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졸업 여행>/신아문예대학 구연식
여행은 언제든 누구한테나 여행지의 기대와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의 출발이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손톱의 봉숭아 꽃물처럼 기다려지는가 보다. 내가 봉사하고 있는 대안학교에는 대부분 늦깎이 학생이다. 도화지에 수채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과거를 생각하면서 하루해가 짧고 애틋한 심정으로 수업에 임하고 있다. 때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히게 하여 격려의 등을 토닥거려 주기도 한다.
오늘은 이 늦깎이 학생들의 3년 마무리를 앞둔 졸업여행 날이다. 행선지는 호남선의 종착역 목포항구의 일원이다. 9시 출발인데 이른 아침에 나와서 턱에다 손을 받치고 관광버스가 늦게 온다고 칭얼거리듯 푸념하는 학생도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짐 꾸러미를 보니 그 옛날 화전(花煎) 놀이인 양 바리바리 들고 온다. 관광버스는 새벽안개 자욱한 도심을 뚫고 어느 사이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달력의 날짜는 빨라도 계절은 늦어서인지 가을걷이는 아직은 뜸하다.
어느 학생은 지금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네모진 큰 보자기를 풀고 일회용 접시에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을 감칠맛 나는 양념간장을 듬뿍 뿌려 앞자리부터 나누어 준다. 오늘 학생 전원과 선생님들을 대접하려고 며칠 전부터 온 식구가 매달려 도토리를 줍고 준비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은 너무 맛있어서 손뼉 치랴 먹느라 바쁘다. 천등산 금봉이는 요깃거리로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달고 박달재를 힘들게 넘었지만, 나는 어느 정승 부럽지 않게 도토리묵을 별미로 먹으면서 고속도로를 미끄러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계절 음식으로 어머니가 해주시던 도토리묵과 어머니가 오버랩 되어 차장 밖에서 아른거린다.
드디어 제1코스인 유달산 북항 케이블카 탑승지에 도착했다. 몸이 불편한 학생이 있어 선생님 중에 제일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몸과 마음을 겸비한 M 선생이 휠체어를 대여하여 오늘 하루 봉사활동을 자처하여 돌보고 있다. 젊은 남동생과 누이처럼 보기가 좋다. 천사는 여자인데 남자 천사도 있는가 보다. 총길이 3.23km 왕복 40분의 고하도(高下島)를 향해 몸을 실었다. 하늘도 맑고 바다도 고와 경계가 구분이 안 되는 좋은 날씨와 풍광이다. 신선이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나처럼 홍진(紅塵)에 찌들어 있는 인간은 옥황상제가 바다에 풍덩 떨어뜨릴 것 같다. 모두 다 좋아서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고하도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훈련하는 병사들의 기합 소리와 대장간에서 무기를 담금질하는 쇠망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승리 후 전열의 재정비를 위해 106일 동안 머물면서 군량미(軍糧米) 전선(戰船) 그리고 병사(兵士)를 모아 훈련했던 곳이다. 결국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7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전략기지로 유명하다. 전망대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길섶에는 아침 이슬에 고양이 세수를 했는지 들국화 꽃잎이 한쪽은 먼지가 그대로 있고 다른 한쪽은 이슬방울이 씻고 간 흔적의 얼굴로 보시시 들어 보이니, 임진왜란의 영혼들 표정처럼 보여 숙연해진다. 가까이 보니 고양이 세수가 아니고, 눈물자국이었다.
전망대 언덕에 오르니 트로이 목마 같은 거대한 목조건물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판옥선(板屋船) 13척을 격자형으로 쌓아 놓은 독특한 모양의 24m 6층 규모의 전망대로 충무공의 위용을 보는듯했다.
점심은 조기 매운탕이다. 그리고 아까 실컷 먹었던 도토리묵을 다시 가져와 내놓는다. 도토리묵 안주에 어울리는 막걸리를 가져온다. 도토리묵과 막걸리가 뱃속에서 어우러져 발효되어 가중된 취기가 온몸에 퍼진다. 술꾼들의 표현인 알딸딸하여 생각이 흐려지면서 모두 다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공교롭게 식당 앞은 카 페리호 선착장이다. 그 옛날 현직 시절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오면서 “선생님 취하셨어요?”라고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보니 몇 초 동안 취중이 몇 십 년의 과거를 보여주었다.
자연사박물관에서는 공룡화석 동식물 광물 등 서남권 문화와 해양 문화를 대표하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때마침 현대 한국 나전칠기 36인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여자이면 누구나 안방에 꾸며 보고 싶은 전통 가구들이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체하여 최종코스인 갓 바위는 대충 보며 인증 샷으로 마무리하고 버스는 익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벌써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숨어 버려, 기다렸다는 듯이 땅거미가 어슬렁어슬렁 기어다니고 있다. 자동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눈을 비비면서 조심스럽게 달린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노래자랑이 시작되었다. 모두 다 저문 나이에 입학한 학생들이다. 레퍼토리 역시 흘러간 노래로 목가적이고 순애보 같은 테마로 가슴을 적시는 노래들이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을 토로(吐露)하는 흑백영화를 보는듯하여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촉촉함을 느꼈다.
오늘 밤은 음력 열 하룻날 이어서 반달을 넘어 복순이처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달님은 ‘오늘 늦깎이 졸업여행을 알뜰하고 세심히 기획하고 협조하신 여러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라고 하늘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다. 남쪽 목포 밤하늘에는 유성(流星)이 큰 붓으로 창공에 느낌표(!)를 주∼욱 그으며 늦깎이 졸업 여행을 축하하고 있다.(2023.10.25. 음 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