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5장 1 - 8절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1959년 9월 27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 주일날이었기 때문에 주일 아침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흐루시초프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은 주일인데 같이 교회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물론 흐루시초프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미안합니다. 그러면 한 시간 반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와서 흐루시초프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예배드리고 오는 동안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그랬더니 소련수상이 대답하기를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혼자 두고 예배를 드린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했습니다.” 이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을 통해 예배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위기에 처한 야곱에게 제일 먼저 명령하신 것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말로 표현을 하면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배에 대해서 명령을 하시고 또 야곱이 순종을 했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나게 되냐면 5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사면 고을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러 떠나는 야곱과 그 가족들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서 야곱을 추격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능력이고 권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실한 예배자라면 우리도 이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떨고, 놀라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일컫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망신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자는 절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늘 공적 예배만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드리는 삶의 예배 또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예배를 통해 이런 은혜를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삶의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사람이 되려면 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야곱처럼 우상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명예를 의지하고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우상 숭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의 예배는 헛된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영혼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같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때가 묻지 않도록 영적인 정결함을 항상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연약하고 부족하여서 세상의 때가 묻었다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깨끗함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 이런 과정 없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또 한 가지는 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의복을 바꿔 입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입을 입혀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악의 구렁텅이에서 살던 그 옷을 그대도 입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절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내어 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결한 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야지 여전히 세상의 옷을 입고 산다면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일천번제가 되어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누가 추격하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위가 되시고 반석이 되시고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를 쫓아올 수도 없고 우리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삶의 예배를 통해 이런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