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여 살고 있는 것에 충고를 하자,
헤로데는 그를 감옥에 가둔다.
요한은 헤로디아의 간계로 헤로데의 생일 잔치의 제물이 되어 희생된다.
권력의 비윤리와 폭력성,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악에 대한 적극적인 동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르 6,17-29)
누구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상관이거나 손윗사람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위계를 가지고 있어서
올바른 토론 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하 관계의 분위기에서는 중요한 사안들이 일방적으로 결정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책임자 주변에는 충언을 해 줄 사람이 드물고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나 치는 간사한 무리들이 자리를 잡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의인 요한이 희생된 모습을 보면
책임자와 그 주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헤로데 임금과
그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고관들과 무관들,
갈릴래아의 유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희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간악한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잘못된 요청에 대하여 그 누구도
거부를 하거나 임금에게 올바르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관과 무관, 갈릴래아의 유지들이
어떻게 그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침묵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 피해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의인의 죽음이라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무릇 교회 안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정권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그 주변의 인물도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바르게 식별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고,
자신 또한 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이 땅의 정신세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악은 늘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어둠의 세력을 넓혀 나갑니다.
사회적으로 책임이 큰 사람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저버린 양심만큼 사회는 병들어 갑니다.
그 사람들이 져야 할 죄 또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을까?
자기가 듣기 싫은 바른말을 했다고 죽일 수 있을까?
그것도 자기와 직접 상관이 없는 바른말 아닌가?
살로메는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요한의 목을 청한다.
왕국의 반을 주겠다는 헤로데의 제안도 무시하고 그의 목을 청한다.
그렇다면 왕국보다도 요한이 더 소중하단 말인가?
그렇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왕국보다 요한이 소중했다.
살로메는 요한을 사랑했고, 그를 열망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녀를 거부했다.
그래서 요한은 죽은 것이다.
구에르치노(1591-1666, 이탈리아)가 그린
<감옥에 갇힌 성 요한을 방문한 살로메> 란 그림이 모든 의문을 해결해 준다.
요한은 족쇄를 차고, 허름한 모포 한 장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린 채 작은 방 안에 갇혀 있다.
살로메는 세련된 옷을 입고 감옥에 찾아와
안타까운 듯이 손으로 창살을 움켜쥐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감옥에 있는 사람인가?
육체적으로는 요한이 감옥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살로메가 감옥에 있는 것 아닌가?
편안하게 늘어진 요한의 손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창살을 움켜진 살로메의 손은 다급해 보인다.
요한이 그녀를 거부하자,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요한의 목을 왕국의 반과 바꾼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보라. 목이 잘린 사람이 누구인가?
요한인가? 살로메인가?
구에르치노는 그녀의 머리만 볼 수 있게 그려
목이 잘린 사람은 살로메임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벽이나 창살보다 더 지독하게 우리를 가두는 감옥은 바로 우리의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