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4
12월26일[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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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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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4EyW3Dug1U
[예수회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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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환희와 기쁨은 언제나 고통이나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기 예수님의 성탄 바로 그 다음 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축제 바로 다음 날, 셀 수도 없이 날아오는 돌팔매에 맞아 죽임을 당한 스테파노의 축일이 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환희와 기쁨은 고통이나 죽음과 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충만한 은총은 고통과 죽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분들의 얼굴을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고,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 안에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주님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박해가 점점 증폭될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갈 때 마다 스테파노는 즉시 자신의 내면에 마련된 나만의 감실, 나만의 성탄 구유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지극히 겸손하신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를 오래도록 관상했습니다.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은 스테파노는 거리로 나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이심을 용감하게 선포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행전 7장 56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굳건한 하느님의 지성소, 자신만의 감실을 마련했던 스테파노였기에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 안에 충만히 현존하면서 활동하신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스테파노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를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스테파노는 살기등등한 거짓증인들, 극악무도한 원수들 앞에서도 예수는 곧 그리스도임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적대자들이 던지는 무수한 돌팔매에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스테파노는 조금도 물러서거나 도망가지 않고 외칩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장 59절)
스테파노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교회의 첫새벽을 밝힌 등불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를 봉헌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스테파노의 생애는 교회의 발전을 위한 마중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라도 죽을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루살이' 스테파노의 삶은 이 성탄 시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롤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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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saSc1uUZ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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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 배척 아니면 포용>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왜 순교하게 된 것일까요? 바로 유다 지도자들이 믿기 싫어하는 대상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때문에 박해도 하고, 믿음 때문에 순교도 합니다. 어떤 믿음은 서로 사랑하게 만들고 어떤 믿음은 서로 분열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사랑하고 다른 것을 믿으면 미워합니다.
사실 스테파노를 죽인 이들은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물론 ‘종교인’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종교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가 참 신앙인을 박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스테파노는 신앙인이었고 그를 죽인 이들은 종교인이었습니다.
같은 종교 내에서 신앙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종교인은 정치인들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생각이 달라도 포용합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부가 꼭 생각이 같아서 한집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의견이 달라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저 생각일 뿐이기에 생각의 차이가 사람을 갈라놓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마치 북한에서 남한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족끼리도 신고하고 가둘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정권이 곧 종교가 된 상황입니다.
생각은 의견이지만 믿음은 종교를 만듭니다. 생각으로 갈라지는 일은 없지만 믿음으로는 서로 갈라집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누군가를 배척한다면 그 사람은 그 누군가를 배척하는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정권이든, 피부색이든, 나이든, 성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생각 때문에 누군가를 차별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생각이 아니고 종교입니다.
영화 ‘리멤버 타이탄’(2001)은 1971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무대로 한 실화입니다. 어느 날 ‘허문 분’이란 흑인 감독이 백인 ‘빌 요스트’가 맡은 고등학교 풋볼팀에 수석 코치로 부임합니다. 허문 분은 흑인 선수들로 구성된 다른 학교의 팀과 합쳐서 타이탄이란 풋볼팀을 지도해야 했습니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할 때였기에 백인 학생들과 코치진들은 흑인이 수석 코치가 된 것에 큰 불만을 가집니다. 백인들은 흑인 동료들에게 우린 절대로 섞일 수 없다며 엄포를 놓습니다. 실제로 분의 가족이 백인들의 공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교육 기관에서 이렇게 발령을 낸 이유는 흑인 인권운동 때문에 무언가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허문 분이 한 경기라도 지면 바로 자르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허문 분은 2주간의 전지훈련 중 흑인과 백인을 하나의 팀으로 만듭니다. 물론 처음엔 기분 나빠하던 코치 빌 요스트도 분 코치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그의 방식에 조금씩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가 새벽 3시부터 지옥 훈련을 시키며 아침에 게티즈버그라는 곳에 다다라 이 선수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여긴 게티즈버그다. 게티스버그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바로 이 장소에서 5만 명의 병사들이 죽어갔다. 이 푸른 초원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 그들이 했던 싸움을 지금 우리 안에서도 하고 있다. 그들 영혼의 소리를 들어봐라. ‘증오가 우리 가족을 망쳤습니다. 난 원한을 품고 내 형제를 죽였습니다.’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
이 숭고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역시 망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법만 배운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사나이다운 시합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믿음이 증오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생각만으로는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증오는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고, 이미 증오하고 있다면 사랑이 아닌 다른 종교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종교가 됩니다.
어쩌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과 백인이 반반씩 합쳐진 첫 팀으로 구성된 타이탄은 그 해 13승 0패로 시즌 우승컵을 들어 올립니다. 타이탄은 그리스 신화에 신들에 대항한 지상의 거인들이었습니다. 타이탄이란 제목은 풋볼이 아닌 각자가 쌓아 올린 인종 종교 신념에 저항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분 코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무슨 종교를 신봉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을 하나로 모으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된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이비만 사이비가 아닙니다. 나를 타인과 분열시키는 무엇이 내 안에 있다면 나도 그것을 섬기는 사이비 종교인입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오늘 이런 종교 숭배자들에게 순교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정치를 종교로 신봉하는 모습입니다. 정치적 의견이 믿음이 되면 그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인이 됩니다. 나와 다른 정치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한다면 나는 정치를 신봉하는 사람이지 사랑을 섬기는 참 신앙인은 아닙니다.
정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대로 투표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민의 의무요 권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되어 다른 이들을 배척한다면 정치를 종교로 신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누군가를 스테파노와 같은 순교자로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정치는 하되, 정치인은 되지 마십시오. 믿을 분은 하느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생각이 다르다고 타인을 배척하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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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첫눈, 첫발자국, 첫사랑, 처음 본당이 지니는 의미가 있습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첫발자국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도 합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첫사랑이 주는 감미로움과 애잔함이 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것은 순수하기도 하지만, 어설프기도 합니다. 33년 전 사제서품 받고 처음으로 부임한 본당은 ‘중곡동’ 성당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저를 포함해서 2명의 보좌신부가 있었습니다. 선임 보좌신부님은 청년, 중고등부를 담당했고, 저는 초등부 주일학교를 담당했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교사들의 교안을 확인하는 거였습니다. 교사 회합을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토요일에는 어린이 미사를 하였고, 주일에는 12시 미사를 하였습니다. 선임 보좌신부님이 미사 순서를 정하면 평일 미사를 하였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저는 어른들과도, 청년들과도 만나면서 처음 본당을 순조롭게 시작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상하셨고, 선임 보좌신부님은 입학 동창이라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면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의 직업을 많이 따라간다고 합니다. 야채가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야채가게에서 일하게 되고, 세탁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세탁소에서 일하게 되고, 마트를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마트에서 일하게 되고, 도넛 가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도넛 가게에서 일하게 되고, 식당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식당에서 일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기술직이나, 전문직으로 왔으면 그 기술과 전문 분야를 찾아서 일할 수 있습니다. 사제 생활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침과 사목 스타일을 배우게 됩니다. 꼼꼼하게 챙기고, 사목을 이끌어가는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여행 가는 걸 좋아하는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성령 기도회를 이끌고, 영성이 깊은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제가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도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교포 사목하고 오신 신부님은 무척 자유로웠습니다. 기존에 보았던 본당 신부님은 엄격하셨고, 권위가 있었고,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신부님은 늘 먼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스테이크를 구워주기도 하였고, 스키장을 가자고 하였고, 산책 가자고 하였습니다. 매주 화요일에는 성령 기도회 미사가 있는데, 같이 하자고 하였습니다. 단체들에도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거의 안 하였습니다. 보좌신부들이 하는 일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신부님에게서 사제 생활의 기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늘 기도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성체조배 하였고, 신부님 방에는 따로 기도 방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방의 기도 초는 늘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매일 복음 묵상 글을 만들었습니다. 신부님은 ‘2000년대 복음화’ 단체를 이끌었고, 저는 신부님을 따라서 몇 번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는 기도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더욱 풍요로웠습니다. 사제 생활 길잡이가 되어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성탄의 기쁨이 있는 바로 다음 날, 우리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늘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모든 권력과 능력을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탄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구세주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묵상할 과제를 부여받습니다. 마구간이라는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서 태어났음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였고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자신의 처지를 말한 적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 제자들을 파견하면서도 지팡이조차 들고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한 무소유와 자발적 가난의 모습만이 가장 제자다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탄입니다. 많은 성인과 성녀가 있지만 스테파노 성인이 예수님을 믿으며 처음으로 순교하였고,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의 뒤를 이어서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를 통해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길이기도 합니다.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란 단순히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순교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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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가장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그분의 가장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박해하였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매 순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신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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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은 십자가 위 예수님의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기도하셨고,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고, 스테파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고 기도합니다.
참된 믿음은 마치 스테파노가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도, 이웃들을 대하는 것도,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도 예수님을 닮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신비가 이루어지게 합니다(갈라 2,20 참조).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 사랑하셨던 것을 우리도 사랑하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믿음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만나고 배우며 닮게 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10,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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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스테파노>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5-60)
스테파노 순교자는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이 들어가게 될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한 첫 증인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라는 말은, 그가 순교 직전에 목격하고 증언한 일은, 어떤 환각이나 착각에 의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한 일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를 받아서 증언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의 증언은 ‘구원의 진리’에 속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보였다는 말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직접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ㄴ-4ㄱ)
신앙인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을 ‘지복직관’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그것을 증언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신앙이 옳은 것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모습을 스테파노에게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 직전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본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마중 나오신 일 자체가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스테파노가 살해당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다가(구경만 하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마중 나오신 것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순교는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것을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증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힘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보다 더 슬퍼하시는 분, 우리가 당신 곁을 떠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분, 우리가 한눈을 팔아도 우리만 바라보시는 분...>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라는 말은, 박해자들이 스테파노의 증언을 ‘신성 모독 발언’이라고 생각해서 분노하면서 말을 막으려고 했고, 스테파노의 말을 안 들으려고 귀를 막았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서 죽인 것은, 그를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위기에 있는 율법대로 한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온 공동체가 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4,16)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총독의 허락 없이는 율법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로마법의 절차대로 진행되었는데, 스테파노 순교자의 경우에는 그 절차가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아마도 총독이 개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폭동과 같은 수준의 박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 증인들’이라는 말은, 스테파노를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보다 먼저 돌을 던진 박해자들을 가리킵니다.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박해자들의 우두머리였음을 나타냅니다. <‘박해자 사울’은 나중에 ‘사도 바오로’가 됩니다. 스테파노 순교자가 흘린 피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사도 바오로’ 라는 열매를 맺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12,24)>
스테파노의 마지막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고, 그가 바친 기도도 예수님께서 바친 기도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스테파노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라갔음을 나타냅니다.
60절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에 ‘잠들었다.’는 말은, 기도 자세 그대로 숨을 거두었음을 나타냅니다.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표현한 것은, 순교자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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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과 말씀 - 설명과 해석>
말과 말씀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는 없지만, 말은 아무래도 쉽고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고, 말씀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좀 더 귀 기울여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빈 말도 있고 저잣거리 말도 있으며, 지껄임이나 에두른 말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말씀이라고 하면, 무언가 ‘쓸 수 있는 말’, ‘쓸모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잣거리 외침 정도나 지껄임 정도의 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라고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순간에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너희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이 말씀하시도록’ 하라는 것도,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설명은 말하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고, 해석은 듣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습니다.
설명의 설(說)이 ‘말을 달리한다’는 뜻풀이를 가지기에, ‘쉽게 말해서’, ‘달리 말해서’ 등으로 쓰겠지만, 어느 경우에는 쉽게 말하려던 것이 더 어렵게 되고 달리 말하는 것이 더 꼬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에게 애써 말하는 설명이 아니라, 순교라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했고, 말씀은 적중하여 많은 이들에게 올바로 해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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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랑의 복음을 전한 첫 열매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아드님을 지상에 파견하시고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여러 증인들의 기념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강생하신 목적, 곧 사람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하늘로 데려가시려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대화에 속하는 복음은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고, 그분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는 스승을 본받아 희생된 첫 어린양입니다. 가말리엘 학파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던 스테파노는 사도들의 설교를 충실히 받아들였고 일곱 부제 가운데 사랑의 봉사를 위하여 선발되었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복음을 가만히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반대와 폭력이 쏟아져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잃는 희생의 순간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증언하였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이들의 행렬을 이끕니다. 믿음의 영웅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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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오 10,17-18)
불편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분입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권력이나 부나 명예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환경 및 생태가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공동선의 세상을 이루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희망은 세례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인호로 새겨져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죽어서도 예수님의 영과 영원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은 순탄하거나 여유로운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기 전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이 땅의 순탄한 행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을 받고 난 후에야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참 행복은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라, 세상과 모든 사람의 행복입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증언하는 삶은 자칫 위험하고 불편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한 사람들은 특히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위해 투신합니다. 하늘나라의 사람은 불행한 사람의 행복과 희망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지만, 이 땅의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사람들의 행복마저 빼앗거나 돌을 던집니다.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파노처럼, 보이지 않는 돌을 가슴에 맞으면서도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시민들과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며 추운 길에서 몸을 던지고 있는 오늘의 작은 스테파노님들에게 따뜻한 마음모아 감사와 위로의 기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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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삼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입니까? 그의 책보다 아마 그의 삶이 먼저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산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근처 이웃들이 칸트를 보고 집의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하지요. 그만큼 그가 정확한 사람이라는 것일까요?
뇌과학자들은 일체의 잡념을 없애려면 뇌에 어떤 변화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변화에는 뇌가 곧바로 반응하기 때문에, 집중해야 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학문에 집중하기 위해, 삶의 일상 안에서 늘 똑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잡념 없이 어디에 온전하게 집중하려면, 일상의 규칙적인 루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에 신경 쓰는 우리입니다.
제게 많은 분이 기도하는데 잡념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기도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기도만 했다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만의 루틴이 필요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요?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에만 가서 기도하면 잡념 없이 주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은 내 삶 전체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주님께 제대로 집중하면서 그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를 기념합니다.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로,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유다인들의 공격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으니,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견디어 내면서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는데,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몸도 마음도 힘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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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마태오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제 잘난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속 검은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겉꾸미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말만하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움켜쥐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썩어빠진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가르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빼앗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죽이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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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을 지키는 일>
죽음에 직면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어디가 조금 아파도 걱정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를 꾸중하십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마태 8,26)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5) 하며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하고 외쳤습니다. 참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걸었던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느냐?”(성 에드몬드)
용서한다는 것이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이상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이 고난을 겪으셨으니, 제자가 또한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갈 것이고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미움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비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니 그대로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마태 10,16)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른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 믿음 안에서 부드러움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10,2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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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순교)-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어제의 주님 성탄의 탄일에 이어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천상 탄일입니다. 거룩하게 살았던 이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천상에서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천상 탄일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 의해 지명됐던 로마의 일곱부제중 한분이었던 성 스테파노입니다.
성 스테파노의 활약상은 사도행전 6장과 7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자기를 순교에 이르게 한 박해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을 닮은 순교의 죽음이요 임종어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영적전쟁의 여정입니다. 역시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이요 누구나 주님의 전사라는 신원을 지닙니다.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수도생활 초기부터 42년동안 한결같았던 제 소신이자 확신입니다. 지금도 아침 산책때 마다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며 영적전의를 새로이 합니다. 일부 가사를 제 처지에 맞게 바꾸어 부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2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청춘, 꽃다운 내청춘”
늘 불러도 늘 새로운 노래입니다. 늦깍기 34세에 시작한 수도생활이 42년이 흘러 지금은 76세이나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끝까지 영적전투에 충실하다가 전사함이 소원이겠습니다. 사고사나 병사, 객사가 아닌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는 제 소신은 여전합니다. 공부하다 죽던지 기도하다 죽던지 일하다 죽던지 셋중 하나인 순교적 죽음의 전사였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전사의 모범이, 영적전투의 모범이 성 스테파노입니다. 그대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사도들과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영적전투의 빛나는 모범들이 되었고 오늘도 면면히 신자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은 영적전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오늘날도 양상만 달리 할뿐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적전투의 현장입니다. “박해를 각오하라”는 제하의 오늘 복음중 각별한 대목을 나눕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바로 평생 영적전투에 성령이 최고의 조력자가 됨을 깨닫습니다. 성령으로 무장한 주님의 전사를 이길 자는 없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불후의 명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끝까지 견디어내는, 버티어내는 인내가 얼마나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의 순교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끝까지 견디어 인내하는 자가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영적승리자가 됩니다. 베네딕도 규칙 역시 수도공동생활에서 이런 인내를 강조합니다.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상호존경과 인내, 순종으로 이뤄진 얼마나 아름다운 주님의 전사들인 수도자들의 공동체 삶인지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영적전투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성 스타파노를 보십시오, 악을 악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선으로 대하며 싸웁니다. 성령과 지혜로 무장하여 싸우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성 스테파노를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자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집중 공격합니다. 늘 지상에서는 영적전투의 삶이지만 성 스테파노의 영적시선은 늘 천상의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신 것이 보입니다.”
천상의 예수님과 하느님이 성령 안에서 늘 성 스테파노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어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스테파노의 유명한 임종어의 기도요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영적승리의 순교의 죽음을 의미하는 임종어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기도한 후 무릎을 꿇고 큰 소리를 또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주님이자 스승 예수님을 닮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용서를 위한 기도입니다. 바로 놀랍게도 순교의 죽음 그 자리에는 미래의 바오로 사도가 될 사울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놀랍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는 순교자 성 테르툴리아노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우리 믿는 이들은 “그렇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한 성인들을 보유한 가톨릭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의 과거가 현재를 구하고,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 죽은 순교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어 오늘도 앞으로도 역사가 계속되는 한 부단히 산자들을 구하여 주님의 전사들이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빛나는 가톨릭교회 전통의 역사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주님의 성령과 지혜로 무장한 주님의 전사가,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희망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과 죽음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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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성탄절에 그리고 그것도 주님 성탄 바로 다음 날에
성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는지 그 의미가 오늘 본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고 스테파노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스테파노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신비는 교환의 신비이고 성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이 부활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육화의 신비는 주님의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 오르게 되고, 주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지요.
문제는 있습니다.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그 교환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교환하자고 하시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면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오르겠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어도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리 구원 열차에 오르라고 초대해도 우리가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스테파노는 이 교환의 제의에 처음으로 응답하여 처음으로 천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스테파노에 대해 사도행전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라고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라고도 하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적대자들을 이렇게 초대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 초대에 응답도 하지 않지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분노로 가득 찼기에 하늘 대신 스테파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냅니다.
스테파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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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성령의 힘으로!>
오늘 복음(마태10,17-22)은 '박해를 각오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열두 사도를 세상으로 파견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세상 안에서 복음 대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성령의 힘으로 끝까지 견디면서 이겨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땀 흘리셨고, 수난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도 너를 위해 땀 흘려야 하며, 신앙생활 안에서 찾아오는 크고 작은 모든 고통과 불편함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 너머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갈 때에도, "아버지,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루카 23,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7,59)라고 말하면서 죽었습니다.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성령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부활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성 스테파노처럼, 살아가려고 날마다 애쓰는 성령이 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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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가 무엇을 말 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 19)
성 스테파노의
여정에
함께하시는
성탄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최상의 평화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봉헌은
최고의
사랑이며
최후의
완성입니다.
성탄의 삶은
순교의
삶입니다.
삶이라는
한계상황에서
만나는
신앙의 뜨거운
진면목입니다.
순교의 사람은
비폭력의 길을
선택합니다.
비폭력의 실천이
바로 성탄의
실천입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
맡깁니다.
이 시대의
성탄과
이 시대의
순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더욱 빛나는
성탄이며
봉헌으로
더욱 뜨거워지는
사랑의 순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무엇을
내어맡기는지를
묻는 첫 순교자
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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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탄생이 신비이듯 모든 순교 또한 신비입니다. 모든 신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서 시작됩니다. 다시금 하느님께서 높아지시고 우리는 다시금 낮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생명이 생명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우리들에게 순교는 생명의 참된 의미가 하느님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수시로 무너져 내리는 우리의 믿음을 순교는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탄생 앞에 내어드릴 것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같은 믿음뿐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봉헌이 있습니다. 봉헌은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다시 보게 하며 깨닫게 합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들입니다. 박해는 하느님을 외면하기에 자신을 볼 순 없지만 순교는 하느님을 따르기에 자신과 주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성탄이며 사랑하기에 순교가 닫힌 하늘을 열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하느님 존재를 우리 현실 안으로 끌어들여 놓아주십니다.
순교 없이 생명은성장할 수 없듯 신앙 없이 생명은 하느님을 품을 수 없습니다. 순교는 성탄처럼 소금과 빛이 되는 탄생입니다. 하느님으로 행복한 우리의 성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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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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