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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식 1공화국의 한국의 상황과 군부,정치권,미국을 볼때 곤혹스러운게 많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잘못된 판단을 하는 미국과 정보부,국무부,국방부가 1공화국시기에 한국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하고 적절하고 억제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1공화국을 통치했던 이승만정부를 보면 머리가 아파온다.허세라고 해야 할까? 전략이라고 할까?
전략이라고 하기에는 그 행동들이 너무 어이없고,실제로 이루어지고,몽상과 꿈에 부풀어 있다.
오히려 1950년대 존경받는 제3세계의 국가들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주라는 오명속에서 미국이 원조한 군부쿠데타로 실각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이없게 한국은 이승만 정부가 워낙 허황되고 이상해서 미국이 합리적이고 제대로 판단한것 같다는 것도 보이는 것이다.
100만 상비병력을 육성하여 중국을 정벌하자.(1954년)
무슨 수백년전에 북벌소리가 아니다.1954년 1공화국 수뇌부의 목표였다.1954년 6월에 손원일 국방장관이 밝힌 100만 상비병의 육성계획이다.18세이상 40세이하의 장병 100만을 현역병으로 입대시켜서 100만대군을 유지한다는게 국방부의 목표였다.
중공군이 압록강 넘어서 수백만명에 달한다고 1공화국의 수뇌부는 만주로 북상하여 중공군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상비군100만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더욱이 중화민국과 연합하면 중공군을 격파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1951년 15세이상 49세이하 장정의 인적동원력은 304만명이었다.미국이 판단한 한국군의 군대는 16개사단 25만명이 인구대비 적정수준이었다.그나마 하도 징징대서 기존의 전차,전투기의 첨단무기 군액을 삼각하고 20개사단의 증편을 허용한것인데,1954년 상비군 100만명을 동원하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의 현실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당시 한국의 군원예산은 미국하원에서 칼같이 삼각당하고 있고,한국을 이승만 대통령 통치에 두지말자는 안이 우세했다.(당시 미국은 1956년경에 한국의 대통령을 신익희,장면으로 교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원무기는 한국군 65만 경찰5만명을 합쳐서 70만명분이었고,물자도 80만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국방예산의 80% 미국의 군사원조로 하고 있을 소리에 국회에서는 윤치영이 200만대군 양성을 소치리고 있고,실제로 1954년 100상비군 양성의 원대계획이 발표되고 있었다.그것도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말이다.
1954년 뭐 원대한 자유반공의 전사 뭐라고........................하고 미국의 군원원조를 받아서 한다고 했다.
정말 인구 2200-2400만 정도 되는 국가에서 뭔짓인지 모르겠다.현역 73만도 간신히 채우는 판국에 말이다.
결과는? 6개월 뒤에 예비군 100만을 키우겠다는 것으로 바뀐다.근데 이것도 문제를 일으키는데.
일단 미국 100만 상비군양성계획과 40개사단 상비군 창설계획을 2개월 뒤 35개 상비사단,나중에 도저히 인적자원이 안되는 20개 상비사단 20개 예비사단 인가로 바꿔버린다.그런데 미국하원에서 10개 예비사단 원조계획을 삭감해버린다.
미국 군원도 문제지만 인원을 채울수가 없는게 더 큰 문제이다.
(뭐 이때 반공을 위한 백만 십자군 이야기가 언론에 심심치 않게 보도 되었다.)
예비군으로 100만을 양성하겠다.
1955년 국방부는 원대한 100만 상비군 계획이 미국이 정해놓은 군원원조 제한분 80만명으로 좌절하게 되자.예비군으로 100만 상비군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내어 놓는다.그런데 100만 예비역 양성계획은 분명히 괜찮았다.근데 내용이 문제였다.
예비군들의 훈련시간을 2년-3년사이에 6개월 받게 하겠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국방부가 1955년 발표할때 예비군으로 양성될 청년들은 6개월의 훈련시간을 받게 하겠다.정식으로 공언하였다.
정식제도는 도입했으나 1958년 예비군 소집율은 40%미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1954년 중공에 대한 공격의지
이승만대통령은 연설에서 한국의 25개 상비사단,25개 예비사단 청년 150만은 공산적도를 전멸시키기 위해 언제라도 국민당의 63만군대와 중국을 탈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연설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50만까지 군대를 양성하려고 했던 모양이다.이승만 1954년 연설에서 한국군을 아시아 제일의 반공군대라고 선전하였다.
당시 국방부는 100만대군의 양성을 하기위해 중공군의 숫자는 1200만까지 부풀리는 모험수를 두었다.
그러나 미국은 만만치 않았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100만-150만 상비군 계획은 미국이 7억달러 군원계획을 철회하고 한국군의 군원원조액을 70만으로 정해버리자 사실상 무산되어 버린다.(미국은 이승만대통령의 북진의지를 상당히 경계할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보자면 100만대군 순전히 미국원조를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1955년 각도에 하나씩 찰성하기로 예비사단,두기로 육군훈련소,병사구사령부(징병담당)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패했다.기존의 제대하는 장병들에 대한 예비군 편성작업조차 지지부진 하였고,1955년에는 고교생까지 예비군 훈련을 강행하려다가 미국의 반발로 취소되는 해프닝이 발생한다.
2300만-2500만 한국인구에서 당시 육군의 복무기한2년 해공군은 3년이다.1951년 미국이 결정한 한국의 군원액수는 10개사단 25만명수준이었다.이병력은 1952년 36만3000명으로 늘어난다.그리고 41만6천명으로 증가하고,1952년10월 한국군을 10개사단 25만명에서 20개사단 50만명으로 증강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당시 미극동군이 19만명으로 억제되고,군원에서 3만명이 부족한 상태였다.중공군은 102만명으로 증강되었다는 판단에 당시 한국군9사단이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한국군의 교육상태와 훈련도 매우 좋아진것으로 보고 2배 수준의 병력을 증강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이 정한 한국군수
1953년 아이젠하워 정부가 정한 한국군의 수요는 2월 14개 사단 507,880명이었다(육군46만명) 이에 따라 미국합참은 한국군의 수요를 장기적으로 육군20개사단 64만명,해병대 3만명,공군 9천명,해군 1만명등 총 68만9천명으로 이루어진 한국군의 장기적인 증강계획을 승인하게 된다.
한국군 20개사단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의 수요가 적정하다는 판단이었다.
1953년 4월22일 미국은 한국군에 카투사,해병대를 제외한 65만5000명의 군원을 결정한다.
그리고 서류상으로 20개 사단을 두어서 예비군을 확보할수 있게 하는 안을 제출했다.(이승만 정부는 이것을 상비군화 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군의 20개사단 계획으로 당시 20억달러의 자금이 필요할것으로 추산하였다.아이젠하워의 특사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타스키 특사는 장기적으로 한국군을 10개사단으로 축소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한국정부 미국의 예상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고 징병하다.
한국은 1955년까지 전시징병령을 유지하였다.1954년 100만대군을 상비군화 시키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18세이상 31세이하는 징병령에 따라서 모두 입대시킨 상황이었다.그러나 나중에는 35세이하도 소집시키는 상황까지도 온다.이것은 당시 호적등의 조사가 부실했고,2300만이 넘는인구에서 청년층의 징병을 극대화시킨것이라고 볼수있다.
이런 형식으로 1954년 11월 육군66만 1000명,공군 1만9040명,해군 1만5000명,해병대 27,500명 도합 72만에 달하는 상비군이 확보되었다.거기에 비공식 켈로부대,경찰병력을 합치면 한국군의 군액은 85만에 이르고 있었다.
35세이하 청년층을 소집해서 생긴 일들
1953년부터 입대시킨 수십만의 청년들은 당시 육군은 2년,해공군은 3년인데 30을 넘긴 사람들을 입대시키다 보니 구 일본군에 참전하거나 징용을 갔던 사람들이 대거 입대하는 일들이 발생했고,농촌의 빈농가족의 신랑들을 입대시키니 논산훈련소에 부인과 잘수있는 방을 마련해주기도 하는 해프닝이 속출하였다.
더 심각한것은 1948년 4.3사건.1950년 보도연맹,양만학살의 피해자,유족들도 입대를 했던 것이다.얼마나 마구잡이 입대였는지를 알수 있다.학도병으로 입대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아서,다시 재입대한 한사람들도 있고,북한군 포로,빨치산들도 입대를 시켜서 군복부를 시킨 일은 아주 흔했다.
1918년-19년에 태어난 35세이상도 제2예비역에 포함시켰다.
31세이하 장정은 금지시켰지만........
결국 1955년 병역법을 개정하여 기존의 26세 이상부터 31세이하의 징병금지를 선포하고,20세이상 25세이하의 장병들을 징병에 포함시켰으나 문제는 기존의 병역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린것이다.어느 시점에 늘린것인지 모르겠지만,1955년 병역법을 반포하면서 72만의 군액을 유지시키기 위해 입대하는 장정들의 복무기한을 3년으로 잡았다.
오직하면 1956년 자료에서 한국의 징병법에서 70만군액을 유지하려면 무려 3년6개월의 군복무를 해야된다는 결과가 있다.
1955년 군액이 얼마나 모자랐으면 징병보류제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100만대군의 증강?????
1954년 합참의장인 이형근 대장은 지금의 경제사정으로 20개사단의 유지도 어렵다고 40개사단의 편성을 요구받은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에 고민하고 있었다.이형근대장은 현 사정으로 20개 사단의 유지도 어렵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00만 상비군 계획은 취소되고 72만의 군액을 유지하는 선에서 2군 사령부와 10개 예비사단의 창설을 결정짓게 된다.
미국 2년만에 한국군에 대한 감군에 나서다
1953년 유엔군 정보부서는 한국군을 장기적으로 25만명으로 수준으로 감축해야 된다는 보고서를 제출한다.미국은 일단 1955년 72만의 군액에 대해서 승인을 내놓고 있었고,육군본부에서도 장기적으로 10개사단 25만의 군병력으로 감축하고,나머지는 예비군으로 편성해야 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53년 미국무부는 한국군의 60만의 군대를 유지할경우에 미국의 군사원조 없이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군병력72만은 대 중공용이었다.
1955년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북한육군 41만명,공군2만명,중공군 48만명 92만명의 병력이 있다고 우려했으나,북한군보다는 중공군에 대한 언급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1공화국이 72만의 군병력을 유지한것은 세계3위의 군인숫자라는 것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았다.북한군은 35만명을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신감처럼 72만에 육박하는 상비군을 유지하려고 했었다.
1950년대 말에 미국은 중공,북한의 연합군을 한국군26개 사단과 주한미군 2개 사단으로 충분히 방어가 평가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장비만 충분하다면 핵무기 사용을 전제로 21개 사단으로 방어가 가능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미국 1공화국 정부의 70만 군원유지는 북진통일을 위한 위협용이거나 실제로 무력침공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북한의 판단
1955년 북한의 김일성의 이미 북한군에게 그런지시를 내려놓았다.
군부회의에서 김일성은
"방어만 하려면 하면 지금 우리 무력으로도 충분합니다.그러나 리승만이 "북진"을 한다면 그 때에도 우리가 방어만 하고 앉어 있겠습니까?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그들은 완전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시기는 한국군의 규모가 72만 30개사단으로 증강되는 시점이다.북한은 한국군을 소멸시키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하고 간부가 더 있어야 된다면서 인민군의 간부화를 지양했다.
미국은 1955년 북한군만 남침한다면 자력으로 한국군이 북진할수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52년 11월 한국의 종군기자들은 2000만인구의 한국이 전쟁시에 100만의 병력을 동원하고,파견하는 장기전을 할수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미국은 애초에 구상이 틀어졌다.기형적인 육군의 비대칭
미국은 원래 한국군의 증강과정에서 공군의 규모를 늘리고 공군기 300대의 전술공군을 갖추려고 1955년까지 공군발전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미국방부와 극동군은 육군의 과다지출과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전술공군의 편제가 무리이고,300대의 공군기를 갖추려면 현 국방예산의 35%가 투입될것으로 보고 공군에 대한 경비지출을 대폭 감소시키고 육군 위주의 증강을 결정한다.
한국의 국방부는 해군,공군,해병대에 대대적인 무기증강과 군비를 요청했으나.상징적인 의미에 그 쳤다.
육군의 전력증강은 대대적인것에 비하면 해군과 공군은 상징적이었다.
북한이 첨단무기를 도입했다.
1953년 12월 국방부 장관이 1개 전투 비행단을 5개 전투비행단,2개 경폭격기 비행단,1개 정찰 비행단,1개 수송대대로 증강시켜 달라고 요청했고,1954년 1월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이 미군에게 다시한번 증강을 요청했으나 미군은 한국공군의 확대는 경제적인 이유로 실현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당분간 주한미공군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게 좋다고 판단했다.
미군은 한국공군이 9천명일때 비용,효율성등 비용이 2700만달러지만 2만명일때는 7,300만달러로 증가할뿐만 아니라,매년 큰폭의 운영비 지출이 있다고 경고하였다.이것은 당시 최빈곤국이던 한국에게 옳은 판단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미그-15 60대,40대의 경제트 폭격기등 300대의 전술기를 확보했고,1950년대 후반기에는 950대의 항공기중 전술기 650대를 보유했다.
이는 한국공군이 장비했던 F-51D무스탕 75대,T-6 15대,L-19 17대 수준이었다,미군도 북한공군이 한국공군을 압도하고 있다고 평가했고,정일권 육군참모총장도 북한은 580대의 제트기로 무장했는데,한국은 한대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이 1950년대 10%가 넘는 경제성장을 하면서 신흥 경공업국가로 나서면서 생긴 부산물이었다.오히려 군비를 억제하고 인민군을 30만 중반수준에서 두면서 적절한 군비증강이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미국에거 국방예산의 70%를 지원받으면서 기존의 예산에서도 군비가 50%이상 지출하고 있었던게 현실이고,
규모4위의 60만대군의 허상에 사로잡혀서 규모 유지에 급급했다.
1공화국의 무리한 허상과 국방비
한국의 당시 전형적인 농업국가였고,그나마 한국전쟁으로 있던 산업기반마저 완전히 붕괴되었다.1954년 자체적인 국방예산은 10개사단의 운영비와 소규모의 해공군 유지에만 가능한 수준이었다.영국이 지적한대로 한국군의 대규모 상비군유지는 외국의 원조만이 가능한 수준이었다.그러나 이승만정부는 군증강에 따른 비용은 계산하지 않고,인력만 제공하고 무기와 장비는 미국에게 지원받아려하는 모습만 보인다,전형적인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결과였다.
1952년11월 신태영국방장관은 10개사단 25만명의 병력에 대한 국방비조차 조달이 힘들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한국은 60만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1960년대까지 예산의 절반이상을 국방비로 투자하고 있었고,그중에 절반은 미국무상원조로 충당하고 있었다.이런 기형적인 조치로 1공화국의 산업개발은 사실상 뒤쳐지게 된다.북한이 국방비를 줄이고 경제개발에 투자할때 1공화국은 세계인력4위 60만대군에 집착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은 각료가 군비의 부담으로 한국군증강에 반대하면 우리가 상비군만 남기고 나머지 병력을 제외시킨다면 미군과 유엔군이 군비증강 비용을 부담할것이라는 근안시적인 내용으로 접근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은 미군1개사단 비용으로 아시아인 25개사단을 무장시킬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54년 한국의 국방예산은 원화비중으로 사단10개,소규모해공군을 유지하는 비용밖에 되지 않았고,국방예산의 79%는 미국이 부담하였다.1956년에도 국방비의 미국원조 부담율은 78%에 달했다.원화비중은 22%였지만 국방예산의 전체비율은 50%가 넘는 비율을 자랑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낳았다.
1957년 미국원조가 53%로 줄어들지만,이시기부터 한국군의 보급이 악화되고,군인들의 생활고가 심해지는게 미국이 직접보급에서 철수했기 때문이다.
결국 70만대군의 유지는 미국의 원조없이는 불가능 한것이었다.더구나 국군의 무기와,탄약은 직접 생산해야된다는 인식은 있었지만,증강에 따른,탄환,차량등의 장비는 전부 일본에서 수입했다.
1957년 미국의 군사원조 감소와 인원부족은 감군에 나선다.
미국의 구 소련과 화해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한국군에 대해서 11만인원의 감축을 논의한다.당시 국방비의 부담도 큰 상황이었고,
결국 1954년 72만의 인가인원은 1958년 63만까지 감군이 되었다,이시기 감군방법은 36개월로 늘렸던 복무연한을 3개월로 줄여서 33개월로 하였다.
1공화국의 70만군대의 허세
이승만 대통령이 자랑했던 세계5강의 아시아 최강의 반공군대는 군 지휘관들은 초창기 건군시부터 있던 사람들이라서 30대 장성들이 많았고,이들의 퇴역이 지체함에 따라서 1950년에 입대했던 장교들의 적체현상이 극한에 달한다.더욱이 규모만 늘려놓고,운영비와 물자비로 예산이 들어가는 바람에 장교들,하사관의 인건비마저도 한달의 쌀식비정도였을 정도로 가난한 군대였다.
미국이 보급을 책임지던 1957년까지는 괜찮았으나 미국이 보급에서 철수하던 1958년부터는 전방에서 사병들이 굶고있을 정도로 횡령이 늘어난다.그와 동시에 사병들을 후생사업 명목으로 사실상 돈벌이에 나서게 된다.사실 어쩔수가 없다 부대 운영비도 부족하던 시절이다.
결국 70만 대군은 탄약,물자,식량,운영비로 엄청난 지출을 초래했고,상대적으로 북한이 여러 첨단무기를 동원할때 질적으로 뒤쳐지는 부작용을 양산한다.
예비군 같은 경우는 100만의 군대를 양성한다는 취지는 커녕 제대장병 인적자원도 병사구사령부에서 파악하지 못해서 1958년 소집율이 40%가 최고이고,군대의 탈영율은 10%에 달했다.
일관성이 없는 동원계획으로 농번기에 차질을 불러오고,예비군을 조직하기 위한 무기마저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국가예산의 50%이상이 집중되는 바람에 사회적인 엘리트들이 대거 군인사회로 흡수되고,군대가 사회를 리드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1공화국은 국민방위군 사건이후에 병역법으로 예비병을 관리했으나,실제 예비역 동원은 20%미만이고,미국의 진단처럼 70만의 군대로 전부였다.
군대에 대한 위화감
70만 군대의 주요 인적 자원층은 농촌 청년들이었다.보리고개가 극심했던 농촌상 "군대오면 배고프지 않는다"는 구호아래서 농촌청년들이 대거 입대했다.반면 도시의 청년입대율은 저조했다.대학의 정원이 포화상태를 보더라도 당시 대학생은 엘리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대학생에 부정이 속출했고,그만큼 부유층이 군대를 가는일이 드물었고,하층에서 주요인적자원이 군대로 흡수되었다.
군대의 부식비도 횡령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군량비에 대한 횡령도 심각했다.
한국전이후에 편성된 70만군대는 허상이었다.농업국가에 미국에 의존해서 인력기반의 군대를 조성했고,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희생을 초래했다.근안시적이고 현실을 보지못한 국방정책덕분에 첨단무기도입이나 균형적인 군대의 조성이 상당부분 북한에게 뒤쳐지고,군대가 국가의 상당한 예산과 인적자원을 흡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고문헌
건군사-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사-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자료총서-국방군사연구소-
휴전전후 한국군 증강 과정에 관한 연구-이미숙
전시 한국군 통솔에 관한 연구-강문봉
한미방위조약 체결과정과 개선방안-김계동
한국의 건국과 군부연구(1945-60)-양병기
[출처] 1공화국 70만 군대의 허상과 진실(이승만의 100만 상비군 양성계획) (『역개루』 네이버 역사 커뮤니티) | 작성자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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