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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는 글쓰기
1. 아마추어의 사랑
아마추어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프로일 것이다. 프로는 프로페셔널의 준말이다. 모두 외래어다. 우리말은 무엇일까? 쉽지 않다.
아마추어 하면 떠오르는 말이 서툴다, 좋아한다, 순수하다 그리고 동호인, 취미활동가, 프로를 지망하는 연습생 등의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프로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잘 한다, 빼어나다 그리고 전문가, 직업인 등이다. 아마추어는 생계와 관계가 없는 순수한 취미의 뜻이 강하고, 프로는 직업과 관계된 전문성의 뜻이 강하다.
어원을 살펴보면 아마추어는 사랑(amor)에 기원하고, 프로는 공표(profession)에 기원한다. 밖으로 말하는 행위인 공표는 그 안에 사랑의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 없는 공표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표에는 약속이 담겨있고, 공표된 말을 지킬 의무가 따른다. 아마추어에게 의무는 없다. 프로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사랑과 약속의 의무. 그런 의미에서 프로도 아마추어의 출발과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아마와 프로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그것은 능력이다. 능력에 따른 결과 유무도 아마와 프로를 나누는 기준이다. 아마와 프로에게 능력과 결과의 차이는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프로가 되고 싶어 한다. 현실에서 능력의 차이는 차별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프로는 능력으로서의 프로에서 직업으로서의 전문가를 의미한다. 훌륭한 전문가라면 사회적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들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이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기여 때문이 아니라, 전문가가 누릴 수 있는 지위와 권력 때문이다. 여기서 계급과 불평등이 만들어진다. 전문가는 사랑을 유지하며 약속을 지켜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의 지위와 권력은 계급사회의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한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직업의 분업화와 전문화 결과 계급사회가 만들어졌다. 전문가의 지배 명분은 능력의 우월성이다. 능력주의라는 능력의 이데올로기가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급된다. 공표된 말이 지녀야할 진실에의 의무를 배반한 채 지배와 차별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과연 전문가가 지배하는 세상이 옳은가 우리가 살아야할 세상인가 묻고 싶다.
학교를 보자. 학교에 가는 이유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어떤 능력인가? 지식을 쌓아 시험을 통과하고 상급 명문학교에 진학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학교인가?
사법고시에 패스해 판검사 되는 것이 반백년 학교의 목표였다. 근대화 기간 고시패스가 신분의 계층상승의 가장 빠른 수단이라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완료된 후 계급이 고정화되고 부가 세습되면서 의사가 새롭게 상층계급의 자격증처럼 인식되고 있다. 두 직업 모두 타인의 생사여탈권에 관여하는 직업이지만, 의사의 전문성이 더 획득하기 어렵고 독점이기 때문이다. 이들 전문가들은 사회적 의무와 책임 대신, 기득권을 능력의 차이로 누리는 당연한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육도 그렇지만 사회 자체가 능력주의로 심하게 왜곡된 결과다. 한국사회에 시험과 스펙, 자격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능력의 우월을 증명하는 객관적 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우월이 권력의 보증서가 되고 차별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세습계급사회인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르는 사회의 모든 영역엔 지배의 권력과 차별이 존재한다. 내가 전문가를 비판하고 아마추어를 옹호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필수 요소가 능력의 차별이 아니라 능력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능력의 평등은 인간의 평등을 의미한다. 아이와 어른, 학생과 교사, 주인과 손님, 등 모두가 다르다. 능력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어른이 아이를 지배하고, 교사가 학생에게 명령하고, 손님이 주인을 부리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민주주의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공동체의 주인이고, 그들이 주권자로서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똑똑한 사람, 힘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인간의 평등한 지성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능력의 평등 개념이다.
능력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다른 말로 가능성이다. 지금 현재는 그것을 할 수 없어도 인간인 이상 노력을 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권자로서 평등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주체성 있는 존재여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부림을 받거나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이 능력이 길러지진 않는다. 공동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공동체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며 배운다. 공동체의 공통성을 기르고 확충해가는 것은 교육의 핵심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쓰고, 타인에 공감하고 협력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고 지키는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생계의 위협을 받지 말고, 차별 받지 않고, 교육을 받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능력의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 근거가 되기도 한다. 능력의 평등 위에 인간은 다양한 능력을 길러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능력의 차이는 공동체를 위한 축복이지 지배 근거가 되지 못한다. 능력의 차이가 독점과 차별로 변하지 않고, 다양성과 풍요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사회는 권력자과 전문가를 선택하고 교체할 권리를 사회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용이하지 않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계급사회라는 뜻이다.
내가 여기서 아마추어주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능력의 평등과 계급의 평등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 이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추어는 절대적이지만 프로는 상대적이다. 프로가 아마추어를 결정하는 사회는 계급사회를 뜻한다. 오히려 아마추어의 평등한 시민이 프로의 전문가를 고용하고 파면할 수 있는 존재다. 프로가 아마추어의 정신을 잃고 프로의 특권을 주장한다면 그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일 뿐이다.
아마추어가 지닌 사랑과 순수성은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정신이다.
2. 발견하는 삶
발견은 기쁨이다. 발견의 기쁨을 통해 존재는 세상과 연결되고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얻게 되고 활기 있게 살 수 있다. 삶을 기대하는 것만큼 큰 동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발견이야말로 도파민을 분출하게 하는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발견→발견→발견→발견→발견으로 이어지는 삶은 얼마나 풍요롭겠는가? 진짜 공부는 이런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발견한 자는 세상을 의욕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랭보는 시인은 견자(見者)라고 선언하였고, 블레이크는 ‘순수의 노래’에서 ‘모래알 속에 우주를 본다’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발견의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림과 설렘이 함께 한다. 발견은 주체와 세계의 1:1 만남이다.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발견을 강제할 수 없다. 그보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발견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보살피고 응원하는 게 필요하다.
유년기 최초로 세상을 발견했던 원체험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나뭇잎 물방울을 보고 거기서 세상을 발견하고 감동을 느낀 뒤 존재의 변화를 겪었다. 무엇인가 유심히 보는 습관 때문에 교사들에게 혼나고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오에 소년이 꿋꿋이 자기의 관심을 유지해간 모습은 놀랍다. 역시 싹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카렌 암스트롱의 ‘붓다’에 대해 쓴 책에서 붓다의 유년기 원체험을 읽은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 농사철이 시작되어 왕이 직접 백성과 함께 밭갈이를 하는 행사가 있었나보다. 아주 어린 싯달타는 바구니에 담겨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다가 깼다. 그리고 밭에서 땀을 흘리며 소에 몰아 밭을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흙 속에 있다 밖으로 꺼내진 지렁이의 꿈틀대는 모습과 그것을 잡아먹기 위해 날아와 먹이활동을 하는 새들을 보았다. 싯달타는 깨달은 후 유년기를 회상하며 그때 처음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 세상의 슬픔을 알았고 연민을 깨달았다고 했다. 읽으며 부처의 진짜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들 인생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세상을 발견하는 원체험이 있다.
5~6살 때인지 모르겠다. 어릴 때 작은형과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 놀다가 우연히 뒷곁 이끼밭을 보게 되었다. 초록의 깨끗한 밭에 우산이끼, 솔이끼 등 이끼들이 싱그럽게 자라있었는데, 내 눈에 그게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내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고 숲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쩜 이끼가 나무같이 보이고 이끼밭이 거대한 숲같이 보일까? 작지만 웅장한 이끼밭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나도 수많은 아이들처럼 많은 보물들을 만났다. 나사, 못, 돌멩이, 동물뼈, 단추 등 온갖 것들이 신기한 보물이고 수집품 대상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모으던 우표수집도 빼놓을 수 없다. 텔레비전에서 본 ‘프란다스의 개’는 모며 슬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던 것도 기억난다. ‘미래소년 코난’이 비행정 위를 달리고 구름 위를 달려갈 때 얼마나 통쾌했는지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 쌍문동 정의여고로 이사하면서 나는 헌책방을 만났다. 정말 작은 헌책방이었는데 거기서 몇 백원 하는 탐정물을 사보다가 ‘오즈의 마법사’를 만났다. 너무 재밌어서 시리즈 중 한권이 꽂히면 바로 사서 읽어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집에는 어머님이 사주신 한국위인전집, 세계위인전집, 세계문학전집, 소년소녀동화전집이 있었지만 몇 권 읽지도 않았다. 대신 헌책방에 드나들며 내 눈에 재밌는 책을 사서 읽었다. 소설의 재미는 역시 헌책방에 많았던 크로닌의 책들로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재미를 느낀 후 다양한 장르와 분야로 읽기가 확대되었고, 고1,2학년 때는 정말 책에 대한 갈증이 심해 항상 손과 주머니에 책을 들고 다녔다.
책에는 현실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고, 나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현실에서는 받지 못한 위로를 나는 책에서 받았다. 그렇게 되니 학교교육이 오히려 너무나 괴로웠다. 교과서는 아무런 감동이 없었고, 시험은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대학을 가기위해 공부를 해야 했다. 고3은 너무 예민해져 신경쇄약인지 밤엔 불을 끄고 자면 가위에 눌려 불을 켜고 잤고, 편두통에 시달렸다. 공부에 대한 부담 때문에 책은 읽지 못했지만 오히려 일기를 2~3시간씩 쓰는 게 습관이 되었다. 쓰기가 위기 속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안에는 나만의 발견→발견→발견→발견→발견의 이어짐이 있고, 이것이 내 공부고,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된 이후에도 나는 남에게서 보석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 한다. 국어교사로서 교과서는 가급적 쓰지 않고 아이들이 시를 쓰고, 수필을 쓰도록 해 그것으로 수업을 많이 진행했다. 수업을 하며 무심히 쓴 아이들 시에서도 한 줄의 보석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럼 아이들 스스로 놀란다. 늘 도외시되고 하찮게 여겼던 자신의 것들이 실은 비교할 수 없는 나말의 발견이고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응원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겐 교육이었다.
공부와 시험공부를 엄격히 분리했다. 공부는 이렇게 호기심을 찾아 계속 발견하고 확장해가는 것이라면, 시험공부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 직장을 잡기 위해서 시험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공부의 순수한 기쁨과 참맛을 모른 채 시험공부만 해 성공한 전문인이 된 인생에 대해서는 많이 걱정스럽다.
3. 글쓰기의 전략
말콤 글레드웰의 <아웃라이어>에는 1만 시간의 법칙이 나온다. 세상의 각 분야에서 정상의 위치에 선 사람들을 연구하니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1만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피아노 등 악기 연주자의 경우는 그것을 측정하기 더 쉽다. 문학이나 학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천재는 없다. 진짜 재능은 좋아하는 것을 오래할 수 있는 힘인 사랑과 열정이다.
아이들이 시를 가지고 와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는지 묻는 경우가 있었다. 그럼 얘기한다. 시집 100권을 먼저 읽고, 우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좋은 작품들을 많이 경험하라고. 물론 시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에도 나름의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 남의 좋은 시를 읽는 눈이 내 시를 읽는 눈에도 필요하기도 하다. 둔재인 나의 경우도 100권을 읽으며 시의 맛을 좀 알게 되었고, 500권정도 읽으니 나름의 시를 보는 눈과 기준이 만들어진 느낌이 들었다. 빠른 사람도 있겠지만 머리가 나쁘고 집중도 못하는 나같은 사람도 그러니 보통사람도 당연하지 않을까?
읽기와 쓰기가 습관이 된다면 남은 것은 시간문제다. 빠르면 3년, 늦어도 10년, 좀 더 늦으면 20년, 좀 더 더 늦으면 30년 지나면 된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하면 된다.
오에 겐자부로가 매일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8시간 글을 쓰고, 이후에는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오에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주기로 주제를 정해 외국의 문학인을 모든 것-비평서까지 포함해서- 읽으며 자신의 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세계적 대가도 그럴 진데 나 같은 평범하지도 못한 둔재가 무엇을 불평하겠는가?
처음 얘기한 톨스토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다만 노력에 들인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능력의 평등을 믿고, 나아가 계급의 평등도 믿고 아마추어로서 세상을 발견하고, 발견한 보물들을 나누는 삶의 기쁨을 실천해보는 것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