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역사
윤춘호 지음
만경강 중류쯤 자리 잡은 전북 익산 춘포리에 대한, 일제시대 일본인 지주들이 대거 진출해 대장촌이라 불리기도 했던 지역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흔하디 흔한, ‘물 좋고 인심 좋은 내 고향 향토사’ 아니면 ‘악랄한 식민지배자에 저항한 순박한 농민사’ 같아 심심하다.
소설 ‘아리랑’을 둘러싼 작가 조정래와 식민지근대화론자 이영훈 교수의 논쟁을 기억하는 이들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조선 후기 근대적 소유권이 있었느냐, 벽골제의 성격이 어떠했느냐를 두고 다양한 논점들이 있는데, 그 논쟁을 떠올리며 읽는다면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조정래와 이영훈 사이를 가로지르며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제기하면서 균형을 잡는 데 최선을 다한다. 판단은 물론 독자 몫이다.
저자는 구마모토 지역 출신 호소카와 가문을 중심으로 일본의 어떤 세력들이 어떻게 이 지역에 진출했으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배로 대장촌에서 밀려날 때까지 이 동네의 완벽한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대장촌 일대 토지의 80%가 일본인 지주들의 소유였고, 대장촌 농민들 가운데 이들의 소작인이 아닌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부러진 만경강을 직강화한 것도, 15년에 걸친 대역사를 통해 초대형 제방을 완공해서 이 마을의 영원한 숙제였던 홍수문제를 해결한 것도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이후 패전과 함께 이 동네를 떠난 일본인 지주들의 이야기는 서둘러 봉인되었다. 그들이 살던 집, 운영하던 거대한 도정공장, 그들이 세운 철도 역사와 도로는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일본인 지주들의 존재 자체는 지워졌다. 그들의 행적이 철저히 봉인되면서, 그들의 맞은편에 서 있었던 조선인 소작인의 이야기도 함께 봉인되어 묻혀 버렸다.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일지라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기억하여 되살려 냄으로써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계속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이 그 발걸음의 시작이 되어 줄 것이다.
저자 윤춘호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고, 1991년부터 SBS 기자로 일하고 있다. 국제부장, 시민사회부장, 2017년 대통령 선거방송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교(慶應義塾大學校) 방문연구원으로 1년, 도쿄특파원으로 3년 동안 활동하며 일본 사회를 경험했다. 한국 정치,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