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의 후진성 탈피 중세 전성기 High Middle Ages라고 불리는 1050년부터 1300년대까지의 시기는, 서유럽이 처음으로 그 동안의 후진성에서 탈피하여 세계 최대 세력중 하나로 부상하는 시대였다. 1050년경의 서유럽은 아직 모든 면에서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세계보다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이르러 서유럽은 두 경쟁 세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전세계를 놓고 볼때, 오직 중국만이 정치,경제,문화적인 면에서 서유럽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
1050년경에 서유럽이 처했던 보잘것없는 처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 시기에 일어난 급격한 진보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중세 전부를 정체된 시기로 파악한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 하겠다.
영주와 농노:
장원제에서의 사회적 조건과 삶
장원제의 의미
농업이 변화하면서 영주와 농업 노동자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세 전성기 대부분을 통해 촌락 생활이 장원manor-영주가 소유하고 농노가 노동하는- 이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들을 말하기 앞서 이 장원제의 전형적인 형태를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음의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먼저 장원제란 말이 봉건제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장원제는 농노에 의해 대규모 농경지가 경작되는 경제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이에 반해 봉건제는, 대부분의 중세사가들이 사용하는 의미대로라면, 권력이 대단히 분권화 되어있는 정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학자들이 "전형적 형태의 장원"에 근거하여 장원제를 논할 경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두 개의 장원이 존재한 적은 없었으며, 실제로 많은 장원들이 규모와 기본 성격에서 크게 달랐다. 더욱이 세느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있는 카롤링 왕조 원래의 중심 거주지로 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유럽 지역에서는 장원이 설령 있따 하더라도 지극히 적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직 도예제에 입각한 농경이 행해졌고, 독일 중부 및 동부에서는 자유 농민에 의한 소농지 경작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장원과 농노
장원은 카롤링 왕조 시대에 처음으로 분명히 등장했으며, 13세기경에 이르기까지 서북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업적 사회, 경제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것은 로마의 대농장에서 유래된 것이었지만 장원은 로마의 대농장과는 달리 노예가 아닌 농노(serfs:때로는 villeins로 불림)에 의해 경작되었다. 농노들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토지에 결박되어 이동의 자유가 없었으며, 영주를 위해 정규적으로 무상 노동(부역)을 해야만 했거, 수많은 굴욕적인 공납을 납부해야 했으며, 영주 법정에서 재판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배정받았다는 점, 그리고 토지 박탈의 염려 없이 경작할 수 있었따는 점에서 노예들보다느 훨씬 나았다. 그러므로 농업의 개선이 있을 경우에 농노들은 그로부터 약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영주는 비록 이론상으로는 마음대로 공납을 거둘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농노의 의무는 언제나 일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농노는 그 운명이 비록 지극히 가혹한 것이었지만, 결코 영주의 자의에 전적으로 예속된 존재는 아니었다.
▶장원의 농업 체계
수백에서 수천 에이커에 달했던 장원의 토지는 영주에게 속한 땅과 농노들에게 배당된 땅으로 구분되었다. 영주 직영지demesne로 불리는 전자는 보통 경작지의 1/3 내지 1/2크기였따. 그 땅은 농노들이 일정한 날에 경작했는데 대개 일주일에서 3일 정도였다. 영주 직영지는 커다란 땅떵이 땅덩이가 아니라 길다란 지조地條strips로 이루어졌는데 이 지조는 농민 보유의 지조와 혼재되어 있었다. (교회 보유 지조가 따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지조들은 길고 좁다란 것이어서 멍에를 멘 말이나 소가 끄는 무거운 쟁기가 쉽사리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각 지조의 경계에는 밭두둑만 있을 뿐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체계를 일컬어 개방 경지제 open-field system이라고 부른다. 논노들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도 거의 대부분 공동작업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 가축과 농기구를 공동으로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초지도 "공유지"라고 불렸다. 공동 소유의 가축들이 그곳에서 함꼐 풀을 뜯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작지와 목초지에다 또 농노들은 보통 보통 자신의 작은 텃밭을 더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원에는 별도의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영주의 사냥을 위한 것이지만, 돼지 먹이와 땔감 수집을 위해서도 유용한 것이었다.
농노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경우에도 그 일 또한 공동으로 했다. 실로 장원제는 전반적으로 공동 작업과 결속을 강조하는 체제였다.
▶농노의 생활 조건
공동체 정신은 농노들의 가혹한 생활 조건을 다소나마 완화시켜 줄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고대 로마의 노예에 비해 훨씬 나은 생활을 누렷다 고는 하지만, 그리고 1050년경에서 1300년경 사이에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농노들의 생활 조건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원시적이고 비참한 것이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보통 나뭇가지를 엮어 진흙을 바른 초라하고 짝이 없는 오두막이었다. 13세기의 한 잉글랜드 농부는 단지 이웃집 오두막 중앙의 기둥 한 개를 부러뜨렸다는 이유로 해서 주택 파손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오두막의 바닥은 대개 차고 축축한 흙이었다. 침대라고 해야 거의 짚덤불에 불과했고, 그외에 가구라 할 만한것은 없었다. 식사는 대개 멀건 죽으로 때웠다.
과일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채소는 양파, 부추, 무,양배추 정도였다. 채소는 모두 멀건 스프로 끓여서 마셨다. 육류는 일년 중 기껏해야 몇 차례, 축제일 또는 말라빠진 소나 돼ㅣ가 먹일 사료가 바닥나는 한겨울에 먹을 수 있었다. 식기는 설겆이 할 필요가 없었다. 버리는 음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흉작의 위협이 항상도사리고 있었는데, 흉작이 닥치면 사실 영주보다는 농노가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었다. 영주들은 언제나 같은 액수의 수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흉년이 닥치면 농노들은 가진 곡식을 모두 내놓아야 할 형편이었고, 자식들이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아야만 했다.
곳간에 곡식이 조금 남아있어도 자식들이 굶어 죽어간다는것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곡식은 이듬해의 종자로 따로 떼어둔 것이기에 손을 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마저 없다면 그들에게는 도무지 장래라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노의 생활조건 개선
이러한 비참한 생활조건에 변화와 개선의 조짐이 보였다. 그 하나는 식단의 개선이었다. 중세 전성기에 접어들어 기근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전보다 한층 건강해 졌다. 이제는 단백질, 특히 콩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이유에서 농노 해방이 널리 이루어 졌다. 일단 영주의 주도로 새로운 땅이 개간되기 시작하자, 영주들은 농노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야만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따. 자유 노동을 이용하는 새로운 지역에는 도망온 농노들이 몰려들었고, 그곳은 농민들에게 부역 대신 고정된 지대를 요구하는 새로운 제도의 시범 지역이 되었다.
그후 심지어 오래된 장원에서조차, 영주들은 부역 대신 지대를 요구함으로써 수익을 올릴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편 농노들은 자신들의 잉여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돈으로 자유를 살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농노제의 쇠퇴
이러한 여러 경로를 통해 13세기를 지나면서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노제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각 자역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그 과정이 다소 지연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에서는 농민들이 강력한 지방 영주에게 (농노제의 유제라 할) 약간의 부역과 공납의 의무를 지지않을 정도로 농노제 소멸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의무들이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 까지 성가신 문제로 남아 있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계속해서 공동으로 노동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에 내다 팔기위해 생산하는 자유 농민이었다.
농업 혁명이 영주에게 가져다 준 이득 영주들은 농업 형명을 통해 농노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겼는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그 하나는 영주들이 농노를 해방시킬때 마다 통상 농노의 전재산에 해당하는 많은 현금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노를 해방시킨 후 영주들은 주로 지대에 의지하여 생활했다. 지대 중 상당액은 종전에 영주가 소유는 했으되 경작지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토지에 대해서 거두어들인 것 이었으므로 귀족들의 수입은 크게 증가되었다. 게다가 영주들이 부역 대신 지대를 선호하게 되면서, 그들은 지대를 불리기가 훨씬 쉽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지대 수취자가 된 영주들은 이제 종전처럼 일일이 경작지를 감독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좀 더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때로는 십자군에 참여하는가 하면, 더러 국왕의 궁정에 나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증대된 부는 그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기동성이 커지자 그들은 삶의 방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중세의 귀족:기사도의 등장
귀족들의 생활이 전에 비해 한층 세련된 것은 중세 전성기에 지역간의 격렬한 전쟁이 전보다 줄어든 데도 이유가 있었다. 1100년경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전형적인 귀족이란 이웃과 전쟁을 벌이거나, 힘 없고 자신을 지킬 무기조차 없는 약자들을 노략질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는 거칠고 잔인한 전사였다.
이러한 폭력성은 교회의 압력으로 12세기에는 많이 누그러졌다. 폭력성이 완화된것은 당시의 신흥 국가들이 국지적 평화를 좀더 효율적으로 강제하고 귀족 자신들이 좀더 안락한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데도 원인이 있다.
귀족들은 계속해서 십자군에 참전했을 뿐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귀족들간의 사소한 다툼은 빕ㄴ도가 훨씬 줄어들었다. 기사도chivalry는 분명히 그러한 오랜 전투 정신의 무의식적인 대용물로 발달한 것이었다.
기사도는 군사 활동을 비교적 온건한 행동으로 누그러뜨렸다. 기사도란 말 그대로 "기사 정신"이었으며, 기사 귀족은 말타기에 매우 능숙해야만 했다. 기사도는 또한 명예로운 목적을 위해 싸울 의무를 부과했다. 그러한 목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마상馬上 시합에서 싸울 기회가 마련되었다. 마상 시합이란 일종의 모의 전투로서, 처음에는 몹시 거칠었지만 나중에는 정교한 의식을 갖추게 되었따. 무엇보다도 말 탄 귀족-상층 귀족보다 토지를 적게 소유한 "기사"가 그 전형이다-에게는 용감하고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관대하고 신실하며 공손하고 친절할 것이, 그리고 부당한 이익이나 비열한 재물을 멀리할 것이 기대되었다.
▶귀족 생활의 향상
귀족의 부의 증대 및 기사도 등장의 부산물로서는 생활조건이 향상되었고, 여성에 대한 처우도 개선되었다. 1100년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귀족 주택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원시적인 난방 및 취사 방식으로 말미암아 종종 불에 타버리곤 했다. 부가 증대되고 기술이 향상되면서 1100년 이후의 성들은 대개 돌로 지어지게 되었으며, 불에 타는 경우도 훨씬 줄어들게 되었다.
더욱이 성에는 이제 굴뚝과 덮게달린 벽난로(두가자 다 중세의 발명품)가 설치되었는데, 그 결과 중앙의 커다란 홀에 큼직한 화덕을 하나 놓는 대신 각 방마다 독립적인 난방이 되었으므로, 각자의 사생활을 제법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귀족들은 항상 농민들보다 채소를 덜 먹었으며 대신에 육류를 많이 먹엇다. 사치품 교역이 증대된 탓으로 후추와 샤프란 같은 값비싼 외국산 향료가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식탁 예절은 여전히 형편없었지만-귀족들은 모두 나이프와 스푼만 사용했을 뿐 포크는 없었고 소맷자락에 코를 풀어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우아한 옷을 걸치고는 남들 앞에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려 했다. 이 시기에는 몽에 꼭 맞는 옷이 착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뜨개질과 단추 및 단추 구멍이 바로 이시기에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의 여성에 대한 태도 변화
중세 전성기에 귀족들은 여성에 대한 태도의 역사적 변화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가지 이유에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첮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가 대부분 문학 형태인데, 역사학자들은 과연 문학이 얼마나 실제 생활을 반영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둘째로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의 여성들은 기껏해야 받침대 위에 모셔진 존재였던 반면에, 현대의 여성들은 "받침대 위로" 올라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 생활의 물질적 향상이 남자는 물론 여자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중세 전성기에는 여성에 대한 언어 표현에서 분명 혁명이 일어났다.
12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소수의 여성 성인聖人들을 제외하면 여자들은 문학에서 사실당 무시되고 있었다. 전형적인 프랑스 서사시는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묘사하면서 여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남성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로만 잠시 표현할 뿐이었다.
그러던것이 서기1100이 지난 후 불과 수십년만에 여성들은 갑자기 서정 시인과 로망 작가들에 의해 존경의 대상으로 변모하였다. 전형적인 투르바두르 시인은 자신이 연모하는 귀부인을 일컬어, "내가 하는 모든 온당한 일을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으로부터 추론"한다느니, "그녀는 즐거움의 열매를 맺는 나무요, 가지"라고 표현했다.
▶귀족 여성의 지위 변화
새로운 "궁정"문학은 극도로 이상주의적이고 다소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류계급 여성들이 과거보다 실질적으로 더 많은 존경을 받게된, 한층 부드러운 문화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었다.
더욱이 12세기와 13세기 일부 왕실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들이 사망하거나 통치할 수 없었던 여러 경우에 처하면 국가에 대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 햇다.
예를 들면 헨리 2세의 아내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아키텐의 엘레노어는 아들인 리처드1세가 1190년에서 1194년까지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이미 70세를 넘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리고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카스티야의 블량쉬는 13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진 국가를 통치한 바 있다. 즉 한번은 아들인 루이9세가 아직 어렸을 때, 그리고 또 한번은 아들이 십자군에 참전한 동아네 프랑스를 매우 훌륭하게 다스렸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 전성기의 여성들은 아직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세 전성기는 상류 계급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된 시기였다. 그와 같은 사정을 보여 주는 가장 상징적인 예는 체스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의 도시생활
중세 도시는 결코 현대 도시의 축소판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주택에는 채소를 재배하는 텃밭이 딸려 있었으며, 소와 돼지가 외양간과 돼지우리에서 사육되엇다. 주요 도시의 대로를 따라 걷던 행인은 양떼와 거위떼로 인해 겨우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해서 동물과 사람의 배설물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게다가 도시민은 종종 화재에 시달려야만 했다. 대부분의 가옥들이 목조 건물인 데다 밀집 되어 있었고 소방 시절 마저 없어서 화재가 났다 하면 도시 전체를 휩쓸곤 했다.
비위생적인 생활 조건과 인구밀집으로 인해 전염병이 쉽사리 번졌다. 또한 경제적 갈등이나 가문간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종종 유혈 폭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도시민들은 그들이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생활방식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길드
중세 도시의 가장 특이한 경제,사회적 조직은 길드guild였다.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특수한 이익을 보호,증진하기 위해 조직한 전문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식생활
▶식사는 정각에
오늘날 서유럽국가들을 관광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식사 시간 이다. 관광객이 많은 도시는 예외지만, 식사시간 이외에 정상적인 식사를 하 기가 극히 힘들다.점심시간이 지나면 레스토랑은 저녁식사 시간까지 닫든가 음료수만을 판매한다. 무심코 점심시간을 놓치면 길가에서 서서 먹는 햄버거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점심, 저녁 식사시간이 고정된 시각으로 정해 져 있는 것도 아니다. 점심시간은대개 정오 전후로 비슷하지만 저녁식사 시 작시간은 로마가 7시반, 밀라노가 7시, 제네바가 6시로 각양각색이다. 어쨌든 서유럽인은 정각이 되면 반드시 충분한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다. 먹는 것이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기업이 신문에구인광고 를 낼 때도 '시원식당 있음'이란 문구가 유력한 선택요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든간에 사람 손으로
이렇게 된 것은 원래부터 서유럽에서는 먹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풍토적 조건이 열악한 서유럽은 바다나 산에서 나오는 자 연적 산물이 매우 적었다. 또 주곡물인 맥류(麥類)는 매년 연작이 불가능하 였고 사료작물과 윤작이 시작되기까지는 지력회복을 위해 휴경해야만 했다. 빵이 주식이 될 수가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자연의 풀들이 부드러운 상태에 서 생장을 멈추기 때문에 가축의 방목에는 풍족하였다. 18세기 영국의 유명 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토지를 이용하는데 있어서빵이 비싸지만 밀밭 으로, 소고기가 비싸지만 목초지도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밀밭 과 목초지는 상호이행의 관계에 있었다. 가축의 사육은 어패류를 잡는 것처 럼 남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소의 경우와 같이 성장하는 데 몇 년씩이나 걸리는 가축은 최종적으로는 도살하여 식육으로 쓴다 하더 라도 무계획적으로 사육할 수는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주식, 부식의 구별이 없고, 사람 입에 들어가는 모든 식품을 처음부터 사람의 손을 거쳐 조달해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먹는 데 대한 관심은 좋은 싫든간에 높아만 갔다.
▶원래는 '섞어찌게'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우라나라처럼 쌀이나 보리의 입자로 밥을 끓여먹는 것이 없으며 여기에는 제분과정이 필요하였다. 또한 어패류의 섭취방법도 다 르고, 소나 돼지의 경우도 통채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도살 후에도 여러번의 해체작업을 거쳐 편육이나 내장으로 나눠놓기 전에는 요리로 만들 수가 없었다. 아무튼 서양요리의 주류는 유우, 버터, 치즈, 밀가루, 고기, 야 채, 달걀 등을 뒤섞어서 약한 불에 흐믈흐믈하도록 끓이는 방식이였다. 옛날 에는 밀가루를 우유나 산양의 젖을 섞어 끓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점차로 섞 는 내용물이 늘어갔던 것이다. 세기경에 위에서 말한 '섞어찌게'가 변용된 것에 불과하다. 요리에 있어서도 재료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까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탓인지 서유럽에서는 일찍부터 괴혈병이 진귀한 질병이 아니었다.
▶무르익은 음식혁명
근세 이후 서유럽인의 해외진출이 사태를 일변시켰다. 알지도 못했던 음식 이 연이어 유입되었다. 16세기에는 아스파라거스(asparagus : 어린싹이 식용 아채로 쓰임), 멜론, 17세기에는 코올리플라워(cauliflower : 꽃양배추. 양배추 의 일종), 가치, 완두콩, 18세기에는 토마토, 사탕무우 등이 서유럽에 첫선을 보였다. 이것이 일반에게 금방 보급된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서유럽의 식 탁은 풍성해졌다. 그 가운데서도 17세기에 등장한 홍차와 커피는 혁명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원래 서유럽에서는 우유 종류를제외하면 맥주 포도주 등 알콜음료뿐이였고 사람들은 항상 얼큰하게 취한상태였다. 거기에 취하지 않게 신경을 자극시키는 새 음료가 소개되었다. 처음에는 독성이 있을 것이 라고 배척받았지만 18세기에는 서유럽에 일반화되었다. 또 16세기 말에 서유 럽에 전해진 감자도 역시 처음에는 배척되다가 18세기경 일반화되었다. 또 18세기에는 사료작물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방목과 축사내의 사육이 병행되 면서 비육이 가능해짐에 의해 소, 양, 말 등의 도살량이 증대되었다. 18세기 는 모든 점에서 음식혁명이 진행된 시기였고 누구나 스푼과 포크를 사용하 게 되었다.
▶레스토랑의 배경
프랑스요리가 서양요리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18세기였다. 당시 프랑스 경 제학자 케네는 음식의 사치는 품종개량을 낳았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 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왕족, 귀족들은 오로지 미식을 추구하는 데 광분하였 다. 남녀 모두 부엌에 출입하는 것이 유행하였고 파티를 열어도 남주인이나 여주인이 손수 만든 요리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 최고의 예의였다. 물론 전부 다 부부가 도맡는 것은 아니였다. 솜씨 좋은 요리장은 왕족, 귀족들이 서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들은 직인이라기보다는 예술가 대접을 받았고 종 종 치열한 스카우트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요리비법이나 새로운 요리가 계속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실업자가 된 요리장들이 남몰래 불특정다 수의 손님들에게 요리를 제공하였던 것이 오늘날 레스토랑의 기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