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각각의 경향들에 대한 설명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이들 사이의 반향과 극복의 관계를 주시함으로써 미술사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한편, 그러한 역사의 동인을 당대의 정치, 경제, 제반 문화와 관련지움으로써 미술사의 표면을 훑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층을 탐사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현대미술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난해하며 변화무쌍한 것으로, 따라서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배려 또한 잊지 않는다. 그는 현대미술에 관한 정보를 단순히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쉽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끄는 방식으로 문체와 내용을 구사한다.20세기의 미술을 연구하는 미술사가는 특수한 문제들에 당면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러한 문제점들을 감지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게 될 것이다. 이들 중 가장 큰 문제점은 20세기의 미술사가는 과거에 발생한 것들에 대한 기존의 개략적인 설명만을 전수받았으며 그것의 진위 여부와 가치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명은 성공한 혁명 다음에 또 성공한 혁명이 뒤를 잇는다는 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서 발전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하튼 예술가와 전통의 관계는 그가 새롭게 기여할 혁신만큼이나 흥미롭고 중요한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미술사의 대상이 현대로 가까이 올수록, 미술사가의 영역은 역사적인 것에서 일종의 자서전과 비슷한 영역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사건들을 목격하였으며 당시에 벌어진 논쟁들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견해가 분명히 그의 역사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술의 역사는 계승과 반발의 양면성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시대, 사회적인 맥락을 투영하는 복합적인 과정이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으로 미술사에 접근했다. 이 책의 장점은 20세기 당대미술사 전체를 다룬 개괄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너비와 깊이를 가진 입체적인 실체로 드러낸 점이다. 저자는 각각의 경향들에 대한 설명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이들 사이의 반향과 극복의 관계를 주시함으로써 미술사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한편, 그러한 역사의 동인을 당대의 정치, 경제, 제반 문화와 관련지움으로써 미술사의 표면을 훑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층을 탐사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현대미술사는 많은 사람에게 낯설고 난해하며 변화무쌍한 것으로, 따라서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배려 또한 잊지 않는다. 그는 현대미술에 관한 정보를 단순히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쉽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끄는 방식으로 문체와 내용을 구사한다.
이 책은 1980년에 초판이 출판된 이래 1989년에 개정 증보판이 출간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해마다 증쇄를 거듭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두 번이나 인쇄될 정도로 많은 독자층을 가로지르는 스테디 셀러다. 이 책은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미술을 자신 있게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씌여졌다.
1. 새로운 야만인들 야수파와 독일표현주의
"표현력이 없어질 정도로 기법이 지나치게 세련되고 약화되면 인간의 언어가 형성된 본질적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마티스, 야수파에 관하여, 1936 "그것은(진정으로)세계의 시작과 같았다." -포드 마독스 포드(Ford Madox Ford), 1914년 이전의 시기에 대하여
새로운 세기가 다가옴에 따라 혁신적인 이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라는 말은 천년이나 된 듯한 어감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새로운 시대'는 분명히 오겠지만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시대가 올 것인가? 19세기에는 대체로 물질적, 기술적 발전을 의미하는 진보라는 것에 신념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 과연 인간 스스로 새롭게 발견한 능력을 현명하게 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를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서구) 사회가 진보됨에 따라 이 같은 회의론자들은 더욱 늘어났다. 그들은 삶이 더욱 단편화되고 도시들은 자만과 억압의 가공할 전시장이 되어가며, 자연과 인간의 그리고 인간과 그 자신의 심오한 본성과의 조우가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반면에 이 같은 모든 현상을 더 나은 세계가 올 조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기술과학이 자체의 손상을 극복할 것이고, 산업은 풍요로움을 가져와 국가간의 투쟁도 종식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즉 인류가, 특히 세계적인 형제관계로 맺어진 노동자들이 상호간의 의존관계를 인식하게 됨에 따라, 그리고 기술과학에 힘입어 지구는 쾌적한 주거지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견해이다.
근본적인 방향전환은 이미 18세기에 시작되었다. 곰브리치(E. H. Gombrich)는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중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장에서 이 같은 현상을 요약하였다. 고전주의 전통은 더 이상 탁월성에 이르는 모범으로 신뢰받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통자체가 모순적인 유형들의 복합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미술사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더욱 조장되었다. 또한 미술이란 자기표현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등장함에 따라, 양식이라는 것이 점차 문제시되었다. 즉 미술가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동기를 발견해서 주제나 기법을 통하여 이를 표현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리하여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경향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문명사회에 대한 루소의 거부, 화성법 및 양식적 의례 등 기존의 음악체계에 대한 베토벤의 반박, 이상화된 언어를 시어로 사용하지 않고 시골사람이나 어린 아이의 말을 선호한 워즈워스의 의도, 어떤 외부적 요인이나 충동이 아닌 무의식이 창조 작업의 진정한 동인이라는 괴테의 견해 등을 포함한다. 어떤 논평가들은 낭만주의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낭만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이 아직도 유효하며, 당시의 혼동과 반목이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낭만주의 미술 이전에는 어떤 파격이 수용될지라도, 그것은 지금도 때로는 '문화의 요람'이라 불리는 지중해 연안에서 발생한 중추적인 전통과의 관련아래에서만 이해되어 왔다. 낭만주의에 의해서 사라진 것은 그 전통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중추적인 역할이었다. 이 전통은 이제 다른 가능한 전통들 가운데 하나로서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전통들에도 눈을 돌렸는데, 그중 몇몇은 서구의 것으로서 지금까지 고전주의의 그늘에 가려져 온 중세의 전통과 북유럽의 전통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이질적이며 미약한 것으로 생각되어 온 중동이나 동 아시아의 문화, 세계 각지의 원주민들의 풍습 등이 서구인의 초기 생활을 보여주는 예로 주의 깊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많은 전통들이 답습되게 되었는데 비교적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이 새로운 표현 언어들은 건축이나 실내장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순수미술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그렇게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고전주의의 원리들은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었으나 그 기법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기술의 형식이 추구되었으나, 단지 그것이 가치 있는 대안으로 점차 받아들여진다는 측면에서만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콘스터블(John Constable)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태도를 갖는 대신 갖가지 일시적인 자연현상 자체를 중시함으로써 자칫 형태들의 나열에 그쳤을 그의 그림에 시각적 활력과 도덕적 의도를 담을 수 있었다. 한편 터너(J.M.W.Turner)는 인간을 무한히 압도하는 힘으로서의 자연의 드라마에 극히 가까이 접근하였으므로 아무도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해즐릿(William Hazlitt)은 터너의 작품을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으면서도 아주 닮은 그림'이라고 하였다. 고야의 기록화와 잔인성과 광증에 대한 악몽과 같은 형상은 즐거움과 교훈을 준다는 고전미술의 전통적인 목적을 전도시켰다. 위대한 고전주의자인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또한 다른 측면에서 고전미술의 본질을 전도시켰는데, 다비드는 오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예술과 도덕성을 비판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절제된 고대적(archaic) 속성의 고전주의를 활용하였다. 다비드의 제자인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는 고대적 양식의 고전주의와 중세 또는 동양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고전적 주제를 절도 있게 다시 표현하거나 때로는 관능적인 환상이라는 보다 신비스러운 영역을 다루기도 하였다. 앵그르가 예술의 파괴자라고 경계하였던 외젠느 들라크루와(Eugene Delacroix)는 문학이나 역사에서 주제를 끌어내어 풍부하고 감각적인 처리법으로 개인적인 의미들을 전달하였다.
전통과의 단절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언급할 수 있겠으나 주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전통주의자들까지도 전통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광대한 주제와 표현의 영역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현상뿐만 아니라 전통을 무시하는 다른 모든 경향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이 낭만주의 속에 있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정당한 근거 없이 진행되는 현상에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즉 천재성은 규범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천재성의 산물은 기존의 척도에 의하여 측정되기보다는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하여 설명되고 평가되어야 하였다. 얼마 안가서 일종의 전반적인 몰이해와 신념의 부재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무능력자로 비난받고 러스킨(John Ruskin)이 휘슬러(James M. Whistler)를 "대중의 얼굴에 물감을 한 통을 내던졌다"고 고소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인상주의의 경우는 특히 교훈적인 예이다. 오늘날 인상주의 그림들은 다른 어떤 그림들보다도 사랑과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그림들을 조롱하였다. 이러한 적대감은, 비난이 관심과 찬양으로 바뀌는 현대미술에서의 예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놀랄 만큼 강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 그림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선묘적인 형태도 구성도 없었으며,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을 칭찬하여야 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림들에는 주제나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의 제목을 염두에 두고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중 몇몇은 사실상 풍경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는데, 물이나 나뭇잎을 묘사하는 데에 적합할 것 같은 거친 원색의 붓 자국이 건물이나 인물과 같은 견고한 대상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인물을 명확하면서 우아하게 재현하는 것은 미술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작업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시도를 하려 하지 않았거니와 명확한 공간을 구축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런 작업을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도 되지 않았다. I8세기에는 역사화라고 불리 울 회화의 범주, 즉 중요하고 고상한 주제를 위엄 있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그림이 여전히 위대한 미술가의 주된 과업으로 생각되었다. 19세기에 제작된 작품 중에는 많은 역사화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공허한 것이었다. 19세기에는 이와 다른 종류의 그림들-초상화. 풍속화(일상생활의 일차적 또는 서술적 정경), 풍경화, 인물화-도 그려졌는데, 이것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화의 요소들을 차용함으로써 역사화가 누린 높은 지위를 공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두 서사적 미술의 작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온 사실이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보다 명쾌하고 가벼운 작품들, 단어나 음조의 기교적인 사용, 또는 함축적인 메시지 같은 것 등을 보여준다. 인상주의회화에 무슨 메시지가 있는가? 졸라(Emile Zola)는 인상주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이들의 그림을 '개성적 기질에 의하여 파악된 자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질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의 그림은 거친 붓 자국으로 칠해져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상호간의 구분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작가의 사인만이 개성적 기질이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인상주의 회화를 추종하는 행렬 속에는 아직도 '작품이 무엇을 묘사한 것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에 현대미술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대중들과, 미술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현대미술의 동지로 간주되는 대중들 모두가 여전히 포함되어 있다. 후자의 대중은 여러 면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인상주의와 인상주의를 옹호하는 견해가 이 같은 대중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가들은 미술을 문학으로부터 분리할 것을 자주 주장해 왔다. 미술과 문학의 관련성은 고전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특성이었는데, 이제 그 대신 미술과 음악의 연관관계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음악은, 지적 해석에 의존하는 예술보다 더 심오한 수준의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미술의 추상적 요소(색채, 형태, 크기와 이들이 명확하게, 또는 부드럽게, 강한 운율로, 또는 조용하게 배열되는 방식)는 피상적으로 길들여진 지식의 층을 뚫고 그 근저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인성에 이르게 된다. 본능적으로 작업하는 미술가들은 본능적으로 감응하는 관람자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될 것이다. 지각심리학은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의 방법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세기의 찬란한 음악의 역사와 20세기의 라디오와 전축에 의한 음악의 대중화가 그 확실한 증거이다. 미술에서는 교도적 기능이 없어졌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미술이 책이나 신문, 영화 등에 높은 지위를 빼앗긴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술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더욱 고귀한 위치를 목표로 하였다. 이것은 종교의 지위와도 같은 것인데, 이 같은 역할을 목표로 함으로써 인간존재의 핵심에 있는 원초적인지 점에 이르고자 하였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이 같은 경향은 넓게 말하면 원시주의로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서구사회에서 인식되어 온 미술의 형식들이나 이에 대한 관념들로부터 루소식으로 등을 돌린 것을 의미한다. 각국의 민속미술이나 중세미술, 이국적인 미술형식(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특히 일본 목판화, 그 후에는 아프리카, 남태평양, 아메리카 원주민과 부족미술, 페르시아와 인도의 회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등), 어린이나 세련되지 않은 아마추어 또는 정신질환자의 작품, 직업작가의 작품이라도 약물을 복용한 경우와 같이 미술가의 자제력이 감소되었거나 없어졌을 때의 작품 등 이 모든 것이 '순수미술'과 이를 지지하는 제도들로부터 미술을 해방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같은 현상은 미술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기반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 후반부터 서구인의 자아인식을 지배해 온 역사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의 근원에 대하여 사고하도록 유도하였다. 루소가 그 자신이 속한 사회체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회가 처음 형성된 방법과 그것이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공통의 합의사항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추측해 보는 방법을 사용하였듯이, 예술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술의 최초의 예를 찾으려 했고 초기적인 예술형태를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예술의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불가침의 것으로 간주되었던 관례는 이제 하나의 부가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즉 관례는 형성 당시에는 유용하고, 또한 필수적인 것이기까지 하였으나 그렇다 해서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게 되었다. 무용(7300년을 전후하여 문학가나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두드러진 관심의 대상이었던)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소위 고전발레의 의상이나 자세, 움직임, 행위 등은 예술형식으로서의 무용을 궁중 또는 민속무용으로부터 점차 분리시켜온 관례들로서, 이리한 관례들의 대부분은 19세기에 형성되었다. 이제 이러한 관례들을 벗어난 새로운 무용을 창안할 수 있게 되었다. 르와 풀러(Loie Fuller)는 1890년대에 파리에서 인간의 행위보다도 채색된 베일의 소용돌이치는 움직임을 강조한 추상무용을 발전시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은 1900년에서 1920년대 사이에 신체의 표현적인 움직임을 추구하는 무용예술을 발전시켜 풀러보다 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일차적 요소나 무대장치를 배제하고 거치 베일을 걸치지 않은 신체만으로 삶의 대주제들. 즉 탄생과 죽음, 사랑, 모성과 부성, 즐거움,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였다. 러시아의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은 전통발레를 농민무용이나 원시적인 무용형태에 결합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봄의 제전]은 러시아의 화가인 로에리치(Nicholas Roerich)가 구상하고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작곡하였으며 니진스키(Vaslav Nijinsky)가 드레스덴에서 특별히 초청한 램버트(Marie Rambert)와 함께 공연한 무용인데, 이야기 전개 없이 오랜 옛날 러시아 이교도들의 생활의 일부였을 듯한 종교의식을 연속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행해졌던 무용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시도로서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당연히 참여적인, 즉 수동적 관객에 의해 극장에서 관람되는 것과는 다른 무용의 형태였다. 드뷔시는 1313년에 이 유명한 공연의 초연에 참석하였는데, 이를 "유례없이 야반적인 공연‥‥‥ 모든 현대적인 설비에 의한 원시적인 공연"이라고 평하였다(그보다 2주일 전에 디아길레프는 드뷔시가 작곡한 <놀이>에 맞추어 세 사람이 정구를 치는 모습을 표현한 짧은 발레를 초연하였다). 디아길레프의 발레와 몇몇 현대 미술가들에 의한 무대장치들은 새로운 미술형식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을 저지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이들 미술형식을 무대와 같은 가상적이고 찰나적인 세계와 관련시켰다.
예술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 모든 예술의 공통의 기원을 종교나 주술에서 찾을 수 있다면, 각 예술을 탈역사적으로 연구하여 그들 고유의 본성과 잠재력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8세기에 레싱(Gotthold E. Lessing)이 각 예술이 어떤 종류의 전달방법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다면, 1세기 후의 사람들은 각 예술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질문하였다. 드가(Edgar Degas)가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에게 그가 쓰고자 하는 소네트에 내한 착상은 수없이 떠오르지만 이를 막상 쓰기는 굉장히 어렵다고 불평하였을 때, 말라르메는 대답하기를 “드가, 소네트는 착상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어들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드가는 이 말을 반복하기를 좋아했는데 여기에 함축된 의미, 즉 그림도 이와 비슷하게 유명한 주제나 존귀한 양식보다는 좀더 기본적인 요소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고갱(Paul Gauguin)의 영향을 받았으며 드가보다 한 세대 어린,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에 의하여 확고하게 명문화되었다. 그 후 자주 인용하는 그의 에세이의 첫 문장에서 드니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회화란 전쟁터의 말이나 나체의 여인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의해 배열된 색채들로 뒤덮인 평평한 표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는 공간 속에 배열된 3차원의 실체들을 암시하는 예술이라는 르네상스식의 회화개념의 종말을 예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때로는 이 말이 추상미술을 촉구하는 것으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구상성이나 일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원근법이나 입체감의 표현을 배제하는 말은 아니다. 로댕(Auguste Rodin)도 거의 같은 시기에 “조각은 우묵한 것과 튀어나온 것의 예술이다"라고 하였다. 펜화와 연필화 또는 에칭의 대가였던 클레(Paul Klee)는 1910년에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혁신적 발견'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자연과 자연연구보다 중요한 것은 화구통 속의 내용물에 대한 화가의 태도이다. "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즐거움을 수고 교육적 기능을 하는 영역이라는 그들의 미술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리스의 선택적 자연주의의 원리들과 수학적 비례를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연극적 통일성, 즉 시간, 장소, 행위의 일치를 갖춘 미에 이르는 수단으로, 그리고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하나의 행위의 순간은 하나의 일관된 공간 속에 하나의 일관된 방법 또는 양식에 의해서 재현되었다. 그 결과는 무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것은 다른 순간들을 함축하고 있는 한 순간의 모습이었다.[다른 말로 하면 타블로(tableau)인데, 이는 프랑스어로 '그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미술가의 능력과 독창성은. 이미 관람자가 알고 있는 행위를 보다 명확하게 묘사하고 구성하는 데 있었다. 모더니스트 미술가들은 이러한 통일성과 이에 필요한 기술을 거부해야 하였으며, 현대 연극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원시미술은 지지가 되어주었다. 원시미술에서는 최우선으로 중시되는 것이 달랐으며 따라서 방법도 달랐기 때문이다. 미술의 문학으로부터의 독립은 극히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는데, 문학적 내용을 중시하는 미술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카데믹한 원리들이 원시미술을 통해 공공연히 거부되었다. 서술적인 주제가 없어지자, 인물들을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회화무대 위에 배치시킬 특별한 필요성이 없어졌다. 또한 이야기 전달에 적합한 방식으로 인물들에 조명을 비출 필요도 없어졌고, 발레에서와 같이 전체 문맥에서 차지하는 각 인물의 역할을 명시하기 위하여 자세나 행위에 대한 전통적 규약을 채택할 필요가 없어졌다.
현대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추상으로의 길이 모더니즘의 본질적인 과정으로서 관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경주의 과정처럼 인식되기도 하는데. 누가 '최초로 거기에 도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추상적인 작품을 최초로 제작하였는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전위회화는 대부분 풍경화와 정물화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역사화의 경우에는 극히 한정된 형식만이 선택되었다. 즉, 일반적인 모호한 의미들이 상징에 의해 전달되는 형식이었다. 또는 세잔(Paul Cezanne)의 [목욕하는 여인들]처럼 문학적인 저의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는 간결한 주제를 추구한 예도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모험적이고 야심만만한 미술가가 최고의 정력을 쏟아 넣었던 미술의 범주로서의 역사화를 제쳐놓는 헌상이었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또한 가장 지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미술, 즉 서구 전통미술의 정수를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20세기 미술의 다양한 출발점들을 제공했던 것은 역사상 후기인상주의자들이라고 알려진 화가들이다. 후기인상주의자들은 하나의 집단은 아니었으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절대적인 객관성을 초월하여 좀더 명확하고 의미 있는 것을 지향하려는 충동을 공통적으로 가진 화가들이었다. 폴 고갱(Paul Gauguin)은 그들 중에서 가장 노골적인 원시주의자였다. 그의 삶 자체는 그의 혁신적인 그림이나 판화와 함께 원시주의의 매력에 극적인 요소를 더하였다. 그는 주식중개인의 직업을 버리고 화가가 되었으며, 부인과 가족마저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되자 가정을 포기하였다. 그는 브르타뉴지방으로 갔는데, 그곳의 생활비가 싼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농부들의 단순한 생활과 고대적 미신에 익숙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프랑스와 서구의 문명을 떠나 남태평양으로 가서 원주민들과 참께 살면서 그들과 그들의 환경을, 다른 곳에서 취한 이국적 자료들과 함께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게 된다. 사실상 그의 미술은 고전주의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으나, 그는 서구미술을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연주의와 이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고전주의의 기반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감정이 우선하고 이해는 다음에 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는 정확한 드로잉보다는 표현적인 묘사를, 정확한 사실적 색채보다는 감동적인 색채를 선택하는 것이었으며,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정경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림의 형태들을 평면화 시켰다. 앵그르와 같은 신고전주의자보다 더 평면화 된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밑칠을 하지 않은 화폭에 채색된 강렬한 색채를 태피스트리와 같은 효과를 준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이건 상상적이건 간에 어떤 것을 보기 위한 창문이 아니라, 풍부하게 그려진 표면인 것이다. 그는 "신은 학자나 논리학자가 아닌 시인의 꿈의 세계에 속하는 존재이다"라고 하였다.
브르타뉴에서 고갱은 그를 스승으로 삼은 작은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 중 몇몇은 파리로 돌아와서 보다 거다란 예술가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갱의 모범을 따라 서술적이기보다 암시적인 방법을, 그리고 착시적인 방법보다는 장식적 구성에 몰두하였다. 고갱은 고국에 있는 소수의 친구들과만 서신교환을 하였는데, 특히 몽프레(Daniel de Monfreid)에게는 편지뿐 아니라 작품도 보냈다. 때때로 몽프레는 고갱이 프랑스로 돌아 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고갱이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귀국할 것을 결심하자 몽프레는 이에 반대하였다. 이때 고갱의 작품은 마침내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따라서 고갱 신화의 뒷받침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명설이 높아진 것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의 일환이었다 소설가인 샤를르 루이 필립(Charle-Louis Philippe)은 1897년에 이 같은 요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고상함과 예술애호적인 태도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야만인들이다. 정열의 시대가 오늘날 시작되고 있다. " 10여 년 후에 앙드레 지드도 어떤 강연에서 같은 어휘들을 사용하였다: '상함과 예술애호적인 태도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야만인들이다. " 그 당시 고갱은 이미 죽었고 그의 작품들은 1906년도에 파리의 비공식적인 연례 미술전인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서 회고전으로 전시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적 선구자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친구였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도 오래 전에 죽었지만 20세기 초의 10년 동안에 미술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1886~88년의 파리 시기에 인상주의에 경도되었으며 남 프랑스 지방으로 옮긴 뒤에는 더욱 강렬하고 개성적인 미술로 전환하였다. 그는 주변의 시물에서 주제를 선택하였다. 풍경, 인물, 실내, 때로는 정물이 주제가 되었는데, 그는 이들의 색채를 보다 강화하고 형태의 특징을 강조하여 거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현하고 또한 종교적인 광휘를 부여하였다. 그는 원색의 밀도 높은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이를 길고 가는 선들로 공들여서 채색해 나갔다. 색의 강렬함과 붓 터치는 격정적인 것으로 오인되기 쉬웠으므로 반 고흐의 찬미자들은 그들의 영웅을 '정열의 시대'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 게다가 반 고흐의 개인적 일대기나 열정적인 인도주의, 그리고 때때로 광증에까지 이른 감정적 위기 등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에는 부가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반 고흐가 자신의 감정을 물감과 함께 쏟아놓은 광란적인 천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 고흐의 편지는 그가 가장 관찰력이 뛰어나고 사색적인 미술가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의 편지가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이지만, 1914년이 되어서야 많은 수의 편지가 활자가 되었다. 그 해에는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600여통의 펀지가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반 고흐의 그림이 모두 열절적인 것으로 보이고 고갱의 것은 이국적인 환상으로 보였던 반면.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의 작품은 냉정한 계산에 의해 그려 진 것으로 보였다. 쇠라는 그의 친구 폴 시냐크(Paul Signac)를 통해서 인상주의를 접했으며, 인상주의자와 같이 일광을 화폭에 포착해 놓고자 하였다. 그러나 쇠라의 정신은 고전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그의 그림은 전통 역사화에서 요구되었던 예비적인 시험과정과 치밀한 구성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는 색채이론을 통하여, 혼합되지 않은 물감을 작은 점들로 병치함으로써 정확성과 신명함이 가장 잘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쇠라가 발전시킨 기법은, 관찰된 색채를 뭍감의 성분으로 분석한 사실을 강조할 경우에는 '분할주의'라고 일컬어지며, 채색의 방법을 지칭할 경우에는 '점묘주의'라고 일컬어진다. 쇠라는 색채이론뿐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형태 하나하나와, 이 형태들을 직사각형 화폭 속에서 구성하는 문제를 동등하게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형태들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게 구성되었다. 그의 그림의 모든 특성들은 엄격하게 조정되어 사고나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림의 주요요소와 분할면들을 설계하는 데 응용한 고전주의적 비례체계에 대한 지식도 그중 하나였나. 대작인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에서는, 단지 파리의 보통 사람들의 여가활동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도 세부적인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인물들에 장엄한 정지상태를 부여하고 있는 점에 고전주의를 비웃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고대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쇠라는 과거에는 왕에게만 한정되었던 위엄성이란 것을 일상세계에도 부여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의 구분이 없이, 더욱이 바탕과 형상의 구분도 없이 모든 면들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고 고른 시각적 질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약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그의 마지막 그림은 서커스 공연을 주제로 한 것이고 다른 것들도 나이트 클럽의 무용수나 몽마르트르 음악당 밖의 연주가들 등 도시의 유흥 장면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이것들은 [그랑드자트] 등에 그러진 보다 순수한 여가활동과 함께 쇠라특유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쇠라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당대의 일상생활에 대한 일관된 조망을 제공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채택한 방식은 종교미술과 같은 위엄을 지닌 형식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점이 그를 시냐크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구분하는 지표가 된다. 또한 이것 때문에 그는 다른 후기 인상주의자들과도 구분된다. 분할주의 기법은 현대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당시 신인상주의라고 불리워졌던 경향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시냐크의 해설(1898년과 1899년에 출판됨)에 힘입은 바 크다. 미술을 의식적인 제작과정으로 보는 쇠라의 합리주의적 미술개념은 역사상 계속 전승되어 몬드리안과 구축주의 미술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폴 세잔은 20세기 초 10년간 상당히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 , '나치 유일한 스승' , '나의 최고의 선생님'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구들로 일컬어졌다. 액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은둔자라고 불릴 만한 세잔의 미술은 실제로 후대 미술가들에게 다양한 측면에서 자극과 모범이 되었다. 그는 선대 화가들이 제시한 목표와 이념들을 집대성하여 이를 강화시키고 명료화하여 후대에 전했다. 이 같은 과정이 예시하듯이 그의 작품은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는 푸생(Nicholas Poussin)과 고전주의 조각을 찬앙한 고전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경력을 대규모의 인물화 [목욕하는 여인들]로 마무리하였는데, 이 그림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인물화나 인물조각의 전통과 이 전통이 구현하고자 하였던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 그는 색채주의자이며 낭만주의자이기도 하여, 베네치아 대가들, 특히 베로네제를 숭배하였으며 루벤스와 들라크루아도 찬양하였다. 혹자는 그가 드로잉과 선적인 구성(그리고 교훈)을 강조하는 고전주의 전통을 색채와 표현적 붓질(그리고 즐거움)을 강조하는 베네치아학파와 그 추종자들의 채색적(painterly) 전통과 결합시켰다고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세잔의 작품에서 이 두 전통은 혼합된 것이 아니라 갈등상태에 있거나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세잔은 이같이 과거의 위대한 화가들의 예에 집착하고 있었으면서도 현실세계를 재현하기 위하여 평면에 색채를 칠한 최초의 사람이 된 것처럼 작업하였다. 그의 찬미자들 조차도 그를 서투른 화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세잔에게 있어 회화란 '세부적인 감각들을 포착하여 평면 위에 구성하는 지극히 난해한 작업이며, 자연을 모방하기보다 '자연에 대응하는' 형상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인상주의시기를 거친 것은 사실이나 특유의 작품에는 빛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사물의 물질적 현존과 그들 간의 공간적 관계와 긴장감을 보여주는 시각에서 주제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보는 행위에 의해서 보여 진 것에 부여되는 삶의 진동을 드러내고 있다. 이같이 보는 행위를 강조하는 점으로 인하여 세잔은 모더니즘의 가장 급진적인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인상주의자의 경우와 같은 망막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외부세계와 물리적, 정신적으로 관련시키는 복합적 과정이다. 그는 말년에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한 편지에서 자신을 '새로운 감각을 가진 야만인' 이라고 표현하였다.
세잔의 작품은 파리에서 I890년대부터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여 I900년 이후에는 더욱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가 죽고 1년 후인 1907년에는 대규모의 회고전이 열렸는데, 유화는 살롱 도톤느에서 전시되었고, 수채화는 베른하임 존느(Bernheim-Jeune)화랑에서 전시되었다. 이 무렵에 그의 편지들의 일부가 최초로 출판되었다. 당시의 미술가들은 여기에서 상당수의 미술적 견해와 조언들을 발견하였고 애초에 세잔이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까지도 부여하고자 하였다. 많은 미술가들이 세잔의 글에서 "자연을 구형과 원뿔과 원통으로 취급하라'고 반복적인 강령을 찾아내어.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세잔이 언급하지 않았던 육면체까지 이 말에 덧붙여서 구상적인 기하형태뿐 아니라 추상적인 기하형식의 미술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서 이를 인용하였다. 사실 이 말은 형태의 특성에 대하여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는 초보 미술가들을 위한 기본적인 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미술가들은 세잔의 몇몇후기 유화작품과 특히 마지막 수채화들에서 뚜렷이 나타난 다음과 같은 특성을 중시하였다. 세잔은 작은 평면들, 즉 단편들을 병치시켜 형태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물론 하늘과 같이 표면이 없는 대상도 재현하였으며, 이들 단편들을 마치 모자이크의 각편처럼 취급하였다. 이들 단편들 중에는 기하학적인 특성을 가진 것도 있었고 그림 소재의 기하학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도 있었다. 또는 소재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연결하여 바람직한 구성을 만들어내는 회화적 디딤돌 역할도 하였다. 세잔의 추종자들 중 몇몇은 이런 그림에서 입체주의를 탄생시겼으며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들과 오랫동안 투쟁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1907년경에는 세잔의 제자들 중 더 많은 수가 세잔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목욕하는 여인들]에 주목하게 된다. 세잔은 이전에 작은 크기의 인물 군상이나 단일인물상을 몇 년 동안 그린 일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세 개의 대작을 그렸는데 그는 이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생각하였다. 마티스(Henri Matisse)는 1977년에 작은 크기의 [목욕하는 여인들]을 구입하였는데, 당시의 그는 이것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한참 후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그림은 내가 미술가로서 모험을 시도한 중대한 시기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이 그림은 나에게 신념과 인내심을 심어주었다.
마티스는 이 그림에서 평면의 단편들이나 기하학적 특성이 아닌 풍부한 '색채와 표면'을 발견하였으며, 이 그림의 '흐르는 듯한 선과 절제된 구성'을 찬양하였다. [목욕하는 여인들]은 무엇보다도 진부한 아카데미즘에 의해 평가절하 되어 왔던 유형의 그림을 진보적인 미술의 영역으로 복귀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또다시 예술적 야망의 정점에 놓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간 상호 간의 관계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제시함으로써 예술과 실존이라는 근본문제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스위스 화가인 페르디난드 호들러(Ferdinand Hodler)는 위와 같은 위대한 선구자들의 대열로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파리에서. 그리고 프랑스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작품이 특히 프랑스 밖에서 주된 자극을 준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그도 또한 인상주의에서 떠나 어떤 점에서는 놀라우리만치 고대적인 미술을 지향하였다. 그는 이 같은 작품으로 스위스의 권위지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파리(1891년 이후), 비엔나(1904), 그리고 독일의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에서 '종교적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이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끌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웅장하고 단순한 조화'를 얻기 위해 웅장하고 단순한 주제들을 사용하였다. 그는 옛 거장들의 직접성을 높이 평가하여, 특히 뒤러(Albrecht Durer)와 홀바인(Hans Holbein), 그리고 소위 '이탈리아 원시화가들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을 그렇게 부른다)의 명확성을 숭배하였다. 그는 그림의 주된 구성에 합당한 모델과 그 자세를 발견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면밀한 관찰을 하였으며, 무용수들의 표현적인 동작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웅장한 상징적 주제를 담은 대규모의 회화연작을 제작하였다. 호들러는 이를 통해서 밤, 낯, 사삼, 진실 등과 같은 단순한 근원적 주제를 자신과 같은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주의와 견고한 구성이 결합된 전형적인 예이다. 인물과 표정의 다양성은 인물들의 엄격한 배열에 종속되고 있다. 이 연작 중 다른 그림들에서도 다섯 사람이 화면을 따라 대칭적으로 병렬되어 있어 유사한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호들러는 이같이 형태와 선을 반복하는 방법을 성명하기 위하여 '병렬주의(parallel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집트 미술과 비잔틴 모자이크에서 유래한 방법이다.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중요한 상징주의 전시회에 소개되고 난 몇 년 후, 호들러는 자크-달크로즈(Emile Jacques-Dalcroze)와 친분을 갖게 된다. 달크로즈는 율동체조라고 알려진 체조방법을 개발한 음악교수로서, 초보적이고 본능적인 무용동작과 유사한 신체운동을 통하여 음악과 언어의 표현적인 움직임을 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이를 드레스덴 근처의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당시 젊은 램버트(Marie Rambert)는 파리에서 니진스키와 공연한 [봄의 제전]에 이 같은 신체운동의 특성을 이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달크로즈의 방법을 인체웅변적(Anthroposophical) 예술작품과 교습방법에 적용하였다. 호들러는 달크로즈나 슈타이너와 마찬가지로, 그의 세련되지 않은(아카데믹한 기준에 의하면) 회화 언어가 대부분의 미술이 가진 난해함에 압도된 대중들에게 전달되어서, 현대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 의해 억제되었던 근본적인 인간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의 영향력은 마티스, 뭉크(Edward Munch), 몬드리안 등의 작품과 독일 표현주의, 그리고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 중 보다 온건한 경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그의 풍경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원색의 색조는, 인상주의가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앉았을 때, 중부 유럽인들의 눈을 인상주의의 생동감 있는 색체에 익숙해지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5 년에, 독일 출신의 건축가이며 도시 계획가였던 힐베르자이머(Ludwig Hilberseimer)는 샤를르 루이 필립(Charles-Louise Philippe)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이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는 대부분이 구축주의적인 추상미술로 이루어진 새로운 수장품에 대한 카탈로그 서문에서 이같이 완벽한 현대적인 미술에 이르게 된 혁신의 과정을 되돌아보았다.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야만인들이다. 본질적인 것은 신과 가까이 살아왔다는 것이며 책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섬세함과 예술애호(dilettantism)의 시대는 지나갔다. 정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샤를르 루이 필립은 이 같은 말로 표현주의가 도래하는 정신적 상황을 명료하게 요약하였다. 야만적인 것이 예술의 회춘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1925 년 당시에 그는 예술의 회춘은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느꼈던 것이다. 야만인들이 그들의
과업을 이룩한 것이다. 그는 이들의 혁신적 과업이 1차대전의 참상과 그에 뒤이은 독일과 러시아에서의 파괴와 재건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도 또한 감지하였을 것이다.
' 표현주의'라는 말은 처음에는 인상주의에 반대되는 경향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즉 프랑스 미술에 있어서 인상주의의 선취권을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인상주의 이후의 모든 미술경향을 지칭하는 닐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시 광범위하기는 하지만, 표현주의에 특별한 역할이 주어진 것도 독일에서였다. 표현주의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 문학(특히 시와 연극)에 있어서, 주제와 기법을 개인적 표현형식으로 삼는 한 경향을 가기키는 것이었는데, 그 경향은 명확히 정의된 것은 아니었다. 표현주의는 '반(反)자연주의적인 형태와 색채에 의하여 전달되는 세계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시각을 통하여 관람자를 감정적, 정신적으로 감동시키고자 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특성을 공통적으로 가진 회화들이 최초로 나타난 곳은 파리에서였다. 1905년의 살롱 도톤느 전에서는 마티스, 루오(Georges Rouault), 블라맹크(Maurice de VIaminck)등의 작품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비자연주의적인 원색과 이를 화폭에 옮겨놓는 세련되지 않은 기법 때문에, 한 비평가는 그들을 야생동물, 즉 '야수(fauves)'라고 일컬었다. 이 명칭이 그대로 고수되어서 미술사가들이 야수파(Fauvism)를 현대미술의 위대한 운동들 중 최초의 것으로 칭하게 되었다. 야수파에 속하였던 미술가들이 이념이나 방법에 있어서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 것은 아니었으며, 일단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후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야수파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그것들이 어째서 그렇게 공격적인 것으로 보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전시회에 전시된 그림 중의 하나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여기서 그림의 주제는 어떤 도발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여인(실제로는 마티스의 부인)이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으며(사실 패션모델과 같은 자세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약간 지나치게 보였겠지만 볼로뉴 숲 속에서는 멋지게 보였을 모자를 쓰고 있다. 이 그림이 모델이나 관람자에게 모욕적인 것으로 보인 것은 분명히 마티스가 모델을 재현하는 기법에 그 원인이 있다. 그의 색채는 그것을 하나의 정보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모델의 머리가 정말 한쪽은 붉은색이고 다른 쪽은 녹색인가,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실제로 연보라색, 녹색, 파랑의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가? 붓 자국 자체도 아무렇게나 성급하게 칠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려진 사물의 각부분간의 일대일 관계나 그 사물의 통상적인 외관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또 사물의 외관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화가처럼 분석적인 눈으로 주의 깊게 사물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경우 놓칠 수도 있었던 모든 채색효과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정확도를 기준으로 그림의 세부적인 것을 문제 삼기보다, 그림 전체를 봄으로써 붓 자국들과 색채들 간의 상호관계나, 형상과 바탕 또는 각 부분의 상대적인 크기간의 상호관계, 즉 모든 요소들의 종합적인효과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만화처럼 보였던 것이 마티스에게는 생기는 효과를 창출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 작품에 감정적인 내용이 표현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여인과 색채, 장식성에 대한 화가의 사랑과 관련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모욕적인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시각적 자극의 표현이다
1.새로운 야만인들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2.현실세계에 대한 질문과 대답 --입체주의와 초기 추상미술
3.진보의 이미지 --미래주의와 러시아 구축주의
4.예술은 죽었다 --예술이여 영원하라--다다이즘
5.질서에의 요구 --초현실주의
6.현대 미술의 선구적 대가들
7.미국적 속성의 미술 --추상표현주의와 색면 추상
8.전후 유럽의 미술 --서정추상
9. 최근의 회화와 조각 --팝 아트, 옵 아트, 미니멀 아트
10.회화와 조각을 초월하여 --행위미술, 개념미술, 대지미술
11.포스트 -이즘, 네오-이즘, 그리고 미술
12.현대 사회속의 미술가
1.새로운 야만인들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야수파: 대담한 변형과 터치 강렬한 색채로 색채를 자기 표출의 수단으로 사용 "야수파"는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의 전시를 보고 '야수들 사이에 있는'라고 하는데서 용어가 유래되었으며, 야수파의 대표작가 마티스는 '수단의 순수함으로 복귀하려는 용기, 이것이 바로 야수파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 -야수주의는 급작스럽게 태어났다기보다는 인상주의적 감각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보다 강렬한 감동에 대한 목마름에서 출발한다. 중류계급의 고상함과 아카데믹한 꾸밈 그리고 암시적이지만 모든 것을 숨기는 아르누보적 우아함등의 판을 치던 시대에 마티스,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죠르주 루오, 라울 뒤피 및 군소 작가들은 대담하고 다시의 화면에서 거의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솔직한 표현을 위해 직접성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야수파들은 세기말적인 슬픔과 내성 그리고 상징주의 문학의 탐미성을 모두 벗어던지고 인상주의의 직접적이고 기쁨에 찬 자연의 포옹을 재생시키는 한편 후기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는데 만족했다. 이들은 모두 색채를 이전의 낡아빠진 묘사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야수파는 새로운 실험정신을 발휘한 작가의 색채를 통해 표현적 감정적 힘을 표현하고 과거의 전통을 깨는 것이다. 야수파는 넓은 추상적 색면을 중요시하여 묘사적 기능에서 조형적 자유를 추구했다. 따라서, 넓은 색면을 점차 추구하여 장식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세잔의 색면과 다른 것은 세잔은 보다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그 의미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색채 사용이 고흐의 고정을 계승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야수파는 양식적인 변화에 주력하여 내용보다는 형태왜곡, 추상적 색채가 패턴화된 화면이 형태를 이루고 그림은 장식화된다. 일종의 조형적 표현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야수주의의 형성에는 3개의 그룹으로 나뉠수 있는데 파리 국립 미술학교 귀스타브 모로를 중심으로한 마티스, 마르케, 망갱, 퓌이, 샤투파로 알려진 블라맹크,앙드레 드랭 그리고 르 아브르 출신의 프리에츠.뒤피,브라크이다. 야수파화가들은 반고흐와 고갱의 작품속에서 예술의 본보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가시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야수파의 색채의 항연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1904년과 1906년에 전시된 세잔느의 회고전이 야수파 화기들의 전향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야수파 화가들은 강한 개성과 기질,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화가들이었다.
-야수주의의 일관된 특성을 추출해 내기란 매우 힘든데, 이론가와 이론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색채의 강렬함이다. 오직 순색조에만 의존하고 각 색조간의 직접적인 대비,거친 터치,종래의 투시법, 양갑, 명암법을 무시하고 색조의 뉘양스,전조를 묵살한다.
-또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고갱의 계승)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상주의는 명암과 광선의 효과를 색채에 의해 묘사하려 하였지만 야수파 화가들은 색채 자체에서 광선이 배어나오기를 워했으며 광선이 색채의 조화 및 광휘와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야수주의 1907-1908년 주요 화가들의 관심이 색채로부터 입체감,양감,중량감,선으로 바뀌어지면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드랭과 블라맹크의 작품은 1908년부터 색채가 어두워지고 구조적으로 변하며 야수파의 본질을 끝까지 유지했던 화가는 마티스와 뒤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 마티스 -마티스는 특별히 이 운동에 대해 어떤 창시적인 선구자로서의 객관적인 입지를 스스로 밝힌 적은 없지만, 화풍이나 연령을 고려할 때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신진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열었다. 그는 모로에게 자유분방한 시각의 교육을 받고 1898년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코르몽,카리에르의 스튜디오로 옮겨 작업을 하다가 코르시카,뚤루즈.생-트로페를 여행하며 자신의 회화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과장없는 평범한 주제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에는 드가,툴루즈-로트렉, 인상주의, 일본판화등에 눈을 떳고 르느와르와 세잔느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정물의 모작에서도 이미 세부표시를 지양하고 선과 색채를 구성요소로 단순화시키는 방향을 말한다.
-전기야수파라고 불려지는 순수 색조의 난폭한 터치의 풍경화가 이때의 특징이며 또 생-트로페 체류시기에는 (1904) 폴 시냑과 작업하며 신인상파의 점묘주의 기법을 시도한다. 바로 그것이 "화사함, 고요함과 쾌락" 이다. - 이후 마티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대담한 색채를 구사하게 되는 데 이는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주제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역할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더욱 강조되는 부분은 바로 소묘에 대한 것인데,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는 우리에게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을 형태로 지각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언급하게 되면 작품의 모든 것이 장식적이라는 것이다. 나무, 배, 해변들이 단순한 공간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선적인 패턴들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가 당시의 문학적인 사조와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작품은 "생의 환희"에 나타나고 있다. 현실도피라는 고전적 주제를 노래로 한 보들레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마티스의 상상력이 문학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 지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중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작품 중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가 있다. 이 작품이 전시되고 나서 그가 들은 것은 노골적인 괴벽이라는 비평가들의 어절수 없는 평가였지만, 지금도 코를 둘러싸고 있는 강한 녹색선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강한 표현, 얼굴을 채우고 있는 주황과 초록색은 인공의 묘한 깊이를 느끼게 하고 있다. 이후 마티스의 작품에는 비유럽적인 요소(원시미술) 들이 상당부분 등장하게 되는 데 "분홍양파들이 있는 정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본질들을 줄여 버리는 이러한 일, 즉 표현해야 할 회화적인 요소들의 수를 감소하는 일은 마티스의 화가로서의 경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발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옛 대가들의 교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순수회화의 문제에 사로 잡힌 명철하고 신중한 교양인이었다.
-블라맹크
-특히 블라맹크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원시적인 충동과 물결치는 색선과 강렬한 색채들을 이용한 충동적 작품을 남겼다.
-그는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그의 회화와 조각에 결정적인 자극을 선사한다. 1906년 앙데팡전 이후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물감이 회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제 선택과 구성은 확실히 인상파에서 연원하고 있으며 실로 그의 구성요소의 배치방법은 피사로와 인상주의와 매우 가깝다.
2.현실세계에 대한 질문과 대답 --입체주의와 초기 추상미술
큐비즘 (입체파:立體派) : 형태를 분해 하고 재구성, 이지적 태도, 파피에 콜레
-20세기 초 야수파(포비슴)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 입체주의라 고도 한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 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 (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遠近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17 세기 프랑스의 G.드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 시대적 구분에 의한 큐비즘
1.초기(세잔적) 큐비즘 (1907 ~ 1909)
-“자연을 원통형·구체(球體)·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밀 베르날에게 보내는 편지, 1904년 4월)라고 하여“색채 속의 면(面),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G.가스케《세잔》) 등을 제작목표로 한 세잔이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07년 살롱 도톤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構築的)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球體)·삼각추(三角錐)·면원통형·입방체(立方體)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큐비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는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 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立體:Cube)란 최초로 비평가인 R.보셀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셀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 차례‘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새로운 화면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奇矯)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피카소),“내게 있어 큐비즘이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인 표현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브라크).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明暗)을 없앤 수법으로,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우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다. 이 <아비뇽의 처녀들>는 입체파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며 분석적 큐비즘의 단초(복수시점과 촉각적 평면의 구성)가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브라크 역시 이 당시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에 힘입어 초기의 야수파 미학에서 벗어나 대상의 구조와 질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며 1908~9년경에는 이런한 초기의 세잔의 재해석이 일련의 풍경화로 나타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는 집과 나무들이 단순한 입방체로 환원되어 있고, 색채는 제한되어 있으며 조명이 여러 각도에서 비춰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서 큐비즘 회화의 한 특징인 복수시점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러한 풍경화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대상에서 찾아낸 선/질감/부피 같은 조형요소들 자체에서 또는 그것들의 배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크와 피카소의 그림에 나타난 풍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피카소의 풍경은 "힘이 있고 대담하며 무엇보다 조각적, 건축적 또는 축조적인 요소가 지배적"인 반면 브라크의 풍경은 "회화적이고 유동적이며 투명하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경우 초기의 큐비즘 연구를 조각적으로 접근-조각실험을 통해 대상의 해체와 종합- 했고 브라크는 이와는 달리 회화적으로 접근해서 공간의 촉감적인 표현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이 다른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直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쌓아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1909년 이들은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만나게 되고 서로의 작품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미학에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이 노력들은 1910년경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이른바 "분석적 큐비즘"의 정물화와 초상화를 내놓게 된다.
2.분석적 큐비즘 (1910 ~1912)
-세잔풍의 입체파에서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亂反射)를 방불케 하는‘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 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비구성(非構成)’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이다. -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는 물체는 일단 일상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顯在)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물체 그 자체’ 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존재로서 정착시킨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視點)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多元的 )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다.
3.종합적 큐비즘 (1912 ~ 1914)
-1912년 입체파는‘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물론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에 다다이즘은 더욱 철저한 콜라주를, 쉬르레알리스트는 포토몽타지를 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파의 현대적 발상의 하나였다.
-입체파의 종합적인 전람회는 1911년의 살롱 데장 데팡당에서 개최되었는 데 당시 출품자에는 앞서 말한 4인 외에 들로네, 뒤샹, 비용, 로랑생 등 이 포함되어 있으며, 소박한 화가로서 알려진 H.루소의 작품에서도 입체파적인 조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입체파의 색채 경시의 경향을 다시 문제삼아, 다채로운 색을 동시적인 존재로 바꾼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며, 그의 이론이 마케, 마르케, 클레를 중심으로 한 청기사(靑騎士)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J.그리스를 전형적인 입체파 화가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분석적 입체파에서 종합적 입체파로의 전환에 미친 그의 공적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사실 J. 그리스의 경우 후년의 피카소, 브라크에 비하여 입체파에 몸바친 경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독일의 입체주의자로는 보통 슐레머, 바우마이스터를 들고 있다. 운동으로서 입체파의 역할은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 을 계기로 소멸해가나, 그 후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
-세잔의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전개시켜 나갔으며, 프랑스 특유의 정서가 깃든 작품을 그렸다. 피카소와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여 입체파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크도 어릴 때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간판을 그리는 기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되었다.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의 작품은 피카소의 당시 그림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브라크의 예술적 독자성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같은 아틀리에를 쓰며 공동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그림에서 영향받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브라크는 피카소가 다른 화풍으로 전향한 후에도 진정한 입체주의자로 남아 입체파를 완성시키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브라크를 피카소가 주도하는 입체파를 형성하는 무리 중 한 화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 레스타크의 집들>이라는 작품은 원근법을 버리고 색채로써 형태를 구축하였다. 그는 빛이 한곳에서만 비치는 풍경대신 각각의 형태들이 따로따로 빛을 받게 했다.
-주요 작품 : 물고기가 있는 정물, 에스타크의 집들,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 커다란 누드 등
- 피카소 -1920년대부터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피카소는 입체주의 그림과 장엄한 고전양식의 그림을 그렸을 뿐아니라 신고전주의적 기법의 드로잉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내었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작품 또한 아주 다양한 데 다소 해학적인 대규모 조각과 함께 초현실주의 조각도 제작하였으며 <게르니카> 같은 갈등의 이미지들을 그렸는가 하면 평온한 아름다움을 주는 섬세한 에칭과 축제분위기로 가득찬 장식회화도 제작하였다. 1947년부터는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대부분 자신을 풍자하는 작업을 하였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 누드는 아프리카 조각에서 받은 영향을 고전적인 미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줌. --- 전체적으로 인물과 배경이 삼차원적으로 해체되어 있음 -<등의자가 있는 정물> --- 모든 물체를 각과 평면으로 분해 -<세악사> --- 정확하게 절단된 형태들은 서로간의 긴밀한 결합을 보여줌
- 후앙 그리 -피카소와 브라크 외에 이들의 큐비즘 미학을 이들보다 오히려 대중에게 잘 전달했던 작가로서 후앙 그리가 있다. 그는 1912년경에 분석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주고 큐비즘 운동이 약해지기 시작한 1914년경에 종합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준다.
- 레제 -레제는 입체파 미학을 기계미학의 추구(운동감)를 위해 도입한다. (인체를 튜브형태로 묘사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을 "튜비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요 작품 : 세여인, 도시, 건축 공사하는 사람들, 형태의 구성 등
- 들로네 -들로네는 1909년 경의 에펠탑 연작에서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색채를 지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에 그려진 <창>시리즈와 <해, 달>연작에서는 비구상 계열의 순수 색채 회화를 보여준다.-그래서 아뽈리네르는 들로네와, 또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작품을 보여준 쿠프카나 피키비아 등의 작품경향을 일컬어 <오르피즘>이라 부른다. -오르피즘은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에서 따온 말로 (자신의 시구에도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색채의 율동성과 색채의 프리즘 효과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오르피즘은 그래서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혹은 순수색채적 큐비즘이라 불려지게 된다.
표현주의:인간의 불안한 내면세계를 강렬하게 표현, 형태의 변형 뭉크(절규) , 코코슈카, 클레, 그로스
3.진보의 이미지 --미래주의와 러시아 구축주의
미래파: 물체의 운동과 시간 요소, 소음 등에서 새로운 형태의 미 창조. 보치오니(조각), 발라, 세베리니
파리파: 파리에 모여 작품활동 모딜리아니, 보나르, 루소, 위트릴로, 샤갈, 수틴, 로랑생
다다이즘:뒤샹
초현실파:꿈, 무의식 세계, 공상 환상의 세계 표현 에른스트, 키리코, 달리, 미로, 마그리트, 아쉴 고르키
추상주의 : 순수 조형요소로만 화면구성, 색채의 원리적인 추구시도, 색채가 재질감 따름 몬드리안(콤포지션-기하학.차가운 추상) 칸딘스키 (서정적, 따뜻한 추상) 아르프(부드러운 곡선의 추상조각)
추상표현: 일반적으로 1947년 폴록의 드리핑 회화의 완성을 기점으로 한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에 미국 화단을 지배하던 추상회화의 양식을 가리킨다. 본래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에 사용했던 말로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폴록과 드 쿠닝의 작품을 설명하는 용어로 이후의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프란츠 클라인, 로버트 마더웰 등의 작품을 포괄하게 되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유럽에서 망명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과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실존주의에 힘입은 바 크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에서는 일체의 구상적 형상이나 기하적 형상 등을 거부하고 작가의 행위와 과정이 중시되며 내면의 격정적 감성을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대륙적인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들은 미국 이라는 초강대국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50년대 전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는 흐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앵포르멜-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서 일어난 서정적 추상(abstraction lyrique, 佛)의 한 경향이다. 당시의 정형화되고 아카데미즘화된 기하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양식으로 격정적이며 주관적인 표현(드리핑 수법, 색채와 재질감 동화)이 특징이다.
1944년부터 등장한 포트리에(Jean Fautrier), 뒤뷔페(Jean Dubuffet)가 대표적인 작가이며 이들은 전쟁의 가혹함과 실존적 고뇌, 전통적 권위에 대한 저항의식을 격정적으로 표현하였다. 1952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앵포르멜의 의미(Singnificants de l'informel)'라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이들의 미술은 '앵포르멜'로 알려지게 되었다.
'informel'은 비정형(非定型)을 의미하는 불어로 대상의 재현이나 기하적 추상미술에 반대하고 내면을 표현하는 유기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일컬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서정적 추상미술에 포함된다. 또한 동시대 미국의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과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비견되는 유럽적 양식이다.
액션 페인팅- 미국의 데쿠닝, 프란시스 베이컨-능동적 행위 중시
현대 조소
마리니(말과 기수)-공간의 긴장미 무어(와상)-단순화된 형과 풍부한 양감, 곤간의 묘미 쟈코메티(걷는 남자)-인체를 가늘게 단순화 브랑쿠시(공간의 새)-극도의 단순화 콜더(움직이는 모빌)-스태빌 마욜(지중해)-부드러운 곡선과 양감 표현 |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myhome.shinbiro.com/~paranjk/frameset.htm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