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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列 |
榮(영) |
承(승) |
鉉(현) |
浩(호) |
東(동) |
燮(섭) |
在(재) |
錫(석) |
永(영) |
柱(주) |
有(유) |
壽(수) |
欽(흠) |
源(원) |
秉(병) |
煥(환) |
均(균) |
鏞(용) |
洪(홍) |
相(상) | |
始祖 |
39代 |
40代 |
41代 |
42代 |
43代 |
44代 |
45代 |
46代 |
47代 |
48代 |
分貫 |
20代 |
21代 |
22代 |
23代 |
24代 |
25代 |
26代 |
27代 |
28代 |
29代 |
다. 世와 代
雲孫 |
仍孫 |
昆孫 |
來孫 |
玄孫 |
曾孫 |
孫 |
子 |
自己 |
父 |
祖 |
曾祖 |
高祖 |
玄祖 |
8代孫 |
7代孫 |
6代孫 |
5代孫 |
4代孫 |
3代孫 |
2代孫 |
1代 |
0 |
1代祖 |
2代祖 |
3代祖 |
4代祖 |
5代祖 |
始祖를 一世로하여 차례대로 따져서 정하는 것이 世이며 자기를 뺀 나머지를 차례대로 따지는 것을 代라한다. (예:父子의 사이는 世로는 二世이고 대로는 一代다)
라. 系派(계파)
-김포파(단활재공파)
-청도파(천룡)(淸道派(天龍)) : 청도파(식성군파)
-청도파(사정공 술)(淸道派(司正公 戌)) : 청도파(사정공파)
-밀양파(생원공 축)(密陽派(生員公 丑)) : 밀양파(생원공파)
-근재공파(맹현)(覲齋公派(孟賢)) : 면천파(교리공파), 인천파(감찰공파),
양주파(현감공파), 진주파(판관공파), 영해파(현령공파), 원주파(진사공파)
-율간공파(중현)(栗澗公派(仲賢)) : 김해파(사직공파), 함안파(덕고공파)
-사의공파(계현)(司議公派(季賢)) : 창원파(첨지공파), 진주파(통정공파),
함안파(처사공파)하동파(주부공파),
-함안파(처사공파)(咸安派(處士公派))
마. 集姓寸(집성촌)
慶北 영덕군 영해읍 창수면 인양2동.
영해파 門中이 4백70여 년간 가풍을 이어온 마을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人物은 고려 때 절신 이오(李午)의 증손자요 성종 때 부제학을 지낸 이맹현(李孟賢)의 아들 이애이다. 임진왜란 때 明나라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의 산천경관을 보고 반드시 큰 人物이 나올 형세라고 감탄하고 이를 시기하여 영해부(寧海府) 시리목, 쟁이골 등의 산맥을 끊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애의 손자 이조참판 이함(李涵)이 인부를 동원, 산맥을 다시 이었고 그 후 이씨문중은 당대 천석의 부를 쌓기 시작했고 여러 석학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本貫地]黃海道 載寧郡
3.載寧李氏家藏舊譜序譯文(재령이씨가장구보서역문)
예전에 증조 할아버지께서 海鄕(해향)으로 오시어 거주함으로부터 나 不宵(불소)에 이르기까지 네번 代가 바뀌었는데 돌아보아도 동종의 친척이 없고 비록 現存한 일가가 있다 하여도 혹은 천리밖에 있고 혹은 오육 백리의 먼 地方에 있어서 서로 대면할 인연이 없으며 또한 내가 늦게 태어나서 이씨의 世譜(세보)를 얻어 보지 못하므로 항상 한탄을 삼았더니 병자년 가을에 일가 사람 이군 重光(중광)이 松羅察訪(송라 찰방)이 되어 하루는 나를 찾아왔다.
李君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나와 일찍부터 서로 알지 못하였다.
世代를 모두 물어본 후에 한 책자를 써내니 載寧 李氏의 족보이다.
이 譜牒(보첩)을 난리를 겪은 나머지에 얻었으므로 비록 유감된 바를 모두 해소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核心을 본 것은 자못 해박하고 심원하므로 내가 보고서 심히 기뻐하여 유숙하기를 청하니 李君이 수긍했다. 이에 집에 간직된 우리 先親이 手錄한 사보를 꺼내서 수일을 참고하여 보니 李君의 보책과 같은 것이 많고 다른 것은 적었다. 아 ! 뿌리와 가지 원천과 흐름이 스스로 친하고 성글며 멀고 가까운 분간이 한번 책을 펴 보며 명료하였으니 子孫된 자로 누구인들 孝悌(효제)의 감상이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요?
오직 월성(慶州)李氏는 벼슬이 고루 성만하여 세상에 甲族(갑족)이 되었고 代代로 족보를 保有하고 있으나 載寧 李氏는 始祖로부터 慶州 李氏에서 나누어지고 子孫도 京鄕(경향)에 흩어지어 쇠하고 한미하였으며 兵火에 덮치어 載寧 李氏의 族譜가 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月城 李氏 以後와 載寧 李氏 以前은 代數가 결실되었다.載寧으로 分貫된 以後에 이르러서도 세계와 휘자와 관직이 혹은 다르고 혹은 같은 곳이 있으니 이것이 우리 종족의 한 가지 큰 결함이 됨으로 우리 선친께서 늘 痛嘆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사는 곳이 궁벽하고 듣고 보는 것이 넓지 못하니 어느 곳에 좋은 子孫이 나와서
믿을 만한 구보를 구하고 널리 歷史를 상고하여 하나의 완보를 이루어 놓았어도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 족보는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여러代의 收集에서 이루어 졌으니 또한 永久토록 傳하여 慶州 李氏의 족보와 서로 表裡(표리)가 될 것이다. 이에 아우와 조카로 더불어 고증한 뒤에 옮겨 써서 종질에게 주어 보수하게 하고 또 뒷사람에게 무궁토록 傳하면서 고증하기를 기다린다.
崇禎 八年 丙子(一六三六)年 八月 十六日
後孫 時明(司宰令府君의七世孫으로 吏曹判書를 증직 받았다.)삼가 敍述함.
4.栗澗先生行狀(율간선생행장)
公의 휘는 중현 字는 준성 姓은 李氏이다. 시조의 諱(죽은 이의 이름)는 알평이니 新羅初期의 좌명공신이다. 高麗때의 휘 우칭이 재령군으로 封해져서 載寧으로 本貫을 삼게 되었다. 曾祖의 諱는 日善이니 사재령이고 祖父의 諱(후)는 오이니 進士인데 高麗의 국운이 끝남을 보고는 世上을 피하여 咸安의 모곡에 살았는데 이로 因하여 호를 茅隱(모은)이라 하였다.朝鮮王朝에서 여러 번 징소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別世했는데 병조참의로 증직(死後에내리는 관직)되었다.考의 諱는 介智(개지)이니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벼슬을 하지 않고 農事만 짓고 學問을 좋아 했는데 戶曹參判으로 贈職되었다. 비는 晋陽河씨이니 목사 경이의 딸이다. 正統 己巳年(世宗31年1449年)에 出生하였는데 재간과 도량이 넓고 원대하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글을 배워 읽을 적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아니했으며 이미 成長해서는 경서와 사서를 두루 읽고 더욱 四書와 낙민(程子와 朱子)의 글에 힘을 썼다.策文(책문에 답하는 글) 수천자를 잠간 동안에 곧 성취시키니 점필제 김종직이 백형 근제공(휘맹현)을 보고서 김곤옥우(金玉과 같은 兄弟)로써 칭허하였다.
임진년(성종3 1472年)에 兄弟가 함께 生員 진사과에 合格하고 병신년(成宗7 1476年)에 文科에 발탁되니 조정에서 人才를 얻었음을 칭하하였다. 추천되어 주서로 임명되어 經?(임금님 앞에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 입시하였는데 응시함이 마치 물 흐르듯이 막힘이 없으니 임금이 매우 사랑하여 수필을 써서 광연정에서 경연관에게 사연하였는데 公이 그 자리에 參與하게 되었다. 이에 어서를 등사하여 집에 보배로 간직하였다.
後에 正言이 되었다가 부수찬으로 전직되고 조금 後에 성균관사성으로 제수되었는데 성균관의 유생에게 과업하기를 가숙의 학생과 같이 하였다. 이내 수찬 겸 지제교로 任命되니 관합(홍문관과 예문관)의 文字를 公에게 質正하는 이가 많았다. 일찌기 경석(경서를 강의하는 좌석)에 入侍하여 大學을 강의할 적에 궁리 정심으로써 箴戒(경계)로 삼도록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서 들었다. 後에 헌납에 任命되니 公이 君主의 덕업을 힘쓰고 當時 폐단을 救濟하는 일로써 수백 언을 상소하여 올리니 이로부터 전랑. 전한. 대성에 任命하는 교지가 문득 많이 내렸다.
경술년(성종21年 1490年)에 통정대부(정삼품)에 승진되고 잇달아 三品의 청반(홍문관의 벼슬)에 任命되었다. 예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에 轉任되니 公은 좋은 時代를 만난 것에 감격하여 임금의 은혜를 萬分의 一分이라도 갚기 위해 힘쓰기를 希望하여 재이의 경계와 척리(임금의 외척)의 폐행(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 등 일이 發生할 때마다 시비를 논술하고 남김없이 말하여 숨김이 없었으며 임금이 채택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문득 上疏하여 체직(직무가 갈림)시키기를 願하였으며 언제나 一年 동안 한 관직에서 오래 머물지 아니했으니 진퇴의 정당함과 조수(절개를 지킴)의 엄정함이 이와 같았다.
임금이 일찍이 公의 사모와 대대가 때가 묻고 떨어진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가난하고 검소한 것이 이와 같은가”하고는 이내 命하여 品帶(官服에 갖추는 띠)를 하사하였다. 갑인년(성종25年 1494年)에 성종이 世上을 떠나시니 公이 여복(車여와 官服)을 진열한 뜰에 달려가서 哭하고는 이내 病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영달의 길에는 뜻이 없었다.
을묘년(1495年)에 연산군이 즉위하여 경연관으로써 교지가 있어 재촉해 부르니 여러 번 사양했으나 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잇달아 대사간. 병조참지에 任命되어 권신과 嬖倖(폐행)이 나라를 그르친 일을 남김없이 논핵(죄를 논하여 탄핵함)했으나 말이 採用되지 않으므로 마음을 決定하고 官職에서 물러나 故鄕에 돌아와서 栗澗(율간)의 집을 짓고는 栗澗이라 편액(글을 써서 문 위에 걸어 놓음)하고서 號를 삼았다. 아우 사의공(휘계현)과 더불어 전예를 討論하고 생도를 교수하며 山水間에 詩歌를 읊으면서 一生을 마치려 했는데 정사년(연산군3年 1497年)에 갑자기 영해부사로 任命하니 病을 핑계했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任命을 받아 임지로 가서 治政은 文敎를 숭상하였다.
무오년(연산군4年 1498年) 에 사옥이 일어나니 이극돈. 유자광의 무리들이 감정을 품고 없는 罪를 만들어 한 時代의 선류(선한선비)가 잇달아 주륙(죄를 몰아 죽임)되고 찬축(먼 곳으로 귀양 보냄)되니 김종직(?畢齊)김일손(濯 縷)김굉필(寒暄堂).정여창(一?)박한주(迂拙子 )가 모두 참혹한 화를 입게 되었다. 公이 일찍이 言官에 있을 때에 박한주 김일손과 더불어 동료가 되었으며 또 司諫金係行(사간금계행)(호보백당)과 더불어 궁내 폐행의 방자하고 횡폭한 것을 남김없이 말했던 까닭으로 公이 이때 外郡에 있었는데도 禍機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마침 그의 억울함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일이 그치게 되었으나 公은 이 消息을 듣고는 여러 賢人들과 더불어 罪人의 名簿에 함께 記載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에 한수의 절구를 읊으니
一死非難事 倫生反是羞 伶?獨立世 西望淚長流
일사비난사 윤생반시수 령빙독립세 서망루장류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생명을 아낌은(죽어야할 때 죽지 않고 욕되게 살기를 탐함은)부끄러운 일이다. 영락하게 혼자 세상에 남아 있으니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리네.”
이에 病을 핑계하고 체직되어 故鄕으로 돌아와서 두문 독서하면서 시국을 근심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스스로 그칠 수가 없었다.
그 後 몇 해를 지나서 양양에 어떤 重大한 일이 發生하니 조정의 공의가 公의 재간과 덕망이 일을 맡길 만 하다고해서 특명으로 이 고을의 府使로 任命되니 公이 말하기를
“無事한 時期에는 病으로 辭職하는 것이 옳겠지마는 有事한 時期에는 義理上 그냥 있을 수없다.”하고는 즉시 任地로 가서 다스렸더니 一個月이 되기 前에 형옥을 번거롭게 쓰지 않았는데도 한 고을이 안온하게 되었다. 감사가 그 공적으로써 위에 아뢰니 特命으로 가선대부(종2품)에 승진시켰다고 한다.
무진년(中宗3年 1508年)에 별세하니 향년 육십 세이었다. 부고가 위들리니 임금이 슬퍼하면서 도신(감사)에게 命하여 초상과 장사에 쓸 물품을 厚하게 주도록 하였다.故鄕인 咸安 仁谷의 祖父 모은공 무덤 아래 반장하니 遠方의 學徒와 別邑의 守令들이 회장자가 千名에 가까웠다.
公은 兄弟가 四人인데 차례가 둘째에 있었다. 伯兄 부제학공(호 근제)은 經學과 文章으로 當世에 명성을 드날려서 임영대군(세종제사자구)의 외손서가 되어 임금이 第宅을 하사하여 서울에 居住하게 했으니 마침내 祖上의 祭祀를 公에게 傳해 맡겼으므로 公의 후손이 지금까지 봉사하는 宗孫이 되었다.
公은 부여 白氏 별시위 계분의 딸에게 장가를 가서 二男二女를 낳았는데 長男 포는 충순위이고 次男 무는 중종조에 정국원종일등공신이다. 딸은 황협과 어응진에게 出嫁했다.王包(포)의 아들은 景裕(경유)인데 그 아들 대형이 임진왜란에 순국한 이유로서 판결사로 추증되었으며 珷(珷)의 아들은 景成인데 현감이다. 景成은 아들이 넷인데 長男 ?(면)은 장락원 主簿(종육품)이고 次男 익은 우윤이고 三男 정은 유일(과거를 보지 않고 학행으로 발탁)로 집의에 任命되었는데 壬辰倭亂에 義兵을 일으켜 학봉 금성일을 따라 功을 세워 官職이 목사에 이르렀고 四男 숙은 군수인데 또 의병을 일으켜 功을 세웠다.
公은 天性이 순효(至誠을 다하여 섬기는 효성)하여 어릴 때부터 생각하기도 전에 그 뜻을 받들어 至誠으로 봉양하는 節次가 그 극도에 도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兩親의 상사를 거듭 만나서는 禮節을 다하여 삼년상을 마쳤다. 뜻을 지킴이 강직하여 처음 벼슬할 때부터 전중에 입시하면서 거리낌 없이 말하고 곧은 말로 간함으로써 權力과 地位가 있는 사람에게 미움을 당했으나 後悔하지 아니했다. 陳述한 말이 施行되지 않으면 기미를 살펴보고는 勇敢하게 물러나와 故鄕에 돌아와서 임천에 隱居하면서 경사서적으로써 한가한 生活을 하고 世上을 마치었다.우의정 신헌 文貞公 허침은 公의 墓에 銘하기를 “성질은 온양하고 처사는 급거함이 없으며 家庭에서는 인효를 칭하고 조정에서는 충정을 승인한다.”고 하였으며 한강 정문목공(鄭述)은 읍지(함주지)에 찬술하기를 “公以局量文華歷踐未嘗以貴加於人(공이국량문화역천미상이귀가어인)”(公은 局量(국량)과 문화로써 華職(화려한 官職)을 歷任하였지만 일찍이 自己의 귀현(존귀하고 현달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모멸하지 아니했다.)이라고 하였다.
보국숭록대부 전행 이조판서 양천 허전은 찬술함.
(부산대학교 교수 후손 재호 국역)
5.栗澗先生墓碣銘(율간선생묘갈명)
公諱仲賢字遵聖 載寧人父諱介智 贈參判 母河氏牧使敬履之女己巳生 咸安茅谷
공휘중현자준성 재령인부휘개지 증참판 모하씨목사경이지여기사생 함안모곡
里第戊辰 卒於襄陽歸葬於仁谷祖 贈參議午墳前 坐坤向艮?別侍衛 白啓芬女
리제무진 졸어양양귀장어인곡조 증참의오분전 좌곤향간추별시위 백계분여
生二男長男曰王包忠順衛次曰珷內禁衛公早以局量文華知名中外壬辰生員進士丙申
생이남장남왈포충순위차왈무내금위공조이국량문화지명중외임진생원진사병신
文科別試其仕於中則歷國學春官臺省寺院至于參知外歷一縣二府鳴呼公之在世也
문과별시기사어중칙역국학춘관대성사원지우참지외력일현이부명호공지재세야
性質溫良處事無競家稱仁孝朝允忠正位不稱德僅至參政壽不應仁未過六*令玆刻
성질온양처사무경가칭인효조윤충정위불칭덕근지참정수불응인미과육*령자각
石以示千億庶幾來仍敬守罔 缺
석이시천억서기래잉경수망 결
左義政 陽川 許琛撰
좌의정 양천 허침찬
6.葛村 先生 實記(갈촌 선생 실기)
諱는 潚 字는 汝澄 號는 葛村 新羅의 佐命功臣 謁平의 後孫 高麗中期에 諱 禹?이 門下恃中으로써 載寧伯에 封하니 子孫이 이로 인하여 本貫으로 삼게 되었다.(12대 조부)
<詩>1 鳳鳴停에서
我愛淸區結小廬 滿天風月滿床書(아애청구결소려 만천풍월만상서)
世間榮辱何須說 吟?時時樂有餘(아애청구결소려 만천풍월만상서)
<풀이>내가 좋아하는 맑은 곳에 조그만 집을 지으니, 하늘에 가득 찬 풍월과 책상에 가득 찬 서책이네
세상의 영화와 치욕은 어찌 말할 필요가 있으랴 때때로 시를 지어 읊으매 즐거움이 많다.
<詩> 2 松亭
松亭之上一區巖 爲送殘年??????(3字缺)(송정지상일구암 위송잔년??????(3자결)
日暖前溪魚潑潑 春深遠樹鳥??(일난전계어발발 춘심원수조남남)
<풀이>송정 위에 한 곳의 바위는 잔년(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보내기 위해(글 석자가 없음)앞 시내에 날씨가 따뜻하니 물고기가 펄펄 뛰고 먼 나무에 봄이 짙으니 새소리가 요란하다.
<詩>3 朴甥姪 震英에게(박생질 진영에게)
孤城危一髮 社?存亡秋(고성위일발 사직존망추)
鬱鬱滿腔憤 長江不盡流(울울만강분 장강불진류)
<풀이>외로운 성이 한 가닥의 머리털처럼 위태하니 사직(社?:국가라는 뜻)이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중요한 때이네
답답한 몸의 분한 마음은 긴 강물이 다함이 없이 흘러내리듯 하네.
<詩>4 許德庵 洪材의 挽詞(허덕암 홍재의 만사)
令子吾佳壻 從遊十載餘(영자오가서 종유십재여)
流離陪杖? 傾倒折葵蔬(류이배장구 경도절규소)
存沒驚朝夕 經過憶里閭(존몰경조석 경과억리여)
今秋菊花發 回首淚盈?(금추국화발 회수루영거)
<풀이>영자(令子:남의 아들의 경칭)는 나의 훌륭한 사위인데 십여년을 서로 교유하였네.
이리저리 방랑할 적엔 장구(杖?:지팡이와 짚신)를 모셨으며 반갑게 맞이할 적엔 미나리나물을 대접하였네.
삶과 죽음이 조석에 놀라게 하고 지나갈 적엔 이려(里閭:동네 어구에세운 문)가 생각나네.
올가을도 국화가 피니 머리를 돌려보매 눈물이 옷깃에 흥건하네.
7.咸安에 600年된 高麗땅(牆內(장내)담안)
잊혀진 王朝 高麗. 우리는 지금껏 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를 배우면서 600년 왕조(王朝) 高麗에 대해 관심(關心)을 갖지 않았다. 高麗는 우리 기억 속에서 정말 사라졌을까. 918년 太祖 王建이 건국한 고려의 領土가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엄연히 存在한다.
바로 咸安郡 山仁面 모곡리 牆內(장내) 마을이다. 마을 入口 세워진 古色 蒼然(창연)한 碑石의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글귀가 눈길을 끈다. 高麗洞壑은 ‘高麗洞 골짜기’란 뜻이다. 기와집이 즐비한 마을 앞에는 高麗田이라고 불리는 沃土 3000餘 坪이 펼쳐져 있다. 굳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마을 안에서 自給自足이 可能하도록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장내(牆內), 곧 ‘담장 안’이란 뜻으로 지은 것이리라. 自身이 살던 곳을 高麗洞이라 하고 平生 마을 밖으로 나가길 拒否했던 우리 祖上님 高麗의 臣下로서 志操(지조)를 지켰던 모은(茅隱) 이오(李午)할아버지이시다. 茅隱(모은)할아버지는 載寧 李氏로 일선(日善)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氣槪(기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當代 碩學인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 牧隱 李穡(목은 이색) 의 門下에서 學文을 精進하여 여러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恭讓王(공양왕) 때 成均館 진사 試驗에 合格했으나 國運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當時 高麗 朝政은 李成桂의 獨舞臺(독무대)였다. 이성계는 1391년 정몽주를 살해하고, 곧 조준(고려말 朝鮮 初期 文臣 자는 명중) ,정도전, 남은(고려.조선 時代 文臣 개국공신) 등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었다. 高麗가 亡한 것이다.
高麗가 망하자, 高麗 조정에서 벼슬을 했던 많은 선비들은 새 朝政인 朝鮮에 反對하여 벼슬을 拒否하고 낙향하여 節槪(절개)를 지켰다. 그 중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高麗에 忠誠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란 고개에서 官服을 벗어던지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이때 조선왕조는 杜門洞을 포위하고 高麗 忠臣 72명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杜門洞은 京畿道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이다.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에서 由來되었다.
茅隱할아버지도 이때 杜門洞으로 들어갔다. 茅隱할아버지가 杜門洞으로 들어간 것은 스승인 포은, 목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杜門洞에 머물던 茅隱할아버지는 뜻을 같이하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한다. 杜門洞에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한 茅隱할아버지는 모곡 땅에 이르러 자미화(百日紅)가 반발한 것을 보고 平生 살 곳으로 정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高麗洞 入口에는 자미화가 그대로 있는데, 茅隱의 後孫들과 興亡을 같이 한다고 傳해지고 있다. 茅谷에 定着한 茅隱할아버지는 마을 둘레에 담장을 쌓았다. 담장 안은 高麗 땅이라고 여겨 高麗洞이라고 표지석을 세웠다. 담장 밖은 朝鮮의 땅이 되었지만 담장 안은 여전히 高麗의 땅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自給自足을 위해 손수 논과 밭을 일구었다. 朝鮮 땅에서 나는 穀食을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의 表現이었다. 옛날 中國의 忠臣 백이와 숙제는 義理를 지키고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 먹으면서 周나라의 穀食은 먹지 않았는데, 茅隱할아버지도 이들을 본받고자 한 것이리라.
茅隱할아버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書冊을 벗 삼아 고된 날들을 보냈다. 달이 밝은 밤이면 亡國의 臣下로서 멀리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슬픔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밤마다 바다에서 떠오른 외로운 달을 맞이하고
해마다 구기자·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 하네
끝내 돌아봐도 태평시대 만날 수 없으니
소먹이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려 하네.’
남쪽 땅 외진 곳에 定着한 茅隱은 高麗 王朝의 回復을 항상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행여나 좋은 소식이 들릴까 기대했지만, 바라던 太平時代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高麗洞에서 農事를 지으며 사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한 것이다
훗날 太宗 이방원은 茅隱할아버지를 여러 차례 불렀다. 흉흉하던 民心을 돌리기 위해 朝鮮의 太祖나 太宗은 高麗의 臣下로서 절개를 지키던 선비들을 수차 회유하였다. 茅隱할아버지도 회유 對象이 되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절개를 꺾을 茅隱할아버지가 아니었다. 高麗의 臣下로서 朝鮮 朝政에 벼슬할 수 없다는 결연한 意志를 밝히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그의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高麗王朝의 유민이니 어찌 新王朝에 벼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이후라도 절대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官職名을 使用하지 말고 또 나의 신주도 이곳 高麗洞 담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역시 朝鮮王朝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茅隱할아버지의 後孫들이 끝끝내 高麗사람으로 산 것은 아니다. 그의 孫子 때부터는 朝鮮 朝政에 벼슬을 하였다. 朝鮮이 建國한 以後 태어났으니, 朝鮮 百姓이기 때문이다.
지금 高麗洞에는 600년 전 茅隱할아버지가 놓은 주춧돌을 그대로 사용한 宗家가 그대로 保存되고 있다. 茅隱할아버지의 後孫들이 祖上의 有志를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茅隱할아버지의 墓碑에는 아무 글자도 없다. 나라 잃은 臣下가 무슨 말을 남기겠냐는 遺言에 따라 글자 한 자 없는 백비를 세웠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茅隱할아버지이시지만, 그의 절개는 600년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8.高麗洞 宗宅의 ‘전복우물’에 깃들인 孝心
高麗洞 茅隱 宗宅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복정(鰒井) 이라고 부른다. ‘전복우물’이라는 뜻이다. 우물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전복’이 들어간 사연이 있다.
茅隱의 현손 이경성(李景成)은 孝誠이 至極하여 老母를 극진히 奉養하였다. 그가 縣監 벼슬만 하는 것을 본 南明 조식 선생이 “어찌하여 더 벼슬을 하지 않는가. 하니 “老母를 奉養하기 위해서 벼슬을 더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한다.
그의 婦人 여주 이씨도 시어머니를 섬기는 精誠이 지극하였다. 病으로 자리에 누운 시어머니가 하루는 전복을 먹고 싶다고 며느리에게 말을 하였다. 시어머니의 말을 들은 며느리는 전복을 당장 구하려 했지만 산골이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며느리는 百方으로 전복을 구하러 다녔다. 그 精誠에 하늘이 感動했는지 어느 날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 며느리는 전복을 料理하여 시어머니에게 드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같이 먹을 것을 권했다. 이씨 부인은 전복이 먹고 싶었지만 시어머니를 위해 전복을 먹을 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시어머니를 위해 善意의 거짓말을 했음에도 李氏는 그 후, 父母를 속인 罪責感을 한 平生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英祖朝 이름난 宰相 유척기(1691-1767)가 慶尙監司로 왔을 때, 부임기념 白日場에 詩題를 “平生不食) 복어회(鰒魚膾)”로 내었다는 逸話가 전한다. 이 복정은 600 年 前 茅隱 先生이 파서 使用한 것으로 아무리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9.11代 할머니 貞夫人 安東張氏 實記
墓所 慶北 安東市 ?山面 水谷洞 所在
遺蹟碑 慶北 英陽郡 石保面 阮里 2里 所在
1990年 4月에 除幕하였고 當時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朴永錫이 碑文을 지었음.
◆貞夫人安東張氏 媤家 載寧 李氏 家系圖
禹?(우칭)始祖 載寧君(분관 시조)
日祥(일상) 日善(일선)사재령
午(오)(17대)
介智(개지)(16대)
孟賢(맹현) 仲賢(중현) 叔賢(숙현) 季賢(계현) (15대)
근재공 율관공(우리할아버지) 사이공
六子 ?(애)(14대)
殷輔(은보) 殷佐(은좌)(13대)
光玉(광옥) 涵(함)(12대)
時淸(시청) 時亨(시형) 時明(시명) 時成(시성) 時震(시진) (11대)
(貞夫人安東張氏)
尙逸(상일) 徽逸(휘일) 玄逸(현일) 嵩逸(숭일) 靖逸(정일) 隆逸(륭일) 女(三人)
(광산김씨소생) (안동장씨소생) (안동장씨소생) (안동장씨소생) (안동장씨소생) (안동장씨소생) (김씨1장씨2)
◆行實에 대한 記錄 行實記
先? 夫人의 姓은 張氏이니 安東府 金溪里의 사람이다. 高麗의 太師 貞弼의 後孫으로서 代代로 본 고을의 드러난 姓氏가 되었다. 아버지의 諱는 興孝인데 학문을 좋아하고 行實이 篤實했던 이유로써 學者들의 스승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敬堂先生이란 분이다.
安東 權씨에게 장가들어 宣祖31년(1598)11월 乙巳日에 夫人을 낳았다. 夫人은 性品이 聰明하고 慈孝하며 訓戒가 디는 말을 듣기 좋아 하였다.敬堂先生은 딸 한분인 夫人에게 小學과 十九史略 등을 가르쳤더니 애쓰지 않고 뜻을 通達하였다.
成人이 되자 자신이 생각하기를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은 女子가 할 일아니라 여기고 이런 일을 끊어버리고 하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詩章과 절묘한 筆跡(필적)은 世上에 많이 전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나이 19세 때에 繼室(계실)로 시집왔는데 先君의 諱는 時明 字는 晦叔(회숙)이며 시부모 섬기기에는 孝道를 다하였으며 前夫人(光山 金氏)의 아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가르치고 사랑해주었다고 한다.
貞夫人 安東張氏는 行職 宣敎郞(행직 선교랑)으로서 吏曹判書로 追贈(추증)된 石溪先生(석계선생)의 繼配이고 文敬公 葛庵先生(문경공 갈암선생)의 어머니이시다.
◆貞夫人安東張氏 詩
◆ 蕭蕭吟(솔솔 내리는 빗소리)
窓外雨蕭蕭(창외우소소) 창문밖에 솔솔 내리는 빗소리
蕭蕭聲自然(소소성자연) 솔솔 내리는 빗소리는 자연스럽기도 하네.
我聞自然聲(아문자연성) 자연스러운 빗소리를 내가 듣고 있으니
我心亦自然(아심역자연) 내 마음도 빗소리처럼 자연스러워지네.
身是父母身(신시부모신) 이 몸은 부모님께서 낳으신 몸이니
敢不敬此身(감불경차신) 감히 이 몸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네
此身如可辱(차신여가욕) 이 몸을 만약 욕보인다면
乃是辱親身(내시욕친신) 이는 곧 어버이를 욕보이는 것이다.
◆鶴髮詩(백발 늙은이의 딱한 사정을 대변하는 시)
이웃마을 女人의 男便이 변방 수자리를 떠나가니 80세가 된 남편의 어머니는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했으나 슬퍼한 끝에 거의 생명을 잃을 뻔 하였다는 그들의 사정을 슬피 여겨지었다는 시.
鶴髮臥病(학발와병) 백발 늙은이가 병들어 누웠는데
行子萬里(행자만리)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네.
行子萬里(행자만리)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니
曷月歸矣(갈월귀의) 어느 달에나 돌아 올 것인가
鶴髮抱病(학발포병) 백발 늙은이가 병을 지니고 있으니
西山日迫(서산일박) 서산에 지는 해처럼 생명이 위급하네.
祝手于天(축수우천)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서 하늘에 빌었으나
天何漠漠(천하막막) 하늘은 어찌 그렇게도 반응이 없는고.
鶴髮扶病(학발부병) 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或起或(혹기혹)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今尙如斯(금상여사)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絶?何若(절거하약)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나간다면 어찌할 것인가
◆손자 신급에게 지어 준 시 贈 孫新及(新及은 ?의 어렸을 때 이름)
見爾別友詩(견이별우시) 네가 벗을 작별한 시를 보니
中有學聖語(중유학성어) 그 속에 성인을 배우려는 말이 있다.
余心喜復嘉(여심희복가) 내 마음 기뻐서 다시 칭찬하여
一筆持贈汝(일필지증여) 짧은 시 한 편을 지어 너에게 준다.
◆손자 성급에게 지어준 시 贈孫聖及(聖及은 栽의 어렸을 때 이름)
新歲作戒文(신세작계문) 새해에 네가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니
汝志非今人(여지비금인) 네 뜻은 지금의 사람과는 다르구나.
童子已向學(동자이향학) 어린 아이가 벌써 학문에 뜻을 두니
可成儒者眞(가성유자진) 참다운 선비를 이루게 될 것이다.
◆드물고 드문 경사 稀又詩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사람이 칠십까지 사는 것은 옛날부터 드문 일인데
七十加三稀又稀(칠십가삼희우희) 칠십 세살까지 사니 드문 중에 드문 일이네
稀又稀中多男子(희우희중다남자) 드물고 드문 중에서 사내아이가 많으니
稀又稀中稀又稀(희우희중희우희) 드물고도 드문 중에서 드물고도 드문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