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麻城)은 문경시의 중앙부에 자리잡은, 74.74㎢의 넓이에 4천6백여 명이 모여 사는 면 지역 벽촌으로 내 삶의 터다. 동음이 주는 연상작용일지는 모르나, '마성(麻城)'이라는 이름에는 왠지 '마성(魔性)'이 깃들여 있을 것도 같고 '마력(魔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마성'이라는 이름은 이 땅을 '마고성면(麻姑城面)'이라고 이름한데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행정 명칭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마성면(麻城面)'이라 했다는 것이다. '마성'이라는 지명의 연원이 된 마고성, 즉 마고산성(麻姑山城)은 괴력을 가진 신선 할미 마고(麻姑)가 쌓은 성이라는 전설이 있고 보면, '마성' 그 이름 속엔 어떤 '마성(魔性)' 같은 것이 깃들여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남으로는 경북 팔경의 제일이라 하는 진남교반(鎭南橋畔), 북으로는 영남대로의 주관문인 문경새재와 인근하고 있는, 수려한 경관을 지닌 마성은 사람의 발길을 끄는 마력을 지니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한 브르통의 말을 따라 걷기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나에게 있어 걷기란 참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걸을 때는 자동차의 힘을 빌었을 때의 구속감, 이를테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장소와 속도에 얽매어야 하는데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향유하고 싶은 시간과 장소를 온몸으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어 참으로 편안하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걷기는 최선의 운동 방법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신체의 곳곳을 고르게 단련시켜 주고 모든 기능을 원활하게 하여 심신의 건강을 굳건히 지켜준다. 걷기를 통하여 높은 혈당치를 정상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은 나의 행복한 경험이다. 그리하여 걷기는 언제나 나를 참 즐겁게 한다. 마성, 이 삶의 터에서 걷기에 나선다. 일상의 산책로를 찾아 길을 찾아 나선다. 일과를 마친 후에 일상을 정리하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사색의 길이 어디 없을까. 싱싱한 대지의 기운을 호흡하고 싶다. 풋풋한 산의 정기를 마시고 싶다.
마성은 산의 성이다. 백화산, 조정산, 단산, 봉명산, 주흘산 등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야는 산을 벗어날 수 없다. 산은 성채(城砦)가 되어 마성을 둘러싸고 있고, 마성은 그 산의 품 안 강보에 싸인 어린것마냥 포근히 안겨있다. 그러나 마성에서 산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산은 마성의 둘레에서 웅자를 비추어 주고만 있을 뿐, 그 몸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굽이진 마을길을 걷고 걸어 한참을 지나도 산은 멀기만 하다. 이 골목 저 도로를 지나면 흙과 자갈이 있고 풀과 나무가 사는 길이 있을까. 팍팍한 포장도로를 희망으로 인내하며 걷고 걷는다. 아스팔트며, 콘크리트로 포장한 도로가 자꾸 앞장을 선다. 이 한촌 벽지에 웬 포도(鋪道)가 이리 많은가. 탓할 일만은 아니리라. 궁촌에 사는 사람인들 문명의 편리를 누리지 말란 법이 있는가. 잠시 생존의 절박함을 간과하고 한가의 사치에 빠진 것 같아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 가장자리 한 곳에 아쉬움이 스미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리 많지 않은 인가에 별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동네는 조용하기만 하다. 늘목, 안늘목, 구점, 뻘띄기, 이름도 신기한 마을들이 산야에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다. 간혹 보이는 교회의 오뚝한 첨탑이 이채롭다. 냇물이 마른 갈대 숲 사이로 자갈을 헤치며 가녀리게 흐르고, 들판엔 검은흙이 봄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을 머리에 인 크고 높은 철골 구조물들이 고즈넉한 동네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곳곳에 서 있다. 나름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축사(畜舍)들이다. 근골만 서 있을 뿐 비어 있는 곳도 있지만, 누런 빛깔의 커다란 소들이 들어 있다. 소들은 쉬지 않는 되새김질로 먹이를 먹고 있다. 먹이를 먹기 위해 살고 있고,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먹고 있다. 분뇨 냄새가 지독하다. 이런 냄새를 맡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그것은 기우(杞憂)다. 이 냄새는 이곳 사람들의 생존이자 생활이기 때문이다. 삶의 원천을 이루는 것이다. 구린 냄새를 관용하며 다시 포장도로를 걷는다. 갑자기 넓어지는 길, 차선이 단정하게 그어진 말끔히 단장된 길이 나타난다. 찾는 길은 이런 게 아니라는 나의 발버둥은 무력하기만 하다. 한참을 걷자 산이 문득 다가서는가 싶더니, '최고 시설 자랑말고 최고 안전 자랑하자'라는 표어를 큼지막이 써 붙인 철판 바리케이드가 길을 무참히 끊어버린다. 바리케이드 너머에서는 요란한 중장비 소리와 함께 산자락이 참담히 잘려 나가고 있다. 골프장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쉬움이 스며오던 가슴 가장자리가 잘려 나가는 듯했다. 맥없이 발길을 돌린다.
다시 포장도로를 걷고 검은 밭머리를 돌아 분뇨 냄새 풍기는 축사를 지나간다. 드디어 산골짝이 보인다.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는 냇가에 버들개지가 흔들리고 있고, 산비탈엔 상수리 나목이며 굽은 솔이 보이고, 마른 풀이 바람결에 날리고 있다. 그런데 웬일인가. 산골짝 길도 널따란 포장도로다. 갈라지기도 하고 청태도 끼어 있는 콘크리트길이다. 조금 더 오르다보면 포도가 끝나고 정겨운 오솔길이 나타나겠지. 풀이 있고 자갈돌이 있을 작은 길을 그리며 오르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만다. 포도는 끝날 줄 모르는데 골짜기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짙어오는 땅거미 때문일까. 산비탈의 흙이 새까맣다. 그대로 석탄 덩어리다.
골짜기에 덮여오는 어둠을 이길 수 없어 오름 길을 접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낡은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안전제일, 웃으면서 출근한 길 웃으면서 퇴근하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아, 이곳이 바로 지난날 탄광이 있었던 곳이로구나. 마성은 문경의 중심 탄광 지구로서 광업이 한창 왕성할 때는 가행 광구(稼行鑛區)가 26개소나 되었다고 하더니, 이 골짜기에 바로 그 광구들이 있었던가 보다. 마지막 탄광이었던 봉명탄광이 문을 닫은 것이 1991년이라니, 폐광된 지 십여 년도 넘었건만 광부의 안전을 걱정하는 구호는 아직도 남아 주민들 거의 전부가 광부였다던 지난날 마성의 애환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이 널따란 포장길이 바로 수많은 광부들이 출·퇴근을 하고 캐어낸 석탄을 분주히 실어 나르던 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포장길이 그리도 많은가 보다.
다시 포장길을 걸어 축사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한참을 또 걸어야 할까 보다. 숱한 시간을 헤매었건만 내 일상의 산책로로 삼을 만한 길은 없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만을 진탕 밟았을 뿐이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겠지만, 그 편리의 이면에 잃어버린 것도 없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감정의 사치일까, 이기의 아집일까. 고향 동네의 소담스런 뒷동산이 그립고, 전임지였던 선산(善山)의 비봉산 길이 그립다. 한 시간 남짓하면 오르내릴 수 있었던 그 길,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정겹게 안겨오던 그 길, 정상에 오르면 등판에 상쾌한 땀방울이 솟게 하던 그 길, 얽히고 설킨 삶의 일과 생각을 가다듬게 해 주던 그 길…….
그러나, 이제는 마성이 내 삶의 터다. 사랑으로 보듬어가야 할 내 삶의 자리다.
"부귀한 처지면 부귀하게 행하고 빈천하면 빈천하게 행하며, 오랑캐에 처하면 오랑캐로 행하고 환란에 처하면 환란에 맞게 행한다.(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中庸>)"고 했다. 어떤 경우에 처하든 그것의 처지에 맞게 행하라는 말이다. 다가온 상황을 즐기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스팔트면 어떻고 콘크리트면 어떤가. 흙이 없고 돌이 없으면 어떤가, 풀이 없고 나무가 없으면 어떤가. 마을길을 걸으며 마을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면 흔쾌히 걸으리라. 그 삶을 사색하며 걸으리라. 그 사색을 사랑하며 걸으리라.
길을 찾았다. 지금의 처지에 대한 사랑, 그 삶의 길을―.
어둠을 싸안으며 마성의 밤을 걸어 집으로 간다. 저 건너 고속도로의 불빛이 마성의 밤을 지키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