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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희] 내시의 딸 - 열 가구가 사는 집 8
한 낮에 문숙이와 내가 마루에 누워 뒹굴거리는데 현미엄마는 우리끼리만 있는 것을 만만하게 알고
안채 마루로 삼 타래를 들고 왔다.
가장 더운 한낮 방에 앉아서 일을 하기보다야 우리 집 시원한 대청마루가 훨씬 좋은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삼 타래를 가지고 온 것이다.
우리들은 현미엄마의 삼 끈 잇는 일을 해보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끈을 잇는 일은 되지 않았고 자꾸 자꾸 실만 엉켜놓았다.
현미엄마는 그런 문숙이에게는 험악한 얼굴을 해도 나에게는 싫은 표정을 하지 않았다.
문숙이는 그런 현미엄마가 좀 얄미운지 "승화야. 오늘 엄마들 일찍 온 댔지?"라고 말했다.
나는 얼른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응. 오늘은 쌀 가지러 가는 날이라던데"라고 했다.
현미엄마는 그 말을 듣고는 허겁지겁 '다라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리들은 현미엄마가 떠나가자 둘이 깔깔대면서 웃었다.
그때였다.
"야, 너희들 만화책 볼래?"
진봉이가 왔다.
우리는 최씨네의 진봉이하고 말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말이 진봉이지 진봉이는 중학생이고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조금 의젓한 채 하며
대문을 나설 때면 교복이 주는 어떤 권위 같은 것에 우리는 조금 위축되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니 말을 해 본 적은 더더구나 없는 터였다.
중학생 진봉이는 우리 곁으로 왔다.
"너희들 만화책 보니?"
나랑 문숙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 글씨 몰라."
문숙이가 아주 떳떳하게 말하였다.
문숙이에게 대단한 점은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면 오히려 더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아하, 그렇지. 그럼 너희들. 엄희자 몰라?"
우리가 고개를 또 가로 저었다.
"만화 그림 중에 제일 예쁘게 그리는 작가야."
진봉이는 굳이 만화책을 꺼내어 그 그림을 우리 눈앞에 펼쳐놓았다.
우리에게 꼭 인준을 받아야 할 급한 서류라도 되는 양 진봉이는 정성스럽게 그 그림을 우리 앞에 잘 보이도록 펼쳐 준 것이다.
정말 그림은 아름다웠다.
눈이 시원하게 그려져 있고 크게 쌍꺼풀 진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엄희자 그림이 좋아서 자주 보는 편이야.
사실 내용은 좀 별로야."
아주 의젓하게 진봉이가 말했다.
그때 문숙이가 "그래서?" 아주 도전적으로 말하였다.
사실 문숙이도 나도 진봉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지난 날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온다며 선풍기며 곤로를 빌려오라고 한나절을 떼를 쓰던 그 중학생.
결국 문숙엄마의 노력으로 그 예나 선풍기나 곤로를 모두 다 빌려다 놓았던 그 날을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진봉이네와 문숙이네 다른 방 사람들이 모두가 허물없이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문숙이네도 미숙이네도 우리도 진봉이네도 모두가 동업자의 관계가 아니던가.
조금 큰 아이로써 아이들끼리만 있는 우리들을 어떻게 든 좀 돌봐주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처럼
진봉이는 우리들에게 호의로 다가왔다.
그러니 진봉이가 굳이 우리들에게 온 이유는 다만 저 혼자 심심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문숙이는 처음에 누구에게든 좀 무뚝뚝하다.
친해 놓고 보면 참으로 좋은 친구지만 처음에는 누구보다 차가워 보이는 것이 문숙이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진봉이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문숙이의 태도에도 진봉이는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였다.
"나 엄희자 만화 그릴 줄 안다."
"정말?"
우리 둘은 똑같이 말하였다.
"응"
"정말 똑 같이 그릴 수 있어?"
"엄희자 그림이 좋아서 나는 매일처럼 보다보니 그림도 그리게 되더라구.
사실 비슷하긴 해도 똑같지는 않아."
"보여줘.
보여줘 봐."
문숙이는 마치 못 믿겠다는 듯 진봉이를 다그쳤다.
"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냐?"
"그래도 증거를 보여줘 봐."
마치 무슨 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문숙이는 진봉이를 다그쳤다.
"알았어.
보여주지 뭐."
진봉이는 그렇게 선선히 일어나서는 얼른 방에서 공책을 한 권 가지고 왔다.
그 공책에는 이미 엄희자 만화의 모든 주인공이 정말 만화가의 그림처럼 아주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와 정말 똑같네."
문숙이가 외쳤다. 아닌게 아니라 그 그림은 만화가의 실력을 뺨치는 솜씨였다.
어떻게 보면 엄희자의 백치미 같은 얼굴보다는 좀 더 눈빛이 또렷하고 어쩌면 더 살아있는 듯한 그림 같기만 했다.
"정말 이거 그린 거야?"
문숙이는 진봉이가 그려 온 그림을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 다는 듯 진봉이를 채근했다.
진봉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방으로 갔고 연필 한 자루와 공책 한 권을 또 들고 마루로 나왔다.
그리고 진봉이는 그 연필을 가지고 그림을 쓱쓱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시작한 선은 곧 얼굴 윤곽을 그리고 머리 선을 그리고 또 눈을 그리기 시작했다.
위 아래의 괄호 같은 그런 굵은 선을 그리더니 그 가운데 동그라미를 넣고는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려낸 것이다.
"우와."
우리는 진짜 환호성을 울렸다.
진봉이는 또 그림을 그렸다.
마치 그 연필은 요술의 연필만 같아서 나는 너무너무 신기했다.
"예쁘니?"
진봉이의 말에 우리는 합창처럼 "응, 너무너무 예뻐."
"이것은 누구나 연습만 하면 그릴 수 있어."
"정말?"
우리들은 그 그림에 취하여 진봉이에게 연신 그림을 그리라고 재촉하였고 마루 바닥에 배를 죽 깔은
세 명의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와 그 그림을 보는 것에 빠져들었다.
진봉이는 우리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운 듯 계속 그림을 그려대었다.
긴 머리의 공주를 그리고 또 교복을 입은 여학생도 그리고 또 아름다운 아줌마도 그렸다.
눈이 깊은 아줌마를 그려내고는 진봉이는 멋 적은 듯 한 번 웃었다.
나는 그 아줌마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그림 나 주면 안돼?"
"이거?"
진봉이는 웃으면서 아주 선선히 그 그림을 나에게 뜯어주었다.
"정말 예쁘다."
문숙이도 감탄하였다.
"너두 줄까?"
진봉이는 아무 말도 않는 문숙이에게 자청했지만 문숙이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싫어. 그림은 그냥 보는 것이 좋지.
내가 갖고 더럽히면 뭐해."
진봉이가 싱긋 웃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보여만 줘."
문숙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우리 집엔 둘 곳도 없어.
삼촌이 보면 아마 다 무슨 알지 못할 글씨로 다 덮어놓을 거야."
진봉이는 "그래두 가져. 만약 그렇게 되면 또 그려주면 되지 뭐."
"정말?"
문숙이의 눈이 반짝 빛났고 문숙이도 그 그림을 얻고야 말았다.
우리들은 진봉이의 그림 실력에 껌뻑 죽어서 둘 다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바라보고 바라보고를 반복하였다.
"신기하다."
"그러게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그리니?"
정말 진봉이는 그림을 무척 잘 그렸고 거의 만화가의 실력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만화책을 뒤적거렸다.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예쁜 그림을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이었다.
그리고 그 예쁜 그림이 있는 곳을 찾으면 진봉이에게 주었다.
진봉이는 그렇게 예쁜 주인공을 보면 그 그림을 흉내내어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만화의 그림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만화와는 다른 생동감을 느껴서 우리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때였다. 문식이가 안채로 뛰어 들어왔다.
"집 짓는다.
도라꾸도 왔어."
"어디에?"
우리들의 물음에 문식이가 우리 대청 뒤를 가르쳤고 우리는 대청에서 뒷마루 쪽을 내다보았다.
우리 뒷마루의 문을 열면 그것은 완전 도라지 밭이었다.
대대로 심어 놓은 도라지 밭에는 누가 가꾸지 않아도 도라지가 자라나 여름이면 도라지 꽃 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공처럼 타원형의 긴 하얀 꽃송이는 하늘을 보고 뻗어 피었고 보라색 도라지꽃에 흰 도라지꽃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참 도라지꽃도 곱다."
우리가 보려던 것이 도라꾸와 집 짓는 풍경이었지만 우리는 도라지꽃부터 감격을 하였다.
정말 우리 사당 옆의 빈 공터에는 커다란 트럭이 자재를 쏟아놓고는 다시 나가고 또 들어오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경난 듯이 그 곳으로 갔다.
우리들이 달려갔을 때 벌써 인부들이 하얗게 흩어져서 집을 짓고 있었다.
벽돌을 내리는 사람, 그 벽돌을 쌓는 사람.
시멘트를 반죽하는 사람 등 인부만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우리 작은 아저씨가 그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작은 아저씨가 어떤 하얀 종이를 들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이 뭐라고 하고 작은 아저씨가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집 짓는 것을 뭐 안다고 그러세요.
에이 "
"뭐, 에이?
당신들 이런 식으로 하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구."
"평당 그렇게 낮은 단가로 지으라면 결국 기름종이 덮은 집이나 지으시구려."
"뭐라구?"
마치 싸움닭처럼 또 작은 아저씨가 불끈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느긋해 보이는 현장감독은 "집 짓는 우리 건드려 봐야 공사만 지연되지. 자 자 참으시고."
작은 아저씨는 그래도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뭐라고 계속 말을 하였다.
나는 반가움에 작은 아저씨에게로 갔다.
"작은 아저씨."
"승화야."
그렇게 이마에 핏대를 세우던 우리 작은 아저씨가 나를 보자 환하게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그대로 뛰어가 작은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작은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벙글벙글 웃기 시작하였다.
"집을 지을 거란다.
이층집을 말이다."
"이층집이나요?"
"그래 지붕을 슬라브로 올린 그런 이층집을 지을 거야."
작은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얼굴이 상기되었다.
나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 어떤 불안하고 서운한 그런 마음이 쓱 밀려왔다.
왜 그랬을까?
아마 그냥 평소에 작은 아저씨가 이층집을 짓는다고 하면 그것은 내 집이었고 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런 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아저씨가 이 집을 짓는 까닭은 분명 그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마음을 미리 짐작하면서 이상하게 어떤 소외감 같은 것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불안하게 울려 퍼졌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다시는 작은 아저씨를 찾지 않았다.
우리 사당 옆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집을 짓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들은 집을 짓는 공사장에 자주 갔다.
공사장에는 이상한 돌멩이도 많고 잣치기를 할 수 있을 만한 막대기도 마구 굴러다녔기 때문이다.
문숙이는 나의 눈치를 보면서 "여기 이층집을 짓는 거라면서?"라고 했다.
"응"
나는 좀 힘없이 대답했다.
아이들은 이층집이라는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말로만 듣던 이층집.
제일 시장 근처에 이층집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런 집을 들어가 본 일은 없었다.
그래서 어서 집이 완성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층집이 작은 아저씨의 집인데 더러 들어가 볼 수는 있을 것이 아닌가?
이층집이 하나하나 올라가는 것이 나는 무슨 요술같기만 했다.
처음에 작은 아저씨가 좀 성을 내긴 하였지만 그래도 집 짓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이제는 집의 골격이 서고 벌써 창문까지 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간촌 아저씨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 뒤에는 아주 뚱뚱하고 화장이 진한 여인도 함께였다.
"아이고 다 지으려면 안적 멀었네."
여자가 말하였다.
"아이고, 우리 승화구나."
간촌 아저씨가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간촌 아저씨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서늘한 기운이 왔다.
나는 멈칫 서면서 뒤로 물러나는데 내 뒤에서 문숙이가 나를 꼭 잡았다.
간촌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승화야.
인사해라. 너희 작은 어머니가 되실 분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뚱뚱한 아줌마와 간촌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나 같은 존재는 아랑곳없다는 듯 이리저리 집 짓는 것을 둘러보았다.
"평수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가 보네요."
"아, 돈이 없나 뭐가 없나.
집이야 저만하면 대궐이고 마당도 저만하면..."
간촌 아저씨가 그 아줌마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였다.
"야! 서울대학교!"
문숙이네 삼촌이 미친 듯이 뛰어 오고 있었다.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바지 허리띠로 넥타이로 동여 맨 그 사람은 문숙이 삼촌이었다.
문숙이 삼촌은 간촌 아저씨에게 맹렬하게 다가갔다.
마치 나를 만지려는 간촌 아저씨를 저지하기라도 할 듯...
"어어, 잠깐 잠깐."
마치 어떤 사람을 검문하듯이 그렇게 말하는 문숙이 삼촌은 한 눈에 보기에도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야! 서울 대학교."
서울 대학교를 다녔다는 문숙이 삼촌 덕에 우리동네 벽이란 벽은 온통 읽지도 못할 한문이나 영어로 가득 낙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 무엇이 영어이고 무엇이 한문인지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혼잣말을 하던 것을 기억했다.
"허 볼수록 문장이로세."
아버지가 얼마나 학문에 대한 안목이 있는 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가끔 문숙이 삼촌이 낙서를 해 놓은 벽에 서서
그 문장들을 줄줄이 읽어보곤 하였다.
낙서가 아니라 마치 정서를 해 놓은 듯 가지런한 글씨의 낙서는 시도 씌어져 있고 무슨 구호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법과 관련된 법 용어들이라는데 왜 그가 저런 학식과 문장력을 지니고도 그냥 정신을 놓아 버렸는 지가
늘 궁금하였다.
깔끔한 화장품 장수 옥주엄마는 가끔 "나 같으면 과부집 딸라 변을 내서라도 굿 한 번 한다."했다.
미숙엄마가 "진짜 굿하면 낫나? 본정신으로 돌아와?"하고 물었고 옥주엄마가 자신에 차서
"우리 시골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굿하고서 바로 낫잖아."했다.
문숙엄마도 그런 시동생을 위하여 굿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사실 그런 삼촌을 위하여 굿을 할만한 여유는 애초에 없었다.
본시 영재였던 시댁의 시동생, 그 좋은 대학에 장학생으로 붙었던 그 청년이 왜 정신을 놓게 되었는지가 우리들 모두에게는
그냥 궁금증이었다.
문숙이 삼촌은 한 떼거리로 몰려서있는 우리들을 보더니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우리한테로 뛰어왔다.
그런데 졸지 간에 문숙이 삼촌이 마구 뛰어오자 그 간촌 아저씨는 별안간에 당한 일이라 옆 공사장의 막대기를 먼저 번쩍 들었다.
마치 그 지팡이로 문숙이 삼촌을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그 뚱뚱한 아줌마는 얼른 자기 옆의 남자 뒤로 숨어 버렸다.
모여 섰던 우리 조무라기 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아 하고 웃어 버렸다.
우리들이 웃는 서슬에 그 아저씨는 멋 적은 지 지팡이를 내려놓았고 우리들은 그 구경거리를 유쾌하게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문숙이가 자기 삼촌을 가로막으며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마치 삼촌을 때리려고 한 그 간촌 아저씨를 향해 던지기라도 할 듯이.
그 아저씨는 그제야 자기 꼴이 우습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문숙이가 막대기를 집어들자 간촌아저씨는 헛웃음을 웃으면서 "얘야 왜 그러니? 애가 그런 건 왜 집어들어?"라고 말하였지만
조금은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문숙이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간촌 아저씨를 바라보는 그 눈은 적의에 가득 찬 그런 눈이었다.
문숙이는 그렇게 서서 한참을 간촌 아저씨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간촌 아저씨는 아주 더 강하게 그 어린 문숙이를 쏘아보는 것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정의감이 참 강한 편이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뒷짐을 척하고 쥔 채 간촌 아저씨를 노려보았다.
나는 속으로 아저씨가 뭔데 우리 작은 아저씨네 집을 함부로 구경하느냐는 그 뜻이었다.
우리들의 행동을 본 간촌아저씨는 다소 풀이 죽었지만 아주 강한 눈빛을 우리들에게 이글이글 태우면서
"에이, 어린것들이 버르장머리가 없이"라고 내 뱉었다.
"어흠 어흐흠"
괜히 헛기침을 하지만 자칫 이런 어린아이들을 보고 상대를 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겠거니 하는 표정으로 그냥 고개를 돌렸다.
"승화야.
내가 왔다갔다는 말은 너의 작은 아저씨한테는 말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고는 그가 떠나려고 했다.
"에이 운수가 사나우려니 원."
이렇게 말하는 간촌 아저씨의 얼굴은 상당히 찌그러져 있어서 문숙이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상당히 당황한 것은 분명한 눈치였다.
"어여 갑시다. 집이야 다 지어져야 보는 거지만 서두."
뚱뚱한 여인은 우리들을 힐긋 보면서 마치 힐난을 하듯 하얀 눈자위를 올리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아가, 다음에 또 보자."
나에게 다가서는 그 여인은 굳이 지갑을 열어 십 원 한 닢을 내게 주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받지 않았다.
"어른이 주는 거는 받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서 역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된 화장품에서 나는 듯한 맡기가 괴로운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를 안다.
언제 적인가 그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올 설날 다음 날이었다. 설날 며칠을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던 작은아버지는 그 날도 늦은 아침을 우리 집에서 해결했을 때였다.
마당에서 아이들과 뛰다가 들어온 나에게 말했다.
"승화야.
작은 아저씨한테 절 좀 해 봐라."
절이야 바로 어제 세배를 했지 않은가 하면서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지금 승화한테 뭐를 줄 건데 절을 하면 준다는 말이다."
아저씨는 벙글벙글 웃으셨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얼굴은 즐거움이 넘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굳이 선물이라고는 하지 않고 뭐라고만 했을 그것이 무엇인지 참 궁금했다.
"절해요?"
나야 절을 잘 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터이므로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아갈 듯이 가쁜하게 작은 아저씨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부엌에서 들어 온 엄마는 행주치마에 무언 가를 감싸안은 듯 하더니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거 승화 줄라고 작은 아저씨가 가져왔다."
그것은 빈 병들이었다.
아마 그것은 남성 화장품의 빈 병이었을 것이다.
포마드 병이 여러 종류가 있고 향수 같은 것이 들어있던 병 같기도 했지만 그 병들은 너무나 모양들이 신기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검은 병은 쪼글쪼글 한 게 속에 검은 꿀이 들어 있을 법도하고 반듯한 포마드 병은 나는 배추김치 독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연두색의 아름다운 병과 하얀 색깔의 병, 파란 빛이 나는 병 등 각양 각색의 병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작은 아저씨가 우리 승화 줄려고 가져왔지."
소꿉이라고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던 나는 가장 아름다운 병들을 모아 소꿉놀이의 새살림을 장만한 것 같았다.
나는 그 후로 잡다한 소꿉놀이들을 엄마로부터 받았지만 그 병들만큼 예쁜 소꿉장난을 가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윗목에는 또 한 아름의 화장품이 있었다.
"아주머니 그거 쓰시기는 뭐 할 거예요.
워낙 오래된 것이라.
그래도 안에 화장품이 들어있어서 물에 가셔버리기는 좀 그래서요."
내가 가진 화장품보다도 더 용기가 예쁜 그 화장품들을 보고는 나는 무릎으로 설설 기어 올라갔다.
"이게 다 화장품이야."
뚜껑을 열고 열심히 냄새를 맡아보던 나는 혼비백산했다.
이미 그 화장품들은 유통기간을 넘겨서인지 아주 고약하고 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끈적하게 남아있는 콜드크림의 색깔도 그렇거니와 아주 오래된 화장품 냄새를 싫어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 뚱뚱한 아줌마는 아마도 아주 오래된 화장품을 발랐던 것 같았다.
그 여인은 헛웃음을 시종일관하면서 황황히 간촌 아저씨를 따라 내려갔다.
그 여인의 치마 끝으로 보이는 하얀 버선과 유행을 따른 나일론 한복을 입은 모습이 꽤나 멋을 낸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빈곤이 보였다.
화장품의 냄새가 그렇고 또 한복치마 끝으로 보이는 속치마가 누렇게 변한 어쩐지 그렇게 투명하지 만은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작은 아저씨에게 말하지 말아라.'
간촌 아저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제발 내가 왔다 갔다고 말해라 이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분명 우리 작은 아저씨한테 말을 할 것이고 그것은 내가 작은 아저씨와 친하지 간촌 아저씨와 친한가와
맞닿아 있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