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사
만기사는 고려 태조25년(942년) 南大師에 의해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만기사에 고려시대의 鐵佛이 남아있고, 신라 말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을 비롯한 석등, 석불 등의 석재가 산재하고 있어 최소한 고려시대에는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기사가 현재의 寺格을 갖추게 된 것은 1972년에 들어와 金慧松 주지가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요사를 중건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974년에 들어와서는 서요사를 중건하였다. 1979년에 동요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인 1980년에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으며,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새로이 대웅전을 조영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감로당, 심우당, 공양간, 종루 등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가 유일하다. 대부분의 건물이 최근에 새로 신축한 것들이어 고색창연한 맛은 찾아보기 힘들고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만이 절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만기사 입구
만기사 원통보전과 사천왕문
만기사 오층석탑
만기사 무봉선원
무봉사 대웅전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567호
高 1.43m, 어깨 폭 58㎝, 무릎 폭 92㎝ 신축된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조여래좌상은 만기사에 전하고 있는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지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유일한 문화재이다. 보물 제5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1.43m, 어깨 폭 58㎝, 무릎 폭 92㎝이다.
철불(鐵佛)로서 현재는 금칠을 입혀 철불의 느낌을 찾아보기 어렵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없고 불신(佛身)만 남아있다. 손과 오른 팔은 불신과 별도로 주조하여 결합하도록 되어 있는 형식이다. 이로 인해 두 손과 오른 팔은 불신에서 떨어져 절 안에 별도로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의 것은 새로 조성해 결합해 놓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하부에 해당하는 무릎이 넓고 두터워 안정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나발의 머리에는 높직한 육계가 솟아있다. 상호는 갸름하고 긴 모습으로 살이 빠진 볼과 긴 코, 긴 귀를 가지고 있다. 목에는 번뇌와 업, 그리고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있다.
가사(袈裟)는 왼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노출시킨 우견편단으로 어깨 아래에서 계단식의 층을 이루도록 하여 옷주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결가부한 자세에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다섯 손가락 모두를 쭉 펴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으로 석가여래의 성불(成佛)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배 앞의 오른발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장지를 굽혀 엄지에 맞닿도록 하였으며 나머지 손가락은 곧게 폈다.
상호의 표정과 팔 및 손가락의 형태, 의습의 표현, 두껍고 넓은 무릎 등은 양감이 줄어든 신체와 함께 경직된 모습으로 형식화가 진행된 모습을 보인다. 이와 함께 갸름하고 긴 얼굴과 살이 빠진 볼의 모습 등은 고려시대 철불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만기사 감로당
만기사 범종각
만기사 명부전
명부전내 지장보살상
명부전내 시왕상
명부전내 시왕상
만기사 삼성각
삼성각내 칠성 목각탱
삼성각내 산신 목각탱
삼성각내 독성 목각탱
만기사 요사
만기사 찾아가는 길
오산 IC에서 내려와 오산시를 지나 1번 국도를 타고 평택 쪽으로 향하면 된다. 이곳에서 1번 국도를 따라 5㎞ 정도 평택 쪽으로 내려오면 하북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왼편으로 하북주유소가 있고 그 앞쪽에 육교가 보이는데, 하북주유소를 지나 육교에 못 미쳐 있는 삼거리가 하북삼거리이다. 여기에서 진위면 쪽을 향해 좌회전을 하면 왕복 2차선의 314번 지방도로가 된다. 이곳으로부터 계속 직진하여 진위중고등학교, 한국야쿠르트, 진위면사무소를 차례로 지나면 왼편 산기슭에 진위향교가 나온다. 계속해서 직진하면 오른편으로 만기사와 무봉산 청소년수련원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무봉산 청소년수련원을 지나 오른편 갈래 길로 들어서면 얼마 가지 않아 만기사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