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이기주의는 ‘님비’(NIMBYs, Not In My Backyard Syndrome) 또는 ‘룰루’(LULU, Locally Unwanted Land Use)로 불리고 있다. 또 다른 양태로는 지역주민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이익이 되는 시설의 지역 내 설치를 요구하는 ‘핌피’(PIMFY, Please In My Front Yard)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집단 이기주의와 집합행동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종종 범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당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주변의 세력을 모아 집단행동을 하는 경우가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이다. 이런 행동은 대개 자신의 주변에 혐오시설이나 환경파괴 시설을 설치하려는 정부의 행정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의 질이 침해받는 경우에 발생한다.
행정기관에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있다. 국민들의 생존권과 국가발전이라는 공익적 목표 간의 갈등이 발생할 때, 이것은 집단이기주의 차원을 벗어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서는 집단이기주의 담론이 지역 주민 혹은 해당 집단들의 민주주적 의사결정과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악용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1990년대 초반 원자력 발전소 건설 혹은 핵 폐기장 설치 반대운동처럼 국민 전체의 공감을 얻지 못한 국가정책에 대해서 해당 지역 및 주민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시민의 정책 결정 참여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한편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공공선을 위한 집합행동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전술로 확산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아파트 주변 환경 개선을 위해 입주민들이 해당 시청 앞에 모여 연좌농성이나 시위를 전개하는 것은 집단이기주의로서 집합행동의 왜곡된 사회화 과정의 결과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집단주의 및 연고주의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기적 개인주의와 결합되면서 집단적 이기주의가 출현 하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을 협동적으로 추구하기보다 나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이기적 개인주의자의 수가 많아질 때 집단적 이기주의는 강화된다. 실례로 강남불패, 8학군, 타워팰리스 등과 같은 부자들에 대한 시기 섞인 별칭들은 ‘우리’와 ‘그들’을 부지불식간에 구별 짓고 있으며, 한국인 모두가 그들을 겉으로는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삶의 양태를 모방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한국인이 말로는 공생, 조화, 상생을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는 욕망, 지존, 쏠림, 투기 등의 생존전략을 학습하기 때문에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이러한 도덕과 가치, 삶의 잣대가 이중적으로 작동할 때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 보다는 집단적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세를 과시하는 집단행동이 강화된다.
한국 사회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체 국민의 70%가 농촌에 살면서 대부분이 마을공동체와 친족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급속적인 도시화 과정을 통해 기존의 공동체는 점차 무너지고 이질적인 다수의 사람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다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살고 있다. 도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지역사회 공동체나 시민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유대방식인 연고 즉,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연줄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도시와 촌락의 삶의 형태를 불안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한국인은 더욱 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과 물질적 성공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으면서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몰입하는 극히 개인주의고 이기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 공익(public interest), 공공선(public good), 공생(symbiosis) 등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아주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최근 전지구적으로 확장되는 양극화(bi-polarization) 현상은 나의 이익과 권리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의미의 개인주의가 한국 사회에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의 이익만 챙기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개인주의로 더욱 왜곡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눔, 사회적 책임, 복지, 공생발전 등의 담론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안 없이 화려한 수사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