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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주최씨광주전남청년회 원문보기 글쓴이: 해주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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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義巖 朱論介 : 신안 朱씨 통훈대부(通訓大夫) 주용일(朱龍一)의 손녀이며 진사 주달문(朱達文)의 외동딸로 조선 선조 7년(1574) 9월3일밤 주촌리(現 대곡리) 에서 태어났다.공교롭게도 그의 사주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甲戌年 甲戌月 甲戌日 甲戌時)였다.이 같은 4갑술생은 이조 5백년동안 단 한 사람이 더 있을 뿐이니 그는 바로 1백 20년 후에 태어난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英祖)다. 논개(論介)는 부모가 덕유산 영각사에서 2년동안 공들여 낳았으며 비록 딸이라 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지성으로 가르쳤다.그러나 논개가 7세 되던 해에 아버지 달문(達文)이 죽고 숙부인 주달무(朱達茂)에게 의지하게 되었으나 방탕한 생활에 젖은 달무가 전 재산을 탕진하고 이웃 풍천리 마을의 부자 김풍헌에게 민며느리 감으로 논개를 팔아 넘기려 하자 두 모녀는 친정인 경상도 함양군 서하면 봉정마을로 몸을 피하였다.그러자 이미 돈을 받고 증서까지 써준 달무에 대해 김풍헌이 소송(訴訟)을 제기하였고 당시 현감(縣監) 경회[慶會]의 주도아래 재판이 진행되게 되었다.이에 겁먹은 숙부 달무(達茂)는 달아나 버렸고 김풍헌이나 재물에 대하여 아는바 없는 두 모녀(母女)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경회가 재판(裁判)을 연기하였다. |
이때에 경회(慶會)가 영암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논개모녀(論介母女)와 헤어지게 되었으나 이별을 앞둔 민씨(閔氏) 부인의 간곡한 청(請)으로 계속해서 경회(慶會)를 따라 다니게 되었다.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나 경회(慶會)는 담양부사가 되었고 논개는 나이 17세에 이르렀다.이에 민씨 부인이 부사 최경회에게 논개를 부실로 맞을 것을 권하니 논개 또한 전날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하여 부실(副室) 될 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그러나 몇 개월이 지난 겨울에 경회는 모친 임씨의 상(喪)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가면서 논개(論介)에게는 장수(長水)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후 일을 기약하였다.
논개(論介) 시비(詩碑) |
선조 임진년(壬辰 : 1592년)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고 난(亂)이 시작되었으니 상중임에도 의병장이 된 경회(慶會)는 곧 바로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상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서 금산성으로 진군하게 된다.진군 중 장수(長水)에서 잠깐동안 논개(論介)를 만났지만 사사로운 정보다 위급한 나라 일에 신경쓰라는 논개의 말에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장수의 아내로서 손색이 없구나 하며 감탄하고 헤어지니 그 때 논개(論介) 나이 열 아홉의 꽃다운 시절이었다.
경회(慶會)가 금산성과 무주,성주성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진주성(晋州城)을 원군하여 대파하니 1593년 4월 나라에서 정식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 인(印)과 직책을 내렸다.진주(晋州)로 부임해 가면서 호위군사 몇 명과 시녀를 보내어 논개를 뒤 따라 오게 하였다.이에 논개(論介)가 그들을 따라 경남 산청군 오부면 어느 골짜기를 지날 무렵 갑자기 나타난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진주와는 반대방향인 의령군 양동 산골로 향하게 되었다. |
1차 싸움의 패배를 설욕키 위해 더욱 광기 서린 공격을 하였으며 피차 물러설 수 없는 대 혈투가 6월18일에서 29일밤까지 계속되었다.많은 장수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고전분투.그 피 바닥 속에서도 경회(慶會)는 산천이 찢어져라 목청을 높였고 용맹한 기상으로 병사들을 독려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는 만회할 수 없었다.당시 진주성은 칠 흙같은 어둠 속에 굵은 빗줄기만 내릴 뿐,단 한명의 원군도 오지 않는 철저히 고립된 성(城)이었다.이윽고 마지막임을 감지한 경회(慶會)가 먼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慶尙右道 兵馬節度使印)을 안고 통분하며 강물로 뛰어 들었다.뒤를 이어 그를 따르던 수 많은 장수가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져 순절하니 진주성의 최후는 왜적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논개(論介)는 그 전날 경회(慶會)의 강권에 못이겨 성 밖 민가에 나왔으나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성안의 사정과 그 모습들을 전해 듣고 자신도 자결로서 뒤 따르리라 결심하였다.얼마 후 성안이 잠잠해지자 부군의 장렬했던 최후모습을 엿듣기 위해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가 벽에 붙은 왜군의 승전 축하연 방문을 보고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라 여기고 곧 바로 나아가 기적부(妓籍簿)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다음날인 7월7일 아침.곱게 단장한 논개(論介)는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毛谷村六助)를 유인하였다.배를 타고 의암(義岩 :일명 危巖)에 다가선다.
바람은 표표히 불어 눈은 잘 뜰 수도 없고
교활한 이 왜놈은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건만 아! 슬프도다.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세상만사가 슬프게만 끝나는구나. 논개(論介)가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 (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
이런 애절한 詩 한수를 남긴 채,반지 낀 팔로 왜장을 부둥켜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이로서 부군인 최경회(崔慶會)의 원수를 갚고 진주성(晋州城) 최후의 충절을 장식하였으니 이 때가 선조 26년(癸巳年 : 1593) 7월7일 밤이요 논개(論介) 나이 20세때였다.
그 후 사람들이 의로움을 행한 이 바위에 그 뜻을 새기고(인조 7년 : 서기 1629년 鄭大隆이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바위 서쪽면에 義巖이란 글자를 새겼다) 의암(義岩)이라 고쳐 불렀으며 훗날 예문관(藝文館)에서 사호(賜號)를 내렸다.墓所는 경남 함양군(咸陽郡) 서상면(瑞上面) 당지리(塘池里) 산록(山麓) 坐.
의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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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사(義妓祠)는 논개(論介)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경남 문화재 자료 제 7호.건립시기는 영조 16년(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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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변에 자리하고 있는 의암 사적비(義岩 事跡碑)에는 논개(論介)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
◇ 義妓祠 :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의 8번지에 소재한 의기사(義妓祠)는 임진왜란 당시(1593년) 여성의 몸으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천추(千秋)에 충절(忠節)이 빛나는 논개(論介)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이다.
선조 26년(1593,계사년) 6월,왜군은 전년의 전투(1592년 제 1차 진주성 싸움)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0만의 대병(大兵)으로 진주성을 공략하여 끝내 7만 민관군(民官軍)이 순절하는 비운을 맞았다.성(城)이 함락된 직후 논개가 왜장을 의암(義岩 : 일명 危巖)으로 꾀어내어 함께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있어 비로서 논개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졌다.인조 7년(1629) 촉석루 남강변 바위에 의암(義岩) 2자를 새겼고 경종 2년(1722)에는 진주의 사민(士民)들이 의암사적비(義巖史跡碑)를 세웠다.의기사(義妓祠) 건물은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남덕하(南德夏 : 1688~1744)가 처음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건물구조는 정면 3칸,측면 2칸,맛배 지붕의 기와집이다.
의암 주논개 생가 |
◇ 義岩 朱論介 生家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에 소재한 의암(義岩) 논개(論介)의 1차 복원 생가(生家) 모습. (2000. 5. 13. 촬영) 1987년 대곡(大谷)저수지 시설로 원 생가(生家) 터가 수몰됨으로써 같은 마을 둘레 내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장수군민의 여망에 따라 남쪽으로 3백m 떨어진 곳에 부지 8천3백40평을 마련하여 복원하게 된 생가(生家)로, |
사진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주논개 생가사적비(朱論介 生家事蹟碑)에는「원 생가(生家)터는 옛 주촌(朱村) 국민학교 건립과 함께 수몰되었으며 교실자리가 바로 그 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주촌(朱村)학교는 이미 10여년전에 폐교되고 없었다.또한「2백여평의 생가(生家)터에는 우물과 유허비가 서 있었고 마을 입구에는 주논개 낭생가지 사적불망비(朱論介 娘生家址 事蹟不忘碑)가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며,1982년 수몰을 앞두고 당시 주촌(朱村) 초등학교 교감이던 효산 고두영 선생(추모시 작가)이 전교생과 합심하여 최초의 논개 동상을 이곳에 세웠다.1997년 의암(義岩) 주논개(朱論介) 생가(生家)는 남쪽으로 1km 지점인 대곡리 709번지 일대에 2만평의 부지를 새로 매입,다시 이전,확장키로 하였으며,2000년 5월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태다.
국비와 지방비 50억원을 들여 생가(生家)를 다시 짓고 동상,전시관 등도 함께 건립한다.
완공예정일은 2000년10월 말경.아래 복원생가 사진 참조.
의암 주논개 추모비 |
義巖 朱論介 追慕碑 |
追慕詩
현해탄의 응어리 천도만도 더 넘게 하-얀 무궁화로 피어납니다 아! (효산 고두영 詩,동촌 이수영 書.) |
의암 주논개 복원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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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
▶개 요 : 논개는 선조 7년(1575년 9월 3일)에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위태롭자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진하여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나라와 부군(夫君)의 원수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 순절한 의암 주논개님의 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20,000여평의 부지에 50억원을 투자한 논개생가 복원사업이 2000년 9월 완료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생가지가 있는 지역은 덕유산, 오동제등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장안산 군립공원과 지지계곡, 동화댐을 연계한 등산코스가 열려있어 논개생가와 연계한 관광코스로 손색이 없으며 연중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다.
▶시 설 물 : 생가, 기념관, 비각, 논개동상. 부모묘 등
▶행 사 : 논개 제전행사 음력 9월 3일을 중심으로 3 ~ 7일간 거행
▶교 통 편 : 전주 →진안 →장계 →경남 함양방면(대곡리 주촌) 1시간 20분소요
경남 함양 →장계방면(대곡리 주촌) 1시간 소요
남원 →장수 →장계 →함양방면(대곡리 주촌) 1시간 10분소요
▶정보제공자 : 주논개생가 관리사무소(063-352-2550)
▶정보감수자 : 여행전문가 허시명님
▶작성기준일 : 2001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