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외 1편
사공경현
소크라테스가 죽었다
플라톤도 죽었다
숙제를 마친 사람은 죽는다
범인은 평생을 헤매지만
천재에게는 금방 풀린다
따라서 천재는 요절한다
24세에 나도향이 죽었다
27세에 이상이 죽었다
28세에 윤동주가 죽었다
29세에 김유정이 죽었다
29세에 기형도가 죽었다
32세에 김소월이 죽었다
35세에 이효석이 죽었다
천재는 밤하늘에 반짝이고
둔재는 아침이슬에 젖는데
육십령 고개를 넘기도록
여즉 숙제를 풀고 있다
범인이 감히 시를 쓴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나이를 지우고
미래를 지우고
하늘을 지운다
땅의 주름을 잡아 광야를 뛰어넘는 도인들처럼
시간의 맥을 잡아 세월을 뛰어넘는 천재들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지 못하는 둔재는
시시콜콜 일기를 쓰듯 숙제를 지우고 있다
물의 여정
사공경현
전생의 기억을 지우고
성간물질로 떠 올라 두둥실
어느 별을 점지해 주시려나
차츰 중력이 자라나자 떠밀리듯
드디어 하강이다
설렌 기분, 저 아래 초가지붕이 보인다
부드러운 사이골을 신나게 미끄러져
처마 끝에서 정겨운 고향 냄새를 만난다
소우주의 궁전 내실이 아늑하다
책가방을 메고 뜰을 돌아
마당을 지나 담장 밖 도랑을 만난다
안녕~ 또래들과 포옹하고
몸집을 불리면서 정신없이 내달린다
목적지도 모르는 들뜬 모험의 길
한 칠팔십 리 길게는 백 리쯤 될까
골짜기마다 새로운 만남
향기를 머금은 선배님
외양간 냄새를 풍기는 친구님
시커먼 연탄 가루를 뒤집어쓴 후배
부대끼며 섞여 어울리고 점점 확장된다
실개천을 지나며 눈을 뜨고
시냇가 거치면서 귀를 열어
오염되고 희석되고 엎치락뒤치락
때론 소용돌이치고 막히면 돌아가고
부딪고 깨어지면서 성숙해진다
이윽고 강이다
가파른 긴장이 해소되고 숨돌릴 시간
피곤한 어깨에 날개를 달아도 좋으련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포용하며 도도히 흘러
마침내 크나큰 근원 바다에 이른다
아이야 이제 가방을 내려놓으렴
노독이 풀리고 수고로움이 그리워질 즈음
어머니여 이제 다시 별이 되렵니다
제 몸을 가볍게 하여 주시어요
햇빛 찬란한 어느 날 두둥실 떠오른다
야호 이제 다시 시작이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사공경현 경북 군위 출생, 2022년 『애지』 신인문학상 데뷔, 수필집 『무임하차』, 시집 『마지막 행에는』, 이메일 v404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