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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김순애(金淳愛) 선생
(1889. 5. 12∼1976. 5. 17)
1919.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상해 대한적십자회 이사
1926.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참여
1930. 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
1943.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 주석
오늘 우리 정세는 변하였다. 지금 우리 민족해방운동은 공전의 혁명고조를 타고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었다. 30여 개 동맹국이 모두 우리의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다. 정히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임시정부 소재지에 있는 혁명 여성들은 당파별이나 사상별을 묻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함으로써 국내와 세계 만방에 산재한 우리 일천 오백만 애국여성의 총단결의 제일성이며, 삼천만 대중이 쇠와 같이 뭉쳐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 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에 제일보를 삼으려 한다.
- 선생이 주도한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 선언문 중에서 (1943. 2) -
선생은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향리에서 송천학교를 마친 선생은 곧 상경하여 새문안교회를 다니면서 정신(貞信)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은 민족계몽을 위해 교육 현장에 투신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당시에는 부산(釜山) 초량소학교(草梁小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때 선생은 일제의 한국역사 교육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일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근무하고 있던 선생의 친오빠 김필순(金弼淳)도 이때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1912년 같이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망명지 남경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
이후 선생은 1915년 9월 만주 통화현에서 남경(南京)으로 옮겨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1월 여기에서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였다. 김규식은 선생의 오빠인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또 같은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기 때문에 김규식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활동하던 1906년경에도 혼담이 오고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생이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기 때문에 혼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후 김규식은 조순환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하였는데, 그녀가 1917년 지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선생과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이 결혼은 선생의 정신여학교 동창으로 학창 시절부터 가까웠던 김규식의 부인이 임종 전에 “꼭 김순애와 결혼하라”고 부탁하여 성사되었다고 하니, 결국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이었고 망명 독립운동가로서의 동지적 결합이었다.
결혼 후, 곧 선생은 상해(上海)로 이주하여 1918년 11월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丙浩)·김철(金澈)·조소앙(趙素昻)·조동호(趙東祜)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여 이사(理事)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부군인 김규식과 더불어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을 쌓아 갔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에서는 미국 버어지니아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선생을 비롯한 밀사를 국내와 만주 지역에 밀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국내와 만주에서 일시에 거족적인 민족봉기를 일으켜 우리 민족 전체가 진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며 민족독립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의 한국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한국대표의 독립 외교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민족대립을 달성하려는 구상의 실현이었다.
이같은 계획에 따라 신한청년당에서는 선생을 비롯한 선우혁(鮮于爀)·김철·서병호·백남규(白南圭) 등을 국내에 밀파하여 독립운동 봉기를 종용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민족대표의 활동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로, 조소앙·장덕수(張德秀)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국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끌어내도록 하였다. 국내로 밀파된 선생은 1919년 2월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후 부산에서 백신영(白信永), 대구에서 김마리아, 서울에서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한국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전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런데 당시 선생은 3·1운동을 추진하는데 깊숙히 관여하고 있던 함태영으로부터 이미 국내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선생은 국내의 3·1운동에 동참하려 하였으나, 함태영이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에 밀려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일을 눈앞에 두고 재차 중국 만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전개
1919년 2월 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고 평양(平壤)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선생은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필순을 찾아 갔다. 여기에서 선생은 한인동포들을 규합하여 국내의 3·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 추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일본영사관에 감금되기도 하였지만, 중국 관원의 호의와 알선으로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로 다시 귀환한 선생은 1919년 7월 이화숙(李華淑)·이선실(李善實)·강천복(姜千福)·박인선(朴仁善)·오의순(吳義順)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선생이 회장으로 주도한 대한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 등 정신여학교 출신 인사들이 비밀리에 서울에서 결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평양(平壤)에서 김경희(金敬喜) 등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등 국내외의 애국부인회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이들 단체들과 연락·협력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고, 해외 각지에 한국지도와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보급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독립전쟁을 대비하여 간호원 양성
이와 함께 7월 13일 이희경(李喜儆)·안창호(安昌浩)·안정근(安定根) 등의 발의로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戰傷兵)의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상해에서 복구되자, 선생은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대한적십자회의 사검(査檢)·이사(理事) 등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그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비밀리에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여 상호 연락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소위 ‘간도출병(間島出兵)’ 이후 일본군이 저지른 재만 한인동포에 대한 학살 만행을 세계 각국의 적십자회에 알려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폄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혀 갔다. 이밖에도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적십자총회에 이관용(李灌鎔)을 대표로 파견하여 창립 보고와 함께 참가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저지하는 일본 정부와 일본적십자회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그 내용을 국제적십자총회의 기관지에 게재하는 등 대한적십자회의 독립적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대한적십자회의 활동 뒤에는 항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노력이 배어 있었다.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 전개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으면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하는 취지 아래 1920년 9월부터 상해의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을 중심으로 해외 한인교육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이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여운홍(呂運弘)이 교장으로 있던 상해 한인동포 자제의 민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유지비를 지원하고, 교사 신축비를 모금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달 30일 열린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총회에서 선생이 18인 의원 가운데 한 분으로 뽑힌 것도, 거류민 아동의 민족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 기초를 확립한 공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지·후원활동과 함께 교민 보호와 아동교육의 일까지 맡게 되었다.
이후 파리강화회의·국제연맹회의·태평양회의 등 잇따른 국제회의에서의 외교 독립운동의 실패로 침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념과 방략상의 갈등으로 핵심 요인들이 탈퇴하여 왜소화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다. 선생 또한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그 최고 통할 지도기관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더니,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그 독립운동은 더욱 위축되어 갔다.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들의 옷세탁도 맡아하고, 삯바느질도 하고, 하숙도 치고, 와이셔츠 공장도 경영하면서 부군(夫君)의 독립운동은 물론 임시정부의 명맥을 지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이 시기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선생은 1926년 7월 안창호·송병조(宋秉祚)·김보연(金甫淵)·조상섭(趙尙燮)·박창세(朴昌世)·엄항섭(嚴恒燮) 등이 조직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벌여 갔다. 그리고 1930년 8월 선생은 상해에서 김윤경(金允經)·박영봉(朴英峰)·연충효(延忠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산하의 여성 독립운동단체로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이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3·1운동 기념일에는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탄 의거로 일제의 추적이 심화되자,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 1932)·진강(鎭江, 1935)·장사(長沙, 1937)·광동(廣東, 1938)·유주(柳州, 1938)·기강(1939) 등지를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국민당의 후원으로 1940년 9월 중경(重慶)으로 옮겨오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나서자 각각의 사회단체들도 주의와 정파를 초월하여 본격적으로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이같은 분위기 아래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부인들 또한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여 여성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갔다. 이 대회에서 선생은 주석,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김운택·연미당·강영파·권기옥·정정화 등이 각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 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행동강령을 선포한 뒤,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아울러 연합군측으로부터 인계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 발표
특히 미국과 영국 최고 지도자들이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고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세계 평화 문제를 논의한 과정에서 한국을 국제 감시 아래 두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43년 5월 10일 한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한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무정부주의연맹(無政府主義聯盟)·한국청년회(韓國靑年會) 등은 공동으로 재중국(在中國) 자유한국인대회(自由韓國人大會)를 개최하였다. 이때 선생은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광(金忠光)·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金奎光)·무정부주의연맹의 유월파(柳月波)·한국청년회의 한지성(韓志成)과 함께 주석단의 일원으로 추대되어 이 대회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 우리는 우리 민족의 영구한 생존발전과 전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기 위하여 우리 국가의 완전독립을 주장한다.
2. 전후 한국을 국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또 동맹국의 대(對)일본 작전방침에 해로우며, 또 루즈벨트·처칠 선언의 기본정신에도 배치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바이다.
3. 우리는 동맹국의 승리와 일구(日寇)의 멸망을 확실히 믿음으로 단결하고 노력하여 일본을 반대하는 대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4. 동맹 각국들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물자를 원조하고 우선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적 지위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
라고 하는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보내는 전문」을 성안 발송하여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을 요구하면서 우선적으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 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前途)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라고 하는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채택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일치 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여러 차례 절규하였는데, 이는 광복 이후의 외세 개입과 정치적 혼돈을 우려한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지적이고 주장이었다.
8·15 광복 이후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1차 환국 때, 김구·김규식·이시영(李始榮)·김상덕(金尙德)·엄항섭·유동열(柳東說) 등과 같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이후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