신의 삶을 봉헌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는 도구로, 요셉은 이 일에 꼭 필요한 협력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는 우리는 구원의 역사에서 마리아로 혹은 요셉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요셉과 같이 협력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님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사십니다. 그분에게 시선을 주십시오. 고해성사 안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에게 가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그분에게 달려가십시오. 가난한 이웃 형제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그분의 손이 되어주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안에 주님께서 태어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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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권력자의 호적조사령으로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전쟁이 터지고 징집이 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돕니다. 우크라이나, 미얀마 등이 그렇고 여기저기 폭압자의 어둡고 음습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무기 공급이나 승전 소식이 희망이 아닙니다. 한 아기의 탄생, 그렇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아기의 탄생 역시 위대하고 근본적인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숨통을 열고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릴 모든 작은 생명에게 축복이 있길 빕니다.
1.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방법
인간이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먼저 하느님이 인간을 믿었습니다. 갓난아기가 되어 인간의 손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경천동지의 사건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목마른 신체조건을 가지고 시공간에 제약받는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겸손되이 일상을 익히시고, 세상에 나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급기야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마지막엔 빵이 되어 먹히는 존재가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발로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얼마 전, 아이에게 성탄카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탄에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는 매년 성탄이 되면 아기 예수님이 한 명씩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년 성탄을 맞이하지만, 오늘 태어나신 그분, 정작 내 삶 속에 그분의 자리가 없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사랑의 응답이 아닐 것입니다.
2. 구유 안에 담겨있는 신비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마구간’의 가축들이 자신들의 거처를 내어 주었나 봅니다. ‘구유’ 안에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세주 탄생을 알아보는 표시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이도 예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워 있는 아기’가 아니라 ‘눕혀있는 아기’입니다. 운신할 수 없는 아기, 벌써 두 팔 벌려 백성을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조만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아기를 중심으로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의 송아지 가족, 요셉 마리아 그리고 목동들을 상상해 봅니다. 아기는 구유(먹이통)에 눕혀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빵이 되시고 가축들의 먹이로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미일까요? 구유 안에 모든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항)
이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계십니다. 목동들이 밀고 들어간 문은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대표이면서 인류의 대표입니다. 그들이 엎드려 경배드린 것은 가난한 이를 하늘로 들어 올린 행위였습니다.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지이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눕혀진 채 온몸으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4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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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1.9-11)
희망이신 빛이 왔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왔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심에 빛이 왔습니다.
가장 힘겨운 삶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비추어 밝게 만드는 빛이 왔습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우리의 생각에 빛이 왔습니다. 날카로운 이성의 빛이 시노달리타스를 위한 올바른 식별의 영이 되어 왔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과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지혜의 빛이 왔습니다. 불공정함을 들추어내는 빛이 왔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어두운 감정에 빛이 왔습니다. 억압된 분노로 우울하고 냉혹하고 쓰라린 영혼의 방에 빛이 왔습니다.
상처입고 빗장을 걸어둔 마음의 문을 열어줄 빛이 왔습니다. 아픈 우리의 감정을 모르고 건드린 사람들을 용서로 인도하는 빛이 왔습니다.
힘들고 어두운 관계에 빛이 왔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자연 생태적 관계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심고 진리를 향해 나가도록 비추는 빛이 왔습니다.
정치적 당리당략이나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약육강식의 제도 및 인종적 차별, 그리고 자연환경 파괴 등 모든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는 빛이 왔습니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우리에게 빛이 왔습니다. 쉴 줄 모르고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몸을 혹사시키거나,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내면의 아름다움을 빼앗긴 공허한 마음에 빛이 왔습니다. 사람과 이 세상 모든 어두움에 빛이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 빛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기쁜 성탄이 됩니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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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지저분하고 차갑기만 한 이 세상에>
+찬미예수님
영상으로 많은 분들이 보셨듯, 저희 성당은 어제 밤 사제단과 봉사자들과 함께 아주 조촐하게 미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미사가 예년처럼 기쁘거나 즐거웠던 것은 아님이 사실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어떻게든 성탄의 의미와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바삐 지내느라 애써 지나쳐 왔는데, 미사가 시작되고 나니 어찌나 허전하던지요.
고사리 같은 손을 모은 복사단 아이들과 함께 행렬을 하고 선물도 직접 전달하며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데 텅빈 성당과 제대가 한 없이 쓸쓸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성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크리스마스 때에 듣는 음악 중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때.
홀로 양친은 깨어있고 평화 주시려 오신 아기.
평안히 자고 있네, 평안히 자고 있네.
세상이 모두가 잠들어 있을 무렵,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이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여린 존재입니다. 몸이 불편한 것을 인지하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슬픔과 아픔을 느끼지만 사람들에게 정확히 의사를 표현할 길도 없습니다. 간단한 의식주 조차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아이가 말구유에서 탄생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냥 아들도 아니고 하나뿐인 외아들이라면 조금 더 편안하고 깨끗한 곳에서 탄생할 수 있었을텐데 공교롭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말구유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구유는 따뜻한 조명이 자리한 깨끗하고 단정한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기의 이미지이지만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동물들이 있었고 그들이 저질러 놓은 온갖 배설물들과 동물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날씨는 또 어떻습니까? 한 겨울, 난방 시설도 없는 마굿간이란 분명 너무나도 추웠을 것이니 아이가 태어나기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로 그러한 곳에서 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연약한 어린 아이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보내온 성탄절은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의 환호소리와 축하인사, 깊은 경배와 예물 봉헌. 이천년 전 예수님이 탄생하던 순간 분명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올해(2020년) 성탄은 본의 아니게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재현된 듯합니다. 물론 동물들의 분뇨 냄새가 있지는 않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고 고요히 구유에 안치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환호도 축하인사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조용히 곱씹어 보면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보다 나은 환경이 아닌 오히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셨고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떤 부모도 원하지 않을 모습입니다. 누가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동물들의 똥오줌 냄새가 가득한 마굿간에서 낳고 싶겠습니까? 누가 친인척이 아무도 없는, 길바닥과 같은 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겠습니까?
제가 마리아와 요셉이라면 이럴거면 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냐고 하느님께 투정을 부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와 상관없이 이러한 환경에서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아기에게 매우 미안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이 부유한 집안의 큰 저택에서 태어났다면 어떠했을지요. 그랬다면 분명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닌, 그저 저 너머의 신으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초라한 마굿간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겉은 화려할지 몰라도 모든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초라한 상황을 겪게 됩니다.
물질적인 부족함, 내면적인 나약함, 질병과 죽음, 사고 앞에서의 무력함, 욕망과 죄 앞에서의 한계.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저 초라한 마굿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 작은아이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야기 하듯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 하느님에게서 나신 분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더 좋고 편한 곳을 마다하고 우리보다도 더 작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고 모든 짐승들이 고개를 조아려 경배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나약함과 인간적 한계와 어려움 속에 이 분은 눈부신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마굿간은 인간이 지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겪는 여러가지 고통과 한계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 참 빛이신 아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탄생의 목적은 우리에게 사랑의 가치를 알려주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구원사업을 펼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분명한 주님의 위로와 돌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성탄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아기 예수님과 같은 수많은 선물들, 즉 사랑하는 가족, 위로가 되어주는 이웃, 특별히 여러가지 안 좋은 일이 있었음에도 그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보호와 위로를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의 열정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저분하고 차가운 이 세상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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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희망이 없다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희망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일을 살아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야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암 투병 중에 계신 분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보았고, 오히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요? 끝까지 희망을 품었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만이 또 실제로 건강도 찾으셨습니다. 지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작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희망이라고 별것 아닌 것으로 무시한다면, 점차 절망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아빠가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저를 보며 ‘아빠’라고 했어요.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빠’라는 말이 대단한 것일까요? 세계 신기록에 등록될 정도로 유일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냥 ‘없다’라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희망의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순히 이 땅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힘없고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를 보게 되면 거부감이 없어집니다. 얼굴만 봐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기가 말을 하지 못해도, 아기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기와 함께 할 미래를 떠올리면서 더 큰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몸이지만, 그 자체로 커다란 희망이었습니다. 거부감 없이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라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 근본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고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희망의 시작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풍날, 여행 날, 합격발표날, 소중한 손님의 방문 날 등…. 날짜를 하루하루 기다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설레임에 더 기뻤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들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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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님께서 내게 오시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빛 생명 말씀>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빛께서
나에게
스미시며
빛
머금은 나
희망으로 벗들을
비추라 하시니
어둠이 짙을수록
물러섬 없이
사르네
생명께서
나에게
깃드시며
생명
품은 나
사랑으로 벗들을
살리라 하시니
광기어린 죽임에
두려움 없이
맞서네
말씀께서
나에게
울리시며
말씀
모신 나
믿음으로 벗들을
깨우라 하시니
포악스런 거짓에
움츠림 없이
외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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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밥그릇에 누우신 예수 아기>
루카 2.1-14 (예수님의 탄생,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밥그릇에 누우신 예수 아기>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사람이든 짐승이든
풀 한포기 아름드리나무도
하늘과 땅과
물과 공기는 물론
저 아득 멀리
해와 달과 별까지
살아 숨 쉬니
밥을 먹어야 할 텐데
여기
빈 밥그릇만
하나 덩그러니
밥은 어디 있을까
밥 찾는 이
차고 넘쳐도
밥 되는 이
찾기 어려워
그렁그렁 눈물 맺힌
주리고 서러운 눈길들
하나하나 가득 모인
밥 없는 밥그릇에
오늘 밤
예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새근새근 누우시네
어서 나를 드세요
그리고 다시 살아나세요
이제 나처럼 여기 누워요
기꺼이 다른 이 살려내게요
살며시 옅은 웃음으로
말씀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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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을 정성껏 준비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시길 빕니다. 아울러 변함없는 사랑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낳아드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성탄의 삶이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 3,16) 성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박대하였을까요?
결국, 우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차려져도 매일 그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서 성탄 축제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다솜이라는 학생은 선천적으로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솜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어떤 역할을 줄까? 고민했습니다. 마침내 동작도 대사도 아주 적은 배역을 찾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관 주인의 역할이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일행이 여관 문을 두드리면 “방이 없어요!” 하고 한마디 말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솜이도 또박또박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연극의 내용상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 주인과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애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라고 하면 “방이 없어요!” 라고 같은 말을 3번 반복하기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를 부축하며 요셉은 다급히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나왔습니다. 다솜이는 연습한 대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방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 않고 여관 주인에게 매달렸습니다.
“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을 줄 수 없나요?”
“방이 없어요!”
다솜이는 또박또박 맡은 배역을 잘해 나갔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면 대 성공입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사정합니다.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방을 좀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다솜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요, 제 방으로 오세요!”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대사는 아니었지만, 다솜이의 그 순수한 마음은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원의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구세주이심을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집을 내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를 문전박대했습니다. 세상에 방은 많았지만, 그분이 태어나실 방은 없었습니다. 그 방은 오늘도 여전히 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마구간을 선택하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안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분으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오늘도 방을 내어드리지 못한 어두움, 우리의 이 어둠을 벗겨 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의 어둠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추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볼 수 있는 눈,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곧 그분이 태어나실 안락한 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누군가의 밥이 되어줍시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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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축, 주님 성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 보았도다.”(시편 98,3)
방금 부른 오늘 성탄 대축일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성탄시기 계속되는 매번 축일 계속될 화답송 후렴들 모두가 흥겹습니다. 이제 주님 성탄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만 아니라 온 인류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주님 성탄과 동시에 우리도 새롭게 태어났고, 존엄한 품위를 회복하여 다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온 세상의 빛이자 생명으로, 희망으로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생하신 주님 계시기에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탄생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희망, 무슨 기쁨으로 무슨 힘으로 이 어둡고 험난한 광야인생을 살 수 있을런지요? 주님 성탄날이 되면 늘 생각나는 감동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어제 성탄 밤미사 루카복음을 소재로 아이들이 성탄절에 많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연극을 하던중 발생한 일입니다. 여관집 주인의 아들 역할을 한 아이는 약간 부족한 장애아였습니다.
연극중 문제는 바로 이때 발생했습니다. 젊은 마리아, 요셉 부부가 여관집을 들어섰을 때, 마리아는 만삭의 몹시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연극중 여관집 주인은 부부의 초라한 행색에 여관집 방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했고, 쓸쓸히 떠나는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약간 부족한 주인집 아들 역할을 하던 아이가 난데 없이 부부를 향해 뛰쳐나가며 외쳤다는 것입니다.
“방 있어요! 떠나지 마세요. 여기 묵을 방이 있어요!”
부족하나 착하기 그지없는 이 아이는 연극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즉흥적으로 외쳤고, 연극은 그 즉시 완전 실패로 끝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중들은 깊은 감동을 받음으로 역설적으로 연극은 실패가 아닌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이런 착한 아이들 같은 마음의 구유 안에 탄생하는 아기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어제 성탄 밤미사 루카복음(2,1-14)과 오늘 성탄 낮미사 요한복음(1,1-18)은 극명한 대조와 동시에 참 좋은 보완을 이룹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어제 밤미사중 루카복음과 같은 들판, 목자, 양떼, 구유등 제대앞 장면과 같은 구체적 사물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이 장면 배후의 깊은 의미를, 진리를 찾아냅니다.
그래서 앞서 루가복음의 이야기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 부르고 요한복음과 제2독서 히브리서 말씀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 부릅니다. 둘을 합쳐야 완전한 성탄이야기가 됩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을 내다본 듯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기쁨을 대변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구나!”
우리가 선포해야 할 구원의 기쁜 소식은 뭡니까? 주님의 성탄입니다. 우리의 희망, 우리의 생명, 우리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절망의 세상에 희망으로, 죽음의 세상에 생명으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태어 나셨다는 복음입니다. 이를 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주님 성탄의 깊은 의미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자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요한복음 로고스 찬가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밀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자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스런 신원입니다. 평생 묵상해야 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요한과 쌍벽을 이루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말하는 히브리서의 고백도 참 멋지고 깊고 아름답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구유에서 탄생하신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둘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활동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입니다. 만들고, 생산하고, 창조합니다.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셋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사랑의 빛, 믿음의 빛, 희망의 빛, 평화의 빛등 모든 빛의 원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어제 빛의 신비, 어둠의 신비에 관한 강론을 기억할 것입니다. 둘은 하나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빛의 신비이자 어둠의 신비가 됩니다. 요한사가의 빛의 신비를 밝히는 내용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바로 이런 무지가 인간의 불행이자 비극임을 깨닫습니다. 빛이라 다 빛이 아닙니다. 가짜 희망, 가짜 생명, 가짜 희망, 가짜 평화도 무수하듯 가짜 빛도 많습니다. 참빛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될 때 분별의 지혜요 참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넷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육화의 신비는 복음의 절정이자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니 바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탐욕도, 허무도, 무지도, 가난도 아닌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없이는 참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이래서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말씀공부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다음 말씀에 요약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보고 배워 닮아야 할 분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바로 이런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일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전 삶의 목표가 됩니다. 참으로 말씀과 하나될수록 주님처럼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이자 인간의 신비이고 만물의 신비가 됩니다.
모든 신비의 열쇠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은총과 진리로, 생명과 빛으로,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탄생하신 주님의 축복을 가득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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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어제 12월 24일 대림절 마지막 독서의 기도를 하다가 아오스딩 성인의 다음 말씀이 성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죽은 채로 있었을 겁니다. 그분이 죄 많은 인간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육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그분이 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이 당해야 할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생명을 다시 얻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되었을까 전에 나눈 적이 이미 한 번 있지만 오늘도 또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이번에 해봤습니다. 주님 오심이 왜 내게 기쁨인지.
남의 집 아들이 태어나면 그 집 부모가 기쁘지 제가 기쁠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성탄이 제게 기쁨이 되려면 주님과 제가 특별한 관계여야 하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특별한 분이시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이십을 전후해서 저는 사느냐 죽느냐 고민했습니다.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이 악한 세상을 고통스럽게 꾸역꾸역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어설펐지만, 자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고, 내가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고 더 살고 싶지도 않은 생을 살게 하신 하느님을 만나야만 했고 살아야 할 이유를 하느님께 찾아야만 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무신론자로 살았거나 종교를 가졌더라도 불교나 유교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불교나 유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설명해줘도 왜 살아야 하는지까지는 설명해주지 못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셨기에 그리스도교가 생겨났고,
그리스도교를 믿었기에 하느님을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님은 물론 수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프란치스칸 수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제가 수도자도 프란치스칸도 아니라면 제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되었을까요? 지금 와서 프란치스칸도 수도자도 아닌 제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은 제 성소의 근원입니다. 주님께서 프란치스코를 부르시어 은사를 주지 않으셨으면, 내 입맛에 맞게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를 맛 들이게 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행복했더라도 지금만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참 행복을 배우지 못해,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고 불행했을 겁니다.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소유케 하는 가난에 관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고통도 사랑하고 죽음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참으로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탄은 그것이잖아요?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심으로 우리는 올라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는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잖아요?
이 밖에도 할 얘기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오심이 여러분에게 진정 기쁨과 행복이기를 바라고 빕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일부터 1월 5일까지 새로운 강론은 올리지 않고, 전에 올렸던 강론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 올리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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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나셨다."(루카2,11)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와 가정 안에 충만히 내리길 빕니다. 특히 그늘진 곳, 어두운 곳, 마음이 아픈 곳에 내려지기를, 그리고 혼란에 빠져있는 우리나라에 내려지기를 빕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해 오신 날입니다. 하느님이 육(사람)이 되신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큰 표징입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2,10-12)
하느님께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가장 초라한 곳에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이며,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기쁨이고, 모두가 함께 성탄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 성탄 날에는 담벼락도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담벼락이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담벼락에 고기 기름이라도 발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탄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과 위헌적 비상계엄 사건으로 큰 혼란에 빠져있는 이 혼란한 시국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루빨리 세상과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정의와 공정과 평화가 충만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신 구세주께 간절히 청합시다!
무엇보다도 내 몸과 마음이 성령의 열매들로 가득 찬 구유, 날마다 구세주를 모실 참 구유가 되도록 노력하는 참 신앙인이 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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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 11)
우리 시대의
성탄은
복된 희망의
성탄입니다.
가장 좋은
성탄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여기 이곳도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여기 이곳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만드십니다.
성탄을 몰라도
성탄은
우리에게
옵니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묻는 은총의
성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십니다.
더 나아지길
바라시며
하느님께서
여기 이곳에
탄생하십니다.
다투지 않으며
하느님 먼저
작아지십니다.
작은 아기가
되시어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떠받드십니다.
조금씩
알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피와 살이
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성탄이
가장 좋은
복음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뜨겁게 만나는
고마운 성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성탄은
우리와
더욱
가까워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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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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