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동아 ‘이명박 대세론’의 뇌관, ‘X파일’ 철저 검증 재산형성, 군 면제, 청계천·버스 의혹, 창씨개명, ‘숨겨둔 자식’…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 여권 “이명박 낙마시킬 26개 파일 준비됐다” ● 선친이 ‘쓰기야마’로 창씨개명 : “민족의 아픔” ● 군 면제 논란 : “지금도 결핵 흔적 있다” ● 선거법 위반 : “내 인생 최대 실수…사과했고 용서받았다” ● 형 이상득 의혹 : “정권은 내 뒷조사 얼마든지 해보라” ● ‘다스’ 실소유주 논란 : “맏형 도와준 건 사실” ● 김경준 의혹 : “제2의 조작 폭로전 가능성” ● 서초동 상가 위법 적발 : “해지처분 받고 끝났다” ● 강남권 재산형성 논란 : “현대는 집만 지어줬다” ● 숨겨놓은 딸 있다? : “여대생이 눈물 흘리며 껴안아서…” ● 버스업계 5000억원 지원 : “시민 편익 크다” ● 서울시정 비리의혹 : “행자부 감사 결과 뒤져보라” ● “이명박 잡으려면 ‘도덕성’ 아닌 ‘능력’의 허구 벗겨라”
2007년 대선의 해는 ‘이명박 대세론’과 함께 출발했다. 각 언론사의 신년 여론조사 결과 이명박(李明博·65) 전 서울시장의 지지율은 대선주자 중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지지율은 40%가 넘어 2위 주자와의 격차를 20%포인트 이상 벌려놓기도 했다(▲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 : 이명박 44.9%, 박근혜 17.3%, 고건 14.1%, 손학규 3.3%, 김근태 1.8% ▲조선일보-한국갤럽 : 이명박 40.7%, 박근혜 19.3%, 고건 15% ▲중앙일보-엠비존 : 이명박 39%, 박근혜 20%, 고건 18.1% ▲SBS-한국리서치 : 이명박 40.8%, 박근혜 18.4%, 고건 17.2% ▲KBS-미디어리서치 : 이명박 36%, 박근혜 20.6%, 고건 16.3%).
열린우리당 측은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세론과 함께 ‘검증론’도 부상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민병두 홍보기획위원장(국회의원)은 지난해 12월13일 이 전 시장의 선글라스 착용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흉내내는 퇴행적 성형”이라고 비판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명박 전 시장을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여권에선 “이명박 전 시장과 관련해 26개의 파일이 준비돼 있다”는 루머가 흘러나온다.
한나라당 내 경쟁 주자 캠프에서도 검증론이 대두됐다. 박근혜 전 대표 측 유승민 의원은 “우리가 이명박 전 시장의 도덕적, 정책적 검증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유 의원은 “언론에서 이것(검증)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아직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무책임하고 음습하다”
대선 정국에서 이명박 대세론과 검증론은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은 ‘핫이슈’가 됐다. 열린우리당 측은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고 밝힌 뒤 4주가 넘도록 잠잠하다. 이 때문에 “공당으로서 무책임하고 음습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언론이 검증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유 의원의 지적은 일리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국민은 ‘대통령 잘못 뽑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차기 유력주자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게 제공되기를 원한다.
현재 이명박 전 시장의 가장 큰 고민은 “이명박 전 시장에게서 뭔가가 나올 것”이라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막연한 불안심리다. 검증을 거치면서 이 같은 불안심리가 상당부분 해소될 수도 있으므로 검증이 이명박 전 시장에게 반드시 불리한 일은 아니다.
‘신동아’는 취재의 법적 한도 안에서 이명박 전 시장의 대세론과 검증론을 심층 분석해보기로 했다. ‘26개 파일’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의 이야기 얼개를 입수해 사실 확인을 해봤다. 이명박 전 시장은 “신동아와 언제든 만날 용의가 있지만, 대세론을 다루는 기사에 당사자가 등장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듯하다”며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다. 대신 이명박 전 시장의 측근들은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했다.
〈 출생, 이름, 가족 〉
2002년 서울시장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의 법정 선거홍보물. 약력란에 ‘출생지’는 생략돼 있다. 최근 한 인터넷 매체는 “이명박 전 시장의 출생지는 경북 포항이 아니라 일본 오사카”라면서 이명박 전 시장이 일본 출생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매체는 “이명박 전 시장의 이름이 명박(明博, 일본식 발음은 ‘아키히로’)인 것도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네티즌의 글을 보도했다. 이어 이 매체는 이명박 전 시장의 어머니가 일본인일 것이라는 허위사실도 인터넷에 돌아다닌다고 했다. 이와 관련 “2002년 서울시장선거 때 이명박 전 시장이 출생지를 포항으로 허위기재해 선거법을 위반한 의혹이 있다”는 루머도 나돈다.
선거법 위반 논란과 관련,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에 확인해본 결과 이명박 전 시장은 2002년 서울시장선거 당시 각 가정에 배달된 자신의 홍보물 등 선거관련 자료에 출생지를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명박은 서울을 바꿉니다!’라는 그의 공식 선거홍보물 ‘약력’란은 출생지를 생략한 채 ‘동지상고(야간) 졸업(1957~1960)’으로 시작된다.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출생지는 의무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사안이 아니다. 서울에서 출마하는 후보자는 대체적으로 선거전략상 출생지를 기록하지 않는다. 이 명박전 시장이 떳떳하지 못한 이유로 출생지를 숨겼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과 네티즌은 이명박 전 시장의 출생지가 오사카라는 점을 마치 새롭게 밝혀낸 사실처럼 공표하고 있으나, 2006년 11월 발행된 ‘신동아’ 12월호 ‘대선주자의 풍수’ 기사에서 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이명박 전 시장의 출생지는 오사카인데,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고 썼다. 이명박 전 시장도 ‘신화는 없다’라는 자서전(1995년 초판)에서 자신이 오사카에서 태어났음을 밝혔다.
한국인의 이름을 연구해온 도수희 충남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이명박이라는 이름은 일본식이라고 보기 힘들다. 고구려 동명성왕, 백제 성왕(부여 명) 등 한국인 이름의 중간에 명(明)자를 사용하는 경우는 흔하다. 이명박 전 시장의 작명(作名)에 특이점이 없다”고 했다. 이명박 전 시장 측근은 “이 전 시장은 한·일 국교수립 반대 운동을 벌이다 투옥된 적이 있는 등 ‘반일 민족주의’ 전력이 있다”고 말했다.
1월12일, 국회부의장실에서 이상득 부의장을 만났다. 이명박 전 시장의 출생, 가족, 친인척 문제에 대해 그의 친형인 이 부의장의 설명을 듣기 위해서다. 이명박 전 시장은 이충우(1907~1981)씨와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의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큰형 상은씨는 다스(주) 회장이며, 둘째형이 이 부의장이다. 또 누나 귀선씨, 여동생 윤진씨가 있으며 다른 누이와 동생은 6·25전쟁 때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상득 부의장은 ‘일본인 생모(生母)’ 루머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이명박 전 시장은 “내 스승은 어머니와 가난”이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 채태원씨를 따랐다고 한다. 이 부의장은 정치권에서 이명박 전 시장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얘기가 나오는 것과 관련, “일제 강점기 때 선친이 창씨개명을 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형제도 한때 일본 성(姓)을 썼다”고 밝혔다.
▼ 이명박 전 시장의 출생지가 일본 오사카의 어디쯤인가요.
“어릴 적 일이라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선친은 한국에서 생활이 너무 어려워 1935년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의 한 목장에서 목공으로 일했어요. 거기서 1941년 이명박 전 시장을 낳았습니다. 광복 후 선친과 어머니, 우리 남매는 고향인 포항으로 귀국했는데,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번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죠.”
▼ 이명박 전 시장의 생모가 일본 여성이라는 루머가 보도되기도 했는데요.
“그 일을 접하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어떻게 남의 부모와 관련해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나와 이명박 전 시장이 친형제가 아니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증폭된 것 같습니다.”
▼ 두 분이 친형제가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나요.
“이명박 전 시장이 2002년 서울시장이 된 뒤 나는 의도적으로 이명박 전 시장 근처에 얼씬도 안했어요. 서울시 공무원들이 나를 찾아오려 해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전 시장 사무실에는 6개월 전 한 번 찾아갔는데 10분 만에 나왔어요. 한나라당 경선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국회부의장의 격을 지켜야죠. 다른 형제, 친인척도 이명박 전 시장과 관련된 공적인 일에 일절 간여하지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이상득과 이명박 사이가 안 좋다, 친형제가 아니다’는 루머가 나온 겁니다.”
‘큰 달이 몸 안에 들어오다’
이런 소문은 이명박 전 시장의 형들(상은, 상득)은 ‘상(相)’을 돌림자로 쓰는데 이명박 전 시장만 이름이 ‘이명박’인 점에 근거를 둔다. 이에 대해 안국포럼(이명박 전 시장의 대선 캠프)의 박영준 전 서울시 국장은 “이명박 전 시장의 어머니는 커다란 달이 몸 안에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이명박 전 시장을 잉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밝을 명, 넓을 박’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명박 전 시장이 이미 자서전 등에서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 일제 강점기 많은 한국인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습니다. 정치권에선 ‘이명박 전 시장도 창씨개명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일제 강점기 호적자료는 본적지 행정기관에서만 열람이 가능해 절차가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향후 대선주자 검증과정에서 공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창씨개명 여부를 밝혀줄 수 있습니까.
“숨길 게 없습니다. 선친께서 창씨개명을 했어요. ‘쓰기야마(月山)’라는 성을 썼습니다. 일제 강점기 가난한 서민이던 선친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겪은 신산고초는 이루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다른 대다수 한국인처럼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꾼 겁니다. 민족의 아픔이었습니다. 다만, 이명박 전 시장이 스스로 창씨개명을 한 것은 아니에요. 이명박 전 시장은 선친이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받은 것뿐이죠.”
일제 강점기 기록에 따르면 창씨개명은 1939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조선민사령’에 따라 1940년 2월부터 8월까지 이뤄졌다. 이명박 전 시장은 창씨개명이 마무리된 이후인 1941년에 태어났다. 1940년 당시 한국인 가구의 79.3%가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이 2003년 5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이뤄졌다”고 망언(妄言)을 했지만 일본 ‘아사히신문’은 “창씨개명은 일본이 조선인의 마음속까지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강권적 지배였다”고 보도했다. 1982년 8월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문부성은 “6개월간 창씨개명을 한 비율이 80%였다는 사실을 보면, 상당히 무리가 있었음은 확실하다”며 강제성을 시인했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당시 일본 총리는 한일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여러분이 예를 들어 타국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창씨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이 강제되고, 군대위안부와 노동자 강제연행 등 각종 문제가 있었는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한 데 대해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을 깊이 반성하며…”라고 말했다.
司正기관에서 주변 조사
최근 한 사정(司正)기관은 전국 각 지부를 통해 주요 인사의 소득, 돈 거래 명세를 광범위하게 조사해 그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조사 대상에 이명박 전 시장의 주변 인사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여권의 ‘이명박 검증론’과 관련, 주목되는 움직임이다. 이 사정기관 관계자는 “이명박 전 시장의 형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대기업 계열사로부터 연간 5000만원 정도의 돈을 받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와 있다.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고 밝혔다. 당사자인 이 부의장에게 경위를 들어봤다.
▼ 사정기관에 따르면 부의장께선 코오롱그룹 계열사인 FNC코오롱으로부터 연간 5000만원을 받고 있다는데요.
“나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코오롱상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코오롱에서 수십 년 동안 일했습니다. 코오롱 측은 내가 경영인으로서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합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퇴임 후 1988년부터 19년째 코오롱 계열사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월 400만~500만원을 받고 있는 겁니다. FNC코오롱은 코오롱상사의 후신입니다.”
▼ 국회에 겸직신고는 돼 있습니까.
“국회에도 신고했고 세금도 제대로 내고 있어요. 그러나 다른 외부활동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야당 유력 주자라서 정권이 내 고문료까지 뒷조사를 하나본데 얼마든지 해도 좋습니다.”
이명박 전 시장은 부인 김윤옥(60)씨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고 있다. 막내아들 시형(29)씨는 군복무(현역)와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국내 한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장녀 주연(36)씨와 차녀 승연(34)씨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기악을 전공했고 막내딸 수연(32)씨는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했다. 셋째사위 조현범(35)씨는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의 차남으로 현재 한국타이어 부사장이다. 맏사위 이상주(37)씨는 검사 출신으로 현재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보로 재직 중이고, 둘째사위 최의근(34)씨는 서울대 의대 내과전문의다.
이명박 전 시장의 가족과 관련해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루머도 떠돌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 측근인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반박한 바 있다. 정 의원은 2006년 8월 ‘이명박에 관한 7가지 거짓말’이라는 보도자료에서 “숨겨놓은 자식설과 관련, DNA 검사까지 다 해놓았다고 하는 얘기까지 들었다. 너무 고전적이고 유치한 흑색선전이라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번 데려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1964년 고려대 재학시절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2006년 이 명박전 시장은 서울여대에서 강연을 한 뒤 학생들로부터 사인 공세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학생이 이명박 전 시장에게 달려오더니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인터넷에 숨겨놓은 자식 소문이 떠돌고 있던 차였기에 취재기자 등 주변 사람들이 순식간에 이명박 전 시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명박 전 시장은 사석에서 기자에게 “당시 나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이명박 전 시장을 찾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학비가 없어 학교를 중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교장 추천으로 학비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아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번에 이명박 전 시장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 때 내가 받은 장학금이 서울시에서 준 ‘하이 서울 장학금’이었고 이 전 시장이 이 장학제도를 만든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학교와 서울시는 누가 장학금을 주는지 전혀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고마워서 이명박 전 시장을 끌어안게 됐다.”
〈 병역 〉
이명박 전 시장은 고려대 재학 중이던 1964년 6·3한일회담반대운동 당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하다 내란죄로 구속 기소된 바 있다. 다음해인 1965년 이 전 시장은 활동성 폐결핵과 기관지확장증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이 해 그는 현대건설에 공채로 입사한다.
이명박 전 시장의 병무청 기록은 ‘1961년 갑종(현역입영대상)-63년 입영 후 귀가(질병), 64년 징병처분미필(無故), 65년 병종 제2국민역(활동성 폐결핵, 기관지확장증)’이라고 돼 있다. 이명박 전 시장 캠프는 최근 검사 출신인 김준선·오세경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네거티브 선전 방어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우선적으로 군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다음은 이명박 전 시장 측의 설명이다.
“이명박 전 시장은 1963년 8월15일 자원입대해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으나 다음날 신체검사에서 고도의 기관지확장증과 축농증이 발견돼 귀가조치됐다. 1964년 재검에서 다시 질병이 발견돼 ‘다음해 다시 재검을 받으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1965년 3월29~30일 흥해국민학교에서 실시된 재검 때 보건소에서 촬영한 X-레이에서 이상이 발견돼 지정병원인 포항영남병원에서 정밀 촬영한 결과 ‘기관지확장증 고도, 폐활동 결핵 경도’가 나타나 내과 군의관과 판정관이 병종(징집면제) 판정을 했다.”
1964년 징병처분미필이 기재된 것에 대해 이명박 전 시장 측은 “1964년 상반기 지정기일에 재신체검사를 받지 않았지만 같은 해 하반기 재검에 응했다. 상반기 재검에 응하지 않은 것은 1963년 말 고려대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1964년부터 학생회를 주도했고 당시 최대 이슈였던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운동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1964년 6월 구속됐다 10월 집행유예 선고로 석방된 뒤 같은 해 하반기 재검에 응했다. 병역기피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기관지확장증은 만성 기관지염 등으로 기관지가 탄성을 잃고 일부 변형해 확장되는 증세다. 치료를 하면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다. 폐 활동성 결핵은 결핵균에 폐가 감염되어 나타나는 질병으로, 대부분 완치된다. 다만 일부 폐조직의 항구적 손상을 가져오기도 하며, 저절로 낫지는 않는 질병이어서 완치 때까지 항결핵제를 복용해야 한다. 기관지확장증과 폐 활동성 결핵은 서로 다른 질병이지만 동시에 걸리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 측은 “이 전 시장이 2006년 1월16일 국립암센터에서 흉부 X-레이 및 CT를 촬영한 결과 좌우측 폐에 기관지확장증 및 폐결핵을 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X-레이 사진이 없는 까닭
병역 논란과 관련,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1964년 3월29~30일 포항영남병원에서 정밀 촬영한 이명박 전 시장의 가슴 X-레이 사진이다. 그러나 취재 결과 이 사진은 시간이 워낙 오래 지나 관계기관에 보존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명박 전 시장이 병역논란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의미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병역 논란의 파괴력을 약화하는 요인도 된다.
이명박 전 시장은 자서전에서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신입사원 연수 때 정주영 회장과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고 썼는데, 호흡기 질환을 앓는 사람이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실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명박 전 시장 측은 “병무청 기록에 나타나듯 폐결핵은 경증(輕症)이었다. 특별한 자리에서 술을 다소 많이 마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명박 전 시장은 얼마 전 조류인플루엔자 감염 농가를 다녀온 뒤 오랫동안 기침이 멈추지 않아 고생했다. 강연도 취소해야 했다. 이명박 전 시장 특유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도 호흡기 후유증”이라고 덧붙였다.
〈 다스, 김경준, 김모 비서관 〉
‘이명박 전 시장이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인 (주)다스(DAS,·옛 ‘대부기공’)의 실제 주인이 아니냐’는 의문도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어 왔다. 이명박 전 시장의 ‘숨겨놓은 재산’ 루머의 상당부분도 다스가 근원지다. 사실이면 이 전 시장은 법적, 윤리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 있다.
1996년 10월10일 검찰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이명박 전 시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을 조사한 끝에 이명박 전 시장의 선거기획단 기획부장 강모씨를 구속기소한 바 있는데, 강씨는 당시 다스 과장이었다. 2002년 이명박 전 시장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뒤 검찰은 이명박 전 시장을 선거법 위반혐의로 다시 기소했으나 법원은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때도 다스가 등장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이명박 전 시장이 위원장으로 있던 지구당 총무부장인 신모씨가 2000년 6월부터는 다스의 충남 아산공장 관리팀장으로 일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서울고법 판결문).
현대자동차에 자동차 시트부품을 납품하는 다스는 일본 후지키코와의 한일합작 형태로 1987년 7월10일 설립됐다. 초기 자본금 중 3억6000만원은 한국 측이, 2억4000만원은 일본 측이 댔고 이후 증자가 이뤄졌다. 설립 당시 이명박 전 시장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회사 등기부 등본에 따르면 최초 임원은 이명박 전 시장의 큰형 이상은씨, 김성우씨, 박헌진씨, 일본인 한 명인데 김씨와 박씨는 현대건설 출신이다.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이 회사의 최대주주다. 이 회사는 2002년 40억원, 2003년 10억원대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다스의 김모 사장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명박 전 시장의 형과 처남이 같은 회사의 대주주가 된 경위에 대해 “이상은 회장이 회사를 설립할 때 일시적으로 자금이 달려 이명박 전 시장의 처남인 김재정씨가 자금을 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나는 다스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자동차는 후지키코로부터 부품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정부의 자동차부품 국산화 정책이 추진되자 한일합작 회사 설립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이상득 부의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세영에게 얘기한 것뿐”
“이명박 전 시장이 현대건설 사장 재임 때 정세영 당시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얘기해 대부기공(다스의 전신)이 안착할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이상은씨가 주주인 다스와 이명박 전 시장의 관련성은 그것이 전부다. 지분구조는 법인 등본에 나온 그대로다. 이명박 전 시장은 다스에 대한 법적 권리가 전혀 없고, 주주와 운영자가 엄연히 별도로 있는데 이명박 전 시장을 자꾸 끌어들이는 것은 지속적인 흠집 내기로밖에는 안 보인다.”
이명박 전 시장 측근은 “검찰은 다스 직원이 이명박 전 시장의 선거운동을 한 것과 관련해 두 차례(1996년, 2002년)에 걸쳐 조사해 모두 이명박 전 시장을 기소했다. 다스의 실질적 주인이 이명박 전 시장이었다면 강도 높게 진행된 검찰 조사에서 밝혀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다스는 ‘김경준 사건’과도 연결된다. 1995년 이명박 전 시장은 에리카 김이라는 재미교포 변호사의 서울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미국 방문길에 교포의 소개로 한두 번 만난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1999년 4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BBK라는 투자자문회사가 설립됐다. 한국지사인 ‘BBK Capital Partners Ltd’의 대표는 에리카 김의 동생 김경준씨였다. 2000년 2월 이명박 전 시장은 김경준씨와 동업으로 LK이뱅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두 사람은 각각 30억원을 투자했으며 이 회사의 공동대표에 올랐다.
다스는 2000년 3월부터 12월까지 BBK에 190억원을 투자했다. 그런데 2001년 3월, 김경준씨가 LK이뱅크에 투자한 30억원은 BBK의 회사자금인 것으로 금융감독원 조사에서 드러났다. 김씨는 각종 서류를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직후 이명박 전 시장은 LK이뱅크 대표이사직을 사임했으며 BBK증권중개 예비허가를 철회했다.
BBK는 금감원 조사 직후 광주의 뉴비전벤처캐피탈(구 광은창투)을 인수해 옵셔널벤처스로 상호를 바꿨다. 김씨가 대표이사에 올랐다. 외국 기업에 인수, 합병된다는 소식에 옵셔널벤처스 주가는 급등했다. 김씨는 주식을 매각해 차익을 실현하는 한편 옵셔널벤처스의 회사자금 384억원을 빼돌린 뒤 위조여권으로 출국했다.
이 전 시장과 다스는 각각 30억원(LK이뱅크 투자금)과 140억원(BBK 투자금)의 피해를 봤다며 미국에서 김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김경준씨는 미국 검찰에 체포되어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연방법정에서 한국 송환 판결을 받았다. 김씨의 변호인은 법정에서 “한국 검찰이 이명박 전 시장을 겨냥한 표적수사를 해 김씨가 희생양이 됐다. BBK는 이 전 시장의 회사”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금감원은 ‘신동아’에 “이명박 전 시장은 BBK와 전혀 관련이 없다. BBK는 김경준씨와 관련된 회사다. 서류위조 등 김경준씨가 BBK를 활용한 불법행위에도 이 전 시장은 무관하다”고 밝혔다. 여권은 금감원 등 해당 기관을 상대로 이명박 전 시장 관련 증거 찾기에 나섰으나 벽에 부딪히자 현재는 작업을 중단한 상태다.
김모 비서관의 출현
검찰은 2002년 BBK와 이명박 전 시장의 연루의혹에 대해 수사를 벌인 결과 이 전 시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모 언론사는 2002년 BBK와 이명박 전 시장의 연루의혹을 제기한 바 있는데 언론중재위원회는 이에 대해 “이명박 전 시장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고 결정했다. 증권선물거래소는 “옵셔널벤처스와 이 전 시장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김경준씨의 한국 소환으로 검찰이 이 사건을 본격 수사하게 될 경우 이명박 전 시장이 곤궁에 처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김경준씨는 파렴치한 사기행각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다. 그의 말은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했다. 김경준씨는 한국 송환을 두려워하면서도 미국 법정에서 이명박 전 시장에게 책임을 돌릴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 측근은 “2002년 대선 때 김대업씨가 녹음테이프 음성까지 조작해 병풍(兵風)의혹을 제기한 점, 한인옥 여사(이회창 후보 부인) 20억원 수수 의혹이 제기됐을 때도 조작된 돈 수수 서류가 제시된 점에 주목한다. 정치권이 사기꾼의 어설픈 서류로 공세를 편다면 그것은 제2의 김대업 조작 폭로전으로 규정되어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 전 시장은 1995년 15대 총선 때 종로에서 당선됐으나 법정 선거비를 초과 지출하고 이를 폭로한 김모 비서관을 해외에 도피시킨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런데 서울시가 추진해온 상암동 DMC(디지털미디어시티) 국제비즈니스센터 내 초고층 랜드마크 빌딩 건설 사업의 시행권을 따내기 위해 움직이는 4개 시행사 중 한 업체에 김 모 비서관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관계자는 “김씨가 최근까지 대표로 재직했던 회사 측이 랜드마크 빌딩 시행권을 받기 위해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명박 전 시장의 선거법 위반 전력은 대선 과정에서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지 않을 경우, 2002년 서울시장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이미 심판을 받은 사안이기 때문에 ‘재탕’ 논란이 일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명박 전 시장 측은 “이 전 시장은 방송토론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내 인생 최대 실수이며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사과했다. 이 때문에 서울시장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충분히 알려졌다. 유권자들이 이명박 전 시장의 사과와 반성을 이해했기에 이명박 전 시장을 선택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모 비서관이 다시 등장한 데 대해 이 관계자는 “우리는 그를 만나지 않았고 만날 이유도 전혀 없다. 랜드마크 빌딩 사업은 공개경쟁입찰과 객관적 심사에 의해 시행사가 결정되므로 로비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상암동 DMC 사업과 관련, 열린우리당 선병렬 의원은 2006년 “이명박 시장 취임 직후 한국산학협동단지의 사업부지가 외국인학교 용도에서 주상복합시설 건립가능지역으로 바뀌었다. 한국산학협동단지 측이 큰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특혜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이후 추가적 문제 제기 없이 소강상태를 맞고 있다.
〈 강남권 부동산 등 재산형성 〉
2006년 8월31일자 서울시보에 공개한 이명박 전 시장의 재산 신고가액은 총 179억6750만원에 이른다. 명세는 서울 서초동 영포빌딩(건평 1753평) 62억8769만원, 서초동 상가(252평) 46억6646만원, 양재동 영일빌딩(830평) 43억181만원, 논현동 단독주택(대지 203평, 건평 99평) 12억2527만원, 논현동 대지(105평·배우자 명의) 6억830만원, 견지동 서흥빌딩 사무실(79.8평) 전세권 4000만원, 2006년식 에쿠스 자동차, 2006년식 그랜드 카니발 자동차, 2006년식 그랜저TG 자동차, 1998년식 쏘나타Ⅲ 자동차, 본인 예금 9억4576만원, 배우자 예금 및 보험 6728만원, 제일컨트리클럽 골프회원권 1억원, 두양산업개발클럽700 골프회원권 9200만원, 호텔롯데 헬스회원권(배우자) 570만원, LK이뱅크 출자지분 30억원 등이다.
서울 서초동, 논현동, 양재동 등 강남권 부동산(빌딩 2채, 상가, 주택, 대지)이 이 전 시장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명박 전 시장은 주로 현대건설 재직시절 이들 부동산을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보너스 많았다”
이명박 전 시장 소유 서울 서초구 1717-1 상가 건물(맨위). 서초구청 건축물대장에는 이 건물에서 두 번 위법 사항이 적발됐으며, 이후 이들 위법사항이 해지됐다고 기록돼 있다(중간).2006년 ‘황제 테니스’ 논란 때 공개된 이명박 전 시장 처남과 현대 고위간부들 소유의 경기 가평군 전원주택. 이 명박전 시장 측근은 “YS 정권 때 사정기관이 이 전원주택의 인허가 과정 등을 조사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을 퇴직한 임직원 모임인 ‘현대 건우회’는 이명박 전 시장의 부동산 취득 등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곳이다. 이 단체 우한영 사무총장을 인터뷰했다. 우 총장은 이명박 전 시장과 함께 현대건설에서 오랫동안 재직했으며 임원으로 퇴직했다.
▼ 이명박 전 시장은 강남권 다섯 군데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현대건설과는 관련이 없습니까.
“논현동 집은 회사에서 지어준 것으로 압니다. 개인이 땅을 구입하면 회사가 집을 지어주는 방식이었죠. 이명박 전 회장을 포함해 현대 계열사 사장 4명이 그런 혜택을 봤어요. 업무 성과에 대한 일종의 인센티브 성격이었죠.”
▼ 그 외의 다른 부동산은.
“서초동 법원 앞 빌딩은 법원이 개발될 때 이명박 전 시장이 구입한 것으로 압니다. 논현동 집 외엔 회사가 이명박 전 시장에게 도움을 준 것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 이명박 전 시장은 강남권 부동산 구입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요.
“이명박 전 시장은 중동 등 전세계를 돌며 공사를 많이 했고, 회사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어요. 현대는 건설에서 수익을 많이 내게 되어 자동차, 조선 사업도 하게 된 것 아닙니까. 이 때문에 이명박 전 시장은 사주인 고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보너스를 많이 받은 걸로 압니다. 한 번에 1000만~2000만원, 혹은 2000만~3000만원이었던가. 당시 서울 전농동 주택 가격이 500만원 정도였으니, 보너스로 받은 돈으로 강남권 부동산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 이명박 전 시장이 재산을 증식하는 과정에 회사에 피해를 준 경우가 있었나요.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내가 아는 한 전혀 없었어요. 현대건설 퇴직자 대다수는 이명박 전 시장을 공사(公私)가 분명하고 능력 있는 경영인으로 기억합니다.”
▼ 그렇게 잘 나가던 현대건설이 위기를 겪게 된 데는 이명박 전 시장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이명박 전 시장과는 무관한 일이에요. 이 전 시장이 1992년 퇴직하고 한참이 지난 뒤 정주영 회장 자식들의 주도권 다툼과 참모들의 반목으로 회사가 어렵게 된 거지요.”
이명박 전 시장은 1993년 공직자 재산신고 때 274억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그는 재산신고 직전 서초동 법조타운 앞 땅 470평(1718-1, 1718-2)을 시세에 못 미치는 60여억원에 처분했다. 2006년 신고액은 179억원이므로 지난 13년간 그의 재산 신고액은 감소 추세에 있다.
2002년 서울시장선거 때 김민석 당시 민주당 서울시장후보는 “이명박 전 시장은 재산가(당시 175억원)이지만, 월 2만원 정도의 건강보험료만 내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명박 전 시장은 자신의 건물을 관리하기 위한 회사의 대표가 되어 직장보험에 가입됐는데, 자신도 종업원과 비슷한 수준의 월급을 받는 것(99만~133만원)으로 돼 있어 건강보험료도 적게 나왔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전 시장 측은 “3년간 4억1770만원의 세금을 냈는데, 고의로 건강보험료를 적게 내려고 했겠는가. 공단 측이 시키는 대로 납부했는데 이후 공단 측은 ‘규정을 잘못 해석한 실수’를 인정했다”고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서울 YMCA 유권자 10만인 위원회’는 서울시장후보자 자체 검증을 벌인 끝에 이명박 후보의 건강보험료 납부는 불법사항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번 위법, 두 번 해지
2006년 서울시에 대한 행자부 감사 결과를 담은 문서. 건축물 인허가 및 관리에 문제가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관할구청에서 이명박 전 시장 소유 부동산의 건축물대장을 살펴봤다. 그 결과 서초동 1717-1번지 지하1층, 지상3층 상가 건물(제2종 근린생활시설)의 경우 2001년 1월22일 ‘위법건축물’로 적발된 점이 드러났다. 이어 같은 해 3월31일 위법 해제된 사실이 기록돼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전 시장은 공직을 맡고 있지 않았다.
이어 2003년 4월11일, 이 건물은 다시 위법건축물로 적발됐다. 사유는 ‘철판/철판. 캐노피. 7㎡’로 되어 있었다. 이 때는 이명박 전 시장이 서울시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캐노피는 통상 눈, 비 등을 막아주기 위해 건물에서 돌출된 처마와 같은 구조물인데 서류상으로는 이명박 전 시장 소유 건물의 어느 부분인지 나와 있지 않았다. 건축물대장 기록에 따르면 9개월여 뒤인 2004년 1월26일 이 부분도 위법 해제됐다. 이명박 전 시장 소유 상가의 구체적인 위법 내용이 무엇인지, 또한 어떤 사후조치가 취해져 위법이 해제됐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서초구청 담당 직원을 인터뷰했다.
▼ 서초동 1717-1 건축물대장엔 2001년, 2003년의 위법 적발 사실만 간략히 나와 있는데, 이 건물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을 위반한 건가요.
“건축물대장에 기록된 내용 이상은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 위법 내용을 처음부터 기록해두지 않은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위법 적발된 건축물의 해당 부분, 위법의 이유, 위법해지의 이유를 모두 기록해두고 있는데 현재는 관련 규정에 의거해 폐기된 상태입니다.”
▼ 그렇다면 이 건축물의 위법 사유가 경미한 것인지, 문제가 되는 것인지 추정할 수 없나요.
“위법 사유가 뭔지 알 방법이 전혀 없네요.”
▼ 위법 해지 과정은 적절했다고 봅니까.
“통상 건물주가 시정조치나 적법한 절차를 거치면 해지됩니다. 건축물대장에 따르면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이 경우는 상세한 내용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단정적으로 얘기하진 못하죠.”
▼ 이 건물은 2004년 2월11일 1층 8.1㎡, 3층 54.80㎡를 각각 증축하겠다고 신청해 구청에서 증축사용승인을 받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 부분이 위법 사안과 관련 있습니까.
“구청이 법률 검토 끝에 증축사용을 허가한 것이므로 그 부분은 적법하게 처리됐다고 보면 됩니다.”
정리하면, 이명박 전 시장의 서초동 상가는 두 차례 위법으로 적발됐다가 해지된 사실은 있으나, 공식 문서로 그 구체적 내용을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 서울시정(市政) 〉
‘이명박 대세론’의 혁혁한 공로자는 그가 청계천 복원과 버스 준공영제 등 서울시정(市政)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이미지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쟁자들은 이 같은 ‘성공 신화’를 무너뜨려야 대세론을 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향후 서울시정에 대한 검증작업이 치밀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 전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에서는 두 가지 비리의혹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고법은 2006년 2월 양윤재 전 부시장이 청계천 인근 주상복합빌딩 재개발 추진업자인 길모씨로부터 고도제한 해제 등의 청탁과 함께 1억원을 받은 점을 인정해 징역5년, 추징금 2억5500만원을 선고했다. 2006년 5월15일 박모 서울시 주택국장은 현대자동차 양재동 사옥 증축 인허가 과정에서 현대차 그룹으로부터 금품로비를 받은 혐의로 검찰소환을 앞둔 시점에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현재까지 검찰에서는 새로운 수사결과가 나오지 않아 양 부시장 등의 ‘개인 비리’로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서울시정 관련 비리의혹 사건이 향후에 확대되기를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몇몇 대선주자 진영은 이명박 전 시장이 중점적으로 추진해온 청계천 복원, 버스공영제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한 대선주자 캠프 관계자는 “청계천 복원 공사를 맡은 건설사들에게 집행된 공사대금이 실제보다 부풀려졌거나 축소된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또한 이명박 전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들이 청계천을 복원하기 위해 4200번이나 주변 상인 등 민원인들을 만나 설득했다’고 자주 말하고 있는데 복원 3년간 4200번 만났다는 건 지나친 과장 아니냐”고 주장했다.
“서류상 4160번 만나”
이에 대해 청계천 복원사업을 총괄했던 장석효 전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공사대금 허위지급 및 기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다음은 장 전 부시장의 설명이다.
“청계천 복원구간 5.8㎞는 3공구로 나눠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에 공기(工期)가 단축됐다. 1공구는 대림건설과 삼성건설, 2공구는 LG건설(현 GS건설)과 현대산업개발, 3공구는 코오롱건설과 현대건설이 맡았다. 서울시는 공개경쟁입찰을 통해 이들 시공사를 선정했다. 청계천 복원에는 3840억원이 들었는데 대부분 이들 시공사에 지급됐다.
설계 발주금액과 실제 공사에 소요된 금액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차액은 정산하여 시공사에게 지급됐다. 발주금액과 실지급액 등에 대해선 문서로 일일이 기록을 남겨두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다.”
장 전 부시장은 ‘4200번 논란’과 관련, “이명박 전 시장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청계천 사업 때 관련 민원담당 서울시 공무원은 100여 명이었다. 청계천 주변 점포는 6만여 개였고 무허가 상인, 점포 종사자까지 합쳐 청계천 사업과 관련해 20만명의 민원인이 있었다. 100여 명의 공무원은 청계천 현장에 매일 상주하면서 밤낮없이 민원인들을 만나서 이들의 요구를 듣거나 이들을 설득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공무원들은 민원인들의 요구사항 등 민원인 접촉결과를 보고서 형식으로 제출했다. 민원인과의 대화 4200번은 이런 보고건수를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된다.”
서울시 취수과 청계천관리팀은 “서울시 기록에 따르면 청계천 복원 당시 서울시 공무원들이 민원인들을 만나 대화한 횟수는 ‘4160번’으로 되어 있다. 당시 담당자에게 문의해보니 집계에 누락된 부분도 있어 실제 민원인 접촉횟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고 밝혔다.
버스 준공영제와 관련해 여권의 한 인사는 “이명박 전 시장이 버스 준공영제를 시행한 이후 서울시의 버스업계 지원금이 크게 불어나 의혹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버스체계 개편은 2004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이뤄지고 있는데, 이 기간 서울시는 버스업계에 2004년 하반기 816억원, 2005년 2221억원, 2006년 1950억원 등 4987억원을 지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버스체계 개편 이전에도 서울시는 2003년 970억원, 2004년 상반기 482억원 등 버스업계에 지원을 해왔다. 개편 이후 지원금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굴절버스 도입 등 버스 서비스의 질 개선과 사실상의 요금인하 효과로 시민 만족도가 크게 높아진 점도 고려돼야 한다. 2006년부터는 버스이용자가 늘면서 2005년 대비 지원금이 271억원 감소하는 등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명박 전 시장은 버스 지원금 증대에도 불구하고 시정 다른 부분에서 예산을 절감해 전체적으로 서울시 부채 7000억원을 갚았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시민의 버스서비스 만족도는 개편 전 58.2%에서 개편 후 86.2%(2006년)로 28%포인트 높아졌다. 하루 버스 이용자수는 개편 전(2004년 상반기) 382만7000명에서 개편 후(2006년 상반기) 445만5000명으로 늘었다. 버스와 지하철 연계 효과로 인해 하루 전체 대중교통(지하철+버스) 이용자수는 933만8000명에서 1034만4000명으로 10.8% 증가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 10년간 대중교통 이용자수가 지속적 감소추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고 설명했다.
시민단체인 ‘녹색교통운동’의 2005년 7월 조사에 따르면 버스체계 개편 이후 서울시민의 버스요금 부담은 7.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차로제에 대한 만족도는 48%, 불만족도는 13.1%로 나왔다
청계천과 버스 감사
2006년 서울시에 대한 행자부 감사 결과를 담은 문서. 행정자치부는 2006년 하반기 청계천 사업, 버스 준공영제 사업을 포함한 서울시정 전반에 대해 감사를 벌였다. 그 결과를 담은 ‘정부합동감사결과 처분 요구서’에 따르면 청계천 사업과 관련해선 ‘모전교 공사시 사전검토 부실에 따른 33억원 예산낭비’ 1건이 지적됐다. 그러나 138건의 처분 요구 사항 중 뇌물 수수, 횡령, 인허가 특혜 등 사안이 중대한 비리는 없었다.
〈 한반도 운하 〉
이명박 전 시장이 지금까지 발표한 대선 공약 중 핵심적인 것은 ‘국제과학비즈니스 도시 사업’과 ‘한반도 운하 사업’이다. 이중 한반도 운하 사업은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경부운하’, 영산강-금강-한강을 잇는 ‘호남운하’를 건설해 물류비용 절감, 관광자원 개발, 고용창출, 낙후된 내륙 도시의 내항(內港)화를 도모하겠다는 게 취지다.
이 전 시장 측에 따르면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내륙,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내륙, 충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경기 내륙의 ‘표심(票心)’을 자극하는 효과가 없지 않다. 안국포럼의 박영준 전 서울시 국장은 “설 이후 한반도 운하에 대한 본격적인 대(對)국민 홍보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운하 검증 4대 포인트
반면 여권과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진영에서는 한반도 운하를 꼼꼼히 검증하겠다는 태세다. 박 전 대표 측근인 유승민 의원은 이 전 시장에 대한 정책검증의 첫머리에 한반도 운하를 올려놓았다. 운하가 2007년 경선 또는 대선 국면에서 정책대결의 한 축을 이룰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운하사업 검증은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날 공산이 크다. 환경오염 논란, 경제적 타당성 논란, 부동산 논란, 사업방식에 대한 논란이 그것이다.
환경오염 논란은 운하가 지나는 한강과 낙동강이 식수원으로 이용되는 점, 국토의 단절과 훼손, 건설과정에서 부유물질 증대에 따른 수질 악화, 바지선 운항에 따른 오염사고 우려 등이 주요 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타당성 논란은 한마디로 ‘건설비용 대비 물류비 절감효과가 있는가’라는 얘기다. 운하 건설비 조달의 문제, 운하와 도로-철도-항만 연계비용의 문제, 바지선 운행 비용의 문제가 핵심 쟁점이다.
부동산 논란은 운하가 지나는 전국 수 십 곳의 내항 예정지, 선착장 예정지를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 안정화 기조가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에서 출발한다. 사업방식 문제의 경우, 국토를 개조하는 초대형 사업인 만큼 사업에 참여하는 민간 건설·토목기업의 이권(利權) 역시 막대할 것이므로 사업권 배분과정에서 권력형 특혜-비리 의혹이 나올 수 있다는 추정에 따른 것이다.
이 전 시장은 최근 기자에게 “운하는 친수(親水)공간을 넓히는 친환경 사업이다. 국토의 단절이 아니라 물길로서 인정(人情)을 이어주는 것이다. 식수원-수질 문제는 대책이 마련돼 있다. 또한 운하는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 꼭 필요한 경제정책이다. 골재 채취 등 재원 마련 방안도 있다. 사업추진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강승규 전 서울시 공보관의 설명.
“독일 뒤스부르크는 라인강변에 위치한 유럽 최대의 루르 공업지대 중심도시가 됐다. 내륙도시인 뒤스부르크는 RMD(라인강-마인강-도나우강) 운하 덕분에 내항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운하는 한국 내륙도시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자동차 대신 물길을 열어두는 것은 석유 절약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가 절실한 한국에 꼭 필요하다”.
이 전 시장 측은 한나라당 경선을 앞두고 운하사업의 구체적 내용을 자연스럽게 공개해 정책대결을 벌일 계획이다.
“후보 검증은 고고학적 발굴”
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선거에서 지지율이 뒤지는 후보가 1위 후보를 상대로 네거티브 캠페인(상대후보의 비리를 폭로하거나 비난해 상대후보가 지지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선거운동)을 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유권자에게 비전을 설득력 있게 홍보해 득표로 이어지게 하는 포지티브 캠페인(Positive campaign)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돼야 하지만, 상대후보를 깎아내리는 데는 비용이 훨씬 적게 들고 표 대결에 있어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시장 대선 캠프인 서울 견지동 ‘안국포럼’ 사무실. 직전 대선인 2002년 대선 때는 대세론과 검증론(네거티브 캠페인)이 실제로 밀접한 ‘반비례 관계’를 보였다. 검증론이 여론에 먹혀들 경우 1위 후보의 지지율은 꺾이기 시작해 종국에는 대세론이 허물어지는 결과를 보였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2월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47.5%로 ‘마(魔)의 50% 벽’을 넘어설 기세였다. 반면 상대인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33.7%에 그쳤다(양자 대결시). 그런데 연초 호화빌라, 원정출산 의혹 사건이 잇따라 터진 뒤인 3월23일 이회창씨의 지지율은 33.7%로 13.8% 하락한 반면, 노무현씨는 44.8%로 11.1% 상승해 1, 2위가 뒤바뀌었다. 당시 여론조사 응답자 중 무려 49.6%가 ‘호화빌라 논란이 지지후보 결정에 영향을 줬다’고 답했다.
이회창 후보는 2002년 6월초 38.6%의 지지를 얻어 39.1%의 노무현씨(1위)와의 격차를 0.5%포인트 차로 좁혔다. 그러나 7월 들어 두 사람의 지지율 격차는 45.8% 대 31.1%로 더 크게 벌어지더니 이런 추세가 대선 막판까지 계속돼 결국 이 후보가 고배를 들었다. 한국갤럽의 ‘제16대 대통령선거 투표행태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중순부터 본격화된 김대업씨의 병풍의혹 제기 및 검찰수사가 이회창 후보에게 상당히 불리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응답자의 69.9%가 병역비리가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네거티브 캠페인이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다. 2002년 대선 막판 한나라당이 제기한 안기부 도청 의혹은 사실 여부의 불명확성, 자료입수 과정의 뒷거래 의혹이 부각돼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이회창 후보 검증작업을 지휘했던 핵심 인사는 “상대 후보 검증이란 ‘고고학적 발굴’과도 같다”고 했다. ‘사실 확인, 뉴스 가치, 여론의 동조’라는 3박자가 동시에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호화빌라의 경우 이회창 후보 일가가 3개 층에 나란히 살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처럼 행위 자체가 100% 사실로 확인돼야 여론은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호화빌라와 원정출산 문제는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재(不在)라는 높은 뉴스가치가 있었다. 당시 언론 환경도 박근혜 의원 탈당 등으로 이회창씨에게 좋지 않은 국면이었다. 사실, 가치, 여론 3박자가 일치하니 대세론도 무너진 것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이렇게 3박자를 모두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이 인사는 이명박 전 시장의 검증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02년 서울시장선거, 서울시장 재임 과정을 거치면서 이명박 전 시장과 관련된 많은 부분이 알려지게 됐고 평가를 받았다. ‘재탕’ 논란을 피할, 새로운 논란거리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다. 이회창씨는 ‘대쪽’ ‘청렴’ 이미지 하나로 성공했기 때문에 두 아들 군 면제, 호화빌라, 원정출산 등 도덕성 관련 문제가 터지자 국민이 실망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민이 이명박 전 시장에게 기대하는 것은 완전무결한 도덕성이 아니라 ‘능력’이다. ‘기업가 출신에겐 어느 정도 흠결은 있다’는 메시지가 은연중에 국민에게 주입되어 있다. 이런 상대에게 도덕성 관련 공격을 하더라도, 치명적 사안이 아니라면 이회창씨에 대한 공격만큼 여론에 잘 먹히지 않을 것이다. 능력으로 1위를 한 사람에게는 그 능력이 허구임을 입증해 보이는 식으로 공격을 해야 효과적인데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인사는 “1위 후보는 정치권과 언론 검증의 집중 타깃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녹음기, 카메라, 캠코더를 들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할 것이다. 말 실수, 선거법 저촉, 가족의 일탈행위 등 의외의 사안이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늘 애매한 말만 하거나 언론을 기피할 경우 ‘OOO스럽다’ 등 더 큰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박용후 에이스미디어(TV프로그램 외주제작업체) 대표는 “이명박 전 시장은 ‘점퍼 이미지’ 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대선주자였던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은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라는 코미디언의 혀 짧은 패러디 한 방에 정치생명을 거의 잃었다. 언론이 붙여준 ‘수첩공주’라는 별명도 박근혜 전 대표에게 큰 짐이 됐다. 대세론도 따지고 보면 ‘이미지’에 불과하다. ‘희화화(戱畵化)’가 확산되는 순간 끝난다. 홍보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전 시장 부부는 서울시장직을 퇴임한 뒤 종로구 가회동 북촌 전통 한옥을 구해 전세로 들어갔다. 관광명소였던 집이었다고 한다. ‘불도저’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한 참모진의 아이디어였다. 한 측근은 “풍수 전문가의 자문도 구했다. 이 전 시장이 살게 된 동네는 반경 500m에서 대통령 2명, 총리 3명이 난 명당이라고 하더라. 다만 소방도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게 흠”이라고 말했다.
2006년 이 전 시장에 대한 ‘언론 환경’은 좋지 않았다. 특히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는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언론’의 공세는 매서웠다. 2006년 4월 ‘황제 테니스’ 논란이 불거졌을 때 네이버는 뉴스메인 화면을 이 주제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황제 테니스’ 특집란을 별도로 만드는가 하면, 제목도 ‘해명도 짜깁기’ 등으로 자극적으로 처리해 이 전 시장 측을 공격했다. 신문, 방송 등 대다수 오프라인 언론은 처음엔 침묵했으나 이처럼 인터넷 포털에서 집중적으로 사회 이슈화를 선도하자 뒤따라 받게 되어 파장이 확산됐다. 이 전 시장의 지지율 하락세도 뚜렷해졌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이 테니스를 친 남산 실내 테니스장의 관리인인 이윤훈씨는 이후 ‘신동아’와의 최초 인터뷰에서 “황제 테니스는 없었다. 이 전 시장에 의한 특권적 코트 독점은 없었다”고 밝히며 테니스 코트 대여 전(全)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핵심 당사자에 의해 의혹의 중심축이 허물어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포털 저널리즘’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나왔다. 민주당 측은 “포털은 여권의 눈치를 본다. 포털은 언론사 기사를 받아쓰면서 자의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정파적으로 편향되게 편집해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며 포털 규제 목적의 입법화를 시도했다. 이후 포털의 ‘정치 개입’ 논란은 소강상태를 맞았다. 대선정국에서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등 언론 환경은 주요 대선주자에게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검찰 등 사정기관의 태도 역시 대선의 향배를 좌우할 요인이다. 1998년 대선 때 ‘김태정 검찰’은 야당 측 김대중 후보 비자금 계좌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았다. 여당인 신한국당이 증거자료를 제시하며 수사를 요청했는데도 검찰은 거부했다. 대선중립성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002년 대선 때 검찰은 김대업씨의 병풍 주장에 동조해 야당 소속 이회창 후보 측을 수사했다. 수사 착수만으로도 이 후보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대선주자 관련 수사에 있어서 검찰에 이처럼 일관성이 없다. 이런 점에서 야당 소속 1위 후보에게 투표일까지 남은 11개월은 ‘가시밭’ ‘살얼음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명박 대세론 유지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2007년 1월11일 박동현 MRCK 대표이사, 신창운 중앙일보 여론조사 전문위원, 이상일 TNS 부장, 홍영림 조선일보 여론조사 전문기자, 고한석 사회디자인센터 소장, 김헌태 KSOI 조장, 박성민 민기획 대표, 김윤재 미국변호사,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 연구교수 등 10명의 정치-여론 전문가를 상대로 서면 인터뷰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은 “이명박 전 시장의 대세론이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북정상회담, 통합신당 출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이들은 제3후보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많이 언급하는 가운데, “‘등장 과정과 비전’에 따라 새 여권주자는 경쟁력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들 중 절반은 “이명박 전 시장에게 재산 문제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다른 절반은 “타격을 줄 것”이라고 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재산 문제 영향이 미미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바탕에는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가 약하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상당수 전문가는 경제와 관련된 각 대선주자의 ‘비전 경쟁’이 이번 대선에도 성패를 좌우할 핵심 요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무곤 교수는 “국민은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선 집권 정부의 ‘과거’를 평가하는 투표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대선에선 ‘미래’를 보고 선택한다. ‘심판론’보다는 ‘건설론’에 무게중심을 둔다. ‘안 된다’는 후보는 ‘해보겠다’는 후보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이 전 시장 측은 전국 광역시도에 포럼 형식의 전문가 네트워크(대구 선진한국국민포럼, 부산 밝은미래포럼, 광주-전남 나라사랑시민포럼, 울산 국원포럼, 강원 비전강원포럼, 충남 충청미래포럼, 전북 마주보며포럼, 경남 미래사회국민포럼)를 두고 있다. 현재 3000여 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중 30%는 지역 대학 교수들이다. 광주포럼 회원 200여 명은 전원이 교수다. 1월중 대전, 충북, 경북에도 포럼이 발족될 예정이다. 이들은 해당지역의 숙원사업을 공약화하는 작업을 맡고 있다. 서울에선 안국포럼, 국제전략연구소(GSI), 바른정책연구원, 구 서울시정자문위원단, 한반도운하연구회 등의 싱크탱크에서 500여 명의 교수, 전문가들이 이 전 시장을 위해 정책 개발을 맡고 있다.
박영준 전 서울시 국장은 “전국 포럼 회원들은 자비로 사무실을 얻어 자발적으로 운영한다. 우파는 이제 정치와 선거에 적극 참여하고 희생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포럼은 그 전초단계”라고 말했다.
“조지프 나폴리탄 가라사대…”
그러나 이 전 시장의 경우 대선주자 중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자금 문제의 투명성을 유지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견지동 안국포럼의 경우 임차료, 상근직원 월급 등으로 월 2200만~2500만원이 지출된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당선을 이끈 전설적 정치 컨설턴트인 조지프 나폴리탄(Joseph Napolitan)은 ‘대세론 효과는 없다’고 했다. 대선은 ‘구도’의 싸움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선주자들에겐 ‘시대정신에 대한 캐치프레이즈’가 없다”며 ‘이명박 대세론’을 평가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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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아킬레스건’ 3大 재산 논란의 실체 서초동 꽃마을·도곡동 1313평·처남 회사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 법조타운 앞 투기 기승일 때 부동산 4건 매입 ● 이명박 땅에 들어선 철거민 집단거주지 ‘꽃마을’ ● 철거민 의장 “이 전 시장 투기 의혹” ● 이명박 측 “직무과정서 받은 건데 웬 투기?” ● 1985년 도곡동 4필지 처남·형 명의로 소유권 이전 ● “이명박, 명의신탁으로 1313평 은닉 의혹” ● 현대 “이명박 땅인지 여부 입증 불가” ● 이명박 측 “예전 의혹…팩트 틀리고 근거제시 없어” ● 이명박 사장 시절 처남 회사가 현대에 하도급 ‘신동아’ 2007년 2월호 ‘이명박 철저 검증’ 보도는 여야 정치권, 각 대선주자 캠프에서 관심을 끌었다.
한나라당 모 의원은 “이번 대선 판도를 결정지을 중대 변수는 ‘이명박 검증’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당사자인 이명박 전 시장 측은 “‘이 전 시장에게서 뭔가가 터질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인데, 이런 불안감이 상당부분 해소됐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가 대비하고 있는 의혹의 90%는 (‘신동아’에서) 다 다뤄졌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전 대표 측근은 “우리가 제기한 검증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전 시장 검증이 본격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평했다.
“3월 위기설이라는 얘기가…”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광용 대표는 PBS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열린세상 오늘’에 출연해 “이 전 시장 관련 의혹에 대한 해명이 오히려 의혹을 키우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정 대표와 진행자와의 대화.
▼ 그동안 인터넷에서 떠돌던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여러 소문, 모두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이 전 시장의 해명이고 ‘신동아’에도 실렸던데요.
“‘신동아’를 좀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우선 ‘신동아’에 해명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이 해명이 오히려 의혹을 더 키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디다.”
▼ 어떤 측면에서요?
“예를 들면 한나라당에서 검증기구를 발족시키겠다고 했기 때문에 제가 이걸 갖다가 다시 거론해서 아이템별로 주석을 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볼 때는,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나 이런 걸 볼 때 홀가분하지 않은, 찝찝한 해명이라고 봐요.”
▼ 찝찝하다니요.
“명쾌한 해명이 아니라는 뜻이죠.”
▼ 어떤 측면에서요? 뭔가 의혹이 더 커졌습니까?
“오히려 커지는 듯한, 이를테면 에리카 김 사건이라든지, 이런 것들 해명해놓은 것을 읽어보면 완벽하게 클리어하게 해명이 전달됐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러면 ‘신동아’에 나온 해명이 에리카 김에 대한 이야기와 다릅니까.
“‘3월 위기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경준씨인가, 그분이 3월에 범인 인도조약에 의해서 한국에 넘어올 수가 있대요.”
1988년 3월1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조타운(검찰청·법원) 부근 속칭 꽃마을 일대.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비닐움막집 11개동이 불에 탔다. ▼ 자, 에리카 김이 누굽니까.
“개략적으로 이야기할 때 사건의 구체적인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명박 시장님이 경제인으로서 사기를 당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 그런데 에리카 김에 대해서 사기를 당한 이명박 시장이 왜 3월이면 위기를 당합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지금 미국에 체포돼 있는 모양인데, 에리카 김의 동생이. 이분이 한국에서 범인인도 요청을 했대요.”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이명박 전 시장의 출생, 재산, 병역, 가족, 서울시정(버스·청계천·상암DMC), 선거법 위반, 운하 등 여러 포인트 중 향후 핵심은 바로 ‘재산’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명박 전 시장은 2002년 서울시장이 된 뒤엔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자기관리에 비교적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출생의 비밀, 숨겨둔 자식, 군 면제 등은 다소 사생활적 사안이거나 자료 확보에 큰 어려움이 뒤따른다. 또한 자료의 신뢰성 문제도 있다. 운하 등 정책 검증으로는 대세론을 꺾기 힘들다.
그러나 재산 문제는 다르다. 이 전 시장은 신고가액으로 180억원대 재산가다. 주로 강남권 부동산이다. 뭔가 나올 여지가 있다. 여권은 이번 대선 구도를 ‘20% 기득권층 대 80% 서민·중산층 대결’로 잡을 수밖에 없다. 사회 양극화 문제를 집중 제기해야 한다. 한나라당 유력 주자인 이 전 시장이 ‘강남 부자’라는 것은 호재다. 이 전 시장과 관련된 돌발적 이슈가 터져나오지 않는 한 ‘이명박 재산’은 소재 면에서나 구도 면에서나 최대 검증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검증의 핵은 재산”
일리 있는 논리로 들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재산’ 한 가지만 갖고 심층적으로 따져보기로 했다. 여권 여러 인사를 상대로 이 전 시장의 재산형성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증언 및 자료를 받았다.
그 결과 이 전 시장의 재산관련 문제는 시기적으로 현대건설 재임시절 및 첫 공직자 재산공개시점(1993년)인 1970년대부터 1993년 사이, 다스 및 김경준 사건이 발생한 1990년대 후반으로 한정된다. 이 전 시장은 나머지 기간인 1994~1996년(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2002년 서울시장 재임 이후 현재까지는 특별한 경제활동이 없었다.
이에 따라 이 전 시장에게 영향을 줄 만한 재산 문제는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꽃마을 투기 논란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1313평 은닉 논란 및 현대건설 재임시절 관련 논란 ▲처남 관련 두 회사(건설회사, 다스) 및 김경준 사건 논란으로 나뉠 수 있다.
〈 서초동 꽃마을 투기 논란 〉
1993년 9월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재산공개가 실시됐다. 이명박 전 시장(당시 의원)은 274억2000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2006년 신고가액 179억원). 그의 재산 중 부동산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특히 서초구 서초동에 4건의 부동산이 있었다.
서초동 1717-1번지 대지 1082㎡(신고가액 80억원), 서초동 1718-1번지 대지 692㎡와 1718-2번지 대지 862㎡(60억원), 서초동 1709-4번지 빌딩(대지 1245㎡, 건물 5792㎡, 108억2900만원) 등이었다. 이 전 시장은 이중 서초동 1718-1번지, 1718-2번지를 93년 6월19일 서울지방변호사회에 60억원에 매도했다.
이들 4개 부동산은 법조타운(검찰청사, 법원청사)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런데 1993년 당시 사회 유력인사들이 서초동 법조타운 개발 시점에 맞춰 그 일대 지역에서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1973년 서울시 서소문에 있던 법원, 검찰청 이전계획이 발표된 이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공직자, 법조인, 재계 인사 등이 법조타운 예정지 부근 토지를 사들여 큰 시세차익을 봤다는 게 투기 논란의 얼개다.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청사는 1985년 8월26일 착공해 1989년 6월30일 준공됐다. 그 옆 서울중앙지검 청사도 비슷한 시기인 1989년 7월14일 준공됐다.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 사이 법조타운 부근 땅은 무려 1만배 이상 값이 올랐다(1970년대 초 법조타운 이전 발표 이전엔 평당 4000원, 법조타운 이전 완료 후인 1990년대 초엔 평당 4000만원).
1993년 9월 이명박 당시 의원의 재산신고 내역을 담은 국회공보. 그는 서초동 법조타운 부근에 4필지의 땅을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서울 철거민들의 집결지
1993년 당시 법조타운 주변 부동산(토지 또는 건물) 소유주 중에는 이명박 노재봉 김문기 나웅배 함석재 박세직 장석화 강수림 등 여야 국회의원, 전두환 전 대통령, 전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씨. 그리고 판사 12명, 검사 3명 등 재조 법조인 19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법조타운 주변 서초동 ‘꽃마을’ 강제철거가 사회문제가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도시정비 차원에서 목동, 도화동, 사당동, 상계동, 신당동, 온수동 등 서울시 전역에 걸쳐 도시재개발사업을 추진했다.
1987년 한 해 동안 서울시내에선 23개 지역에서 재개발사업이 추진됐다. 서울의 주거환경이나 도시 미관은 상당부분 개선됐으나 그 과정에서 집중적인 강제 철거작업의 결과로 많은 도시 빈민이 집을 잃게 됐다.
서울 시내 각지에서 내몰린 철거민, 영세민들이 임시로 정착해 집단주거촌을 형성한 곳이 바로 서초동 법조타운 주변 꽃마을이었다. ‘전국철거민연합’에 따르면 꽃마을에 정착한 철거민은 2000여 가구에 이르렀다. 꽃마을 철거민들은 전기나 상하수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무허가 천막집, 비닐하우스에서 거주했다. 20여 가구가 1개의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등 주거여건은 최악이었다. 1988년 9월 월간 ‘말’지는 꽃마을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잠실주경기장에서 남서쪽으로 4∼5km 떨어진 서초구 서초동 법원단지 신축공사가 한창인 이 일대엔 언제부턴가 전국 각지에서 강제철거민, 영세민들이 모여들어 집단주거촌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주워온 널빤지와 기둥목으로 뼈대를 세우고 천막과 담요를 겹으로 덮어씌워 지붕을 올린 납작한 천막집들이 300∼700세대씩 나뉘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속칭 ‘꽃동네 비닐하우스촌’으로 불리는 이곳은 사람 한 몸이 간신히 빠져나갈 정도로 비좁은 골목을 따라 집들이 밀집해 있어 여름 한철 방안의 온도는 40℃를 오르내린다. 유희자씨는 치열하게 벌어졌던 사당3동 철거투쟁의 마지막까지 남아 최종보상금 330만원을 받아 쥐고 사당3동 철거민 50여 세대와 함께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에 정착했다고 한다….”
서울시 자료 “이명박 땅 포함”
흥미로운 사실은 서초동 꽃마을이 한국 사회 양극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매집·보유한 서초동 법조타운 앞 부동산 소재지와 꽃마을은 사실 거의 동일한 장소였다. 상류층인 땅 소유주는 지가(地價) 급등으로 ‘대박’이 난 반면, 그 땅 위에서 임시로 사는 사람들은 도시 난민들이었던 것이다.
꽃마을 지주와 철거민 사이엔 ‘화원(花園)’이라는 매개체가 있었다. ‘꽃마을’은 꽃과 식물을 재배하는 화원이 많이 들어서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지주가 화원 측에 땅을 임대하면 화원은 이를 철거민에게 재임대했다. 화원 측은 철거민에게 임대료로 300만∼400만원을 받았다. 당시 ‘말’지가 인터뷰한 사당3동 철거민 유희자씨도 철거반원들에게 매맞아가며 받아낸 보상금 330만원을 고스란히 꽃동네 화원 측에 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던 1989년 하반기 법조타운이 입주를 시작하면서 법조타운 주변 지역도 정비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때부터 서울시는 꽃마을 철거작업에 착수했다. 이즈음 꽃마을 철거민촌에선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화재 10여 건이 잇따라 발생하기도 했다. 1990년 8월28일 오전 9시 서울시는 공무원과 철거반원 1700여 명, 경찰 2500여 명, 포크레인 5대를 동원해 꽃마을을 강제 철거했다. 이후 꽃마을 철거민촌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당시 서초동 꽃마을 면적은 2만4800평으로 파악됐다. ‘신동아’가 1992년 서울시가 작성한 ‘서초동 꽃마을 내 부동산 소유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이명박 전 시장도 일부 법조계 인사들과 함께 이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전국철거민연합 남경남 의장은 “이명박 전 시장이 서초동 꽃마을 부동산 소유자 명단에 포함된 것만으로도 이 전 시장에게는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남 의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169-4번지(98평) 폐쇄등기부등본. 1985년 6월 현대건설주식회사(왼쪽 위 원내)에서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의 처남인 김재정씨(왼쪽 아래 원내)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됐으며, 김씨가 1995년 9월 이 땅을 포스코 개발 주식회사에 매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 꽃마을 철거민촌은 언제쯤 완전히 사라졌나.
“1995~1996년께 끝까지 남아 있던 검찰청 앞 150여 철거민 가구가 철거된 것이 마지막인 것으로 안다.”
▼ 당시 꽃마을 지역 지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당시 지주들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땅을 사고팔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상당수 지주는 법조타운 조성에 따른 지가상승 기대감으로 그곳에 투기를 한 것으로 안다.”
▼ 지주와 철거민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나.
“지주들과는 특별한 충돌이 없었다. 간접적으로 임대차계약을 맺어왔으니까. 그러나 일부 지주는 법조타운 준공 후 땅의 활용가치가 높아지자 철거민들에게 ‘무조건 나가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철거민들이 버티다가 대책위를 결성했는데, 이후로 지주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 서울시의 철거작업 당시 큰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경실련 서경석 목사 등이 서울시와 철거민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안다.”
‘지주 vs 철거민’ 네거티브 캠페인
▼ 이 전 시장의 꽃마을 부동산 소유를 어떻게 보나.
“나는 꽃마을에 부동산을 갖고 있던 사람은 모두 부동산 투기를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전 시장도 투기를 한 것으로 본다.”
전국건설노조연맹은 1993년 9월9일 “건설회사 봉급자로 몸담았던 이명박 의원의 재산이 274억원에 달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축재과정을 밝히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여권의 한 인사는 “꽃마을에서 부동산 투기로 수백억원을 번 지주와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철거민을 대비시키는 방식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구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선이 본격화하면 1990년 대 초 꽃마을에 살다가 강제철거로 쫓겨난 철거민을 TV에 출연시켜 ‘이명박은 안 된다’고 공격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처럼 자원이 대거 투입되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펴려면 ‘투기’로 볼 만한 정황이 충분해야 한다. 근거가 미약한 상태에서 하는 물량 공세는 자칫 ‘상징조작’이라는 역풍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꽃동네 철거 당시 중립적 위치에서 서울시와 철거민들을 중재해 폭력사태를 막았던 서경석 목사(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는 “1990년 꽃마을 철거 사건 때 꽃마을의 지주들과 관련된 문제는 전혀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지주 대 철거민’의 대립구도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국세청 민자당의 투기 조사
1990년 10월10일 국세청은 서초구 법조타운 주변 부동산 투기자 단속을 벌였는데, 적발자 명단에 이 전 시장은 없었다. 1993년 국회의원 재산공개 이후 민자당은 투기 의혹을 받은 의원 8명을 자체 징계(비공개경고 등)했는데, 역시 이 전 시장은 징계대상에 해당되지 않았다.
법원과 검찰청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청사 시공은 대림산업, 서울중앙지검 청사 시공은 삼환기업이 맡았다.
이 전 시장이 4개 서초동 부동산을 매입한 시기는 모두 1977년이다. 시기적으로는 1973년 법조타운 예정지 주변에서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한 지 3년 뒤의 일이다. 이 전 시장은 1977년 당시 서초동 부동산 구입가격이 1곳당 4000만~5000만원대였다고 밝혔다(1709-4번지 4527만원, 1717-1번지 4092만원 등). 현재가격(신고가액 등)은 그 114∼139배라는 것. 이 전 시장은 매입과정에 대해선 ‘신동아’에 보낸 자료를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1978년 7월 현대건설 자회사인 한국도시개발(주)의 특혜 분양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1977년 현대건설 사장 시절 사우디아라비아 대형 항만공사를 수주한 공로로 회사로부터 특별상여금을 받았다. 회사 측이 이 상여금을 해외 업무를 담당한 3∼4명의 간부로 하여금 관리토록 결정하고 당시 관재담당 이사가 서초동 토지를 구입하여 관리해오던 중 본인이 퇴직시 담당이사가 현금 통장 대신 등기서류를 넘겨주어 현재까지 소유하게 됐다.”
1993년 이 전 시장이 국회에 제출한 재산신고 서류를 확인해보니 이들 서초동 부동산에 대해 ‘해외공사 수주 상여금으로 77년 취득’이라고, 현재의 설명과 동일하게 기록돼 있었다.
1970년대 거래 명세가 담긴 폐쇄등기부등본을 법원에서 떼서 확인한 결과 서초동 4개 부동산은 1977년 ‘이명박’으로 소유권 이전이 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1977년은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 전 시장이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이 되던 때였다. 이 전 시장 전에는 이모씨, 변모씨, 김모씨 등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 전 시장 측 관계자는 “직무과정에서 받은 건데 웬 투기 의혹인가”라고 반박했다.
“회사 측이 이 전 시장에게 주는 특별상여금으로 이 전 시장 명의로 토지를 샀다가 이 전 시장이 퇴직할 때 넘겨준 것이다. 부동산 사고팔기도 없었다. 법조타운 이주에 편승해 투기를 했다거나 불법으로 부동산을 장만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
이 전 시장은 현대건설 재임 때 취득한 다른 강남권 부동산에 대해서도 서면으로 아래와 같이 답변해왔다.
“서초구 양재동 12-7번지, 14-11번지 : 1972년 서울시에서 지하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지하철공채를 공매했는데, 당시 서울시 당국으로부터 구매요청을 받아 액면가 310만2000원어치를 구입했으며, 그후 공채원리금 상환 정책에 의해 1974년 12월24일 현금이 아닌 체비지(替費地, 시공자측이 공사비에 충당하기 위해 남겨둔 땅)로 대불받는 등 자의에 의한 부동산 취득이 아닌 국가정책에 의해 불가피하게 취득한 부동산임.” (강남구 논현동 부동산 취득 경위는 ‘신동아’ 2007년 2월호 참조)
양재동 토지에 대해서도 폐쇄등기부등본을 떼어 확인한 결과, 12-7번지와 14-11번지는 모두 1989년 3월8일 ‘서울시’에서 ‘이명박’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 강남구 도곡동 1313평 은닉 논란 〉
1993년 9월 국회의원 재산공개 직후 이명박 전 시장이 서울 강남구 도곡동 땅을 처남명의로 은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다음은 당시 중앙일간지 A기자가 B시사잡지에 기고한 기사 내용.
“이명박 의원은 1985년 현대건설 사장 재직 때 구입한 강남구 도곡동 시가 150억원 상당의 땅을 처남 명의로 은닉한 채 신고하지 않기도 했다. 이 의원은 현대건설 사장에 취임한 77년부터 강남 개발 붐이 시작되자 회사 차원의 부동산 투자를 해오다 85년 도곡동 현대체육관 인근 나대지 1313평을 개인적으로 구입, 부인 김윤옥씨 등의 명의로 등기한 것을 비롯 수천평에 달하는 대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C 중앙일간지도 1993년 3월 “이명박 의원은 85년 현대건설 사장 때 사들인 서울 강남구 도곡동 시가 500억원어치 땅을 처남 명의로 해놓고 있어 자산의 소유사실을 고의로 감추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면 도덕성에 치명상”
이들 언론 보도의 요지는 이 전 시장이 처남 명의를 빌리는 일종의 ‘명의신탁’ 방식으로 고가의 부동산을 숨겨왔다는 것. 명의신탁을 불법으로 명문화한 ‘부동산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일명 부동산실명제법)’은 1995년 제정됐다. 도곡동 땅 명의신탁 논란은 1985년 발생한 것이므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불법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 여권의 한 인사는 “수백억원대 강남 부동산 은닉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대선주자로서 도덕성에 치명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1993년 ‘이명박 도곡동 땅 은닉’ 기사를 작성한 A 기자와의 일문일답이다.
▼ 1993년 9월 국회의원 재산공개 이후 이명박 당시 의원이 도곡동 땅 1313평을 처남 명의로 은닉했다는 기사를 작성했는데.
“내가 그런 기사를 썼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13~14년 전의 일이어서….”
▼ 기사엔 처남 명의뿐 아니라 부인 명의의 땅도 있으며, 도합 수천평에 달한다고 되어 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기사는 본인 명의로 되어 있다.
“그러면 내가 쓴 것이 맞을 것이다.”
▼ 당시 국회를 출입했나.
“국회로는 나가지 않았고 사건 담당이었다. 기사 내용이 어떤가.”
▼ (요지를 읽어 줌)
“기사 내용은 내가 직접 취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직접 확인한 것이라면 기억이 났을 것이다. 아마 한 언론에 먼저 난 것을 인용해 쓴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 한 여권 인사는 “1993년 당시 이 전 시장의 도곡동 땅 은닉 문제를 가장 이른 시기에 자세히 다룬 곳은 D 일간지다. 이후 다른 여러 언론이 D일간지 기사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해 후속 보도했다”고 귀뜸했다. 이 전 시장의 도곡동 땅 은닉 논란은 당시 정치권과 언론에 상당히 확산되어 있었지만 그 진원지는 D일간지에 제보한 취재원으로 좁혀지는 셈이다. 다음은 1993년 3월 D일간지 보도 내용.
“이명박 의원은 현대건설 사장에 취임한 77년부터 서울 강남개발붐이 시작되자 회사차원의 부동산 투자를 해오다 85년부터 강남구 도곡동 현대체육관 인근 나대지 1313평을 개인적으로 구입, 처남 재정씨 명의로 등기해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도 ‘김재정’ 명의로 되어 있다는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나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신동아’는 도곡동 구 현대체육관 인근 토지의 등기부상 소유권 관계부터 먼저 확인해봤다. 현대체육관은 이미 헐렸으며 이 일대는 타워팰리스 등 고급 주상복합타운으로 변모해 있다. 이 일대 번지는 여러 차례 통합되어 새로운 번지가 만들어졌고, 옛 번지는 지명에서 사라지기도 해 1985년 번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현대에서 이전된 땅 1건
확인 결과 도곡동 현대체육관 인근 지역에서 이명박 전 시장 관계인이 소유했던 토지는 4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등기부상에는 이 전 시장 본인이 이 일대에서 토지를 소유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다. 1985년 당시의 지번으로 도곡동 163-4, 164-1, 164-2, 169-4 등이었다. 이들 토지의 면적을 합산해보니 1993년 기사에 보도된 대로 1313평이 나왔다. 1993년 당시에도 이곳은 매봉산터널이 뚫리고 지하철 3호선 공사가 진행되는 등 강남 개발의 요지 축에 들었다.
이들 4개 지번의 땅은 1997년 하나의 지번(164-1번지)으로 통합됐다. 그런데 폐쇄등기부상 4개 지번에서 이 전 시장과 관련된 소유주는 두 사람으로 나타났다. 3개의 지번은 이 전 시장의 처남(김재정)과 이 전 시장의 큰형(이상은) 공동 소유였고, 나머지 1개 지번은 처남 단독 소유였다. 1993년 B잡지, C신문, D신문 보도에선 도곡동 땅 1313평의 소유주가 김재정씨 한 명뿐이라고 했는데 이는 등기부 기록과 일치하지 않은 오류인 것으로 나타났다.
폐쇄등기부에 나타난 이들 4개 번지의 소유권 변천 과정은 이렇다.
164-1번지, 164-2번지, 163-4번지 : 1984년 8월 서울 성동구 광장동 워커힐아파트 거주 전모씨(여성·당시 43세)가 매매에 의해 A단체(현대와 무관한 기관으로 보임)로부터 매입. 1985년 5월 매매에 의해 김재정씨와 이상은씨가 전씨로부터 이 땅을 매입. 1995년 9월 김씨와 이씨는 포스코개발에 이 땅을 매각.
169-4번지 : 1977년 5월 매매에 의해 ‘현대건설’이 매입. 1985년 6월 김재정씨가 매매에 의해 현대건설로부터 이 땅을 매입. 1995년 9월 김씨는 포스코개발에 이 땅을 매각.
1993년 언론 기사는 앞서 언급한 대로 등기부상의 소유권 관계에서 오류가 확인됐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도 핵심적 사실관계를 빠뜨렸다. 즉 4필지 중 1필지(169-4번지)는 이 전 시장의 처남이 현대건설(당시 이 전 시장이 현대건설 사장)로부터 직접 소유권을 이전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어 의혹을 증폭시킬 수 있는 중요한 사안임에도 기사엔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1993년 기사 내용 중 ‘이 전 시장이 개인적으로 구입해 처남 명의로 등기…’ 부분이 사실이라면 전 소유주인 전모씨에게서 땅을 구입한 사람은 김재정씨나 이상은씨가 아니라 실제로는 이 전 시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규명이 매우 어려운 사안이라고 한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명의신탁을 할 때 보통 실제 소유자는 권리확보 차원에서 해당 부동산에 근저당을 설정해두기도 한다. 그러나 도곡동 땅의 경우 이 전 시장 명의 근저당은 없었다. 이럴 경우 매도자(전씨)가 등기부상 매수자와 실제 매수자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줘야 한다. 그런데 명의신탁에 의한 부동산거래엔 실제 매수자는 나타나지 않고 주로 대리인이 거래를 한다. 매도자가 20여 년 전 자신의 땅을 사간 실제 매수자가 누구였는지를 입증할 증빙자료를 지금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169-4번지와 관련해 여권의 한 인사는 “현대건설에서 이 전 시장 처남에게 바로 소유권이 이전됐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이 전 시장이 현대건설 사장 재직 때 회사로부터 얻은 땅을 처남 명의로 명의신탁해 놓은 것일 수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 부분은 현대건설 측에 경위 설명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169-4번지는 총 1313평에 이르는 도곡동 4필지 중 가장 작은 규모로 93평이었다. 등기부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이 땅을 다른 큰 필지에서 분할해 매각한 것으로 돼 있다. 다음은 현대건설 측과의 일문일답이다.
현대, “98평이면 작다는 느낌”
▼ 1980년대 현대건설은 도곡동 지역에 땅을 많이 갖고 있었나.
“당시 도곡동엔 현대체육관이 있었다. 1980년대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모기업으로서 서울 등 여러 곳에 땅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주로 아파트를 지을 땅이었다. 백화점 사업도 그 때문에 한 것이고. 지금은 땅을 갖는 게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그때는 서울에도 싸고 좋은 땅이 많았다.”
▼ 도곡동 169-4번지의 경우 1985년 6월 현대건설에서 이명박 전 시장 처남인 김재정씨로 소유권이 이전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경위를 설명해달라.
“해당부서에 확인한 결과, 1985년 처분했다는 도곡동 169-4번지 땅에 대해선 회사 내에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등기부상의 기록 이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 현대건설에서 당시 사장인 이 전 시장 처남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을 두고 일각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께서 경영진에게 경영성과에 대한 보너스로 땅을 증여하거나 싼값으로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명예회장께서 이명박 당시 사장에게 준 것을 이 당시 사장이 처남 명의로 해둔 것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 98평이면 좀 작다는 느낌이 있다.”
▼ 현대건설과 김재정씨가 1985년 실제로 매매계약을 통해 토지거래를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당시 현대건설은 회사에 기여한 바가 인정된 협력업체 사장들에게 회사 소유의 땅을 분할하여 시세보다 저렴하게 팔기도 했다. 다만 협력업체엔 무상으로 주는 일은 없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처남은 당시 현대건설 협력업체 사장이었으므로 이런 방식에 의해 현대건설에서 이 전 시장 처남에게로 도곡동 땅의 일부 소유권이 넘어갔을 수 있다. 이 경우 등기부상 소유권과 실제 소유권은 일치하는 것이다. 그 땅의 실제 소유주가 김재정씨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는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도곡동 169-4번지는 법률적으로는 김재정씨 소유로 되어 있으며 매도자인 현대건설 측에는 이 점을 뒤엎을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시장 측은 “도곡동 1313평 땅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등기부에 나온 대로 처남인 김재정씨가 실제 소유주다. 과거 일각에서 도곡동 땅에 대해 명의신탁의혹이나 은닉의혹을 제기했지만 팩트(fact)가 틀리고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1995년 도곡동 4개 번지가 포스코개발에 매각될 당시 매매 대금은 공시지가로도 수십억에서 100억원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매도인인 김재정씨와 이상은씨는 공인(公人)이 아니고 이들 땅의 매매도 사적인 경제활동이었지만 향후 대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도곡동 땅 매각대금의 흐름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 특혜분양과 관련?
이 전 시장의 현대건설 재임시절 의혹과 관련,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이번 대선에서 다시 거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한국도시개발(주)이 무주택 사원용 아파트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정·관계, 검찰, 언론계 인사들에게 특혜 분양해 1978년 7월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우리 사회에서 ‘특혜분양(당시엔 ‘특수분양’이라고 표현)’이라는 용어가 이때 처음 유행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도시개발은 현대건설의 자회사였고, 이 전 시장은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이었다. 현재 주요 언론사 및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인명 정보에는 이 전 시장이 1978년 한국도시개발 사장을 겸임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때문에 이 전 시장이 아파트 특혜분양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을 것이라는 의문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그러나 한국도시개발의 후신인 현대산업개발 측은 ‘신동아’에 “인사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 전 시장은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종결된 이후인 1978년 12월 현대산업개발 사장에 취임한 것으로 돼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
“특혜분양 당시 한국도시개발 대표는 정주영 회장의 아들인 정몽구 현 현대자동차 회장이었다. 이 전 시장이 현대건설 대표이사로서 자회사에 포괄적인 경영권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사주의 아들이 대표로 있는 회사의 업무에 월급쟁이 CEO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처남 회사 관련 논란 〉
이명박 전 시장의 처남 김재정씨는 현대건설 직원 출신으로, 퇴사 후 우신토건(이후 우방토건을 인수해 ‘태영개발’로 개명)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김씨는 이 전 시장의 형 이상은씨와 함께 198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 시트부품업체 다스(당시 대부기공)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이 전 시장의 둘째형인 이상득 국회 부의장은 ‘신동아’ 2007년 2월호 인터뷰에서 “이 전 시장은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얘기해 대부기공이 안착할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권 일각에선 김재정씨가 관여한 우신토건의 실제 주인이 이 전 시장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시장측은 이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신동아’ 취재 결과 이 전 시장의 현대건설 재임시절 김재정씨가 운영하는 건설회사는 현대건설의 하도급 회사로도 운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현대건설 측과의 일문일답이다.
“준 건 맞는데 자료는 없다”
▼ 김재정씨의 회사가 이명박 전 시장의 현대건설 재임시절 현대건설에 하도급을 받았던 사실이 있나.
“몇몇 간부에게 확인해본 결과 그런 사실이 있다고 한다. 사장 처남 회사라서 지금까지 기억을 하는 간부들이 있었다.”
▼ 현대건설 측이 김재정씨 회사에 준 공사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간부들은 없다.”
▼ 김재정씨의 회사가 현대건설 측으로부터 따낸 물량이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인지, 아니면 특혜 시비가 일 정도의 과도한 규모였는지도 알기 어렵나.
“현대건설에선 알 수 없다.”
▼ 현대건설 측이 김재정씨 회사에 공사를 준 것은 김씨가 이명박 당시 사장의 처남이었기 때문이라고 봐도 되나.
“그건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김씨는 우리 회사 출신인데다 김씨 회사는 맡은 공사를 성공적으로 잘 수행했기 때문에 계약관계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 김씨 회사와 주고받은 계약 서류는 남아 있지 않나.
“우리 회사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킨다는 방침이기 때문에 이 전 시장을 편들 생각은 조금도 없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1990년대 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류 보관용 창고도 축소됐다. 그 바람에 많은 양의 서류가 없어졌다. 또한 회사 방침상 기본적 자료의 보존연한은 3년이고, 긴 것도 대략 10년을 넘지 않는다. 공사지(공사기록)는 보존연한이 없는데, 이 또한 상당부분 유실됐다. 이 전 시장이 재직할 때인 1992년 이전, 이 전 시장이나 김씨 회사와 관련된 서류는 회사에 남아 있지 않다.”
▼ 이 전 시장이나 김씨 회사에 대해 기록한 현대건설 내부 문서가 외부에서 폭로된다 해도 그 문서가 실제로 1992년 이전 현대건설에서 만든 문서와 동일한 내용인지, 아니면 일부 손을 댄 것인지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회사에 동일한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 대조가 불가능하므로 그렇게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스·김경준’ 검사의 변(辯)
이와 관련, 국세청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건설회사(김재정씨 회사)가 특정회사(현대건설)로부터 수주받은 하도급 명세는 세금계산서가 발행됐으면 합계표에 기록되어 세무당국에도 제출된다. 그러나 보통 세무당국에 제출되는 서류는 5년 정도 보관될 뿐이다. 특히 1992년은 국세청 통합전산망이 구축되기 이전이어서 자료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자료가 있더라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한 공개할 수 없다. 외부 유출 행위 자체가 더 큰 문제가 된다.”
정치권에선 김재정씨가 대주주인 다스의 실소유주가 이 전 시장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1996년과 2002년 다스 직원이 이 전 시장의 선거운동을 도운 사실을 밝혀내 이 전 시장을 기소한 바 있다.
2002년 당시 이 전 시장을 기소했던 박철준 서울고검 형사부 부장검사(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는 “당시 다스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수사 대상이 아니어서 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의 실제 지분을 규명하는 일은 회사 내부 당사자의 고소가 없는 한 밝히기도 어렵고 수사의 필요성도 없다”고 말했다.
“다스의 실소유주 문제는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회사 지분 문제는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 일가의 경우처럼 지분보유자 당사자의 요청이 있으면 수사를 하는 것이다. 등기상 지분권자가 있는 회사의 실소유주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있다고 해서 검찰이 수사할 수는 없다.”
이 전 시장과 다스는 금융사기범 김경준씨로부터 각각 30억원과 140억원의 피해를 봤다며 미국에서 김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전 시장은 미국 변호사 에리카 김과 몇 차례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동생인 김경준씨와 동업으로 LK이뱅크라는 회사를 설립했었다.
그런데 300억원대 사기 및 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김씨 측은 미국에서 체포된 뒤 이들 범죄에 동원한 BBK, 옵셔널벤처스와 이 전 시장의 연관의혹을 제기했다. 김씨 측은 “BBK는 이 전 시장 회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신동아’ 2007년 2월호 참조).
정치권에선 에리카 김·김경준 사건이 이 전 시장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최근엔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거액을 제공한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인 김영환씨가 해외에서 에리카 김과 비밀리에 접촉해 이 전 시장을 낙마(落馬)시킬 모종의 ‘딜’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동그라미 하나 안 나왔다”
이와 관련, 2002년 김경준씨가 미국으로 도피하기 직전까지 김씨 사건을 담당했던 김인원 사법연수원 교수(당시 서울지검 형사9부(현 금융조사부) 검사)로부터 이 사건의 실체 및 이 전 시장과의 관련성에 대해 의견을 들어봤다. 김 교수는 “김경준씨는 빨리 한국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 김경준씨의 혐의는 무엇인가.
“옵셔널벤처스를 인수한 뒤 증자를 하면서 회사 돈 수백억원을 횡령했다.”
▼ 이명박 전 시장도 김씨의 혐의에 연루된 정황이 있나.
“당시 수사할 때도 물어오는 사람이 있던데 김경준 사건에 이명박 전 시장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놓고 왜 자꾸 이 전 시장을 거론하나.”
▼ 수사 당시는 2002년 서울시장선거 때문이었을 것이고, 지금은 대선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 아니겠나.
“이 전 시장은 이름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동그라미’ 하나도 안 나왔다.”
▼ 옵셔널벤처스 등 김경준씨 관련 회사 직원도 모두 조사해본 결과인가.
“법인 자료를 충분히 검토했고, 직원들도 다 불러서 증언을 받았다. 김경준씨 외에 다른 주주는 없더라.”
▼ 김경준씨는 이 전 시장이 이 사건의 몸통이라고 주장하는데.
“김경준씨가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모르겠다. 김씨는 사기꾼이다. 국내에서 죄질이 매우 나쁜 수법으로 큰돈을 빼돌려 외국으로 도피한 자다. 체포되어 송환을 기다리는 상태에서 무슨 말이든 못하겠는가.”
▼ 한국 검찰이 미국 측에 김씨 인도를 요청한 것으로 아는데.
“김씨는 미국에서 알거지가 된 듯하다.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들었다. 우리 범죄인데 왜 거기서 압수하는지…. 법무부를 통해 인도 요청을 했을 것이다.”
“김경준 빨리 송환돼야”
▼ 검찰 내에서 김경준 사건 담당 검사는 현재 정해지지 않은 상태인가. 김씨가 한국에 송환되면 그때 수사팀이 새로 꾸려지는가.
“그건 아니다. 서울지검 내에 김경준 사건 담당 검사가 지정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들어오면 바로 수사하게 된다. 김씨가 체포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빨리 송환돼야 한다고 본다.”
▼ 김씨의 한국 송환 이후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은? 이명박 전 시장에게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나.
“내가 조사한 결과로는 이 전 시장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김씨의 혐의가 없어질 가능성은 없다. 다만 본인 주장을 참작해 횡령액수가 다소 경감될 수는 있을 것이다.”
(끝)
월간중앙
[ 임도경의 대권후보 집중탐구] 도전을 즐기는 승부사 MB ‘대운하’ 카드로 대권물길 틀까? “소년가장의 고단한 독학의 길… ‘기업인 엔진’ 국가경영에 재시동” 지지율 1위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지지율 부동의 1위 대선 주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행보는 오늘도 계속된다. ‘바닥인생’을 만나면 그의 과거가 꿈틀거리고, 미래에는 그의 CEO 및 서울시장 경험이 투영된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의 흔들리지 않는 인기의 끝은 어디인가? --------------------------------------------------------------------------------
■'어머니, 정주영 회장, 김영삼 대통령… 이명박이 만난 3명의 거목 ■'가난했지만 공부 잘하고 구김살 없던 아이… 동생 공부까지 도맡아 ■'6·3시위로 구속… “너 대단하구나, 소신껏 살라”던 어머니 ■'별명은 감퓨터(感+컴퓨터)… 비즈니스 승부에 동물적 판단력 ■'YS 부름에 정주영 회장과 결별… 운하 전도사 행보 박차
지난 3월 초 안국포럼 사무실, 예정에 없던 방문이 이어지는 바람에 인터뷰는 약속시간을 넘기며 한없이 지연됐다. 대기석에 앉아 얼굴이 붉어질 만큼 화가 났을 즈음 이명박 전 시장은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을 던졌다.
“화가 단단히 난 얼굴이네요. 인터뷰해 봤자 잘 써주지 않을 테니 밥 먹으면서 기분 풀고 시작합시다.” 어차피 낮 12시, 어느새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일행과 사무실을 나서서 인사동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갔다. 식사 주문이 끝나자 이 전 시장은 주저없이 식탁 옆에 쪼그리고 누웠다. 밥이 나올 때까지 잠깐 자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단한 행군에 잠이 부족하면 저럴까? 가뜩이나 기자를 앞에 두고…. 놀라움과 함께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동석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전혀 놀라운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식사 후 돌아오는 길에 청각장애인 부부가 하는 풀빵 리어카를 발견한 이 전 시장은 걸음을 멈췄다. 자신도 풀빵장사를 해봤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도와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잠깐 시범이나 보일 것으로 알았지만 그는 곧 그 일에 몰두해버렸고,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리어카 주위에 인산인해로 몰려들었다.
분위기를 보니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거리에서 기다리느니 먼저 사무실에 가 있겠다 하고 그에게 산 풀빵 한 봉지를 든 채 그곳을 벗어났다.
한참 후 사무실로 돌아온 이명박 전 시장은 “내가 한 시간만 고생하면 그 사람들 하루치를 벌어줄 수 있다”며 꽃샘추위가 잔뜩 묻은 코트를 벗었다. 이런저런 돌발적 행동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와의 인터뷰는 그 이후에나 시작됐다. 집무실 밖에서는 다음 약속을 한 사람들의 긴 기다림의 줄이 이어졌다.
두 장면 속, 그는 독특했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독특함’의 본질을 파악해야 했다. 이런 행동들이 미워할 수 없는 ‘감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독선’의 산물인지….
바로 얼마 전 갤럽에서 실시한 대선 후보 이미지 조사에서 그를 대통령감으로 꼽는 사람들이 가장 지지하는 부분은 추진력(27.6%)-경제발전 기대(16.6%)-전 서울시장(12.2%) 순이었고,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답한 사람들은 그 이유로 독선적(14.9%)-신뢰성 부족(13.5%)-정치경험 부족(8.7%)인 것으로 조사됐다.
변화 대응력 강한 B형 혈액형 소유자
찬반이 가장 강하게 엇갈리는 ‘추진력’과 ‘독선’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독특한 캐릭터가 그를 지지하는 사람과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강하게 각인돼 있는 셈이다.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표 측 법률특보였던 정인봉 변호사의 폭로전에서 시작된 전 비서 김유찬 씨 위증 교사사건 진위공방은 지난 3월12일 경선준비위 자체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도 이 사건의 휴유증은 사건의 진위와 별개로 이 전 시장의 이미지에 적잖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의 독특한 캐릭터를 ‘부도덕’함에 묶어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갈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지지율은 약간 떨어졌을 뿐, 1위 자리는 굳건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지난 대선에서의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2002년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체험한 ‘노무현 학습효과’(아마추어리즘 배격) ‘김대업 학습효과’(마타도어 배격) ‘이인제 학습효과’(탈당자 배격) 등 3대 학습효과가 바로 그것.
김유찬 씨 폭로는 ‘김대업 학습효과’로 웬만한 마타도어에는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줬다. 여기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노무현 학습효과’의 덕까지 톡톡히 보고 있다. 이는 여론조사 수치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갤럽에서 최근 실시한 전 국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은 이번 대통령이 갖춰야 할 3대 자질로 경기회복(33%)-리더십(13.1%)- 추진력(12.7%)을 꼽았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경합을 벌인 15대 대선에서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의 3대 자질은 경제위기 극복(72%)-정치개혁(7.2%)-서민생활안정(2.9%)이었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이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맞붙은 16대 대선에서는 능력(11.1%)-정책(9.7%)-인물(7.6%) 등이 3대 자질로 꼽혔다.
지도자의 자질로 ‘추진력’이라는 항목이 등장한 것은 이번 대선의 독특한 특징이다. 행정 아마추어리즘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이 이번 대선에서 ‘경기회복’과 ‘추진력’을 지도자의 주요 덕목으로 들고나온 것도 결국 ‘노무현 학습효과’ 때문이다. 이제는 현란한 수사보다 실행력을 갖춘 행정형 지도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수혜자가 바로 이 전 시장이다.
그를 지지하는 이유가 ‘경기를 회복시킬’ ‘추진력’ 두 항목에 집중돼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공채 사원으로 시작해 12년 만에 현대건설 사장으로 승진한 성공신화를 이룬 경영인이며, 서울시장 재직 당시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통해 변화한 서울을 확인시킨 행정가다. 이런 학습효과를 배경으로 해석하면 그에 대한 지지도는 순간적 거품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어머니의 품, 가난 속에서 현실을 배우다
그에 대한 지지는 ‘박정희 신드롬’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개발우선논리가 사회를 지배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을 관통하며 성장한 경영인이다. 박 전 대통령과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바로 옆에서 블도저형 추진력을 습득했다. 이런 강한 추진력은 일부에서는 ‘독선’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느 정치인보다 ‘박정희형 추진력’을 갖고 있는 그에게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누리고 있는 ‘박정희 향수’와는 또 다른 힘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직계 자녀인 박 전 대표가 누리는 부분은 간접적이고 정서적인 데 비해, 가시적인 행정적 성과를 보여주는 이 전 시장의 파워는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서는 셈이다.
이런 그를 오랜 시간 지켜본 같은 고향(포항) 출신의 한 원로 언론인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라고 말했다. 이 언론인은 이 전 시장을 두고 “시대적 흐름과 자신의 성장이 맞아떨어진 경우”라며 “갖춰진 토양이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더 비옥해져 긍정적인 형태로 삶에 투영됐으니 그보다 더 운 좋은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거쳐온 변화무쌍한 시대상이 B형 혈액형을 타고난 그에게는 성장하기 적합한 토양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의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고생은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는 독이 되지만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자양분이 된다.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지혜와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성공의 발판이 된 덕분인지 그의 성격은 긍정적이다. 이 전 시장의 아내 김윤옥(60) 씨도 남편의 최대 장점으로 ‘긍정적 성격’을 꼽는다.
▶1. 중학교 시절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 2. 고려대 경영학과 시절 본관 앞에서. 뒷줄 맨 왼쪽이 이명박 전 시장. 3. 동지상고 생활기록부에 올라 있는 고교시절 이 전 시장. 4. 1970년 현대건설 이사 재직시인 약혼식 후 회사동료·친구들과 함께.
1965년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건설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당시 상황은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우선논리에 따라 정주영 사장의 밀어붙이기식 경영원칙이 탄력을 받으며 기업이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가난을 돌파하며 갖게 된 그의 추진력과 통찰력이 그 속에서 진가를 발휘했고, 그는 입사 12년 만인 35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되며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뤘다. 그의 성공신화는 TV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1992년 그가 현대 계열사 회장직에서 물러나자, 경제우선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권은 그를 ‘전문경영인’으로 예우하며 정계 진출을 권유했다. 건설업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노가다’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던 풍조에서는 파격적 제안이었다.
2002년 사실상 세 번째 도전에 성공하며 입성한 서울시장 자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것도 현대건설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키우고 운영해 보았던 CEO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덕분이다. 그의 업적으로 꼽히는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은 기업에서 닦은 그의 경영 수완이 행정에 접목돼 입증된 성과물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그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로 평가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1941년생인 그는 대부분의 동년배가 그러하듯 광복과 6·25전쟁이라는 격동기를 겪으며 고생스럽게 성장했다. 그 고생의 정도는 각기 사연에 따라 다르지만, 그 경험이 바로 성취의 자양분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명박 전 시장은 2005년 펴낸 세 번째 자서전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랜덤하우스중앙)에서 자신의 리더십의 요체를 ‘위기에 강하다-반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디지털시대의 경쟁력을 얻는다-CEO형 리더십’으로 요약했다. 이 항목은 최근 세계 2위의 갑부이면서도 재산의 운용에 대한 철저한 도덕성으로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부자인 워렌 버핏이 밝힌 후계자론과 맞닿아 있어 흥미롭다.
버핏은 지난 3월1일 ‘2006년 연례 투자서한’을 통해 곧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지목할 것임을 밝혔다. 그가 적시한 후계자의 자격은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독립성과 안정적 감성-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 세 가지였다.
투자가인 버핏의 후계자론과, 경영인이면서 행정가인 이명박 전 시장의 리더십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위기관리 능력을 첫 번째로 꼽은 것이나 사람을 포용해야 성공한다고 적시한 부분도 그렇다. 그는 가난을 통해 위기를 관리하고 독립적으로 살아남는 지혜를 얻었다. 또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해 안정적 감성과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기본을 닦았다.
65년에 걸친 그의 삶 속에서 이런 자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현실에서 실천돼 왔는지 한번 짚어보자.
그는 자신의 일생 동안 3명의 거목(巨木)을 만났다. 개인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처럼 그 자신을 알아주는 거목 옆에서 성장하는 행운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 씨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2001년 작고),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그들과의 삶 속에서 도전과 응전을 통해 성장해온 이가 바로 오늘날의 이명박이다.
‘인간 이명박’의 형성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특히 그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누구나 그러하듯 어린 시절의 정서와 경험의 토대 위에서 기업과 행정에서 신화를 이뤄낸 이명박의 리더십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시장은 가난했지만 정서적으로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성장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가 종교적 가풍 안에서 자녀들을 품어 안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 씨와 어머니 채태원 씨 사이에 태어난 일곱 남매(4남3녀, 귀선·상은·상득·귀애·명박·귀분·상필) 중 다섯째다.
아버지 이씨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1리가 고향인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1935년 새로운 기회를 찾으러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목장 일을 거드는 목부(牧夫)로 살았다.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된 반야월에서 자란 어머니와는 고향 사람의 중매로 만나 일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 전 시장의 출생지는 오사카다.
▶ 좌) 어린 이명박에게 꿈을 심어준 둘째형 이상득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5선 의원이다. 우)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회장 시절 6ㆍ3사태 관련 시위 주모자로 구속 수감돼 재판받는 이명박 전 시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태몽! 치마폭에 보름달 안았다
그의 이름은 남자 형제들의 ‘상’자 돌림을 따 ‘상경(相京)’이었다. 족보에는 이 이름이 올라 있다. 호적에 명박(明博)이라는 이름을 올린 것은 태몽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갖고는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했더니 작명하는 사람이 이 이름을 붙여줬다는 것이다. 일본식 이름이라는 뒷말을 듣는 그의 이름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해방 직후 온 가족은 귀국선에 올랐다. 그가 네 살 때 돌아온 고향땅, 고생은 다시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 때 시행된 토지개혁으로 인해 아버지가 일본에서 번돈으로 형님 앞으로 사둔 땅을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다시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고향인 덕성리를 뒤로하고 포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에 배운 것이라고는 목부 일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동지상고 재단이사장집 목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여러 가지 물건을 지고 장터를 떠도는 일을 택했다. 아버지는 가난했으나 가정교육만큼은 철저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형제 간의 우애를 지키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커온 것도 이런 가르침 덕분이었다.
▶ 1964년 작고한 어머니 채태원 씨의 초상화.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아이들을 거둬야하는 어머니는 과일 행상에 나섰다. 당시 어머니의 꿈은 수재로 인정받던 둘째 형(이상득 국회부의장)이었다. 자식 하나라도 성공시키면 형제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니 나머지 자식은 먹고 입히며 키우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었다. 상득 씨의 여섯 살 아래 동생인 명박 씨도 자연히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명박 씨는 포항 중앙초등학교에 다니다 3학년 때 6·25전쟁을 겪은 뒤 이사하면서 영흥초등학교로 전학갔다. 고향인 흥해로 피난가 있는 동안 누이 귀애 씨와 막내 상필 씨를 잃었다. 전쟁 후 더 어려워진 살림으로 인해 하루 한두 끼는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영흥초교 동창생 박이득(66·전 언론인) 씨는 “당시 명박이는 행동에 구김이 없어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줄 몰랐다”며 “그래도 집에 놀러가면 어머니가 늘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당시는 잘 살든 못 살든 집에 아이들이 놀러오는 것을 귀찮아하는 부모가 대부분이었는데 명박이 어머니는 달랐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동지상고 동창인 김창대(65·사업가) 씨에게도 강하게 각인돼 있다. 그는 “야간학교라 학교 가는 길에 집에서 키운 배추를 두 포기 뽑아 가져다드렸더니 다음날 불러 쌀밥과 배춧국을 주셨다”며 “보리밥도 귀한 시절인데 어려운 살림에 아들 친구를 그렇게 대접해주는 어머니는 없었다”고 했다.
이명박 전 시장이 어렵게 자랐어도 자신 있고 긍정적 성격을 가진 데는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의 일과는 새벽 4시 기도로 시작됐다. 기도 속에서 그는 가난은 불편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것임을 어려서부터 깨달았다. 어머니는 또 그 상황에서도 남을 도우라는 말까지 했다. 자신보다 돈이 많은 사람도 떳떳하게 도울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르친 것이다. 당시 그의 성적은 반에서 늘 3등 안에 들 만큼 우수했고, 유독 글씨를 잘 써 다른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였다고 한다.
중학생 이명박은 학교에 다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머니를 따라 시장통으로 장사를 나섰다. 그가 중학교 때부터 살았던 포항시 덕산동 686번지는 일제 강점기 때 절이었던 곳으로,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의 가족은 길이로 쪽방 두 개가 연결된 부엌도 없는, 여섯 칸 집 중 한 칸에 세들어 살았다. 지금은 문 앞 연탄 아궁이에 칸막이가 생겨 간이 부엌처럼 개조돼 있지만, 당시는 바람 한 점 피할 수 없는 한데서 밥을 해먹고 사는 환경이었다.
30년째 그 옆 칸에 세들어 살고 있는 안복순(81) 씨는 “지금도 월세가 10만 원”이라며 “이 전 시장이 살던 옆 칸은 얼마 전 아파트가 당첨돼 재수 좋은 집이라고 소문이 났다”며 웃었다. 현재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임씨 부부는 맞벌이에 나가기 때문에 낮에는 현관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명박 전 시장은 학교를 마치면 어머니의 풀빵장사를 도우며 김밥장사도 했다. 집에서 200여m 떨어진 시장통에 자리 잡았는데, 50년 전부터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지켜봤던 상인 최전달(78) 씨는 “어린아이인데도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 깔끔한 성격이어서 눈에 띄었다”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는 고교 진학을 포기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아침마다 입에서 술지게미 먹은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바람에 불량학생이라는 오해까지 받고 교무실로 불려가기도 했다. 이때 추궁하는 선생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화가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집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생활환경을 본 선생님은 그 후 오히려 그를 도와 고교 진학의 길을 열어줬다.
이명박 전 시장은 이 경험으로 지금도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적의를 가진 사람에게 진정성을 알리면 오히려 더 심지 굳은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 원칙은 서울시장에 취임한 직후 바로 적용되었다. 그가 청계천 복원의 대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 경험 덕분이었다.
2002년 7월 서울시장에 취임한 직후 한 서울시 고위공무원이 봉투를 들고 찾아왔다. 청계천 복원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다른 후보 캠프에 자료를 준 공무원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이른바 ‘살생부’였다. 그는 이것을 보지도 않고 도로 가져가게 했다. 반대하는 사람이 90%인데 10%만으로는 일을 추진할 수 없으며, 반대했던 이들도 일단 돌아서면 열심히 동참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 1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동지상고 동창인 김창대 씨가 이명박 전 시장이 중ㆍ고등학교 시절 살던 집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2 동지상고 시절 김창태(뒷줄 오른쪽) 씨와 이명박(뒷줄 왼쪽) 전 서울시장이 함께 찍은 사진. 3 영훈초등학교 교정에 선 동창생 박이덕 씨. 4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 시절 포항여고 앞에서 뻥튀기장사를 했던 때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기억 속에는 가장 창피했던 순간으로 남아있다. 이명박 전 시장의 동지상고 동창 강원구 씨가 뻥튀기장사를 하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진정으로 대하면 적도 동지 된다”
아버지가 동지상고 재단이사장의 목장 일을 한 덕분에 위의 두 형은 동지상고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당시 아버지가 5일장을 따라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낮에는 일을 해서 어머니를 돕는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반 진학을 허락받았다. 어머니는 그가 등록금이 면제되는 기간에만 다닐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둘째형이 포항에서 최초로 육사 14기에 합격하는 경사가 있었지만, 1학년 때 팔을 다쳐 중도에 포기했다. 형은 다시 대입시험을 치러 1957년 서울대 상대에 합격한 터여서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 뒷바라지는 생각도 못했다. 포항에서 육사에 이어 서울대에 입학한 기록은 둘째형 상득 씨가 최초로 세운 것이었기에 어머니의 기대는 남달랐다.
그의 고교 동창 김창대 씨는 “명박이와 나는 상득이형처럼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이명박 전 시장도 “만일 내 위에 큰형만 있었으면 그렇게 자극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어린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무뚝뚝한 둘째형이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엽서 한 장을 보내왔다. “대학은 꼭 돈이 있어야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꿈을 잃지 말고 꼭 진학하라”는 격려의 편지였다. 하늘 같은 형으로부터 처음 이런 격려를 받은 그는 엄두도 못 냈던 대학 진학의 꿈을 가슴 속에 품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에 뛰어든 것은 고2 때다. 온갖 장사를 다 해본 그는 이왕 고생하는 바에 돈벌이가 더 잘 되는 과일장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창 사춘기 시절 같은 나이 또래 여학생들이 지나다니는 포항여고 앞에서 뻥튀기장사를 하는 것은 얼굴 뜨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창피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과일장사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였다. 시들기 때문에 수량과 가격 조정이 생명이었다. 초장에 비싸게 불러 팔고 남은 것을 나중에는 헐값에라도 다 팔아야 하는 장사였다.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수완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장사도 오래가지 못했다. 비 오는 날 후진하는 승용차에 받혀 과일이 엉망진창되고 리어카도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차 주인은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냈다. 그는 지금도 이 일을 그가 겪은 가장 황당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명박이, 너 대단한 놈이구나. 소신대로 살아라”
분한 마음에 서울로 가출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깨진 과일을 모아 집으로 가져왔다. 장사를 시작한 이후 이윤을 내야겠다는 욕심에 어머니는 물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과일을 준 적이 없었다. 떠나기 전에 깨진 과일이라도 마지막으로 식구들에게 먹이겠다는 생각이었다.
매일 과일을 윤나게 닦아주던 어머니는 그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거둬온 깨진 과일을 먹기는커녕 돌아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새벽기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명박이의 앞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건강도 지켜주시고….”
평소 그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나 등장하던 어머니의 기도에서 처음으로 그가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그 기도에 감동해 그는 가출 시기를 한 달 뒤로 미뤘고, 몇 번을 그러다 결국 결국 영영 가출하지 못했다.
둘째형의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빚을 얻었던 부모는 벌이가 더 많을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고교 3학년에 진학할 즈음이었다.
그는 장학금으로 중학교에 다니던 동생 귀분 씨를 책임지고 졸업시켜야 하는 가장이 됐다. 이태원시장에 자리 잡은 어머니는 약속대로 생활비를 보내왔지만 보리쌀도 배불리 먹지 못할 정도의 작은 돈이었다. 동생은 늘 배가 고프다며 한꺼번에 배불리 먹고 차라리 굶자고 졸랐다. 하지만 그는 폐지를 모아 한 달분 봉지를 만들어 보리쌀을 나눠 담고 하루에 봉투 한 개씩 죽을 쒀 연명할 정도로 냉정했다.
당시 옆집 사는 친구가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 한 개를 슬쩍 갖다주었는데, 온갖 잡일을 다하며 생계를 연명하던 그에게는 유일한 영양 공급원이었다. 그는 그 친구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1960년 졸업식에서 그는 동지상고 수석졸업생으로 재단이사장상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러나 부모를 찾아 서울로 올라간 후여서 친구인 김창대 씨가 상을 대신 받아주었다.
부모는 이태원 판자촌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서울대에 다니던 둘째형은 김세련 전 한은총재(이후 재무장관 역임) 집에서 4년 내내 입주 가정교사로 생계를 해결하는 한편 미군부대에서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어 어렵게 대학공부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이력서에 고교 졸업보다 대학 중퇴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학에 합격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서울로 올라와 자취하고 있던 친구 김창대의 하숙방으로 들어갔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주인의 도움으로 헐값에 참고서를 얻어 대입 준비에 들어갔다.
김창대 씨는 당시 이명박 전 시장의 모습에 대해 “공부하면서 힘들었는지 기침을 심하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코를 푼 이면지가 가득이었는데, 축농증도 심했고 그때 유행했던 폐병에 걸린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1년간 공부해 고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경영학을 택한 것은 제2외국어시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의 상고 야간학부 출신인 그가 고려대에 합격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의 합격 소식을 들은 상인들은 등록금을 마련하라며 이태원시장의 쓰레기 치우는 일을 주었다.
▶ 이명박 전 시장이 중학교 시절 어머니를 도와 풀빵장사를 하던 시장통. 이 자리에서 50년간 잡화상을 해온 최전달 씨는 이 전 시장을 “깔끔한 소년”으로 기억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나마 어머니가 남의 가게 앞에서 생선 노점상을 하면서 가게가 문 닫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청소를 해주는 성실함을 보였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고 했다. 그 어머니는 그 모습을 통해 그에게 사람사이 신뢰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자 형 상득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 코오롱 본사에 취직돼 내려갔다. 1961년이었다. 형의 당시 월급은 3,000원.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상득 씨는 월급으로 부모가 진 빚을 갚는 데 급급하다 보니 자연 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대학생 이명박은 취직한 형의 도움 없이 4년 내내 쓰레기 치우는 일로 대학을 졸업했다. 3학년 때는 몸도 많이 상하고 더 이상 견딜 기력이 없어 재충전을 위해 군대에 자원입대하기로 결심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논산에서 기관지확장증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고 쫓겨나 시립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됐다.
그가 정치권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6·3사태 시위 주모자로 구속 수감돼 6개월간 구치소 생활을 하고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6·3사태 재판은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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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그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최초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기사를 본 대구 외가에서는 그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시 용산구 이명박’이라는 황당한 주소를 써서 사과궤짝을 보냈는데, 그것이 집으로 배달되자 어머니가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서대문구치소로 면회를 온 어머니는 흰색 한복차림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어머니는 “명박아, 나는 네가 별볼일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구나. 소신대로 살아라. 어미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만 하고 돌아섰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둘째형에게 눌려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의 이런 한마디는 어떤 상보다 큰 힘이 됐다. 그 역시 비로소 ‘인정받는 아들’이 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그 한마디가 이후 그의 삶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는 구치소에서 못다한 공부에 빠져들었다. 수감생활 6개월 동안 그는 착실히 공부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당시 경험이 그에겐 “어떤 환경도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이며, 적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최종판결을 받고 1964년 10월 말 석방됐다. 곧 복학했고 한 달반만인 12월 말, 어머니는 세상을 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인연을 떼어놓고는 오늘날 이명박이라는 정치인의 성장사를 제대로 조명할 수 없다.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 그는 정주영이라는 사업가를 만나면서 가난에서 얻은 지혜와 투지를 기업에 접목하는 흔치 않은 기회를 만난다.
입사하기 전에는 일면식도 없었던 타인인 정주영 회장에게 자식보다 더 신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계 최고의 경영 컨설팅 회사인 베인 & 컴퍼니의 한국지사 이성용 대표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임원들>(청림출판, 2006)에서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형 리더로 이 전 시장을 뽑았다.
그는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해 “현대그룹 시절 그는 동물적 감각과 예리한 판단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그는 비즈니스에 탁월하고, 돈이 있는 곳을 찾아 누구보다 먼저 거래를 성사시켜 경쟁자를 앞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완벽한 비즈니스 감각으로 모든 이의 역할모델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현대그룹에서는 그와 같은 임원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고 평했다.
경영인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비슷했다. 지금도 그의 별명이 ‘감퓨터(感과 computer의 합성어)’라는 것만 봐도 “비즈니스에 동물적 감각이 있다”는 평가가 왜 나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오랜 세월 지켜본 인사들은 그가 경영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역발상을 바탕으로 한 승부사적 기질, 정보 장악 능력, 견제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자제력, 능력 위주의 인사관리 등을 꼽는다. 이런 점들이 경영전문가로 성공한 그의 리더십의 요체인 셈이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현대그룹 입사 때부터 드러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위에 가담한 이력은 취직 길을 막았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는 현대건설이라는 중소기업에서 태국 현지에 나갈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았다. 1965년 5월이었다.
학생운동 전력은 여기서도 암초가 됐다. 둘째형이 입주가정교사를 했던 김세련 당시 한은 총재가 보증을 서줬지만 힘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당국의 처사를 비판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편지를 계기로 이낙선 민정담당 비서관을 만나게 되었고, 담판을 통해 현대 입사를 허용받았다. 이후 그가 현대건설 사장이 됐을 때 이낙선 씨는 국세청장이 돼 조우하게 된다. 우회를 모르는 그의 성격은 이때 더 확고해진 것 같다.
정주영 사장과의 면접은 한 달 후 이뤄졌다. 공사관리부로 발령받고 진해 제4비료공장 건설현장에 파견된 후 그해 말 경리사원 자격으로 태국으로 떠났다. 어려서부터 말처럼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면서 커온 그는 말만 신입사원이지 노회한 사회인이었다.
정 사장이 그를 눈여겨보게 만든 그 유명한 태국금고사건에서도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태국 공사는 국제 입찰을 따내 진행되었는데, 너무 저가에 입찰해 밑지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현장 내부에서 갈등도 심했다. 어느 날 한국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이 폭도로 변해 금고를 공격해 왔다. 경리였던 그는 칼을 들이대는 그들에게 홀로 맞서 금고를 안고 지켜냈다.
▶ 6ㆍ25전쟁 이후 이 전 시장 가족이 살았던 포항시 덕산동 집.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사찰이었던 가옥을 6칸 집으로 개조한 이 곳에서 여섯 가구가 옹색하게 살았다. 그때 모습 그대로 보존된 이 집에는 아직도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현대건설에 뿌리를 깊이 박게 된다. 정주영 사장의 눈에 띄었던 것. 더구나 적자투성이 태국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를 계기로 그는 현장 책임자로 승격된다. 채용된 지 2년도 안 돼 대리로 승진했다. 능력우선주의를 앞세우며 능력을 보고 자리를 내주는 정 사장의 인사 스타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때 보고 배운 능력우선주의 인사원칙을 지금도 적용하고 있다.
그가 서울시장 재직 시절 서울시정개발원장을 지낸 백용호(52·이화여대 정책대학원 교수) 바른정책연구원장은 “이 시장은 비판이나 도전을 즐기는 승부사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라며 “청계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반대하는 사람들이 막아서자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내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은 리스크를 피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는 역발상으로 전체 상황을 들여다보며 역경을 뚫고 나가는 스타일”이라고도 했다.
승부사적 기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현대중공업 과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있었던 불도저 해체 사건이다. 태국에서 그는 현대건설 중기사업소(후에 현대중공업) 과장으로 발령받고 귀국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휘로 현대가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중공업은 장비를 제때 공급해 주는 주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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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과장일 때 신입사원으로 채용돼 1978년까지 함께 근무한 박헌진(63) 전 현대중공업 서빙고공장장의 기억이다.
“현장에서는 정 회장이 나가 있었는데, 고물 불도저가 만날 고장나 제때 장비를 보내지 못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기술자들이 텃세를 부리는 바람에 힘들어했던 이 과장이 고장난 불도저를 밤새 해체해 조립하며 구조를 익혔다. 이후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고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그때부터 밤 10시에도 퇴근하지 않고 현장과 사무실이 모두 대낮 같이 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불시에 공장을 찾은 정 사장은 이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해 남다른 신뢰를 갖게 됐다. 이렇게 일에 매진하면서 사업소에서 부장 진급과 이사 진급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두 번째는 견제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처신이다. 중공업 경리를 맡았던 박 전 공장장은 당시 이 전 시장이 명절 때 회사로 상품권이라도 들어오면 바로 돌려줄 것을 지시하는 등 처신에 각별히 신경 썼다고 한다. 그가 현대건설 사장으로 재직할 때 만난 친구들도 “그가 친구들 밥값을 법인카드로 계산하는 것을 못 봤다”고 했다.
소유주의 6형제와 8명 아들이 모여 있는 가족기업에서 샐러리맨이 승승장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박 전 공장장을 비롯해 현대그룹에 근무했던 인사들은 “오너의 검증이 가장 무서운 검증”이라며 “최소한 현대그룹에 다니는 시절 꼬투리를 잡힐 일이 있었다면 회장까지 승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선물도 받지 않았지만 그다지 인심이 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회사에서 신입사원 환영회 정도를 제외하고는 소위 ‘한턱’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칼날 위에 선 것 같았던 그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아내 김윤옥 씨다. 아내의 오빠와 이 전 시장이 졸업한 동지상고 영어교사가 친구인 인연으로 만났다. 그들은 1970년, 그가 29세에 이사 진급을 하면서 결혼했다. 자신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같아야 잊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 때문에 그해 12월19일을 결혼일로 잡았다.
신접살림을 시작한 곳은 서울 북아현동 20평짜리 전세 아파트였다. 이런 바쁜 생활 속에서 그는 1남3녀를 낳았고, 승진에 따라 재산도 불어났다. 장녀 주연(36), 차녀 승연(34), 3녀 수연(32)씨와 외아들 시형(29) 씨다.
미국 줄리아드음대를 졸업한 주연 씨는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보로 근무하는 이상주(37) 씨와 결혼했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승연 씨도 서울대 의대 내과 전문의로 있는 최의근(34) 씨와 혼인했다.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어머니와 같은 학교인 이화여대 미대를 나온 수연 씨는 한국타이어 회장의 차남인 조현범(35) 한국타이어 부사장과 결혼했다.
그에게는 외손주가 모두 5명이고 곧 한 명이 더 태어난다. 미혼인 막내아들 시형 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유학 후 돌아와 스위스계 은행에서 근무하다 최근 쉬고 있다.
김씨가 29세 때 남편은 현대건설 사장이 됐다. 젊은 나이에 ‘사장 사모님’이 되다 보니 그녀 역시 겪어온 일들이 만만치 않은 듯했다. 시장에 나가면 뒤에서 “저 여자가 이명박 세컨드”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 이명박 전 시장의 아내 김윤옥 씨. 동지상고 영어교사의 소개로 이 전 시장을 만나 1970년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그녀는 “친정 아버지가 사위의 세컨드가 집 근처에서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추적해 보니 바로 나였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전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김씨는 “선거 때마다 ‘여자가 있다’ ‘숨겨 놓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다”며 “이런 소문에 대해 이제는 어떤 느낌도 없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돼 있다.
최근 특혜와 관련해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다스’ 건에 대해서도 이 전 시장은 떳떳하다는 입장이다. 그의 큰형 상은(75) 씨가 회장으로 있는 현대자동차 협력업체 ‘다스’는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이 부품 국산화를 위해 협력업체를 찾고 있을 때 그가 소개해 연결된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 전 시장은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전기사업을 하던 처남과 큰형이 일본과 합작하는 조건으로 세운 회사”라면서 “합법적이기 때문에 정 회장이 현대건설을 통해 공장도 지어주었다”고 했다. 이 회사는 현재 현대 출신 전문경영인이 운영 중이다.
그의 많은 재산에 대해서도 주변에서 밝히는 내력은 간단하다. 그는 1974년 1월 33세에 현대건설 부사장이 됐다. 그가 재산을 모은 것도 한국 건설업의 중동행이 시작된 이 즈음이다. 우리나라가 오일쇼크를 극복한 것도 중동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전적이었던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사우디아라비아·이란·아랍에미리트·이라크 등으로 다니며 대형 공사를 따냈다. 동남아시아의 지도자들과 교분 나누기도 지속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와도 친분을 쌓았다.
정주영 회장의 절대 믿음 얻어 승승장구
이런 건설외교를 통해 그는 ‘세계화’에 일찍 눈을 떴다. 일하는 사이 그는 부자 대열에 들어가 있었다. 정 회장이 수주의 대가로 땅과 현금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울 논현동에 있는 300평짜리 자택도 정 회장이 손님 접대용으로 지어준 집이다. 2002년 서울시장 당선 후 신고한 재산은 180억 원이었다. 신고액수가 추산되는 재산규모에 비해 적다며 진실성이 의혹을 사고 있지만, 전 재산은 모두 그때 조성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박 전 공장장은 “1970년대 당시 중동 근로자들은 2~3년 일하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며 “성과에 따라 당시 정 회장으로부터 연말에 1억 원 정도의 포상금을 받은 사장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 전 시장도 포함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이명박 전 시장이 돈을 탕진하지 않았다면 현재 부자인 것이 당연하다”며 “서울시장 재직 중 청계천 공사 비리로 부시장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갔지만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고 했다.
스스로 말하는‘이명박 리더십’ 요체 1.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해결한다. 2.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란 없다. 3.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순간 즉시 수정한다. 4. 핵심을 뚫고 나간다. 5.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6. 주변 사람부터 설득한다. 7.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용한다. 8. 10번 해서 안 되면 100번 두드린다. 9. 추진하기 전에 먼저 계산하고 분석한다. 10. 남들과 같은 속도로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11. 1분1초까지 일정관리를 한다. 12. 비전을 보여준다. 13. 실용성을 앞세운다. 14. 어떤 상황이든 대안을 마련해 둔다. 15. 원칙에 충실한다. 16.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다. 17. 확고한 추진 의지를 보여준다. 세 번째는 정보력이다. 그가 정 회장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역이 된 이후에도 해외에 나가 있는 현장 소장들이 밤낮없이 언제나 전화를 걸어오도록 개방된 자세를 취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몸에 밴 부지런함 대로 하루에 4시간만 자는 강행군 속에서도 자다가 전화를 받아도 기다렸다는 듯 잠에 취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본사에서도 정 회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던 소장들이 먼저 들러 차 한 잔씩 하며 한담을 나누고 가는 곳도 언제나 열려 있는 그의 방이었다. 그는 누구의 말도 끊지 않고 경청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 회장이 아침에 세계 각국 현장으로부터 팩스로 보고받는 정보는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정보력을 바탕으로 그는 언제나 정 회장의 대화 창구가 돼주었다. 정 회장은 이렇게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는 그를 문제가 있는 기업으로 보냈다. “자네가 맡으면 조용해져”
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도 그는 모든 정보를 스스로 챙기는 스타일이다.
김영삼의 부름, 정치인으로 굴곡의 새 행보
정치권의 생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77년 초. 그가 현대그룹 국내담당 사장으로 승진해 삼성그룹과 매출액 선두 다툼을 벌이면서부터다.
1978년에는 아파트 바람이 불면서 현대건설이 국내 매출액 1위로 올라섰다. 그때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이 터졌다. 재벌의 정경유착에 혐오감이 팽배하던 시절 터진 사건이었다. 정부는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던 현대건설의 자회사 ‘한국도시개발’을 해체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고, 결국 이를 막아냈다. 정치권의 생리를 알게 된 것도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부터였다.
그는 1979년 10·26 사건 불과 열흘 전 청와대로 불려갔다. 소위 ‘사회 지도층과의 대화’에 동원된 것이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그 자리에 참석할 요인들이 대통령 앞에서 외워야 할 대본을 나눠 주었다. 요지는 ‘부마사태는 철없는 학생들의 시국에 대한 안이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등 그의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이것을 주는 대로 외우는 일은 비굴해지는 것이었지만 맞서 싸우기도 역부족이었다. 고민이었다. 그날 대통령 앞에서 신문사 사장 두 명은 시키는 대로 잘 이야기했고, 다음 순서가 새마을지도자였다. 나이가 많은 그는 벌벌 떨면서 외운 내용을 이어가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외우시다 잊으셨군요”라면서 그만 하자고 자리를 떴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열흘 후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서울의 봄’이 찾아왔지만 정치권은 더 경색됐다. 신군부는 정 회장이 3김씨에게 정치자금을 대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처벌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 현대그룹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91년 노태우 정권 말기에 정주영 회장은 1,600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맞고 경영에 압박을 받자 스스로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정치권의 생리를 알고 있던 이 전 시장은 기업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데 따르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를 말렸다. 하지만 화가 난 정 회장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1992년 1월 그는 현대건설 회장직을 끝으로 현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런 그를 정치권으로 부른 것은 김영삼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다. 차기 대권을 노리던 김 대표는 그에게 ‘전문경영인’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전국구로 들어와 줄 것을 요청했다. 소년기 그의 우상이던 둘째형 상득 씨는 코오롱 사장을 끝으로 고향인 포항에서 1988년 민정당 후보로 13대 총선에 출마해 이미 국회의원이 돼 있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총선에 나선 정주영 회장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기업에서 함께 일했다고 해서 정치적 노선까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정치권에서의 행보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경영인으로 닦은 노하우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15년간 경험한 정치권에서의 생활에 대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경쟁의 틀이 없는 곳”이라며 “정치발전의 속도가 다른 분야에 비해 느리다”고 평했다. 그는 마음고생을 하며 정치권의 생리를 하나씩 배워나갔다.
1995년 그는 처음으로 서울시장 경선에 나서 정원식 씨와 맞붙었지만, 당내 정치적 뿌리가 취약해 실패했다. 1996년 총선에서는 종로구에 출마해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정계 거물 이종찬 씨를 누르고 당선됐다. 하지만 선거자금 과다지출로 선거법 위반에 걸려 재판에 회부되는 파란을 겪게 된다.
이때 연결된 사람이 바로 김유찬 씨다. 그는 형이 민자당 정책위 의장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재판받았으며, 1998년 다시 서울시장 당내 후보 경선에 도전해 최병렬 씨와 맞붙었지만 재판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뜻을 접은 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정치의 생리를 몰랐던 그는 이렇게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대운하 건설 전도사 행보의 끝 궁금
▶ 1 2001년 9월 셋째딸 결혼식. 이명박 전 시장 부부 뒤에 (왼쪽부터) 아들 시형, 둘째딸 승연, 셋째딸 수연 씨와 사위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 맏딸 주연 씨와 맏사위 이상주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 부부. 2 지난 설날 서울 가회동 집에서 외손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이 전 시장 부부. 시장 재도전을 준비하기 위해 1년 반 뒤 귀국한 그는 자신이 만든 동서문화연구소에 머무르면서 미국계 은행에 근무하던 김경준 씨와 공동 투자로 사업을 추진하던 도중 접었다. 김씨가 다른 일에 연루돼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아직도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구에 출마한 뒤 연이은 실패를 기록한 이 시절이 그에게는 가장 힘든 때로 기억된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비서실장인 유승민 의원이 “자기 사업에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이 일 때문이다.
2002년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기록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추대된 그는 삼수 만에 서울시청에 입성해 공약대로 청계천 복원공사와 대중교통체계 개편이라는 대사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난마처럼 얽힌 대중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교통문제를 취급하는 과의 공무원 전원을 교체발령하는 일로 첫 단추를 풀 만큼 과감하게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대권 도전을 위해 그는 한나라당 경선을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당내 경선이 본선이라는 판단에서 후보 간 불꽃 튀는 진검승부가 벌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세 후보 간 연합이 성사되기를 내심 원하지만 현 상황으로는 요원한 일로 보인다. “줄 세우기를 한다”는 비판을 가해온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경선 포기 가능성을 내세우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래도 그를 향한 당내 지지는 공고하다.
지난 3월13일 일산 킨텍스(KINTEX)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대선 출정식과 다름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당내 의원 60명,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각계 인사 2만여 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그는 이 자리에서 10년 경제계획으로 ‘대한민국 747’ 정책을 밝혔다. “7% 성장, 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이 목표”라고 공언했다.
서울시장선거로 ‘청계천 복원’을 약속했던 그는 대선 공약으로 국가 경제발전의 동력인 ‘한반도 대운하’ 건설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있다. 대운하 계획에 대해서는 과거 청계천 복원안만큼이나 부정적 여론이 팽배하다. 그래도 그는 꺾이지 않고 대운하 건설의 전도사로 전국을 누비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하면 이 문제는 더 뜨거운 논란이 될 것 같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인 그의 인생에 오는 ‘12월19일’(대선일)의 의미가 한 가지 더 보태질지 궁금하다.
70문 70답 |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물었다 “내 휴대전화 컬러링은 가수 자두의 <식사부터 하세요>”
이명박 전 시장과의 두 번째 인터뷰 자리. 식사를 시켜놓고 간단한 퀴즈식 문답을 하자고 제안했다. 생각을 오래 하지 말고 답하라는 주문에 호기심이 발동한 듯 식사 내내 술술 문답을 이어나갔다. 이런 자리를 즐기는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70가지 질문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네티즌들 사이에 가장 애용되는 것들이다.
1. 생년월일-1941년 12월19일 2. 신체 사이즈-키 173cm, 몸무게 68kg, 허리 32인치, 체지방과 근육량 표준의 표준 3. 혈액형-B형 4. 종교-기독교 5. 결혼기념일-1970년 12월19일 6. 취미-테니스와 영화 보기(최근 <마파도2>를 재미있게 봤다) 7. 좋아하는 음식-스파게티(외국 가서도 한국음식은 안 찾는다. 그 나라 음식이 곧 문화체험) 8. 싫어하는 음식-없음 9. 장점-긍정적 사고 10. 단점-없음(웃음) 11. 신체 비밀-남보다 손바닥 길이만큼 팔이 길다.(작업복도 맞춰 입어야 한다) 12.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밤늦게 유선방송 영화 보며 앉아 있을 때 13. 성형수술을 한다면 어느 부위-쌍꺼풀수술을 권유받은 적이 있지만 안 했다 14. 한 달 용돈은-지갑에 현금 10만 원 정도는 늘 갖고 다닌다. 가끔 재래시장에서 떡볶이와 붕어빵을 사먹기 위해. 15. 첫사랑은-초등학교 5학년 때 짝. 내가 좋아하는 데 대해 너무 구박했다 16. 이성을 볼 때는 어디를 먼저 보나-눈 17.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첫 손주 봤을 때(9년 전) 18.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때-글쎄… 너무 많아서 19.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세 가지-개성·정직성·적극성 20. 가장 자신있는 요리-라면 끓이기는 프로급 21.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어머니 22.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 것-무책임한 사람 23. 자신이 가장 멋있을 때-20~30대와 테니스 칠 때, 끝난 뒤 맥주 한 잔 할 때 24. 학교 다니면서 가장 못 했던 등수-3등 25. 거울 보고 난 후의 마음은-거울은 머리 빗을 때만 본다. 아무 느낌 없음 26. 맞벌이에 대해-찬성한다. 본인만 원하면 27. 살면서 허무할 때-황당한 일 겪을 때 28. 스트레스 해소법-운동이 최고 29. 약속시간 몇 분까지 기다릴 수 있나-일의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여자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30. 여자와 남자의 가장 큰 차이는-감성의 차이그래서 이 시대가 여성의 시대인 것 같다 31. 살면서 가장 창피했던 적은-고교 시절,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장사 했을 때 32. 몇 살까지 살고 싶나-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33. 나의 패션-아내 손에 달려 있다 34. 잘하는 스포츠-테니스 35. 햇빛과 달빛 중 어느 쪽이 좋은지-이병주 시인이 그랬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요, 달빛에 비치면 신화라고.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36.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영화배우 비비안 리(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 37. 생일에는 무엇을 하나-명절 때 각기 바쁜 형제들이 모이기 힘들어 생일 때 온 가족이 만난다 38. 좌우명-최선을 다한다 39. 사랑이란-달콤한 것 40. 한 달 독서량은-평소에는 10권쯤, 요즘은 바빠서 2권 41. 감명깊게 읽은 책-책마다 그런 부분이 있다 42. 주량은-맥주 두 컵 43. 징크스는-없다 44.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신뢰 45.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고민하겠지만, 일단 사과를 따먹겠다 46. 지금 현재 가장 바라는 일-(웃음) 47.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구분하나-둘 다 소중하다 48. 결혼에 대한 생각-둘이 하나가 되는 것 49. 화났을 때의 행동은-눈을 감고, 입을 꽉 다문다 50. 습관-피로하면 자동차에서 잠깐씩 잘 때가 있다 51. 내 주위에서 이런 것은 없어지면 좋겠다-못된 사람들 52. 지금 보고 싶은 사람은-손녀 53. 어린 시절 꿈은-선생님 54. 지금 행복한가-행복하다 55. 지금 아내가 울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 56.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화목한 가정 57. 요즘 기분 상태-좋다 58. 배우고 싶은 것-서예(어려서부터 워낙 잘했다) 59. 존경하는 사람-안창호 선생 60. 다시 태어난다면-교육자로 살아보고 싶다 61. 가장 부러운 사람-좋아하는 테니스 치면서 돈도 잘 버는 샤라포바 62. 가장 잊을 수 없는 친구-어려운 시절 힘을 준 몇 사람이 있다 63. 내가 보기에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썩 괜찮다 64. 가장 기다려지는 날-결혼기념일 65. 지금 잃고 싶지 않은 것 세 가지-가족·건강·친구 66. 밥은 많이 먹는 편인가-보통 67. 휴대전화 초기화면-손주들 사진 68. 존경하는 정치인-간디 69. 인터넷 팬클럽-‘MB연대’ 등 10여 개 70. 휴대전화 컬러링-자두의 <식사부터 하세요>(나를 응원하는 노래 같아서)
임도경_인터뷰 전문기자
[심층해부 ] 한반도 大운하 구상 10대 쟁점 이명박 국토개조론의 정치경제적 득과 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경부운하 건설 프로젝트’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 핵심 공약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 전 시장이 지난해 10월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유람선에 탑승해 RMD운하를 둘러보고 있다. 1. 독일 RMD 운하가 전범 되나? ‘안정적 수량 확보 어렵다’ 반대에 ‘뱃길로 번영 유도한다’ 반박
2. 공사비 17조 원은 타당한가? ‘막대한 추가비용’ 우려에 ‘민간자본 유치로 해결‘ 주장
3. 경제성 있는 물동량 확보 가능한가? ‘수송 추가비용 부담, 하주 외면’ vs ‘1/3 물류비용이 장점’
4. 내륙운하의 운송시간 경쟁력 있나? ‘경부 40시간 경쟁력 없다’ 주장에 ‘벌크 화물은 퀵서비스 불필요’ 반박
5. 골재 팔아 건설비용 절반 충당 가능한가? ‘1년 2조 원씩 4년 파는 것 비현실적’ vs ‘공사 후 골재 판매도 가능’
6. 친환경적 대운하 건설 가능한가? ‘강물 다 썩는 재난 초래’에 ‘운하 자체가 친환경’ 주장
7. 운하 건설기간 4년 가능한 목표인가? ‘70% 산지여서 절대 불가능’ 주장에 ‘터널 난공사만 잘 대비하면 된다’
8. 30만 명 고용창출 과연 가능한가? ‘고용창출 극소수’ 비판에 ‘산업연관표 분석 결과’ 장담
9. 대홍수 우려 대비할 수 있을까? ‘홍수 때 수심 유지 불가능’ 주장에 ‘홍수 예방 기능 기대’ 일축
10. 정치 목적 치수사업 오해 벗을까? ‘비경제적 대선전략일 뿐’ 주장에 ‘선진국 진입 위한 인프라’ 반박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경부운하 구상’이 대선 가도의 가장 치열한 논쟁터로 떠오르고 있다. ‘국토 건설과 개발의 파이어니어’의 뚝심이 먹히느냐, 국토를 망치느냐의 논란이 바로 그것. <월간중앙>이 처음으로 그 10대 쟁점을 심층해부했다.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경부운하 대야망’의 청사진을 제시한 시점은 1996년 7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였다.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자신의 ‘능기(能技)’요, ‘특장(特長)’이라 할 만한 국토건설 프로젝트의 상상력을 가슴에 품고 있던 셈이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계에 달한 철도·도로 수송 능력으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로스앤젤레스 간 해상운송비보다 높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느냐? 지금도 교통체증으로 연간 13조 원이 넘는 경제손실이 발생하고, 매년 2조 원씩 늘어나고 있다. 경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고, 유지보수비가 필요하지 않다. 운하는 관광·레저 산업에도 이용될 뿐 아니라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 만들어 놓고 말 것이다.”
이명박 의원이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하기 1년 전인 1995년 8월, 세종대 부설 세종연구원은 ‘신(新)국토개조전략’이라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서울과 부산을 운하로 연결해 ‘수상 고속도로’를 만들자는 것이 프로젝트의 골자다.
대운하, 국운 융성의 계기 될까?
당시 세종연구원이 제시한 경부운하는 충주호에서 월악산(月岳山) 등을 관통하는 20.5km의 터널을 뚫어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전체 길이 500.5km의 대수로였다. 고저차는 갑문을 건설해 내륙에 물길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신국토개조전략’을 만들어낸 이는 주명건 당시 세종대 이사장. 그의 운하 건설 대구상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원에 유학할 때 독일 라인강의 운하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독일은 라인강 해발 406m 지점에 171km 길이의 ‘라인 마인 도나우(Rhein-Main-Donau)’ 운하를 건설했다. 운하 건설에는 32년간 총 3조6,000억 원을 투입했고, 스위스-독일-북해로 흐르는 라인강과 독일에서 발원해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도나우강을 연결해 물류혁명을 가져왔다. 유럽의 강에는 짐을 가득 실은 바지선이 오간다. 그런데 우리는 한강을 놀리고 있다.”
현재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른 이명박 전 시장은 경부운하 건설이라는 화두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청계천 복원이 그를 성공한 서울시장으로 만들었듯, 운하 건설 프로젝트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 핵심 공약이라는 생각을 굳힌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작심실천’의 인간이다. ‘작심’한 것은 ‘실천’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를 구체화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테마는 없다.
‘작심실천’은 위대한 리더의 중요한 자질이다. 그러나 이 자질은 종종 위험을 부르기도 한다. ‘작심’의 내용이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그리고 ‘실천’의 과정이 과욕으로 탈선할 때 그 리더가 이끄는 집단은 위험에 처하기 십상이다.
경부운하 건설 구상은 그래서 면밀한 검토와 치열한 토론이 필요한 프로젝트다. 운하 건설이 결국 실패로 귀결됐을 때, 이를 온전하게 복원할 방법은 별로 없다. 희망과 불안, 도약과 후퇴의 두 가지 가능성이 상존하는 섹터가 바로 이 운하 건설 계획이 위치한 회색 공간이다.
이명박 전 시장은 집요하다. 이 프로젝트 앞에 ‘국운융성’이라는 관형사를 붙인 채 전력을 다해 국민을 설득할 태세다. 그는 최근 그의 대운하 구상의 심경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너무 찌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사람들이 전부 다 그냥 멍해졌어요. 짜증만 나는 거예요. 국가가 발전하는 데는 뭔가 계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운하를 한다고 하면 이것만 하겠다는 줄 아는데, 그것은 아니고요. 첨단은 첨단 대로 하고, 다른 일도 다 하되, 5,000만 명의 국민의, 젊은 사람들의, 50~60대 기 죽은 사람들의 기를 살릴 수 없을까? 지도자가 공장 안에 들어가서 물건 경쟁력 있게 만들어라 하는 것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고, 그건 기업가가 할 일이고, 나라 전체 국민이 한 번 국운융성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만드는 게 지도자가 할 일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한반도 대운하가 국운융성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전 시장의 운하 노선안은 서울(김포대교, 신곡수중보)-구리-하남-팔당호(팔당댐, 이상 한강지역)-양평-여주-충주(이상 남한강 지역)-충주 조정지댐(탄금호)-문경 조령천-상주 영강-상주 낙동강-구미-대구-창녕-물금-부산 낙동강 하구언에 달하는 구간이다.
▶2006년 10월 24일, 유럽을 방문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독일의 뉘른베르크 RMD 운하를 찾아 덴 연방 수로국장과 운하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최대 난공사는 남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24km 구간의 터널 공사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충주 쪽의 박달산과 문경 쪽의 조령산 밑자락에 터널을 뚫는 안이 유력하다. 이 엄청난 공사를 4년 안에 끝내겠다는 것이 이 전 시장의 야심이다. 자신이 집권에 성공하면 임기 안에 공사를 끝내겠다는 계산이기도 하다. “자연하천 준설과 인공수로 부분은 각 지자체에서 동시에 공사를 시작하면 2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월악산국립공원을 비껴 박달산과 조령산에 수로 터널을 뚫게 되면 경부운하의 총연장은 530km가 된다. 애초 세종연구소의 안보다 30km 정도 늘어난 연장이다. 남한강에서 바로 낙동강으로 연결하지 않고 충주 달천으로 우회하는데다 달천과 조령산 수로 터널을 연결하기 위해 10km의 인공수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전 시장 측이 내놓은 총 공사기간은 4년, 소요 예산 15조~20조 원이다.
현재 경부운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캠프의 운하팀은 한반도대운하연구회다. 국제정책연구원(GSI)과 안국포럼을 포함해 적어도 3개 그룹 이상의 조직에 걸친 태스크포스다. 운하연구회에는 건설업체 엔지니어와 각 대학 토목공학·환경공학·경제학과 교수 100여 명이 포진해 있다.
이 전 시장측 김영우 정책보좌관은 “최근 거론된 모든 반대 논리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에도 일면 타당한 논리가 있는 만큼 개방된 자세로 이들의 의견을 경청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운하 구상 반대론자들은 ▷환경파괴 ▷경제성과 효율성 ▷예산 확보 ▷건설기간 ▷고용창출효과 등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인터넷 언론사 <오마이뉴스>는 대운하 구상의 벤치마킹 대상인 독일 라인-마인-도나우 운하에 기자를 파견해 이 전 시장 운하 구상의 허구성을 현지 취재를 통해 맹공하기도 했다.
<월간중앙>은 한반도운하 구상의 논점을 10가지 쟁점으로 분류해 반대론자들의 논리와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반론을 집중해부했다. 편의상 10대 쟁점 해부 기사 중 ‘반대논리’는 운하 건설에 비판적인 인사들의 반대 이유를, ‘반박논리’는 이명박 전 시장의 태스크포스인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반론을 적시한 것이다.
1. 독일 RMD 운하가 경부내륙운하의 전범 될 수 있나? ‘안정적 수량 확보 어렵다’ 반대에 ‘뱃길로 번영 유도한다’ 반박
반대논리 이명박 전 시장이 내륙운하의 세계적 전범으로 내세운 독일의 라인-마인-도나우(RMD) 운하는 우리나라의 운하 입지와 상당히 다르다. 독일의 지형은 바다 쪽은 평야지대인데다 수심이 얕고 드나듦이 단조롭다. 특히 바다의 풍랑이나 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에 좋은 항구나 대도시를 만들 만한 입지조건이 되는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일찍이 라인강이나 엘베강을 따라 대도시와 공업단지가 배치돼 있다.
독일은 지금부터 1,200년이 넘은 서기 793년에 이미 RMD 운하를 계획한 적이 있고, 1830년대에는 실제로 마인강과 도나우강을 잇는 운하를 건설한 경험이 있다. 다시 말해 아주 오래전부터 운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던 것이다. 도나우강과 라인강에는 몇 만t짜리 대형 선박도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유역 면적이 갖추어져 강을 통한 물류가 크게 발달한 상태였다.
이러한 조건과 함께 내륙에 산업도시들이 입지한 독일의 특성상 두 강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RMD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유럽의 여러 국가를 넘나드는 3,500km짜리 거대한 물길이 완성된 것이다. 운하길 171km를 잇는 데 들어간 돈은 모두 합쳐 2조7,000억여 원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일단 독일에 비해 갈수기와 홍수기의 수량 차이가 엄청나다. 운하 사용을 위해 필수적인 안정적 수량 확보가 매우 힘들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 너무 오지 않아서 걱정인 셈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삼면은 바다이기에 연안운송이 언제든지 가능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부운하는 한강과 낙동강의 끊어진 부분 20여 km를 연결하는 데 적게 잡아 10조 원, 많게는 20조 원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RMD 운하보다 훨씬 짧은 거리를 잇는데 왜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일까?
독일과 달리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20여km 길이의 터널을 뚫어야 하고, 강에 배가 다닐 수 있는 충분한 폭과 깊이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추가적인 공사와 준설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낙동강 상류를 가본 분들은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평상시에는 시냇물 수준의 물이 졸졸 흐를 따름이다. 이곳에 폭 100m의 수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 독일과 여건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반박논리 반도국가인 우리나라에 운하가 생기면 운하의 혜택이 더욱 풍부해진다. 예부터 문명과 도시는 물이 있는 곳에서 번성했다. 우리의 경우 산간내륙지역은 아직도 교통과 물류 시스템이 빈약해 낙후한 상태에 있다. 뱃길이 열리면 물류뿐 아니라 거대한 관광상품이 개발되고,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연안수송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 반대론자들이 있다. 그러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바다는 파도가 약간만 높아져도 바지선이 다닐 수 없다. 또 서울·인천에서 대구·상주로 갈 대형화물이 서해안을 돌아 부산까지 배로 간 뒤 다시 트럭으로 옮겨져 내륙지방으로 운송될 이유가 없다.
한강과 낙동강 물줄기 거의 그대로 사용
운하는 말 그대로 내륙운송수단을 말하는 것이다. 또 모든 제조업체, 수출입 공장이 서해안을 따라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장과 산업단지는 내륙에도 있다. 또 앞으로는 내륙지역에 더욱 많은 제조업이 생겨 고용창출과 지역균형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공사의 난이도 측면에서도 우리가 독일보다 더 어려울 것이 없다. 오히려 쉬운 측면이 있다. 독일 RMD 운하 가운데 가장 난공사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도나우강과 마인강 연결지점 공사는 해발 400m가 넘는 고지에서 이뤄졌고, 고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도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부분은 해발 100m 정도이고, 다른 구간도 해발이 그리 높지 않다. 기존 한강과 낙동강 물줄기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수심 확보를 위해 하상을 준설하는 구간이 있지만, 그것은 난공사가 아니다.
2. 공사비 17조 원, 과연 타당한가? ‘막대한 추가비용 우려’에 ‘민간자본 유치로 해결’ 반박
반대논리 이명박 전 시장 캠프에서는 운하의 공사비를 17조(10조~20조) 원 정도로 추산한다. 이 같은 공사비 예상이 과연 정확한 데이터에 입각한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많다. 17조 원 안에 갑문 공사비와 유지보수비가 포함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운하의 경제성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정확한 공사 예산 산출이 중요한데, 17조 원이라는 액수는 어떻게 산출된 것인가? 특히 수질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추가될 가능성도 있다. 경부고속철도의 경우도 애초 예산 5조8,000억 원에서 실제로는 18조4,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반박논리 추산된 사업비 17조 원은 주운수로 조성과 보 및 갑문시설 등을 건설하는 데 소요되는 공사비, 그리고 높은 지역의 인공수로 구간을 위한 용지매입비를 포함하고 있다. 유지보수비는 제외한 급액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운하는 국민 세금에 기반한 국가 재정으로 하기보다 민간자본 유치를 통해 건설할 계획이다. 사업비 내역은 현재 세밀한 부분을 연구하고 있으며 적절한 시점에 이를 발표할 계획이다.
3. 경제성 있는 물동량 확보 가능한가? ‘수송 추가비용 부담 우려’에 ‘1/3 물류비용에 하주 선호’ 반박
반대논리 물동량이 생겨나려면 경부운하로 화물을 운반하는 것이 더 유리해야 한다. 수송 편익을 결정하는 것은 운송비와 운송시간이다. 운송비 단가는 일견 배로 옮기는 것이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운하로의 운반비용, 선적과 하역비용, 그리고 최종 목적지까지의 수송비용 등을 감안하면 추가적인 단가 상승 요인이 많이 존재한다.
운하를 이용해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우선 배가 필요하다.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이 든다. 업체에서 과연 이런 돈을 주고 배를 살지 의문이다. 다음으로는 컨테이너 수요가 있는 역마다 선착장이 있어야 한다. 이 선착장에는 최소 3,000평 가량의 야적지가 필요하다. 또 트랙터·하역장비 등 대규모 컨테이너 처리시설이 필요한데, 트랙터 한 대 값이 작게는 수천만 원에서 크게는 1억 원이 넘는다. 결국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어 만든 여러 부대조건이 충족돼야만 컨테이너 운송 배를 띄울 수 있는 기본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반박논리 현재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물류비용이 12.5%를 차지한다. 미국·일본은 8%대다. 이런 조건에서는 우리의 제조업이 경쟁력이 없다. 운하를 건설하면 물류비용이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다.
자동차가 별로 없던 시절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를 현재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경부축 운하는 2020년 경부축 컨테이너 물동량의 20%, 벌크화물(시멘트·유연탄·석유·비료)의 40% 이상을 흡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밖에도 운하 인프라는 터미널 배후지에 창고업·가공업·제조업과 관광산업을 창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새로운 인프라는 새로운 상품과 가치를 창조해 물동량 증가에도 기여하는 물류선순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한반도 대운하를 이용하면 증가하는 시간 대비 수송비 절감액이 더 크기 때문에 육상운송보다 더 나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류 수송체계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대운하는 수도권에서 출발해 부산항을 이용하는 수출입 물량을 중점적으로 수송하게 된다. 현재 이를 대상으로 한 경제성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물량의 수송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한반도 대운하의 경제성 분석은 절대로 물류 부문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단순한 토목개발사업이 아니라 정보기술(IT)과 시스템이 결합한 신지식 경영사업이다. 환경개선효과, 대기질개선효과, 환경친화적·지역균형적 국토개발사업이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의 경제적 총 편익에는 기존 연구에서 무시하던 비시장가치를 모두 고려하고 있다.
4.내륙운하의 운송시간, 경쟁력 있나? ‘경부 40시간 경쟁력 없다’ 주장에 ‘벌크 화물은 퀵서비스 불필요’ 반박
반대논리 이명박 전 시장 측이 예상한 것처럼 부산에서 서울까지 40시간이 소요된다면 운하를 통해 컨테이너를 옮길 화주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력 상품이 과거의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생산품 중심에서 경박단소(輕薄短小)형 제품들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으므로 신속성이 담보되지 않는 운하 운송은 불가능하다. 철강과 자동차, 골재와 시멘트 등 벌크 화물의 경우도 입지여건상 운하를 통한 운송은 여의치 않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26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독일 뒤스부르크 내항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부산항에서 내린 컨테이너를 다시 배에 싣고 운하를 통해 운반한 뒤 다시 컨테이너를 내리고 또다시 차에 실어 운송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운하에서 걸리는 시간은 100여 시간 이상이 될 수 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컨테이너는 포터 로테이션(짐을 내리는 순서)에 따라 쌓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배가 부산-대구-대전-서울 순으로 운송한다면, 서울행 컨테이너가 제일 밑이고 다음이 대전-대구-부산 순이다. 순서가 어긋나 항구마다 컨테이너를 재배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운하를 통해 컨테이너를 이동한다면 이런 일이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반박논리 철강과 자동차, 골재와 시멘트 등 벌크 화물은 그동안 운하와 같은 운송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운송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포항의 자동차·철강, 경북·충북지역의 시멘트·석탄 같은 벌크 화물은 운하수송에 적합한 화물이다. 이런 화물들이 퀵서비스처럼 빨리 운송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운하를 이용한 운임비용이 트럭이나 철도 수송에 비해 3분의 1 이하이기 때문에 운하라는 대체 운송수단이 생기면 그만큼 화주들이 많이 이용하게 될 것이다. 서울~부산 운송시간도 화물트럭이 하나의 컨테이너를 싣고 가지만 운하가 건설되면 바지선 한 대에 200개 이상의 컨테이너를 싣고 간다. 따라서 컨테이너 한 대당 서울~부산 간 이동시간을 따지는 것은 잘못된 비교다.
5. 골재 팔아 건설비용 절반 충당 가능한가? ‘1년 2조 원씩 4년 파는 것 비현실적’ 주장에 ‘공사 끝나도 골재 판매 가능’ 반박
반대논리 이 전 시장은 10조~20조 원 정도 드는 경부운하 건설비의 절반 정도는 준설 과정에서 나오는 모래 등 골재를 팔아 충당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공사비로 언론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17조 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골재를 팔아 8.5조 원을 확보한다는 말이다. 공사기간은 수십 개 건설사를 일시에 투입해 4년 내에 끝낼 것으로 보면 결국 매년 약 2.1조 원을 모래 팔아 수입을 확보한다는 결론이다.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연간 골재 채취량은 약 2.6억㎥이고, 이 중 모래의 양은 약 1.1억㎥다. 모래의 시장가격을 1㎥당 1만 원 정도로 잡는다고 하면 국내 모래시장은 연간 약 1조 원 규모라는 계산이 가능해진다. 이 전 시장 주장대로 모래를 팔아 연간 2.1조 원을 확보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국내 모래 수요가 갑자기 2배 이상 뛰어오르되 모든 모래 공급은 경부운하 건설에서 나온 골재로 충당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골재를 팔아 공사비의 반을 충당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반박논리 한반도 대운하 건설의 예산과 골재 판매수익이 시간적으로 일치할 필요는 없다. 운하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골재의 전량은 추가적인 비용 없이 보관 가능하며,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지속적인 판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8.5조 원의 재원 확보는 가능하다.
추후 국고로 환수하거나 다른 정부 지출비용으로 8.5조 원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대운하 건설의 8.5조 원 만큼의 비용절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해 예상되는 건설비용을 골재 수입에서 직접 충당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이 충분한, 다양한 예산 염출 방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다.
6. 친환경적 대운하 건설 가능한가? ‘강물 다 썩는 재난 초래’에 ‘운하 자체가 친환경’ 반박
반대논리 운하의 물은 거의 정체된 상태이기 때문에 식수원으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국민의 3분의 2가 한강과 낙동강 물을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우리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식수원 오염은 사실상 불가피하다.
운하를 파면 콘크리트로 양쪽 강변을 막아야 한다.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한국보다 평균수량이 3배나 높은 독일의 경우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또 배가 다닐 수 있는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강물의 앞과 뒤도 막아야 한다. 한국처럼 강수량의 편차가 큰 곳에 운하를 설치하려면 모든 강을 막아 호수가 되도록 해야 하고, 그러면 강물이 다 썩는다. 이것은 인공재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내륙운하’공약을 구체화하기 위해 지난해 8월 17일 부산 을숙도를 방문,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독일의 식수원은 대부분 지하수다. 한국의 경우 사고가 나면 당연히 그 물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 물이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어떤 식으로든 식수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배가 다니게 하기 위해 갑문으로 물을 가두면 식수원 오염은 불가피하다.
반박논리 한강과 낙동강의 물줄기를 대부분 그대로 살릴 뿐 아니라 주변에 숲, 휴식공간 등을 조성해 친환경적 생태공간이 만들어진다. 국민이 걷고 싶어하는 거리,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는 거리를 조성할 예정이다. 조령산은 자연 훼손이 적은 수로 터널로 통과하고, 입출구부 인공수로는 자연하천과의 합류부까지 친환경적으로 조성한다.
운하는 도로에 비해 단위 운송화물의 CO2·NOx·HC 등의 배출이 적어 대기오염을 감소시키고 에너지 소모가 적은 친환경 운송시설이다. 하천에서 수심 유지를 위해 주운수로의 굴착과 보를 설치하면 현재보다 많은 물이 흐르게 된다. 주변 지역의 하수처리장 건설로 오염물질 유입을 차단함과 아울러 선박 운행의 산소 공급 효과로 수질이 좋아진다.
운하 건설시 하천 바닥의 오염물질 제거로 수질은 훨씬 좋아진다. 2006년 1월 건설교통부 감사팀의 감사 결과 형산강의 경우 하상 준설 이후 사라졌던 은어가 돌아왔다. 운하 건설이 무조건 환경을 망친다는 발상은 단견이다.
7. 운하 건설기간 4년, 가능한 목표인가? ‘70% 산지여서 절대 불가능’ 주장에 ‘터널 난공사만 잘 대비하면 된다’ 반박
반대논리 이 전 시장 측이 제시하는 운하 건설기간 4년은 지나치게 낙관적 전망이다. 171㎞ 구간의 마인-도나우 운하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공사가 중단된 기간을 제외하면 20년이 걸렸다. 530㎞의 운하를 판다면 모든 기술력을 동원해 전 구간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10년 이상 걸릴 것이다. 게다가 독일처럼 평지도 아니고 국토의 70%가 산지인 나라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갑문 20개를 만든다는데, 갑문 건설기간만 4년이 걸릴 것이다.
반박논리 국토의 물류체계를 바꾸고 지역균형발전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국책사업인 만큼 치밀한 계획과 주도면밀한 사업 집행이 필요하다. 운하 건설 구상은 10여 년 전부터 학자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 타당성 검토 등 충분한 논의가 진행돼온 테마다. 해외 전문가들도 우리나라의 운하 타당성에 대해 검토해온 만큼 이들 계획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면 4년 안에 공사를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새만금·KTX 건설 등 많은 국책사업에서 계획이 부실하고 사업 지연으로 많은 국고가 손실된 점 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효율적인 사업 추진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한반도 대운하의 경우 사업부지가 대부분 국공유지 내 하천부지가 대부분이어서 민원 발생이 적은 만큼 장애 요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운하 공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 국토가 산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더라도 우리의 한강과 낙동강은 기본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형 자연하천이다. 남한강과 낙동강 연결지점은 해발 100m 상에 있지만 이 같은 고도에서 운하 건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해발 300m, 400m에서도 운하는 가능하다. 표고 차이는 갑문이나 리프트를 통해 단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다만 높은 지대의 20여km 터널 공사가 최대 난공사인데, 초기 1년에 철저한 공사 준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여러 작업갱을 굴진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작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사기간 4년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8. 30만 명 고용창출 과연 가능한가? ‘고용창출 극소수’ 비판에 ‘산업연관표 분석 결과’ 반박
반대논리 30만 명이든 50만 명이든, 그 수치의 산출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독일 수운연합회가 통계로 제시한 ‘내륙운송 관련 기업 수’는 2004년 6월 현재 총 1,169개다. 총연장 7,300km의 독일 수로를 이용해 운송업을 하는 회사들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일반화물 운수회사는 672개, 가스와 유류를 싣고 다니는 탱커를 운영하는 회사는 184개, 유람선 등을 포함해 수로를 통해 승객을 실어 나르는 회사는 310개, 벌크선을 운영하는 회사는 43개다.
이들 회사에서 일하는 고용인원은 총 7,612명. 이 중 승선인원은 6,080명인데, 함께 타고다니는 승선자의 가족 1,147명도 이에 포함된다. 그리고 뭍에서 일하는 사람이 1,532명이다. 회사당 7명 남짓의 인원이 일자리를 유지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 전 시장이 경부운하 모델로 설정한 171km의 마인-도나우 운하(MDK)를 관리하는 사람 역시 380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독일 운하 총연장의 1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550km 구간의 경부운하에서 이보다 더 많은 고용창출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반박논리 30만 명의 고용창출 보고서는 한국은행에서 발간한 2000년 산업연관표를 토대로 건설산업의 산업연관분석을 실시해 도출된 결과(30만 명)다. 따라서 분명한 경제학적 이론과 근거가 있으며, 산업연관분석을 시도하는 모든 경제학자는 동일한 결론을 얻을 것이다.
9. 대홍수 우려 대비할 수 있을까? ‘홍수 때 수심 유지 불가능’ 주장에 ‘홍수 예방 기능 기대’ 일축
반대논리 하상계수는 우기에 가장 물이 많이 흐를 때와 건기에 가장 물이 적게 흐를 때의 차이다. 하상계수가 크다는 말은 계절에 따라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게 갈리고 강이 짧으며 경사가 심함을 뜻한다. 하상계수가 클수록 우기 때는 홍수와 함께 엄청난 토사가 밀어닥치기 때문에 강이나 운하의 시설 유지가 어렵거나 불가능해진다. 반대로 건기에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기 때문에 항해에 필요한 수심을 갖출 수 없다. 수량이 풍부하지 않은 강은 수심 유지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강이나 낙동강의 하상계수는 380 내외, 라인강은 15 이하, 가장 작은 콩고강의 경우는 4이며, 위에 열거한 운하들도 모두 30 이내다.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강이나 운하도 토사가 끊임없이 밀려들기 때문에 운하나 강에는 1년 내내 준설이 이루어져야만 대형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 수량이 엄청난 아마존강이나 콩고강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강이나 운하에 가 보면 언제나 준설선이 움직이며 흙이나 뻘을 파내 수심을 유지한다. 건기와 우기가 뚜력한 차이를 보이는 우리의 기후 조건상 운하 건설은 자칫 엄청난 수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반박논리 하천 바닥을 준설하고 하천 주변을 정리해야 여름철에 큰 비가 와도 하천 주변으로 물이 넘치지 않는다. 미리 하천 바닥을 정비한 대형 하천의 경우에는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매미’에도 피해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하천 바닥을 준설해 수로를 형성하므로 통수단면이 커지고 홍수 시에는 보에 설치한 수문을 열어 전 구간의 수위를 계획홍수위보다 낮게 유지하도록 계획할 수 있다. 홍수 방어력이 커져 하천 주변의 범람을 막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중 강수량이 1,270억t이 넘지만 40% 이상은 증발한다. 나머지도 주로 6~8월에 집중해서 내린다. 그리고 그 물은 거의 그대로 바다로 흘러간다. 고작 23%의 수자원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다. 운하를 건설하면 그동안 흘려버렸던 물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운하 건설로 인해 홍수를 예방하면 예방했지 홍수를 초래하거나 악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10. 정치 목적 치수사업 오해 벗을까? ‘비경제적 대선전략일 뿐’ 주장에 ‘선진국 진입 위한 인프라’ 반박
반대논리 몇십 년에 걸쳐 수십조 원의 비용이 드는 데 시간과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환경이나 경제논리를 차치하더라도 운하 건설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운하 건설은 사회·경제적인 타당성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라 다분히 이명박 전 시장의 대선 승리를 위한 전략적 제스처다.
좁은 국토에서 제로섬 경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나라보다 60배나 큰 세계시장으로 나아가 거기서 파이를 늘릴 수 있도록 창조적 지식이나 사람에 투자해야 한다. 운하 건설은 21세기 한국경제의 전략으로는 전혀 합당하지 않다. 운하 건설 과정 자체가 극도로 험난하고, 결국 건설한다고 해도 경제성이 없다. 이런 과제에 몰두하는 것 자체가 청계천 후광효과를 다시 재현하려는 이 전 시장 측의 대선전략이다.
반박논리 반도가 바다로 열린 땅이라면 운하는 그 반도적 특성을 완결시키는 동맥이다. 내륙운하가 만들어지면 해상교통망이 내륙까지 연장된다. 세계화시대에 국토 구석구석이 세계와 직결되면서 국토의 조직이 질적으로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 대운하는 시대 조류에 부응해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드높이고 마침내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반도 대운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프라다. 한반도 대운하가 가져올 획기적 효과는 단순한 정치적 목적의 치수사업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랜드 디자인이다.
운하 건설은 물류혁명이다. 2020년까지 경부축 물류의 15%에서 20%까지 흡수할 것이다. 물류비용도 지금의 3분의 1수준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지역균형개발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의미다.
그동안 낙후했던 내륙지방이 매력적인 항구도시가 된다. 물류 터미널이 생기고 관광·스포츠·레저 시설이 하천에 생긴다. 농작물 수송 인프라가 구축돼 농업경영에도 큰 도움이 된다. 번잡한 수도권을 벗어나 벤처기업과 연구기관들이 지방으로 속속 몰려갈 것이다. 지역균형개발은 억지로 떼밀어서가 아니라 자석처럼 지방을 매력있게 만들어야 가능한 사업이다.
엄청난 일자리 창출이 발생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건설·토목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운송·관광·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 걸쳐 30만 명 이상의 고용창출이 일어난다. 이보다 더 큰 경제적 혜택은 없을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에도 일익 해낸다
운하 건설은 아름다운 국토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킨다. 우리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고 대내외적으로 선전하지만 금수강산을 쉽게 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운하가 건설되면 한강과 낙동강을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을 타고 금수강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자원 확보와 재난 방지가 가능해진다. 운하 건설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여름철 물난리, 겨울철 물부족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운하가 건설되면 치수와 이수를 제대로 해서 국민의 생활을 더욱 풍요하고 안전하게 바꿔줄 것이다.
가장 위대한 결과는 국민통합 효과다. 물길이 이어져 물류가 활발해지고 사람과 사람이 오가면 우리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북한지역도 운하로 연결되면 그만큼 통일의 계기가 빨라지고 남북한 통일경제 달성에도 큰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와 분단에 이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세계를 놀라게 한 국민이다. 이제 함께 일어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할 때다. 지역이니 계층이니 엇갈렸던 과거를 털고 다 같이 마음을 열고 뜻을 합쳐야 한다. 선진 통일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손잡고 나서야 할 때다. 한반도 대운하는 그 꿈을 실현할 토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대선주자 24시 1] 새벽 5시 기상, 러닝머신으로 체력단련 박찬숙 의원이 그림자 수행 가는 곳마다 경제! 경제! 경제!
유력 대선 예비 주자 중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한반도 대운하’ 등 그동안 굵직한 정책을 앞세우며 이슈를 선점해 왔다. 이 전 시장의 대선 행보를 3일에 걸쳐 밀착 취재했다. -------------------------------------------------------------------------------- ■ 큰 일정 1~2달 전 추진… 모든 스케줄 회의 통해 결정 ■ 눈에 잘 띄지 않는 경호… 사설 경호업체 의뢰해 해결 ■ 집에 가면 먼저 반기는 진돗개… 아내와 대화 즐겨
2007년 1월30일 새벽 5시10분,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한 한옥 앞. 문패에는 ‘이명박·김윤옥’이라고 적혀 있다.
“드르륵~.”
벨을 누르자 멀리서 미닫이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명박(66) 전 서울시장의 부인 김윤옥 씨. 이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직접 나와 대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아침형 인간’ 이명박 전 시장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5시 이전에는 일어나는 편이라고 이야기했다.
“특별히 노력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입니다. 어려서는 어머니가 늘 새벽에 기도를 드리셨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커서는 생계를 위해, 또 학비를 벌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기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이 전 시장은 이 새벽에 일어나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새벽시간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새벽의 1~2시간은 오후의 3~4시간에 해당하는 집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 마디 더 주고받던 그가 양해를 구하며 러닝머신에 올랐다. 숨이 찰 듯 뛰면서도 시선은 TV를 향한다. 뉴스를 챙기기 위해서다. 20여 분 뒤, 힘차게 달리던 이 전 시장이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식탁으로 향했다.
이 전 시장의 아침상은 의외로 소박했다. 몇 가지 반찬에 밥 한 공기, 그리고 야채즙 한 잔이 전부였다. 늘 이런 식이냐고 부인 김씨에게 살짝 물어봤다.
“저 정도도 못 챙겨 드실 때가 많아요. 급할 때는 ‘선식’을 드시기고 하고요. 다행인 것은 샌드위치·밥·빵 등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신다는 거죠.”
가벼운 아침식사를 끝낸 이 전 시장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아침형 인간’의 단출한 아침식사
-언제 이곳으로 이사했나? “2006년 6월30일, 서울시장직을 퇴임하자마자 바로 이사했다.”
-불편한 점은 없나?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옥마을이라 골목길이 좁아 곡예주차를 해야 한다.(웃음) 특히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쓸면서 내려가야 할 정도다. 그 외에는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다.”
-식사가 너무 단출하던데… 평소에도 그런가? “아침은 봤을 테고…. 점심은 약속이나 행사에 맞춰 먹는 편이다. 가리는 것은 없지만 돼지고기·된장찌개·김치찌개·비빔밥·만두를 좋아한다. 저녁 식사는 가급적 집에 와서 가족과 함께 먹으려고 노력한다. 또 집에서 식사하게 되면 아무리 바빠도 미리 귀가시간을 아내에게 귀띔해 준다.”
짧은 대화를 나누던 중 이 전 시장이 시계를 쳐다봤다. 이내 그는 “참모진과 함께 오늘 일정을 준비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켜줄 것을 부탁했다. 이 전 시장의 이날 첫 일정은 충남 아산시 탕정면 명암리 삼성전자 LCD공장 방문이었다. 잠시 이 전 시장과 헤어져 동행 기자단을 태우고 갈 버스가 준비돼 있다는 종로구 견지동 서흥빌딩 11층 안국포럼으로 향했다. 이 전 시장의 경선 캠프다.
“버스 왔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아침 7시10분, 안국포럼. 이 전 시장을 동행취재하기 위해 모인 각 언론사 기자들과 참모진으로 사무실은 꽉 들어찼다. 참모진 중 한 명이 빌딩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고 소리친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톨게이트 부근은 밀려드는 차와 눈이 내려 미끄러운 도로 때문에 정체가 심각했다. 결국 아산에 도착한 시각은 9시50분쯤. 예정보다 40여 분이나 늦은 시각이었다. 이 전 시장이 삼성전자 LCD 총괄 탕정사업장에 도착하자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던 임직원들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검정 슈트에 흰색 와이셔츠, 연두색 넥타이 차림의 이명박 전 시장. 말끔한 옷차림만큼이나 얼굴 표정은 밝았다. 이 전 시장은 임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둘러봤다. 그의 뒤에는 박찬숙(비례대표) 국회의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TFT-LCD 패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감탄사를 쏟아내던 이명박 전 시장은 “앞서갈 때 가격도 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등 기업가 출신다운 질문을 간간이 던졌다. 가끔은 우스갯소리도 했다.
“신제품이 이렇게 나오니 사고 바꾸고, 사고 바꾸고…. 계속 사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전시관을 모두 둘러본 이 전 시장과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의 LCD 화면에는 “이명박 전 시장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임직원과의 간담회가 마련돼 있는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이명박 전 시장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국 경제발전의 중심(中心)에 있는 삼성(三星)이 크게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전 10시8분. 이명박 전 시장은 탕정사업장에 대한 브리핑을 들은 뒤, 짧은 인사말을 시작했다.
▶ 1 김천문화예술회관에서 특강을 마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손을 들어 청중에게 인사하고 있다(왼쪽 사진). 2 충남 아산시 탕정면 삼성전자 LCD공장 생산라인을 견학하기 위해 방진복을 입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지금 경제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경제의 시작도 기업이고, 경제의 중심도 기업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미래 희망도 기업입니다. 특히 첨단 기술분야에서 세계와 경쟁하며 계속 1등을 유지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또 모든 힘을 쏟아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사회적 분위기는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 전 시장은 기업의 중요성과 우리 사회의 반(反)기업정서를 지적했다. 이어 “과거 이곳은 포도밭이었는데 이렇게 발전한 것을 보니 ‘탕정벽해’가 된 것 같다”며 “한국 1위가 세계 1위가 된 데는 기업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이상완 사장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음 세대 공장 부지도 이미 60만 평을 확보했다던데, 기술투자를 해외가 아닌 국내에 했으면 좋겠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 보면 경쟁력을 생각해야 하는 등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이 아마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해외에 가서 투자하는 정도의 뒷받침을 (정부가 기업에) 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첨단 과학기술분야, 또 가능하다면 국내투자였으면 좋겠다.”
‘탕정벽해’? 포도밭 탕정의 첨단 공단 변신에 유머
오전 10시40분쯤, 이 전 시장은 LCD 생산라인을 탐방하기 위해 방진복으로 갈아입었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안타깝게도 기자단은 동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전 시장을 기다리는 동안 한 참모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다.
― 정책과 관련해 따로 공부하는 시간은 있나? “혼자서는 주로 새벽시간, 우리(참모진)와 함께하는 것은 주로 주말이다. 북핵문제 등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만난다. 이슈에 따라서는 그 분야 전문가와 세미나도 자주 한다.”
― 당일 일정은 어떻게 짜나? “큰 일정은 한두 달 전부터 진행된다. 보통 외부 요청과 자체 기획, 그리고 이 전 시장 개인 일정으로 구분된다. 우리는 거의 모든 일정을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30여 분쯤 지났을까 1층 현관으로 이 전 시장이 내려왔다. 취재진이 몰려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은 대부분 원론적 답변을 하며 자신의 전용 이동차량인 ‘그랜드 카니발’(리미티드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은 차량이 공장을 벗어나자마자 기자단이 타고 있는 버스로 몸을 옮겼다. 좌측 세 번째 자리에 앉은 이명박 전 시장은 조간신문을 훑어보다 <중앙일보> 1면 우측 상단에 실린 쿠바 지폐 도안 사진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야~ 대단하네. 카스트로 사진이 아니라 우리 사진(현대중공업 설비)이 들어가다니…. 정말 대단해!” 그의 목소리에서는 과거 현대맨으로서의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버스가 더디게 가자 이 전 시장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늦으면 안 되는데…”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자신은 빨리 가야겠다며 다시 승용차로 갈아탔다. 다음 일정은 충남 예산 스파캐슬에서 열리는 매헌기념사업회의 신년 교례회였다. 매헌은 독립투사인 윤봉길 의사의 아호다.
오후 12시30분. 먼저 도착한 이명박 전 시장은 매헌기념사업회 임원들과 본관 1층에서 티타임을 마친 뒤 신년 교례회가 있는 2층 루비노홀로 이동 중이었다. 이 전 시장 옆에는 홍문표(홍성·예산) 의원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 전 시장이 앉은 홀 중앙에 위치한 원탁에는 KRA(한국마사회) 회장이면서 16대 국회의원이었던 이우재 씨도 있었다.
예산군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긴 축사가 이어진 다음 매헌기념사업회 회장인 이 전 시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말로 걱정하는 사람만 많지, 매헌 윤봉길 의사와 같이 애국·애농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애국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이명박 전 시장은 발언 내내 자신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애국 애족할 것”임을 강조했다. 또 그는 “올 한 해는 (제 개인적으로) 정신이 없는 한 해이기는 합니다만, 내년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돕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인사말을 끝으로 오찬이 이어졌다. 오찬 후에는 윤봉길 의사 추모 사당인 충의사 참배가 예정돼 있었다.
이명박 전 시장 일행이 충의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45분. 외투를 벗고 사당으로 올라가는 이명박 전 시장은 이동차량에서 검은색으로 넥타이를 바꿔 맨 상태였다. 분향과 묵념을 한 이명박 전 시장은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매헌 윤봉길 의사님 뜻을 기려 후손들이 간직하겠습니다.”
“경제 아는 사람이 지도자 돼야”
이후 기념관을 둘러보는 이명박 전 시장.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탔던 명지대 사회교육원 정덕희 교수가 동행하고 있었다. 기념관 측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던 이 전 시장은 윤봉길 의사의 “왜놈보다 무서운 건 무식, 무식보다 무서운 건 가난”이라는 글귀를 직접 읽어내려갔다. 그러고는 “굉장히 무서운 말이야”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 2시19분. 기념관에서 나온 이명박 전 시장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함께 사진을 찍던 사람 중 한 명이 갑자기 큰소리로 “한국의 힘은 이명박 선생님입니다”라고 외치자 이명박 전 시장은 활짝 웃었다. 이때 기자 옆에 있던 한 지역 주민이 “완전히 대통령 된 것 같아”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일의 모든 일정이 끝난 시각은 오후 2시26분. 이 전 시장은 서둘러 서울로 돌아갔다.
이명박 전 시장과의 다음 동행은 2007년 2월1일에 있었다. 첫 일정이 예정돼 있는 경북 김천시 직지사로 가는 버스 안. 오전 7시17분쯤 기사가 라디오를 틀자, 이명박 전 시장이 K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김천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의 전화 인터뷰였다. 그중 한 대목.
― 노무현 대통령이 “실물경제 좀 안다고 경제 잘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경제 전문가보다 경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다른 대선 주자들의 공세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CEO·국회의원·서울시장 등을 다 해 봤다. 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경험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험을 하지 않고 일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서민을 위한 정책을 폈지만, 결과적으로 서민이 어렵게 되었다. 결국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만, 경제가 어렵게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경제를 아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악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직지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께였다. 경내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이명박 전 시장은 대웅전에 들른 뒤, 명부전(冥府殿)에 참배했다. 명부전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그리고 박 전 대통령 부모님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이었다.
계곡에 살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임에도 이 전 시장은 건강을 자신하듯 외투를 벗고 경내를 돌고 있었다. 경내를 다 돌아본 이명박 전 시장은 직지사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일반적으로는 각 사찰에서 가장 큰 어른을 의미함)인 녹원 큰스님을 만나기 위해 차량으로 5분 거리에 있는 명적암(明寂庵)으로 올라갔다.
암자로 안내하던 한 스님이 이명박 전 시장에게 “녹원 큰스님이 터밖에 안 남아 있던 이곳에 명적암을 지으신 것이 10여 년 전입니다. 큰스님께서 건설을 좋아하시는데, 그러고 보니 이 전 시장님도 건설을 좋아하시네요”라고 농을 던졌다. 이명박 전 시장은 이에 화답하듯 “녹원 큰스님은 스케일이 크신 것 같다”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암자에 모신 불전 앞에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이명박 전 시장은 녹원 큰스님이 기거하는 월명산가(月明山家)로 들어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80세의 녹원 큰스님에게 이명박 전 시장은 삼배를 올렸다. 인사말을 주고받던 녹원 큰스님과 이 전 시장은 임인배(경북 김천) 의원만 배석시킨 채 방 안의 모든 사람을 물리게 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30여 분 뒤, 임인배 의원이 먼저 방에서 나왔다. 임 의원은 기자들에게 이명박 전 시장과 녹원 큰스님의 대화 내용 중 주요 부분을 전언했다.
“녹원 큰스님이 ‘지난여름 청계천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또 ‘세계에서 이렇게 잘된 곳은 처음 봤다’고 하시면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데, 청계천을 보고 나서 나는 믿게 됐다. 깔끔하게 잘해 달라’고도 말씀하셨다.”
이어 임 의원은 “(정치하는 사람이) 종교를 내세우면 안 되는데, 이명박 전 시장은 큰 인물인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전날인 1월31일 이명박 전 시장이 주호영(대구 수성을) 의원을 경선 캠프 비서실장에 앉혔다고 큰스님이 좋아했다고 한다.
주호영 의원은 대구 능인고 출신인데, 이 학교는 조계종 산하 동화사 등 대형 사찰 5곳이 함께 설립한 학교다. 녹원 큰스님은 이 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의원은 조계종 고문변호사를 역임하는 등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오전 11시27분께 이 전 시장이 독대를 끝내고 녹원 큰스님과 함께 나왔다. 산가 바로 앞에서 큰스님과 기념촬영을 하던 이명박 전 시장은 “인물 좀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눈이 좀 크게 나오게 해 주세요”라고 사진기자들을 향해 살가운 주문을 했다. 사진촬영을 끝낸 이 전 시장은 녹원 큰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김천으로 떠났다.
오후 1시30분. 한나라당 김천시당원협의회와 고향사랑주부모임 초청 특강을 위해 이명박 전 시장은 강연 장소인 김천문화예술회관에 나타났다. 강연의 주제는 ‘창조적 도전이 역사를 만든다’였다. 귀빈실 앞 벽에는 ‘혁신도시유치보고회 노무현 대통령 김천시청 방문’이라는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언뜻 귀빈실로 들어가는 이명박 전 시장의 얼굴과 노 대통령의 얼굴이 교차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오후 2시가 되자 이 전 시장은 3층 강연장으로 이동했다. 강연장에 들어선 이 전 시장을 향해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2층까지 꽉 들어찬 좌석이 부족해 복도에 간이의자를 갖다 놓고 앉거나 서서 듣는 청중도 많았다. ‘경제왕 이명박’ ‘정권 창출 문제없다’는 등의 현수막을 든 당원도 여러 명 있었다.
2시9분 무렵 이 전 시장이 연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가난했고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일자리 없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다. 또 50~70대까지는 일할 수 있으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일자리가 어디서 나오나? 김천은 현대모비스 같은 기업이 오면 일자리가 생긴다. 경제가 잘되는 것은 기업이 잘 되는 것이고, 기업이 잘되면 일자리가 생긴다. 종업원 몇 천 명 되는 큰 회사가 들어오면 종업원이 월급받아 김천에서 쓰는 거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대한민국 노조의 귀감이 돼라”
이 전 시장은 현대 재직 시절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일자리론을 이어나갔다.
“내가 현대 들어갈 때 종업원은 고작 98명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만둘 때 보니 16만8,000명이 돼 있더라. 회사가 크면서 종업원이 계속 느는 데 행복했다. 내가 꿈꾸던 일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더라. 중동에 일거리가 터져 가난한 노동자들이 15만 명씩 중동으로 가서 일했다. 이들이 돌아와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집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명박 전 시장은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경쟁하며 성장하는데, 정치는 서로 끌어내려서 이기려고 하니 발전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니 대한민국 정치는 아직도 3류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이후 이명박 전 시장은 자신의 이름과 부모님에 대한 비방과 관련해 반 농담식으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부모님 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머니가 일본 여자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한 술 더 떠 ‘아버지는 조총련’이라고 하더라”면서 “조금 더 있으면 ‘김정일의 뭐다’ 이렇게까지 나올 것 같다”고 말하자 청중들이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이어 이명박 전 시장이 “그래도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참는다”고 하자 이번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약 1시간10분에 걸친 긴 강연이 끝나자 이명박 전 시장은 연단에서 이어지는 중앙 통로를 통해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이어지는 악수 세례와 기념촬영. 그곳에서만큼은 이명박 전 시장의 인기가 ‘욘사마’에 버금가는 것 같았다.
이명박 전 시장을 따라붙는 경호원도 눈에 띄었다. 물론 통제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한 수행 참모에게 물어보니 “지방 출장이나 오늘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 때는 사설 경호업체에 협조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김천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난 것은 거의 오후 3시가 다 돼서였다. 다음 일정이 있는 대구로 가기 위해 이 전 시장은 차량으로 이동했다.
대구에 도착한 이명박 전 시장의 첫 일정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인 이문희 대주교 면담이었다. 하지만 동행 기자단은 버스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바로 다음 일정이 있는 대구시 수성동 대구은행 본점으로 향했다.
오후 5시55분. 이 전 시장은 한국복지재단 대구지부 후원회가 주최하고 대구은행노동조합 등이 후원하는 불우청소년 및 후견인 한마당 축제 ‘꿈꾸는 아이들이 미래를 디자인한다’의 격려사를 하기 위해 지하 대강당으로 들어섰다. 연단 바로 밑에 앉은 이명박 전 시장 옆에는 낯익은 두 얼굴이 있었다. 안택수(대구 북구을) 의원과 김석준(대구 달서병) 의원이었다.
특히 안택수 의원은 축사에서 “이명박 전 시장은 여러분 나이에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다. …올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여러분이 본받아야 할 분”이라는 등의 발언을 했다. 이 전 시장은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격려사를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것은 오후 6시20분께.
“지방에 다니면서 이렇게 따뜻한 행사에 처음 와 봤다. 사람들이 노조 하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대구은행노조는 아닌 것 같다. 노동단체가 이렇게 좋은 일 하는 것 처음 봤다. 내가 전국 돌아다니면서 노조, 특히 현대자동차노조 흉을 많이 본다. 그런데 이런 대구은행노조와 같은 노조가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전 시장은 격려사 말미에 또다시 “노동조합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되새겨본다”고 강조하며 대구은행 노조위원장을 향해 한 가지 주문을 했다.
“노조위원장이시죠? 노조위원장 바뀌면 없어지는 것 아니죠?(웃음) 방침을 세워 바뀌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대한민국 노조의 귀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행사가 끝날 무렵, 또 하나의 퍼포먼스가 준비돼 있었다. 무대 위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행사였다. “내 꿈을~ 펼쳐라~”라는 힘찬 구호와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이었다. 이 전 시장도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내 꿈을~ 펼쳐라~.”
이명박 전 시장의 이후 일정은 한나라당 대구시 당원들과의 만찬을 겸한 간담회였다. 일정의 마지막 순서였다. 다음날인 2월2일의 일정은 두 차례의 간담회와 대구테크노파크 방문 등으로 역시 대구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후 2시25분 출발하는 동대구발 서울행 KTX를 타고 귀경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내 꿈을~ 펼쳐라~” 종이비행기 날리기
참모진에게 부탁해 이 전 시장이 귀경시 이용하는 KTX 열차에 동승할 수 있었다. 마지막 막간 인터뷰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일상과 관련한 가벼운 질문이었다.
― 아침의 일상은 지난 1월30일 직접 자택에 들러 확인했지만, 귀가 이후의 장면이 궁금한데. “집에 돌아가면 문 앞에서부터 반기는 녀석이 하나 있다. 우리집 ‘진순이(진돗개)’다. 쓰다듬어 주면 정말 좋아한다. 손주들(시집간 딸 3명의 자녀는 모두 합쳐 2남4녀)이 있을 때는 안아주고 뽀뽀도 한다. 이후에는 신문도 들춰보고 팩스로 온 서류를 챙겨본다.”
-잠자리 들기 전에 특별히 하는 것이 있는지…. “주로 아내와 대화를 한다. 우리 아내는 가정의 야당이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해 준다. 꼭 잠자리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 하루 수면시간은? “아닐 때도 있지만, 보통 밤 11~12시쯤이면 일과가 모두 끝난다. 그렇게 계산해 보면 대략 4~5시간 정도. 하기는 요즘에는 꼭 그렇지도 않다.”
이명박 전 시장은 최근 <온몸으로 부딪쳐라>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의 경험담을 담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2002년 6월13일 서울시장에 당선된 것은 “1,000만 시민주주와 4만5,000여 직원이 있는 거대기업인 서울의 CEO가 된 것”이라고 적었다.
그런 그가 이제 대선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것도 2위와의 간격을 점점 더 벌리면서 말이다. 그는 이대로 결승 지점에 도달해 4,900만 명의 국민주주와 56만여 명(국가공무원)의 직원이 있는 거대기업 대한민국의 CEO가 될 수 있을까?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 말라” ‘과학 발전을 위한 7개 어젠다’공표…이명박씨도 돕기로 전국 자연과학대학장들 뭉쳤다
전국 자연과학대학장들이 정부에 대해 과학을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국가 지도자가 선진 과학정책을 수립하고, 창의적인 과학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국 자연과학대학장 70여 명은 1월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릴 ‘펨토과학 비즈니스 도시 국제 포럼’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과학 발전을 위한 7개 어젠다’를 공표한다. 현재 유력한 대선 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상자 기사 참조>도 7개 어젠다가 정책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적극 돕기로 했다.
이 선언은 지난해 9월 9일 출범한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은하도시 포럼’(이하 은하도시 포럼) 주최로 만들어졌다. 과학도시 건설 준비를 위한 1차 구체화 작업인 셈이다. 이날 선언자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 겸 전국 자연과학대학 회장인 오세정 교수, 이대 자연과학대학장 겸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인 우정원 교수 등 70여 명이다. <선언자 명단 참조>
7개 어젠다에는 국가의 펀더멘털인 기초과학의 국내 현황과 함께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의 정책 지원 방향 등이 담겨 있다. 이들 어젠다 중 ‘과학자는 오직 연구 성과로 책임을 진다. 정부는 과학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의 과학연구소 및 연구지원 기관은 연구의 자유와 연구자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연구자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성과 창의성을 갖도록 과학이 경영돼야 한다’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주요 참여자(가나다 순) 국형태 경원대 자연과학대학장 권명회 인천대 자연과학대학장 김경환 전 대한약리학회 회장, 전 연세대 의대 학장 김도상 전 부경대 자연과학대학장, 대한수학회 부회장 김도한 서울대 수학과 교수, 대한수학회장 김성래 전 충남대 자연과학대학장 김영철 부산대 자연과학대학장 김인경 전 대한생화학분자생물학회 회장 노영쇠 전북대 자연과학대학장 박용복 경북대 자연과학대학장 박종윤 성균관대 자연과학대학장 박찬일 기초의학협의회 회장 박 철 충남대 자연과학대학장 백경수 숭실대 자연과학대학장 송희자 동국대 자연과학대학장 오세정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 우정원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장, 한국물리학회 부회장 위인숙 고려대 자연과학대학장 이남숙 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장 이병민 대한화학회 부회장 이상국 대한화학회 부회장 이상좌 목포대 자연과학대학장 이정례 대진대 자연과학대학장 이정식 경성대 자연과학대학장 이진애 인제대 자연과학대학장 이해황 인하대 자연과학대학장 이혜숙 전국여성과학기술인단체총연합회 회장 장주섭 한양대 자연과학대학장, 대한수학회 부회장 정순영 경상대 자연과학대학장 주상열 강원대 자연과학대학장 차창룡 전 대한미생물학회 회장 최기룡 울산대 자연과학대학장 최준길 상지대 자연과학대학장 최재성 계명대 자연과학대학장 홍승길 고려대 의무부총장 그동안 정부는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개별 연구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연구자의 자율성이 침해되고, 결과적으로 연구의 부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자연과학대학장들은 이 점을 지적하고, 향후 연구의 자율성을 강조한 것이다.
내년까지 ‘은하도시’계획 확정
은하도시 포럼은 국내 과학자와 예술인, 경제인 등 100여 명이 모여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단법인 단체다. 은하도시 포럼은 2008년까지 도시 건설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확정하고, 이후 5년간 건설에 돌입해 2013년엔 도시 형태를 갖출 계획이다. 이를 위한 초기 투자비용은 총 3조원 정도로 예상된다.
은하도시의 구체적 그림을 그려보자. 과학자 3000여 명과 예술가 1000여 명이 함께 사는 도시, 매일 아침이면 물리학자와 화가, 공학도와 조각가가 곳곳에서 티 타임을 즐기며 서로의 철학을 공유하고 수시로 포럼을 여는 곳, 중이온 가속기 같은 중대형 연구 시설이 있으며 대학·해외 연구진이 함께 사는 도시다.
은하도시에 설치할 중이온 복합 가속기는 1000조분의 1m인 펨토 사이즈(1나노의 100만분의 1 크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극미 물질의 깊은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정밀한 사진기인 셈이다. 물질의 내부 구조를 이해하면 물질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밝혀낼 수 있고, 그러면 신약 개발이나 동위원소 등 신물질을 개발할 수 있게 된다. <관련기사 이코노미스트 855호 참조>
지난해 9월 이코노미스트에 은하도시 기사가 실린 이후 각종 지자체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자체 관계자들이 개별적으로 민동필 교수를 찾아오거나 전화를 통해 “해당 지역에 은하도시를 유치하고 싶다” “구체적 도시 건설 자료를 보고 싶다”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민 회장은 “이번 대한민국 과학선언은 은하도시 건설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며 “이 7개 어젠다를 기본으로 은하도시 설립을 위한 구체적 계획들을 진행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민 회장은 “보통 사람은 과학기술이라는 말을 쓰는데 과학은 절대 기술이 아니다”며 “기술은 아이디어 중간에 튀어나오는 형이하학적 결과다. 이 기술을 지원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과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부 산하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지난해 1000개 기업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기초연구비 필요율이 환경에너지 분야(24.5%), 생명공학 분야(43%), 나노과학 분야(31%), 정보통신 분야(22%), 우주항공 분야(28.5%)로 나와 대다수 기업이 향후 5년간 신기술 발전의 주요 고려 사항으로 ‘원천기술의 준비’를 꼽았다. 그러나 정부의 기초과학 R&D 지원 현황은 5.2%로 정보전자(33.4%), 생명(23.7%), 기계·제조·화공(9.8%) 등에 비해 한참 처진다.
민 회장은 “국내 전체 교수의 2분의 1은 우수한 제안서 제출 능력이 있으나 현재는 8분의 1의 교수들만 연구비 수혜를 받고 있다”며 “이날 포럼에서는 교수들의 기초연구 지원비에 대한 이야기도 구체적 안건으로 올려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참여 대선 공약으로 과학도시 건설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이명박(66) 전 서울시장도 은하도시 포럼과 공동으로 과학도시 건설을 추진한다. 이 전 시장은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국제 포럼에 참석해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와 함께 과학도시 건설을 양대 핵심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공표할 계획이다.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는 당장의 신성장동력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과학도시 건설은 30년 후의 국가 성장동력을 만드는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하게 된다.
이명박 전 시장이 운영하는 안국포럼 홍보담당인 강승규 전 서울시 홍보기획관은 “이 전 시장은 서울시장으로 재임할 때부터 기초과학은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기초과학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지원도 했었다”고 전했다.
이 전 시장은 재임 시절 매년 1000억원씩 3년간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정책을 추진했었다. 2005년과 2006년 국내 기초과학 분야에 2000억원을 지원했으며 올해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 정책을 이어 실행하고 있다.
이 전 시장이 은하도시포럼 측과 과학도시 건설을 위한 공동 방향을 모색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은 그동안 고민했던 과학도시에 대한 구체적 콘텐트와 아이디어를 학자들로부터 제공받기 위해서다. 이 전 시장은 본인이 구상한 과학도시와 은하포럼이 추진 중인 은하도시 구상을 접목해 정책적인 부분에서 지원하게 된다.
은하도시포럼에서 기초과학 콘텐트를 제공한다면 이 전 서울시장 측에서는 과학과 비즈니스를 연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이 전 시장은 지난해 10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선(cern)연구소와 독일의 GSI(국립중이온연구소), 일본의 쓰쿠바 과학도시 등을 방문해 과학도시의 핵심시설인 가속기를 보고 온 바 있다.
대한민국 과학선언 전문 대한민국의 과학 발전을 위한 7개 어젠다
① 과학의 역할 세계는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거쳐 ‘생각의 힘’을 중시하는 고도의 지식사회로 향하고 있다. 이제 과학은 ‘산업경제를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보다는 ‘미래 지식사회를 이끄는 개척자’로서 그 위상이 올바르게 인식돼야 한다.
② 과학과 기술 선진국은 다른 나라에서 원천기술을 얻어오기보다는 스스로 원천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나라다. 원천기술은 기초과학에서 나온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③ 과학과 교육 초·중등 과학교육은 창의적 사고방식과 충실한 과학 지식을 습득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과학자를 우대함으로써 어린이들이 장차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연구자의 창의성과 과학의 국제성을 조화시켜 고급 인력 ‘유출국’을 ‘유입국’이 되도록 해야 한다.
④ 지식 융합 미래는 융합 지식의 시대다. 과학과 공학은 물론,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문화가 함께 만나는 지식 융합의 도시를 조성함으로써 신성장동력의 근원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융합도시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생산되고 지식과 문화가 창조되는 지식사회의 새로운 도시 전형이다.
⑤ 예산과 정책 현재 국제학술지(SCI)에 매년 1편 이상 논문을 발표할 능력이 있는 과학자 중 800여 명은 어떠한 연구비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과학계가 세계의 선두 그룹에 속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 연구비 예산을 획기적으로 증액해야 하며, 국가 연구인력의 안정적 확보와 다양한 능력 개발을 위한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
⑥ 과학의 경영 과학자는 오직 연구 성과로 책임을 진다. 정부는 과학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의 과학연구소 및 연구 지원 기관은 ‘연구의 자유’와 ‘연구자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연구자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성과 창의성을 갖도록 과학이 경영돼야 한다.
⑦ 과학 리더십 과학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며, 과학의 발전은 국가 전체의 과제다. 우리는 국가 지도자가 선진 과학정책을 수립하고 국제적인 과학 연구의 허브를 구상하며, 창의적인 과학 발전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박미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한겨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요즘 쟁점으로 떠오르는 ‘한반도 대운하 구상’의 배경과 그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글을 <한겨레>에 보내왔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11월18일치 4면)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12월26일치 4면)에 이은, 대선 주자로는 세번째 기고다. 앞으로 다른 대선 주자들도 글을 보내오면 최대한 원문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할 계획이다. 편집자
어머니는 나를 가졌을 때 밝고 큰 달을 치마에 가득 받는 태몽을 꾸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 이름을 돌림자(相)를 쓰지 않고 명박(明博)이라고 지으셨다. 꿈은 어쩌면 내게 운명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말하자면 나의 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물은 흐른다. 시내를 만들고 강을 이루면서 바다로 간다. 강은 흐르는 물이 만들어 주는 천혜의 길이다. 그래서 옛적부터 소금과 생선, 곡식과 포목을 실은 배들이 하구에서 상류까지 물길을 따라 운항했다. 마포, 충주, 상주, 동래에는 나루터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모든 길 붐빌 때 물길만 ‘텅텅’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강들은 뱃길 구실을 하지 않고 있다. 신작로와 철도의 발달이 이를 밀어냈을 것이다. 토사가 쌓이고 구조물이 가로막아 배가 다니기 어렵게 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강의 경우, 남북 분단으로 하구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뱃길 자체가 아예 막혀버렸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는데 물길은 끊어져 버린 것이다. 도로와 철도, 항공로가 모두 과중한 교통량으로 북적대는데도 강물은 텅빈 채 흘러만 가고 있다.
‘강에 배를 다시 띄울 수 없을까?, 그리고 끊어진 물길을 하나로 이을 수 없을까?, 그리하여 내륙의 모든 지방이 바다 너머 세계로 연결되게 할 수는 없을까?’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보낸 내게 그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기업에서 활동하던 시절, 구미 선진국에서 운하가 여러 나라에 걸쳐 많은 하천들을 이으면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것을 눈여겨봤다.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바지선과 멋진 유람선들이 쉴 새 없이 떠다니는 것을 보면서, 물길이 현대적 교통로로서도 매우 유용한 것을 확인했다. 세계 최대의 경제권으로 부상하는 유럽의 통합에 운하가 연결망 구실을 해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하여 나는 끊어진 물길을 이어 여러 지방을 소통시키고 나아가 세계로 연결하는 일을 나의 꿈을 넘어 나라의 과제로 설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꿈은 꿈으로 그칠 수도 있다. 꿈이 의미를 가지려면 실현을 위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강구되어야 한다. 나는 여건을 분석하고 전문가 의견을 듣는 한편 외국 사례를 수집하며 생각을 다듬어 갔다. 15대 국회의원 시절인 1996년 7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처음으로 내륙 운하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 후로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에 운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혀왔다. 경제 선진화, 국토 업그레이드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확신에서 어느 정부에서라도 꼭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주길 바랐다. 나는 한반도 대운하가 경제적 타당성을 갖는 수준을 넘어 국운 융성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물동량이 없어 경제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인프라 건설은 미래를 내다보고 미리 하는 것이다. 또 인프라는 스스로 새로운 물류 수요를 창출해낸다. 경부고속도로는 자동차도 별로 많지 않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에는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가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국가에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 되는 데에 고속도로의 뒷받침이 컸다는 걸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운하개발 이득이 단순히 물류 향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 오가는 것이다. 대운하는 관광 진흥에도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낙후된 내륙지역의 산업 활동을 진작해 국토의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고속도로 뚫는 것보다 친환경적
어떤 사람들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에서 운하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반도가 바다로 열린 땅이라면 운하는 그 반도적 특성을 완결시키는 동맥이다. 내륙 운하가 만들어지면 해상교통망이 내륙에까지 연장된다. 세계화 시대에 국토 구석구석이 세계로 직결되면서 국토의 조직이 질적으로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반도 대운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프라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파괴를 수반한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반도대운하는 물길을 막는 게 아니라 잇는 사업이다. 생땅을 파 새 물길을 내는 게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 놓은 수로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보가 만들어지고, 내륙도시에 항만도 건설해야 하고, 하천 이음새 부분에 터널 공사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철저히 친환경적으로 계획하고 시공해야 한다. 이는 양보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사소한 비판과 제안에도 귀 기울일 것이다.
10년 뒤면 우리나라 육상 교통은 운송능력의 한계 상황에 이른다. 그때 가서 비싼 사유지를 사들여 산하를 파헤치며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지금 국공유지에 있는 수로에 배가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친환경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오히려 수질도 개선될 것이다. 홍수와 가뭄도 보다 잘 조절될 수 있을 것이다. 하천 연변에는 생태공원들이 생겨날 것이고, 지금은 버려지다시피 한 토지 이용도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이 마구잡이로 운하를 밀어붙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얼마 전 운하 현장 답사 때 딸이 사준 선글라스를 끼고 나섰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흉내낸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나의 정책 구상을 꼬집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박 대통령의 고도성장 전략이 성공해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앞당기고 결과적으로 민주화 토대를 마련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성장 전략이 21세기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 시대에 국가가 추진하는 개발 사업은 모든 개인적인 것에 우선했고, 사유 재산권 침해니 환경 파괴니 하는 비판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21세기 도약은 내용부터 다르다. 모든 사업은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또 획일성, 집단성보단 다양성과 창의성이 더 요구된다. 모든 정책은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하고, 특히 소외된 소수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임의 기본 원칙은 ‘경쟁’이지만, 과정의 공정성이 보장되고 약자의 기본 수요에 대한 보호가 전제될 때 비로소 정당성과 함께 실효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도약은 과거의 그것과 내용이나 방법이 다르지만, 같은 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내일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희망과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 나는 노숙자들에게 뉴타운개발 공사장 막노동 일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다. 그때 희망에 차서 빛나던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여름 정책 투어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고생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나는 지금 그들이 내게 내민 투박한 손을 맞잡고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궈 세계를 놀라게 한 국민이다. 이제 함께 일어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할 때다. 지역이니 계층이니 엇갈렸던 과거를 털고 다 같이 마음을 열고 뜻을 합쳐야 한다. 선진 통일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손잡고 나서야 한다. 한반도 물길을 잇자는 내 제안은 말하자면 그 꿈을 실현할 토대를 만들자는 것이다.이명박/전 서울시장
신동아가 10년 추적 끝에 최초 공개하는‘이명박 운하’의 전모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 삼성그룹, 1995년 경부운하 검토 ● 이명박 측근, “1996년 YS 견제로 무산” ● 충주댐, 충주호, 국립공원 통과 안 해 ● 괴산 박달산-문경 조령산 쌍방향 터널 뚫는다 ● 임시 갱도공법으로 4년내 완공 ● 서울-부산 40시간, 고속 바지선의 비밀 ● 구포대교 등 17개 재가설, 달천교 등 13개 철거 ● 대구 갈산동·화원읍, 선착장·물류단지 유력 ● 총생산 파급효과 연 1조4229억원 ● ‘타당성 없다’ 정부 보고서 자문교수들 “연구 참여한 적 없다” ● 환경단체 “백두대간 두 동강…생태계 교란 불 보듯”
길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신작로가 생기면서 사라진다. 그것이 길의 운명이다. 길이 사라지면 그 길에 명운을 걸었던 사람들의 인생, 풍류도 잡풀 속에 묻힌다. 지역경제도 길의 흥망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고속도로였던 ‘조선 팔대로(八大路)’는 신작로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앞두고 부설한 경부선 철도(1901∼1905)는 부산 동래에서 서울 양재까지 가장 빠른 도보 길이자 과거 보러 가던 길이던 ‘영남대로(嶺南大路)’ 위에 놓여졌다. 낙동강 우안(友岸)을 따라, 또 남한강을 비껴 장호원 들판을 내달리던 영남대로는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물길(水路)이다. 조선시대 부산, 경남지역의 조공(朝貢) 배와 소금 배는 낙동강을 거슬러 문경새재 코밑인 상주까지 올라갔다. 낙동강 지류를 따라 경북 내륙 골짜기인 안동으로도 들어갔다. 안동 양반이 바다 생선을 맛볼 수 있던 것도 이 물길 덕분이었다. 서울에서 충주까지는 한강과 남한강 물길을 이용했다. 서울로 가는 조공 배는 달구지로 문경새재를 넘어온 짐을 싣고 남한강의 유속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강 마포나루까지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나루에는 주막과 시장이 번성했다.
강의 물길은 바다로도 연결됐다. 충북 충주의 달천강 지류에서 시작한 남한강은 경기도 양평의 팔당 지역에서 북한강과 만난 후 비로소 한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서울을 관통해 경기도 파주까지 한달음에 내뻗은 한강은 임진강과 합쳐지면서 서해와 몸을 섞는다. 강원도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문경, 상주, 구미, 물금을 거쳐 부산지역에서 남해로 연결된다.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일제는 경부선 철도 인근의 한강, 남한강, 낙동강 주변 나무를 집중적으로 베어내기 시작한다. 수목 남벌로 토사는 강으로 흘러내렸고, 이후 급속한 산업화로 강변이 파괴되면서 강의 바닥(하상)이 높아져 큰 배가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국도와 지방도가 늘어나면서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강과 낙동강은 물류이동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다. 사람을 실어 나르던 나룻배도 신식 다리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제1부〉 정치 입김에 좌초된 경부운하
이명박 경부운하 노선도 사라진 내륙의 물길을 우리의 기억에서 되살려낸 주인공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다. 이 전 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이 마무리되어가던 지난해 초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내륙운하, 즉 경부운하에 대한 계획을 언론에 흘리기 시작했다.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 사이에 우뚝 솟아 한강과 낙동강을 가로막고 있는 조령 인근 지역에 수로 터널을 뚫어 서울과 부산을 운하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낙동강 상류의 부족한 수량은 충주호에서 받거나 보를 만들어 확보하고, 높아진 하상은 준설해 수심을 확보한다는 안(案)이다. 공사비의 상당 부분은 준설을 통해 얻은 골재를 팔아 충당한다는 것.
이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그가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1996년 7월, 15대 국회 본회의에서 제안한 내용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으로, 그 한 해 전인 1995년 세종대 부설 세종연구원이 내놓은 내륙주운(舟運) 건설론을 원용하는 수준이었다. 이 전 시장은 시장 퇴임 1년 전부터 대선을 향한 정책적 승부수를 띄운 셈. 하지만 이 전 시장의 주장은 크게 이슈화하지 않았고, 그 자신도 운하 자체가 정치적 이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난 5월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후 청계천 복원에 대한 칭찬 여론이 빗발치자 이 전 시장은 자신의 대통령선거 제1 공약을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내륙운하 건설로 확정했다. 8월17일부터는 3박4일간 한강과 낙동강을 따라가는 정책탐사를 벌이며 지역민과 언론을 대상으로 내륙운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청계천의 성공(환경단체들은 ‘일부의 성공’ 또는 ‘실패’로 보지만)’은 그에게 10여 년 전 국회의원직 상실과 함께 묻힌 ‘운하의 꿈’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을 불어넣었다.
세종연구원의 제안
9월을 넘어서면서 이 시장의 경부운하는 명칭이 ‘한반도운하’로 바뀐다. 서울-부산뿐 아니라 호남지역과 신의주, 원산 등 북한 전역에 운하를 만들고, 이 모든 운하를 하나로 연결하겠다는 거대 구상을 세운 것이다. 이는 다분히 지역 정서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한 것으로 현재는 계획으로만 존재할 뿐, 바로 실행하기에는 너무 먼 미래의 일이다. 이 전 시장측도 “금강과 영산강을 연결하는 호남운하는 몰라도 북한지역 운하에 대해서는 아직 경제적 타당성 조사나 기술적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반도운하 중 경부구간(이하 경부운하)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곳은 세종대 부설 세종연구원이다. 1995년 4월 이 연구원은 경부운하뿐 아니라 경인, 경안(서울-안양-시화호), 호남운하(한강-금강-영산강)를 비롯, 전국 5대강을 운하로 연결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세종연구원은 ‘물류혁명과 국토개조전략’이라는 테마로 1996년까지 관련 논문과 책을 쏟아냈는데, 여러 운하 중 특히 경부운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89년 한국수자원공사가 서울에서 충주댐까지의 한강운하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벌여 “타당성이 충분하다”는 결과 보고서를 낸 적이 있으나,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운하에 대한 검토 보고서를 내기는 세종연구원이 처음이었다. 당시 세종연구원 주명건 이사장과 연구진이 제시한 경부운하의 얼개는 이렇다.
“운하는 한강 하류인 김포 신곡수중보를 시점으로 한강 본류를 따라 남한강의 팔당댐, 충주댐(충주호)을 경유한 뒤, 조령지역 해발 125m 지점에 뚫릴 길이 20.5km의 터널을 통해 낙동강 상류지점과 연결된다. 충주호에서 터널을 통해 엄청난 물을 공급받은 낙동강은 본류를 따라 하류지점인 낙동강 하구둑까지 총 거리 500.5km 구간을 흘러간다. 운하 가운데 준설공사 구간은 총 237.5km, 절개공사 구간은 166.9km이다. 전체 운하구간에 용수 보조용 댐 7개소와 주운용 댐(수량 확보용) 8개소 등 모두 15개 댐을 건설해야 한다. 터널은 배의 일방통행만 가능하도록 폭 14m, 높이 16m로 뚫는다. 해발고도차 극복과 댐 통과를 위한 갑문은 13개소에 설치한다.
팔당댐 아래의 남한강. 수량이 많지 않다. 운하의 규모는 바다와 강을 모두 다닐 수 있는 2400t급 바지선이 왕복 통행할 수 있도록 평균 폭 50m와 깊이 5m로 하되 신곡수중보에서 팔당댐까지 54km는 5000t급 바지선이 다닐 수 있도록 폭 50m, 깊이 6m, 구미에서 부산항까지 139.7km는 1만6200t급 바지선이 교행할 수 있도록 폭 100m 깊이 6.5m로 한다. 총 공사비는 8조6700억원.”
경부고속철도(서울-동대구)를 만드는 데 13조원(동대구-부산 구간에는 향후 5조원 이상 투입 예정)을 퍼부은 요즘에는 ‘뭐 그쯤이야’ 하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9조원이면 ‘천문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세종연구원은 “하상 준설을 통해 나오는 골재와 부지 판매 비용 등으로 공사비보다 더 많은 8조7300억원을 얻을 수 있으므로 재정부담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당시 연구원은 “한국 경제의 4분의 3이 경부축에 위치하고, 물류비가 국내 총생산의 15.7%인 59조원을 차지하므로 수출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은 교통 혼잡과 환적(換積)시간이라 할 수 있다”며 “경부운하를 만들면 총 물동량의 25%를 운하로 운송할 수 있고, 운하의 운임은 고속도로와 철도에 비해 30% 수준 밖에 되지 않아 엄청난 국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종연구원이 추정한 경부운하의 수송비 절감액은 연간 3조8000억원, 교통혼잡 비용 절감액은 연간 9000억원에 달한다. 세종연구원은 이 밖에도 경기부양과 고용창출, 영남과 경기 남부의 용수 부족난 해소, 통근용 여객선과 관광유람선 도입으로 인한 소득증가, 전쟁 억지력 증가, 대기오염, 수질오염 및 산림골재 채취로 인한 자연훼손 감소 등을 대표적 편익 또는 효과로 꼽았다.
삼성 구상도 수면 아래로
1995년 8월 삼성그룹의 운하 건설 계획을 소개한 영남일보 기사. 그러나 세종연구원의 경부운하 프로젝트는 이슈화에 실패한다. 그러다 1995년 8월 삼성그룹이 삼성상용차의 물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부운하 건설을 검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빛을 본다. 당시 삼성그룹은 대구시 성서공단에 삼성상용차 공장을 건설 중이었고, 그에 따른 부품단지를 건립키로 확정한 상태였다.
대구지역 일간지 ‘영남일보’는 1995년 8월30일자 1면 톱 기사에서 “삼성그룹은 수출 물량과 원료의 용이한 수송과 물류비용 절약을 위해선 기존 고속도로로는 곤란하다는 판단하에 과거 수상 수송로로 쓰였던 낙동강에 수로를 개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사의 제목은 ‘대구를 부산과 연결되는 항구도시로 만든다’였다. 기자는 당시 영남일보 기자로 이 기사를 취재했는데, 삼성그룹이 운하 공사의 타당성 조사 용역을 각 대학 교수팀에 의뢰한 사실을 공개하며 “삼성이 성서공단 삼성상용차 공장과 부품단지 건립을 계기로 성서공단과 쌍용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는 달성군 구지공단, 위천공단 등 낙동강 공업벨트의 물동량 수송과 최단거리 수출부두의 확보를 위해 순수 민간자본으로 대구와 부산을 직접 연결하는 운하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삼성측은 정부부처,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경부운하 공사계획이 확정될 경우 달성군 구지공단의 쌍용자동차 등 참여희망기업들과 컨소시엄 구성을 구상하는 한편, 공사에 필요한 재원은 민간자본으로 충당한다는 전제 아래 준설작업을 통해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모래 판매 수익금을 운하 공사의 재원으로 삼는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삼성상용차는 김영삼 정부 당시 부산 삼성자동차의 경우처럼 입지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구지역에 자리잡았으나 물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때마침 쌍용자동차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일대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자 삼성은 아예 자신들이 운하를 만들어 돈을 벌 궁리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삼성의 이런 계획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 시기를 거치며 2000년 삼성상용차가 문을 닫고, 쌍용자동차 구지공장과 위천공단 건립이 연이어 무산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당시 김혁규 경남도지사(현 열린우리당 의원)는 평소 세종연구원의 경부운하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영남일보 기사를 읽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안 된다면 한강과 낙동강이 지나가는 광역 지자체가 힘을 합해서라도 경부운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대구시도 장기 국토개발계획안에 경부운하 건설을 넣을 것을 국토개발원에 다섯 차례나 요구한 바 있다.
이후 대구시와 경남도는 이 문제를 한동안 거론하지 않았다. 세종연구원의 연구원으로 경부운하 논문 작성에 참가한 세종대의 한 교수는 “운하와 관련해서 연구한 학자들은 대부분 삼성이 경부운하를 만들려 했다는 사실을 안다”며 “YS 정권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전한다.
건교부, 수자원공사의 경부운하 폄하
이 전 시장이 경부운하 건설을 국회 본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선 시점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96년 7월이다.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던 이 전 시장은 정부와 한국수자원공사가 경부운하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경부운하건설추진위원회(이하 운하추진위)를 구성하려 했다. 당시 60여 명의 의원으로부터 서명을 받았지만 위원회는 구성되지 못했다. 이 전 시장측의 한 인사는 ‘신동아’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무려 60여 명의 의원이 운하추진위 결성에 동의했는데도 구성되지 못한 것은 청와대가 막았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 YS측은 경부운하 구상이 이슈화하거나 그 구상이 행여 가시화되어 이 의원의 정치적 위상이 급상승할 것을 우려했다. YS는 대선 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경쟁한 이후 불편한 사이였는데, 그 때문인지 당시 이명박 의원도 경계 대상에 포함됐다.
당시 정부 산하기관에서 뜬금없이 운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보고서를 내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불거졌다. 반면 김대중씨는 경부운하를 지지했다. 실제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측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이 의원의 운하 구상을 우리가 대선공약으로 쓰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신한국당 소속인 이 의원의 구상을 상대당 후보가 사용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이런 정황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난다. 1996년 9월2일 건설교통부와 한국수자원공사, 신한국당은 당정 회의를 통해 “경부운하는 현실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는 주운용 하천수량 확보난, 운하 이용 물동량 부족, 다단계 갑문설치에 따른 기존 제방 공사 필요, 사업비 조달 어려움 등이었다. 또 선박이 20km가 넘는 터널을 통과하는 데 따른 안전 문제와 하천 결빙시 대체 수송수단 확보 문제도 지적됐다.
문제는 건설교통부가 정확한 용역조사를 벌이지 않았고, 이 의원의 제안이 나온 지 한달 보름 만에 이런 결론을 서둘러 발표했다는 점. 건교부가 제시한 문제점에 대해 당시 이명박 의원과 위원회 관련 의원들이 “기술적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또한 신한국당은 경부운하에 대한 반대 당론을 정하면서 소속 의원들과 한 번도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 달 후인 1996년 10월9일 추경석 건교부 장관은 대구·경북권 의원들이 국정감사에서 경부운하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자 “경부운하 건설을 현재 수자원공사에서 수행 중인 수계연결 계획에 포함시켜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제2부〉 수자원공사 조사보고서 왜곡·부실 의혹
1997년 외환위기가 엄습하면서 경부운하라는 말은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1998년 1월, 한국수자원공사는 한 권의 용역결과보고서를 ‘조용히’ 내놓았다. ‘지역간 용수수급 불균형 해소방안 조사연구 최종보고서(내륙주운부문)’. 1년여 전 추경석 건교부 장관이 약속한 경부운하에 대한 검토보고서가 그때서야 나온 것이다.
수자원공사가 국토연구원에 5억6000만원의 예산으로 용역을 맡겨 완성한 결과보고서는 하필이면 YS 정권이 DJ 정권으로 바뀌기 1개월 전에 나왔다. 최종 결론은 ‘사업 타당성 없음’이었다. 그러나 이 전 시장과 대구시처럼 경부운하 건설에 열을 올린 주체들은 이 보고서가 나온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는 어수선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수자원공사가 이 보고서를 국회도서관과 관련 부서에만 보냈을 뿐 이 전 시장과 운하추진위 결성 서명 의원들, 심지어 이 연구에 동참했다고 주장하는 토목공학자나 경제학자에게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자원공사가 경부운하를 지지해온 DJ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에 서둘러 조사보고서를 발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수자원공사 “사업 타당성 전혀 없다”
경기도 여주 신륵사 바로 아래 조포. 왼쪽에 있는 배가 옛 돛단배를 재현한 황포 돛배. 수자원공사는 경부운하와 관련된 용역연구를 진행하면서 세종연구원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 충주댐과 충주호를 지나 월악산 국립공원을 터널(20.5km)로 관통하는 세종연구원 안을 버리고 월악산 국립공원과 문경새재 도립공원을 서쪽으로 멀찌감치 벗어난 지역에 수로 터널(5.3km)을 만들기로 한 것. 이렇게 되면 산을 관통하는 길이는 세종연구원 안보다 15km가 단축되지만 터널의 위치가 해발 120m에서 210m로 높아지고, 자연하천이 아닌 인공수로를 35km 이상 만들어야 한다. 이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세종연구원 안보다 당시 시세로 4500억원이 더 많았다.
댐도 하나 더 늘어나 16개의 댐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배가 드나드는 갑문도 13개에서 17개로 늘어났다. 갑문 1개당 배가 통과하는 시간은 45분으로, 이 때문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바지선의 운항시간은 60.6시간으로 늘게 된다. 수자원공사는 보고서에서 “세종연구원 안은 구간이 길어 전 공정에 지연을 초래하고 이에 따라 수익감소와 금융비용이 증가한다. 터널 구간이 길면 환기문제와 비상시 대책이 어려워진다. 더욱이 높이 97.5m의 충주댐에 배가 들어가려면 댐 본체부에 8개의 갑문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댐 안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수자원공사 안은 충주호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터널 인근 지역에 3개의 댐을 더 만들어야 하는 부담까지 안게 됐다. 세종연구원 안대로 하면 충주호에서 터널수로를 통해 낙동강 상류로 물을 끌어당겨 쓰면 되지만 수자원공사 안은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댐을 더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 운하 건설시 따르는 수몰지역민의 민원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연구원과 수자원공사의 용역보고서는 기본 전제가 달라 공사시기, 규모, 총공사비, 경제성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 수자원공사 안은 세종연구원 안보다 총공사비도 2000억원가량 늘었고, 경제성 분석에서도 편익 대 비용의 값을 가리키는 수익성 지수(B/C 비율)가 큰 차이를 보인다. 수익성 지수 1 이상일 때 사업 타당성이 있다고 보는데, 세종연구원 안은 분석기간 50년을 기준(할인율 10% 적용)으로 5.44가 나온 반면, 수자원공사는 0.244에 불과했다. 수자원공사는 “50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경부운하의 사업 타당성은 ‘전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수자원공사는 보고서에서 경부운하로 옮길 수 있는 화물이 제한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또 국내 기술로는 터널 공사와 갑문 공사가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내륙운하보다 연안운하가 바람직”
“경부축의 화물은 대부분 단위당 가치가 높은 제품이어서 주운을 이용할 수 있는 화물의 규모와 종류는 매우 제한적이다. 외국의 사례를 고려할 때 운하는 단위당 가치가 높지 않은 대량화물 수송에만 적합하며 이에 걸맞은 화물은 경부축 총 화물의 3.3%에 불과하다. 또 운하는 고속도로, 철도 등에 비해 운항시간이 길어 비교 열위에 있는 수송수단이며, 수로 터널 등 인공 연결구간은 지나치게 길고 표고차가 매우 커 많은 갑문을 건설하는 데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해외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등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된다. 더욱이 안개와 결빙 기간이 길어 선박운항 불가능일이 연 90일에 달한다. 내륙운하보다는 바닷가의 각 항구를 이용하는 연안운하를 개발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환경적으로는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를 보이려 노력한 측면도 보인다. 수자원공사는 “경부운하로 인한 수질 오염, 일조량 감소, 생태계 교란 등 부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에너지 절약, 대기오염과 소음공해 감소, 교통사고 위험 감소 등 긍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또 “경부운하로 인해 연간 1억3816만갤런의 석유를 절감할 수 있으며 하루 5t 화물트럭 5165대가 배출하는 매연이 감소하고 2011년을 기준으로 매일 3944대의 화물트럭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개선 편익은 전체적인 경제적 타당성 분석에 반영되지 않았다. 반면 세종연구원은 올 초 만들어진 경부운하 타당성 분석 자료(비공개 문서)에서 경부운하가 건설되면 대기오염 감소로 매년 758억원(2011년 기준), 소음 감소로 367억원의 효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를 수익성 지수 분석에 반영했다.
하지만 수자원공사는 운하로 인해 일정 정도의 수질 악화를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주운댐이 건설되면 운하는 댐과 댐을 연결하는 저수지로 봐야 한다. 즉 물의 흐름이 없는 호소로 간주해야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부영양화가 진행돼 투명도가 떨어지고 심수층의 용존산소가 감소하면서 수중 생태계가 파괴되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모든 생물은 유속이 느린 호소(湖沼) 생태계에 적합한 형태로 바뀐다. 또 터널이 생기면 생태계가 단절되고 교란 현상이 일어나며 외래어종의 급속한 증식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주운댐은 안개를 발생시켜 일조량과 일조시간의 감소를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인접 농경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수자원공사는 그 대안을 내놓았다. 운하를 생태공학적으로 만들면 수질오염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 즉, 친환경적으로 개발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환경오염은 막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더욱이 수자원공사는 보고서에서 “공로(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등) 화물이 주운으로 전가되어 수송되면 오염비용이 감소한다. 2011년부터는 매년 5300억원 이상의 오염비용이 감소할 것”이라고 했다. 수질오염을 그대로 두더라도 운하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상쇄하면 환경 차원에서도 운하를 만드는 게 이익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다양한 분석을 담은 이 보고서는 어떤 영문인지 8년이 지난 현재, 모든 조건이 변했지만 이 전 시장의 경부운하 안을 비판하는 최대의 무기이자 바이블로 이용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유필우 의원 등은 9월27일 이 보고서를 근거로 “이 전 시장의 경부운하안이 경제성이 전혀 없다”는 자료를 냈다. 그 내용은 보고서에서 부정적인 내용만 따로 정리한 수준이었다.
“용역주체 의지 반영됐다”
그렇다면 수자원공사의 보고서는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일까. 이 보고서의 결론에는 수자원공사, 나아가 경부운하에 반대하는 정권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토개발원이 작성해 수자원공사에 납품한 최종보고서의 앞머리를 보면 참여 연구진의 이름과 소속을 적시해놓았는데, 그 인원이 45명에 이른다. 이들 중 국토개발원의 자체 연구 인력과 그들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할 개연성이 있는 업체, 정부 산하 연구소 연구원, 공무원을 제외한 대학 교수는 16명. 자문위원으로 등록된 이들 교수진을 취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교수는 최종보고서의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이런 용역연구를 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 이들은 자문위원으로 등록만 됐을 뿐 용역연구에 참여한 사실은 없었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수자원공사와는 정 반대 의견을 개진했던 세종연구원 소속 연구원 4명도 들어 있었다. 세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국토연구원에서 불러 회의를 한 적은 있지만 그것으로 연구에 참여했다거나 자문에 응했다고 이름을 올리는 것은 곤란하다. 보고서에 이름이 오른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수자원공사에 항의했지만 삭제되지 않았다. 최종보고서 책자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토목공학과 이길성 교수는 “개인적으로 경부운하엔 반대하지만 그런 회의에 참가한 기억도 없고 책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연세대 토목공학과 조원철 교수는 “회의에 참가한 적도 없고, 보고서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보고서의 이러저러한 내용을 보니 이 사람들, 정말 큰일 낼 사람들이다. 특히 운하를 만들기 위해 해외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부분은 터무니없다. 분명 연구진 중에 외국 회사 관련자가 포함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수자원공사 최종 보고서에는 네덜란드의 한 토목회사가 ‘국외자문단’이라는 명목으로 올라 있다.
“토목판에서 용역주체의 의지대로 용역연구 결과가 좌지우지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인가. 회의에 자신들과 친한 교수 몇 명 불러놓고 한두 번 대화를 나눈 뒤 연구위원이나 자문위원으로 슬쩍 이름을 집어넣는 것도 관행이다. 그 후에 자기네 입맛대로 용역 보고서를 쓰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경부운하 용역연구 자문에 응하거나 참여한 적이 없다.”
최종보고서에 자문위원으로 오른 한 대학교수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용역에 연구원으로 참여한 국토연구원 박태선 책임연구원은 “그들은 분명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우리는 회의 참석을 ‘자문’에 응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사람이 어떤 의견을 가졌는가와 관계없이 용역 보고서에는 그것이 녹아들어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에게 “발행된 지 8년 된 이 보고서가 현 시점에서 경부운하의 타당성을 논하는 데 유용한가”라고 물으니 그는 “변수가 변하면 결론도 바뀔 수 있다. 전제가 바뀌는데 어떻게 똑같은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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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부운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데 대해 이명박 전 시장측은 “나쁠 것 없다”는 반응이다. 운하 건설 세부 계획을 밝히는 것도 꺼린다. 이 전 시장측 한 인사는 “이 전 시장이 구상하는 경부운하는 1995년 세종연구원이 발표한 경부운하와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수로의 통과지점, 터널의 위치, 길이, 바지선의 유형, 댐 설치 방식, 갑문의 위치, 형식 등 경부운하의 구체적 사안은 현재로선 밝힐 수 없다. 내부적으로는 검토가 거의 끝났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공개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11년 전 세종연구원 안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공사기간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한편, 보다 더 환경친화적인 운하가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이 전 시장 주변에는 경부운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운하팀(운하연구회)이 꾸려져 있다. 국제정책연구원(GSI)과 안국포럼을 포함해 적어도 3개 그룹 이상의 조직에 걸친 ‘운하연구회’에는 건설업체 엔지니어와 각 대학의 토목공학, 환경공학, 경제학과 교수 100여 명이 포진해 있다. 이 전 시장측 김영우 정책보좌관은 “이들은 아무 대가 없이 이 전 시장을 돕고 있다. 경부운하는 내부적으로는 설계도가 완성단계에 와 있다”고 했다. 이 전문가 그룹의 실체는 대통령선거의 뚜껑이 본격적으로 열릴 때쯤 공개될 예정이다.
경부운하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행태는 제각각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전 시장이 여러 개의 경부운하를 만드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김영우 정책보좌관은 “경선이 내년 4∼5월에 있고 대선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어 경부운하 설계도를 공개하는 행위는 선거법에 저촉될 수도 있고, 우리가 가진 패를 모두 보여줌으로써 반대 논리만 양산시킬 공산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10년 전에 나온 세종연구소의 논문이 이 전 시장의 운하안(案)으로 둔갑했다.
‘이명박 운하’의 내용이 이렇듯 추상적이다보니 언론도 환경단체도 제대로 검증할 도리가 없다. 밑그림만 보고 완성품의 허와 실을 논하는 해프닝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운하의 설계도조차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효과만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다보니 ‘과연 운하건설이 가능한가’ ‘선거용 빈껍데기 공약(空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쌓일 수밖에 없다.
〈제3부〉 최초 공개 : ‘이명박 운하’의 실체
기자는 이 전 시장측에 ‘올바른 정보가 전달되지 않으면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취지를 전달하고 경부운하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이 전 시장측은 한사코 이를 거절하다 지금껏 여러 언론에 흘러나온 갖가지 설들을 부정하거나 확인하는 방식으로 경부운하의 개요를 설명했다. 이 전 시장이 구상하는 경부운하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먼저 운하의 통과지점, 즉 노선에 대한 부분이다. 이 전 시장 경부운하안의 골자는 ‘대부분의 구간은 자연하천을 그대로 이용하고, 강과 강을 잇는 수로터널의 앞뒤에 극히 짧은 거리의 인공수로를 만든다’는 것. 언론에 알려진 이 전 시장의 운하 노선안은 서울(김포대교, 신곡수중보)-구리-하남-팔당호(팔당댐, 이상 한강지역)-양평-여주-충주(이상 남한강 지역)-충주호(충주댐)-월악산 수로터널(국립공원지역)-문경 조령천-상주 영강-상주 낙동강-구미-대구-창녕-물금-부산 낙동강 하구언의 총 500.5km로 1996년 세종연구원이 제안한 것과 같다.
댐 없고, 충주호·국립공원 통과 안 해
대부분의 구간이 세종연구원 안과 일치하지만 이 전 시장측 노선안은 남한강 수계에 있어 충주댐과 충주호를 통과하지 않고, 충주호를 서쪽으로 비껴 충주 조정지댐(탄금호)과 달천을 따라 수로터널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이는 수자원공사 안(달천, 쌍천을 통과해 인공수로를 길게 만드는 안)과 세종연구원 안의 중간노선으로 충주댐과 충주호를 통과하지는 않지만 충주호의 물을 도수로(導水路)로 쉽게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한 것이다. 이 전 시장측은 댐을 전혀 만들지 않거나 한 곳만 만들어 낙동강 상류 수로의 수량을 확보할 계획이다.
터널을 뚫는 위치도 다르다. 세종연구원 안처럼 월악산 국립공원에 수로터널을 뚫는 게 아니라 월악산을 서쪽으로 완전히 벗어난 충주 쪽의 박달산과 문경 쪽의 조령산 밑자락에 터널을 뚫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자원공사 안보다는 충주댐에 가깝지만 월악산 국립공원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 전 시장 정책 담당자는 “충주댐과 월악산은 난공사에 따른 위험부담이 크고 국립공원 파괴라는 비난에 맞닥뜨릴 수도 있어 조금 우회하더라도 해발고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충주 조정지댐과 조령산을 통과하는 방안을 택했다. 이렇게 해도 문경새재 도립공원의 극히 일부분은 포함될 수밖에 없다. 공사비가 많이 들더라도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운하를 개발한다는 게 이 전 시장의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총력 리포트 230매]
신동아가 10년 추적 끝에 최초 공개하는‘이명박 운하’의 전모
수로터널 통과안 비교 월악산 국립공원을 비껴 박달산과 조령산에 수로터널을 뚫게 되면 경부운하의 총연장은 530km가 된다. 남한강에서 바로 낙동강으로 연결되지 않고 충주 달천으로 우회하는데다 달천과 조령산 수로터널을 연결하는 데 극히 일부지만 인공수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 또 조령산 남쪽에 있는 문경 조령천과 그 아래쪽에 있는 상주 영강을 잇는 부분도 물길의 굽이가 워낙 심해 곳곳에 인공수로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측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인공수로는 10km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자원공사 안은 인공수로가 35.5km, 세종연구원 안은 22km인 것에 비해 인공수로가 짧아짐으로써 공사비도 줄이고 환경파괴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터널의 높이도 달라진다. 세종연구원 안은 해발 120∼141m에, 수자원공사 안은 해발 210m에 터널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이 전 시장측은 105m 높이에 터널을 만들 계획이다. 터널의 높이는 배의 왕래에 있어 운행시간, 기술적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수자원공사는 “총공사비가 늘고 기술적 부담이 따르는 공사이긴 하지만 터널 양쪽은 물론 각 댐에 ‘십 리프트(배를 엘리베이터에 실어 들어올리고 내리는 방식)’를 설치해 해발 차를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이 시장은 15개의 갑문과 보를 설치해 물의 낙차를 조금씩 줄여가기로 했다. 배가 도크에 들어오면 갑문이 서서히 열리고 물의 높이가 같아지면 진행하는 방식이다.
공사비 17조원 정도
충주 조정지댐 전경. 이명박 전 시장이 계획하는 경부운하는 충주댐을 통과하지 않고 이곳을 지난다. 운하 건설에서 노선만큼 우선적으로 결정돼야 할 요소는 운하를 왕래하는 바지선의 규격이다. 그 규격에 따라 총 물동량과 수로의 폭이 결정되기 때문. 이는 운하의 물류 경제성과 총공사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 전 시장측이 공개한 바지선의 규격은 폭 11∼12m, 길이 110m에 2400t급. 이는 컨테이너 200개가량을 한번에 옮길 수 있는 규모로, 이를 1열2단으로 연결할 경우 한번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양은 4800t으로 늘어난다. 또 구간에 따라서는 5000t급과 1만6200t급이 운행되기도 한다.
이 전 시장측은 자연하천 구간의 경우 수로의 평균 폭을 50m 정도로 할 예정이다. 조령산에 뚫을 터널 수로의 폭은 20m이지만 상행, 하행 터널(쌍굴)을 따로 만들어 양쪽의 수로 폭을 합치면 실질적으로 자연하천 구간의 수로 폭과 다를 바가 없다. 바지선 선폭이 11∼12m밖에 되지 않는데 수로의 폭을 이렇게 넓게 잡은 것은 충돌 사고를 방지하고 몸집이 큰 유람선이 왕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또 쌍방향 터널을 뚫음으로써 바지선의 대기시간이 크게 줄어 운행시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다. 세종연구원 안은 터널의 폭을 14m(일방통행)로 정해 상행과 하행이 교차할 경우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단점이 있다. 수자원공사는 수로 터널이 아니라 터널 내에 철도 선로를 부설해 그 위에 바지선을 얹은 후 특수대차(기관차)로 잡아당기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방식은 기관차가 경유를 연료로 사용할 경우 터널 내 매연과 배기 문제가 발생하고, 배를 선로 위에 올리는 데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약점이 있다. 이마저도 일방통행이다. 다만 이 전 시장 안의 문제는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
일부 지류 부분을 제외하고 한강과 낙동강의 강폭은 좁은 곳이 80m이고 넓은 곳은 2km를 넘는다. 따라서 수로 폭을 최소 50m로 잡은 것은 일부 지류 부분이나 인공수로 폭을 고려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다. 2400t급 바지선이 물에 잠기는 깊이인 흘수(물에 뜬 배의 선체가 물속에 잠기는 깊이)는 2.8m밖에 안 되지만 평균 수심을 6m로 잡은 것도 앞으로 바지선의 규모를 확장할 것과 대규모 유람선 왕래를 감안한 것이다.
이처럼 일정한 수량과 수심을 확보하려면 수량이 풍부한 충주호의 물을 터널수로를 통해 낙동강으로 흘려보내는 한편, 물을 항상 가둬두는 저수용 댐을 곳곳에 설치해야 한다. 낙동강 상류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1000mm 이하로 전국 평균보다 300mm 정도 적어 늘 물 부족 현상에 시달린다. 또 내린 비가 하천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유출계수가 어느 곳보다 높다. 이 때문에 세종연구원과 수자원공사는 15∼16개의 댐을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령산 수로터널과 상주시 영강 사이에 들어설 3개의 댐을 제외한 나머지 13개 댐은 이미 수자원공사의 장기 댐 건설 계획에 포함된 용수 공급용 댐으로, 운하와 관계없이 언젠가는 건립될 것들이다.
반면 이 전 시장측은 “댐은 전혀 필요치 않고, 저수용 보만 15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전 시장측은 “한강 상류와 낙동강 상류 각 지점에 보를 설치하면 수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댐 설치로 인한 수몰지역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터널을 쌍굴로 뚫는데다 연장도 길어지면서 총 공사비는 수자원공사 안과 세종연구원 안의 2배에 달하는 15조~20조원이 될 것이라는 게 이 전 시장측 추산이다.
〈제4부〉 ‘이명박 운하’ 현장 철저 검증
이 전 시장측이 구상하는 경부운하의 실현 가능성과 문제점을 살펴보기 위해 9월25일 경부운하 구간 답사에 나섰다. 출발지점은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김포대교 지점. 한강의 마지막 다리인 김포대교의 총 연장은 2.2km로, 한강 하류의 강폭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포대교 아래 물 밑에는 신곡수중보가 있다.
한강 수중보의 비밀
1987년 만들어진 신곡수중보는 한쪽으로만 물이 흐르는 다른 보와 달리 아침, 저녁으로 물의 방향이 바뀐다. 신곡수중보가 만들어진 첫 번째 이유는 밀물 때 서해의 물이 노량진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한강에 유람선이 다닐 수 있도록 강의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수중보가 없으면 한강에는 큰 유람선이 다니지 못한다. 물이 빠르게 서해 바다로 흘러내려가 일정한 수심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물의 유속을 줄임으로써 그곳에서 공업용수도 퍼낼 수 있다. 고기들이 다닐 수 있도록 어도(魚道)도 따로 만들어져 있다. 신곡수중보에는 최근까지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한 쇠그물이 쳐져 있었으나 언제인가 제거됐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 만일 한강을 따라 내려온 배가 서해로 나가려면 신곡수중보에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갑문이 설치돼야 할 것이다. 강 양옆에 배가 들어갈 수 있는 도크와 갑문을 만들면 배는 서해와 한강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김포대교에서 신평 인터체인지를 타고 자유로로 들어서면 강변북로와 이어진다. 강변남로의 명칭은 ‘올림픽대로’. 서울시민은 이 길을 단지 김포와 구리를 잇는 간선도로로 생각하겠지만 운하로 따지면 제방도로가 되는 셈이다. 폭이 넓은 구간에는 대부분 강변도로를 만드는 게 관행이다. 국가 소유의 하천이므로 따로 보상비가 들지 않아 도로 시공비용이 저렴하다. 이 전 시장측은 “지금은 아니지만 경부운하 제방에 강변도로 건설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서울과 부산 사이에 또 하나의 국도 내지는 고속도로가 생긴다는 얘기다. 경부운하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환경정의’의 한 관계자는 “경부축에 이미 여러 개의 고속도로가 있는데 또 도로를 만든다는 것은 중복투자이며 또 하나의 환경파괴”라고 반박한다.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다 잠실대교에서 또 하나의 수중보를 만나게 된다. 물론 물 밑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류로 흘러가는 유속을 이곳에서 한번 줄이고 신곡수중보에서 다시 한번 줄임으로써 물이 한꺼번에 바다로 쓸려내려가는 정도, 즉 유출계수를 낮춘다. 일정한 수심을 유지하므로 취수도 가능해졌다. 서울시민 중 일부는 이곳에서 취수한 물을 정수해 마신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는 최근 잠실수중보와 신곡수중보 양쪽을 막아 한강의 바닥을 드러내는 ‘한강판 모세의 기적’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잠실 수중보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두 막고 신곡수중보가 중간에 가둬진 물을 바다 쪽으로 내보내면 한강은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바닥을 드러낸 한강 위에 줄을 놓아 남사당패로 하여금 세계 최장의 줄타기 기네스 기록을 세우게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수중 생태계의 파괴를 얼마나 줄이는가가 문제다.
경부운하가 만들어지려면 잠실수중보에도 갑문을 설치하거나 배만 다니는 우회 수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기술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울-부산 40시간에 주파
안개 낀 팔당호. 주민들은 안개가 선박의 운항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강변북로는 한강을 오른쪽에 끼고 경기도 구리시를 지나 남양주시에서 6번 국도와 만나 팔당댐에 이른다. 시퍼렇게 깊은 수심과 1km가 넘는 강폭을 자랑하던 한강은 팔당댐 언저리에 다다라 수량이 급격하게 줄어 강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은 집중적으로 준설해야 한다. 과연 이 많은 모래와 자갈을 어떻게 다 파낼 것인가. 깨끗한 모래와 자갈은 골재로 판다고 해도, 거기에서 나오는 오염물질인 오니(汚泥·더러운 흙)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환경단체들은 준설을 하는 과정에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질이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준설하면 가라앉아 있던 오염물질이 흩어지면서 강 전체가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 신항만을 건설하면서 나온 오니를 모아둔 곳에 모기와 같은 해충이 넘쳐나 경남 진해 근처의 몇 개 군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부운하 전체로 보면 준설공사 구간은 총 237.5km. 거기서 나오는 오니를 다 모아놓으면 어지간한 산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 전 시장측은 “오니를 건조, 압착해 재처리하는 시설은 국내에 얼마든지 있으며 또 오니를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도 많은데 왜 오니를 산처럼 모아놓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부산 신항만이 처리를 잘못한 데서 오히려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3급수 수준이던 울산 태화강도 준설을 통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맑은 물로 되돌아왔다. 포항 형산강도 준설을 통해 은어가 돌아오는 하천으로 바뀔 만큼 준설 기술(드레인 에이징 공법)이 발전해 이제 수질을 오염시키지 않고 준설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배가 팔당댐을 넘어가려면 갑문이 필요하다. 팔당댐의 해발고도는 58m, 하지만 실제 강물과 팔당댐 안의 팔당호 물 높이 차이는 채 10m도 되지 않는다. 이는 갑문과 도크 시설만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갑문을 통과하는 데 드는 시간이다. 수자원공사는 최종보고서에서 갑문 하나를 통과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평균 45분으로 잡았다. 조령산을 뚫은 수로터널이 210m 높이에 있어 특수갑문(십 리프트 방식)을 통과하는 데 또 6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갑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현재 갑문 통과시간은 15분(미국 세인트루인스 운하는 7분)으로 줄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바지선의 속도도 1997∼98년 당시에는 시속 12km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시속 25km까지 낼 수 있다. 수자원공사의 계산대로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운하 운항시간은 전체 17개 갑문을 통과하는 데 11시간, 십 리프트 통과시간 6시간, 일반구간 운행시간 44시간을 합쳐 모두 61시간(평균 60.6시간)이 걸리지만, 이 전 시장측 안대로 계산하면 15개 갑문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4시간과 총 530km의 일반운항 시간 22시간(시속 25km)을 합쳐 26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전 시장측은 “곡선구간과 수로터널, 보를 통과하는 데 항상 최대 속도를 낼 수 없고, 중간 경유지 정박시간 등을 고려해 전체 운항시간을 여유 있게 40시간으로 잡았다”고 밝혔다.
팔당댐을 넘어서면 드넓게 펼쳐진 팔당호가 나온다.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팔당호에서 물을 받아 서해로 흘러간다. 홍수 때만 되면 양쪽 강에서 내려온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환경부와 경기도는 팔당호 준설을 시도했으나 “공사비가 1조원이나 들고, 그 효과도 미미하다”는 용역결과를 받았다. 팔당호는 그만큼 넓다.
안개와 결빙의 ‘숫자놀음’
오전 8시. 팔당호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시계(視界)가 10m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배가 다닐 수 있을까.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았다는 김종복(75)씨 부부를 만났다. 김씨는 “팔당호가 생기고(1972년) 난 후 얼마동안 건너편 남양주로 가려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개 때문에 배가 운항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매년 9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안개 끼는 날이 많지만 배가 서로 식별하지 못해 부딪칠 만큼 짙은 안개가 낀 적은 거의 없다”는 것. 그에게 팔당호가 배가 다니지 못할 만큼 얼어붙은 적이 있는지도 물었다. 바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30여 년을 지켜봤지만 언저리는 얼어도 한복판이 얼어붙은 적은 한번도 없다.”
선박운항 일수는 운하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데 결정적 변수다. 한강과 낙동강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거나 강이 꽁꽁 어는 경우, 태풍과 폭우, 폭풍 등 기상특보가 발효되는 경우에는 바지선이 운항하지 못한다. 경부운하 반대론자들은 수자원공사의 최종보고서를 인용해 “선박운항 불가능일수가 90일이나 되는 운하는 운송수단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수자원공사는 최종보고서에서 1986년부터 1995년까지 10년간의 기상청 자료를 인용해 한강이 결빙되는 기간이 1년 평균 120일, 낙동강은 93일이라고 밝혔다. 또 안개 일수는 한강이 평균 49일, 낙동강이 11일, 폭풍·호우·태풍에 의한 기상특보 발효 일수는 한강이 46일, 낙동강은 24일이라고 했다. 모두 합하면 선박운항이 불가능한 날은 한강이 215일, 낙동강은 128일이나 된다. 결빙과 안개, 기상특보가 겹치는 날을 고려하면 한강 180일, 낙동강 100일로 줄어든다. 그런데 수자원공사는 “선박의 운항이 가능할 정도의 결빙이나 안개도 있다”며 한강과 낙동강을 통틀어 선박 운항 불가능 기간을 약 90일로 봤다. 그러나 왜 90일이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신동아’는 기상청에 의뢰해 수자원공사가 조사한 기간(1985∼95년) 이후인 1996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의 기상상황을 알아봤다. 분석 결과, 연 평균 안개 일수는 한강이 35일, 낙동강이 11일, 결빙 기간은 한강이 14일, 낙동강은 1.8일, 기상특보 발효일수는 한강·낙동강 똑같이 21일이었다. 낙동강은 2000년의 18일을 제외하곤 한번도 결빙된 해가 없었다. 특히 안개, 결빙, 기상특보를 산술적으로 합쳐도 선박운항 불가능 일수는 한강 70일, 낙동강 33.8일이 나온다. 근거를 알 수 없는 계산이지만 수자원공사 방식으로 결빙과 안개, 기상특보가 겹치는 날을 빼고, 거기서 또 며칠을 빼면 실제 선박운항 불가능 일수는 20일도 채 되지 않을 듯하다.
‘연 90일 선박운항 불가능’?
연세대 토목공학과 조원철 교수는 “선박운항 불가능 일수가 90일에 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강이 결빙될 것이라는 예보가 나올 경우 전날부터 작은 모터보트로 물결을 일으키고 다니면 강은 절대 얼지 않는다. 강이 얼어 운하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은 운하 선진국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라며 어이없어 했다. 안개에 대해서도 “코앞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상황이 아니면 관계없다. 운하 폭이 좁은 곳에서는 지시등을 켜는 등 안개에 대비한 시설을 제대로 갖추면 된다”고 말했다.
같은 기상청 자료인데도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 10년간 우리나라의 기상 상태가 급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확인 결과 수자원공사는 기상청의 결빙일수 자료를 잘못 인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자원공사는 한강과 낙동강 수면 자체의 결빙일수를 조사한 게 아니라 한강 인근 지역의 각 기상대(서울·충주기상대)와 낙동강 근처의 기상대(추풍령·대구·부산 기상대) 관측 결빙일수를 차용했다.
즉 기상대 내부에 고여 있는 물의 결빙일수를 기록한 것. 더욱이 충주와 대구, 추풍령은 겨울이 춥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러나 한강과 낙동강은 흐르는 물이니만큼 설사 기상대에 고여 있는 물이 꽁꽁 언다 해도 결빙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서울측후소와 충주측후소의 연간 결빙일수는 무려 110일에서 132일에 이르렀고, 부산·대구·추풍령 측후소의 10년 평균 결빙일수는 각각 60일, 89일, 121일이었다. 반면 흐르는 물 위에서 측정한 한강과 낙동강의 실제 결빙일수는 14일과 1.8일에 불과하다.
수자원공사와 국토개발원은 운하의 경제적 타당성 검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통계를 왜 이렇듯 자의적으로 차용한 것일까. 기상청 관계자는 “한국수자원공사는 국가하천 곳곳에 관리소를 두고 있기에 굳이 기상청 자료를 이용할 필요도 없고, 더욱이 측후소 내부의 결빙현상을 흐르는 강의 결빙일수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의문을 표했다.
수자원공사의 한 직원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냐고 물었더니 “용역 연구자는 발주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 다시 용역을 맡기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정부 발주 용역의 특징은 결과를 정해놓고 한다는 것”이라며 이 직원의 말을 풀이해줬다.
팔당호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양평군 양평읍과 여주군 관내로 들어서면 조선시대 4대 나루였던 이포와 조포가 나온다. 1960년대까지 존재했던 이포와 조포의 강 양쪽으로 펼쳐지는 수려한 풍광에는 입이 절로 벌어진다. 지명 뒤에 ‘원(院)’이 들어가면 조선시대에 나라가 만든 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고 ‘포(浦)’가 들어가면 나루가 있었던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포나루’라고 하면 ‘서울역전(驛前) 앞’과 마찬가지로 틀린 표현이다.
조포는 조선시대 여주, 이천 지역의 진상미를 한양으로 올려보내는 조공나루였다. 그 지형은 선박이 머물고 가기에 딱 좋은 구조로 되어 있다. 진상미를 보관하는 조창도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나루의 이름도 조포(租浦)다. 조포는 남한강의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신륵사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여주군은 신륵사 관광 수요를 늘리기 위해 조포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라는 유람선을 매일 운행한다. 말 그대로 누런 포(黃布)를 돛에 달고 바람의 힘만으로 강을 오가던 옛날 배를 그대로 재현한 것. 석양 무렵 돛단배가 강 여울로 돌아오는 광경(연탄귀범·燕灘歸帆)은 신륵사에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신륵모종·神勒暮鍾)와 함께 ‘여주 8경’에 꼽힌다. 신륵사 주변에는 도자기 엑스포장(도예단지)도 있다.
“경부운하 관광편익 연 3322억원”
신륵사 아래 조포 인근에는 제철이 지났지만 수상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여전히 북적였다. 강변에서 식당을 하는 이송미(28)씨에게 “이곳에 운하를 만든다고 하는데 들어봤냐”고 물었더니 “듣긴 했는데 별로 반갑지가 않다”고 했다.
“운하라는 게 큰 배로 짐 옮기고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수상 레포츠를 할 수 없게 된다. 신륵사 찾는 손님만으로는 장사가 안 된다. 여기에 선착장이 생기고 황포돛배보다 훨씬 큰 유람선이 서울에서 손님을 가득 싣고 오면 또 몰라도. 선착장이 생긴다면 땅값도 많이 오를텐데….”
반면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차재경(경기도 관광협회 여주군지부 총무)씨는 “운하는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며 “조선시대 유명한 나루였던 만큼 운하가 만들어지면 이곳에는 유람선 선착장과 화물 바지선 선착장이 함께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주군에는 도자기 엑스포와 신륵사, 세종왕릉, 효종릉, 명성황후 생가 등 관광거리가 많은데, 서울에서 이곳까지 유람선이 다닌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없다. 관광단지가 한강 유람권역으로 편입되면 ‘관광 여주’의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것이다. 수상 레포츠도 바지선이 다니는 노선을 피해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걸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이천에 현대 하이닉스, 진로, 오비 공장이 있는 만큼 화물 선착장이 생기면 고용창출 등 지역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 여주 쌀도 그렇게 급하게 옮겨야 할 품목이 아니므로 배를 통해서 서울과 부산 각 지역으로 옮기면 물류비도 싸게 든다. 그리고 남한강은 심하게 오염돼 언젠가는 준설을 해야 하는데 마침 잘됐다. 큰물이 질 때마다 홍수 걱정을 많이 하는데, 그것도 해결되니 얼마나 좋은가. 다만 청계천 복원 때처럼 상인들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면 반대여론에 부딪힐 것이다.”
이명박 전 시장측은 경부운하 강변에 관광지를 조성해 대규모 민간자본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강변을 정비해 관광단지를 조성할 부지를 만들고 이에 대한 운영권을 팔거나 부지를 매각해 운하 건설비로 충당한다는 것. 이 전 시장측은 “수자원공사가 경제성을 검토하면서 관광편익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고 했다. 수자원공사의 최종보고서 어디에도 관광편익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운하의 수익성 지수(B/C 비율)를 계산하는 데도 관광편익은 변수로 들어가 있지 않다.
세종대 경제학과 배기형 교수는 “경부운하가 만들어지면 2020년에는 한 해 3322억원의 관광편익이 발생할 전망이다. 경부운하 관광유람선은 일본의 오사카 내해와 중국의 황해까지 연결되는 광역 관광유람 상품으로 개발될 수 있다”고 예측한다. 그는 또 “경부운하의 건설이 관광산업 활성화를 통해 끼치는 총생산 파급효과는 매년 1조4229억원, 총소득 파급효과는 2919억원, 총고용 파급효과는 3만5712명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충주댐 안전 위협하지 않는다”
남한강을 남동쪽으로 거슬러 상류지역인 충주시로 향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이 줄어 모래사장만 넓고, 물이 흐르는 폭은 넓지 않았다. 대규모 준설이 필요한 구간이다. 남한강 최상류를 향해 가다 도착한 곳은 충주 조정지댐과 탄금호. 충주호에서 충주댐을 거쳐 내려오는 남한강과 남한강 최상류 지류인 충주 달천, 쌍천에서 내려오는 물이 마주치는 곳이다.
충주 조정지댐은 충주호에서 내려오는 물과 달천, 쌍천의 물을 받아 남한강으로 내려 보낼 수량을 조절하는 댐으로 발전기능도 하지만 주로 저수용 댐의 기능을 맡는다. 이 때문에 댐의 높이도 충주댐(97.5m)보다 턱없이 낮다(21m). 따라서 특수 갑문을 설치하지 않고 일반 갑문만으로도 배가 통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탄금호는 얼마 전까지 조정지댐 호수로 불렸지만 낚시꾼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 탄금호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정지댐 호수 인근에 신립 장군과 팔천 의병의 얼이 새겨진 탄금대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하여 이름붙여진 탄금대에 올라서니 조정지댐과 탄금호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탄금호의 내력을 밝힌 입석에는 “양호한 수질에 그윽한 풍경, 사람에 대한 사랑, 다양한 수서생물이 함께 있는 곳으로 철새들이 철따라 도래해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고 적혀 있다. 댐이 생기기 전과 그 후 생태계의 양태는 많이 바뀌었지만 또 다른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충북이 자랑하는 자연환경 명소 중 하나다. 환경론자들이 그렇게 반대하던 댐 구역이 이렇게 변한 것은 아니러니다.
세종연구원 안에는 이곳에서 운하가 충주댐으로 향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이 전 시장측 안에는 이곳에서 달천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 조령을 향한다. 수자원공사의 운하는 달천에서 남한강의 다른 지류인 쌍천으로 물길을 갈아탄 후 속리산 국립공원 북동쪽 편에서 35.5km의 긴 인공수로(문경, 상주 방향)와 연결된다. 인공수로 중간에 5.3km의 터널을 뚫을 계획.
이명박전 시장측은 “수자원공사 안을 따르면 운하가 조령을 서쪽으로 너무 멀리 비껴감으로써 인공수로를 35.5km나 만들어야 할뿐더러 터널도 길이는 짧지만 높이가 210m까지 올라가 십 리프트와 같은 특수 갑문을 만들어야 하는 위험부담이 따른다”며 “수자원공사가 십 리프트 설치와 관련해 ‘해외기술 도입’ 운운하며 경부운하 건설의 어려움을 얘기하지만 이는 지금 우리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고, 충주댐을 지나지 않고 조정지댐을 지나면 십 리프트와 같은 특수 갑문을 만들 필요도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 전 시장측 안은 충주댐을 통과하지 않음으로써 특수 갑문 같은, 충주댐의 안전에 영향을 줄 만한 공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박 스크루가 수질오염 막아”
충주시내를 관통하는 달천(달래강)은 말이 천(川)이지 강폭이 남한강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충북 괴산군으로 들어서면서 천은 좁아지고 수량도 급격하게 준다. 해발고도가 높아지는데다 최상류 지천의 지류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 시장측은 이곳에 달천보를 만들어 수량을 확보할 계획이다. 위치는 충북 괴산군 지문리 조곡교 인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시장측은 “세종연구원이 댐 15개, 수자원공사가 댐 16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댐은 1개가 필요하거나 전혀 필요 없다. 수량 문제는 저수용 대형 보를 강 위에 만들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달천에 보를 만들고 동진천, 음성천 등 지류의 물을 받아 보를 통해 유속을 저감시키면 수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환경단체들은 경부운하 곳곳에 댐이 들어설 것을 전제로 “운하는 댐과 댐을 연결하는 거대한 호소로 변해 부영양화 현상으로 인한 수질 악화를 피할 수 없다”고 예상한다. 수자원공사도 경부운하에 대한 환경분석에서 “운하는 거대한 호소로 보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시장측은 “이 전 시장이 구상하는 보는 소형 댐의 기능을 하면서도 물을 가둬두지 않고 특수 기술을 사용해 물이 계속 흘러가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 아래에 어떤 식으로든 구멍을 뚫어 물고기가 지나갈 수 있는 어도를 만드는 한편, 물이 계속 하류로 흐르게 하겠다는 것.
이명박 전 시장측이 수질오염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는 데는 특수 준설기술말고도 다른 근거가 있다. 호소의 부영양화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속이 느려짐으로써 수중 용존산소량이 감소하기 때문. 이 전 시장측은 “바지선과 각종 유람선이 교행하면서 엄청난 용존산소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답은 바로 배 밑에 달린 스크루에 있다. 작은 어항에 산소를 일으키기 위해 소형 물레방아를 넣어두는 것처럼 거대한 선박의 스크루가 빠르게 돌아가면 여기에서 엄청난 양의 산소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달천 상류는 가을 갈수기라 물이 있는 곳의 폭이 20∼30m밖에 되지 않았지만 원래 강폭은 100m가 넘는다. 충북 괴산군 장연면에서 만난 한 주민은 “물이 많을 때는 강 언저리까지 차오른다”며 “이곳의 물이 지하수나 지천으로 흘러 나가지 않게 막으면 늘 물이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했다.
터널 공사의 핵, ‘갱도’
충북 괴산군 장연면의 방곡리 마을에 들어서면 박달산이 나온다. 이곳은 이 전 시장측이 수로터널을 계획하고 있는 장소.
박달산 인근 산에는 관개용수로 쓰이는 큰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가 수로터널에 물을 공급하는 보의 기능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박달산은 넓게 보면 월악산, 조령산, 백화산과 함께 조령으로 불리는 지역. 이 전 시장측은 박달산과 경북 문경시 마성면 모곡리 조령산 서쪽 능선 아래 해발 105m 지점을 양쪽에서 뚫어 수로터널을 낼 계획이다. 연장은 총 24km.
일부 언론 보도에는 지면에서부터 계산해 산 위 105m 지점에 터널을 뚫는 것으로 나왔지만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 시장측 안의 터널높이는 바다로부터의 높이, 즉 해발고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박달산과 조령산은 산 아래 지면이 이미 바다로부터 100m 높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터널이 뚫리는 위치는 지면과 별 차이가 없다.
경부운하 수로터널 예정지인 충북 괴산군 방곡리 박달산(위)과 경북 문경시 마성면 모곡리 조령산 서쪽 능선. 수자원공사는 이 전 시장측 안보다 더 서쪽에 있는 백화산 지역 해발 210m 높이에 5.3km 길이의 터널을 뚫는 것으로 계획했고, 세종연구원 안은 박달산에서 훨씬 동쪽에 위치한 충주호 부근 125∼140m 높이의 월악산 자락에 20.5km의 터널을 뚫기로 했다. 수자원공사가 배를 엘리베이터로 들어서 오르내리는 특수 갑문을 터널 출입구 양쪽에 설치하려고 했던 이유는 터널이 산 중턱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수자원공사는 운하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터널 공사기간이 너무 긴 것을 큰 마이너스 요소로 꼽았다. 공사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공사비도 늘어나고 채산성도 떨어지는 까닭이다. 수자원공사는 최종보고서에서 “터널을 파고 인공수로를 만드는 데 1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터널 공사의 완료시점이 곧 경부운하 총 공사의 완료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세종연구원과 수자원공사는 터널을 단선(일방통행)에다 폭 14m로 뚫기로 했지만 이 전 시장측은 쌍방향으로 터널을 뚫는데 터널 폭이 각각 20m나 된다. 터널 2개의 폭을 합치면 40m. 수자원공사의 계산으로 하면 공사기간은 30년 이상이 된다. 그러나 이 전 시장측은 “터널을 4년 안에 모두 뚫겠다. 자연하천 준설과 인공수로 부분은 각 지자체에서 동시에 공사를 시작하면 2년도 걸리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하상 준설작업과 인공수로 건설은 그 기간 안에 가능하다고 보더라도, 24km나 되는 터널을 그것도 쌍터널을 어떻게 그 기간 안에 뚫겠다는 것일까.
이 전 시장측은 그 방법으로 “터널의 옆구리로부터 공사용 임시 갱도를 3, 4군데 뚫고 들어가 터널굴착 지점을 양쪽 2곳에서 8∼10곳으로 늘리겠다”고 귀띔했다. 8∼10곳에서 터널을 뚫기 시작하면 수자원공사의 주장처럼 한 지점에서 하루 2∼4m씩만 뚫는다 해도 3, 4년 안에 공사가 끝나게 된다(토·일요일 제외). 이 전 시장측은 “일본의 신칸센 고속전철에는 55km, 알프스에는 57km의 터널이 있다. 전세계의 터널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우리 토목기술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터널굴착에 이용한 임시갱도는 터널 내 환기구와 비상탈출구로 이용할 생각이다.
수로터널에 대한 주민의 두려움
물길은 수로터널을 따라 박달산 건너편의 조령산 서쪽 능선 아래 마을인 경북 문경시 마성면 모곡리로 향한다. 이 전 시장측은 수로터널의 정확한 위치는 비밀에 부쳐왔다. 공사 민원(民怨)과 관계해 지역민의 반발이 우려되기 때문. 이 전 시장은 지난 8월의 운하 정책탐사 때도 이 두 곳을 멀리서 바라봤을 뿐이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경부운하가 건설된다면 이곳에 터널이 뚫릴 거라는 점과 이 전 시장이 이곳을 지나간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방곡리 이장 황태진씨는 “터널이 생긴다 해도 우리야 농사짓는 사람들이니 환경 영향만 없다면 바뀔 게 뭐 있겠냐”며 “다만 발파할 때 가축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황씨는 또 “농사지을 물이 수로터널에 다 들어가는 것 아닌가. 달천에 보와 인공수로를 파면 우리 논이 거기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고 털어놓았다. 수로터널의 반대편 출구 쪽인 문경시 모곡리의 한 주민도 “터널이 뚫리면 짐승들이 양쪽으로 패가 나뉘고 모곡리 마을도 둘로 갈라질 터라 걱정”이라고 했다.
환경단체들이 우려하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다. 조령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로서 여기에 터널을 뚫고 인공수로를 내면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난다는 것. 종(種)의 이동이 가로막힘으로써 먹이사슬이 변하고 그렇게 되면 전체 생물의 생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전 시장측은 친환경적 공법으로 이런 부작용을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수로터널은 월악산 국립공원과 문경새재를 되도록 피해 최대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으로 우회하고, 댐도 만들지 않으며, 수로터널 주위에 동식물 이동통로를 만들 것이다. 각종 보는 유속이 빠른 곳과 느린 곳이 함께 있도록 해서 수생어종이 한꺼번에 뒤바뀌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수질은 준설, 그리고 바지선과 유람선의 운행으로 더욱 깨끗해질 것이다. 갈대와 같은 수질정화를 위한 식물을 대거 심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많은 환경공학자가 참여해 예산이 얼마가 늘어나든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오히려 생태계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방향으로 운하를 만들 것이다.”
문경시 마성면 모곡리에서 조령산 서쪽 끝자락을 빠져나온 수로터널은 문경시 마성면사무소 앞에서 조령천과 만난다. 조령천은 주변 조령산과 주흘산 자락을 타고 굽이쳐 상주 함창 방향으로 내려간다. 갈수기라 개울보다 조금 넓은 폭으로 물이 흐르고 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이곳도 물이 넘쳐 고생이다. 문제는 굽이가 매우 심한 곳이 몇 군데 있어 이곳에서부터 경북 상주시 함창읍의 영강(낙동강 상류 지류)까지는 U자형으로 굽은 물길을 직선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조령천과 만나는 영강은 강폭 80m를 유지하고 있으나 중간에 소형 보가 너무 많고, 낡은 교각도 적지 않다. 소형 보들은 모두 철거돼야 하지만 그러면 수량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이 전 시장측은 영강의 지류인 이안천에 저수용 보나 운하용 댐을 만들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전 시장측은 지난 답사 때 이안천을 방문하고 이곳 H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이곳에는 이 전 시장이 다녀간 지 두 달 가까이 됐는데도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환영, 농민과 함께하는 새 일꾼, 이명박 서울시장님 방문 2006. 8. 18-19’
벌써부터 대선이 시작된 게 아닌가 착각하게 만든다. 이곳에는 농가가 극히 드물어 대규모 댐이 들어선다 해도 수몰될 가구는 많지 않을 듯하다.
영강은 상주시 함창읍에 이르러 경북 안동시에서 흘러온 낙동강과 예천군에서 흘러온 대성천과 합류해 큰 물길을 이룬다. 강은 여기서부터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얻어 100∼300m의 강폭을 유지하며 대구 인근까지 내려간다.
운하 생기면 교각도 바뀐다
영강에서 구미까지 낙동강에는 30년이 넘은 다리가 많다. 구 영강교, 영강철교, 강창교, 일선교, 왜관철교, 왜관교, 낙동강 대교(왜관 호국의 다리)…. 경부운하가 들어서면 이 다리들은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거나 철거될 운명이다.
경부운하를 교행하는 바지선은 일반적으로 컨테이너 화물을 2층으로 쌓아 싣고 간다. 따라서 교량의 높이(형하고)는 바지선 자체의 높이와 컨테이너의 높이를 합한 것보다 더 높아야 충돌을 피할 수 있다. 또 교각 사이의 거리(견간장)도 바지선의 폭이 11∼12m이므로 최소 14m가 넘어야 한다. 수자원공사는 한강, 달천, 쌍천, 영강, 낙동강에 있는 84개의 교량 중 형하고나 견간장이 모자라 재가설돼야 할 교량이 17개소, 아예 철거하고 새로 지어야 하는 교량이 13개소에 달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수자원공사 보고서가 나온 후 8년이 흐른 지금은 이미 재가설되거나 새로운 다리가 인근에 지어진 경우도 많고, 또 이 전 시장측 안은 쌍천 부분을 통과하지 않으므로 철거 대상 다리는 당초 예상보다 5∼6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영강에서 부산에 이르는 구간에 놓인 다리 중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을 빼고도 경남 창녕군 남지읍의 남지교와 부산의 구포교(구포다리), 구포대교, 낙동강 횡단 수관교, 낙동대교가 재가설돼야 한다. 이 중 1933년 설치 당시 한국 최대의 다리였던 구포교는 태풍 매미 때 붕괴돼 이미 철거가 결정됐고 6·25전쟁 당시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영도대교는 재가설해 보존된다.
“고가 제품도 수송 가능”
이 전 시장측은 “1980년대 이전에 지어진 작은 규모의 다리는 이 기회에 모두 크고 번듯하게 다시 짓고, 큰 다리들은 배가 운항하는 부분의 다리를 들어올린다든지, 교각의 일부분이 옆으로 돌아가게 하는 특수공법을 이용해 재설하면 된다. 교각 사이의 거리를 넓히는 것은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교각 때문에 운하를 못 만든다고 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다시 물길은 고려시대 이래 최대의 조창이 있던 곳이자, 군사 요충지였던 경북 상주시 낙동면 낙동나루 옛터를 지나 구미시 비산동 비산나루터에 들어선다. 조선시대 낙동나루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루의 옛 이름이 동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곳. 조선시대에 조창이 7개나 있었던 낙동나루는 현재 주변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수자원공사는 이 인근에 대구·경북권 북서부 화물터미널과 농수산물단지 등 물류단지를 계획했다.
경부운하가 생기면 재가설돼야 할 다리 중 하나인 달천교. 구미 비산나루터는 수자원공사가 바지선 선착장으로 계획한 41개소 중 하나다. 수자원공사는 구미시에서만 시미, 비산, 독동나루 3개소를 바지선 선착장으로 꼽았다. 선착장은 상행선과 하행선, 즉 강의 좌안과 우안에 하나씩 있어야 하는데 구미에는 국내 수출량의 20%를 점하는 구미국가공업단지가 있으므로 3개씩 있는 게 무리가 아니다.
구미에 바지선 선착장이 들어서면 구미의 수출물량은 6∼7시간이면 부산에 도착한다. 물류비가 제품 단가의 15%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운임이 철도나 고속도로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운하를 이용할 경우 수출품의 경쟁력은 그만큼 높아진다. 하지만 수자원공사는 최종보고서의 결론부분에서 “경부운하는 고가의 화물이 아니라 벌크, 시멘트, 석탄 등 1차 자원을 이송하는 데 적합하므로 경부축 물동량의 3.3%만 수송 가능해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시장측은 발끈한다.
“수자원공사는 유럽을 보고 그런 설명을 하는데, 유럽 최대의 운하인 RMD 운하(라인-마인-도나우강 운하) 주변에는 1차 광물을 생산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고가품이나 깨지기 쉬운 화물이 운하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게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가장 안정적인 교통수단이 운하인 만큼 반도체와 같은 고가의 물품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연세대 조원철 교수도 “사회간접자본은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하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러저러한 전제를 달아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석연찮은 골재 판매 추정액
‘이명박 운하’는 그가 ‘경부운하의 최대 수혜지’라고 말한 대구시로 입성한다. 이 전 시장은 보트를 타고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교 아래를 다니며 시민들에게 운하의 필요성과 운하가 만들어지면 대구시가 어떻게 바뀔지를 설명했다. 달성군은 이 전 시장과 한나라당 대선 경선을 치를 박근혜 전 대표의 지역구이자 텃밭이다.
화원읍 사문진은 예부터 관광지로 유명했다. 현재 사문진교 인근의 화원 유원지는 조선시대 사문진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지금은 강변 둔치 축구장으로 변해버린 곳에는 버드나무 숲과 꽃밭(그래서 ‘花園’이다)이 있었고, 여인네들은 뱃놀이로 삶의 회한을 달랬다.
화원읍 성산3리 이장 권택란씨는 “내가 시집온 1960년대만 해도 사문진에 배를 띄워놓고 노는 사람, 백사장에서 모래찜질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임하댐과 안동댐이 만들어진 후에는 수량이 줄어 배가 다니지 못하게 되면서 관광객이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전 시장이 다녀간 후 사문진 인근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선착장이 들어설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문진은 그 한자이름(沙門津)에서 알 수 있듯 모래사장이 한없이 펼쳐진 곳으로, 몇 년마다 한번씩 골재채취를 둘러싸고 공무원과 업자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곤 했다. 그만큼 골재가 풍부하다. 그런데 수자원공사는 최종보고서에서 경부운하 공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한강과 낙동강 유역 전체의 골재채취 가능량을 1307만㎥, 골재 판매수익을 784억2000만원으로 추산했다. 당시 예상한 총공사비(8조6700억원)의 1%도 안 되는 규모다.
그런데 이는 보고서가 나오기 9년 전인 1989년 수자원공사에서 발표한 남한강 유역의 골재개발 가능량 4억2380만㎥보다 턱없이 적은 수치다. 9년 사이에 하천 매장 골재량이 97% 이상 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당시 한국자원연구소가 통상산업부의 의뢰를 받아 조사한 낙동강 유역의 골재 개발 가능량은 5억7326㎥에 이른다. 한강 지역을 제외하고 남한강과 낙동강 유역만 합쳐도 골재개발 가능량은 9억9706만㎥나 된다. 세종연구소는 당시 한국자원연구소와 1989년 수자원공사가 추산한 골재 개발 가능량을 합해 골재 판매비용을 7조8160억원으로 잡았다. 여기에 부지 판매비용 9140억원을 보태면 8조7300억원에 이른다.
세종연구원이 골재와 부지판매 비용만으로도 경부운하가 흑자 공사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예상한 총공사비는 8조6700억원으로 골재와 부지 판매비용보다 600억원이 적다. 이 전 시장측은 “지난 10년 동안 판매용 골재채취가 계속됐지만 토사의 유입으로 그만큼의 골재가 새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옳다. 10년간 골재 가격이 30% 정도 상승했으므로 지금은 골재 판매비용만으로도 10조원 이상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으며, 이는 총공사비의 60∼70%를 충당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대에 부푼 대구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낙동강 인근의 사문진. 모래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 전 시장측은 “운하 공사에서 채취한 골재는 산림 훼손의 주원인인 석산골재(산을 깎아 나온 바위를 잘게 부숴 만든 쇄석골재)와 육상골재를 대체해 환경보존 효과를 가져다준다”며 “바다골재를 대체함으로써 구조물의 안전성도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운하가 생기면 대구시는 임해(臨海) 도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경부운하가 만들어지면 부산과 뱃길로 4∼5시간에 연결되는데다 경부운하 인근에 성서공단과 논공공단 등 각종 공단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수자원공사는 최종보고서에서 대구시 달서구 갈산동에 바지선 선착장을 만들고 인근 하천 부지에 ‘대구경북권 남부 물류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곳은 수출입 화물의 화물터미널 기능과 함께 집배송 단지, 농수산물 집하장 구실을 하게끔 되어 있다. 갈산동은 대구지역 최대의 공단지역인 성서공단과 맞닿아 있다.
더욱이 운하가 들어서면 그동안 물류비 부담 문제로 무산된 위천공단과 구지공단 계획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대구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지 못하면 낙동강만으로라도 운하를 만들자”는 주장이 시장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나온다. 2002년에는 시청에 ‘낙동강 프로젝트팀’이라는 운하 관련 부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구시는 운하가 만들어지면 낙동강 상류에서 깨끗한 물을 도수로로 끌어와 부산에 공급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대구와 부산·경남지역간 해묵은 수질오염 분쟁이 단번에 해소되기 때문이다. 대구시는 낙동강 수질오염 문제로 위천국가공단 사업을 포기한 바 있다. 부산·경남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먹는 수돗물의 취수원인 낙동강 하류지역 물을 오염시키는 주체가 대구지역의 공단이라고 지목한다.
이 전 시장이 대구지역 낙동강을 방문한 이후 화원읍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갈산동에는 물류단지가 각각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 지역 주민들은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를 것”이라며 신이 나 있다. 실제 화원읍은 아파트와 논공단지가 함께 있는 도농복합형 도시이기 때문에 이곳에 유람선 선착장이 생기면 아파트 값이 폭등하고 갈산동 인근의 공단 용지 가격도 뛰어오를 게 뻔하다. 이 전 시장이 대통령이 되면 임기 안에 운하를 완성할 것이라는 기대는 이런 전망에 구체성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측은 “운하 계획을 발표함과 동시에 운하특별법을 제정해 투기우려 지역에 대한 용도제한 조치와 투기지역 지정이 이뤄질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뛰어 원주민들이 혜택을 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곳에 투기를 한 외지인들은 오히려 재산권 행사에 지장을 받고 ‘쪽박’을 차게 될 것”이라고 못박았다.
옛 물길의 추억
낙동강 물줄기는 대구시 달성군과 경북 고령군의 자연경계를 이루며 경남 합천군, 의령군을 넘나들다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 닿는다. 경북 고령군 우곡면 봉산리에서 만난 최주석(82) 옹은 기자가 운하 이야기를 꺼내자 자신의 청장년 시절 애환이 담긴 동네 나루터로 안내하겠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나루에는 지금도 나룻배 한 척이 동아줄에 묶여 있었다.
“요즘도 손님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건너가는데…. 이제 우곡대교가 완공되면 저것도 없어지겠지. 여기가 그 유명한 봉산포라네. 1960년대 초반까지도 부산 구포에서 짐을 실어 올라오다 칠서 남지나루에서 쉬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서 쉬어 갔어. 예전에는 술도가가 즐비했다네. 이쁜 가시나(여자)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
하지만 그곳에는 갈대만 무성할 뿐 사람이 오간 흔적이 없다. 최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큰한 소주 냄새를 뒤로하고 길을 재촉했다.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선 남지나루가 유명했다. 이곳은 낙동강에서 남강이 갈라지는 곳으로 강 북서편은 경남 의령군이고 건너편은 경남 함안군이다. 남강은 의령군과 함안군의 경계를 이루며 흘러내려가다 진주시로 들어간다.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안고 뛰어든 강, ‘진주 난봉가’에 나오는 바로 그 강이다. 3개 군이 맞닿은 낙동강과 남강의 접점에 남지나루가 있었고, 의령군·함안군 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고 창녕군 남지읍으로 강을 건너와 남지시장을 이용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3개 군이 걸쳐 있는 지역이라 해서 ‘걸음강 나루’라 부른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낙동강 하구언댐에 있는 갑문과 도크시설을 가리키고 있다. 남지읍 남지리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김창수(64) 이장은 뱃사공이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려줬다.
“이 전 시장이 정책탐사를 와서 우리 마을회관에 묵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곳은 예부터 부산 구포에서 올라가는 물자가 쉬어가는 곳이었다. 주로 곡식을 옮겼는데 당시(1950∼60년대)에는 돛을 올리면 바람이 좋을 때는 동력선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내려오는 길은 더 신났고. 아버지와 고령, 왜관, 안동까지 들어간 적도 있다. 여기엔 남지시장이 있어 배에서 내린 곡식과 물자는 바로 팔려 나가거나 물물교환이 이뤄졌다. 의령, 함안 사람들도 다 이리로 오고 해서 늘 시끌벅적했다. 아무튼 이곳에 운하가 들어서면 엄청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사실 수자원공사는 남지읍이 아니라 낙동강의 우안, 즉 남지읍과 남강이 만나는 대각선 맞은편 의령군 성산리에 성산 선착장을 계획했었다.
계산에서 빠진 홍수방지 편익
김 이장과 대화를 시작하자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당목 아래 평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겐 이 전 시장의 방문과 숙박이 오래도록 화제가 되고 있었다. “여기에 운하가 들어서면 무엇이 좋습니까”하고 묻자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운하가 생기면 왔다지. 제일 큰 게 홍수를 막는 거지. 여긴 큰물이 질 때마다 홍수가 나거든. 물이 일정하게 들어차면 배 다니는 데도 좋겠지만 일단은 홍수를 막는 게 급선무지.”
그랬다. 한강과 낙동강의 축을 따라 국토를 종단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점에도 강 주변 사람들은 예외없이 ‘홍수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건교부가 낙동강 유역에서 수해 상습지로 지정한 곳은 232곳이나 된다. 그런데 운하의 큰 기능 중 하나도 홍수 방지 기능이다. 운하 주변의 보나 댐이 큰 홍수 때는 물을 가두어두는 기능을 하기 때문. 하지만 수자원공사는 경부운하 최종보고서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에서 홍수방지 편익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이에 비해 세종연구원은 경부운하 건설로 인한 홍수조절 편익을 2011년 중 매년 2781억원으로 추정했다.
김 이장은 신이 난 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운하가 생기면 경남 함안의 칠서 지방공단과 우리 남지읍의 논공공단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운하로 다 옮길 수 있다. 배로 옮기면 그만큼 비용이 싸진다. 또 운하를 건설하면서 창녕군의 숙원사업인 남지대교를 만들면 함안, 의령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오갈 것이다. 사실 따지고 들면 나루터가 없어지고 수로가 막힌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루터가 없어진 뒤로 남지시장 경기도 영 재미가 없고, 지역경제도 다 죽었다. 이 근처는 경치도 끝내주는데….”
마을 사람들은 운하가 만들어지면 수로가 열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살길이 새로 열리기나 하는 것처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운하가 생길 경우 입게 될지도 모를 손해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 남지에서 시작해 밀양, 부산 구포까지는 강변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특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다. 운하가 생기면 물이 많아지고, 그러면 안개가 발생하는 날이 많아 일조량이 감소한다. 일조시간의 감소는 광합성을 둔화시켜 농작물의 생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을숙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낙동강은 남지나루를 뒤로하고 조선 4대 나루 중 하나인 경남 밀양시 삼량진으로 향한다. 삼량진은 조선시대 군창과 조창이 함께 있던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조선시대 고속도로이자 과거길인 영남대로의 대규모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도 남지나루와 다름없이 홍수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어지간한 큰비는 그럭저럭 넘겼지만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매미 때는 제방이 무너져 이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제방도, 배수 펌프장도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홍수 앞에는 백약이 무효였다.
이곳은 해발고도가 10m도 되지 않아 댐도 만들기 힘들다. 보를 많이 만들어 저수 용량을 확대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운하가 확실한 대안이 되는 셈. 이 전 시장은 이곳에서도 시민 강연회를 통해 운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큰 호응을 받았다. 수자원공사가 삼량진 선착장을 계획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오성규 환경정의 사무처장 인터뷰 “친환경적 개발이란 없다”
경부운하의 대표적 반대론자인 오성규 환경정의 사무처장을 만나 왜 경부운하가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들었다. 오 처장은 “총체적 관점에서 경부운하는 타당성이 전혀 없는 공사”라고 주장한다. ▼ 경부운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1998년에 수자원공사는 경부운하의 수익성 지수가 0.12(30년간 사용시)에 그친다고 전망했다. 100원을 투자하면 12원의 이익이 남는다는 뜻이다. 그후 8년의 세월 동안 경부축에 경부선 외에 3개의 고속도로가 신설됐다.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따르면 경부축에는 앞으로 5개의 고속도로가 더 생기게 된다. 경부운하를 통해 옮길 물량이 없다. KTX도 새로 생겼다. 고속도로 건설에 철도 건설비용의 3배가 들어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경부운하를 만들 사회적 필요와 수요가 없다. 경부운하는 반드시 인프라의 공급과잉 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 우리나라의 지형이 내륙운하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내륙 주운이 많은 나라들은 대부분 바다를 접하지 않은 국가다. 반도국가에서는 내륙 주운보다 바다를 이용해야 한다. 인천, 평택, 광양, 군산, 신항, 부산항, 포항항 등 그 많은 항구를 놔두고 왜 내륙운하를 새로 만드는가. 낙동강은 표고가 낮고 하상계수가 높아 운하를 만들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안개와 결빙일수도 문제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선박항해 불가능일수가 90일이나 된다.” ▼ 경부운하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경부운하는 두 개의 다른 하천을 인위적으로 합치는 것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동강에는 세계 유일의 동강할미꽃이 있다. 동강댐이 들어서면 이런 꽃은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본류인 남한강과 낙동강을 합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배제하는 게 옳다. 경부운하로 새로운 생태계가 생기면 또 거기에 적응하면 된다는 논리는 ‘우리의 DNA가 바뀌면 거기에 적응해 살면 된다’는 논리와 같다. 백두대간을 두 동강 내는데 어떻게 생태계가 교란되지 않겠는가.” ▼ 이 전 시장측은 “물이 흐르는 보를 만들면 수질오염 걱정이 없다”고 말한다. “보도 댐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아무리 물이 흐르는 보라 하더라도 부영양화는 피할 수 없다. 낙동강은 표고차가 낮아 유속이 느리다. 하상 준설을 해 골재를 채취해 버리면 하천의 자연정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준설할 때 수질도 오염된다. 하천을 정화하는 준설기술이 있다고 하는데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오니가 호소를 오염시키는 것은 강 오염원 중 30%밖에 안 된다. 바지선에서 새는 기름도 문제다. 파나마 운하가 적조현상 때문에 문을 닫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이 전 시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전 시장의 경부운하가 진정성이라도 확보하려면 우선 국토개발계획에 잡힌 고속도로 건설계획부터 백지화하고, 항만을 추가로 건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경부운하가 우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수질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시대 부산 쪽 최대 나루였던 구포를 지나면 강폭만 수km에 이르는 낙동강 하구언에 도착한다. 경부운하의 끝 지점이자 철새들의 천국 을숙도로 잘 알려진 곳이다. 남해와 낙동강 사이에 있는 낙동강 하구언댐은 엄청난 위용으로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하구언댐이 들어서기 전엔 이곳도 작은 나루터에 불과했다. 홍수 때나 밀물 때는 바닷물이 올라와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 되던 곳이다. 이곳에는 강과 바다의 수위 차가 커 배가 댐을 통과할 수 있도록 갑문과 도크가 설치돼 있다.
강의 수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보나 댐을 배가 어떻게 통과하는지, 낮은 수위에 있던 배가 어떻게 높은 수위의 물로 이동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알고 싶다면 이곳에 와보라. 그 광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하구언댐의 가장 우측을 보면 갑문과 도크가 설치돼 있다. 강에서 바다로 나가려는 배는 우선 도크 안에 들어와 유선전화를 통해 댐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한다. 그러면 강쪽 갑문 일부가 서서히 열리면서 바닷물이 도크 안으로 들어와 수위가 맞춰지고 배는 바다쪽 갑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면 나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일부 환경생태학자들은 운하가 만들어지면 수위의 상승으로 을숙도가 물에 잠길 염려가 있고, 그렇게 되면 철새 도래지가 파괴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낙동강 하구언댐의 운영을 맡고 있는 수자원공사 부산권 관리단 김지찬 운영과장은 “을숙도가 잠기면 낙동강 하구언댐도 물에 잠기는데 말이 안 되는 억측”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그 어떤 운하가 들어서도 을숙도가 잠기는 일은 절대 없다. 만일 그런 경우가 생기면 부산지역도 모두 물에 잠긴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서면 인터뷰 “운하는 스스로 그 가치를 창출한다”
▼ 경부운하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적지 않다. “청계천을 복원할 때도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환경이 파괴되고 먼지대란, 교통대란, 소음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복원 1년이 지난 지금 청계천은 친환경적인 곳으로 변화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운하는 한반도의 국운(國運)을 크게 융성시키는 역사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단지 누가 어떻게 구상하느냐, 어떤 지도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확실하게 추진할 것이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 호남과 북한에도 운하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모든 운하구간을 동시에 착공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물동량이 제일 많고 공사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서울-부산 경부라인을 1차적으로 착공하는 것이 순서다.” ▼ 수자원공사의 용역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수자원공사와 같은 전제로 분석을 하면 결과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새로운 구상과 공법을 과거 보고서와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정부는 물류 하나만을 가지고 계산했지만, 운하는 단순히 물류만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 창출과 관광, 레저, 치수(治水), 수자원 확보 등 종합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운하의 경제적 가치는 훨씬 커질 것이고, 공사비보다 큰 효용이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적 타당성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인프라는 가치를 스스로 창조한다.” ▼ 생태계 교란과 운하의 수질악화 우려는 어떻게 보나. “터널은 산을 절개하는 것보다 환경훼손이 훨씬 적다. 어떤 공사든 환경에 불가피하게 변화를 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최대한 친환경적 방식으로 공사를 해야 한다. 우리의 운하는 오랜 역사를 두고 자연이 만들어낸 하천 수로를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최소화한 터널마저 생태계 교란 행위라고 비난한다면 고속도로 하난들 제대로 건설할 수 있겠는가. 수질은 하도정비를 통해 더욱 개선할 수 있다. 자연을 방치하는 것만이 자연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할 때다. 환경을 개선하고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는 개발도 있다.” ▼ 1997년 당시 YS가 경부운하 논의를 고의적으로 방해했다고 들었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이 얽혀 있었고 운하 역시 그런 정치적 논리에 따라 정책적 타당성이 제대로 검토되지 못했다. 1997년 당시 경부운하추진위원회에 자진 참여한 의원이 60여 명에 달했다. 세월이 좀더 흐르면 당시 일들이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 국가 기간시설 공사에는 항상 민원이 뒤따르는 법인데. “국가하천을 이용하기 때문에 토지수용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따라서 민원도 그 만큼 줄어든다. 오히려 내륙지역은 운하로 인해 경기가 살아나고 워터프런트 조성 등 새로운 도시계획을 통해 항구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원 소지보다는 기대가 더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 공개, 2006년판 보고서
경부운하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경제적 타당성 여부다. 크든 작든 환경에 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 꼭 운하를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또 운하는 교통 혼잡의 해소차원이 아닌 교통수단 과잉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게 운하 반대론자들의 시각이다. 환경단체 사람들을 만나도 환경적 측면보다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사업을 왜 하려 하느냐는 얘기를 먼저 한다. 그 근거는 대개 수자원공사가 1998년 내놓은 경부운하 최종보고서이다. 그들은 “운하를 만들면 자기 몸집을 더 불릴 수 있는 수자원공사가 용역연구 결과를 불리하게 낼 리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더 신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자원공사의 용역보고서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적 입김의 작용, 틀린 계산과 각종 변수의 제거 등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왜곡돼 있다. 이와 관련해 세종연구원은 최근 경부운하의 경제적 타당성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새롭게 내놓았다. 10년 만에 업그레이드판 연구서가 나온 것이다. 연구원측은 전문 공개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연구원으로 참가한 각 분야 교수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기로 한다. 우선 경부운하의 필요성 부분이다.
“2003년 중 국내 물류비는 90조3450억원이며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대로 선진국의 1.5배에 달한다. 교통혼잡 비용도 22조8000억원으로 GDP에서 3.16%를 차지해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가 중 도로연장은 29위, 자동차당 도로연장은 28위를 기록함으로써 교통관련 인프라 수준은 27위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때문에 도로 중심의 수송망 구축은 한계가 있으므로 경부운하와 같은 새로운 수송망이 필요하다.”
다음은 경부운하의 수송비, 교통혼잡비용 절감효과와 국민경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분석 내용이다.
“경부운하 개통 초기인 2011년의 수송비 절감액은 1289억원이지만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의 운하 흡수율이 증가하면서 2020년에는 4496억원으로 증가한다. 2400t급 바지선 1대가 150∼180개의 컨테이너를 운반한다는 전제하에 2011년 중에는 교통혼잡 비용이 1318억원 감소하고, 물동량과 운하 흡수율의 증가로 그 감소액은 2020년 중 3663억원에 달한다. 경부운하의 건설은 직간접 영향을 받는 지역의 제조업 생산규모를 연간 3조4000억원 정도 추가 증대시키는 효과를 낼 것이며, 이로 인해 3만7696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그와 별도로 경부운하 건설 사업비 지출은 각 산업의 고용증대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 규모는 24만3200명에 이를 것이다.”
심판대에 선 운하의 미래
세종연구원이 이러한 편익과 비용을 고려해 도출한 경부운하의 비용 대 편익비율, 즉 수익성 지수는 1.0을 상회하는 1.1453으로 나왔다. 수자원공사의 경부운하 50년 사용 수익성 지수 0.24보다 5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세종연구원측은 “총공사비가 10년 전보다 3배가량 늘어난 23조원에 이르는 까닭에 당시(5.44)보다 수익성 지수가 크게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 전 시장측의 경부운하 총공사비 예상액이 약 17조원인 점을 감안하면 수익성 지수는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아무튼 세종연구원의 2006년 보고서의 결론은 “경부운하는 경제적으로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사업”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참가한 세종대 배기형 교수는 “찬성론자, 반대론자가 모두 참여하는 제3의 기관이 경부운하의 타당성을 사심 없이 새롭게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경부운하는 사라진 ‘과거의 길’로 사장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물류혁명과 관광한국을 이끌 ‘미래의 길’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운하의 미래는 2007년 대통령선거와 함께 또다시 심판대에 올랐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서면 인터뷰 “운하는 스스로 그 가치를 창출한다”
▼ 경부운하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적지 않다. “청계천을 복원할 때도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환경이 파괴되고 먼지대란, 교통대란, 소음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복원 1년이 지난 지금 청계천은 친환경적인 곳으로 변화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운하는 한반도의 국운(國運)을 크게 융성시키는 역사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단지 누가 어떻게 구상하느냐, 어떤 지도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확실하게 추진할 것이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 호남과 북한에도 운하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모든 운하구간을 동시에 착공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물동량이 제일 많고 공사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서울-부산 경부라인을 1차적으로 착공하는 것이 순서다.” ▼ 수자원공사의 용역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수자원공사와 같은 전제로 분석을 하면 결과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새로운 구상과 공법을 과거 보고서와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정부는 물류 하나만을 가지고 계산했지만, 운하는 단순히 물류만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 창출과 관광, 레저, 치수(治水), 수자원 확보 등 종합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운하의 경제적 가치는 훨씬 커질 것이고, 공사비보다 큰 효용이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적 타당성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인프라는 가치를 스스로 창조한다.” ▼ 생태계 교란과 운하의 수질악화 우려는 어떻게 보나. “터널은 산을 절개하는 것보다 환경훼손이 훨씬 적다. 어떤 공사든 환경에 불가피하게 변화를 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최대한 친환경적 방식으로 공사를 해야 한다. 우리의 운하는 오랜 역사를 두고 자연이 만들어낸 하천 수로를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최소화한 터널마저 생태계 교란 행위라고 비난한다면 고속도로 하난들 제대로 건설할 수 있겠는가. 수질은 하도정비를 통해 더욱 개선할 수 있다. 자연을 방치하는 것만이 자연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할 때다. 환경을 개선하고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는 개발도 있다.” ▼ 1997년 당시 YS가 경부운하 논의를 고의적으로 방해했다고 들었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이 얽혀 있었고 운하 역시 그런 정치적 논리에 따라 정책적 타당성이 제대로 검토되지 못했다. 1997년 당시 경부운하추진위원회에 자진 참여한 의원이 60여 명에 달했다. 세월이 좀더 흐르면 당시 일들이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 국가 기간시설 공사에는 항상 민원이 뒤따르는 법인데. “국가하천을 이용하기 때문에 토지수용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따라서 민원도 그 만큼 줄어든다. 오히려 내륙지역은 운하로 인해 경기가 살아나고 워터프런트 조성 등 새로운 도시계획을 통해 항구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원 소지보다는 기대가 더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 공개, 2006년판 보고서
경부운하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경제적 타당성 여부다. 크든 작든 환경에 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 꼭 운하를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또 운하는 교통 혼잡의 해소차원이 아닌 교통수단 과잉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게 운하 반대론자들의 시각이다. 환경단체 사람들을 만나도 환경적 측면보다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사업을 왜 하려 하느냐는 얘기를 먼저 한다. 그 근거는 대개 수자원공사가 1998년 내놓은 경부운하 최종보고서이다. 그들은 “운하를 만들면 자기 몸집을 더 불릴 수 있는 수자원공사가 용역연구 결과를 불리하게 낼 리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더 신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자원공사의 용역보고서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적 입김의 작용, 틀린 계산과 각종 변수의 제거 등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왜곡돼 있다. 이와 관련해 세종연구원은 최근 경부운하의 경제적 타당성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새롭게 내놓았다. 10년 만에 업그레이드판 연구서가 나온 것이다. 연구원측은 전문 공개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연구원으로 참가한 각 분야 교수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기로 한다. 우선 경부운하의 필요성 부분이다.
“2003년 중 국내 물류비는 90조3450억원이며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대로 선진국의 1.5배에 달한다. 교통혼잡 비용도 22조8000억원으로 GDP에서 3.16%를 차지해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가 중 도로연장은 29위, 자동차당 도로연장은 28위를 기록함으로써 교통관련 인프라 수준은 27위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때문에 도로 중심의 수송망 구축은 한계가 있으므로 경부운하와 같은 새로운 수송망이 필요하다.”
다음은 경부운하의 수송비, 교통혼잡비용 절감효과와 국민경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분석 내용이다.
“경부운하 개통 초기인 2011년의 수송비 절감액은 1289억원이지만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의 운하 흡수율이 증가하면서 2020년에는 4496억원으로 증가한다. 2400t급 바지선 1대가 150∼180개의 컨테이너를 운반한다는 전제하에 2011년 중에는 교통혼잡 비용이 1318억원 감소하고, 물동량과 운하 흡수율의 증가로 그 감소액은 2020년 중 3663억원에 달한다. 경부운하의 건설은 직간접 영향을 받는 지역의 제조업 생산규모를 연간 3조4000억원 정도 추가 증대시키는 효과를 낼 것이며, 이로 인해 3만7696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그와 별도로 경부운하 건설 사업비 지출은 각 산업의 고용증대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 규모는 24만3200명에 이를 것이다.”
심판대에 선 운하의 미래
세종연구원이 이러한 편익과 비용을 고려해 도출한 경부운하의 비용 대 편익비율, 즉 수익성 지수는 1.0을 상회하는 1.1453으로 나왔다. 수자원공사의 경부운하 50년 사용 수익성 지수 0.24보다 5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세종연구원측은 “총공사비가 10년 전보다 3배가량 늘어난 23조원에 이르는 까닭에 당시(5.44)보다 수익성 지수가 크게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 전 시장측의 경부운하 총공사비 예상액이 약 17조원인 점을 감안하면 수익성 지수는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아무튼 세종연구원의 2006년 보고서의 결론은 “경부운하는 경제적으로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사업”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참가한 세종대 배기형 교수는 “찬성론자, 반대론자가 모두 참여하는 제3의 기관이 경부운하의 타당성을 사심 없이 새롭게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경부운하는 사라진 ‘과거의 길’로 사장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물류혁명과 관광한국을 이끌 ‘미래의 길’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운하의 미래는 2007년 대통령선거와 함께 또다시 심판대에 올랐다.
박근혜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부터” ‘3단계 평화통일론’ 발표…이명박 ‘3·3통일론’과 유사
성연철 기자 황준범 기자 » 박근혜 VS 이명박 통일론 비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을 뼈대로 한 ‘3단계 평화통일론’을 내놨다. 두달여 전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같은 자리에서 획기적인 북한 경제회생을 핵심으로 한 ‘엠비 독트린’을 발표한 바 있어, 경제가 한나라당 두 유력 주자의 통일론에 주요 화두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정치적 통일에 성급하게 매달린다면 혼란을 초래하고 통일 비용만 커질 뿐”이라며 “경제적 통일을 통해 한반도 민족공동체를 만들어가면 정치통일의 날은 저절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라며 3단계 평화통일론을 제시했다.
3단계 평화통일론은 북한 핵무기의 완전 제거와 군사적 대립구조 해소를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는 1단계,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로 경제통일을 이루는 2단계, 정치·영토적 통일을 이루는 3단계로 이뤄져있다. 신동철 공보특보는 “3단계 통일 경제론은 체제 탓에 아무 것도 못하는 현 상황을 경제공동체 건설로 차근차근 풀어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표는 △핵무기 완전 폐기 △당근과 채찍을 병용한 협상 △국제 사회와의 공조라는 북핵 협상의 3원칙도 제시하면서 “북핵 폐기 전에는 개성공단 사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지난 2월6일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북한이 핵 포기와 개방을 선택하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년 안에 3천달러가 되도록 국제사회와 함께 적극 돕겠다”며 통일의 경제적 접근을 강조했다. 이 전 시장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북한이 3천달러는 돼야 비로소 통일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는 ‘3·3 통일론’을 주장했다. 이 전 시장의 정책 공약 마련을 돕는 한 측근은 “1인당 국민소득이 3천달러는 돼야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양문수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는 “해결에 어려움이 많고 민감한 정치나 이념보다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쉽고 현실적인 경제 쪽에서 통일을 접근하자는 데 자연스레
두 번의 기소 경력, 최근 출판기념회 때문에 또 구설수…다른 후보 진영도 몸조심하기 바빠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선거법과 질긴 악연이 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두 번이나 기소돼 법정에 섰다. 이 전 시장은 1996년 ‘4·11 총선’ 당시 선거 비용 초과 지출 등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고, 재판 진행 중에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2002년 서울시장에 출마해서는 자신이 쓴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라는 제목의 책을 무료로 배포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으나, 직접적으로 관련됐다는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를 받았다.
△ 3월13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출판기념회에 무려 2만 명이 운집했다. 중앙선관위는 사전 선거운동을 했는지 여부를 조사 중이다.(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이명박쪽 “캠프와 아무 관계 없다”
이 전 시장에게 선거법 위반 경력은 지워진 과거형이 아니다. 2002년 기소될 당시 검찰은 공소장에 “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됐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 기소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붙였다. 과거가 당시 그의 현재를 ‘구속’한 것이다.
96년 사건은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 최근엔 그의 전 비서관인 김유찬씨가 그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냈다. 김씨는 이 전 시장 쪽이 거짓 증언을 하도록 시켰고(위증 교사), 자신을 해외로 도피시켰다(범인 도피)고 폭로했다. 위증 교사 부분은 당사자 간 다툼이 있으며 여전히 논란 중이다. 김유찬씨는 추가로 당시 이 전 시장 쪽이 “기자들한테 성접대를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전 시장은 최근 다시 한 번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3월30일 열린우리당 선병렬 당무부총장(의원)은 최고위원회의에서 “3월13일 고양시 킨텍스(KINTEX)에서 열린 이명박 전 시장의 출판기념회와 관련해 대전에서 동원된 버스에서 기부 행위와 사전 선거운동이 있었다고 하는 녹취록이 확보됐다고 해서, 중앙선관위가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회의가 끝나자 서영교 열린우리당 부대변인은 논평을 내, 이 전 시장의 과거를 다시 한 번 긁었다. “선거법 위반 범죄, 국회의원직 박탈, 증인 도피, 위증 교사, 살해 협박, 거기에 당선을 위해 성접대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는데, 이젠 출판기념회 사전 선거운동에 기부행위도 제기되고 있다.” 논평은 확실한 물증을 바탕으로 나온 건 아니다. 일단 의혹의 불씨를 살려두고, 40%가 넘는 지지율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이 전 시장의 이미지를 타격을 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열린우리당은 당 사무부총장을 단장으로 하는 가칭 ‘불법 선거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중앙선관위는 이 전 시장의 출판기념회를 조사하고 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출판기념회 식장에선 불법 사례가 없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버스가 60~70대 왔는데, 그것에 대한 불법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는 “우리가 알기로는 캠프가 관여하지 않았다. 지역별로 경쟁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거 아닌가 싶다. (조사가) 더 이상 윗선으로 가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로 봤을 때, 조사 결과가 어떻든지 이 전 시장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시장의 ‘대리인’인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출판기념회의 모든 걸 선관위와 상의하면서 했다. 선관위에서 100명 이상의 현장 지도 인력이 와서 감독했다. 다만, 대전에서 올라온 일부 인사들한테서 지구당 위원장(당원협의회장)이 돈을 다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부 불법 사례를 시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캠프와는 상관없다. 우리가 신신당부했는데…. 우리로선 방법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선관위의 조사를 좀더 지켜봐야 한다.
5년전보다 훨씬 조심하는 분위기
사실 이 전 시장으로선 출판기념회를 통해 손해를 본 게 더 크다. 3월14일 김형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불법 사전 선거운동 의혹을 제기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출판기념회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것과 관련해 “어제 출판기념회를 평하자면 세몰이, 줄 세우기, 구시대 인물 내세우기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는 이제 정치권 무대에서 퇴출돼야 할 3가지를 다시 확인시켜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불법 의혹 제기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전 시장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 유기준 한나라당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대선 주자 흠집 내는 정치 공세를 즉각 중단하라”고 했지만 옹색했다.
다른 어떤 대선 예비 주자들보다 이 전 시장은 선거법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과거 경력 때문이기도 하고 ‘부자 몸조심’ 때문이기도 하다. 정두언 의원은 “유달리 많이 의식하게 된다. 선거법 위반 전력도 있고, 또 선거법 위반 첫 후보가 되면 안 좋을 거 같아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판기념회는 이 전 시장 또는 그의 대선 캠프와의 직접적 관련성 여부를 떠나, 대선 주자와 관련된 첫 선거법 위반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
△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월21일 팬클럽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창립행사에 참석했다. 선거법상 팬클럽의 활동을 좀더 풀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정치권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선거법은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이다. 역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뽑는 데 선거법 위반이 문제가 돼서 당선이 취소된 적은 없다. 하지만 모든 예비 후보들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불법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는 이미지가 대선 경주에 도움이 될 리 없는 탓이다. 물론 결정적인 흠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중앙선관위 공명선거지원단의 김대년 지원운영과장은 요즘 하루 15건 정도의 선거법 관련 문의를 받는다. 예비 후보들이 차린 캠프, 팬클럽, 정당, 시민단체 등에서 수시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온다. 지난해 10월15일 여의도에 꾸려진 공명선거지원단은 1월1일 6명에서 10명으로 인원 수도 늘렸다. 이곳에서 하루에 처리하는 선거법 문의 건수는 70여 건에 달한다. 김대년 과장은 “5년 전과 비교하면 선거법을 지키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입후보 예정자들이 일일이 물어보고 선관위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안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다른 캠프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전 시장 캠프는 선관위의 지도에 따라 실제로 강연 등을 몇 차례 취소하기도 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3월25일 ‘평화경제포럼’ 서울 지역 출범식에서 축사를 했다. 그가 나타나자 팬클럽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300~400명이 티셔츠를 맞춰 입고 나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선관위에서 나온 현장지도원은 그 자리에서 사회자를 통해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현행 선거법상 동일한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예비 후보자의 이름을 외치거나 플래카드를 거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정 전 의장 캠프에서 일하는 장형철씨는 “캠프 안에 선거법 위반 여부와 관련해 자문을 해주는 변호사가 한 명 있다”고 말했다. 정 전 의장 캠프는 후보자의 일정을 매일 선관위에 보내고,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 중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는 것들은 관리자를 통해 자진 삭제하고 있다. 이 전 시장 쪽도 법률가를 통해 수시로 선거법 위반 자문을 받는다.
17대 대선 관련 위반 건수 28건
하지만 적지 않은 선거법 위반 사례가 적발되고 있다. <한겨레21>이 중앙선관위에 의뢰해서 받은 지난해부터 3월27일 현재까지의 ‘17대 대선 (선거법) 위반 행위 조치 내역’ 건수를 보면 모두 28건에 이른다. 고발 3건, 수사 의뢰 10건, 경고 15건이다. 경기 화성시에 사는 김아무개씨는 지난 1월 특정 후보자에게 불리한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해 전국의 교회와 사찰 등 종교지도자 2만 명에게 우편을 발송한 혐의로 선관위에 의해 고발 조치됐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산악회 등 단체를 통한 사전 선거운동을 하다 적발된 경우도 4건에 달한다. 선관위는 특정 후보를 선전하기 위해 ‘파워 코리아 클린 제주’를 결성해, 후보자의 초청 강연시 회원이 아닌 일반 선거구민 200여 명을 초청해 강연을 듣게 한 이 단체에 폐쇄 명령을 내렸다.
선관위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있다. 가장 최근엔 ‘대선 관련 출판기념회 및 각종 서적 광고 등 운용 기준’을 상세히 제시했다. 대선 관련 팬클럽, 포럼 등 각종 단체·모임 등이 사조직화할 경우 엄중 조치하겠다는 방침도 내놨다. 물론 선관위가 틀어막는 것만은 아니다. 논란이 됐던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이용한 선거운동과 언론과의 대담은 상시 허용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선거법이 여전히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예비 후보자들은 4월23일부터 등록이 가능하다. 하지만 각 당의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후보자로 등록하면 이 때부터 후원회를 꾸릴 수 있는 것과 달리 예비 후보 단계에선 ‘돈줄’이 막혀 있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아닌 경우, 더구나 호주머니가 빈 예비 후보자의 경우 불리한 조건에 놓일 수밖에 없다. 팬클럽의 오프라인 활동도 좀더 풀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장형철씨는 “돈은 묶고 입은 푼다는 게 현행 선거법의 기본적인 방향이라고 할 때, 자발적·자율적 선거를 할 수 있는 국민적 역량이 커가는 만큼 팬클럽 활동 등은 최대한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지난해 12월 △예비 후보자의 선거운동 확대 △정책 대결 활성화를 위한 대선 후보자 정책공약집 배부 △대통령 선거 입후보 예정자 후원금 모금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은 자율의 폭은 넓히되 책임은 강하게 묻는 것이다.
월간조선 4월호 [독점 인터뷰] 李明博 모든 X파일에 답하다 7% 성장, 4만 달러 소득 달성, G7 진입 위해 국민운동 「대한민국 747」 전개하겠다. 『앞으로 더 당하겠지만 문제 없다』
[출생 의혹]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사실을 숨긴 적 없다. 1995년 발간한 자서전에 그 사실을 밝혔다』, 『明博이란 이름은 어머니가 태몽에 달이 너무 밝아서 지은 이름이다』
[병역 의혹] 『나는 기관지 확장증 등으로 면제됐고 기록도 있다. 내 아들들이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하지만 아들은 하나이고, 전방부대에서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다스」 實 소유주說] 『큰형님이 회사를 설립할 당시 주변에 약간의 도움을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와는 전혀 관계없다』
[봄 위기說] 『소송 중인 재미교포 김경준을 하루빨리 한국으로 송환해서 재판한다면 나로서는 더욱 좋다. 나는 그에게서 돈만 돌려받으면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에리카 김 관계] 『재미교포 에리카 김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은 음해다. 남편이 있는 그녀는 성공한 재미교포 2세로 한국에 知人들이 많다』
[숨겨 놓은 아들] 『자신 있다면 구체적으로 몇 살이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누구인지를 밝혀라. 사실이 아니니까 못 밝히는 것 아닌가』
李明博 1941년 경북 포항 출생. 고려大 경영학과 졸업. 현대건설·인천제철·한국도시개발·현대엔지니어링 사장, 현대건설·현대엔진 회장,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국회의원, 6·3동지회장, 서울시장 역임. 저서 「신화는 없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등.
金演光 月刊朝鮮 편집장〈yeonkwang@chosun.com〉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李明博의 작심 토로 鄭寅鳳(정인봉) 변호사의 이른바 「이명박 X파일」 폭로, 비서관을 지낸 김유찬씨의 위증교사 및 살해 협박 의혹 폭로 등 검증공방과 관련 직접적 대응을 자제해 왔던 李明博(이명박) 前 서울시장이 자신에 대해 제기된 각종 의혹들을 직접 해명했다. 李 前 시장은 지난 3월12일 오전, 그의 大選 캠프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月刊朝鮮과 인터뷰를 갖고 재산형성 과정, 자신과 아들의 병역 문제, 어머니의 일본人 의혹 등 각종 의혹에 대해 답변했다. 시중에 떠돌고 있는 在美 여성 변호사 에리카 김과의 염문說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답변했다. 검증공방이 이루어진 이후 언론매체와는 첫 공식 인터뷰다. 각종 의혹에 대해 『음해성 루머』라고 강력하게 부정하는 李시장의 모습은 작심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검증공세가 두 달 가까이 이어져 오면서 「요즘 1대 9로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죠. 『앞으로 좀더 당하겠지(웃음)』 ―검증공방을 거치면서, 大選에 괜히 나와서 李 前 시장께서 지금까지 쌓아올린 「현대의 신화」, 「근대화의 신화」에 먹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는 안 했습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저는 국민의 의식이 정치인의 의식보다 더 미래지향적이고 더 앞서가고 있다고 봐요. 검증공방이라는 게 과거 지향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오히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느낌을 받나 보죠. 『현장을 다니면서 많이 느끼죠. 저는 기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고 또 거기에서 성과를 이루었던 사람입니다. 검증하는 과정이 길어지면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단단해지고 검증과정에서 상처가 회복 가능하다고 봐요』 ―제기된 의혹 가운데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사실을 李시장이 숨겨 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숨긴 적이 없어요. 제가 쓴 자전적 에세이집인 「신화는 없다」에 그 사실을 밝혔어요. 1995년 1월에 나온 책이에요. 일제시대 때 부모님이 일본에서 사셨기 때문에 거기서 태어난 것은 당연한 거죠. 아버지는 일본에서 남의 집 목장에서 牧夫(목부)로 계셨어요. 광복 후 온 가족이 귀국하다가 대마도 앞에서 배가 침몰해 가족이 목숨은 건졌지만 그나마 얼마 되지 않던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된 사실까지 적어 놨어요』 ―왜 그런 의혹이 제기됐을까요. 『인터넷에서 그 소문이 퍼졌어요. 제가 스스로 밝혔는데도 그 사실을 제가 비밀에 부쳤다는 식으로 허위 폭로한 거죠.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연락이 왔기에 사실을 설명했는데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어요. 저는 지금 나올 것은 다 나오는 게 오히려 좋다고 봅니다』 李시장은 일본 혈통? ―「어머니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李시장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나왔는데요. 李明博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일본식으로 지은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일본여자고 아버지는 조총련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더군요. 저를 음해하려는 아주 저질적 음모라고 봐요. 우리 어머니가 생모인지 아닌지는 근거를 찾으려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인터넷을 보니까 제 이름이 明治維新(명치유신)의 「명」 자, 伊藤博文(이등박문)의 「박」 자로 이명박이 됐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제 이름은 어머니 태몽에 보름달이 너무 밝아서 밝을 明(명), 넓을 博(박)을 써서 이름이 붙여진 거예요』 ―아드님의 병역기피 의혹도 나오는데. 『우리 아들이 멀쩡히 전방부대에서 사병으로 軍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는데도 군대를 안 갔다고 해요.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해도 계속 의혹이 있는 것처럼 생산해 내요. 한국정치의 저질 폭로를 통한 네거티브 공격의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봐요. 의혹을 제기했다가 「아니면 말고」식으로 갑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른바 汎여권의 후보는 빨라도 10월 말이나 11월 초쯤 정해질 전망입니다.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하더라도 여권 후보가 정해질 때까지 링 위에서 상대도 없이 혼자 매를 맞는 상황이 올 텐데 걱정되지 않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저는 검증 자체에 대해 걱정되는 것은 없습니다. 늘 돌아다니던 이야기에 뭐가 보태지는 식인데 그건 완전 음해성이기 때문에 그때마다 바로 밝혀질 수 있는 거다 이거죠』 ―소설가 김진명씨가 그의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에서 등장인물 가운데 일본인의 입을 빌려 「한국 사람들이 지금 가장 치를 떠는 게 부동산 문제인데 땅부자가 대통령 선호도 1위라는 것은 非이성적 선택」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李시장을 겨냥한 비판으로 보이는데 국민의 정서를 반영하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부동산 등 재산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부동산 사본 적 없다』 『재산 문제에 관한 한 서울시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을 통해서 충분히 검증됐다고 봐요. 저는 깨끗한 재산이 많은 사람은 존경받아야 하고, 적은 재산이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벌었다면 그것은 지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업의 CEO로 있으면서 정당하게 세금을 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한 것도 아니고 당시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제공한 그 재산 외에는 없어요. 저 스스로 부동산을 사본 일도 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은 모두 회사에서 일한 것에 대한 代價와 관련돼 나온 것밖에 없거든요. 제가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 나오는 거라고 봐요.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제 재산형성 과정을 제대로 알고 썼으면 오히려 감동적으로 들었을 거예요. 그 소설가가 재산형성과 관련된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단 1분의 노력도 안 했을 거예요』 ―35세에 대기업 사장이 되고 기업인으로서 富(부)를 쌓았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고 일반인들보다 많은 재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격당하는 게 서운하다는 뜻인가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전부 합쳐도 현재 유수의 국내 대기업 CEO 1년 연봉보다 적어요. 지금 CEO를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하죠. 제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최장수 CEO가 아닙니까. 제 재산 형성과정에 당시 관련했던 사람들이 다 살아 있어요. 제가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했다면 그분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재산형성 과정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당당해요. 제기된 의혹을 보니까 강남에서 부동산을 사고팔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에서 부동산 투기를 전문으로 한 사람이 서울시장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현대건설의 개발계획이 있는 곳에 미리 땅을 사서 큰돈을 벌었다」는 요지의 부동산 투기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이야기죠. 저는 기업에 있을 때, 鄭周永(정주영) 회장과 협의해서 회사의 장기 개발계획에 관련된 부근에 땅을 가졌던 모든 회사 간부들에게 그 땅을 전부 회사에 내놓도록 지시했습니다. 본인들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회사가 회수했어요. 제가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랬던 사람이 그렇게 투기를 했겠어요?』 ―「사고팔고를 안 했다」고 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부동산을 갖고 있었습니까. 『1972년에 구입한 조그마한 땅은 35년이 넘었고, 다른 것도 보유한 지 20년, 30년 넘는 재산이에요. 그 후에는 취득한 재산이 없어요. 당시에는 가격이 얼마 되지 않았던 게 지금은 높아져서 재산이 늘어난 것이지 제가 어디에 투자해서 만든 재산이 아니잖아요. 제가 부동산 투기를 했으면 재산은 엄청나게 늘어났겠죠. 투기를 하려면 사고팔아야지 지금까지 그 재산을 뭐 하러 갖고 있었겠어요. 저는 사고 팔 시간도 없었어요』 ―「李시장의 큰형(상은)과 처남(김재정)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인 (주)다스(DAS·舊대부기공)의 실제 소유주가 李시장이다」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1987년 다스 설립 당시 李시장은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었습니다. 다스가 현대자동차 협력업체로 선정되는 데 힘을 쓸 수 있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그 당시 저는 정치하려는 생각이 없던 때예요. 그때는 자동차 부품 국산화 정책이 추진될 때여서 회사가 권해 간부들 여럿이 그런 회사를 만들기도 했어요. 鄭周永 회장과 정세영 회장이 다 합의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때 제가 형님이 하는 공장을 현대건설이 못 짓게 했어요. 쓸데없는 오해받을까 봐서요. 鄭周永 회장이 그 소리를 듣고 「돈 받고 하는 건데 왜 못해 주느냐」고 하셔서 현대건설이 건물을 지어 준 겁니다. 제가 위장해서 운영하는 회사라면, 鄭周永 회장이 「왜 공장을 현대가 안 짓느냐, 형인데 어떻겠느냐, 돈 받고 지어 주는데 왜 안 지어 주느냐」, 심지어 「실비로 지어 주라」고까지 이야기했겠어요? 그리고 제가 실질적 소유주라면 뭐하러 복잡하게 형님 명의라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최고의 검증은 「재벌 총수의 검증」 현대건설 신입사원 수련회에 참석한 鄭周永과 李明博.
―鄭周永 회장이 李시장의 형님이 실소유주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검증 가운데 최고의 검증이 무엇인지 아세요. 재벌 총수의 검증이 최고의 검증이에요. 재벌회사의 전문경영인에 대한 검증제도는 정부나 감사원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요. 만약 삼성그룹의 CEO가 위장으로 자기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면 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LG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다스의 실소유자라고 하는 소리는 大기업의 메커니즘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다스가 제 소유라면 그룹 오너가 어떻게 해서 그걸 지어 주라고 했겠어요. 서초동에 있는 집은 현대건설이 지은 건데 원래 그곳이 공한지였어요. 공한지면 세금이 나와요. 鄭회장한테 「땅 도로 가져가고 대신 돈으로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집을 짓게 된 거예요. 집을 다 지어 갈 때 제가 회사를 그만둔 거예요. 그래서 그 옆에 있는 땅을 변호사협회에 팔아서 공사대금을 나중에 갚은 거예요. 회사를 그만뒀는데 외상으로 할 수 없잖아요. 제가 부동산 투기를 했으면 회사가 집을 지어 줬겠어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이해 못 해요. 저로서는 너무 상식적이기 때문에 변명을 안 하는 거예요』 ―1996년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했을 때 다스 소속 사람들이 와서 선거운동을 지원한 사실이, 李시장이 실소유주라는 방증으로 인용됩니다. 『우리 선거운동원 중 한 사람이 다스 소속이었죠. 동생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는데 형님이 그 정도도 안 도와주나요. 선거운동원 하나 안 보내 주면 형하고 저하고 원수졌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어요. 그걸 위법·불법이라고 하면 鄭周永 회장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지원활동 벌인 그 형제들과 자식들을 처벌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정치공세지만 금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에리카 김과의 만남 1989년 소련 방문시 레닌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李明搏 당시 현대건설 회장,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 안충승 현대중공업 부사장(오른쪽부터).
이른바 「이명박 X 파일」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에리카 김과 김경준이라는 인물이다. 에리카 김은 재미교포 변호사이고, 김경준은 그녀의 남동생이다. 李시장은 에리카 김이 1995년 서울에서 열었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미국 방문길에 교포의 소개로 한두 번 만나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1999년에 영국령인 버진아일랜드에 BBK라는 투자자문회사가 설립되는데, 그 회사 한국지사장이 김경준씨였다. 李시장은 2000년 2월 김경준씨와 공동으로 각각 30억원씩을 투자해 「LKeBank」라는 회사를 설립, 공동대표를 맡았다. 다스도 190억원을 투자했다. 2001년 3월 금감원 조사에서 김경준씨가 LKeBank에 투자한 30억원은 BBK의 회사자금으로 드러났고, 金씨는 이 외에도 각종 서류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이 밝혀진 직후 李시장은 공동대표직을 사임했다. 金씨는 BBK의 상호를 「옵셔널벤처스」로 바꾼 후 회사자금 384억원을 빼돌린 뒤 위조여권으로 출국했다. 김경준씨는 미국 검찰에 체포돼 한국 송환 판결을 받은 상태다. 李시장과 다스 측은 미국에서 金씨를 상대로 각각 30억원과 140억원의 피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李시장은 김경준씨와 LKeBank의 공동대표를 했습니다. 30억원을 개인적으로 투자했고, 李시장의 처남이 대주주로 있는 다스는 190억원을 투자했습니다. 김경준씨에게 피해를 당하고 투자금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에서 진행 중인 걸로 압니다. 에리카 김이라는 여성과 그의 동생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그때 보니까 삼성·현대 등 많은 기업들이 그 회사에 돈을 맡겼더라구요. 그 당시 1, 2위 회사와 거래했으니까 믿었죠. 제가 알기로는, 에리카 김이라는 여성 변호사는 이전부터 한국사회 여러 지도층 인사들을 많이 아는 사람이에요. 엊그제 김덕룡 의원을 만났더니 에리카 김을 저보다 먼저 알았다고 하더군요. 자기가 에리카 김에 대해 더 많이 안다면서 말이죠. 에리카 김은 교포사회에서 성공한 2세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출판기념회도 했고요. 제가 가서 보니까 김덕룡 의원 등 국회의원들이 많이 왔더군요. 에리카 김 남편도 테이프 커팅하는 데 같이 있더라고요』 에리카 김 부모의 요청 ―에리카 김의 동생과는 어떻게 사업을 함께 했습니까. 『에리카 김의 부모님이 교회의 장로이고 권사였어요. 한국에 오셨을 때 저를 찾아왔어요. 「우리 아이들을 어렵게 공부시켰다.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까 한국에 진출하는 데 좀 도와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부모님들이 믿을 만하고, 에리카 김도 한국사회에서 알려졌으니까 그 동생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 후에 동생이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한다고 찾아왔어요. 저는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지만, 그가 전문가이기도 하고 그의 부모님의 당부도 있고 해서 투자했어요. 그때 제가 놀고 있던 때라 뭐라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취소가 된 거죠』 ―김경준씨와 왜 결별하게 된 겁니까. 『그 당시 회사가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는다고 해서 제가 「금융감독원에서 조사해 지적받을 정도면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해서 헤어진 거죠. 헤어지면 당연히 금전관계를 청산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돈을 안 돌려 줘요. 국내에 있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까 미국에 가서 구속이 되었더라고요. 또 다른 건으로 고발이 되었던 모양이죠. 그 사실을 알고 제가 고소한 거죠』 김경준 한국 송환과 3월 위기說 ―市中(시중)에는 김경준씨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면 李시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봄 위기說」이 나돌았습니다. 金씨의 변호인이 법정에서 『BBK는 이명박 시장의 회사다』라고 주장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빨리 오면 더 좋죠. 국내에서 재판하면 진실이 더 빨리 밝혀질 것 아닙니까. 정치적으로 누가 뭐라고 이야기해도 먹힐 수 없어요. 투자했는데 청산을 안 하고 도망을 갔고, 그래서 제가 손해를 봐서 고발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더 이상 뭐가 있겠어요. BBK는 제가 투자하기 전부터 그 친구(김경준)가 운영하던 회사예요.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요. 2002년에 「시사저널」에 그 기사가 나간 적이 있는데 언론중재위에서 「이명박 시장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어요. 저는 그 친구가 미국 법정에서 그런 주장을 해도 미국은 법이 공정하니까 있는 사실 그대로 판결이 나올 거라고 봐요』 ―李시장과 에리카 김이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덕룡 의원이 그 이야기를 듣고 웃더라고요. 金의원이 에리카 김을 잘 아는지 사실은 나도 몰랐었어요. 에리카 김은 남편이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까지 음해하는 것을 보니까 참 한심해요』 ―김경준씨와의 소송은 계속할 겁니까. 『그렇죠』 ―「大選 출마와 상관없이 소송을 그대로 진행하겠다」는 말씀이시죠. 『법은 법대로 하는 거죠. 송환돼 오면 한국에서 하는 것이고. 그가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저는 그것으로 끝이고, 손해 본 것을 찾으면 되는 거예요. 그 손해 본 돈을 찾으면 좋은 일에 쓰려고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이제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막바지에 온 것 같아요』 김유찬의 폭로와 「이명박 리포트」 ―김유찬씨의 「이명박 리포트」를 읽어 봤는데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상의 특별한 내용은 없더군요. 그래도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다」 하는 자책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유찬씨 이야기 중 『이명박씨 아래서 일했던 사람이 다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심정은 어떻습니까. 『그 친구의 말일 뿐이죠. 그 친구가 제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은, 본인이 직접 편지를 보냈어요. 자기는 서울大를 나와 정보장교를 했고, 평소 존경하는 이명박씨를 돕고 싶다는 장문의 편지를 사무국장에게 보냈어요. 그때 우리는 사람이 모자랐으니까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것 없이 다 모아야 할 형편이었어요. 왜냐하면 이종찬씨가 사람을 다 데려갔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쓰게 된 거예요. 국회 보좌관을 겸임하고 있던 사무국장이 「서울大까지 나온 사람을 소속도 없이 월급도 주지 않는 자원봉사자로만 쓸 수 없다」며 자기 밑에 6급인가 7급인가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임시로 거기에 소속을 두게 했어요. 그 친구는 국회에서 일한 것은 아니고 선거 현장에서 일했어요. 선거 끝나자마자 이종찬씨를 찾아가더군요』 ―그렇다면 왜 김유찬씨와 鄭寅鳳 변호사가 종로 선거관련 폭로를 할 때 반박하지 않았습니까. 『그 친구는 제가 직접 뽑은 것이 아니고 제 밑에서 정식으로 일해 본 경험도 없어요. 이번에 김유찬 문제가 나왔을 때 제가 일언반구도 안 했어요. 「이명박의 국회 비서관으로 있었다」고 하니까, 국민들은 국회에서 비서관으로 오래 데리고 쓴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변명같이 보이잖아요. 그냥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번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김유찬이 「이명박 시장의 대리인」이라고 하면서 돌아다녔다는 사실입니다. 저로서는 큰일 날 뻔한 거죠. 실무 과장 선에서 자격여부를 따져서 김유찬씨에게 상암동 DMC 사업권을 안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큰 실수를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암동 사업권을 주고 일하게 했더라면 큰일 날 뻔한 거죠』 『김유찬과 한 시간도 마주 앉은 적 없다』 ―김유찬씨가 쓴 「이명박 리포트」의 원고를 읽다 보니 김유찬씨가 李시장의 비서관을 지낸 이광철씨를 「인격이 훌륭한 분」이라고 극찬했던데, 그분은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나중에 안 이야기인데, 이광철 비서관이 「김유찬이 살기 힘드니까 배신은 했지만 좀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고 사무국장에게 권유했다고 해요. 다른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해주는데 이광철씨가 그 친구를 불쌍하게 여겼던 거죠. 그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거든요. 참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미국에 이민 간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선교 계통의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김유찬씨가 당초 의혹을 제기할 때는 「李시장 쪽에서 해외로 도피하라고 돈을 줬다」고 했는데 「이명박 리포트」에는 자기가 선거자금 관련 폭로를 하고 나니까 미안해서 「이광철 비서관을 찾아가 외국에 나가겠다고 했다」고 썼더군요. 『나중에 알았어요. 그래서 이광철 비서관을 나무랐죠.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할 텐데 왜 그렇게 했느냐」고. 그 후로 李비서관이 면목이 없으니까 저한테는 말을 못 하고 사무국장한테 이야기해서 김유찬씨를 도와준 것 같아요』 ―김유찬씨가 「영등포 구청장에 출마할 때 선거 비용은 李시장 진영에서 사실상 끌어다 쓴 것」이라고 썼더군요 『저는 그 친구와 단 한 시간도 마주 앉아서 이야기해 본 경험이 없어요. 선거 때 보니까 여자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연설을 하는데 말을 참 잘하더군요』 ―열린당 민병두 의원이 지난해 12월 『1주일에 한 건씩 李시장 검증을 하겠다』고 하더니 수개월째 조용하네요. 『한 건 했잖아요. 박정희 선글라스(웃음)』 ―열린당은 최근 『앞으로 李시장의 부동산 문제 검증에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여당이 너무 무책임하게 하는 것은 보기 안 좋네요. 왜 여당이 한나라당까지 관여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웃음). 민병두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한번 해본 소리겠죠』 ―검증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식적인 증거를 내놓는 것도 아니고 폭로성으로 일관하니까 그렇죠. 정인봉씨의 폭로를 봐요. 폭로한다고 서류 들고 왔는데 신문기사였잖아요. 사실 명예훼손인데 그렇게 폭로해 놓고 이제 와서 사과했어요. 저는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잠시라도 국민에게 의심을 준 일인데 얼마나 무책임해요. 폭로 서류라는 게 신문 카피를 떠서 그것도 네 부를 떠서 두껍게 해서 들고 다닌다는 게 사실 좀 황당하지 않아요? 황당한 것까지 일일이 이야기할 수 없어 그 후에 제가 입을 다물고 있었죠. 지난 번 국회에서 정책 포럼할 때 우리 당원들에게는 이야기를 했죠. 「아무튼 당원들 마음을 걱정스럽게 만든 것에 대해서 제가 참 미안하다」고 말이죠』 ―鄭東泳(정동영) 前 열린당 의장이 『이명박 시장은 사장 돈 벌어 주기 위해서 일한 사람이지 공익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아니다』고 공격했습니다. 비즈니스 섹터의 사람이 퍼블릭 섹터에서 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문제제기인데. 『자기가 장관하면서 盧武鉉 대통령만을 위해서 일했나요? 盧武鉉씨 밑에서 일했지만 국민을 위해 일한 거 아니에요? 제가 鄭周永 회장을 부자 만들려고 밤 잠 안 자고 일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 논리가 여러 가지 네거티브를 만들어 내는 거죠. 그래서 우리 정치권이 발전을 못 하는 거예요.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고 경쟁을 해야 하거든요. 제가 大운하를 하겠다고 하면, 자기도 뭘 하겠다고 해야지, 자기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은 곤란하죠』 ―이른바 검증공방, 난무하는 의혹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 각 부문의 자율성, 자체 정화능력 이런 것들을 너무 무시하는 태도가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말은 검증이라고 하지만 너무 음해성·폭로성이라서 유치하기 때문에 제가 대응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혹시 너무 대응 안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는 하죠』 『이명박은 한방에 날린다』는 주장들 ―검증공방이 벌어지면서 李시장의 지지율이 약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은 느끼시죠. 『그게 아니더라도 3% 정도는 아래 위로 움직일 거라고 봤죠. 47%에서 43%식으로 말이죠. 2~3%는 움직이더라고요』 ―검증공세 와중에 李시장 측에서 강하게 대응을 안 하니까 일반 국민들은 「뭔가 숨기는 게 있으니까 저렇지」 하는 생각이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검증 논란에 직접 대응해서 「아니다」고 하는 게 좋은 것인가, 그냥 놔둬서 「그렇게 떠들고 시끄럽던 게 알고 보니 아니다」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 게 좋은지는 생각의 차이일 거예요』 ―여권은 물론 경쟁자인 朴槿惠 의원쪽에서 『이명박은 네거티브 한방이면 간다』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李시장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는 방법을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어요. 이번에는 당내에서 검증 문제가 나왔잖아요. 예를 들면 박근혜 대표께서 「검증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제가 김유찬·정인봉 문제가 朴 前 대표하고 관련 있는 것처럼 공격을 해보세요. 제가 나서면 朴 前 대표와 바로 대응을 하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사실 저는 朴 前 대표를 의식해서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어요. 김유찬이가 떠드는데, 거기에 대해 대응을 하면 朴 前 대표와 바로 대응되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여론조사 지지율 1위 후보로서의 자신감입니까. 『아무튼 제가 앞서가는 사람으로서 당이 화합해 같이 가자는 입장이니까, 맞대결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합니다』 ―김유찬 사건을 보면 李시장 입장에서 「대응 안 한 게 잘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일이 대응을 했다면 그 사건이 한두 달은 끌었을 테니까요. 『김유찬씨 폭로 얘기를 듣고 정말 황당했습니다. 김유찬씨의 폭로를 뒤에서 기획한 사람이 있다면, 김유찬씨가 얼마 후에 그 사람을 또 폭로하지 않을까요』 『부동산 임대 소득의 세금 제대로 냈다』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의 세금은 정확히 내십니까. 『세금 안 냈으면 서울시장 4년을 어떻게 했겠어요. 서울시장 재직 때 저에 대해 투서하고 모략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무슨 부탁을 했다가 안 들어 주면 여당에 투서하고. 한번은 어떤 잡지사에서 제가 큰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취재를 한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어요. 문제가 있다면 제가 서울시장을 무사히 마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국민 정서상 재산이 많다는 게 약점으로 작용할 텐데. 『국민들은 부를 어떻게 쌓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으로 봅니다. 저는 기업에 있을 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던 사람이에요. 제가 부자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아마 같은 1년을 벌어도 저는 그 사람이 10년을 번 것과 같을 거예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지금 무슨 돌아다니는 소문을 가지고 검증한다고 해서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 세상에 숨긴다고 숨겨지나요? 月刊朝鮮에 나왔지만, 숨겨진 아들이 LA에 있다는 말도 있었잖았아요(웃음)』 ―아직 숨겨진 아들은 안 나타났습니까. 『있어야 나타나지(웃음).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 있게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고, 나이는 얼마고, 무얼 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죠. 사실이 아니니까 못 밝히잖아요』 『리더에 따라 경제상황 달라진다』 화제는 李明博 시장이 자신 있는 경제문제로 옮겨졌다. 검증공방 관련 이야기 때처럼 그의 답변은 거침없었다. ―최근 李健熙(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우리나라가 5~6년 후에는 아주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면서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경제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李회장은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삼성까지도 5~6년 후에 어려워질 거라고 했는데요. 『삼성이 5~6년 후에 위기를 맞는다는 얘기는 정권에 대한 경고일 겁니다. 왜냐, 삼성조차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하면 다른 데는 어떻게 되겠어요? 말할 게 없잖아요? 경고성으로 발언했다고 보는데, 상당히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고 봅니다』 ―盧武鉉 정부에서도 4% 정도의 경제성장은 이룩했지 않습니까. 『지난 4년간 盧武鉉 정권에서 4% 정도의 경제성장을 한 것은 우리 내부의 경제성장 동력이 있어서 된 게 아니고, 세계경제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세계경제가 전례없이 좋으니까 수출산업이 잘된 것이죠. 우리의 성장은 수출에 의지해서 이룩된 겁니다. 반면 내수시장은 침체돼서 체감 경제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기업들은 앞으로 5~6년 내에 세계경제가 지난 4~5년 만큼 좋지 않을 것으로 보는 거죠. 게다가 환율이 굉장히 위험 수준에 다가왔단 말이에요. 우리가 수출경기에 의해 경기가 유지되었는데, 수출산업마저 어려워지고 환율 문제 때문에 수익이 떨어진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거예요』 ―수출산업에서의 수익률 저하가 우리 경제를 급속도로 위축시킬 것이라고 보십니까. 『물론이죠. 첨단 산업이라고 하는 것은 기술개발과 再투자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옛날 제조업은 이익이 10% 이하로 발생해도 돼요. 5% 이하까지도 괜찮은데 첨단과학기술 분야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계속 투자를 해야 되고, 시설투자를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익률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이죠. 일반 제조업하고는 달라요. 그러니까 위기감을 안 느낄 수 없는 거죠. 삼성그룹은 첨단업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해서 다른 데 보다 앞서가야 하고, 앞서간다는 것은 더 많은 연구투자비를 써야 된다는 거 아니에요? 거기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李회장이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표현을 했다고 봅니다』 ―닥쳐올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죠. 새로운 시작은 어디서 오느냐, 분위기 개선이 굉장히 중요한데 분위기 개선은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기업의 CEO가 누구냐에 따라 기업 분위기가 달라지죠. 학교 총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학교 분위기도 달라지는 거죠. 분위기의 개선이 없으면 우리 경제는 굉장히 어려워져요』 ―투자가 너무 위축되고, 기업인의 사기가 꺾인 게 경기 침체의 가장 큰 원인이겠죠. 『투자라고 하는 것은 우선 과학적으로 생각해서 되는 투자도 있지만, 투자 환경, 분위기에 많이 좌우되잖아요.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해외에서 이뤄졌습니다. 국내의 투자를 보면 투자율이 연 1%거든요. 사상 유례없는 투자 불황이에요. 과거 우리 투자율이 15~17%에서 지금은 1%가 돼 버렸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2000~2005년간 인건비는 50% 올랐어요. 일본은 불과 1%밖에 안 올랐어요』 ―우리 기업의 임금이 그렇게 많이 올랐습니까. 『주로 大기업이 주도한 것이죠. 투자는 1% 늘어났는데, 임금은 150%가 되었단 말이에요.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이것을 극복하고 살 길은 高성장은 아니더라도 中성장, 적어도 5~7% 정도의 성장은 유지해야 하죠. 그 정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우리 경제가 와 있단 말이에요. 회사가 위기를 만나면 꼭 CEO를 바꿉니다. 똑같은 원리로 나라가 위기를 극복하려면 국가의 CEO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 제 말은 정치적 논리가 아니고 경제적 논리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7% 성장이 가능하려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한 복안으로 향후 10년간 7% 성장을 지속해서 4만 달러 시대를 열고, 7大 강국에 진입하겠다는 국민운동 「대한민국 747」을 제안하셨는데, 7% 수준의 성장론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봅니까. 『이론이 많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7% 한다고 하면, 그 7%는 달성 못 할 목표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할 수도 있고요. 「7%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이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현재의 우리 경제 패러다임으로는 맥시멈 5% 성장은 할 수 있어요. 7% 성장을 위해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데, 결국은 투자 확대거든요. 세계화하고 개방하면서 국내외 투자가 있어야 해요. 그걸 하기 위해서는 노사문화의 개선과 기초질서의 확립이 필요해요. 기초질서가 확립되고 법질서가 확립되는 것만으로도 1% 성장을 할 수 있어요. 나머지 1%는 리더의 몫입니다』 ―법질서 확립도 리더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면, 결국 리더의 역할에 따라 2%의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말씀이군요. 『패러다임을 바꾸고 어떻게 경제를 이끌어 가느냐가 중요하죠.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경제성장률 1~2%는 달려 있어요. 5~6% 성장까지는 제도 개선 등을 통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요. 현재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으려는 마인드를 바꿔서 적어도 4~5%까지는 투자를 해야 해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하죠. 「현재로서는 7%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사람의 주장이 맞아요. 그냥 노력하면 5%까지 할 수 있지만 제도를 고치고 하면 6%까지 성장할 수 있어요. 그래도 목표는 7% 성장으로 잡아야죠. 우리가 함께 하면 할 수 있어요. 근대화하면서 「우리 한번 잘살아 보자」고 뭉쳤잖아요. 한번 뭉치면 7% 성장, 나아가 8% 성장도 이룩할 수 있어요. 그렇게 국민을 뭉치게 하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죠』 李明博 시장에게 現代는 운명이다. 현대는 李시장에게 「이명박 신화 탄생」의 터전을 제공했고, 李시장은 故(고) 鄭周永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李시장은 인터뷰에서 현대그룹 재직 시절 鄭회장과 얽혀 있던 인간관계에 대해 담담하게 술회했다. 현대와 鄭周永 그리고 李明博 1980년대 초반 현대건설 사장 시절 鄭周永 회장과 경영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李明博 前 시장.
―현대에서 CEO를 몇 년 하신 겁니까. 『제가 입사 5년 만에 이사가 됐어요. 결국 제 회사 생활의 거의 전부가 CEO였죠. 사실상 부사장·전무 때 벌써 CEO를 했으니까, 20년 가까이 CEO를 한 거죠』 ―月刊朝鮮이 지난 2월호에서 「수출 3000억 달러, 기적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별책부록을 냈습니다. 무역 종사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3000억 달러 수출에 가장 기여한 사람으로 「鄭周永 회장」이 선정됐습니다. 현대종합상사 陰龍基(음용기)씨가 鄭周永 회장을 기리는 글을 써주셨습니다. 「鄭周永 회장이 호랑이 같아서 화를 내면 형제들도 오금을 저렸다」는 내용이 있던데, 그런 분하고 어떻게 호흡을 맞추셨습니까. 『동생들이 鄭회장님을 무서워한 건 사실이죠. 그건 아마 형과 동생 관계였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저와는 어쩌면 상호보완적인 비즈니스 관계였다고 볼 수 있어요』 ―어떤 면에서 두 사람이 잘 맞았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 비슷한 게 많다고들 했는데, 비슷했으면 오래 같이 못 했을 거예요. 재벌 회사를 보면 CEO들이 계열사 내에서 이리 저리 옮기는데 저는 현대에 들어가서 母기업인 현대건설의 CEO를 하면서 다른 기업 CEO를 겸직했지 母기업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어요. 鄭周永 회장님이 母기업의 명예회장이면 저는 회장, 회장이면 저는 사장, 이런 관계를 일평생 유지해 왔어요. 제가 현대건설에 들어갈 때는 종업원 98명의 건설회사였어요.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 「서로가 도움이 되었다」고 봤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鄭회장과 다퉈서 열흘씩, 보름씩 말을 안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상호 필요성에 의해서 서로 인정했죠』 鄭周永이 친필로 써준 감사장 ―鄭周永 회장은 李시장의 어떤 점을 높이 샀습니까. 『같이 일해 보면 자기 생색내기 위해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죠. 전문경영인 위치에서는 오너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차원은 뛰어넘었다고 생각하죠. 鄭周永 회장이 오너로서 생각하는 회사에 대한 마음을 저도 똑같이 갖고 있었다고 봐야죠. 그때는 제 개인과 회사의 관계에서, 「先(선)회사」의 개념을 가졌던 거죠. 그러니까 회장께서는 부담이 없었죠. 회사가 위기를 맞고 장남인 정몽필 회장이 돌아가셨을 때 鄭회장이 감사장을 저한테 친필로 써 주셨어요. 「회사의 위기 때마다 이명박 회장이 위기관리를 잘 해서 오늘날까지 회사가 안전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정말 진심으로 나는 이명박 회장에게 감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아마 장남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회사에 대한 마음을 한번 정리하려고 그런 글을 써 주셨던 것 같아요』 ―친필 감사장을 지금도 갖고 계십니까. 『어디 있을 거예요. 저는 사실 중소기업인 현대에 들어갈 때는 임시로 들어갔다가 나오려고 했지만 거기서 그 시대의 걸출한 기업인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볼 수 있겠죠. 鄭周永 회장은 개발연대의 巨人(거인)이었고, 無에서 有를 창조한 분 아니겠어요?』 ―李시장이 「처세의 달인」이라는 말도 있는데 鄭周永 회장을 모실 때 그분의 심기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신경 쓴 것이 있었습니까. 『비위를 맞춘다든가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鄭周永 회장이 저를 인정하고, 저는 또 鄭周永 회장을 존경하니까 그런 바탕 위에서 일했어요. 서로 딱 몇 마디만 하면 알아들었죠. 어떻게 보면 鄭周永 회장이 저를 전문경영인의 봉급생활자로 인정을 한 게 아니고 비즈니스를 해 나가는 가운데 뭐랄까… 서로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신뢰의 대상도 될 수 있는 그런 관계로 우리 사이를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鄭周永 회장이 大選 출마할 때 李시장은 반대하셨죠. 『많이 반대했었죠』 ―지금은 李시장이 大選 출마를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鄭회장은 오너시고 저는 전문경영인이니까요. 전문경영인은 그 자리를 떠나면 입장도 떠나지만, 오너는 떠나더라도 大주주로서 남는 거잖아요』 『「인천제철 달라」고 한 적 없다』 ―현대에서 떠날 때 「인천제철을 달라」고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제가 鄭周永 회장을 얼마나 잘 알고 현대를 얼마나 잘 아는데, 또 인천제철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주겠어요? 그리고 기업을 어떻게 주고 그래요. 그건 상식의 문제예요. 저하고 헤어진 다음에 月刊朝鮮 기자가 鄭周永 회장을 보름간 따라다니면서 그 이야기를 물어봤다더군요. 그건 상식에 안 맞는 이야기죠. 그 이야기는 이렇게 추측이 되네요. 제가 그룹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너무 크니까 어떻게 그냥 나올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누가 지어 낸 말인 것 같아요. 저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CEO를 오래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 허튼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鄭周永 회장이 저를 키웠겠어요. 호랑이를 키웠겠어요? 그래서 의견이 달라서 헤어지고 난 다음에도 서로 존중했잖아요』 이명박 前 시장과 인터뷰하고 있는 김연광 편집장, 김성동 차장, 백승구 기자(사진 왼쪽부터)
북한을 다루는 기준은 글로벌 스탠더드 ―지난번 인터뷰에서 『북한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뤄야 한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크리스토퍼 힐을 만났을 때 「6者회담 관련 국가들이 북한 核을 제거하는 것까지 합의를 이루면, 동시에 개방도 하도록 해라. 북한이 살길이 그게 아니겠느냐. 金正日이 개방되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려서 개방 안 할 거라고 하는데 그것을 안심시켜 줘라」고 했어요. 북한이 개방된다는 것은 결국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간다는 거죠. 인권 문제에서부터 법령의 문제까지 모든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化하는 거죠. 그러면 우리도 비즈니스 관점에서 투자할 수 있죠. 일본도 청구권에서부터 有·無償(유·무상)의 돈이 들어갈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북한도 자립경제로 살아야 되죠. 북한이 적어도 국민소득 3000달러 정도로 올라가야 해요. 북한은 과거 800달러까지 올라갔던 경험 있기 때문에, 중국이 100달러도 안 되는 데서 3000달러에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빠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重慶(중경) 인구가 3500만 명, 上海(상해)가 1400만 명, 하얼빈이 800만 명입니다. 「인구 2500만의 북한 경제를 3000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별것 아니다」고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겠네요. 『우리가 전부 부담해서 살리려고 하면 그건 어렵지만 경제를 자립시키는 것은 가능하거든요. 우리는 100달러에서 시작해 2만 달러 가까이 간 노하우가 있으니까, 우리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자는 거죠 . 우리가 밀가루와 쌀을 계속 대주면 북한은 앞으로도 10년, 20년 늘 저렇게 살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개방하는 길밖에 없어요』 한반도 운하 건설, 정치논리로 왜곡 마라 ―「한반도 大운하」에 대해서 親與성향의 인터넷 뉴스매체가 취재단을 구성해서 독일 현지 취재를 한 후 연일 거세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정치적으로 가장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언론기관이고, 청계천 복원·교통개혁을 할 때도 가장 심하게 반대했던 매체이기도 해요. 하지만 청계천 복원과 교통개혁은 성공했어요. 그 후에는 그 분들이 스스로 인정했어요. 「한반도 大운하」에 대해서도 정치적 관점에서 보는 눈이 있죠. 제가 청계천을 복원할 때, 대중교통을 개혁할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정치적 논리를 가지고 대했을 때였어요. 저는 기술적인 문제나 경제적 논리에 대해 서로 토론하는 것은 건강한 토론이라고 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한반도 大운하」 건설에 기술적인 문제는 없는 겁니까. 『기본이 「환경」과 「물」, 「기술적」인 문제 아니겠어요? 물 문제는 홍수 때 넘치는 물의 일부만 이용할 수 있으면 충분히 가능해요. 독일이 향후 50년간 운하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우리는 더 첨단 기술로 할 수 있죠. 현재 기술적 문제 몇 가지는 전문가들이 검토하고 보완하면 됩니다』 검증공세 속에서도 李시장은 여전히 자신이 넘쳐 보였고,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기 힘들 정도로 그의 캠프는 손님들로 붐볐다.● 사진 : 이오봉 --------------------------------------------------------------------------------
▣ 李시장 父子의 병역기피 의혹 李시장에게 따라다니는 의혹 중에 하나가 병역 기피다. 李시장 본인뿐만 아니라 외아들도 병역을 기피했다는 의혹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李시장은 징집 면제가 아니라 1963년 8월 대학 3학년 때 논산훈련소에 자원입대했다가 질병이 발견돼 귀향조치된 뒤, 국가기관에서 2년간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폐질병(기관지 확장증 등)이 확인되면서 징집면제 판정을 받았다. 외아들은 1999년 3월 현역으로 입대해 전방에서 근무하다 2001년 5월 만기 제대했다. 李시장 부자의 병역과 관련해 인터넷에 허위사실을 유포한 네티즌 1명은, 지난해 6월 서울지법에서 정보통신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 李明博의 재산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李明博 前 서울시장의 재산은 2006년 8월31일 기준으로 총 179억6750만원이다. 서울市報 8월31일자에 따르면, 李 前 시장의 재산은 서울 서초동·논현동·양재동 등 강남권 부동산(빌딩 2채, 상가, 주택, 대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재산 명세는 서울 서초동 영포빌딩(건평 1753평) 62억8769만원, 서초동 상가(252평) 46억6646만원, 양재동 영일빌딩(830평) 43억181만원, 논현동 단독주택(대지 203평, 건평 99평) 12억2527만원, 논현동 대지(105평·배우자 명의) 6억830만원, 견지동 서흥빌딩 사무실(79.8평) 전세권 4000만원, 2006년식 에쿠우스 자동차, 2006년식 그랜저TG 자동차, 1998년식 쏘나타Ⅲ 자동차, 본인 예금 9억4576만원, 배우자 예금 및 보험 6728만원, 제일컨트리 클럽 골프회원권 1억원, 두양산업개발클럽700 골프회원권 9200만원, 호텔롯데 헬스회원권(배우자) 570만원, 「LKebank」 출자지분 30억원 등이다. ▣ 자동차 부품업체「다스」 「(주)다스」(舊대부기공)는 현대자동차에 자동차 시트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다. 다스는 일본 후지키코와 합작형태로 1987년 7월10일 설립됐다. 초기 자본금은 6억원이며, 한국 측이 3억6000만원을 투자했고 일본 측은 2억4000만원을 댔다. 설립 당시 李 前 시장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회사 등기부등본을 보면, 설립 당시 임원은 이상은(李 前 시장의 큰형)·김성우·박헌진(두 명 모두 현대건설 出身)·일본인 한 명이다. 현재는 이상은 씨와 李 前 시장의 처남 김재정씨가 다스의 최대 주주다. 다스는 2002년 40억원, 2003년 10억원대의 당기 순이익을 올렸다. ▣ 김유찬의「이명박 리포트」는 어떤 내용인가 李 前 시장이 국회의원 시절 비서였던 김유찬씨가 출판을 위해 준비했다는 이 리포트는 李시장의 사생활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이명박 그는 아니다」, 「누가 배반자인가」, 「나는 밥보다도 정치가 더 중요해」, 「이제야 진실을 밝힌다」 등 4개 단락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유찬씨는 지난 2월16일 기자회견에서 『1996년 총선 후 재판과정에서 李시장 측으로부터 위증 代價로 돈을 받았고 협박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이 책의 출간을 예고했다. 한나라당 경선준비 기구인 「국민승리위원회」 검증위원회는 지난 3월12일 『이명박시장에 대한 검증 결과 법적·도덕적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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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는 하나다. 하나가 되자. 원문보기 글쓴이: 잠깬사자
첫댓글 월간 동아 몇월달인가요..
이명박은 결국 대통령이 될수없음을 알아야 하고 아울러 한나라당도 10년만의 기회를 송두리채 잃게 될 것이다.이명박이 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알만한 국민들은 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검증피하고 얼버물리기만 하면 의혹이 날이 갈수록 커져서 화를 면할 수가 없은 것임을 이명박과 이명박측 캠프사람들과 한나라당은 꼭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