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 (전주시) |
명 칭 |
연안이씨이유길가전고문서(延安李氏李有吉家傳古文書) |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 |
수량/면적 |
일괄3종25점 |
지정(등록)일 |
1989.01.09 |
소 재 지 |
전북 전주시 덕진구 유토피아APT B동 406호 |
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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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소유단체) |
이호룡 |
관리자(관리단체) |
이호룡 |
상 세 문 의 |
전라북도 전주시 전통문화시설과 063-281-2168 |
조선 선조 30년(1597)∼순조 32년(1832) 사이의 고문서로 1989년1월 9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된 25점의 연안이씨 가전 유물이다.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이유길과 그 가족에 주어진 포전(褒典)내용의 교지(敎旨)와 부조묘를 받들고 있는자손들에게 특별 대우하는 은전(恩典) 등에 관한 고문서이다.
이유길과 배위(配位)에 관한 교지 11매, 이유길 아들 이우인(李友仁)과 배위에 관한 교지 2매, 이유길의
손자 이석고(李碩考)와 배위에 관한 교지 3매, 이유길의 증손 이징국(李徵國)과 배위에 관한 교지 3매
등이 그것이다. 이유길의 후손 이호룡(李浩龍)이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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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고문서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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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안이씨의 가전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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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부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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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의 일세조(一世祖:中始祖)로 삼고 있는 이유길은 조선조의 청백리로 녹선된 이후백(李後白)의 손자로서,
아버지 이선경(李善慶)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복수할 생각으로 18세 때 이충무공 휘하에 들어가 충무공을
따라 명량대첩에서 공을 세워 9품직을 제수받았다.
또한 명나라에서 금의 침입으로 원병을 청했을 때 이유길은 우영장(右營將)으로 출전하여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순조대에 이르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錄
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가 증직되었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도 내렸다.
또한 용정사(龍井祠)에 이충무공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유길의 후손에는 8명의 상신(相臣)과 7명의 대제학
(大提學), 6명의 청백리(淸白吏), 그리고 조선조의 문과급제자가 250명이나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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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 (延安李氏 李有吉家 古文書 전북유형 문화재 제131호) 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신 이유길 (李有吉) 의 가문에 내려오는 고문서 들이다.
이유길 (李有吉) 은 아버지 이선경(李善慶)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복수할 생각으로 18세 때 이순신의
휘하에들어가 명량해전에서 공을 세워 9품직을 받았다.
또한 명나라 에서 후금의 침입으로 원병을 청하자, 이유길이 우영장 으로 출전 하여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순조대에 이르러 대광보국승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가(大匡輔國崇錄
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증직 되었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렸고 ,부조묘의
은전도 내렸다.또한 용정사(龍井祠)에 이순신과 같이 배형 되어 있다.
위와같은 이유길가(李有吉家)에 주어진 포전내용(褒典內容)의 교지와 부조묘를 받들고 있는 자손들에게 특별
대우하는 은전 등에관한 고문서가 잘보존 전승되고 있는데, 이유길과 배위(配位)에 관한 교지11매, 이유길 아들
이우인(李友仁)과 배위에 관한 교지 2매,이유길의 손자 이석고(李碩考)와 배위에 관한 교지3매 이유길의 증손
이징국(李徵國)과 배위에 관한 교지3매 등이 그것이다,
이문서는 전주 덕진구에 살고 있는 이유길의 후손 이호룡(李浩龍) 씨가 소장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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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 : 1576-1619)은 해남군 삼산면 충리 출신 장군으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忠 武公)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싸움에서 크게 전공을 올려 선조(宣祖)임금으로부터 9품직과 충효(忠孝)라는 두 글자를
하사받았다.
후 평안도(平安道) 영유(永柔) 현감으로 있을때 명(明)나라의 파병 요청이 있어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하고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병하여 함길직도(直搗)의 적 소굴을 소탕하던 중 패하여 강홍 립과
김경서는 항복을 하였으나 이유길만은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분전하던 중 화살을 맞고 중음에 이르자 혈서로
전황을 적어 말에 매달아 보내고 순절 하였다.
그 말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초혼장을 지냈으며 기특한 이유길 장군의 애마(愛馬)도 파주(坡州) 평지에
묘를 안장해 주었으며, 그후 정종(正宗)이 그 공 을 높이 치하하며 충의공(忠毅公) 시호를 내려 주었고 명나라
황제도 영의정(領議政)을 증하였다.
현재 그의 사당이 고향인 해남군 삼산면 충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인(世人)들을 그곳을 충신(忠臣)터라
일컬어 부르고 있다.
병자호란과 조선
당시 대륙 만주에서는 여진족 누르하치가 후금국을 일으키고 명나라의 세력을 꺾기 위해 명을 압박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명은 후금의 완전 토벌을 위 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도 임진왜란 때 명의 원조를 입었기
때문에 姜弘立을 5도 도원수로 하고 金京瑞를 부원수로 하여 병사 1만 3,000명을 파견하였다.
이 때 金應河·李一元·李繼宗 등과 함께 원명군의 좌영중군장으로 참여하였다.
1618년 10월에 평북 창성에서 명의 10만대군과 합류하였다. 승리와 패배가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 나, 1619년
봄에 들어 점차 오랑캐의 숫자가 많아지자 원정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강홍립 등 파견됐던
조선의 장군들이 속속 항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 운데 김응하 장군의 결사적인 항전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이에 입고 있던 한삼소매를 찢어서 '五月 五日 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자신이 타던 말의 갈기에 매어 주고 채찍을 쳐보냈다. 말을 떠나 보내고 난 뒤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주위를 둘러보니, 예하 3,000의 병력은 거의 없어지고 군관 60여 명과 사병 몇 명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거기에다 포탄은 남은 것이 없었고, 화살·창·칼 등도 모두 소진되거나 부러진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것은
맨주먹뿐이었다.
그러나 이 국만리 후차령에서 62명의 군관과 사병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44세의 짧은 일기를 마쳤다.
장군과 함께 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명단이 지금도 전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안 타깝게 한다.
이렇듯 애처로운 사연을 담고 있는 장군의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중을 뛰쳐나온 말도 주인의 뜻을 알았음인지 산과 강을 건너 3일 동안을 달려 주인의 고향인 광탄면
발랑리에 돌아와 주인의 죽음을 알리고, 슬피 울면서 숨을 거두었다 한다.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숙종 때에 정려되었다. 그뒤 200여 년이 지난 1829년(순조 29) 다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강진에 사우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 죽은 말의 무덤을 '義馬塚'이라 하였는데,
그 비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북방의 패자
조선 중기의 義士로 광탄면 발랑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有之, 본관은 延安, 종계변무로 광국공신이 된 後白의
손자이며 찰방을 역임했던 善慶의 아들이 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왜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시는 불행을 겪었다. 1594년 군인이 되어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출정하였고, 1597년 해남의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품직을 제수받았다. 광해군조에 들어 함흥
찬관을 거쳐 1618년 봄 평남 영유현령으로 승진하였다.
<참고문헌>
내고장 얼, 해남군편찬위원회, 해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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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沙月 李盛永(延安李氏宗報 1987년 봄호 통권제4호 게재, 增補및 제목 변경)
조선 광해조 때 명나라에서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한다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는데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서 도와 준 일이 있어서 조선 조정은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 선천군수 김응하를 좌영장으로 하여 1만 군사로서 출병을 하였다.
이 때 우리 延李의 忠毅公(휘 有吉: 청련 이후백의 손자)도 출전하였는데 충의공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특히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바 있고, 문무재략이 뛰어나 이
때는 승진하여 영유현령으로 있다가 우영장(右營將)이 되어 출전하였다.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심하(深河)에 이르러 명조군이 후금군과 대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전투결과 명나라 군사는 장졸이 다 죽고, 조선군사도 더 지탱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원수(강홍립)와 부원수(김경서)는 후금군에게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충의공은 최종까지 싸워서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손가락이 다 잘려서 더 이상 활을
쏠 수 없을 때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날이 3월 4일이었다. 충의공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였고, 숨을 걷우기 전에 옷소매를 찢어서 피로써‘三月四日死’(3월4일사) 다섯 글자를
써서 말 갈기에 매고 말을 체찍 질을 하여 보내고 목숨을 거두었다.
충의공의 말은 강을 건너고, 먼 길을 달려서 고향 집에 와서 비명을 지르며 울고 죽었다.
가족들이 죽은 말을 조사하여 갈기에 매여있는 혈삼(血衫)을 찾아 냈는데, 혈삼에는 위와
같은 다섯 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공의 동생 되는 별좌공(휘 復吉)이 압록강까지 가서 그 혈삼에 공의 혼을 불러 와
선산(파주군 광탄면 발랑리)아래 그 혈삼을 묻어서 장사 지내니 시체가 없는 무덤 곧
‘혈삼무덤’이 되었다.
그 충성스런 말도 그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사람들은‘말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근래에
‘義馬塚’이라는 조그마한 묘지석을 세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혈삼무덤(위 오른쪽)과 말무덤(아래)
그후 혈삼무덤의 주인 이유길(李有吉)은
① 인조1년(1623) 교지를 내려서‘심하순절(深河殉節)은 300년 역사의 우리나라가 금수
(禽獸)의 나라를 면하게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고,(深河殉節獨扶三百年綱常使我國得
免禽獸之域, 심하순절독부삼백년강상사아국득면금수지역)
② 숙종21년(1695)에도 교지를 내려서 찬양하고 ‘충신(忠臣)’에 정려(旌閭)하고
이조참판(吏曺參判, 종2품)의 증직(贈職: 죽은 후에 주는 벼슬)을 내렸다.
(箕封禮儀賴玆以扶 皇朝大恩賴玆以酬 命旌 特贈吏曺參判, 기봉예의뢰자이부 황조대은뢰자
이수 명정 특증이조참판)
③ 영조9년(1733)에는 교지를 내려서 심하순절을 높이 찬양하고 정려하였으며,(深河殉節使
國家忠義著旌天下其功大矣, 심하순절사국가충의저정천하기공대의)
④ 정조11년(1787)에도 교지를 내려서 심하순절을 찬양하였고, (深河殉節永有辭於天下後世
又 睢陽文山合而爲一, 심하순절영유사어천하후세 우 휴향문산합이위일)
⑤ 순조 때는 영의정(領議政, 정1품)에 가증(加贈)하고, 시호‘충의’(忠毅: 전쟁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았고-忠, 강직한 결단을 내렸다-毅)’를 내리고, 부조전(不祧典: 영구히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는 특전)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