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 조련의 智將 원주시립합창단 정남규
2008년 9월 11일, 국내 유명 지휘자 초청 연주회에 초빙돼 원주시립합창단 객원지휘를 마친 당시 한국합창총연합회 구천 이사장은 연주회를 마치고 나서 그 소회를 이렇게 밝힌바 있다. “비상임 단원체제에서 상임체제로 전환해 단원 90 퍼센트 이상이 교체된 상황에서 이렇게 빠 른 시간에 정상급 합창단의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시립합창단에서도 전례를 찾아 보기 힘든 일입니다. 정남규 지휘자의 지도력이 정말 돋보입니다. 그리고 체임버 합창단의 톤 컬러와 절제된듯하면서도 성부 간에 잘 조화된 소리는 원주시립합창단의 정체성과 퀼리티를 더욱 향상 시켜 나갈 것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수년 내에 한국 합창음악계에 크게 주목받는 합창단으로 창단으로 커 나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음 해 9월, 역시 구천 이사장과 같은 케이스로 원주시립합창단을 객원지휘하게 된 당시 대 구시립합창단의 음악 감독이었던 이병직 지휘자는 원주시립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지휘자의 음악적 의도를 잘 소화하려는 단원들의 자세가 돋보이고 그런 단원들을 인간미 넘 치는 카리스마로 리드해 나가는 정남규 지휘자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정말 기대해도 좋은 합창단이라고 봅니다.” 원주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정남규. 그는 어떤 인물인가? 한국합창계의 기린아인가, 아니면 다크호스인가.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국내 정상급 합창 지휘자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 받으며 주목받는 음악가로 떠오르게 되었는가? 그러나, 아니다. 그는 결코 떠오르니 않았다. 다만, 오늘의 위해 성실하게 준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국내 합창계의 떠오르는 별도 아 니고, 다크호스는 더욱 아니다. 정남규. 그는 오로지 준비된 지휘자였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지휘자 정남규는 강원도 원주 산(産)이다. 그곳에서 출생했고, 거기 서 자랐으며, 음악공부를 위해 십 수 년 간 춘천과 비인으로 유학을 다녀왔던 시기를 제외하고 그는 줄곧 원주의 음악을 사수해왔다. 토양적으로 춘천이란 도시에서 김유정,전상국,이승훈,최승호와 같은 걸출한 문인(文人)을 많이 배출해 냈다면, 음악 쪽에선 단연 원주권에서 뛰어난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피아 니스트 손열음, 작곡가 박정선, 지휘자 정치용과 같은 아티스트들이 이 도시에서 성장했고, 그들 을 키워낸 음악적 토양 때문인지 오래 전부터 젊은 음악가들의 활동이 범상치 않았던 곳이 원주 였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휘자 정남규의 음악과의 인연은 원주라는 도시의 정서와 맞물려 유년기부터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의 부친이 원주에서 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그는 유년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성악의 영역을 넘나들며 필연적으로 음악수업을 쌓아 나가게 되었다. 고교 시절엔 원주 대성고에서 브라스 밴드와 인연을 맺고 고교 졸업 후, 강원대 음악교육과에 서 작곡 전공으로 오동일을 사사한 정남규는 더 큰 세계로의 날개를 펼치며 오스트리아로 향했 다. 그리고 비인시립음악원에서 스타니세프를 사사, 앙상블 지휘과를 졸업하고, 이어 비인국립 음악원에서 이반 에뢰드와 디에터 카우프만을 사사하여 작곡전공 디플롬을 취득했다.
지금 국내 합창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위 메이저급 지휘자들 - 안산시립의 박신화, 수원시립의 민인기, 창원시립의 윤의중, 또 그의 부친인 국내 합창계의 대부격인 인천시림의 윤학원과 같은 이 들이 미국에서 합창을 공부한 이들이라면, 국립합창단의 이상훈과 같이 독일어(獨逸語)권에서 수 학하고 온 몇 안 되는 합창 지휘자가 정남규이기도 하다. 유학시절 합창지휘가 아닌 작곡을 전공한 정남규가 그 분야에 어느 정도 기량을 발휘했었는지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는 늘 겸손한 사람이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사 람이다. 다만, 유학 시절 그의 지도 교수인 디에터 카우프만(메시앙의 제자)은 자신의 제자 가운데 정남규를 가장 뛰어난 제자로 여겼고, 그래서 모차르트 서거 2백주년 기념의 해에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신인 작곡가 추천 프로그램에 정남규를 전격 추천했다는 일화 정도만 들었을 뿐이다. 그가 유학시절 이렇게 작곡활동에 전념해서 세계적 귄위의 교수에게 인정받는 전도가 유망한 작 곡가로 생활했으면서 정작 합창 지휘자로 전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물음에 정남규는 이렇게 답변했다. “합창만이 내 음악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합창만이 자기 음악의 유일한 통로라고 고백한 정남규는 언젠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공언 했다. 합창단원 모두가 상임이 되면 3년 안에 국내 정상급 시립합창단으로 올라서겠다는 의지표 명이었다. 그게 2008년의 일이었고, 3년이 지난 오늘의 원주시립은 정남규의 호언장담처럼 열악한 지방도시의 음악여건을 극복하고 국내 정상급 시립합창단과 어깨를 견주어 부족함이 없는 합창단 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결정적 물증이 정기연주회 5회를 포함하여 지난해에만 모두 65회의 연주회를 소화하였다. 특이한 경력은 2009년 영화 <하모니>의 OST를 전곡 녹음하였고, 이후 강원도내에선 유일하게 한 국합창대제전에 연속 4년 초청되어 서울 무대에서 화음을 펼쳤다. 이 같은 행보는 중소도시 시립 합창단으로선 분명 힘겨운 호흡이었으나, 원주시립은 지휘자의 탁월한 리허설 테크닉에 힘입어 그 여정을 무리 없이 이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지휘자 정남규 개인으로선 2010년 국립합창단과 서울 시합창단을 객원 지휘하는 영광을 부여 받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지방도시 무명의 합창단을 조련하여 호평 받은 그의 지도력은 합당한 것이며, 그 카리스마의 근원은 무엇인가. 해답은 간결하다. 그는 ‘국내 정상급’이라는 표현조차 항상 강한 어 조로 부인한다. 그의 겸손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 해답의 키 워드가 바로 '겸손함'이다. 정남규 는 언제나 겸손함으로 그의 음악을 결말(結末) 진다.
항상 2% 부족한 합창단이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언제나 2% 부족하다고 폄하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폄하된 부분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준비한다. 그가 상임 지휘자로서 자신을 낮추려는 자 세는 2008년부터 시작된 국내 유명지휘자 초청 연주회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 동안 이병직, 구천, 박신화, 오세종, 이상길, 이기선, 민인기의 객원지휘로 단원들에게 합창세계 의 다양함을 인식시켰고, 자신의 합창음악에 대한 비교평가를 단원들에게 과감하게 동기부여 하였 다. 자아 존중감이 높은 지휘자로선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상임지휘자 자신의 음 악적 위상과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크게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남규 는 주저 없이 강행하였다. 그 결과 톤 컬러가 다양해 졌다. 단원들의 적응력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성됐다. 지휘자가 기대했던 결과 이상을 수확하였다. 바로 이런 정남규의 합창경영이 지혜로운 지휘자가 보여주는 진정한 리더십이고, 그러기에 단원 들이 그를 가리켜 국내 합창음악계의 ‘지장(智將)’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함 없는 것이다. (음악저널. 2012년 1월호)
|
출처: 음악칼럼니스트 이영진의 소리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