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중관사상의 창시자인 용수를 상찬하는 인정(人正), 그리고 용수의 『중론』 등을 올바른 대승의 이치라고 주장하는 법정(法正)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원래 의미에서 파사현정은 파사즉현정이 아닌 삼론종의 종파적인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오늘날처럼 파사현정이 파사즉현정으로 해석된 것은 『백론』, 「제10장 파공품(破空品)」이나 용수의 후기 저작으로 알려진 『회쟁론(廻諍論, Vigrahavyāvartanī)』에 걸쳐 등장하는 ‘나의 주장은 없다. 다만 그대의 주장을 논파할 뿐!’이라는 비판주의의 영향이다.
예를 들어, 『백론』, 「제10장 파공품」 6에 등장하는 ‘공(空)을 설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주장[執]이 없다.’는 제바의 언급이나 『회쟁론』 29번 게송에서 ‘만약 나에 의한 어떤 주장이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나에게 그 오류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에게 (어떤) 주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결코 어떤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용수의 언급처럼,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 자체가 현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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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종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생겨난 이 개념이 불교를 넘어 관용어로 ‘파사즉현정’이라는 뜻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언어적 표현을 극도로 자제한 선종(禪宗)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역 경전권의 ‘필터 역할’을 했던 중국의 교학불교가 중앙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반면에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528?)를 초조(初祖)로 삼는 선종은 지방 호족의 지원을 통해서 점차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형태를 취했다.
역대 왕조의 중심지에서 체계화된 교학을 바탕으로 당대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던 다른 종파들과 달리 『금강경(金剛經)』으로 약칭하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이나 『능가경(楞伽經, Laṅkāvatārasūtra)』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았던 남북 선종에서는 다른 종파들과 비교하여 그다지 복잡한 교학 체계가 필요하지 않았다.
삼무일종법난(三武一宗法難)으로 대별되는 불교에 대한 탄압 속에서, 특히 26만 여명의 출가자를 강제로 환속시키며 4만 여개에 달하던 절을 없애버렸던 당(唐) 무종(武宗)에 의한 회창법란(會昌法難, 840~846)으로 대부분의 다른 종파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그 법맥마저도 위태로워진 상황 속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던 선종은 상대적으로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살아남아 이후 한역 경전권의 대표주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특히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던 6조 혜능(慧能: 638∼713)에서 비롯된 남선종은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달하며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돈오(頓悟)를 수행 전통으로 삼았다. 이 남선종이 추구하는 ‘돈오’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것은 파사와 현정이라는 구분 자체가 없는 ‘파사즉현정’이었다.
한국 불교도 교학불교의 시대를 통과하여 선불교로 수렴되는 유사한 과정을 겪었던 관계로, 그리고 조선시대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 속에서도 선불교가 민중 신앙으로 살아남은 불교와 함께 큰 흐름을 형성했던 관계로, 파사현정이 ‘파사즉현정’이라고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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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삼론종에서 강조하는 진속이제(眞俗二諦)나 팔부중도와 달리 대중화된 파사현정은 자기 종파를 옹호하기 위해서 출발한 것이지만 선종의 활약 덕분에 관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원래 중관사상에서 뜻하는 파사는 자신의 주장을 세우는 것이 아닌 논박자의 망상과 아집을 버리게 하기위한 방편으로 붓다의 가르침인 중도의 추구를 그 목적으로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공사상을 체계화시키며 등장한 중관학파의 비판주의가 한역 경전권의 관용어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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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삼론현의(三論玄義)』(길장, 박광수 역, 2009)
『百論, 十二門論』(용수, 김성철 역, 1999)
『회쟁론(廻諍論)』(용수, K. 0630)
『회쟁론(廻諍論)』(용수, 김성철 역, 1999)
『佛光大辞典』(佛光大藏經編修委員會 編, 星雲 監修, 台灣: 佛光出版社,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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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중관사상 불교 개념 불교에서 논파를 통하여 공, 연기, 무자성, 이제론 등을 강조하는 불교교리.
삼론종 불교 단체 불교 종파의 하나.
금강반야바라밀경 출판 문헌 1042년에, 최적량이 국왕의 완쾌를 기원하기 위해 간행한 수진본 경전.
이심전심 불교 개념 스승과 제자가 마음으로 불법의 도리를 주고 받는다는 의미의 불교용어.
오가칠종 불교 개념 중국 당송대에 형성된 위앙종 · 임제종 · 조동종 · 운문종 · 법안종 · 황룡파 · 양기파 등 선종의 일곱 종파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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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신상환
기 고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정월 초하루라고 해 ‘설날’이라는 명절로 즐겨왔습니다. 그러다 식민지 상태던 일제 시절 당시 태양력을 따랐던 일본의 양력설을 ‘신정’이라고 부르고 한국인들이 쇠는 음력설은 ‘구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생겨난 신정과 구정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계속됐고, 한때는 이중과세를 방지한다고 해 음력 설날에는 모든 공공기관은 정상근무를 하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휴업금지 등을 강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1985년이 돼서야 비로소 음력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민족 대명절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음력 설날 휴일은 사흘로 늘고, 양력설은 사흘에서 하루로 줄어들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설에 관련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새해의 첫날입니다. 2001년부터 매년 교수신문은 대한민국의 한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의 대한민국 사회상을 함축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지난해 말의 사자성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입니다.
‘파사현정’이란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불교 삼론종의 중요 논저에 실린 고사성어입니다. 일제가 자기들 편리한대로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을 말살하려고 우리의 설날을 신정으로 쇠도록 강요한 것을 해방이 돼서도 이중과세라며 금지한 것을 다시 바르게 고친 것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일 것입니다.
파사현정을 말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단어인 적폐청산(積弊淸算)이 떠오릅니다.
적폐청산은 국가와 사회 조직 등에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 즉 부정과 부패와 비리 등 생각과 행동을 청산하고, 지난날의 부정적인 요소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따져보면 적폐청산이나 파사현정이나 비슷한 의미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파사현정’을 보는 측면에 따라서 각자가 해석을 달리합니다.
지난해 말에 선정된 사자성어인 ‘파사현정’을 어떤 사람은 적폐청산을 끝까지 제대로 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보복을 자행해 또 다른 적폐를 만들고 있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2018년 문재인 정부가 다뤄야 할 최우선 과제로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을 들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정부가 다뤄야 할 최우선 과제에 대해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이 20.4%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다음으로 ‘소득불균형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 해소’가 17.3%로 2위, ‘청년 등 일자리 창출’이 14.4%로 3위로 나타났습니다.
1위와 2위로 나타난 ‘부정부패 척결’이나 ‘사회적 양극화 해소’가 다 같이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라야 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법정스님은 ‘좋은 세상이란’ 시에서
마지막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벽이고,
이어주는 것은 다리다.
벽은 탐욕과 미움과 시새움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두터워가고,
다리는 신의와 인정 그리고 도리로 인해 놓여진다. 다리는 활짝 열리는 마음끼리 만나는 길목이다.
좋은 세상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사랑의
다리가 놓여진 세상이다”
장 석 춘
서울 성북구 공동주택관리 자문위원
(행복코리아 대표)
첫댓글 삼론종에서 강조하는 진속이제(眞俗二諦)나 팔부중도와 달리 대중화된 파사현정은 자기 종파를 옹호하기 위해서 출발한 것이지만 선종의 활약 덕분에 관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원래 중관사상에서 뜻하는 파사는 자신의 주장을 세우는 것이 아닌 논박자의 망상과 아집을 버리게 하기위한 방편으로 붓다의 가르침인 중도의 추구를 그 목적으로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공사상을 체계화시키며 등장한 중관학파의 비판주의가 한역 경전권의 관용어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