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캇트』작가의 작품.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장군, 『레오폴드 요제프 폰 다운』 일대기.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뱃전을 오가며 먹이를 조르는 갈매기들만 아니면 좀 더 잘 수도 있었으련만... 오늘은 깨면서도 불쾌하지 않다. 깰 때마다 두통에 시달리던 터라 이런 소소한 행운도 반갑다. 아드리아 해안을 왕복하는 작은 화물선 레나 호는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시원스레 펼쳐진 해안선을 따라 질주 중이다.
돛그늘 아래 화물더미에 누워 낮잠에 빠졌던 참이다. 삐걱대는 마찰음과 돛이 잔뜩 부푸는 소리, 밧줄이 여기저기서 쓸리는 소리는 마른 빨래 짜는 소리같다. 누군가가 부스럭대며 물수건을 건넸다. “도련님, 저녁 드실 시간입니다. 먼저 얼굴 닦으셔요. 눈곱도 꼼꼼히 떼시고요.“ 머리가 희끗한 팡틴 상사가 무표정하게 냄비를 닦고 있었다. 승객이지만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물을 아끼기 위해 설거지는 바닷물로 하고 헹굼만 살짝 식수로 닦아낸 다음 주머니칼로 재료를 다듬고 섞는 팡틴 상사의 솜씨는 익숙할 뿐만아니라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성 들인만큼 맛있어지는 법이니까.” 요리를 배만 채우는 게 아닌 종교의식쯤으로 여긴다. 갓 마흔인 그는 아일랜드,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북부,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등의 복잡한 혈통을 지닌 자로 우리 가문에 2백 년 동안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온 충복이다. 그의 복잡다단한 혈통은 우리 가문이 어디서 싸움을 치렀으며 어느 전장을 전전했는지 밝히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그의 선조는 적의 여자를 납치해 자손을 보았고 오스트리아 본가에 데려와 길렀다. 대를 이어 꾸준히... 팡틴 상사의 어머니는 프랑스 남부 이름없는 시골 출신이다. 그건 우리 가문이 40년 전 프랑스 어딘가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얘긴데 실은 이탈리아 전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티롤 골짜기에 사는 이름 모를 프랑스 병사의 미망인을 납치해 그를 낳았다. 팡틴은 그의 외할머니 이름이다. 납치된 미망인은 이제 빈의 저택에서 상사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를 애지중지 기르고 있다. 팡틴 상사의 그을린 얼굴에는 이마와 콧등에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그건 자주 전장에 나갔던 탓이다. 전쟁은 늙게 하고 그을리게 하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철저히 마모시킨다. 그리고 곧잘 상처를 입어 죽어간다. 그런 면에서 상사는 운이 좋았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오면서도 항상 남의 일처럼 무사했던 그는 입버릇처럼 얼굴이 적갈색으로 그을린 것이 타고난 건강을 상징한다고 떠들곤 했다. 전장에서 마주치는 운 나쁜 자들의 얼굴은 생선 뱃대기처럼 허옇다면서... 그래서 그는 흰색 오스트리아 군복보다 청록색 크로아티아 유격병 복장을 즐겨 입었다. 원래는 안 되지만 그는 백작가의 가병이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상사는 스튜 냄비를 들고 고물 쪽의 주방으로 갔다. 화덕을 빌리는 대가로 일부는 사라지겠지만 나머지는 배를 채워줄 것이 다. 오이 초절임을 덜어내고 딱딱한 흑빵을 주머니 칼로 잘라 식사준비를 마친 상사는 바닥에 천을 깔아 식탁을 차렸다. 팡틴 상사는 주방으로 가서 스튜 냄비를 받아왔다. 생각보다 양이 많이 비자 대뜸 욕지거리를 내뱉은 상사는 주방장과 거친 멱살잡이를 벌이다 무사히 돌아왔다. 벨트에는 주방에서 훔쳐온 훈제청어 한 마리가 비스듬히 끼워져있다. 마치 권총을 닮아 나는 속으로 큭큭 웃었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놈들이라니까요. 언제 어디서도 얕잡아 보일 짓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여지를 두면 곧바로 기어오르니까요. 특히 천박한 선원 놈들은 이교도 해적과 다를 게 없어 겉으론 웃지만 언제라도 우릴 바다에 쳐넣고 시치미를 뚝 뗄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그는 털썩 주저앉아 청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런 살점을 발라내 내 접시에 담고 자신은 뼈째 머리부터 꼬리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나름 진수성찬이다. 배에서 이보다 더 나은 식사를 기대할 수는 없다. 물론 선장은 더 나은 걸 먹겠지만 난 육지가 좋다. 평생 배 안에 갇혀 사는 선장이니만큼 만찬 정도는 그에게 양보해도 좋다는 마음이다. 훈제향이 나는 청어를 입에 넣고 습관처럼 우물우물 씹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에스터에서 출항한지 벌써 닷새인가. 지겹네.” 트리에스터는 지중해에 열린 신성로마제국에서 하나뿐이자 가장 큰 항구다. 번성한 만큼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은 항구도시. 마음같아선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군인의 신분인 나는 전쟁에 참가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이미 연대에 부관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분께선 아들 둘을 전쟁터에서 잃었음에도 마지막 남은 아들인 나까지도 마저 소모하고픈 모양이다. “도련님은 천수를 누릴 겁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내 마음 속을 읽은 것처럼 팡틴 상사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타로 카드로 점이라도 쳤나?”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의 외할머니는 프랑스 산골마을에서 유명한 마녀이자 점쟁이였다고 했다. 가업이었고 몇 대를 이어서 대물림해온 삶이었다. 그것이 하늘이 내려준 운명인 줄 알았다고 했다. 물론 동네에선 불길한 존재라며 핍박과 천대를 밨았다. 그런 보이지 않는 무시와 천대에 못 이긴 그의 어머니는 도망치 듯 마을을 떠나 프랑스 병사와 결혼 후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까지 흘러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상사에게도 점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맞았다. 할머니의 재능이 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해질녘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노을이 내려앉는 방향에서 따뜻한 미풍이 불어오자 상사는 한껏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도련님이 태어날 때 저는 마구간에서 여물을 주고 있었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말들이 전부 잠잠하지 뭡니까. 평소 같았으면 난리법석을 떨었을 요란한 녀석들이요. 그래서 곧장 밖으로 뛰쳐나와 하늘의 별자리를 봤죠. 놀랍게도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그게 내 수명하고 무슨 상관이지?” “도련님은 결국 장군이 되실 운명이란 뜻이죠. 다른 이의 수명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겁니다. 그건 운명이고 세찬 바람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죠.”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남의 목숨을 빼앗아 연명하는 건 신께서 금지한 일이야. 또 그렇게 구차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신께서 살생을 금하셨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향하는 이탈리아의 교황성하도요. 도련님은 언젠가 주인님의 작위를 물려받겠죠. 그리고 사방이 포위된 신성로마제국을 위기에서 구해낼 구국의 명장이 되실겁니다. 그것이 신께서 정해놓은 도련님의 운명인거죠.” “평생 그분을 찬양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도 모자라단 말인가?” “그분을 찬양하는 사제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왕국을 지켜낼 명장은 흔치않지요. 신께서는 어려운 임무를 도련님께 부여한 겁니다.” “그렇다면 정녕 잔인하신 분이로군. 두 형님을 그리도 일찍 데려가시더니 이젠 나까지 부려먹으려 하시다니.” 어느새 짙게 내려앉은 어둠 저편에서 상상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파도가 잔잔해진 탓에 한층 뚜렷하게 들려왔다. “신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죠. 주로 천국에서요.” “입조심해. 신성모독이야.”
나는 주위에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팡틴 상사가 한 말이 내 처진 의욕을 북돋아주고자 한 공치사임은 잘 알고 있다. 구국의 명장이니 하는 허튼 꿈 따위는 꾸지 않는다. 딱히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닐 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다. 내가 도망가지 않도록 구슬리고 싶었을 뿐이리라. 열흘 전, 아버지 명령을 받고 찾아온 그와 함께 길을 나섰었다. 이를테면 수송하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마지막 남은 아들인 나라는 화물을. 과연 국가를 위해 집안의 멸문까지 각오해야 하는 걸까? 우리 사후 백작가문을 이어받을 친척조차 없는데? 주기적으로 빈을 습격한 천연두는 참으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천연두였다. 그 병마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체력이 없는 자는 황제의 아이든 농부의 아이든 싹 다 모아서 저승으로 데려갔다. 그나저나 합스부르크가 이럴 만큼 대단한 놈들인가. 고작해야 스위스 산중에 몰려살던 원숭이 놈들. 그 빌어먹을 주걱턱들에게 이리 열렬히 충성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기운이 쇠한 이 낡은 제국은 언제든지 하룻밤 새 멸망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잠결에 그 소식을 전해 듣더라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언제라도 당연히 전해질 법한 소식이니까. 그리고 난 아주 기쁠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이 번잡한 제국은 수백 년간 강철같은 통치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누더기 지도를 봉합하는 접착제나 우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은 독일의 군주들로부터 존경과 복종보다 도전과 권위타파의 대상이 된 마당이다. 언젠가는 돼지조차 거부할 비웃음꺼리로 전락하리라. 내일 아침이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다. 기대보다는 지겨움이 앞선다. 걸음마 시절부터 스페인이나 오스만 제국과의 접경지역에서 원치 않는 병영생활을 해온 나는 대다수가 용병으로 구성된 그 삭막한 분위기가 정말 싫다. “고작 반년의 자유였던가.‘ 아쉬운 한숨이 이어졌다. 현재 벌어지는 시칠리아 전쟁, 오스트리아, 영국, 네델란드, 프랑스 4개국이 스페인 왕국에 맞선 동맹 치고는 작은 규모지만 여하튼 전쟁은 전쟁이다. 과연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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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걱 턱 왕가. 잘 될 턱이 있나?
칼 대제가 스페인 갔더니 한 의전관이 오더니 " 전하 입을 다무소서. 스페인의 파리들은 하도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거 재밋는 농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