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8일 재의 수요일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은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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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Take care not to perform righteous deeds in order that people may see them;
말씀의 초대
“이제라도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고,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회개를 위한 진실한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말라면서,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임을 강조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에 대해 말씀하시며 진실한 삶을 가르치신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자선을 베풀 때에, 기도할 때에, 단식할 때에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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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성찰과 회개의 때, 은혜로운 사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삶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수행의 때이다. 진실한 인간, 진실한 그리스도인, 진실한 제자의 삶을 추구하며 자기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회심의 시기인 것이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사실은 객관적 현상이고, 진실은 내면적 의지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것을 진실이라 한다. 인간의 판단은 한계가 있어 믿을 것이 못 된다. 모든 갈등은 사실만 보고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인간 사이에는 목격자가 있어도 사실과 다를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는 속임도, 거짓도, 억울함도 없다.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시는 만큼이 진실인데 타인에게도 그런 진실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모습에도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 유념해도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자선과 선행, 기도와 단식은 고행과 극기의 종교적 수행들이다. 인간에게서 인정받으려 애쓰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진실의 함량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라는 진실을 믿으면, 상황이 어떤 경우이든, 상대가 누구이든 겸손할 수 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모든 삶의 진실성을 존중하자. 올해 사순 시기에는 함께 사는 이들의 말과 행동에 담긴 진실을 믿어 주자. 그러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하면 사랑이 된다.
인터넷에서 본 글이 하나 있습니다. '예레미야 스티펙'이란 목사님의 이야기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더군요. 이 목사님은 예배가 있는 주일 오전, 자신이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한 교회 근처에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인 중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파 음식을 사려하니 잔돈 좀 달라’고 구걸하기 시작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고 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님은 가장 맨 앞자리에 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배 위원들의 저지와 차가운 시선에 맨 뒷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시간이 흘러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공지사항을 하는 순간,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스티펙 목사님이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섰고 그제야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말씀을 읽은 뒤에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 라는 말을 남기고 예배를 마쳤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역시 한 가지 체험이 떠오릅니다. 저는 지금 안식년을 맞이하면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아파트의 승강기에서 어떤 자매님과 살짝 부딪히게 되었습니다(솔직히 부딪힌 지를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살짝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큰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인상을 쓰면서 “에이~ 씨”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반응을 일으킬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과도한 반응에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이 분이 신자이고 내가 신부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이렇게 행동했을까? 라고 말이지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특히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뜨거운 사랑으로 다가서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여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부활 축제를 준비하면서 우리들은 피정, 기도, 묵상 등을 하면서 영적으로 더 성숙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몸으로는 희생, 극기, 절제의 생활을 하지요. 그런데 정작 마음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의 의미는 사라지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요엘 예언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찢고 이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 있는 사순시기, 그리고 40일이 지난 뒤에 기쁜 부활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진주도 처음엔 하나의 상처였습니다. 상처 낸 침입자인 모래알을 밖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어 감싸 안았습니다. 오랜 시간 상처를 보듬는 일. 이 노력의 시간이 당신의 보석을 만듭니다.
인생은 걸어가는 것(‘좋은 생각’ 중에서)
대학을 중퇴한 게이브는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했다. 그는 선생과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을 지켜보길 좋아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이렇게 할 텐데.’하고 상상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게이브의 어린 시절 스승이자 당시 일하고 있던 학교의 교장이 그를 불러 “선생이 되면 어떻겠니? 네가 저 자리에서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장난치는 모습이 그려지는구나.”라며 용기를 줬다. 그날부터 게이브는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고된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청소부로 일한 지 27년 만에 교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3년에는 교장으로 뽑혔다. 그가 청소부였을 때 만난 아이들이 학부모가 되어 자녀를 맡겼다.
그는 지금도 새벽 여섯 시에 출근해 아이들을 맞는다. 누군가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그가 답했다.
“지금 처한 상황이 미래를 가로막게 놔두지 마세요. 저를 보세요.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남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면 어떻습니까? 매순간 꿈을 향해 웃으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그게 인생 아닐까요?”
어두운 현재를 벗어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찬 시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마에 재를 받으며
-이기정신부-
재를 보며 생각하면 무엇이 이렇게 되었는지 거이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크기도 수량도 모양도 다 사라지고 오직 탄소 재만 남았습니다. 파묘도 보았고 화장터의 화장 모습도 보았지만 결국 모든 게 먼지였습니다.
재속에 무엇 크기 이름 무게 등 엄청난 모든 것이 탄소로 감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재는 먼지며 흙으로 돌아가니 흙속엔 우주의 질량이 보존돼 있습니다. 이마에 재를 받으며 흙처럼 겸손되이 밟아도 눌려도 묵묵한 겸손을 배웁시다.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4)”
< 회개는 가슴을 찢는 것 >
-전삼용신부-
작년 ‘상의원’이란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조선시대 의복을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한 채 30년 동안 옷 만드는 일에만 목숨을 바쳐 궁궐에서 임금의 옷을 짓는 상의원 어첨장 조돌석(한석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 임금에게 충실하며 이제 막 양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찰나입니다. 새로 된 임금(유연석)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여 어떤 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조돌석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대단한 경쟁자가 나타났습니다. 기생집에나 드나드는 이공진(고수)이란 젊은 사람입니다. 그는 천재적인 능력으로 편하면서도 우아한 옷을 만들어냅니다. 우연히 왕비(박신혜)와 그녀의 시종들의 실수로 불태운 면복을 하룻밤 만에 다시 만들어냄으로써 왕비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린이 같아서 바느질로 문드러진 손톱들을 보며 조돌석을 존경하고 형처럼 잘 따릅니다.
왕은 왕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후궁을 들입니다. 어첨장 조돌석은 왕의 편에 서서 앞으로 왕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후궁의 옷을 지어주고, 이공진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왕비를 위해 옷을 지어줍니다. 그런데 옷으로는 번번이 이공진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조돌석은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공진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밤새 노력해도 안 되니 몰래 이공진의 작품을 훔쳐내어 옷을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왕은 자신이 몰아내려고 하는 세력을 모함하기 위해 이공진을 자신을 시해하려 한 세력의 한 파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조돌석에게 자신의 음모에 동참하게 합니다. 조돌석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공진을 음해하여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공진의 집에 들어가 그의 옷들을 태우던 중 자신이 양반이 되면 선물하려고 했던 새 옷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입고 싶어 했던 대로 그대로 지어서 선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자신의 질투심과 공명심 때문에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조돌석은 그 옷을 부여안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능력 있고 깨끗했고 자신을 좋아했던 이공진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요엘 예언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 죄를 뉘우쳐야 하는지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주 하느님께 돌아오기 위해서는 옷만 찢어서는 안 됩니다. 옷은 성경에서 자신의 전부를 상징합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고치다 성전에서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읽으니 지금까지 자신들이 살아왔던 삶이 우상숭배의 삶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일어나 모든 신당과 우상들, 제단들을 허물어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 회개는 바로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해성사 할 때 지은 죄를 반복해서 또 짓는 이유는 죄 때문에 자신의 가슴을 찢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내 가족의 팔을 잘라야 한다면 가슴을 찢겠지만, 그리스도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으로는 가슴을 찢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십자가를 보며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가 아니라 결심입니다. 결심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찢어야 하는 이유는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껴 심장을 찢지 않으면 회개란 것은 잃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는 것이 가리옷 유다의 배신과 유다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하고 나서는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찢어지는 가슴으로 한없이 울고 나서야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번 사순절 때는 우리 모두 참으로 우리 심장을 찢을 수 있는 회개가 있기를 빕니다.
참 아름다운 삶
-이수철신부-
"제발 죽지 마세요. 더이상 죽지 마세요.
자꾸 돌아가시면 국민들 마음만 무너집니다.
이를 악물고 연대하여 싸워야 합니다.
제발 죽지 마세요. 절대로...."
"힘없다고 죽지 마세요. 살아있는 유가족들은요...
같이 연대해서 싸우는 전략으로 나가세요. 힘없다고 극한 선택하지 마시고,,,“
새벽 뉴스, 인터넷에 오른 공장 노동자 분신 자살 사건에 달린 댓글이 마음 먹먹하게 합니다.
서로 대화하고 연대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진정 하느님을 알아 믿고 사랑했다면 이런 안타까운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대죄는 둘이니 자포자기의 절망과 타인에 대한 멸시입니다.
절망은 자살에 이르게 하고 이웃에 대한 멸시는 타살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니 절망이 아닌 희망의 세상을, 멸시가 아닌 상호 존중의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거칠어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연대하여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극단적인 죽음의 선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삼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안식년의 순례기간에도 참 많이 아름다운 장면의 사진을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아름다움의 감동은 마음을 정화합니다.
오늘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다시 삶의 제자리 하느님께 돌아와 삶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시기입니다.
오늘은 '참 아름다운 삶'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하느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회개입니다.
모든 불행은 제자리를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제자리로 돌아가 제대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게 회개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요엘 예언자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자비와 희망의 하느님께 돌아갈 때 살 힘과 살 희망을 얻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구원의 살 길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길뿐입니다.
무엇보다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의 연대'가 우선입니다.
둘째, 사랑과 겸손의 수행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수행입니다.
진정 내적자유도 수행의 열매들입니다.
사랑의 수행을 통한 마음의 순수와 자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자선, 기도, 단식 수행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억지로, 의무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사랑의 자발적 표현인 수행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자선이요, 기도요, 단식입니다.
이래야 무사(無私)하여 순수한 아름다운 수행입니다.
사람 중심의, 내 중심의 자기만족의 수행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수행이 참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줍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참된 자선, 기도, 단식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결론은 모두 다음 말마디로 요약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이런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신뢰와 사랑이 겸손한 수행의 원천이 됩니다.
셋째, 내적일치의 삶입니다.
겸손한 수행을 통한 내적일치의 삶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주님과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내적일치와 평화입니다.
내적일치의 평화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바오로의 권고가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바로 사순시기 첫날, 재의 수요일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회개를 통한 주님과의 화해와 일치요, 이에 따른 나와의 내적일치의 평화와 기쁨입니다.
참 아름다운 삶을 살라 주어진 사순시기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사랑과 겸손의 수행에 충실함으로 내적일치의 삶을 살 때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3,19참조).
아멘.
하느님의 눈에 들어라
-반영억신부-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고유명절인 구정과 함께 사순절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단식, 금육의 관면을 허락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다른 날을 정하여 단식, 금육에 동참하고 그 정성을 이웃과 함께 나눕니다. 재를 지키는 것은 더 큰 기쁨을 지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선할 때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하라.” 단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모르게 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의 삶이건 신앙의 삶이건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좋은 평판을 받기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힘을 길러 그런 것에 민감해 하지마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적인 힘이 있으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대주교).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을 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 해 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합동 판공성사에 다니다 보면 알게 모르게 살이 올라요. 가는 곳마다 오랜만에 오신 신부님 대접한다고 고기에, 회에 넘치도록 챙겨주시거든요. 마음을 먹고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유혹의 빌미는 항상 생기게 마련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세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에 자주 듣는 말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죄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하느님께로 다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외적인 기도와 단식, 자선에 앞서 마음의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적 갈망의 즐거움 -인영균신부-
사순시기가 막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혹은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과 함께 머리에 재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사순절하면 무거운 짐을 진 느낌이 먼저 엄습합니다. 어쩔 수 없이 통회하고 보속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겠지요. 우리 수도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때에는 몇 끼니를 굶는 것이 수월한데 꼭 사순절 단식 날에는 왜 이리 배고픔을 더 강하게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규칙 49,1).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순시기가 그 만큼 은혜로운 시기임을,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마련된 때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인은 계속 말합니다.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악습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규칙 49,2-4). 자식에게 삶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아버지처럼 베네딕도 성인은 하나하나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사순시기를 어떻게 충실히 보낼 것인가를 오늘 다짐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재계는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파스카, 곧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가 동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파스카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규칙 49,7).
우리가 머리에 받은 재는 우리의 나약성과 죽을 운명을 상징하고 또 자연스레 재계와 회개의 내적 자세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부활의 표지입니다. 재의 더러움은 사순시기 동안 매일매일 씻어질 것이고 파스카 밤에 세례의 물로 완전히 씻어지고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미리 내다보면서 사순시기를 지낼 수 있습니다. 영적 갈망이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코린 5,20) -오상선신부-
어김없이 사순절이 돌아왔네요. 이번 사순절은 설연휴와 함께 시작되니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까 좀 고민스럽습니다.
주교회의에선 재의 수요일과 연휴 금요일에 금육재를 관면해 주어서 고맙기는 한데 이번 사순절의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고민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아마도 극기와 희생의 재를 지키며 보내기보다는 더 사랑하며 기쁘게 보내라고 하시는가 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그길은 더 사랑하고 더 용서하고 더 배려하고 더 믿어주고 더 감사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이번 사순절을 보내 봅시다. 그래야 이 시기가 참으로 구원과 은총의 때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지 않는 의미있는 사순절 보내시길 축원합니다.
축제와 절제
-김찬선신부-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어제 저희 공동체는 약식 카니발 행사를 했습니다.
갓 들어온 형제들 중에는 수도원에서 카니발 행사를 한다고 하니
그런 것을 왜 수도원에서 하냐고 의아해하며 그 뜻을 묻었습니다.
사람들은 카니발 하면 삼바 축제와 같이 떠들썩한 축제를 떠올리지요. 그
래서 일반 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식의 정의가 있었습니다.
“주로 서양에서, 가장행렬 등이 있는 떠들썩한 행사나 축제”
“난장판의 축제 분위기, 큰 잔치판; (경기 등의) 대회”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의 떠들썩한 축제라는 것인데
그러나 카니발의 본래 의미는 사순절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 40일 간 고기를 비롯한 음식의 절제를 하고,
여러 가지 고행과 극기를 하면서 즐거운 것들은 피하게 되기에
사순절을 시작하기 전 며칠을 마음껏 먹고 즐기던 축제이지요.
그래서 그 이름도 라틴어의 고기를 뜻하는 Caro(Carnis)와
마지막 인사를 뜻하는 Vale가 합쳐진 말로서
이제 ‘고기는 안녕’ 또는 ‘고기는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Caro와 Valens(맘껏)가 합쳐진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두 말 다 고기를 뜻하는 Caro가 들어갑니다.
고기를 마지막으로 맘껏 먹건 고기는 이제 그만이건
다 사순절에는 고기를 끊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덩어리 고기를 끊는 것보다
육의 정신(Carnis Spiritus)을 끊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육의 정신을 끊음으로써
욕정欲情을 열정熱情으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욕정이란 자기의 육적인 욕구들을 채우려는 것인데
그것을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열정으로 바꾸는 겁니다.
열정은 영어로 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Passion에 수난의 뜻도 있으니
열정이란 누구를 위해 또는 무엇을 위해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크고 강한 내적 힘인 거지요.
둘째로 육의 정신을 끊음으로써 우리는 욕망을 갈망으로 바꾸고,
더 나아가 갈망을 열망으로 바꿔야겠습니다.
욕망이란 이 세상 것들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욕망에는 육체의 욕망이 있고,
야망이라고도 하는 출세와 성공의 욕망 등이 있는데
이런 바람들을 하느님과 영원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고,
바라는 것이 바뀔 뿐 아니라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열망으로 바꾸는 겁니다.
셋째로 육의 정신을 끊음으로써
우리는 육정肉情을 애정愛情으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육정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처럼 사적인 사랑을 얘기한다면
애정이란 라틴말로 Caritas(애정, 애덕)라고도 하는
조금 더 공적이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어제 저희는 카니발을 하면서 짧은 영적 독서를 읽고
선배 형제로부터 카니발의 영적 의미에 대해서 청해들었습니다.
그 형제님께서 아주 재치 있게 그 의미를 정리해주셨는데
축제란 절제와 늘 함께 있는 것이며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맨날 빈둥빈둥 노는 사람에게는 쉼이 없고
열심히 일을 한 사람에게 쉼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듯
우리의 삶은 늘 축제적이어야 하지만 늘 절제할 수 있어야
축제가 저급하지 않고 영적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되돌아가야 할 때
-기경호신부-
사순 시기’는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거룩한 때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세상과 창조질서의 회복, 자신의 쇄신,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나야 할 부활의 참 기쁨을 맞을 준비한다.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6,2)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라는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과 진리와 정의로부터 멀어진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주신 ‘사랑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 때는 내일도 모레도 아닌 바로 '지금'이다. 주님께 되돌아가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오늘 거행하는 '재의 예식'은 회개와 참회, 각자 다가올 죽음의 묵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재’는 그 자체로 인생의 무상함과 나약함을 깨닫고 하느님과 죽음 앞에 자기 본모습을 찾으라는 표지이다. 우리는 재의 의식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또는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하는 권고를 듣는다. 한마디로 생명의 근원이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회개와 쇄신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분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순시기의 우리 삶의 방향은 오직 주님을 향할 뿐이다. 늘 ‘빛을 그리워하는 어둠의 존재’인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자신의 어둠을 바로 알아차리고 주님께 되돌아가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 시기에 창조와 사랑과 선의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 마음과 혼을 쏟아보자!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 것’에 앞서는 ‘진실한 마음’이다. 요엘 예언자 시대에 유다는 흉년이 심해 먹을 것이 없었다. 성전에서 나날이 제사에 쓸 것조차 없었다(1,1-12). 예언자는 이 무서운 기근을 더 큰 심판의 전조(前兆)로 보면서(2,1-2) 참회를 호소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옷이 아닌 마음을 찢는’(2,13) ‘진정한 회개’여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이 없는 회개나 형식적인 예식을 역겨워 하셨다. 신앙생활마저도 물량주의와 실적주의, 효율주의에 젖어 있는 오늘, 빛이요 사랑이신 그분을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을 만나자. 나아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진심을 다해 만나도록 하자!
‘하느님의 사절’(2코린 5,20)이요 ‘협력자들’(6,1)인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고(5,20),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6,1). 사순시기에 하느님과, 이웃과,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것이 있을까? 진실하게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춰볼 때 누구든 '죄인'이요 ‘사랑의 무능력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은총의 때’를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생각에만 머무르지 말고 구체적인 변화를 도모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오직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하느님과 일치하고 동료 인간들과 사랑의 연대를 이루기 위한 세 가지 기본 태도로 드러난다. 단식할 때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기도할 때는 순수한 지향으로 하며, 자선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가치 없는 일일뿐 아니라 되레 스스로를 단죄하는 칼로 변해버릴 것임을 명심하도록 하자.
사순시기에 행하는 절제와 희생은 끈기 시험도 일시적인 자기만족을 느끼기 위한 기회도 아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아픔을 나누는 절제와 참회가 되어야 한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임을 명심하고, ‘마음을 찢는 회개’의 정신으로 사랑이신 주님께 되돌아가자. 진실한 마음과 혼을 다 쏟아 '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하여' '주님만 드러나는'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통하여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단맛으로 변하는”(성 프란치스코) 부활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모든 이는 얼마나 복되고 축복받은 사람들인지!"(성 프란치스코, 1신자편지 4-5절)
-한상우신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빛 앞에서 흙의 존재인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흙은 흙의 길을 가야합니다.
흙 앞에서 모든 존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능한 흙이 하느님 사랑을 통해 생명의 흙이 되었습니다.
흙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만나게됩니다.
사순시기는 생명의 본질인 사랑과 감사를 흙이 되어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떠나야 할 우리 존재 모두가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다 주님 안에서 고운 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거짓과 모순의 자아를 버리고 정직한 흙이 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부드러운 흙으로 돌아가 작은 생명을 싹 튀우는 생명의 시간 되십시오.
흙 안에 피와 살이 있고 사랑과 용서가 있음을 믿습니다.
결국 흙 아닌 존재가 없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삶이 새로워진다는 건 흙으로 다시 우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은 봄꽃을 피우는 새로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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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