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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
미혹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나이 40세를 이르는 말로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不 : 아닐 불(一/3)
惑 : 미혹할 혹(心/8)
불혹(不惑)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보면, 불혹지년(不惑之年)의 준말이라는 뜻과 부질없이 망설이거나 무엇에 마음이 홀리거나 하지 아니함으로 나온다.
다시말해 불혹지년(不惑之年)은 마흔 살의 나이를 이르는 말이며, 논어(論語)의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에서 나온 말이고 그 준말이 바로 불혹(不惑)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불혹이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40세에 이르러 직접 체험한 것으로,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언급된 내용이다. 공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수양의 발전과정에 대해 나는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30세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三十而立).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 60세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六十而耳順) 7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불혹이란 미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판단이나 생각이 올바르지 않아서 외물에 쉽게 현혹되어 빠지는 것을 미혹이라고 하는데 사람 나이 마흔이면 세상에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분변(是非分辨)을 바르게 하고, 감정 또한 적절하게 절제 할수 있어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知者不惑),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仁者不憂), 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勇者不懼).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면 대화중에 공통적인 인사말 중의 한두개는 반드시 빠지지 않는 '요즘 세상 사는게 통 재미없다'고 하는것과 '뭐 좀 재미있는 일은 없는가' 하는 두가지 말은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나오는 말이다.
대개 생활에는 큰 위기없이 그럭저럭 꾸려가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주로 건네는데, 사업하는 사람들은 경기가 잘 안풀린다고 하는 말끝에 나오기 마련이고, 월급쟁이들은 남의 밑에서 살아가는 신세가 처량하다고 한숨 끝에 나오는 말들이 대강 그렇다.
중년의 남자들이 그런 허탈감이나 상실감에 흔히 빠지기 쉬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대부분 청춘의 설레임이 점차 무디어지고 생활을 주도하는 삶이 아니라 생활에 끌려가는 삶이 마치 박제되어 가는 듯한 삶의 틀이 점차 지겨워지고 무의미해지는 그야말로 꿈과 희망이 희미해지는 중년이 되어가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모든 사회적 가치가 돈과 권력으로 집중되는 몰가치적이고 몰개성적인 틀속의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가슴뛰는 설레임이나 할 수있다는 가능성과 거리가 있는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답습하다 보면 뭔가 알맹이가 빠져버린 듯한 껍데기의 삶으로 느껴지는것이 허무해 진다는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다른 삶을 추구하려다 가는 겨우 쌓아올린 현재의 위치를 허물까 두려워 하면서 끊임없는 내연으로 점차 실의에 빠지기쉬 운 약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리라.
흔히 인생의 중간이라는 불혹이라는 40대 이후에 오류나 함정에 빠지기도 하는 남자의 새로운 위험은 무엇일까? 구조조정의 중심 타겟, 낀세대, 자신감을 상실하는 체력, 호기심의 감퇴, 성적 매력의 후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현재의 위치에 대한 불안한 심적 공황상태 등등이다.
그래서 흔히 나타나는 증세 중의 하나를 들어본다면 뭔가 새로운 자극을 줄수 있는 새로운 분기점을 인위적으로라도 만드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행이나, 낚시, 골프, 등산, 달리기, 글쓰기, 어학공부, 취미활동, 술마시기, 동호회 활동, 기타 뭔가 새로운 자극을 찾으려 하지만 시간은 허락되지 않고 돈은 부족하고 잠시간의 몰입조차도 곧 시들해지기 일쑤고, 때문에 그야말로 일탈에 그치게 되고, 이마저도 여유없이 쪼달리는 부류들은 허덕이면서 발버둥치면서 살아가기도 바쁘기 마련이지 싶다.
물론 돈도 있고 시간도 많은 부류들이야 새로운 여성과 로맨스에 돌입하기도 한다거나 먼 타국으로 여행을 다닌다거나 하겠지만 건 소수에 그치지 않나 싶고, 핀치에 몰린 세대가 나타내는 사회적 현상은 OECD 국가 중 자살율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에서 그중에 40대의 남성 자살율이 가장 높다고 하는 통계를 보면 이 시대의 40대 남자는 극한의 경계에서 내 몰리고 있는 매우 불우한 연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바람이 분다고 다 흔들리는건 아니지만 모두가 흔들리는데 굳건히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가진 한 가정이라는 세포의 핵심 자리를 지키는 40대 남자들의 삶은 위험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연대가 아니라 오히려 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미혹의 세대가 아닌가 싶다.
또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기도 모르게 고집이란 것이 생기게 되는 모양이다. 자기가 살아오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자는 나이 40을 불혹이라고 하여 흔들림이 없다고 하였는데, 요즘 보니 대개 나이 40이 넘은 사람들은 그야 말로 남이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림 없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젊을 때는 남이 말을 하면 그런가 보다 하다가 대개 나이 먹은 사람들은 시비를 많이 가리고 남과 언쟁도 많이 하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말이 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니 문제가 된다.
우선 남의 말이나 듣고 자기 생각을 이치에 맞게 말하려고 노력이나 하면 말할 것도 없지만, 도대체 남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무조건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고 노발대발하는 경우가 좀 많은가.
사실 공자가 말한 불혹이라는 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수양이 얕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불혹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공자같은 성인은 모든 일에 사리판단이 분명히 서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바른 판단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항상 스스로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어야 남의 말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은 새로운 지식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유연성이 절대로 필요한 시대이다.
남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받아들이고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즉시 고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라야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연령을 나타내는 한자어
志學(지학) : 15세
弱冠(약관) : 20세
而立(이립) : 30세
不惑(불혹) : 40세
知命(지명) : 50세
耳順(이순) : 60세
華甲(화갑) : 61세
進甲(진갑) : 62세
古稀(고희) : 70세
從心(종심) : 70세
喜壽(희수) : 77세
八旬(팔순) : 80세
傘壽(산수) : 88세
米壽(미수) : 88세
卒壽(졸수) : 90세
白壽(백수) : 99세
子曰(자왈)
공자가 말하기를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三十而立(삼십이립)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15세 지학(志學) : 배움, 학문에 뜻을 두다.
나이 15살이면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시해야 한다. 더구나 당시는 그리 다양한 학문이 있던 시대는 아니었다. 고래(古來)의 경전이나 역사를 공부하여 나라를 경영할 경륜을 쌓는 것과 전장에 나아가 적을 무찌르고 공을 세울 수 있는 무예와 병법을 익히는 것 정도다. 선택이 좁은 만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보다 일찍 정하는 것 그 시기가 15살이라는 것은 전혀 빠르지 않다.
30세 이립(而立) : 확립하다, 학문적 일가를 이루다.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어 30살이 되면 한 사람의 전문가가 되기에 충분하다. 인생 설계가 확립되고 그 것을 지켜 진행 할 뿐이다. 지금도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은 30대 정도에 그 이름을 얻고 한 사람의 권위로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나이이다.
40세 불혹(不惑) : 의혹이 없어지다.
세상 사물 유혹에 미동도 없는 것, 당연한 일이다. 의혹이 없다는 것, 지혜가 밝아지고 주관이 확립되었다는 것, 사물에 대해 개인의 주관과 주관, 그 중심에 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그 모든 가치를 중심에 둘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이 나이에 이르면 주위의 선동이나 조언에 이끌리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자기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자칫 그것이 보수적이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까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선택일 수 있다.
과거에 있어서도 현대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40살 쯤 되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책임있는 자리에 있게 된다. 자기 한 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그 속해있는 집단의 여러 사람들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40살이라는 나이에 함부로 흔들리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주위를 위해서나 자칫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40살 이상의 중년이 되어서는 자신은 물론 주위를 위해서라도 더욱 엄히 자신을 단속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미혹되지 않는 불혹이다.
50세 지천명(知天命) : 천명을 알다.
천명이라고 하는 천(天)은 자연이다. 자연형성에 부여된 생명의 이치를 통했다라는 뜻이다. 한 개인으로서 평생을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높고 너무도 넓고 너무도 깊다.
따라서 현실에 있어서의 지천명(知天命)에서의 천명이란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의 원칙들을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그러한 당위성, 자연성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사는 사회, 자신이 속한 사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이 선 위치에서, 자신이 짊어진 책임에서, 자신의 역할에 맞는 자신만의 이해를 가지고 스스로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것이 현대에 있어서의 지천명(知天命)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60세 이순(耳順) : 귀가 순하다. 곧 어떤 말을 들어도 거역되지 않는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이성의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순(順)은 통(通)과 같고 순(順)은 역(逆)의 반대이다. 귀가 막혀 있으면 반사적으로 튕겨 나오고 통(通)해 있으면 통과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 자신과 관련된 누군가에 대한 욕심,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대한 욕심, 채워지지 못한 욕심은 공포가 되어 더욱 큰 또 다른 분노와 증오로 이어진다. 그 욕심은 바로 권위의식에서 나온다.
권위를 자극하면 화를 내고, 자신과 다른 가치에 미움을 갖게 만든다. 이것은 귀가 막혀있기 때문이다. 천명을 안 자의 60살은 억척스럽고 힘들게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고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많은 것을 버리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삶, 그것이 귀가 순(順)하다. 란 뜻이다.
이미 귀가 통해 있으면 욕심이 사라져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어 화낼 일도 없다. 선도 악도 아닌,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닌, 이제는 더 이상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서의 60 그 자체이다.
70세 종심소욕불유거(從心所欲不踰矩) : 곧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60살이 넘어 삶에 달관이 되면 자연스러운 삶에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70에 이르러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과 경륜이 천진함과 만남을 뜻한다. 스스로에 솔직하여 그 살아온 길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경지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따르는 종심(從心)이다.
우리는 물론 이순(耳順)조차 찾아보기 힘든 지금 종심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자기 마음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몸 밖의 것을 쫓아 착각에 벗어나지 못한다.
수명이 늘어난 탓일까? 앞으로도 한참을 더 살 것이라 믿음 때문일까? 나이를 잊은 주착은 주위를 눈살 찌푸리게 하고, 스스로를 욕되게 만든다. 얼마 안남은 삶의 끝자락을 경멸과 무시와 조롱 속에 보내는 것이다.
이순(耳順)이든 종심(從心)이든 결국 뜻하는 바는 자연의 도리를 깨달아 자신을 해방시키고 그 마음에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가르치는 깨달음의 경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진인(眞人)이며,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부처이며,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다.
공자가 말한 종심(從心)이라는 것은 그러한 뜻일 것이다. 시대는 변하여도 사상, 이념, 철학은 살아 사람 속에서 고통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惑(미혹할 혹)은 ❶형성문자로 或(혹)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마음 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혹시, 혹은의 뜻을 가진 或(혹)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惑자는 '미혹하다'나 '의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惑자는 或(혹시 혹)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或자는 창을 들고 성을 지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혹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혹시라도 적이 쳐들어올까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心자가 더해진 惑자는 성을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며 수상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惑자는 그런 의미에서 '의심하다'나 '미혹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惑(혹)은 정도(正道)의 장해(障害)가 되는 일이나 마음에 혹시, 혹은 하고 생각하다의 뜻으로, ①미혹하다 ②미혹케하다, 현혹시키다 ③의심하다, 의아스럽게 여기다 ④미혹(迷惑), 의혹(疑惑), 현혹(眩惑) ⑤번뇌(煩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미혹할 미(迷), 미혹할 영(覮), 의심할 아(訝)이다. 용례로는 어떤 것을 너무 지나치게 즐김을 혹기(惑嗜), 사람을 홀리는 말이나 주장을 혹설(惑說), 어지러운 세상을 혹세(惑世), 반하여 꼭 믿는 믿음을 혹신(惑信), 끔찍이 사랑함을 혹애(惑愛), 사람을 미혹하는 술책을 혹술(惑術), 미혹되어 어지러움을 혹란(惑亂), 몹시 반하여 제 정신을 잃고 빠짐을 혹닉(惑溺), 수상하게 여김을 의혹(疑惑), 나쁜 길로 꾐을 유혹(誘惑), 어지럽게 하여 홀리게 함을 현혹(眩惑),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림을 미혹(迷惑), 곤란한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름을 곤혹(困惑), 생각이 막혀서 어찌할 바를 모름을 당혹(當惑), 어떤 일에 즐겨 빠짐을 익혹(溺惑), 매력으로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매혹(魅惑), 남을 아첨하여 유혹함을 영혹(佞惑), 남을 속이어 홀림을 광혹(誑惑), 남을 꾀어 속임을 고혹(蠱惑), 속이어 미혹하게 함을 기혹(欺惑), 망령되이 혹함을 망혹(妄惑), 놀랍고 의아로움을 경혹(驚惑), 크게 반함을 대혹(大惑), 미쳐서 혹함을 광혹(狂惑), 의혹을 풀어 버림을 파혹(破惑), 의혹을 풀어 버림을 해혹(解惑), 미혹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나이 마흔 살을 일컫는 말을 불혹(不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것을 이르는 말을 혹세무민(惑世誣民), 후처에게 홀딱 반함을 일컫는 말을 혹어후처(惑於後妻), 글자가 잘못 쓰였다는 뜻으로 여러 번 옮겨 쓰면 반드시 오자가 생긴다는 말을 어시지혹(魚豕之惑),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지자는 도리를 깊이 알고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미혹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지자불혹(知者不惑)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