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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 학교 : 창원 이창 국민학교(1977. 10. 1∼1979. 2. 28)
◎ 첫 이동의 순간
1977년 10월 1일, 진해시 교육장이 지정하는 학교 근무를 명함. 이라고 적힌 사령장을 들고 진해 교육청을 찾아간 것은 10월 4일이었다.
진해 교육청에 가니 당시의 장학계장에 의해서 교육장님에게로 안내가 되었고 '창원 이창국민학교 근무를 명함' 이라고 적혀 있는 사령장을 전해 받았다. 교육청에서 주는 관내도를 보니 이창국민학교는 행정구역상으로 창원군 진전면 이명리 목화전 부락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섯 학급에 전교생 130 여명의 아주 작은 시골 학교였다.
지리에 선 탓으로 주차장에서부터 물어가며 학교를 찾아가게 되었고, 진동에서 택시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늦은 시각에 교문 앞에 택시가 서고, 이어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교무실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곽기현 선생님과 이봉원 기능직 아저씨였다. 곧바로 학교 구내의 사택에 계시는 배영기 교장선생님께로 안내가 되었다. 한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고 숙직실에서 혼자 잠을 자게 되었다.
교직생활을 시작한지 5년하고도 5개월만에 첫 이동을 하게 되었고, 이제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임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근처를 혼자서 둘러보았다. 교문을 나서기 바쁘게 나를 맞아 주는 것은 때마침 만조로 아주 풍부하게 철썩이는 파도였다. 청정해역답게 아주 맑고 깨끗한 해수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곳이었다.
곽 선생님 댁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남해로 향했다.
그 날은 마침 도마 국민학교 가을 소풍날이었다. 이락사(李落祠)에서 소풍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거의 옵저버 자격으로 부담 없이 갖는 도마에서의 마지막 소풍 행사는 내게 또 하나의 의미를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이락사는 바로 내 교직생활의 첫 소풍지 이기도 했던 것이다.
◎ 오자 마자 소풍
이삿짐을 싣고 남해를 떠나 이창으로 부임을 한 것은 10월 6일이었고, 새로운 생활에의 적응을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새 학교에서 내가 맡은 학년은 4학년, 23명의 참으로 홀가분한 인원이었다. 전임지 아이들보다 훨씬 순수해 보이는 이창 아이들의 앞에서 나는 자신을 더 아이들과 맞추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몇 날 뒤 소풍을 가게 되었다. 더러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겠지만 내겐 또 특별한 의미의 소풍이었다. 같은 해에 가을 소풍을 두 번이나 가게 되는 행운(?)을 얻었으니 말이다.
소풍지는 바닷가였다. 청정해역의 맑은 물이 출렁이는 해변의 가을 경치는 공해에 찌든 도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참으로 좋기만 한 곳이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의 가족적인 분위기 또한 전 임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교직생활 이제 6년 남짓 무슨 일이나 자신 있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교직에 관계된 모든 일들이 전혀 생소하지만은 않은 어쩌면 생기 넘치는 시기였을 테니까 아무래도 마음은 입구부터 깊숙한 끝까지 맑기만 했고, 희망적이기만 했다. 한잔 술에 붉어진 얼굴도 그렇고,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들과의 여러 가지 추억 만들기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돌아오는 길에 합창으로 불렀던 '과수원 길'의 멜로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 들리는 듯 하다.
◎ 처음 맡았던 교무주임
1978년 하반기에 1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받으라는 공문을 받았다. 1급 정교사는 2급 정교사에서 사회 신분이 수직 이동하는 것이라고 뒤에 들은 일이지만 교직생활을 수행하는데 보다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의미가 부여되는 사건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소위 1급 정교사가 되어야만 주임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40 시간의 연수 교육을 모교인 진주 교육대학교에서 이수하고 학교에 돌아와서 새 학년도를 맞아 내게 주어진 직함은 교무주임이었다. 교직생활 6년, 1급 정교사가 되자마자 교무주임을 맡게 된 것이다. 교직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여러 주임교사 중에서도 교무주임은 학교의 모든 일들 가운데 중심적인 일들을 해야함은 물론 다른 주임교사들의 업무까지도 관심을 갖고 챙겨야 하는 수석주임이기도 했었다.
지금은 부장교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리고, 그 이름이야 어찌 됐건 매일의 일과를 포함하는 모든 학교내외 교육활동의 기획과 실행이 교무주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조차 분간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갈 수밖에 없었다.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그리고, 동료교사들이 나를 부를 때 ‘교무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이 낯 설은 가운데 어깨가 올라가는 흐뭇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은 모든 교사들이 세월과 함께 겪으면서 자연 성장을 해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참으로 어리석은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욱 지금에 와서는 혼자 미소 짓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 졸업식에서
1979학년도는 내게 교직생활 또 하나의 시작이 있었다. 처음으로 교무주임 업무를 맡았던 것이다.
1정 연수를 받고 이내 받은 첫 주임인지라 딴엔 1년 내내 할 일들이 무척도 많았었고, 따라서 몹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79학년도가 거의 끝나 가는 2월 20일, 졸업식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6학급의 작은 규모 탓으로 준비과정이 몹시 분주했고, 처음으로 하는 일이라 일목요연한 체계보다는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가운데 일들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 하나의 일들을 챙겨 가면서 준비를 하기는 했다.
졸업식 진행을 하면서 딴엔 몹시 긴장을 했다. 이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진행이 되어 가다가 졸업장 수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졸업장을 받을 사람은 모두 26명, 이름은 하나하나 교무주임이 호명하게 되어 있었다.
"1979학년도 졸업장을 받을 사람."
하고는 이름을 부르려는 찰라 졸업장을 정리하여 교무실의 캐비넷에 두고 졸업식장으로 내어다 놓지 않았음을 생각해 내었다. 급히 6학년 담임을 교무실로 보내고 스물 여섯 명의 이름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불렀다. 흐르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기가 그리도 힘드는 것인줄은 미처 몰랐었다. 한 사람인가 남았을 때 6학년 담임이 졸업식장으로 들어섰다. 어찌나 반갑던지 그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6학년 담임은 들어서서 내게로 다가와서 참으로 청천벽력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캐비넷이 열리지 않습니다."
상황은 터지고 만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죄송하다는 공개적인 멘트를 남기고 교실을 세 칸이나 지나서 교무실로 달려갔다. 캐비넷을 열고 졸업장을 가지고 졸업식장으로 가서 졸업장을 수여했다.
면내 기관장들을 포함한 손님들을 모셔 놓고 일어난 해프닝은 정말로 큰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졸업식이 끝나고 회식이 있는 자리에서 나는 교장선생님께 진심의 사죄를 했다.
"교장선생님, 죄송합니다."
"사람이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수도 있는 거네. 나나 교감선생님이 관심을 갖고 챙겨 주지 못한 점이 미안하네. 앞으로의 교직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될 걸세."
아랫사람이 한 실수는 모조리 죽일 죄로 치부되는 풍토가 만연했던 당시의 윗사람으로는 정말로 보기 드문 아량이었다. 사실 나는 호된 꾸지람이 더 속 시원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너무나 관대한 교장선생님이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도 졸업식장에서 식이 진행되면 예의 그 일이 생각나서 혼자 실소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동료나 후배 교사들에게 그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웃곤 한다.
진정 존경스러운 영감님의 존함은 배영기 교장선생님. 창원 이창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 교장선생님과는 그 외에도 나와는 서로 밀착되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인정을 받은 가운데 교직생활에 관한 많은 행동 지침들을 체험으로 배우게 했던 분이다.
-전근으로 서로 헤어진 뒤에도 안부를 전해 드리곤 했다. 그러다 어느 해부터는 우연히 서로 연락이 안되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수소문하여 전화를 드렸더니 정년퇴임을 한 열흘 앞두고 있었다.
부랴부랴 축하를 위한 시화 1점을 만들고, 준비를 하여 퇴임식장에 참석을 할 수 있었다.-
◎ 시조부 지도를 하면서
1977년부터 1979년까지의 이창 국민학교는 참으로 작은 규모인데다가 교육청이 있는 진해시에서 보면 가장 멀리 떨어진 학교요, 교통이 몹시 불편하여 벽지 아닌 벽지학교로 치부되던 그런 학교였다. 자연히 아동의 학력도 그렇고 교육청이 주관하는 각종 아동 행사 실적도 다른 학교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 교육청에서도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학급 아동으로 치면 부진아 그룹의 학교였던 셈이다.
1978년 나는 클럽활동 부서를 조직하면서 시조부를 맡게 되었다. 맡고 보니 아이들 모두가 시조를 써 본 일이 전혀 없는 아이들만 모였다. 써 본 경험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읽어본 경험도 없는 아동들이 대부분이었다. 5,6학년들만 국어 교과서에서 시조를 읽어보았고, 시조가 우리 민족의 순수 문학이라는 사실도, 그 기본 형식도 전혀 모르는 아동들만 모였던 것이다.
자연히 기초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 나름대로 지도 계획을 구안하면서 많은 고심을 했다. 이 때 시작하여 매년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여 요즈음까지 활용하고 있는 소위 『단계적 형식 접근 방식에 의한 동시조 창작지도안』의 태동이었던 셈이다.
아동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흥미를 갖고 임했고, 스스로 생각해도 나날이 발전을 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을철이 되어서 도 학예발표회 예선을 진해 도천 국민학교에서 갖게 되었는데 우리 학교는 학교 규모와 교통의 열악함 때문에 시조부에서 2명, 조소·공예부에서 1명 도합 3명이 대회에 참가를 했다.
경연을 마치고 연습장에 적어 나온 김용호 어린이(당시 5학년)의 작품은 뛰어나다 싶었다. 6학년짜리 한 아동은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우수, 장려였다. 둘 다 입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인데 당시 아동 수 1000명이 넘는 학교가 진해 시내에 몇 학교 있었는데 우수를 차지한 것은 정녕 중앙지에 대서특필할 그런 사건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신문사가 놀았는지 대서특필은 되지 않았고 지방지에 행사 결과로만 작게 보도가 되었다.
함께 참가한 조소·공예부에서도 위용 넘치는 악어를 빚어 최우수를 차지했다. 이래서 이창 국민학교 개교이래 대외행사에서 이처럼 좋은 성적은 처음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수고했다는 격려와 하사주(?)로 잔치를 했고, 학부모들 간에는 제법 오랫동안 감동적인 화제로 남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제법 세월이 흐른 후 옮겨 근무하던 서포 국민학교로 배달된 김용호군의 편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진전중학교 1학년 때 국어시간에 시조를 공부하는데 국어선생님이 시조의 형식을 설명하기 전에 알고 있는 학생이 있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그 때 김용호군이 손을 들고 알고 있는 시조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발표했더니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는 참으로 진한 감동을 안겨 주는 소식이었다.-
◎ 교직 첫 연구실적
1979년의 일이었다. 교무, 연구 업무를 동시에 맡은 나는 교원예능경진대회 참가자를 물색하면서 고민을 했다. 우리 학교 규모는 의무참가 수가 1명이니 홀가분할 것 같은데 참가를 희망하는 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업무 담당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내가 참가하기로 결정을 했다. 교원예능경진대회에서 그 해 처음으로 생긴 시조 백일장부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새교실』,『교육자료』지 추천을 마친 나는 특별히 따로 시조 창작 공부는 하지 않았다.
교원예능경진대회 진해시 예선대회는 진해 경화 국민학교에서 있었고 제시된 제목은 『새마을 운동』이었다. 나름대로 몇 번을 쓰고, 고치고 하여 작품을 완성하여 제출하고는 함께 참가한 친구랑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심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사실 진해 교육청 관내에 시조를 쓰는 선생님들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라 몹시 긴장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심사가 끝이 난 듯 했고, 발표는 아직 안한 가운데 당시 진해 중학교 국어선생이 "글마 작품 좀 뵈 주소."
하면서 심사위원의 뒤를 따라 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거기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궁금증을 이길 수 없었다. 꾀를 낸 것이 담당 장학사님을 찾아서 직접 물어보는 것이 제일 현명한 방법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학사님, 저는 이창 국민학교 교사 김형진입니더. 아시다시피 갈 길은 멀고, 결과가 안 좋으몬 지금 갈라고 합니더."
했더니 심사결과 집계를 하는 교무실에 다녀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김 선생, 안 가능기 좋겄더라."
결과는 예선 최우수로 도 대회 참가자가 되었고, 아까의 진해중학교 국어선생이 심사위원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말하던 '글마'가 바로 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정보가 빨라서 심사 결과를 벌써 알고 했던 좀은 경망스런 행동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그는 나보다는 연령적으로 어린 사람이었다.
-도 대회는 마산 상업고등학교에서 있었고, 참가 결과 나는 2등급에 입상을 했다. 그 해에는 1등급이 한 사람이었는데 함안 종합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라고 했다. 어쨋든 나는 교직 생애 첫 연구실적을 내가 좋아하는 시조 쓰기로 쌓은 셈이어서 더 좋았다.-
◎ 바다에 들어가서 작업하는 선생님들
이창 국민학교는 전기(前記)한대로 바닷가 학교였다.
학교가 자리한 목화전이란 곳은 이명(耳明)마을과 창포(昌浦) 마을의 중간 지점으로 인가가 고작 10집 남짓한 마을이었는데 이런 곳에 학교가 서게된 점이 매우 의아했다. 이명도 창포도 상당히 큰 부락이었으니 그 궁금증은 더욱 컸었다.
당시의 기능직 이봉원 주사의 말에 의하면, 개교를 준비할 당시 이명과 창포의 실력자들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바람에 이명도 창포도 아닌 중간 지점으로 낙착이 되었고, 학교의 이름도 이명도 창포도 아닌 '이창'으로 결정되었던 사연을 지닌 학교였다.
학구내 마을은 바다에다 온통 굴 채모를 함으로써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학교 몫으로 적당량을 시설해 주었다.
굴 채모란 굴 껍데기를 줄에 끼워 엮어서 만든 것을 바닷물에 잠기도록 해 놓고 굴의 포자가 붙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수하식 굴을 키우도록 하는 그런 작업이었다. 말로는 간단한 설명이 가능했지만 그건 상당히 복잡한 일련의 작업과정을 필요로 하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걸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조개 껍데기에 구멍을 일일이 똟어서 끼운 것을 걸고, 수시로 관찰하는 등 자주 바다에 들어가야 했고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적당한 시기를 잘 이용해야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기능직 아저씨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교장, 교감, 남 교사는 별 일 없으면 작업복 입고 바다에 들어가야 했다.
다행한 것은 그 일이 더운 여름철에 해야 하는 일이어서 어렵지만은 않았고, 덕분에 해수욕은 자주 했다.
물에 흠뻑 젖은 참으로 불쌍한 모습(그게 물에 빠진 생쥐의 모습일 것이다.)들은 그 순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결코 아니고, 교장실에서 경영전략을 세우시는 근엄한 교장선생님의 모습 또한 아니었다. 초라하다 못해 비 맞은 제비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비슷할 것이다.
남 직원 전원이 바다에 들어가서 작업을 끝내고 나면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어쨌든 오늘날은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아마도 큰 일이 났을 것이다. 과연 어떤 젊은 남 교사가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해야 하는 그런 작업을 즐겨할 것인가?
얻어지는 수익은 그야말로 학교의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교직원들의 의논대로 100% 아동 도서 구입에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자활학교란 이름으로 농·어촌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돼지를 사육한다. 염소를 키운다. 아니면 밤, 감, 밀감, 유자 등을 재배하여 수입을 올렸던, 그래서 지역의 특성을 살려 가며 의미 있는 교육활동 까지 기대했던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시절의 이야기이다.
◎ 제일 작은 학교의 배구 우승컵 영구보존
당시 진전면내 학교는 진전 중학교, 진전 국민학교, 옥봉 국민학교, 양촌 국민학교, 이창 국민학교, 낙동 국민학교 등 6개 학교가 있었고, 행정구역은 달라도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고성 동창 국민학교와 함안 여항 국민학교가 함께 어우러져 교직원 친목 배구대회를 매월 돌아가며 개최했었다. 인원수에 따라 2개 학교씩이 합쳐져 팀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진전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기증하는 우승컵을 세 번 연속 우승하는 팀이 영구히 가져가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이창 국민학교는 직원 배구 실력이 좀 뛰어났었다. 그저 비슷비슷한 가운데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라 월등한 실력 차를 누구나 느낄 수 있도록 잘했다. 직원 8명에 체육 진흥회장과 학교 인근의 청년 한 명까지 합세하여 단일 팀으로 세 번 연속 우승을 달성함으로써 우승컵을 영구보존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직원들, 배영기 교장, 박선훈 교감, 나와 전수정, 예권익, 황성희, 정희분 선생님, 그리고, 이봉원 주사, 강만규 체육진흥회장님과 법무사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손용호씨, 지금도 그들의 소식을 알고 있지만 모두 모두 건투를 빌고 싶다. 함께 무적의 팀을 이루고 백구(白球)를 그물질했던 당시의 감격을 생각하면서…….
특히나 경기를 마치고 회식이 끝나고 나서 교장, 교감선생님은 당시 마산에 거주하신 관계로 버스로 가시고 나면 함께 걸어서 학교까지 돌아오면서 얘기하고, 거나해진 기분을 살려 가며 노래 불렀던 저녁시간이 더욱 향수로 남는다.
◎ 시험지에 나타난 재미있는 이야기
1979년 10월 어느 날, 당시 1학년 담임이던 황성희 선생님은 마산교대를 졸업한 교사로 열성이 대단한 분이었다. 1학년을 맡아서 6학년보다도 늦게 보내는 일은 다반사였다. 부진아 지도의 열성은 정말로 끝이 없었다.
그런 황 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을 시켜서 나를 자기 교실로 오라고 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1학년교실로 들어서자 황 선생은 안 그래도 잘 웃는 아가씨가 그 날 따라 더욱 활짝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답은 안하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내미는 시험지 한 뭉치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짚어주는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문제> 교장선생님이 계시는 곳은? □□□
그게 뭐 그리 우스울까? 하는 생각으로 답지들을 살피던 나는 따라서, 아니 황 선생보다 더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쓴 답이 대부분 정답이라 여겨지는 이 아니라, 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교의 내부 일에도 치밀하셨던 당시의 배영기 교장선생님은 화단에서 화초를 가꾸는 일에 정말로 열성을 보이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학년들이 시험을 치르던 그 시각에도 이슬비가 내리는 화단에서 화초를 돌보고 계셨던 것이고, 1학년들은 칸도 모자라는 답지에다 '에'자를 더 넣어 가며 썼던 것이다.
내친 김에 시험지 이야기 하나만 더, 이것은 다른 학교에서 있었던 시험지 이야기이다.
3학년 자연 시험 중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문제> 곤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 ), ( ), ( )
<머리, 가슴, 배>라고 쓰는 것이 정답인데 참으로 기상천외한 답을 한 아이 하나, 그 답인즉
(죽)(는)(다) 였다고 한다.
◎ 채변봉투에 얽힌 이야기
약간은 냄새가 나는 이야기지만 제목처럼 똥에 얽힌 참으로 재미있는 일을 경험했었다. 이건 어쩌면 우리 내부의 부끄러움을 널리 알리는 것 같아서 많이 망설였으나 당사자인 Y선생을 직접 만나서 얘기 나누고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양해를 얻은 후에 쓴 것임을 먼저 밝혀 둔다.
1979년 가을의 이야기, 당시뿐만 아니고 상당한 세월이 흐르기까지 학교에서는 아동들의 변을 채취하여 한국기생충 박멸협회라는 기관으로 보냈고, 그 기관에서는 기생충 보유의 유무를 검사했었다. 그리고, 검사 결과에 따라 구제약도 배부해 주었었다.
봄, 가을 2회에 걸쳐 실시하는 채변 검사는 국민들의 기생충 보유율이 높아서 국가 시책으로 국민 보건 향상과 건강 증진을 위해서 실시했다. 노란 채변봉투와 그 속에 든 대변을 채취할 때 쓰는 비닐봉지가 들었었는데 한 번 처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담임교사는 물론 업무 담당자의 고충은 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채변의 분량이 적당해야 한다. 너무 많으면 그 냄새가 지독하고, 너무 적게 채취했다가는 검사 전에 말라버려서 검사가 아니 된다. 또. 제출 율이 100% 가까이 되어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며칠간씩의 여유를 두고 수집을 할 그런 성질의 일은 아니었다. 지독한 냄새도 문제였지만, 시골 학교는 어디를 막론하고 교실마다 밤이면 누비고 다니는 서생원(서 씨 님들께는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때문에 보관 등이 큰 문제로 대두되던 때였으니까. 그런데도 100% 달성을 한 담임교사는 퍽 유능한 교사였고, 그러지 못한 담임교사는 변명의 여지없는 게으른 교사로 치부되었었다.
1979년 가을 어느 날의 일이었다.
가정실습에 들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채변 봉투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가정실습이 끝나면 등교하는 날 꼭 가져오라는 말을 그야말로 신신당부했다. 등교하는 날이 등청일이라 그날 모두 모아서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여섯 학급 모두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잊어버리기 잘하는 시골 아이들이고, 요즈음의 부모들처럼 자녀들 학교 생활에 큰 관심을 갖고 준비물이 무엇인지 챙겨 보내는 일은 당시 사정으로는 기대할 수조차 없었었다. 더구나 가정실습이 있어 아마 잘해야 50%를 넘지 못할 거라는 참으로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가정실습이 끝나고 등교한 날, 아니나 다를까 상당수의 아이들이 집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당연히 채변봉투를 깜빡 잊고 안 가져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도 소위 제출 율은 95%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오직 한 반 6학년은 100%였다. 혹 6학년이니까 철이 들어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고 그 결과 100%가 가능했으리란 짐작을 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에 속한다.
당시의 6학년 담임 Y모 총각선생님은 가정실습 하는 날 깜빡 잊고 아예 아이들에게 채변봉투를 나누어주지 않았었던 것이다. 개학을 하고 나서야 아침에 그 사실을 안 담임은 아이들에게 개인용 봉투를 나누어주면서 아침조회 때까지 해 내라고 했다.
다분히 강제성을 띤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약간은 소란스런 가운데 교장, 교감선생님 모르게 그 일은 진행이 되었고, 어쨌거나 100% 달성이 가능했다. 그리고 교감선생님의 칭찬은 빠지지 않았다.
"역시 6학년답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얘기하지 않아도 짐작을 할 일이지만 대부분, 좋게 말해서는 절반쯤은 남의 변을 채취했을 것은 물론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몇 달 후 결과가 나왔고 그에 따라 종류별로 기생충 구제약이 배부되었는데 다른 학년의 그것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77.10.01/배영기(교장선생님), 류갑수(교감선생님), 곽기현, 전수정, 박성임, 이연규 ,이봉원(기능), 강만규(교육협의회장) 1978.03.01/박선훈(교감선생님), 정희분, 황성희, 예권익 1979.03.01/김순원(교감선생님), 권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