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
강이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대금 연주가 한창이다.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소리에 취해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로 여남은 평 되는 마루가 빼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리에 듣는 이들의 가슴도 함께 저릿해진다. 무(無)의 공간을 꽉 채운 팔색조 같은 소리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대금에는 바람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지공이 있다. 취구와 첫 번째 지공 사이에 난 구멍을 청공이라 한다. 이곳에 떨림판 역할을 하는 청을 붙이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뽑아내어 만든다. 청은 대금의 소리를 더욱 신비하고도 생명력 있는 소리로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우리 가락 감상 동아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소탈하면서도 유쾌한 성격인 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국악에 관심이 많아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전통 악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장단이나 소리에 익숙지 않은 회원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며 우리 가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청 같은 존재였다.
청은 음력 오월 단옷날을 기준으로 약 일주일가량 채취한다. 갈대 속에 수분이 충분히 올라와 뽑아내기 쉽기 때문이다. 아랫마디의 것이 두껍고 윗마디로 올라갈수록 얇아진다. 얇은 것은 청소리가 쉽게 나기 때문에 산조대금에 붙여 사용하고 두꺼운 것은 주로 정악대금에 사용한다. 어렵게 채취한 청은 뜨거운 김과 찬김을 번갈아 가며 쏘여야 적절한 탄력이 생겨 맑은 소리를 만들어낸다.
소리나 악기에 문외한인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익히는 속도가 느려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리의 빠르기, 음의 고저장단도 잘 모르던 내가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고 따뜻하면서도 그윽한 소리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연배가 비슷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매사에 열정적이면서 겸손했으나 술 한 잔에 허허롭고 시린 마음을 쏟아내기도 했다. 무심한 듯 내뱉는 이야기 속엔 언뜻언뜻 외로움이 내비쳤다. 사람의 삶은 겉모습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듯싶었다.
평온하던 그의 가정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결혼 후 십여 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활동적이어서 바깥일에 분주한 아내와 다정다감하며 가정적인 그의 성격은 곳곳에서 부딪치며 충돌했다. 얇아서 따로 봉투나 주머니에 보관하지 않으면 작은 힘에도 잘 찢어지는 청은 항상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일교차가 심한 봄 날씨처럼 서로의 상처들을 보듬지 못한 부부 사이에는 조금씩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대편 의견을 존중하기보다 각자의 생각을 고집하다 보니 틈은 점점 벌어져 갔고 결국 이별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삶의 버팀목이었던 그의 이혼은 부모의 가슴에 대못으로 자리 잡았다. 아내가 떠나간 후 남겨진 남매를 끌어안은 그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대금은 취구를 통해 입김을 불어넣어 기본 소리를 내고 여섯 개의 지공을 여닫아 음높이를 조정한다. 숨을 불어넣는 입술의 각도와 입김의 빠르기, 양에 따라 청의 떨림이 다르다. 무작정 숨을 빠르게 많이 넣어도 안 되고 너무 느리고 적게 해도 안 된다. 호흡과 입김을 일정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입술의 각도를 바꿔 가며 연주해야 한다. 청은 저음부에서는 부드럽고 중음부에서는 맑으며, 고음부에서는 시원하고 장쾌한 소리가 나도록 숨을 조절해야 한다. 음계에 맞추어 호흡에 집중하면서 부단한 연습을 통해 숙달해야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청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떨림에 있다. 떨림이 없다면 결코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한쪽 날개가 꺾인 아들을 바라보며 상심한 어머니는 급기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아버지마저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두려움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어린 자식들의 흔들리는 눈망울과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그를 조금씩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떨림을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했다.
어름사니가 합죽선으로 허공에서 중심을 유지하듯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잡아 준 건 청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비참함이 달려들 때 젊은 시절 불던 대금을 손에 쥐었다.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사연들은 청을 떨며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민과 갈등, 눈물과 고뇌들이 소리에 섞여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혼자 끙끙거리며 힘들었던 순간을 숨에 실어 내뱉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힘이 났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마음 한구석에 늘 죄송함으로 남아 있던 양친도 편안한 안식을 얻어 떠났고, 홀로 키운 아이들도 잘 자라 제 자리를 찾아갔다. 마음의 평안을 찾은 그는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들려주려 했다. 대금 연주회는 그런 취지로 해마다 갈대꽃이 만발한 늦가을에 열린다.
지천명을 넘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편안한 삶 속에서 행복한 노래를 부른 적도 있지만 절망과 고통으로 감당하기 힘든 때도 많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을 만큼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순간 일어나는 삶의 떨림을 참고 견디다 보니 조금씩 용기도 생기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도 터득했다. 욕심도 두려움도 상처도 하나씩 내려놓으니 강의 하구처럼 잔잔해졌다.
청아한 울림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음색은 한없이 가녀리다가 금세 호쾌해지고 구슬프게 울다가도 웅혼하게 살아 숨 쉰다. 지공 위로 손가락이 넘나들고 들썩이는 팔꿈치에 음들이 파동을 친다. 진양조의 부드럽고 은은한 소리가 중모리와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로 변하는가 싶더니 폭발하듯 장쾌한 소리로 바뀐다. 희로애락이 묻어나는 연주에 좌중에선 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소리는 다시 진양조가 되고 연주는 끝이 났다. 그가 밝은 웃음을 머금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다. 대지는 가을비에 젖어 촉촉해지고 소리에 젖은 내 마음도 어느새 고요해진다.
(안희옥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