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재벌 상속녀 마를렌 엥겔혼(31)은 지난 2022년 9월 세상을 떠난 친할머니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세상에 흔한 기부단체를 또하나 세우는 대신 세금을 더 많이 내겠다고 공언해 국내 언론에도 크게 소개됐다. 중부유럽의 상속자들을 모아 'TAX ME NOW'를 만들어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시위를 벌인 일로도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영국 BBC는 그가 상속받은 돈 가운데 2500만 유로(약 361억원)를 어떻게 기부하는 것이 좋을지 결정해달라고 50명의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자문단을 꾸리기로 했다고 10일(현지시간) 전했다.
우선 마를렌은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재산을 물려받아 힘이 생겼다. 그것을 일구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나라는 거기에 세금을 매기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 오스트리아에서는 2008년에 상속세를 폐지했다. 방송은 유럽 국가 가운데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는 나라가 상당수 있다고 전했다. 엥겔혼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마를렌의 증조할아버지는 프리드리히 엥겔혼 (1821~1902), 독일 화학 및 제약업체 Badische Anilin- & Soda-Fabrik AG(BASF) 창업자이다. 할머니 트라우들 엥겔혼베키아토(1927년 1월 19일~2022년 9월 22일)가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세상을 떠난 당시 미국 잡지 포브스 추계에 따르면 42억 달러(5조 5300억원)로 평가됐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 벌써 손녀는 유산의 90%를 세상에 내놓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9일까지 마를렌이 꾸리는 자문단에 참여하겠다는 지원자가 1만명 모였다. 재분배를 위한 선한 위원회(Good Council for Redistribution)는 온라인과 전화로 신청자를 모았다. 모두 16세 이상이며 이들 가운데 50명을 선정하고, 혹시 몰라 15명의 대기 명단을 추렸다.
마를렌은 "정치인들이 재분배에 대한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아 내 스스로 재산을 재분배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정규직 일자리를 찾는 데 힘겨워하고, 일해서 번 푼돈으로 세금을 낸다. 나는 이런 일을 정치의 실패로 보며, 정치가 실패하면 시민들이 스스로 이 일을 해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선발된 50명은 모든 연령대, 연방에 속한 주들, 사회계층, 배경 등을 감안할 것이며, 3월부터 6월까지 잘츠부르크에서 학계와 시민사회 단체들과 면담을 갖는다. 그저 즉흥적으로 기부 방법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장애에 구애되지 않고 어린이 돌봄도 제공되며 통역 서비스도 제공된다. 참가 비용과 여행 경비로 주말마다 1200 유로씩 지급한다. 일종의 민주주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마를렌은 말했다. "내게 거부권은 없다.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해 내 재산의 처분을 전적으로 밑길 생각이다.
물론 위원회가 합당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돈은 마를렌에게 귀속된다. 또 그의 재산 가운데 얼마만큼이 현재 남아 있으며 얼마 만큼의 몫이 사회에 환원될지도 불분명하다.
유럽은 미국보다 상위 1%의 자산은 적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부가 대물림돼 그 자산은 더 널리 분산돼있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억만장자 3분의1 정도가 재산을 상속하지만, 유럽은 절반 이상이다. 상속 재산의 90% 이상을 기부하되 100% 세금으로 내고 싶다는 생각을 책 '겔드'(Geld)를 펴냈다. 그러자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쇄도했다. 이에 “내가 돈을 받을 사람을 결정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누구에게 돈을 줄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이 결정권을 조세 정의가 가져가 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이런 위원회를 꾸리게 된 것이다.
손녀 만큼이나 할머니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출판사의 서점원이자 편집자였는데 1955년 5월 빈에서 결혼한 남편이 페터 엥겔혼이었다. 1990년대 지배 주주를 둘러싼 다툼 끝에 스위스 그룹 호프만 라로슈에 회사를 매각, 110억 달러를 손에 쥐었다. 당시에도가족 지주 회사가 버뮤다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마를렌 조부모의 친구 중에는 행동과학자 콘라드 로렌츠와 생화학자 배노 헤스가 있었다. 남편은 자선가로 유명했으며, 만하임의 젊은 음악학도들애게 장학금을 희사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부인 역시 생명공학, 나중에는 생물물리학, 시스템생물학, 생물정보학 장학금을 기부했다. 이슬람 가정과 상속제도를 비교하는 프로젝트에도 기여했다.
BBC는 오스트리아에서 상속세가 폐지된 지 16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정치권에서는 논쟁 중이라고 했다. 제1 야당인 사회민주당은 재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 대표 안드레아스 바블러는 공영방송 ORF에 올해 총선을 통해 다른 정당과 정책 연합을 통해서라도 이를 관철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 녹색당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보수인민당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크리스티앙 스톡커 사무총장은 "바블러가 힘든 이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려 하고 있다"며 새로운 세금을 거부하며, 사람들은 순수입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