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산 김현 형님을 추모하며
며칠 전 형님을 뵈올 때 일원상서원문 책을 발간하여 크게 보은 했다고 격려하시더니 갑자기 정토님에게 미안하다는 최후의 말씀을 남기시고 홀연히 열반 길로 떠나셨습니다.
정토님과 가족 이웃 동지님들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갑자기 떠나셨나요?
형님의 살아온 삶은 오늘 전북시민사회 추모식에서 더욱 성스럽게 드러났습니다.
지견이 열리지 않으면 그 사람을 모른다 했는데 함께 반평 생을 살면서도 형님의 참 모습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형님은 교단의 직책보다 시민사회 직함이 더 많으셨네요. 반핵평화운동연합 공동의장.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의장. 자주평화 통일 민족회의 공동의장.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연대회의 공동대표. 익산생활문화원 이사장. 민주개혁 국민연합 공동대표. 참여연대 자문위원.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김대중 전 대통령 시민추모위원회 고문. 남이랑 북이랑 고문. 익산참여연대 고문. 교육문화중심 아이행복 고문 등 저도 모르는 수많은 직책을 수행 하셨군요.
오늘 추모식 때 천주교 박창신 신부. 기독교 전병생, 한상열 목사 추모사 정우식 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 원장의 조사, 안미남 교육문화중심 아이행복 이사가 형님의 시 ‘평화는 오리 평화는 오리’ 시낭송, 조객의 헌화 순으로 진행된 추모식은 과산님을 다시 뵙게 하는 성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과산님을 너무 모르고 살았으며 대해 왔습니다. 동창생인 제가 이렇게 까마게 모르고 살았는데 다른 사람은 오직 했겠습니까?
형님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주미문화원 방화로 쫒기는 사람은 안아 주었다가 옥고를 치룬 아픈 기역입니다.
그때는 교단에서도 염려했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광주5·18 민주화 운동이 자리 매김 되자 형님은 교단의 체면을 세워주셨고 성직자로서 쫓기는 어려운 사람을 품어 앉는 용기와 민주화를 갈망하는 열정을 몸으로 보이셨습니다.
영산 성지에서 성지장엄사업과 성지사업회 직무를 13년 동안 했다고 오늘 들었습니다.
그러시면서 가장 걱정하신 것은 영광의 핵발전소 문제를 고심하면서 핵없는 세상을 염원했지요.
핵발전소의 대안으로 전기절약운동 물자절약운동을 노래하며 풍력발전 지열 태양열을 대안으로 제시 하시더니 지금 국가 정책이 그런 방향으로 전환되고 100주년 사업계획에도 태양열 시설 100개 교당을 추진하는 기연이 되셨습니다.
환경보호운동에 앞장 스셨습니다.
생태계 보존 문제나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 때 삼보일 배를 함세웅 신부 불교 지선 스님 원불교 김경일 교무가 동참 할 때 뒷바라지를 하시며 저도 함께 하자는 제안으로 몇 차례 따라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들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지요. 기독교 김상근 목사, 천주교 함세웅 신부, 불교 지선 스님, 원불교 김현 교무 이러게 이야기 되었지요.
조국의 평화통일 문제에 앞장 스셨습니다.
시민단체 직함을 보면 평화통일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의장, 자주평화 통일 민족회의 공동의장을 지내셨고 원불교 하면 형님이나 거론 되었지요.
전주 고백교회 한상열 목사와는 교분이 깊으셔서 오늘 추모식 때도 과산님을 스승님으로 추모 하며 평화의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아나바다 운동을 교도들과 함께 실천하셨습니다.
서울시장인 박원순님과 같이 아름다운 가게를 익산에 유치하시며 활동하시고 이리교구장 시절 자원절약을 위해 아껴 쓰고 나눠 쓰고 서로 바꿔 쓰고 버릴 것도 다시 살려 쓰는 교단 초창기 창립정신 운동을 실천 하셨습니다.
영산성지 대안학교를 명문학교로 만드셨습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우리가 돌보지 않아도 되지만 적응을 못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교육시켜 사회의 일원을 만드는데 앞장 스셨습니다. 성자적 심법이었습니다.
일원가족을 만드셨습니다.
장남 영빈이를 전무출신 시키시고 형제 들을 모두 원불교인 으로 만드셨습니다.
형님은 차남인데도 어머님을 모시는 효성을 보이셨고 정토님이 하숙이나 청국장 판매로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데도 가까운 동지들을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는 동지애가 있으셨습니다.
과산님을 생각하면 전지가위를 들고 총부 나무들을 전지 하거나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총부 소나무 심는 것을 감독하는 모습이 선연합니다.
제 부모님 열 반시 화장지 까지 오시어 위로해 주신 정이 많은 형님, 겸손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형님이셨고 교단의 어려운 일이 생겨 찾아가면 시원스럽게 상담을 해주셨습니다.
총부 앞 길 건너부터 대학 정문까지 각종 시민 단체에서 과산 김현 교무님의 죽음을 애도 하고 정신을 계승하자는 플래카드가 많이도 걸려있네요
교단의 장례 중 처음 있는 일 같습니다.
형님 71세의 나이는 지금은 청춘입니다. 빨리 몸 바꿔 오시어 제생의세의 못 다한 사업을 펼쳐주시고 형님이 염원하신 평화통일의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원기100년 6. 21 서광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