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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산 역사 갈대상자
저자; 김 영애
출판사; 두란노
출판년도; 2004년 4월 2일
<지은이 소개/저자명>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제한 속도 35마일을 우직하게 지키는 과학자 김 영길과 결혼 이후 미국으로 유학, 뉴욕 주립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했다. 모태 신앙인이었으나 미국에서 남편 김영길과 함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님께 삶을 헌신하기로 했다. 1979년 12년 만에 영구 귀국, 이화여대에서 14년 동안 특수교육학과에서 가르쳤으며,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종강시간에는 꼭 복음을 전했다.
<차례>
책머리에 -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서
프롤로그 - 그날
1부 비전 vision
1장 재건의 명령을 받들다
2장 김 느헤미야의 탄생
3장 김 느헤미야의 기도
2부 모험 adventure
1장 주춧돌을 놓다
2장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다
3장 고난 속의 행진
4장 죽기로 작정한 사람은
5장 모세를 갈대상자에 띄워 보내듯
3부 도전 challenge
1장 피지에 뿌려진 밀알들, 슬픔이 변하여 찬송으로
2장 채우시는 하나님
3장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4부 희생 sacrifice
1장 옥문을 여는 위로
2장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3장 네 장막터를 넓히라
에필로그 - 35마일로 달리는 남편
발문 - 내 영혼의 예루살렘 - 정 연희
<소개글, 서평>
한동대를 주신 것만으로 우리 사회에는 비전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동대 초대 총장 김 영길, 김 영애 부부가 하나님께 위탁받은 한동대를 제대로 길러내기 위한 애끓는 한동대 양육기이다. 이 책은 지난 10여 년 동안 한동대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 무모해 보였던 학교 출범에서부터,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정체성을 공격하는 세상과 힘겹게 싸우며 사십여 차례의 고소고발과 총장․부총장 구속 사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은이는 그 숱한 고난의 과정을 마이크로렌즈처럼 또렷하게,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때는 생명수를 찾은 사슴처럼 은혜에 감격하며 이 글을 기록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개인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놀라운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개개인의 삶들을 움직여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 가시는지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우리 1천만 크리스천 각자 각자의 중보 기도와 말씀 묵상. 그 실천적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아래 놓여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동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칼빈대도 증언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증거물이자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에 보여 주시는 분명한 비전이다.
Preface -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서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개교 전부터 잎으로 보이지 않는 출발이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면서 시간이 가면 차차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갈수록 길을 더욱 어둡고 좁아지기만 했다. 우리의 다리는 휘청거렸고 고통과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인간이란 누구나 태생적으로 자기 중심으로 살도록 학습되어져 온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독특한 훈련을 받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짙은 안개 속을 걷도록 우리에게 아프고 슬픔 사건들을 허락하셨는가 보다. 우리의 이름,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 등 지금까지 우리가 자랑하고 익숙한 것들을 하나씩 떼어 내시며 오직 당신의 손만 의지하도록 하셨다. 이런 고리들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우리는 금단 현상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광야 학교 학생인 우리들은 그렇게 깨어지고 부서지며 여기까지 왔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나는 길목 길목마다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업이 지켜보며 그분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할지라도 가장 안전하다고 감히 외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되어 갔다. 단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나는 탄성을 질렀다. “와! 하나님, 굉장하시네! 정말 살아 계시네!” 지난 10년 동안 한동대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하다가, 때로 너무 서러워서 주님께 삐치기도 했고 때로 감사해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친구와도 잔정이 생겨야 친해지듯 나는 날마다 예수님과 잔정을 쌓아 갔다.
내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매일 매일의 성경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들을 붙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 말씀은 활자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것은 능력이었다! 고난과 역경은 흑암 속에서 보화를 캐는 기회였다!(사 45:3)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 33:6) 성경 말씀들을 우리가 겪는 사건들에 적용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공식은 같고 숫자만 다른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난 세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갔던 우리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동대 곳곳에 가득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목격한 자로서 그분을 증거하는 증언대의 자리에 서서 우리의 잘못과 실패, 두려움, 고통스러운 경험들, 그리고 작은 상처들까지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도록 내 모든 것을 내어 놓기로 했다.
지난 7년여, 남편 김영길 한동대 총장은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항상 자기 일에 바빠서 한 번도 내 글을 읽어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 원고가 책이 되어 나올 쯤 되니까 남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가로채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 주곤 했다. 나 자신도 남편을 자랑하거나 칭찬하는 게 될까봐 무척 조심스럽고 걱정되기만 한다. 혹시나 그런 대목이 있더라도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람으로 보시고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나 또한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통해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을 온전히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것만이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이유인 것이다.
이 책은 한동대 이야기의 완성판이 아니다. 한동대의 기초를 닦는 과정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첫 번째 책일 뿐이다. 초창기부터 헌신해온 한동인들에게도 귀한 간증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기초 위에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한동대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흥분되는 것은 한동대, 바로 이곳에 전국 각처뿐만 아니라 어느덧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과 아프리카의 가나, 나이지리아 등과 동유럽의 알바니아 그리고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 등 전 세계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포항의 이 한적한 시골 대학에 세계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지금은 다 할 수 없지만, 이제 각 나라의 지도자급 인재들이 이곳 한동대에서 자라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곤 한다. 분명한 것은 한동대를 통한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고, 한동행전은 계속 쓰여질 것이다. 초대 총장의 아내로서 그 첫 발을 뗀 것을 감사드린다.
책 제목을 두고 고민하는 나에게 한동대 졸업생 윤 선민(95학번) 군이 신세대다운 발상으로 재미있는 제목을 추천해 주었다.
“사모님, 제목을 남송리 블루스라고 하면 어떨까요? 원래 블루스는 흑인 영가에서 유래되었대요. 감미롭고도 슬프게, 애환과 기쁨이 느껴지는 춤이잖아요.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남송리에 사는 우리 한동인들을 그렇게 가슴에 안고 블루스를 추신 거잖아요! 하나님과 함께 춤을!”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한동 인들과 함께 기쁨의 눈물에 젖은 채 감미로운 춤을 춘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이 이 지면에 다 담을 수가 없다. 먼저 송태헌 한동대 설립자님과 설립을 도왔던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포항 흥해읍 남송리를 거쳐 간,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교수, 직원, 학생들과 학교를 위해 중보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학부모들에게 특별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동의 오늘이 있기까지 변함없이 돕고 격려해 주시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 내외분과 성도님들, 이영덕 이사장님 내외분을 비롯한 여러 교계 지도자들, 이종순 변호사님 내외분, 김종원 협동 원장님을 비롯한 선린병원의 모든 식구들, 한동대 이사님들께도, 특히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과 갈대상자 후원자 분들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늘 격려해 주시며 바쁘신 시간을 내어 나의 원고를 다 읽으시고 조언해 주신 소설가 정 연희 선생님 내외분께도 감사를 드린다. 한동의 첫 입학생으로 원고의 처음을 도와준 김 명은(95학번) 양을 포함한 몇몇 한동 학생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서울과 포항의 우리 집을 방문하며 6년 동안 꾸준히 원고 정리를 도와준 김 선희 양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선희 양이 없었더라면 내 글을 정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힘든 자리에서 묵묵히 이 글을 걸어가는 남편 김영길 총장과 부모의 좋은 신앙 조언자가 되어 준 호민과 정민 내외, 종민과 병희 내외, 또 여든여섯의 연세로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한동대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 이 삼희 권사님, 이렇게 좋은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의 출간을 맡아 준 두란노 서원 송영태 장로님과 유 종선 출판본부장님에 대한 감사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도 한동대 갈대상자에 실린 모세와 같은 이 시대를 변화시킬 우리 한동인 모두에게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린다.
2004년 4월, 한동 행진이 계속되고 있는 남송리에서 김영애
Prologue - 그날
재판
2001년 5월 11일, 남편의 1심 선고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한동대 총장으로서 학교 재정 문제로 형사 고발을 당해 오성현 행정 부총장과 함께 법정에 서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도 남편이 법정에 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제까지처럼 그냥 집에 남기로 했다. 현관에서 남편을 배웅하며 말했다.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함께하실 거예요.”
나는 몇 개월 동안 조사를 받아 온 이 사건이 오늘로서 끝나리라 생각했다. 선고 재판은 9시 30분에 열렸다. 그런데 11시가 되어도 집에 있는 내게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불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들 호민이었다.
“어머니... 결과가 좋지 않아요...”
아들은 잠시 들이켜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징역 2년을, 부총장님은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셨답니다.”
“법정 구속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법정에서 바로 구속되셨다고 합니다.”
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학교 측에서는 차마 이 소식을 내게 직접 전할 수 없어서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먼저 알렸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날 법정에는 하루 휴가를 내어 서울에서 내려온 졸업생과 재학생과 학부모, 교수와 직원 여럿이 참관했다고 들었다. 피고인 두 사람이 앞문으로 들어오자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재판장이 법정 안으로 들어왔다. 곧 조용해지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판결문을 낭독하기 전에 재판장이 말했다.
“재판 결과에 대해 어느 쪽이든 소란을 피워선 안 됩니다. 어차피 대법원까지 갈 사건이니, 만약 재판 결과에 대해 소란을 피우면 그쪽이 더욱 불리해집니다.” 사람들은 재판장이 낭독하는 판결문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모든 신경을 귀에 모았다.
“피고는 여러 차례 법정 출석을 기피했으며, 목적 없이 잦은 해외 출장으로 해외 도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고... 죄질이 나쁘므로 총장, 부총장에게 각각 징역 2년과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며, 법정구속을 명한다!” 땅!땅!땅!
순간 법정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교수, 학생, 학부모들은 상상치도 못했던 결과에 경악했다. 그들은 한동안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그런데 재판 결과에 만족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승리의 쾌재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35:23-24) 이 뉴스는 정오부터 방송 매체를 통해 전국으로 전해졌다. 신문들은 일제히 “한동대 김영길 총장, 오성연 부총장은, 학교의 재정과 관계된 혐의 사실로 법정 구속”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한동대 개교 이후 남편은 검찰, 법원, 경찰서, 노동청 등에 80여 차례 출두하여 온갖 고초를 치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건들과 달리 이번 사건은 심상치 않았다. 이 사건의 수사 때문에 경리 장부 일체를 압수당해 학교 행정 업무가 한때 마비되었다고도 했다.
어떤 날은 검찰 소환으로 아침에 집을 나간 남편이, 14시간 동안이나 조사를 받은 후 자정 무렵에야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서재에서 탈진한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었다. 아내인 나 또한 어찌 그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 있으랴! 교육부에 올라온 진정서에 대한 해명 자료를 급히 준비해야 했던 어느 날, 남편은 내게 컴퓨터로 받아쓰게 했다. 지난 세월 그 많은 어기찬 사건들은 하나씩 열거하던 그는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지, ‘흑’ 하고 신음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그는 어느새 감정을 다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학교의 긴박한 재정 업무를 맡은 오 부총장도 가시밭길을 걷기는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채권자가 그의 멱살을 잡고 당장 돈을 내놓으라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학교 식당 바닥에 꿇어앉힌 적도 있었다. 위로하는 우리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학교에 돈만 생긴다면 무릎 꿇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2001년 4월 두 사람은 학교 재정과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또다시 기소되었던 것이다. 1심 구형이 내려지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했다고 했다.
“한동대가 개교하기 전 설립자의 기업에 사고가 나서 더 이상 재정 출연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개교를 했으나 초대 총장인 저를 믿고 국내외에서 한동대로 온 교수님들과 전국에서 온 학생들을 두고 학교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한동대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들은 견뎌 왔습니다. 총장으로서 어찌하든 학교를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교를 이끌고 가다 보니, 본의 아니게 불가피한 실수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행정 미숙으로 생긴 일들로, 많은 분들에게 누를 끼치고 고생을 시켜 드렸습니다. 오성연 부총장님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총장 본인의 부덕의 소치이오니 총장인 제게 책임을 물으시고, 부디 그를 천처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남편의 비감 어린 최후 진술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주님께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69:1-2)
◈ 억울해하지 마세요
저녁 때 한동대의 한 교수 부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총장님이 부럽습니다. 감옥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지요. 이 시대에 주의 일을 하다가 갇힌 자들이 얼마나 되나요? 감옥에 보내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총장님을 신뢰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가고 싶어도 못 가지요. 제 남편은 총장님과 함께 한동대에서 동역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모님! 절대로 낙심하지도 슬퍼하지도 마세요. 그러시면 하나님께서 섭섭해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총장남과 사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모님,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마세여. 우리가 의지할 분, 우리를 위로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조금도 억울해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억울해하실 것입니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두 분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이사야 51장 12-16절을 전합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떤 자이기에... 사모님, 하나님께서 총장님을 옥에서 속히 나오게 하시고, 이제 뒤로 한동대는 양식이 끊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 첫 면회
이튿날 경주 구치소,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면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당하는 줄 아시옵소서(렘 15:15)
얼마 뒤, 수감 번호 433과 443이 확성기로 호명되었다. 남편의 수감 번호는 433, 부총장은 443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교수들과 함께 마당을 가로질러 면회소 건물로 갔다. 교도관을 따라 들어온 남편이 작은 공간, 투명 플라스틱 칸막이 저편에 앉아 있었다. 어제 집을 나설 때와는 전혀 딴 사람이었다. 가슴에 번호표를 단, 누런색의 남루한 미결수 수의를 입은 채 안경도 끼지 않고 푸석하게 부은 얼굴이 어젯밤 잠을 못 잔 흔적이 역력했다.
“총장님!”
그 한마디 외엔 함께 간 교수들도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은 온갖 감회가 서린 얼굴로 말했다.
“모두들, 너무 걱정 말아요. 나 괜찮아요. 룸메이트들도 좋고 방 청소도 안하고, 이불도 개키지 않고...” 어제까지 학교의 비전과 꿈을 힘차게 논하던 사람이, 하루 사이에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나 빨리 나가야 돼. 이번 달에도 학교에 10억 원이 필요해!” 그는 여전히 돈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여보, 걱정 마세요. 그 돈 다 해결되었어요. 이른 아침에 하용조 목사님(온누리교회 담임 목사)이 전화를 주셨어요. 오늘 새벽에 긴급 당회가 소집되어서 이번 달에 필요한 10억 원을 교회에서 후원하기로 결정하셨대요. 모인 분들 모두 두 분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셨답니다.” 내 말을 듣자 남편의 얼굴이 금세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다. 그는 마치 이웃집에 놀러 온 사람처럼 말했다.
“아, 그래? 그럼 나 여기 좀 더 있어도 괜찮아.”
“여보, 돈 걱정은 이제 그만하시고 그 안에서나마 좀 푹 쉬세요. 당신이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더 바쁘시게 일하신답니다. 당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무나 이런 데 들어오지 못한다고요. 당신이 하나님 일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 부럽다고 해요. 우리는 이제 아이들 시집 장가 다 보냈으니 남은 여생 하나님만 기쁘시게 할 생각만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안에 있으라고 하시는 날까지 느긋한 마음으로 계세요.”
“나도 그렇게 마음먹고 있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거요.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지냈으니 이제 이곳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야겠소. 학생들에게는 전혀 동요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이 안에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안경테는 허용되지 않으니 뿔테 안경을 준비해 넣어 주시오.”
그제야 그가 안경을 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시력이 얼마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여분의 안경 하나 마련해 두지 못한, 얼마나 허술한 아내였는가. 안경 없이 그는 얼마나 불편할까.
옆방 면회실에서 오 부총장님도 잠시 만났다. 나는 “부 총장님!” 하고 불러 놓고는 그만 목이 메었다. 그의 눈가에도 물기가 어렸다.
“걱정 마십시오. 방 식구들이 제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방 청소도 안 시키고 잘 해 줍니다. 총장님과 저는 공범이라고 서로 만날 수는 없어요. 제 이름표에 표시된 빨간 마크가 공범 표시입니다.”
두 사람을 구치소에 남겨 두고 나오면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남편을 6년째 동행해 온 이 기사님이 마음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어제, 총장님, 부총장님이 그렇게 법정 뒷문으로 사라지신 후, 저 혼자 학교로 돌아오는데, 차 반쪽만 몰고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법정에 섰어도 늘 집에 모시고 돌아왔는데, 너무나도 기가 막힙니다. 눈물이 흘러내려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님이 지내오신 세월을 저보다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고소 고발은 줄을 잇지, 툭하면 교육부로 보낼 소명 자료 준비하랴 재판 준비하랴 검찰과 법원에 출두하랴, 낮에는 학교 업무로 저녁이면 간증 집회로 정신없이 보내는 총장님의 하루를 누가 알겠습니까! 보통 일주일에 두 번씩 집회를 다니시고, 갈대상자 후원자들을 모으시고, 어떤 주일엔 세 차례나 집회를 하신 적도 있었어요. 종일 검찰 조사를 받고 저녁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힘차게 간증하시는 총장님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저러실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저녁은 잡수셔야 되는데 무슨 밥맛이 있을까 싶어 식사하시라는 말씀도 드릴 수 없었어요. 저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나고 입에서는 단내가 확확 나는데...
간증 다닐 때 자동차에는 총장님 앉은 자리만 겨우 남기고 갈대상자와 학교 홍보 책자로 가득했습니다. 식사 할 시간도 없을 딱 많았아요. 어떤 땐 총장님이 가게로 뛰어가 햄버거를 사오셔서, 차 안에서 급히 잡수시기도 했지요.
어느 해,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몹시 추운 주일 저녁에 총장님과 함께 성남으로 간증 집회를 갔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교회는 언덕 위에 있었어요. 며칠 전 내린 눈 때문에 길은 빙판이어서, 승용차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지요. 차에서 내린 총장님과 저는 갈대상자 약정서 상자와 학교 소개 책자 상자를 양손에 들고 미끄러운 언덕길을 조심해서 올라다가 그만 미끄러졌습니다. 갈대상자 보따리는 아래로 굴러 가고, 줍다가 또다시 미끄러지고... 그런 날도 있었지요.
전라북도 남원에 갔을 때였어요. 총장님의 간증이 시작되자, 그때 동행했던 신현길 교수님과 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습니다. 교회 허락 없이 갈대상자를 교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교회의 눈치를 먼저 살핍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길모퉁이 전봇대 아래에 앉아서 학교 홍보지 속에 갈대상자 후원서를 한 장씩 끼워 넣기 시작했어요. 그때 초겨울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와, 갈대상자 신청서들을 사방으로 날려 버렸어요. 신청서가 한 장이라도 날아갈세라 허공을 허우적거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일들은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지난날의 하루하루가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 힘으로 이어져 왔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내 머릿속에 지난날들이 마치 오늘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