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밤입니다.
5월의 이 아름다운 밤에 우리는 성모의 밤을 지내려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성모의 밤은 무엇을 하는 날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씀 드리자면 성모의 밤은 성모성월의 한 밤에 성모 마리아를 특별한 사랑으로 공경하는 행사를 하는 날을 말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마리아’ 라는 세례명을 가지신 분 한 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마리아’ 라는 이름의 뜻을 아시는 분 혹시 있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뜻은 “가장 높으신 분, 존귀한 분,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존귀한 이름을 받았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를 공경하는 데에는 아주 특별합니다.
실제로 예를 들어볼까요?
어느 성당이든지 입구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성모상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어디에 인사를 합니까?
이것 역시 성모상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기도는?
묵주기도입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성물은?
묵주와 성모상이랍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예로도 우리는 성모님을 특별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의 이런 행동을 보고 천주교회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천주교회는 마리아 교회다”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는 마리아라는 우상을 섬기는 옳지 못한 교회”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천주교 신자 중에 어떤 분들은 개신교 신자들이 우리 천주교회를 오해하는 말을 하는 데에도 제대로 이해를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가 공경하는 마리아는 어떤 분인지, 그리고 우리는 마리아를 왜 공경하는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민 윤리’ 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이 과목에는 동서양의 종교를 소개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는 윤리 선생님은 당신 나름대로 틀을 갖고 종교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종교의 신앙 대상은 누구이고, 교주는 누구이다....’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우리 천주교를 소개하는 데에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천주교의 신앙 대상은 마리아이고, 교주는 로마 교황이다.”
저는 너무 황당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따졌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천주교회에 다니는데 천주교회는 마리아를 믿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주가 교황이라는 말씀도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천주교회 신자들의 행동이라든지 또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등을 예를 들면서 당신의 말씀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이 틀리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생님이라는 권위(?)에 눌려 그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제가 한 마디 말씀만 더 드려도 몇 대 얻어맞을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선생님이 열변을 토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선생님은 어떤 개신교의 집사님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신학생 때 일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개신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 친구와는 제가 신학생 때에도 일년에 몇 번씩은 만나고, 자주 편지 왕래도 하던 사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자기는 이해 할 수 없다.
기도는 하느님께 해야지 왜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냐!’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은 성모상만 보아도 소름이 돋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천주교 신학교에서 나와 개신교 신학교에 다니고 목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면 아주 훌륭한 목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때의 경험도 있고, 또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도 있고 해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런 것입니다.
‘너는 우리에게 우상을 섬긴다고 했는데 우리는 결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신으로써 흠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흠숭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는 것이다.
흠숭은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마리아에게 흠숭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서두를 꺼냈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긴장하지 마세요.
초등학교 3학년 첫 영성체 교리 수준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믿습니까?
마리아라는 하느님입니까?
........................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계속 편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너는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고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린다 했는데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우리는 성인들과 마리아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성모송을 보아도 그 기도문은 -우리를 위해 기도 드려 달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는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 달라는 기도 부탁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께 직접 기도하지 왜 구태여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기도를 부탁하느냐 하면, 이 분들이 이 세상의 삶을 살 때에 가장 완벽하게 신앙 생활을 했고, 따라서 지금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계신 분들이기에 이분들께 기도를 부탁 드리는 것이다.
우리 역시 편지를 쓸 때나 안부를 물을 때에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라든지 -나를 위해 기도 해다오- 라는 말을 하지 않는가?
바로 이런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마리아 상에 인사를 하고 기도하는 것은 마리아 상을 신으로 생각해서가 결코 아니다.
너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부모님 생각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전화로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던지, 아니면 부모님 사진을 보지 않느냐?
그렇다고 네가 보고 있는 부모님 사진 자체를 너는 네 부모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모상 자체를 성모님이라든지, 하느님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성모상을 보면서 보다 가까이 느끼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기본적으로 이런 마음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성모의 밤을 지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갈릴레아라고 불리는 가난한 시골지방 지방에서도 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나자렛이라는 촌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지쳐 일그러진 모습들을 보며 자란 그 소녀는 자신의 삶의 주변의 비인간적인 삶의 모습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동네 어른들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라고 믿고 있던 하느님만이 자신들을 그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그분은 우리를 죄와 어두움에서 해방시켜주실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분에게 자신의 모든 소망을 걸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던 ‘마니휘깟’이라 불리던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담긴 노래를 자신의 희망이 담긴 노래로 여겨 참으로 즐겨 불렀고, 그 노래의 가사가 성취되는데 자신이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늘 바라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참으로 맑고 순수한 한 소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하느님께서는 인류전체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당신의 엄청난 계획에 그녀를 쓰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에 어울리는 자는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는 찬란한 궁궐의 왕도, 어느 씩씩하고 잘 생긴 용사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골 촌동네의 아무 힘도 없는, 그러나 그분을 믿고 따르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간직한, 그리고 그분의 구원하는 힘이 자기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 도구로 자신도 쓰여질 수 있다고 믿으며 늘 기도해 온 그런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가 주님의 천사로부터 그토록 놀라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라는 놀라운 신앙의 응답을 자신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자신의 삶의 자세와 관계없이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엉뚱한 용기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의 영화만을 추구하다가 그런 엄청난 고통의 길에 선뜻 응답하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혹시 그 순간의 만용으로 응답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응답이었다면, 어떻게 평생을 그 응답에 충실하며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응답으로 인해서 따라오는 삶은 영광 가득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함으로써 따라오는 죽을 위험뿐만이 아니라, 피땀 흘리는 아들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어머니의 고통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또한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통한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그분이 이러한 삶까지도 감수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예"라고 응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예"라는 응답으로,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응답에 충실하였던 삶으로 그분은 구세주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광 받으신 성모님은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20대의 처녀로 아름다웠던 성모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가난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흙장난하는 시골 동네의 꼬마 소녀였고, 누구나 희망 가득한 아름다운 처녀 시절에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잉태하여 파혼까지 당할 뻔한 불쌍한 여자였고, 다 길러놓은 자식 마저 권력의 손에 살해당할 때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시골 아낙이었으며, 아들의 부활 이후 아들의 제자들이란 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기도할 때는 이미 다 늙어버린 그런 평범한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상상을 해 봅시다.
치과도 없던 시절 이빨도 다 빠져버린 그런 할머니 성모님을 말입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성모님은 그렇게 인생을 살아오신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는 공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예"라는 그분의 응답과 그 응답에 충실한 그분의 삶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꽃으로 꾸며드리는 아름다운 성모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을 공경하면서 오늘 드리는 이 예절도 그분의 삶이 너무도 놀라와, 그런 삶까지도 감내하시면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주신 것이 너무도 고마워서, 꽃 들고 촛불 들고 그분에게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당신이 그렇게 사셨듯이 우리도 참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예’라고 응답하며, 그 응답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이니 우리의 어머니도 되어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당신 아드님이 죽음을 당하실 때, 십자가 곁에 머물러 계셨듯이 우리가 올바른 신앙의 삶을 위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도 우리 곁에 함께 계시어 우리의 위로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밤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성모상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 성모의 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을 봉헌하기 위해서 성모의 밤은 존재합니다.
환상 속에 묻힌 신앙은 닥쳐오는 고난 앞에서 깨어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삶을 먼저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드리는 꽃과 촛불들은 참으로 그분에게 어울리게 그분을 장식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성모님 공경이 참으로 의미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토록 하는 제 동료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그 동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동료를 통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기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부제 때 2월쯤의 일이었습니다.
제 동료 부제의 아버님은 전주 교구의 어느 조그만 본당의 사무장님이셨습니다.
그 본당의 신자들은 나주의 피눈물 흘리는 성모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철야기도를 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 부제의 아버님은 가끔씩 봉고차로 그 분들을 모셔다 드리곤 했는데, 그날도 철야기도를 가시는 분들을 전주에서 나주까지 모셔다 드리고는 식사하시러 가셨다가 소식이 끊겼다고 합니다.
철야기도를 가셨던 분들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친구의 아버님이 나타나시지 않자, 타고 간 봉고는 근처에 있었지만 다른 차로 전주로 돌아 왔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돌아오시지 않자 걱정하던 가족들은, 다음날 오후에야 아버님
이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나주의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동료의 아버님은 식당을 찾아가기 위해 시골도로의 갓길을 걸어가시다가 밤늦게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백미러에 가슴을 부딪치셨던 모양으로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백미러 조각과 얼어붙은 땅만이 파헤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동료의 아버님은 가슴이 백미러에 부딪침으로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찔렀고, 고통에 겨워 땅을 파헤치느라 손톱이 다 헤어져 피투성이였으며, 결국 혼절하셨던 모양입니다.
사고 차는 뺑소니를 치고, 다음날 아침까지도 지나던 행인들에게조차 술 취한 행인 정도로 여겨졌었나 봅니다.
겨우 발견되어 동사를 면한 동료의 아버님은 폐출혈로 사경을 헤메셨고, 충격으로 약간의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셨습니다.
동료의 아버님은 나주병원으로 두 달 동안이나 입원해 계셨고 결국 전북대 병원으로 옮겨 장기간의 치료를 받고 퇴원하셨지만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합니다.
저의 동료 부제는 그 일로 인해 내색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제가 괴로워했던 것은 뺑소니 차 운전수의 몰양심이나 길 가던 행인들의 무관심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더 근본적인 것은 철야 기도를 다니던 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철야 기도를 갔던 그분들은, 아침이 되어 돌아올 시간이 되자, 근처에 차가 있고 사람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주변을 찾아보신 분은 없었으며, 나주 병원에 두 달 동안 입원해 계시는 동안에도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찾아 몇 번이나 철야기도를 다녀갔지만 그 중의 단 한 사람도 사무장님을 위해 병원을 찾아오신 분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동료는 그 문제로 한동안 괴로워했으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다가 차에 치여 쓰러져 아무런 힘도 없는 분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 뵙지 못하는 분들은,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위해서 매일 철야기도를 바친다 해도, 살아 계신 성모님을 만나 뵙고, 더 나아가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뵙더라도 아마 그분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동료의 아버님과 함께 철야기도를 갔던 분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기념하며 우리의 신앙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성모 공경은 이처럼 맹목적인 흠숭과 찬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응답하며 세상을 참되게 살아가신 그분의 신앙을 우리의 신앙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성모의 밤을 지내고 있는 이 순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 앞에 “예” 라고 응답하심으로서 살아가셨던 모범적인 삶을 본받아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 “예”라고 응답하며 우리의 삶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결심하도록 합시다.
첫댓글 갑자기 가슴이 아파옵니다.성모님의 발현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따지는게 아니라,참으로 무지한 신자가 많음에 마음이 서러워요.저도 성모님을 사랑하고 개신교의 신자들에게 성모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 그분들의 까페에 가입했던적도 있었습니다만,저의 글로 어찌 그분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지겠는지요.다만 기도하며 그 가엾은 분들을 성모성심께 특별히 봉헌하였습니다.문제는 우리 신자들의 성모님께 대한 맹목적인 신앙입니다.이웃사랑의 계명도 못지키면서 기도만 하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자기들을 위해 봉사하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신 분을 모른체 하다니요.씁쓸한 마음으로 저부터 반성합니다.아멘.성모님은 찬미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