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서쪽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식탁 앞에서 눈인사를 한다. 놀라 돌아본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리도 그리웠는지 남의 창을 통해 반사 빛으로 비취 주는 햇살이기에 고마웠다. 아침식사 내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내 집은 동남향이다. 아침에 햇살이 반갑다며 들어와야 되지만 높다란 고층 건물이 앞에 우뚝 서 있다. 그 건물을 비껴서야만 햇님은 우리 거실로 들어온다. 오늘 아침시간에는 유독 환하게 햇살이 비취었는지 남편이 말을 한다. 뒤 건물 유리창 덕에 서쪽에서 아침햇살이 비취는 집이라 너무 좋단다. 무심히 살아온지라, 햇님이 왔다 갔는지 또 날이 흐려 오지 않았는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기에 몰랐었다. 참으로 무심하게 살아왔나보다.
아침식사 후 늦게야 들어온 동편의 따스한 햇살을 보자 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어디론지 달려가고 싶다. 어디를 갈까, 산으로 바다로 하며 생각했다. 마침 오늘은 남편이 시골에 가는 날이다. 남편이 떠나면 겨울바다를 만나러 가리라 결심했다. 그러자 내 마음은 인천으로 갈까, 아님 제부도 아님 전곡 항으로 갈까 망 서려졌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그래 한번 가보고 싶던 대천 해수욕장으로 가자. 그 곳에는 이종사촌언니가 살고 있지 않은가, 가자 서해 바다로…….
그렇게 결정을 하자, 내가 사촌 언니한데 언제 가보았던가 생각을 되돌려 보았다. 서산시 보건소에 근무할 적에 휴일을 택해 갔던 기억이 났다. 차도 많이 안다녔던 오지를 40여 년 전에 갔던 일이. 그때 형부는 성주탄광이라는 곳에 근무를 했기에 산속에서 살았다.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기에 겁도 없이 그 탄광을 찾았던 일이 꿈같이 생각났다. 날이 어둡도록 찾지 못해 산속을 해매일 때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 무조건 형부 이름을 대며 여쭈었더니 잘 안다며 나를 그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아저씨가 없었다면, 나는 그때 그 끔찍한 일을 어찌 처리했을까? 되돌려본 필름은 너무나 황당하고 무서웠다.
지금 나는, 남편을 시골에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고는 언니의 집을 향해 달려온 것이다. 서해고속도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전화로만 확인한 곳에서 형부를 기다렸다. 서로 얼굴을 잘 모르기에 내 앞을 지나쳤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슈퍼에 들어가서 언니가 말한 떡 방앗간을 물어보았다.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란다. 거기 한군데 밖에 없다며 조금만 돌아가란다. 차를 몰고 들어가자 정말로 떡 방앗간이 보였다. 방앗간 아주머니는 누구를 찾나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형부 이름을 말하니 그 제서야 앞에 멋있게 지은 한옥 한 채를 가르친다. 나는 달려가 대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었다. 조금 후 떡집아저씨 하시는 말씀이 박아무개가 저기와요 한다. 바라보니 조금 전에 내 앞에서 돌아가던 그 분이었다.
반가워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시골특유의 메주 띠운 냄새가 거실에 가득했다. 형부는 웃으며 시골은 다이래 메주 때문에 냄새가 나지만 문을 열어놓아도 한동안 냄새가 나가질 않아한다. 그래요 형부! 이런 게 시골 사는 재미가 아닙니까했다. 앞에 있는 텃밭과 옆에 논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형부는 자기의 소일거리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먹 거리를 장만하며 운동도 할 겸 농사를 지으신단다. 말을 하면서도 매우 흐뭇한 표정이다. 조금 후 언니가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우리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한 오 분쯤 기다리자 모퉁이에 버스 머리가 보인다. 언니는 버스에서 내리자 내가 있는 곳으로 바삐 오신다. 서로를 붙잡고 ‘언니가 이렇게 잘사니까 너무 좋아’하며 꼭 껴 않았다.
사실 이 언니는 이종사촌이지만 내 어릴 적에 우리 집에서 10년 이상을 같이 살았다. 이모님은 딸을 8형제나 낳으셨다. 가난했던 언니는 쌍둥이 형제였다. 그리고 여자동생이 여섯이나 되었다. 먹는 식구 하나래도 줄이려고 언니는 우리와 같이 살았다. 항상 잊을 수 없었던 친언니와 같다. 그동안 간간이 너무 가난하다는 소식만 전해오고 애경사에 오질 않았다. 지금 와서 언니를 만나보니 못살아서가 아니라 연락해주는 오빠가 멀리 살고 힘이 든다고 연락을 안줘서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반갑게 만난 언니는 바닷가에 나가보잔다. 그리고 생선이 들어오는 항에 가서 매운탕거리도 사며 돌아보잔다. 차를 몰고 삼십여 년 전 남편과 잠깐 와서 보았던 대천 해수욕장의 겨울 바다와 항구를 찾아 나섰다. 먼저 바닷가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보았다. 입구에서부터 길 다란 해변의 모래는 조개가루로 아름답고 길었다. 삼 십 년 전 남편과 잠간 왔을 때 하고는 아주 달랐다. 그 때는 물도 더럽고 푸른 바다라는 생각을 못했기에 흙탕물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멋진 연초록의 바다는 내 상상을 한 순간에 뒤 엎어버렸다. 아니 강원도의 동해바다만큼 청 녹색은 아니지만, 예날 과 너무 다른 모습이네요, 하며 감격해 했다.
형부는 아니야, 여기가 더 좋아, 계속 계발을 하기에 내년에는 더욱 좋을 걸 한다. 옛 건물은 다 헐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불편함이 없이 만든데, 하며 연신 자랑한다. 형부 눈에는 내가 황홀한 표정으로 멋지다 하며 겨울 바다를 즐기고 있었기에 자랑 아닌 자랑을 더하는 것 같다. 너무 늦게 처제가 왔기에 보여줄게 많다며 항구 쪽으로 가잔다. 고기배가 들어오는 항으로 갔다. 부두 곁에는 관광객이 산책하며 즐길 수 있는 쉼터와 산책로가 길게 이어져있다. 그 길을 걷고 난후 언니와 먹는 생선회와 한잔 술은 피곤을 잊을 수 있는 강장제였다. 부두 식당에서 내다보이는 크나큰 여객선은 겨울바다를 찾아온 여인의 가슴에 커다랗고 둥근 그리움이라는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다. 그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자꾸 들었다.
언니와 지난 일들을 말하며 밤늦도록 추억에 서린 시간을 보냈다. 40년 동안 쌓인 회포를 하루저녁에 다 풀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부담 없이 만나볼 수 있을 만큼 잘사는 언니가 고마웠다. 다음날 따스한 햇볕이 내차 창문을 통해 웃으며 ‘천천히 조심하며가세요’ 한다. 그리고 겨울바다를 ‘자주 만나러오세요’ 하는 것 같다.
내 삶에 햇님은 매우 소중한 연인 같다. 때론 길 안내자로 식탁의 친구로 또 오래된 벗으로 언제까지나 함께 사랑하리라. 그리고 남편을 향해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취 주며 행운을 발하는 햇살의 인연은 계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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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현동님의 글을 보니 낯설지가 않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지명들이 제마음을 설레이게 만드네요... 저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때는 인천의 영종도 아님 제부도 이럽니다. ㅋㅋ 가깝거든요.. 그리고.. 대천해수욕장 성주탄광 이단어들이 너무 반갑고 마치 제이야기인듯 너무 좋네요.. 성주탄광의 깊은 게곡도 잘알구요.. 대천해수욕장도 잘알거든요.. 40여년전 이야기라면.. 정말 산골 오지엿을듯 싶네요.. 제기억 30여년전도 그러햇으니 말입니다.. 잔잔하게 써내려가신 글 너무나.. 좋네요.. 미사여구가 필요없는 삶의 한단편의 모습이.. 마치 제모습인듯.. 그리고 제 생각인듯 편하게 다가오는것이 잠시 추억에 젖어보왓습니다
이 글은 2008년 12월 24일 이곳 편지실에 올리셨던 글입니다. 참고 하시기를 원합니다 .
저도 글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잠시 착각 하셨나 보아여..긇이 많다보니..
저는 방향 감각이 둔해서 동서남북도 제대로 모르겠더군요 ㅋㅋ 지금도 제가 앉아 있는 앞쪽이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모른체 그리방향감각 없이 산답니다 ㅋㅋ 햇살이 찾아드는 좋은 집에서 오래토록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운 추억 감사히 읽고 가네요~
정말로 그러네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런 실수를 했네요. 그리고 조금 수정을 하다보니 착각을 하였어요. 죄송 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겟습니다. 저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 글이 많다보니 이런일이 일어났군요. 조심 하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