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차'와 '위기'라는 화두가 들어앉아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이 화두를 가지고 쓴 원고가 a4 1000매는 족히 됨직하다. 2년째 밖으로 내 보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 우리 시대 대한민국 아픔의 핵심 중의 하나다 보니, 내가 아픈게 당연하다고 자위한다.
격차는 우리시대 최고, 최대의 난제인 불평등과 양극화를 뭉뚱그린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저성장, 일자리, 저출산, 저신뢰, 고갈등의 핵심원인 이자, 주력산업과 제4차산업혁명에 대한 대응 위기의 핵심 원인이다. 격차는 곧 사람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인 인센티브 체계이기 때문이다.
크고도 불합리한 격차는 노동시장 혹은 고용노동체제와 부동산 시장에서 절감한다.
노동시장은 생산물 시장(산업, 기업)과 금융시장의 투영이다. 동시에 국가(법제도, 정책, 표준, 세금, 예산, 공기업, 공공부문 고용임금)와 사회(노동조합, 협회, 이데올로기,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한편 격차는 진짜 생산성과 가짜 생산성(지대=합법적 약탈)이 뒤섞여 있다.
노동시장의 격차를 제대로 해명하려면 이 모든 것을 살펴야 한다. 한국의 격차나 노동시장/고용체제를 연구한 연구자나 관료나 노동운동가들이 격차를 만들어내는 핵심 요인들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합이 있어야, 더 심도 깊은 분석과 각론이 발전할텐데. 이게 안되어 있으니, 나라도 곡괭이 하나 들고 암벽을 팔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격차, 혹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명하려면 서구 이론이 프로그래밍화 시킨 사고방식과 싸워야 한다. 격차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실행되는, 사상이념적 바이러스 비슷한 사고 방식이 있다.
이 놈은 2000년대 들어서 점증한 자본-노동, 기업-가계, 대기업-중소기업, 갑-을의 소득 격차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전자가 많이 처 먹어서 후자가 가난하다는 논리를 머리 속에서 펼친다.
자본, 기업, 갑의 대표는 재벌대기업이다. 무지와 착각이 뒤섞여 있지만 수백조원의 사내유보금이 움직일 수 없는 착취의 증거로 제시된다. 이 놈의 바이러스로 인해 구의역 비극이 터지자, 대표적 진보 신문이 사람 보다는 이윤, 안전 보다는 효율을 중시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만행--'마른 수건(인건비) 쥐어짜기'와 '민영화/외주화' '비정규직화'--을 원흉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자본-노동, 기업-가계의 소득 격차 확대가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 현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두어번 더 던져야, 그래서 생산성 격차와 지대 격차와 잘못된 표준/패러다임을 분별해야, 현상도 정확하게 분석하고, 대안도 제대로 도출할 수있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자본-노동, 기업-가계, 대기업-중소기업 프레임이 한국 특유의 부조리인 노동-노동, 노동-비노동(비임금근로자, 비경활인구, 청년미래세대), 공공-민간 격차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구의역 김군의 비극은 이 부조리가 얼마나 심각하고 악질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한국의 노동은 (마르크스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처지, 조건이 비슷한 존재가 아니다. 소속 직장의 지불능력과 교섭력에 따라, 한마디로 소속(위치)에 따라 근로조건은 천양지차가 난다. 지불능력은 생산성/경쟁력, 규제와 독과점과 노조가 만드는 지대, 권력(세금과 예산)에 의해 만들어진다. 노동생산성(노동의 양과 질)은 핵심 변수가 아니다. 그것은 은성psd의 월442만원 정규직과 월140~200만원의 정규직 혹은 비정규직이 웅변해 준다. 사실 이것이 유럽, 미국,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악질적 부조리다.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는 자본-노동 프레임은 이것을 가린다.
자본-노동과 기업-가계의 분배구조가 나빠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힘센 자본/기업과 가장 힘센 공공을 타고 있는 노동(공무원, 공기업 임직원)은 예외다. 자본-노동 프레임은 이것을 덮어 버린다. 더불어민주당의 소득주도성장론이나 777플랜이 양극화 해소에 별무신통이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이유다.
고용임금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방향은 상향평준화, 하향평준화, 중향평준화로 단순화 할 수 있다.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이 정의로운지(지속가능한지)를 따지는 것은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고용임금 격차를 해소하려면 이 셋을 혼합해야 할 것이다. case by case라는 얘기다. 수많은 case를 알려면, 시장(산업/기업/기술/글로벌 시장 등), 국가, 사회를 알아야 한다. 복잡하다. 그래서 거칠게 수요와 공급이 자유롭고, 제반 위험, 이익 요소가 다 녹아든 잘 작동하는 시장에서의 고용임금 수준을 생각해 보면 된다.
어차피 시장에서 정할 수없는 공공부문은 보통 시민(납세자)들 100여명이 모여, 그 공공서비스 업무에 상응하는 처우를 원탁 토론이라도 하면 대충 정확하게 책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유럽의 공공부문이 양반적 위상을 갖지 않는 것은 바로 지방 자치를 통해서 '공공서비스맨'들의 처우 기준을 정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시장과 민주공화주의가 잘 작동하면, 고용임금 수준이 더 올라 갈 곳도 있고, 내려올 곳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귀족, 양반 소리 듣는 많은 직장, 직업은 많이 내려 올 것이다. 그것은 선진국을 보면 안다.
아무튼 상향평준화든, 중향평준화든 아래를 끌어올려야 한다. 아래를 끌어 올리는 방법은 새로운 파이를 만드는 방법(발빠른 혁신과 도전)이 있고, 기존에 많이 가진 자의 몫을 빼앗아 오는 방법이 있다. 많이 가진 존재는 자본/부자 일수도 있고, 노동/부자 일수도 있다. 그 기준은 역시 하는 일과 받는 처우의 균형점 일 것이다. 시장과 민주공화주의 문제라는 얘기다. 그리고 새로운 파이를 많이 만드는 방법은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발빠른 대응인데, 한국의 '청년/미래 약탈적' 격차 체계를 보면 절망적이다.
격차는 표현을 달리하면 인센티브다. 인센티브는 시장과 국가(민주공화주의)가 잘 작동하면 신경을 그리 많이 쓸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국은 둘 다가 지독한 비정상이다. 그리고 적정한 지대를 제공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지금 한국의 격차 문제가 풀기 어려워진 것은, 국가가 전략적으로 제공한 지대(특권, 특혜)가 산업화 민주화의 기적을 낳았기 때문이다. 재벌대기업과 고학력자와 공무원과 전문자격사 등에게 적정한 특권,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이만한 물질적문화적 생산력을 만들어 냈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유효기간이 다하지 않은 지대(특권, 특혜)는 단 하나도 없다. 한 때 성공신화를 낳의 가치의 유효기관을 아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다. 이념과 이권이 스크럼을 짜고 방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성장과 통합을 담보하는 인센티브 체계는 너무나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불합리한 격차 내지 인센티브 체계는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부조리인 착취(약탈)와 억압을 의미한다. 한국의 격차가 크고도 불합리한 상태를 지속한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이 대한민국은 필망이다.
크고도 불합리한 격차도 위기의 일종이다. 위기는 내파 위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파 위기도 있다. 자연환경(지구생태계)과 나라 밖의 정치체(북한,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다. 그 대응의 중심은 결국 국가, 시장, 사회, 개인 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시장은 또 엄처나게 다양한 요소로 분해 된다. 어쨌거나 이것을 움직이는 것이 인센티브와 거버넌스다. 생각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 다시 격차를 만나고, 불평등, 양극화, 저성장, 일자리, 저출산, 저신뢰 문제 등과 씨름하게 된다. 생각을 어디서 끊을까, 어떤 체계로 서술할까 고민하다고 써 봤다.
출처 : 김대호 패이스북
https://www.facebook.com/itspolitics/posts/1113130415395373
첫댓글 계층, 세대, 이념, 지역, 부정의한 사회, 민생경제, 통일, 복지, 행복추구.....함께 사는 세상... 공동체 복원, 저녁이 있는 삶.....시대정신이 담아야할 테제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