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고을에 장(張)이라는 사람이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주색잡기에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호색가였는데, 부하의 처를 데려다 범하고도 부하까지 죽이는 색광을 밥먹듯 했다. 나중에 왕이 그 사실을 알자, 관직을 삭탈하고 팔도에 조리를 돌려 사형시키고 다시는 그와 같은 부도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상을 나무에 새겨 길거리에 세우게 했다.
이것은 구전되어 오는 장승설화 중의 하나이거니와 현존하는 장승설화는 그 종류와 유형이 각양각색이다. 소설가 한수산의 작품 <사월의 끝>에도 다음과 같은 설화가 삽화로 나오고 있다.
깊은 산에 살던 홀아비는 나이 든 딸을 불러 정욕을 호소했다. 딸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인륜(人倫)에서 그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아버지의 그 애절함에 괴로워했다. 만약 아버지가 개 같은 짐승이라면 인륜 때문에 괴로워하진 않아도 되리라. 딸은 아버지가 마루 밑으로 들어가 개 시늉을 하며 세 번 짖으면 몸을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개짓을 하는 동안 딸은 뒤뜰에서 목매어 죽었다. 사람들은 이 아버지를 후세에 길이 저주하고자 길가에 아버지를 닮은 장승을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침을 뱉게 했다.
그런가 하면 옹녀와 한짝이 된 변강쇠가 장승을 불태웠다가 팔도장승들의 미움을 받아 지독한 병에 걸려 결국은 장승처럼 뻗뻗해져 죽는다는 판소리 <가루지기 타령>등도 있다.
이상에서 보듯 비록 후대에 각색된 것들이긴 하지만, 장승설화는 불륜·난음과 같은 성도덕의 타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장승에 대한 자세한 문헌은 없지만,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으로는 장흥 보림사1), 보조선사 탑비의 비문2)에 나오는 장생표주(長生標柱) 이야기와 양산 통도사3)의 국장생(國長生) 이야기4)가 그 중 오래된 사료들이다.
특히 장승문화는 조선 중기 임란·병자 양대 전란을 치르면서 민중문화로 토착된다. 나라가 백성들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하면 백성들 스스로 마을을 지키려는 자위의식이 생기게 된다. 장승문화는 봉건사회의 궤멸의 반작용으로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장승은 마을 장승과 절[寺] 장승으로 나누어진다. 절 장승으로는 불회사 장승·운흥사 절터 장승·법천사 장승 등이 소문나 있다. 거의가 조선시대의 것들이다.어려운 때 절 미륵이 마을로 내려와 민중들의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었듯이, 마을 장승도 조선 중기 어려운 때에 산으로 올라가 삿되고 헛된 것으로부터 절을 지켜주는 수문장이 되었다. 어지러운 때일수록 종교와 민중은 하나가 된다.
장승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장생(長生)으로, 조선시대에는 장승(長丞)·장선(將仙)·장군 등으로 불리었으며, 남해안 지역에서는 벅수·살막이 등으로 불리었는데, 장승의 기능 또한 그 이름만큼이나 다양하다.
우선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부락수호이다. 돌림병이나 흉년을 가져오는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흔히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웠다. 영남지방 일부에서는 마을과 마을간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경계지표로 세웠고, 지리산 실상사나 화왕산 관룡사에서는 절 입구에 장승을 세워 승가람을 지키게 했다. 또 아들 생산이나 풍어·풍작을 빌기도 했고, 천연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중국 아미산에 있다는 신인(神人)의 형상을 새겨 세워두기도 했다. 산천의 기운에 따라 나라와 마을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보고, 땅기운이 약한 곳에 장승을 세워 산천의 기운을 보태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과 마을 사이의 이정(里程)을 알리는 노표(路標)로 세운 장승도 있었다. 그리고 동구 밖의 장승은 만남의 장소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기능은 장승의 몸체에 새겨둔 글귀를 보면 더욱 정확히 드러난다.
장승에 얽힌 토속신앙은 그보다 더 다양하고 재미있다. 장승의 코를 긁어서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 임신중절의 효과가 있다고하여 처녀나 과부들이 낙태 약으로 사용했다. 또 다른 지방에서는 그와 반대로 부녀자들이 장승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 하였고, 더러는 그 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집안의 화목과 길 떠난 자식의 과거길을 빌기도 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병자의 사주(生年月日)와 이름을 적어 제사지내고, 혼기 놓친 노총각 노처녀들이 장승의 입에다 음식을 물려 놓고 소원성취를 빌기도 했다.
대개의 장승 모습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부라린 두 눈, 툭 불거진 눈망울, 치켜뜬 눈썹, 뭉퉁한 코 등 장승이 이처럼 무섭고 못생긴 것은 마을에 해를 끼치는 잡귀를 내쫓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자애로울 수 없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을 본다. 그것은 그대로가 중노(中老)에 접어든 우리들의 아버지 상이요, 할아버지 상이다. 지방에 따라 제주도의 돌하르방처럼 근엄한 표정을 한 것도 있고, 충북 괴산 고성리 장승처럼 보는 이마다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익살스런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우스꽝스럽고 꺼벙하게 생긴 장승도 있다. 모두가 삶의 애환과 서민들의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승 중에는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쓴 신랑·각시도 있다. 아무래도 서양의 사탄과는 그 모양부터가 다르다.
곳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장승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세운다. 그래서 팔도의 장승들은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이다. 사람도 그렇듯이 장승들도 저마다 개성이 다르다. 정조 임금의 능행길을 지킨 서울 상도동 장승백이 장승은 크고 위엄이 있어서 일찍이 맏형이 되었고, 민불(民佛)로도 불리는 화순 벽나리 장승은 몸매가 예뻐서 그 누이가 되었으며, 상주 남장사 돌장승은 싸움패 막내가 되었다.
장승 세우는 일은 마을 전체의 일이다. 장승 세우는 날 아침, 마을 장정들이 산으로 올라가 장승으로 쓸 튼실한 나무를 고르고 산신에게 간단히 제를 올린다. 나무는 대개 소나무나 밤나무다. 곧게 자란 나무를 벤 후 여러 사람이 짊어지고 산을 내려온다. 나무를 잘라 오면 마을 사람들이 나와 풍물을 치며 반긴다. 장승은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성껏 만든다. 글씨 잘 쓰는 이는 붓을 잡고 묵서(墨書)한다. 장승 세우는 날은 온마을이 잔칫날이다. 모두가 하나가 된다. 마을은 다시 공동운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충남 외암리 마을 장승이나 쌍계사 장승의 경우처럼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쓰는 곳도 있다. 뿌리 부분이 위로 가도록 거꾸로 세우는 이유는 하늘과 땅의 교합을 의미한다. 즉 나무는 하늘의 남근이 되는 셈이다. 또 제작하는 데 있어서도 넓은 면에다 얼굴을 조각하는 것이 수월하기도 하다.
원래 장승은 남녀 성 구별이 없다. 그래서 남도 여도 아닌 장승을 꿈에서 보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생겼다. 부부로 세워둔 것은 훗날의 일이다. 충무 문화동 벅수는 혼자 서 있지만, 장승을 남녀 쌍으로 세울 때는 정읍 백암의 것처럼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도 하고, 속리산 말티고개 장승처럼 사이좋게 나란히 세워놓기도 한다. 마주 보게 할 때는 대장군은 동쪽에, 여장군은 서쪽에 세운다. 그래서 옛날에는 나그네들이 장승을 보고 방향을 알았다고도 한다.
장승은 마을 입구에 주로 서 있는데, 그곳을 장승백이라고 불렀다. 언덕배기라는 말에서도 보듯이, 배기란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장승은 대개 서낭당이나 선돌이나 또는 솟대 등과 함께 세워졌다. 태백산 당골 장승은 솟대와 함께 있고, 정읍 백암 장승은 남근석과 이웃해 있다. 두륜산 대둔사 장승은 돌무더기 위에 서 있다.
외암리 할배장승은 할미장승을 잃고 벌써 몇 해째 홀몸이다. 사람들이 참 야속하다. 몇 푼 추렴이라도 해서 새할미를 모셔드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장승들도 고향을 떠나고 있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듯 장승도 고향땅을 버리고 대처로 떠난다. 이제 장승은 관광지나 도심의 고급 음식점 앞에서 길흉화복을 지키는 문지기나 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재일;장승,<우리 민속 아흔아홉 마당>,1997.2,pp 87∼94.
* 전국 분포 주요 장승 위치
관룡사 : 화왕산. 전남 창녕군 관룡사 장승 - 호법 장승이다.
남장사 : 경북 상주시 남장사 돌장승 - '하원주장군'으로 얼굴 좌우가 대칭을 이루지 않고 있다.
대둔사 : 두륜산.
보림사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 보조선사 탑비의 비문 '장생표주 이야기'
선암사 : 전남 승주군 승주읍 선암사 장승 -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기능의 장승이다.
실상사 : 전북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 장승 -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쌍계사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장승 - 불법 수호 장승이다.
운흥사 : 전북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 장승 - '하원당장군'의 얼굴 모습이다.
통도사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 통도사 국장생표 '국장생 이야기'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무갑리 장승 : 마을 남쪽을 지키는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이다.
서울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돌하르방 : 제주도 제주목 돌하르방이 옮겨져 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장승백이 장승 : 동작구청에서 신림동 방면으로 500m쯤 장승백이 사거리에 있다.
전북 남원군 운봉면 북천리 장승 : 방위 수호 장승이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 장승 : 충북 단양에서 경북 점촌을 잇는 575번 지방도인 단양에서 경상도 땅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다.
4) 통도사 국장생 : 1085년에 세운 것으로 문장의 내용은 "통도사 손내천 국장생 1좌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을축(乙丑) 5월 일자의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개립(改立)케 하도록 하므로 이를 세운다"라고 하였다. 이 국장생은 1934년에 보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덜어갑니다^^*
저도 덜어갑니다..^^
자료감사합니ㅣㅣ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