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현실정치에 대하여 침묵하던 전북대 신방과의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 사상 9월호에 오랜만에 글을 남겼다.
노무현의 기회주의, 노무현과 그 일행의 증오정치,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하여, 3.12 대통령 탄핵사태의 진실, 4.15총선의 진실과 민주당의 운명 등등 정치 현안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특히 강교수는 이 글에서 민주당 분당과 탄핵과정을 거치며 벌어졌던 개혁세력들의 분열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민주당에 대하여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강교수가 집중적으로 비판한 부분은 노무현이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정치를 기회주의판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 노무현의 대통령 후보 시절 민주당에서 이쪽 저쪽 눈치만 보던 행태적 기회주의자들이 졸지에 ‘개혁 투사’로 변신했다. 이들은 자신의 유전자에 ‘개혁’이 박혀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노무현 정권의 요직에 진출하거나 실세로 군림하게 되었다. 반면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자신의 안전에 개의치 않고 온갖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은 막판에 노무현의 기회주의에 줄 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반(反)개혁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다음은 월간 인물과사상 측이 보내온 보도자료용 요약본이다.
조중동의 음모에 휘둘리는 노무현: 2004년 7월의 한국정치
노무현의 기회주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국사회는 전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기회주의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쟁의 핵심이 기회주의라는 걸 깨닫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개혁’이라는 포장지가 워낙 화려한데다 뜨거운 정열의 소용돌이가 그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기회주의 논쟁이었다는 건 오직 시간만이 밝혀줄 일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정점을 향한 일련의 줄서기와 줄바꾸기 과정을 거친 후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과거 한나라당에 몸을 담고 한나라당의 집권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투사들이 아무런 사과 한마디 없이 하루아침에 ‘개혁 영웅’이 되었으며, 노무현의 대통령 후보 시절 민주당에서 이쪽 저쪽 눈치만 보던 행태적 기회주의자들이 졸지에 ‘개혁 투사’로 변신했다. 이들은 자신의 유전자에 ‘개혁’이 박혀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노무현 정권의 요직에 진출하거나 실세로 군림하게 되었다. 반면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자신의 안전에 개의치 않고 온갖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은 막판에 노무현의 기회주의에 줄 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반(反)개혁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탄핵 이야기는 꺼낼 필요조차 없다. 이 모든 게 탄핵 사태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옳건 그르건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걸 좋아한다는 점에선, 노무현은 과거의 독재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목숨을 거는 사람에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감각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 글에서 노무현과 그 일행의 기회주의에 관한 부분에 대해선 지금 동의할 필요는 없다. 논쟁을 한다 해도 답도 없다. 모든 건 시간만이 답해줄 수 있다. 기회주의는 단물을 찾아 화려한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의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은 화려한 날개에 주목하지만 날개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물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단물을 빨던 사람들이 노무현의 임기 말이나 임기 후에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고 나서 혹 기억이 난다면 그때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주기 바란다.
사실 안희정 사건이야말로 노무현이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말해주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노무현이 안희정을 비롯하여 지난 대선에서의 1등 공신들을 생각했다면 대선자금 문제는 그냥 덮고 가되 앞으로의 정치자금 개혁을 위한 방안 모색에 주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노무현은 정치자금 개혁에 있어서 큰 진전을 이룬 동시에 열린우리당을 제1당으로 만들 수 있었다.
노무현은 확실히 ‘보통사람’은 아니다. 보통사람으로선 노무현의 그런 대국적인 행보가 인간적으론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니 여기서 사람의 그릇 크기가 나타나는가 보다. 그러나 이왕 저질러진 일인 만큼, 안희정의 요청대로 안희정은 무겁게 벌해야 할 것이며, 훗날에라도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의 살신성인적인 결단이 훗날 ‘잔인한 정략’으로 욕먹지 않기 위해서도 그건 꼭 필요한 일이다. 노무현은 대통령 임기 후 남은 여생을 안희정과 그와 유사한 경우에 처한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노무현 일행의 ‘증오의 정치’
왜 정치에 대해 침묵하는가? 그간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간 동지애를 느꼈던 사람들과 싸우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간디는 “국민을 비굴하게 만드는 정치가 가장 나쁜 정치”라고 말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뜨거운 동지애를 나눴던 사람들을 원수처럼 싸우게 만드는 정치야말로 가장 나쁜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노무현은 예전의 노무현이 아니다. 그는 어느새 어설픈 마키아벨리가 되었다. 조악한 이분법을 휘두르며 자신의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선동가가 되었다. 한편에선 과거 그의 지역문제에 대한 진실성, 그 아름다운 도전조차 의심케 하는 발언들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노무현 일행은 지금 ‘증오의 정치’를 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증오의 정치’에 대한 유일한 면죄부는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한심한 작태다. 왜 그들을 그토록 과대평가 하는가? 나는 노무현이 조중동의 음모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무현을 화나게 만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비판이 워낙 수준 이하인데다 악의적이라 효과는 마찬가지다.
정치가 단지 적대세력의 행위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면 노무현의 정치는 옳다. 노무현의 흠을 잡을 시간이 있으면 그 전선에 뛰어들어 적대세력을 깨는 데에 조금이라도 일조해야 한다. 이게 노무현 지지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반사작용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하여
노무현과 노 정권이 범하고 있는 ‘이분법 정치’의 뿌리는 민주당 분당에 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너무 크게 너무 많이 떠들어댔다. 자기 말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진짜 정치개혁을 하고 싶으면 국민에겐 “정치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외치면서 작으나마 실질적인 변화로 국민을 감동시켜야 할 텐데 노 정권은 그간 정반대로 해왔다. 입만 열었다 하면 웬 허풍이 그리도 센지! 허풍은 더 센 허풍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허풍의 악순환’이 발생했다. 언행일치가 될 리 만무하다. 예컨대, 신기남의 경우, 민주당 분당 전의 태도와 열린우리당에서 크게 한자리 차지하고 난 이후의 태도 변화는 너무도 드라마틱해 한 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집단적 기회주의이자 시대적 광기(狂氣)로 이해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건 그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집단이 어떤 명분을 선점해 그걸 여론재판으로 치고 나가면서 자신은 선(善)의 편에 서고 다른 집단은 악(惡)의 편으로 몰아넣는 식의 싸움질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싸움질은 옳지도 않거니와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선 성공적인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정권의 수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독선과 오만에 가득 차 내내 실속 없는 싸움질만 하다가 끝나고야 말리라는 암울한 전망이 이미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잉태돼 있었던 것이다.
기회주의로 일어선 정당은 언젠가 또다른 기회주의 부메랑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을 가장 큰 목표로 내세웠지만, 한국 정치판을 기회주의의 잔치판으로 만든 1등 공신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3·12 대통령 탄핵 사태의 진실
못된 자들이 저지르거나 애초부터 상호 적대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왕따는 당하는 사람에게 파멸적인 상처를 주진 않는다. 당하는 자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롭거나 정의를 파는 자들이 저지르는 왕따엔 그런 탈출구가 없다. 고통과 더불어 치욕까지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자신의 가족들을 볼 낯도 없을 것이다.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이 저지른 왕따 전략은 그들이 그 혐오 집단의 단물만 빨아먹고 내버린 경우였기에 더욱 악성(惡性)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개혁’과 ‘진보’라는 그들의 상투적인 구호로 정당화되었고, 신들린 지지자들에 의해 추인되었다.
자신이 새시대의 ‘원조’가 되고 싶어하는 이른바 ‘원조병’은 한국의 모든 역대 대통령들이 갖고 있는 고질병이었다. 노무현이 앓고 있는 ‘원조병’의 증상은 그의 2중 전략에서 잘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헤게모니 쟁취에 도움이 되는 일에선 지나칠 정도로 모험주의적이고 전투적인 반면(예컨대 정치투쟁), 자신의 헤게모니 쟁취와 무관한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거나 소심했다(예컨대 이라크 파병).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개혁’과 ‘진보’라는 구호는 ‘민주당 죽이기’를 비롯한 헤게모니 쟁취용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어차피 민주노동당이 비웃거나 분노하는 수준의 ‘개혁’과 ‘진보’에만 매달릴 게 뻔하며 이미 충분히 그런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정도의 개혁과 진보는 민주당도 꾸준히 해왔던 일이며, 대북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민주당이 열린우리당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3·12 대통령 탄핵 사태는 억울한 왕따를 당해 파멸의 궁지로 내몰린 사람이 저지른 칼부림 사건이었다. 다수파는 칼부림 사건의 ‘사악함’에 분노한 반면, 왕따 전략을 비판하던 극소수 사람들은 그 ‘어리석음’에 분노했다. 그러나 진짜 개인주의자라면, 그런 칼부림 사건의 원인에 더 주목하면서 왕따에 가담했거나 박수를 보냈던 자들에 대해 더 분노해야 할 일이었다. 칼부림 사건을 저지른 자들은 그것 하나로 파멸이라는 응징을 받을 것이었기에 그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그 어떤 대의의 현란한 이벤트와 판촉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개인과 소수파에 대해 섬세한 촉각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3·12 대통령 탄핵 사태는 자신을 진짜 개인주의자라고 믿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집단주의의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간 사건이었다. 탄핵 사태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혼란을 염려하는 보수파의 나라 걱정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았다.
4·15 총선의 진실과 민주당의 운명에 대하여
지난 4·15 총선에서 나타난 호남 표심을 보고 많은 이들이 ‘지역주의 탈피’니 ‘개혁성’이니 하는 평가를 해댔다. 나는 그때 속으로 비웃었다. 물론 지금도 비웃는다. 그때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왜 최근 호남 민심이 노 정권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것에 대해 질타를 하지 않는지 그게 궁금하다. 노 정권이 그간 달라진 게 뭐란 말인가? 노 정권이 이라크 파병을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아니면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기 때문에?
노 정권에 대한 호남 민심이 나빠진 결정적인 이유는 ‘호남 소외론’이다. 그런데 나는 그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내세웠던 건 지역주의 양비론이었다. 민주당은 지역주의 기생정당으로 매도되었고, 호남 표심은 열린우리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그 매도를 수용했다. 열린우리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는 건 열린우리당의 동진 전략을 받아들였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이 민주당 집권 시절보다 호남에 덜 신경을 쓰고 영남에 더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제 와서 그럴 줄 몰랐다고 ‘호남 소외론’을 떠들어대면서 화를 내면 어쩌자는 건가?
혹 호남인들은 지난 4·15 총선시 누가 옳건 그르건 집권 여당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열린우리당에 몰표를 준 건 아닌가? 물론 나는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호남인도 이걸 인정하길 거부하니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공개적으로 그런 말 하면 “호남인을 모독하지 말라”는 아름다운 말씀만 들려온다. 그게 바로 내 말이다. ‘호남 소외론’ 떠들지 말고 계속 좀 그런 식으로 아름답게 살아달라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던진 메시지의 핵심은, 거칠게 말하자면, 개혁을 위해 호남이 한번 더 당하라는 것이었다. 그걸 몰랐었나? 이제 와서 그걸 몰랐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좀 민망하다. 그러니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건 아니었건 “개혁을 위해 열린우리당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는 말 그대로 개혁을 위해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호남에선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신들의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 최소한의 자존심만큼은 지켜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누워서 침을 뱉고야 말았다. 그간 호남인들이 몰표를 던져준 대상이었던 민주당은 지역주의 기생세력의 아성으로 단죄되었다. 놀라운 자기부정이었다. 5·18 광주학살과 영남패권주의의 본산이었던 한나라당에게 결코 표를 줄 수 없다는 호남인들의 정서는 4·15 총선 이전이나 이후나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5 총선 이전에 민주당에게 준 몰표는 ‘지역주의’고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게 준 몰표는 ‘개혁’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 세상에 이런 기회주의가 없었다.
이제 민주당이 살길은 딱 하나다. 당원이 주인이 되는 민주노동당처럼 만드는 것뿐이다. 열린우리당도 그걸 추구하겠다고 그러지만, 거긴 하루아침에 갑자기 비대해져서 이젠 그 일을 하기 어렵게 돼 있다. 민주당이 당원의 당비로 당 살림을 꾸려가고 모든 주요 의사결정을 당원 투표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보수 정당의 모델을 보여준다면 기사회생할 수 있겠지만,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민주당 의원들의 대다수는 그 자리나마 즐기려는 사람들이지 민주당 회생을 위해 자신들을 내던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낄 것이다.
민주당의 현 역량에 맞춰 현실적인 주문을 한다면, 열린우리당에 흡수된다거나 하는 추태 부리지 말고 죽을 때 의연하게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연하게 죽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예 입 닫는 게 상책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민주당에 대한 ‘겸손한 장례식’ 편에 서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만 더하자면, 노무현을 원망하진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답이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호남인들이 꼭 말 되는 말이라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게 아닌 만큼 노무현의 말 안 되는 말을 비판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민주당은 호남 독식체제에 오랫동안 안주했던 탓에 판단력을 잃고 망한 것이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비판은 나 같은 제3자의 몫이지, 감히 민주당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