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신앙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출처: 저는 주님의 종 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如山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