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5
12월27일[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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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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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Pp7hRN8Ufw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도회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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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가끔씩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명대사를 접하면 대본 작가님들의 민중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에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 하루하루의 삶은 위에 앉아있는 분들이 상상못할 정도로 힘겹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한 편의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며 박수를 치고, 대리 만족합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것이 예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저희 같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도 막중한 것 같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영혼을 돌보는 존재로서 전례나 성무를 더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잘 연습된 아름다운 성가로 교우들이 마음을 활짝 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상처입은 마음들을 부드럽게 위로하고 고통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갈 에너지를 제공하는 멋진 강론도 필요하겠습니다. 한명 한명 교우들과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환대하고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관대히 나눠야 하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한 복음 사가가 그랬습니다. 사도 성 요한 복음 사가는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타이틀을 하나 붙인다면 사랑의 사도입니다. 나이든 그는 만년에 말하기 조차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외친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건장한 남성이었던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이 세상 안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영원할 것 같던 불같은 사랑도 세월과 더불어 식어갑니다. 마치 산같이 든든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초라하고 구차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랑,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사랑은 주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 한계가 없는 사랑,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 오직 주님 사랑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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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VyCHBdlq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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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처럼 이웃을 만난다>
어제 외국에 있는 큰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형은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로 했는데 고해 때 그 사제가 또 냉담할 걸 뭐 하러 고해하러 왔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하는 행동도 마치 깡패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죄짓지 않기 위해 다시 냉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당신부가 바뀌어서 귀국하면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사랑인데, 왜 어떤 신앙인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까요? 한 마디로 실제로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성 요한의 축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누구든 내가 창조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은 내가 영향을 받아 성장할 때와 같습니다. 사람은 본 것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 존재를 하나도 보지 못한 아기는 절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을 흉내 내지 두 발로 걷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자신이 사랑이 없는 부모에게 길러졌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해서 자녀를 키울 때 그것과 다르게 키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그래서 엄한 부모에게 자란 자녀는 엄한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불안한 감정과 억압된 감정을 가지면서도 지금처럼 자랐기에 다른 사람들도 성장하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영향을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을 타인에게도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선한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교가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세례도 없고 성체성사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형식 없이도 자기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존 울먼(John Woolman)과 루크레샤 모트(Lucretia Mott)와 같은 인물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신 안에서 만난 하느님은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와 같은 여러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들이 만난 하느님은 평화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는 교도소 개혁을 한 여성입니다. 영국 지폐에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1800년대 여성이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했습니다. 초기의 엘리자베스는 사교 모임을 좋아하고 외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자신이 가진 부와 특권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퀘이커 설교자인 윌리엄 세이버리를 만난 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798년, 세이버리의 설교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만남 이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진실하게 그분을 찾으면 그분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체험은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813년,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본 장면은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감옥은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는 그들을 완전히 잊은 듯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이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기본적인 위생과 의류를 제공하며, 여성 죄수들에게 재봉과 뜨개질 같은 기술을 가르쳐 출소 후 삶을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죄수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영적 지침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앞에서 감옥 개혁을 주장하며, 영국 전역의 감옥 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 1823년 감옥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매우 대담하고 특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단도 진짜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사랑을 해 줍니다. 만약 정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개인적 체험이 중요하고 세례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은 다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그들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만나기 더 쉽습니다. 씨앗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열매를 찾기는 쉽습니다.
장 발장은 자신에게 촛대까지 내어주는 주교의 사랑에 감동하여 억울한 도둑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던 경관은 여전히 도둑은 착해질 수 없다고 믿었고 장 발장에게서 도움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종교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지닌 가톨릭 신자라도 예식에 치중하여 진심으로 가슴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치고 맙니다. 반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오늘 요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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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1일부터 4일까지 달라스 교구 시노드 회의가 있었습니다. 시노드는 3년 동안 준비했고, 이번 모임으로 폐막하였습니다. 3년 동안 4,000개가 넘는 안건이 논의 되었습니다. 준비위원회는 그중에서 307개의 안건을 선별하였습니다. 307개의 안건은 다시 17개의 주제로 나누었습니다. 교리교육, 학교와 교육, 성사, 혼인, 이민, 성소수자, 교구 행정, 본당 행정, 자선, 사회복지, 성사, 미사, 전례음악, 사제 생활, 사제 양성, 사제 교육, 환경과 같은 주제로 나누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307개의 안건 중에서 먼저 실시해야 할 50개를 선별하였습니다. 17개의 주제 중에서 먼저 실시해야 할 5개를 선별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시노드의 투표 결과를 참조해서 2031년까지 교구의 사목 지침에 반영하겠다고 했습니다. 시노드 폐막 미사에서 모두의 기립박수를 받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자매는 시노드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이 그녀를 소개하고, 꽃다발을 선물했고, 모든 준비위원이 기립하여 박수쳤습니다. 그녀는 8살 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파티를 준비했고, 이웃들을 초대해서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묵시록을 통해서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 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전승은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 주셨을 때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을 때도 요한 사도는 함께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도 요한은 예수님 곁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니께는 요한 사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만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요한 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앞서서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그 중요한 일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많은 일이 다른 이들이 해도 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하는 때도 있겠지만 자리를 포기하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실수와 잘못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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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2-8: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요한 사도를 오늘 기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얼굴에서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므로 더는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제자들만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요한은 이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또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여야 한다. 이 특권은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낮출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우리도 성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나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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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요한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품에 기댈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빈 무덤을 향하여 베드로와 함께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요한 사도였다면, 저는 곧바로 무덤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없어지신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왜 베드로를 기다렸을까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뜻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기다렸고, 그가 빈 무덤을 확인한 첫 번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사도들 안에서 권력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일,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려는 그분의 뜻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시지 않았을까?’라고 주님을 원망하거나 시기와 질투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 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할 줄 아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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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1-10)
1) 우리는 성탄절 다음 날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박해와 순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다시 그 다음 날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베들레헴 아기들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기들이 이쪽 세상에서는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탄절 뒤로 복음 말씀을 이렇게 배치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은 아닐 것이고, 축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성탄은 십자가의 시작’이고,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이고,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2) 각 개인의 신앙 여정도 같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고, 부활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누리면서,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를 너무 고통의 상징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훈련을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일, 학생들이 중요한 시험의 합격을 위해서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일로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얻게 될 영광과 생명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7)
3) 사도 요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복음서를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에 기록한 증언들과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를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사도입니다.
4) 사도 요한은 첫째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했는데, 이 고백도 결코 간과하면 안 되는 중요한 업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라는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이 고백과 증언을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다.”가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은 없고 이기심과 미움만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에서 누가 옳고 누구 그른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는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고백을 기준으로 해서 금방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무리들이 하느님 편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선도 정의도 평화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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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를 기억합니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요한은 자신의 형인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드러났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겟세마니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넷째 복음서는 성인을 지칭할 때,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를 달리 ‘애제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특별한 호칭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복음서는 요한 사도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자세히 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여 보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제자의 사랑은 예수님 수난의 때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한나스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저택의 안뜰까지 들어가는 용기를 보이며 바깥뜰에서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베드로와 대조된 모습을 보입니다.(18,12-27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제자였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19,25-27 참조) 특히 오늘 복음에서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부활의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목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그토록 빨리 달려가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만큼 누군가를 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크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크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다면 우리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께 얼마나 큰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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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첫 번째 부활 이야기입니다. 20장 1절에서 언급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은 안식일 다음 날,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수난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합니다.(20,1-18 참조)
오늘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그에게 빈 무덤을 먼저 확인할 기회를 줍니다. 여기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자리하는 ‘첫 번째’ 위치, 곧 그의 권위와 역할(6,68-69; 21,15-19 참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첫 번째 부활 이야기에서 무덤에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의 위치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20장 8절에서 “보고 믿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가시적 현실을 넘어 부활의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밝힙니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요한 사도와 같은 인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복음 속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요한 사도가 증언한 믿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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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3-5)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두렵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는 삶은 허무합니다.
그런 삶은 물기없이 메마른 땅처럼 황량합니다. 살아도 죽음의 어두운 계곡을 걷는 것처럼 쓸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살아도 쓸쓸했습니다. 사랑하던 분을 떠나보내고 눈물도 채 마르지 않은 셋째 날, 죽어도 볼 수는 있었던 시신마저 잃어버리고 빈 무덤을 보는 것은 너무 아팠습니다. 사랑했던 만큼 가혹하게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텅 빈 가슴을 보는 것은 너무 쓰라립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은 오직 하나 뿐이고, 그 하나를 잃으면 우리는 가슴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 남겨진 빈 가슴은 빈 무덤 앞에 서 있는 요한의 마음입니다. 요한은 빈 마음을 안고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남겨진 텅 빈 마음은 채우려 하지 말고 안아야 합니다.
빈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을 보아야 부활은 이루어집니다. 빈 가슴은 바라보고 안아야 새 마음이 솟아납니다. 빈 무덤을 채울 수 없듯이 그 무엇도 우리의 빈 가슴은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빛만이 어두운 빈 무덤과 빈 가슴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요한은 절망과 어두움의 빈 무덤 안에서 주님의 부활의 빛을 보았습니다. 빈 무덤은 어두워서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빈 가슴은 비어있어서 주님께서 오실 수 있습니다.
비우고 아팠던 만큼 우리는 예수님과 요한처럼 자신과 이웃을 공감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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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삶과 신앙을 기념하는 축일을 지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도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굳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랑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은 요한 사도의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여러 부분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분명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먼저 자신이 주님께 제자로 부르심을 받던 첫 순간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제자로 뽑혔다는 사실을 얼마나 큰 기쁨으로, 자기 삶에서 얼마나 의미있는 순간으로 여겼는지, 자신이 부르심 받은 그 시간을 잊지 않고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두번째는 주님께서 수난과 핍박을 당하시는 상황입니다. 주님께서 성전경비병들에게 체포를 당하시자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며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했고, 다른 제자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주님 주님’하고 따랐지만 정작 마음으로 그분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자 그분께 등을 돌렸던 겁니다. 하지만 요한은 반대자들의 핍박과 위협, 죽음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시자 주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성모님을 사랑으로 보살폈습니다.
세번째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의 상황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그분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하였지요.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달리기 실력이 꼭 나이에 비례하는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요한이 예수님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그 마음만큼 빨리 달린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기보다 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 상태를 먼저 확인하도록 양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가 먼저 도착했으니 그냥 들어가서 확인했어도 될 일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의 반석으로 세우신 베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수제자로 정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사랑으로 기꺼이 그분 뜻에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권두언) 요한이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머리가 총명해서가 아니라 그가 주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증인이 된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러니 내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봐야겠습니다. 머리보다 마음으로, 생각보다 행동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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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 모임이 있을 때, 책 한 권을 들고 갔습니다. 제 옆에 앉은 신부님은 제가 들고 간 책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 이해가 돼? 나는 도대체 무슨 말 하는 줄 모르겠더라.”
이 신부님은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을 읽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렵기는 했지만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똑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 이해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공부를 왜 할까요? 모든 것을 알고 또 이해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고 또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앎을 갖게 되었다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을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주님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의 ‘앎’이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그 앎으로 기쁨과 함께 주님과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중요한 사건에 늘 요한 사도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에 놀라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인 요한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다른 곳에 옮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직접 평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앎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 앎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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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앞서도 사랑 뒤서도 사랑>
요한 20,2-8 (부활하시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앞서도 사랑 뒤서도 사랑>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요한 20,8)
사랑
받은 이
사랑
주신 분
만나러 가는
설레는 길
사랑
받은 이
누구보다
앞서니
앞서도 사랑
사랑
받은 이
사랑
주신 분
만나려는
벅찬 순간
사랑
받은 이
첫 자리
내어주니
뒤서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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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없는 사랑을, 있는 척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은 이미 무덤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깊은 슬픔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여인의 증언을 듣고, 빈 무덤을 확인하고 믿었습니다. 증언하는 사람과 그 증언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 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베드로가 공식적 사실을 조사하러 갔고, 다른 제자는 보고 믿기 위해 갔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역할입니다. 부활 신앙은 부활 발현 없이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왜 넘어졌을까?”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고 “자비와 연민의 눈길”로 봐야 합니다. “의인은 자신의 판단과 판결을 미안해합니다. 의로운 판결은 편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더욱 소중한 시대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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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은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고 통과하셨습니다. 곧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베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악취에 찌든 ‘우리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빈 무덤’을 동시에 봅니다. 우리 안에 더없는 사랑으로 들어오시는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봅니다.
하오니,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비워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맑은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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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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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사람, 참영성가>
- “예수님 닮기” -
수십년전 어느 수녀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면 주님을 만난 듯 반가울 것입니다. 참사람은 아주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사람입니다. 참으로 꿈과 비전을 지닌 섬세와 배려, 예의와 존중, 겸손과 섬김의 사람입니다. 한마디 말에 인격을 담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사람’이라면 참 좋은 참사람일 것입니다.
“1.대화중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는다.
2.잘 모를 때는 정중하게 질문한다.
3.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한다.
4.계산적이지 않고 요점을 간략하게 말한다.
5.평소 비속어나 욕설을 쓰지 않는다.
6.강단있게 말하되 인상은 환하게 유지한다.“
수도원 청원자 네레오 형제의 어머니가 성탄축제날 피정 중 면담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이미 세상 떠난 형제의 부친은 49년생 저와 소띠 동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자랑하는 남편이자 형제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평생 시골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가난중에도 네 자녀를 모두 사랑하며 밝고 반듯하게 키웠고 존경을 가득 받았기에 지금도 네 자녀들이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한다 했습니다. 성서를 읽듯 배우는 마음으로 장시간 경청했습니다. 아들 청원형제에 대한 세 긍정적인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1.변덕이 없다.
2.남을 판단할줄 모른다.
3.손재주가 좋다.
저보다 네 살 적은, 평생 아들을 키워온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정말 믿음직한 수도자의 자질을 지닌 청원형제였습니다. 하느님은 보물같은 형제를 수도원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후배는 선배를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새삼 아버지답게 처신해야 하겠다는, 독신의 수도자이지만 정말 아버지다운 참사람 수도자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이제 젊은 수도자들의 아버지뻘 나이를 훨씬 넘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공부가, 평생공부가 참영성을 지닌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학식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라는 토마스 머튼의 평가를 기억합니다.
“머튼은 가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인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참사람이요, 영성의 최고봉 경지에 이른 머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 문서에 나오는 성 바오로 사도의 인품에 대한 묘사가 참사람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게 합니다. 무엇보다 참사람은 현실주의자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성 바오로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인생은 그의 기쁨과 슬픔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사랑은 시련들중에 시험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희망은 고통을 직면하면서 흔들릴수 있음을 알았다. 그럴지라도 그는 다음과 같이 힘차게 고백한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5,3-4)”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참사람이자 참영성가, 현실주의자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더 분명히 하면 늘 천상에 눈길을 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함이 맞습니다. 이런 좋은 본보기가 또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오늘은 어제 성 스테파도 첫 순교자 축일에 이어, 예수님의 애제자로 추정되는,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사랑의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최측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중 요한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사도축일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예수님곁에서 자리를 지켰던 에제자 요한이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애제자 요한이야말로 진정 참사람, 참영성가였습니다. 그는 결코 영육의 이원론자나 영지주의 이단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주님을,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을 철석같이 믿고 사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아닌 참사람이자 참하느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인간적일수록 신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로 닮아갈수록 참사람에 참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요한1서의 말씀을 통해 요한의 체험이 흡사 우리의 체험처럼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 요한, 성 바오로처럼 영원한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참사람, 참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빈무덤에 먼저 달려온 것은 열렬한 사랑의 애제자 요한이었고 빈무덤 입장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양보함으로 겸양의 사랑이 빛납니다. 빈무덤 안에 잘 개켜져 있는 수건을 보는 순간, “보고 믿었다”라는 묘사에서 보다시피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의 부활을 직관하고 믿은 애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사도 요한의 선포와 초대가 고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아버지와 아드님이신 당신과 나누는 친교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참사람이, 참영성가가 되어 충만한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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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더 많이 사랑하여 더 사랑받는>
어제 스테파노 축일에 이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도 주님을 바라봄 곧 관상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어제 스테파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성탄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성탄 축일 다음에 두 성인의 축일을 이어 지내고 있고
주님을 바라봄, 관상과 관련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은 두 성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관상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은 진정 사랑꾼이고 관상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자신에 대해 아무 주저함 없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요한만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나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만 데리고 가신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이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입을 더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래서 새들은 어미가 왔을 때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소리를 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마다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에 투정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조금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스펀지 빨아들이듯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사랑에 달리 대응하기에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다 받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흠뻑 사랑받고, 더 받아들이기에 안 받아들인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받은 셈이 되지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는, 요한만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더 사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주님 사랑을 더 사랑했기에 더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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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4)
<사랑의 사도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20,2-8)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 못하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러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습니다.
성탄 팔일 축제 3일째인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이며,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성모님을 맡기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 사도, 그것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예수님 무덤에 다다를 수 있었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쓴 성경이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의 말씀들 안에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체험된 사랑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체험이 있어야 요한이 전한 말씀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1요한 1,1.3)
'우리가 살아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은 '먼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리고 체험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체험된 사랑을 함께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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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 2)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우리 삶을
끌어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일상생활이
빛나고 깊어집니다.
살아가는 이시간이
바로 신비입니다.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간직한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생명의 순간들은
이와같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며
십자가의 상처까지
사랑의 놀라운 선물로
변화시킵니다.
요한 복음시가는
말씀으로 힘을 얻는
우리들이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하느님 말씀을
향해 두레박을
힘껏 던집니다.
삶의 의미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을 사랑하는
말씀의 자녀들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살아계신 말씀이
샘솟는 성탄의
기쁜 삶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가면을
벗어 던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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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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