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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 여행] 록 그룹 <마그마> 下
넋 빼앗는 신들린 연주
한국 헤비메탈의 이정표
첫 발표 무대는 1980년 제 4회 MBC 대학가요제였다. 매일 강력한 비트에 둘러 싸여 연습을 하며 준비한 곡들은 ‘ 해야’,‘ 알 수 없어’,‘ 기다리는 마음’ 등 조하문의 창작곡 9곡. 그 가운데 박두진의 시를 개사한 ‘ 해야’로 출전을 결정했다. 그 때까지도 팀 이름이 없어 3일 동안 다방에 모여 고민을 했다. 지질학을 전공했던 리더 조하문은 ‘ 폭발 일보 직전의 뜨거운 바위 녹은 물’을 의미하는 마그마가 자신들의 잠재력과 하드 록 계열의 폭발적 분위기를 잘 표현한다며 제안해 팀 명을 그렇게 정했다.
당시는 포크 계열의 노래들이 대부분 입상을 하던 시기. 그래서 홍익대 ‘ 블랙테트라’도 소프트 록 계열의 노래를 들고 나왔다. 80년 대학가요제는 하드 록을 구사하며 한 바탕 소란을 벌인 참가 번호 10번 마그마의 독무대였다. 수려한 외모에 바이브레이션이 가미된 고음의 폭발적인 샤우팅 창법을 구사한 조하문과, 미국 고교 시절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에 둔 헤비한 기타 리프를 선보인 김광현의 신들린 듯한 연주는 장내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며 온 몸으로 율동을 보여 준 마그마는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의 넋을 빼버렸다.
하지만 결과는 은상 수상. 대상은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겨지던 분위기였기에 관객들도 의아한 듯 웅성거렸다. 연주와 노래실력은 최고였지만 전위적인 무대 매너가 문제였다. 순수 대학생 축제인 대학가요제 심사위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일부 팬들에겐 그들의 무대 매너가 시건방지게 비춰졌던 면도 없지 않았다. 이날 대상은 포크계열의 ‘ 꿈의 대화’를 부른 연세대 의대 듀엣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마추어 대학생 밴드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탁월한 마그마의 연주력에 대부분 관객들은 ‘ 한국에도 이런 음악이 있었던가’라는 놀라운 반응과 충격으로 술렁댔다.
대학가요제 수상 이후 마그마는 유명 밴드로 떠오르며 방송 출연 제의가 줄을 이었다. ‘ 젊은이의 광장’,‘ 영11’,‘ 젊음의 행진’,‘ 명랑 운동회’등은 단골 출연 프로그램이 되었다. ‘ 명랑 운동회’ 출연을 인연으로 MC 변웅전의 소개를 받아 펄시스터즈의 멤버였던 배인숙의 백 밴드 겸 보컬을 맡아 TBC의 ‘ 쇼쇼쇼' 에도 출연을 했다.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개성이 강했던 리더 조하문과 리드 키타 김광현은 음악적으로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목걸이나 목도리를 늘 착용했던 멤버 모두는 4학년이 되면서 군 입대와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직업 가수로 활동할 마음이 없었던 이들은 졸업 전에 기념으로 독집 음반을 남기는데 합의했다.
때 마침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취입제의를 해 와 1백만원에 계약을 맺었다. 뮤직비디오와 함께 제작된 독집 음반에서 마그마는 여타 밴드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싸이키델릭 록을 선보였다. 신들린 듯한 김광현의 기타 애드립과 조하문의 고역의 샤우팅 보컬이 빛나는 ‘ 잊혀진 사랑’은 명곡으로 꼽을 만 하다. 대학가요제 수상 곡 ‘ 해야’는 연세대의 공식응원가로 지정이 되었다. 프로그레시브한 기괴한 분위기의 사운드와 샤우팅 창법 그리고 헤비한 기타 리프는 한국 헤비 메탈의 이정표를 그을 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마그마는 해체의 길을 걸었다. 리드 기타 김광현은 졸업 후 MBC 김보경 아나운서와 결혼해 파리 제 3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언어학을 전공했다. 현재 그는 대구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드럼 문영식은 미국 워싱턴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경영학 석사 학위를 따고 대우경제연구소에서 근무 했다. 리더 조하문은 음악 활동과 군 입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솔로 가수 데뷔를 생각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접어야 했고 연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시험에도 낙방을 해 결국 입대를 했다. 제대 후 조하문은 음악 활동을 접고 방배동에서 소극장 방배 예술극장을 운영했다. 85년 3년 간 연애를 해 온 탤런트 최수종의 누이 최지원과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틈틈이 작곡은 했다.
87년, 가깝게 지내던 선배 송창식과 조동진이 재능을 썩히지 말고 솔로 독집 음반을 남기라고 권유했다. 여러 레코드회사에서 퇴짜를 맞은 뒤 대학가요제 때 인연을 맺었던 Y기획의 유수태 사장을 찾아가 9월에 첫 솔로 독집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 ‘이 밤을 다시 한 번’ 등 수록된 6곡이 동시에 히트를 터트리며 100만장이 팔려나가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한 순간에 인기 가수가 된 조하문은 이어 ‘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등 남성 취향 발라드로 연 타석 히트를 기록했다. 90년, 유명세의 대가로 토크 쇼의 인기 사회자 자니윤과 부자 관계라는 뜬금 없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91년에는 63빌딩에서 첫 단독 콘서트에 이어 92년에는 서문여고 교내에서 대형 라이브 무대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이즈음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복음 성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93년에는 CBS 라디오의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라는 프로의 DJ를 맡으며 솔로 4집을 끝으로 대중가수활동을 접고 CCM가수로 거듭났다. 조하문의 폭발적이며 감성적인 섬세한 고역의 보컬은 ‘ 한국 록 보컬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까지 평가되고 있다.
마그마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간 대부분의 음악처럼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잊혀진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숨겨진 명반 복각 붐을 타고 신비감을 더해 온 유일한 독집 음반이 1200장 한정본 CD로 재 발매되며 품절이 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추억의 LP 여행] 록 그룹 <마그마> 上
대학가의 숨겨진 실력파
한국 록의 실험적 사운드 구현
록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는 3인조 헤비메탈 록 그룹 ‘마그마’. 서울대, 연대생으로 구성되었던 3인조 하드록 그룹이었다. 산울림, 송골매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에서는 떨어지지만 그들이 들여준 실험적이고 파괴적인 사운드는 대중 음악사에 특별한 존재의미를 부여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마그마는 단 한 장의 독집 앨범을 남기고 사라졌지만 록의 본고장 영국에서조차 중요 수집 대상 음반으로 찬사를 받을 만큼 한국 록 음악사의 숨겨진 전설이다.
리더는 록 발라드가수로 인기정상에 올랐던 조하문이었다. 그는 성산학원 이사장으로 배문중고 교장을 역임했던 부친 조서희씨와 모친 이정금씨의 엄한 집안의 4남 2녀 중 막내로 1959년 12월 24일 서울 신당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공부를 잘 했던 그는 장충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여자 같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셋째 형이 기타를 들고 와 '에델바이스'를 노래해 처음으로 기타의 매력에 빠졌다. 이후 홀로 기타 배우기를 시작한 그는 대경중2학년 때부터는 연주는 물론 작곡까지 시작했다. 엄한 가정분위기와 각종 시험에 억눌린 사춘기의 그를 위로해 준 것은 음악이었다. 중3 때는 정신여고 문학의 밤등 다른 학교의 행사에 초대받을 정도로 노래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오산고에 진학하면서 ‘딥 퍼플’ 등 하드 록에 매료되면서 그룹 ‘갤럭시’를 결성해 활동을 했다.
78년 연세대 지질학과에 진학하면서 공부보다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이때 만난 국악작곡가 김영동을 따라 경동교회의 창극공연에 참여했다. 이후 대학2학년 때 5인조 록그룹 '아스펜스'를 결성했다. 연세대 백양로를 상징하는 백양나무라는 뜻의 팀 명이었다. 이때의 라인업은 같은 과 친구였던 기타 정창호, 베이스 생물과 2학년 김영철, 드럼 경영과 4학년 박창모, 키보드 간호학과 3학년 어은실이었다. 대학가 최고의 밴드를 꿈꿨던 멤버들은 신촌로터리 부근의 음악학원에서 매일 연습을 했다. 당시 대학가의 유명밴드는 서울대 '엑스티스', '에코우즈', 홍익대 '블랙테트라', 건국대 '옥슨스', 연세대 '라이너스'였다. 직업가수의 꿈보다는 ‘퀸’, ‘레드 제플린’, ‘레인보우’ 등의 하드 록 음악을 남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79년 4월, 연대 교내의 무악극장에서 첫 콘서트를 열은 아스펜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대학가의 스타로 떠오른 출중한 외모의 조하문은 여대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다. 사기가 충천한 아스펜스 멤버들은 79년 한양대에서 열렸던 대학가요축제에 대상을 꿈꾸며 출전했다. 하지만 창작곡 연주 규정을 모르고 외국 곡을 준비해 예선 당일 날 실격을 당했다. 이때 작은 거인의 김수철은 '일곱 색깔 무지개'로 금상을 수상했다. 이후 외국 곡만 연주하게 했던 연세대 주최 대학보컬그룹 경연대회에 참가해 딥퍼플의 'BURN'을 불러 대상을 거머쥐었다. 수상을 하자 TBC '밤을 잊은 그대' 프로에서 방송 출연교섭이 들어왔다. 당시 DJ 황인용은 "앞으로 대성할 수 있는 그룹'으로 칭찬을 했다. 이후 TBC TV '젊은이의 광장'에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멤버가 많다는 이유로 녹화 당일 날 퇴짜를 맞았다. 리더 조하문은 담당PD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소동을 벌였다. 79년 가을,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포크계열의 노래로 도전했지만 방송국 난동사건으로 2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함께 출전했던 연고대 혼합밴드 '라이너스'는 '연'을 불러 우수상과 작사상을 수상했다. 이후 79년 10.26날 이대 기린제에 출전이 예정되었던 멤버들은 대통령의 유고로 공연이 취소되면서 더욱 의기소침했다. 이후 4학년이던 드럼 박창모의 졸업과 함께 ‘아스펜스’는 해체를 했다.
‘마그마’를 태동시킨 계기가 된 것은 정기 연고전 응원연습. 밴드실에 들렸던 조하문은 불문학과 동급생 김광현을 만났다. 외제기타로 연주솜씨를 뽐내는 그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보았다. 넋을 빼앗긴 조하문은 연대 앞 생맥주 집에서 김광현에게 새로운 록그룹 결성을 제안했다. 김광현은 '라이너스'의 리드기타리스트 출신이었다. 그는 의사인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을 떠나 미국, 유럽을 떠돌아다녔고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연세대 2학년에 편입을 한 동급생이었다. 힘이 장사이고 태권도 유단자였던 김광현은 "조하문처럼 목소리가 우렁찬 놈은 첨 보았다"고 말했다. 김광현은 드럼을 쳤던 라이너스의 베이스기타 문영삼의 동생 문영식을 합류시켰다. 또한 베이스는 연대 밴드부에서 한명을 스카우트해 4인조를 결성했다. 이화여대 앞에 70만 원 짜리 방을 전세 내 연습실을 마련했고 깁슨기타, 팬다베이스, 루딕 드럼등 최고급 악기도 장만했다. 이때가 대학 3학년 때인 1980년 6월. 매일같이 모여 음악연습을 했다.
어느 날 조하문은 실력이 처졌던 베이스 기타를 참다못해 부숴버렸다. 그 일로 베이스멤버는 탈퇴를 하고 조하문이 베이스를 맡게 되었다. 처음 4인조로 결성되었지만 작사작곡, 보컬, 베이스에 연세대 지질학과 2학년 조하문, 리드 기타에 연세대 불문학과 2학년 김광현, 그리고 드럼엔 서울대 경영학과 2학년 문영식 3인조로 라인업을 재구성했다. 이들의 음악적 공통관심은 철저한 헤비메탈로 외국 곡 카피보다는 창작곡을 지향했다. 멤버 모두는 학업성적도 우수했다. 이들은 음악 할 때와 놀 때 공부할 때를 구분했던 현명한 대학생들이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Biography
월등한 가창력으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조하문(1959년)은 누구나 경험하는 뮤지션의 통과제의와도 같은 기타소리에 매료돼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룹을 조직해 연주하며 용돈도 벌었던 그는 대학에 들어와 백양나무라는 뜻의 아스펜스(Aspens)라는 그룹으로 1979년 TBC의 젊은이의 가요제에 참가한다. 하지만 창작 곡 위주였던 가요제에서 이들은 딥퍼플(Deep Purple)을 연주해 실격을 당한다. 이 대회에서 김수철은 작은거인이란 그룹과 함께 '일곱 색깔 무지개'로 대상을 탄다.
심기를 가다듬어 연세대 주최 대학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이들은 다음해에 다시 젊은이의 가요제에 도전했지만 2차 예선에서 탈락하고 그룹은 '80년의 어지러운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고 만다. 이 대회에선 우수상을 받은 라이너스의 '연'이 히트했다.
그 후 조하문은 기타리스트 김광현과 드러머에 문영식을 영입해 마그마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야'라는 곡을 만들어 대학가요제에 출전한다. 이들은 최고의 연주를 펼치며 참가한 팀들 중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가 되었지만, 아마추어를 벗어난 프로페셔널한 냄새는 이들을 은상에 머물게 했다. 이 해의 우승은 이범용과 한명훈의 '꿈의 대화'에게 돌아갔다.
<영11>, <젊음의 행진>이란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며 인기를 얻은 이들은 군 입대와 졸업을 앞두고 기념 음반 한 장을 내고 팀을 해체하기로 한다.
그래서 나오게 된 1981년의 유일한 앨범은 우리 음악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작사, 작곡, 보컬, 베이스를 맡은 조하문의 고음역을 자랑하는 목소리와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김광현의 기타는 최고의 앙상블을 이루었으며 이후 연세대의 응원가로 쓰인 '해야'도 명곡이지만, '알 수 없어'와 '이럴 수가 있을까'에서의 치기 어린 가사와 이미 시나위 이전에 모든 곡의 패턴을 기타 위주의 전개로 가져간 것은 우리를 감탄으로 몰고 가고도 남는다. 그리고 연주곡 '탈출'까지, 이후 교수의 길을 걷는 김광현의 기타는 이미 이 때에 자기 세계를 확실히 견인하고 있었고 조하문의 안하무인격의 보컬은 대학생이 낼 수 있는 신선함을 넘어서 록커로서의 오만이 가득 배여 나온다.
팀의 일원이 모두 각자의 길로 가고 조하문은 졸업 후 방배 예술극장을 운영하면서 지내다 대학가요제의 앨범을 제작 중이던 때 만난 유수태와 첫 솔로 앨범을 만든다.
1987년 '이 밤을 다시 한번'이 잊혀졌던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계속해서 '눈오는 밤', '사랑하는 우리', '같은 하늘 아래'가 계속해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며 이 앨범은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창력으로 정상의 자리에 선 그는 두 번째 앨범을 1989년에 발표한다. 마그마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켜 주는 '고통 없는 나라'가 1번 트랙을 차지하고 있어 그의 본색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이어지는 '그대는 몰라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에서 '인연'까지는 조동익이 편곡한 발라드풍의 곡들로 채워져 있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 특히 종교를 가지면서 달라진 마음 자세를 깊은 신앙으로 표현한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는 앨범 판매량에 상당히 일조 했다.
이후 김현식의 추모 콘서트에 참가하고 이선희에게 '왜 나만'이라는 곡을 작곡해 주며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정신병원을 왔다갔다하다가 종교의 세계로 빠진다. 그리고 주로 CCM 계열의 가수들과 <지구촌 굶주린 이웃을 위한 밀알 프로젝트>, <송명희와 친구들>,
지금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목사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고 신학교의 강단에 서서 찬양을 지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되찾았지만 가요계는 걸출한 뮤지션을 잃었다.
2001/03 지운 (sunshine1126@izm.co.kr)
첫댓글 잘 읽었어요^^ 조하문씨 노래 좋아했는데...이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감사^^
^^ 조하문님...최근 사진들이 인터넷에 떠 있던데..완전 목사님의 전형이더군요..; 외모와 재능을 갖춘 탁월한 락보컬리스트였는데..칼럼에서의 말대로 가요계는 걸출한 뮤지션을 잃었죠....
이 밤을 다시 한번.. 아.............들어 봐야지............^^
주누옵 말대로.. 배불뚝이 목사님이 되셨군요... 안타깝당~ 노래 제목들은 몰랐는데.. 찾아서 들어 보니 모두 귀에 익은 곡이네요. 우리 삼촌이 즐겨들으시던 노래인듯.^^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었지..그리고 당대 최고의 락보컬리스트이기도 하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