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 본문 미6:1-8 주님의교회/임영수 목사
오늘 본문에는 매우 특이한 법정이 개설되어 있습니다. 이 법정에 재판관은 산과 언덕이고, 피고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소송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소송자인 하나님은 산과 언덕 앞에서 이스라엘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고발 내용은 이스라엘이 아주 중요한 것을 잊어 버리고 그것을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잊어버린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가치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송 내용은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 가운데 있을 때 모세와 아론을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 진 쳤을 때에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에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점술가였던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고 그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발락은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통해 경고하신 말씀을 듣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가 원하시는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길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길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길을 잊어버리므로 인해 이스라엘은 그들의 본래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상기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신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의 삶이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지난 날 역사의 과정을 돌이켜보게 해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같은 날카로운 소송 제기에 대해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피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송제기 의도를 완전히 잘못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송을 제기하신 그 의도가 명절 때마다 돈 봉투나, 선물을 가지고 찾아와 인사를 치르듯이, 안식일마다 형식적인 종교 의식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너무 약소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제물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의 섭섭함을 풀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제물의 양은 엄청납니다.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일년된 송아지를 비롯해서 수천마리의 양, 수만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타협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수호신에게 그들의 현실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해 맏아들을 바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타협안으로 맏아들의 희생 제사를 내놓습니다.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이 정도면 눈감아주고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는 타협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타협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정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로 삼으시는 것은 그들의 불의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에 대해 이렇게 낱낱이 열거하십니다.
"들어라!
주께서 성읍을 부르신다.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분께 순종하여라.
악한 자의 집에는,
속여서 모은 보물이 있다.
가짜 되를 쓴 그들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틀리는 저울과 추로 속인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도성에 사는 부자들은 폭력배들이다.
백성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의 혀는 속이는 말만 한다. (10∼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소한 것은 종교적인 제물에 관한 것이 아니고, 불의한 재물 축적, 부정한 상거래, 부자들의 횡포, 거짓의 만연, 우상 숭배 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것들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타협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타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설득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음, 고통받는 자들의 절규에는 마음이 움직이시지만 종교적 타협에는 응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그들의 길을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형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견디기 어려운 형벌을 내린다.
너희가 망하는 것은 ,
너희가 지은 죄 때문이다.
너희는 먹어도 허기만 질 것이며.
너희가 안전하게 감추어 두어도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며,
남은 것이 있다 하여도
내가 그것을 칼에 붙일 것이며,
너희가 씨를 뿌려도,
거두어 들이지 못할 것이며,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도,
그 기름을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 술을 빚어도,
너희가 그것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13-15)
그러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인간을 위한 진정한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본문에서 세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공의(정의)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송을 제기하신 것은 그 시대 사회에서 공의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법도 있었고, 제도도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마음 먹기에 따라 임의대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권력이 공의를 실현해가는 수단이 아니라, 부패한 인간들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종교적 의식은 매우 엄숙하고, 화려했습니다. 종교는 불의한 권력을 합리화 시켜주는 시녀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공의가 그 사회 기초가 되어지지 않을 때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수의 사람이 고통스럽고,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냉소주의, 한탕주의, 불신, 갈등이 그 사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공의에 기초하지 않은 권력, 경제, 사회 안정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공의를 갖지 못한 종교는 언젠가는 민중들에게 외면 당하고 맙니다.
불란서에는 오래된 유명한 수도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문해 본 이름있는 수도원 몇 곳은 대부분 파괴된 것을 개축한 것이었습니다. 불란서 혁명 당시 민중들이 먼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수도원이었습니다. 왜 민중들이 수도원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그 당시 수도원이 너무 부패한 왕정과 함께 리듬을 맞추어 갔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습니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공의는 횡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다른 사람과 멍에를 같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멍에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어려운 사람과 멍에를 같이하는 가운데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참된 사랑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나누는 삶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금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오른 "쿠커스"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알바니아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이곳은 인구 15만 정도의 작은 마을로서 구리 생산과, 카펫 제조가 주 소득원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산악 마을입니다.
이 작은 은둔의 마을이 국제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들의 잔혹한 인종 청소가 일어나면서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살육을 피해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쿠커스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쿠커스에 머무는 난민들 숫자는 15만명, 많은 때는 17만명이나 됐습니다. 물론 난민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받아 준 가정에 체재 비용을 지불했지만, 대개는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공의를 행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행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여정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매우 고상하고 성스러운 민족적 소명이며 책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소명과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들의 삶은 천박해졌고, 그들의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언자 미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을 가장 성실하게 이행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가장 선한 것이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임을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해 언제나 "예"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시대에서 분명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그 함마슐드" 전 유엔 사무총장의 생애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961년 9월 17일 자정 무렵,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부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다그 하마슐드의 그 진상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비행기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세계는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다그 하마슐드를 잃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파트에서 몇 권의 영적 일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라이프에게 :
언젠가 내게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일기를 자네가 맡아 주기를 부탁했던 일을 기억할 지 모르겠네. 여기 있네.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읽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네. 하지만 최근에 내게 일어난 일들과 나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고 글 쓰는 것을 생각할 때 상황은 바뀌었네. 이 일기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내 소개'를 얻을 수 있는 내용들을 줄 것일세.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를 위해 일기를 쓸 것이지, 대중을 위해서 쓸 것은 아닐세.
만일 자네가 보기에 이 일기들이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면 그렇게 하도록 내가 허락하네. 내 자신과 하나님과 협상한 백서 같은 것으로 말일세." -다그 함마슐드-
1956년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감히 '예' 라고 대답했을 때 -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예'를 되풀이 해 말하면 - 모든 것은 의미를 얻는다.
모든 것의 의미를 가질 때, 어떻게 네가 아닌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선된 후 "하나님께 '네'라고 대답하고, 운명에 '네'라고 대답하며, 자신에게 '네'라고 대답한다." 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기 몇 주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끝 날까지 계속 갈 용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예' 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선한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행복한 미래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는 우리가 얼마만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시대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한 삶에 대해 '아니오'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예'라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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