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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날개는 물에 젖지 않는다 <최명숙 목사>
‘정녕 저게 내 머리를 가리던 그것이었던가? 내 것이라 생각할 때는 파마도 하고, 코팅도 했던 그것이 책상 위에 남의 그것인양 덩그마니 자리 잡은 걸 보니 흉물스러웠다.
정녕 저것이 내가 그리 애지중지했던, 시간을 쏟았던 그것이었단 말인가?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흉물스러워 단박에 버렸을 그것을 오로지 내 것이란 이유만으로 그 오랜 기간 가지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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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독신 여성인 S의 글 내용 중 일부입니다. P.C 통신에서 만나 언니, 동생 하면서 친숙하게 지내다가 얼마 전에는 S와 나를 비롯하여 5명의 독신 여성이 ‘단독비행(單獨飛行)’이라는 이름으로 독신 여성 소모임 방을 개설했습니다.
이 글은 그 소모임 방에 S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오직 자기 일인 글 쓰는 작업에 전념하고자 삭발(削髮)을 하고 나서 올린 글입니다.
그렇잖아도 마침 이즈음에 ‘재욕무욕(在慾無慾)’ 즉 현실 속에서 집착하지 않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터라 S의 진솔한 느낌은 순간 나를 숙연(肅然)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얽혀있는 존재(存在)와 관계(關係)에 대한 느낌이 이 몇 줄에 단순 명료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S의 말대로 우리는 얼마나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들을 사랑해 온 반면에 또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관심하며 함부로 대해 왔습니까?
이곳 군산 나운동에 있는 서민임대아파트인 주공4차 아파트는 참 깨끗하고 편리하게 잘 지어진 아파트지만 갈 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일부러 담배 불로 태워서 망가뜨려 놓는 등 구석구석에 고의로 흠집을 내고 파손시켜 놓은 흔적들이 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볼 때마다 이 아파트가 임대가 아닌 자기 집이었어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흉물스럽게 보이는 머리카락도 자기 것일 때는 쓰다듬고 손질하며 정성을 들이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 것이 아니면 그처럼 함부로 망가뜨리는 부패한 인간 심리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과 연관된 사람, 내 부모, 내 형제, 자식, 남편, 아내 등 또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존재가 아닌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잘 해준다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눅6:32,34>
생각해 보면 새 천년이래야 역사의 날 수를 계산해 온 하나의 단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런 아침,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대기(大氣)의 신선함은 머·언 히말라야로부터 불어오는 하얀 눈새(雪鳥)의 깃털 같은 신비로움입니다.
이 신선한 느낌 속에서 의식의 나래를 펴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그런 사랑, 그런 삶을 살지 못했기에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갈매기 날개가 물에 젖는다면 어떻게 그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새 천 년에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역사는 날 수를 계산하는 단위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 내는 삶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이 A.D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모세의 출애굽 사건으로 히브리 원력이 시작된 것처럼, 새 역사는 인간의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되는 인간은 지금이 역사의 시작이요 여기가 시온성이라는 삶에 대한 엄숙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지 않으면 세기가 바뀌어도 우리에게 새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신선함으로 우리들 영혼의 새 날, 삶의 새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현실이 각박하고 힘들더라도 갈매기 날개가 물에 젖지 않듯이 집착하여 얽매이지 않는 자세로, 시대가 가진 병폐를 아파할 수 있는 그 분의 가슴 한 조각을 품고 세상에 살면서 관계가 아닌 존재를 보는 눈을 떠야겠습니다.
새 천년을 맞는 이 아침에는 40대 만학(晩學)으로 신대원(神大院)에서 신학(神學)에 전념하고 있는 K전도사님이 연하카드에 담아 보낸 소중한 마음을 함께 느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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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늘 불초한 사람 곁에 Q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고민하며 기도하며 치열한 몸부림을 쳐 온 주의 종이 존재함을 감사드리며 살아왔습니다.
작지만 Q이 인정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신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시대적 상황의 갈등구조 속에서 파생(派生)되고 생성(生成)되는 것이라면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Q을 죽은 신이 아닌 살아계신 Q이 되게 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세상을 위한 자유를 위해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사색과 고뇌와 거듭남이 있어야겠지요. 새 천년, 새 아침, 새 마음 새 삶을 기원합니다.‘
------------------------------------- - 2000년 1월에 - .
너는 행복자로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내린 이번 겨울은 어려움의 고비마다 모세의 기도가 내 기도로 이어졌던 날들이었습니다.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33:12)
이것은 사역의 현장에서 내 영혼의 속살로 드리는 처절한 기도입니다.
10여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한계상황의 끝에서만 이어지는 사역에 지치다보면 정신적인 고갈로 몸과 마음이 바삭바삭 균열이 가는 느낌입니다.
그럴 때면 아, 모래바람 부는 간조한 땅,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마음도 이렇게 메말랐고 지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나의 갈망은 때마다 내려주시는 만나와 반석의 물에 지쳐서 고기와 부추와 마늘도 먹을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던 이스라엘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처럼 은혜의 자리에서, 그렇습니다. 은혜의 자리입니다.
생각하면 여기가 홍해가 갈라진 곳이요, 반석에서 물이 나온 곳입니다.
항상 안 될 것 같은 여건에서 되어지는 기적을 체험해온 자리입니다.
12년 전에 ‘아기는 어떻게 생기느냐’고 묻던 총명하고 천진스럽기만 하던 지선이가 이번 겨울에 시집을 갔습니다.
신랑은 5년 전에 PC 통신에 내가 올린 글을 보고 흰 고무신을 신고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찾아와 장가를 보내 달라는 조건으로 나를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총각인데 진짜 사위가 된 것이지요.
교회당을 건축하고 나서 처음으로 혼례식을 올리는 날, 읍장실 접견용 안락의자를 빌려다가 양가 부모님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예배당은 색색의 풍선과 테이프로 장식했습니다.
그동안 7, 8쌍을 결혼시켰지만 내가 직접 주례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목사가 설교를 하는 거야 당연한 것이며 지금까지 어디에서든 당당하게 해 왔지만 주례 문제로 받았던 상처 이후로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움츠려 들게 했습니다.
얼마 전 장애를 가진 성도 한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주례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꼭 내가 주례를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는 그 일로 인하여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옮기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한 맹세를 깨고 교회를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사역 10여년 동안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목회’라는 사역, 그 자체가 하기 싫었습니다.
성도 입장에서 내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목사라는 사실이, 그리고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성도로 하여금 그러한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게까지 했다는 사실은 옛날, 신학교 면접시험에서 실격했을 때보다 더 나를 비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가 수백 명의 하객들 앞에서 외견상 나타나는 장애를 가진 나에게 꼭 목사님이 주례를 해주셔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사역자로써의 온 정열을 다해서 정말 잘 해주고 싶었습니다.
내 영력의 바닥까지라도 다 바쳐서 내 신체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아름답고 용기 있는 결단이 그분 앞에 향기롭고 소중한 제물로 올리워져서 그들의 평생에 신체적인 장애로 인하여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혼례식을 마친 지금도 지선이는 그 때 참석했던 하객들이 주례가 훌륭하고 은혜스러웠다고 얼마나 칭찬과 소문이 자자한지를 틈틈이 내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지선이는 내가 10여년동안 물을 주어 기른 꽃들 중에 가장 예쁘게 피어난 꽃입니다.
생활공동체를 위한 준비를 조금씩 해 나가고 있는 이즈음, 한 사람이라도 일할 직원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건축 공사비를 아직 절반밖에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예산을 세우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나는 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공사비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시고 소신껏 할 일을 하십시오. 공사비는 안 받아도 괜찮으니까 공사비에 매여서 할 일을 못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대출 등을 받아서 공사를 해 놓고 이자도 안 되는 액수를 조금씩 받으면서도 공사비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해온 L장로님의 그 의연한 신앙의 자세는 이 겨울에 다시 나를 뜨겁게 감동시켰습니다.
지금 다시 돌아보는 ‘나’는 그분 안에서 참으로 많은 은혜를 누리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신33:29)’
내 사역의 길에 어려움으로 만나는 걸림돌들을 그분은 오히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디딤돌로 만들어 주십니다.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33:12) 라고 내가 목이 메여 기도하는 자리에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33:14)고 대답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나는 지금 듣고 있습니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이 겨울 속에서 신비롭게 일렁이는 봄기운을 느낍니다.
겨울 대기의 속살처럼 눈을 감고 영혼의 오관을 열어야 느낄 수 있는 그 미세한 일렁임은 내 속에 억눌려 온 그리움 같은 빛깔을 띄고 잔잔한 파문이 되어 번져 갑니다.
그것은 내 서러운 겨울 속에서의 행복한 봄과의 만남입니다.
- 2000년 2월의 편지 - .
아픔도 은총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는 어쩌면 안개로 잦아드는 깊은 밤이나 이슬 떨구는 맑은 아침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봄이 햇살로 하얗게 퍼져 가고 있는 한낮에 Violin 연주를 들으며 편지를 씁니다. 옛날에 minuet 을 들으며 환상적인 봄이 정취에 젖었던 기억은 있지만 오늘처럼 성가(聖歌)를 Violin로 듣기는 처음입니다.
오늘, 들어보는 떨리는 현(絃)의 전율은 죽은 감각을 살리는 봄의 느낌입니다.
얼었던 겨울이 풀리면 이곳은 모든 것들이 생명으로 꿈틀거립니다. 바닥의 티끌도 살아서 기어가고, 공기 중의 먼지도 살아서 날아다닙니다. 땅에 기는 것들, 나무에 붙어있는 것들, 모두가 생명 아닌 것들이 없습니다.
봄기운에 일렁이는 생명은 심지어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마저도 생명으로 꿈틀거릴 것만 같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옛날 국어 교과서에서 외웠던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라는 싯귀처럼 햇살도 생명으로 아롱거리고, 물살도 생명으로 일렁거립니다.
그렇게 나도 사는 날까지 끊임없이 그리움으로 일렁일 것 같습니다.
아, 그러나 생명이 있음은 꽃이 피는 것 같은 환희임과 동시에 피 흘리는 아픔입니다.
완도 바닷가에 모래 대신 깔려있던 자갈들은 모두가 동글동글하게 매끄러워서 그 위에 앉아도, 누워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항상 내가 그렇게 변화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산책길 도로변에 깔린 돌들은 전체가 모로 이루어져 부서질 때의 그 날카로운 날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시각만으로도 아픔이 전해져옵니다. 어쩌면 때로 내가 저런 모습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돌처럼 사람도 모를 세울 때면 아픔을 느낍니다. 모는 상대방을 밀쳐내는 몸짓이요, 찌르는 몸짓입니다.
꽃샘추위가 시리던 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성도를 찾아갔다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아 찬바람 속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사소한 문제들을 이유로 얼마동안 못나오는 동안에 어느새 저렇듯 모가 생겼는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를 세우고 있는 상대방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어느 때는 삶 그 자체가 상처처럼 생각됩니다. 크고 작은 아픔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길, 그러나 그 때마다 그분께서는 그 아픔을 상쇄(相殺)하고도 남을만한 은혜를 예비해 두십니다.
구리로 조각(彫刻)을 할 때는 시작하기 전에 우선 그 구리 자체를 질산(窒酸)에 담가둔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그분은 내 마음에 깊은 항구적(恒久的)인 인상을 남기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상처의 훈련으로 부드럽게 준비시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끔씩 나는 부끄럽게도 철없는 아이처럼 자기 연민(憐愍)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그 분 앞에서가 그렇고, 당신 앞에서가 그렇습니다.
그분 앞에서 나는 항상 철없는 아이지만 또 당신 앞에서도 나는 이렇게 온갖 하소연을 다하고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어쩌면 그것은 나의 유일한 행복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겪는 상처와 아픔은 부끄러운 것도 아닌 반면에 얼마나 대단해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선교 여정에서 옥(獄)에 갇히고, 돌에 맞고, 매도 맞고, 잠도 못 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죽음 의 선(線)까지 넘나들었기에 감히 ‘나는 내 육체에 주 예수의 흔적(痕迹)을 가졌노라’ 고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그처럼 아름답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언제쯤 상처가 아프다고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아픔들을 와인(wine)처럼 숙성시켜 여과(濾過)가 되면 보석처럼 하얗고 단단하게 반짝이는 결정체로 남을 것입니다.
문득, 저물녘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며 보았던 남해의 물빛이 생각납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보이던, 얼마나 그리움을 안은 수많은 가슴들이 와서 차오르는 한(恨)을 하얗게 뿜어놓고 갔기에 그것은 마치 시린 바람 속에 여과(濾過)된 은빛 개펄처럼 진한 그리움이 되어 반짝이는 듯 했습니다.
나도 거기에다 겨울의 끝자락과 함께 그리움을 한 자락 길게 깔고 돌아왔습니다.
완도 바닷가 자갈밭에서 마음이 편한 이들끼리 모여 숭어회 한 접시를 놓고 감상했던 J목사님의 구성진 심청가 가락은 바닷바람과 함께 내 속에 신선한 도전(挑戰)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을 못 보는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 때 연꽃이 그녀를 받아서 영화롭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데 하물며 영(靈)의 눈을 뜨는 하늘의 사역을 위해 우리가 한 생애를 전제(奠祭)로 부을 때 연꽃이 피어나는 기적만 못하겠습니까?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특별히 비워 둔 이 진공(眞空)의 시간 속에서 Violin 현(絃)의 소리는 날카로운 톱날로 내 심령을 긁듯이 찢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은혜의 흔적을 새기며 지나갑니다.
오늘 나는 Violin 연주를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그 분 안에서는 아픔도 은총(恩寵)인 것을,
- 2000년 3월의 편지 - .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한 송이 국화꽃을 보면서도 시인은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던 아유를 깨달았는데 찬연한 봄의 향연이 어찌 그저 이루어지겠습니까?
지금 꽃샘추위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뒤집어 놓을 듯이 강한 바람으로 불기도 하고 비를 흩뿌려 마음까지 젖어들게 합니다.
그러나 가슴속을 파헤치는 추위도 비바람으로 일렁이는 밤도 그 안에 봄꿈을 안고 있기에 모두가 소중한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도 어떤 꿈을 가졌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며 내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내가 소속된 곳이나 주변이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영향력을 가진 주체인 ‘나’로 살라고 그분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한 것이겠지요.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의 서글픈 세속적 흐름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교단(敎團)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군소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이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기반이 잡혀갈만하면 큰 교단으로 옮겨가는 일이 이제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하고 무시하기 때문이요, 심지어 그걸 약점으로 잡아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 그런 천박한 사상이 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문제는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 사상을 바로 잡아 줘야 할 지도자가 그런 이유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약점으로 여길 때만이 상대방에서도 그것을 약점으로 쥘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길이 없다면 몰라도 길이 있는데 왜 안 갑니까?” 그러나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나 수단이 될지는 몰라도 정도(政道)는 아니지 않습니까?
작은 교단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작든 크든 거기서 공부했고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사람들 아닙니까? 능력이 없어 도움이 안 되는 경우에는 조국이나 부모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조국이나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교단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까?
가장 어려웠던 시절, 주의 일을 하겠노라는 사명감에 불탔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고 어려웠기에 거기서 공부를 하고 안수를 받았으며 그 때 이미 그런 불이익은 각오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성직자라면 교회를 부흥시키고 눈에 보이는 일을 하기 이전에 먼저 신앙의 올바른 주체성과 바람직한 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주의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편법을 사용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이런 소리들이 그분의 귀에 들릴 수 있을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꿈을 갖되 바람직한 꿈을 가질 일입니다. 이런 꿈이란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땅히 구할 것을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특별히 신체에 장애등 어려운 여건에 있는 이들에게 꼭 꿈을 가질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비록 절대 절망적인 여건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하늘은 열려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절망처럼 보였던 홍해가 오히려 이집트 군대로부터 그들을 구해 낸 구원의 도구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꿈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을 이루어 가는 확신에 찬 노력입니다.
이집트를 출발 할 때 이스라엘이 가졌던 가나안의 꿈은 40여년의 기나긴 광야의 여정 속에서 지치고 퇴색하여 변질되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의 꿈은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 강하고 분명했기에 똑같이 가나안의 꿈을 갖고 떠났지만 60만이 넘는 사람 중에서 그 꿈을 이룬 사람은 바로 이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혈통을 따라가 보면 여호수아는 ‘꿈꾸는 자’로 불렸던 요셉의 후손이요, 갈렙 역시 운명을 극복한 집념의 여인 다말의 후손입니다.
이들의 조상인 야곱 역시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적막한 황무지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면서도 꿈을 꾸었던 사람입니다.
꿈은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말년에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의 나이가 조상들의 나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음을 고백했습니다.
야곱의 이런 끈기와 노력은 바로 유대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꿈을 이루기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들이며 이런 이들을 통하여 오늘날에도 역사의 맥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됐습니다. 접시 위에서 눈을 굴리고 아가미로 숨을 쉬는 모습은 같은데 시내 횟집에서 먹는 회에 비해 포구(浦口)가 있는 바닷가에서 먹는 생선회는 입에 착착 감기며 단맛이 돌 정도로 좋은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바다 속에서 활기차게 그야말로 물고기답게 살아가는 것과 횟집 수족관에서 목숨만 근근이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은 그 육질(肉質)과 맛이 달랐던 것입니다.
음식과 비교해서 안됐지만 사람도 살아 있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았으되 죽은 것과 같은 삶도 있고, 참으로 숨을 쉬는 그 기운만으로도 다른 생명까지도 살려내는 진짜 살아 있는 삶도 있습니다.
만나면 느낌이 통하면서 맛이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꽉 막힌 것처럼 경직된 사람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이미 많이 오염되어 맛이 가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맛이 나는 사람, 산소 같은 휴식이 느껴지면서 숨을 쉴 수 있는 푸른 생명의 기운이 전해져 오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는 항상 사랑의 씨앗에서 싹이 돋아납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은 쉴새없이 부단히 움직이면서 싹이 돋고 꽃이 피는 기적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너희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라는 책망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1999. 4월에 - .
5월의 신록 속에서..
밝은 것만 눈부신 게 아니라 맑은 것도 눈이 부심을 5월의 신록 속에 있어 보면 압니다.
비온 후에 움터 나오는 연록빛 잎새는 눈이 부시다 못해 입안에 넣고 싶도록 사랑스럽습니다.
자목련 백목련 나무를 지나는 내 산책길은 나의 행복으로 다듬어지는 코스입니다.
비로 씻겨낸 아침 대기 속에서는 새소리도 투명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다람쥐는 까만 눈을 또록거리며 쳐다봅니다. 이런 날이면 가만히 있어도 푸른 생명력이 몸 안에 쏴-악 스며듭니다.
그 동안 잡초와의 투쟁만으로도 지치던 주차장 주변의 황무지(荒蕪地)가 팥고물처럼 일어나 숨소리가 들리더니 파랗게 싹이 돋아났습니다.
H집사님 내외의 손길은 닿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는 번개 손입니다. 식당의 주방기기와 식탁의 배치가 편리하게 새로워지고, 굳은 땅을 파 일구며 돌멩이와 함께 잡초를 뿌리째 골라내는 부지런한 손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이 일궈지는 것처럼 개운해집니다.
이제 막 돋아나는 배추 잎을 솎아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싸 주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조서방도 밭 한쪽에 비닐하우스로 조롱박 모종을 넉넉하게 길러 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생명의 발아(發芽)와도 같이 아름다운 모습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저녁노을이 내릴 무렵이면 뇌졸중(腦卒中)으로 몸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권사님 내외분의 찬송이 평화롭습니다.
할아버지가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인다고 하소연하면서도 할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는 할머니와 항상 무뚝뚝하고 고집이 센 할아버지지만 내가 찾아가 기도해 주지 않을 때는 서운해 하시는 할아버지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
몸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요양 중이면서도 항상 밝고 부지런한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 생기를 주는 귀엽고 사랑스런 N자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기쁨이며 이렇게 은혜의 꽃그늘 아래 오순도순 모여 사랑을 나 때 그들의 상처받은 영과 육이 소생되고 새로운 힘과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면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밤 9시는 내가 기도를 인도하지 않고 그냥 개인적으로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한 사람이 올라가 기도하고 내려오면 그 다음 사람이 올라가는데 때로는 목 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바람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상한 심령의 아픔을 공감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확신합니다. 내 귀에 아득하게 들려오는 저 소리가 그분 귀에는 크게 들려서 꼭 응답해 주실 것을,
우리는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그분께 우리 자신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예배를 드려 주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인도를 따라 내가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내가 하는 것이며 성경의 말씀도 내가 깨달아 내 몸으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젊은이들에게 숙제를 던져 줍니다. ‘범죄한 다윗이 회개를 하고 난 후에도 왜 밧세바와 헤어지지 않았는가?’ 이것은 어떤 정답(定答)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경 속의 인물이 되어 보는 훈련입니다.
이런 숙제에는 각기 자신의 심령 속에서 나오는 정답(正答)이 중요하므로 정답(定答)에 매이지 말고 정답(正答)을 찾아가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주체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창조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이 결여될 때 종교는 부패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세계는 그렇게 좁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가족들이 아직은 몇 명 안 되기 때문에 식생활 패턴도 자유롭게 각자 원하는 때에 원하는 메뉴로 식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만들어 두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유롭고 불편 없이 우리는 무질서 속의 질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녹화해 놓은 TV프로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여유로움을 누려 봅니다. 그럴 때는 긴 식사시간도 아깝지 않고 TV를 보는 시간도 아깝지 않아서 좋습니다.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면서 천천히 식사를 한 후에 차(茶) 한 잔을 하노라니 감미로운 바람결에 아직도 묻어있는 그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 번 피었던 꽃은 지는 것이 자연의 정리(定理)입니다.
시든 꽃잎이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면 열매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무를 썩게 합니다. 꽃이 피는 것이 나무를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떨어질 때에 떨어지는 것도 나무를 유익하게 하는 자연의 이치는 우리들 인생관에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할머니는 밀면서 산책을 하는 노부부의 등 뒤로 어느새 여름을 닮아가는 5월의 햇살이 눈부십니다.
침대에 누웠다가도 혼자 일어날 수가 없는 할아버지는 5분이나 10분이 멀다 하고 할머니를 부릅니다.
거동을 못하시는 할아버지도 안됐지만 그 할아버지 곁을 지키느라 고사리를 따러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앞산을 바라만 보고 계시는 할머니가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할아버지가 혹시 침대에서 떨어질새라 몸소 쿠션이 되어 침대 밑에 바짝 자리를 잡고 주무시는 할머니, 이 분들은 이미 행복을 초월한 인연인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에는 생활관 증축(增築) 공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지난 1월에 혼인 예식을 올리고 가을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는 조용철, 심지선 부부가 교회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딸, 사위처럼 사랑해 온 이들 부부와 더불어 살게 된 것 또한 마음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크고 화려한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풀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답습니다.
밝은 것만 눈부신 것이 아니라 맑은 것도 눈이 부심을 5월의 신록 속에 있어 보면 압니다.
화려하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것만 행복한 게 아니고 작은 일상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삶을 느끼는 사람은 압니다.
- 2000. 5월에 - .
꽃은 꽃으로 피고 물은 물로 흘러
당신이 이곳에 온다면 오늘같이 장미의 핏빛
꽃망이 아픔으로 터지는 유월의 저녁, 꽃내음과 풀내음의 어우러짐 속에서 뻐꾸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뻐꾸기 소리뿐만이 아니라 휘파람을 짧게 네 음(音)으로 끊어 내는 새소리를 나는 그냥 ‘휘파람새’ 라고 부릅니다.
외에도 밤이면 ‘부-욱 부-욱’ 거리는 황소개구리 소리와 함께 시설스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며 밤공기 속에서 알싸하게 피어오르는 진한 숲의 향기, 이렇게 자연이 주는 감미로움에 젖다 보면 자칫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람을 즐겁고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 꽃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종족을 번식하기 위하여 피는 것이고, 새도 종족 번식을 위하여 소리를 내는 것이며, 그러한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는 기쁨이요, 행복이 되는 것이지요.
진정한 자기중심적 우주관은 이기적으로 상대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 인하여 모든 것을 살리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창1:28의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평화적인 조화과 보호를 위한 그분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실질적인 유익의 도구로써가 아니라 당신이 당신이라는 존재로 피어나는 것이 내게는 진정한 기쁨이며 행복인 것과 같은 것이지요.
여름가뭄으로 인해 앞 논에 물을 대는 모터 소리가 땡볕 아래 더위를 더해주고 ‘비가 와야할텐데....’ 하는 마음으로 잠이 드는 밤이면 잠결에 개구리 소리가 소나기 오는 소리로 들립니다.
햇살의 열기가 가시는 오후가 되면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을 시작하시는 할아버지 권사님은 저쪽 버스 정류장까지 200여 미터나 되는 거리를 왕복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건강 상태가 좋아져 가고 있는 반면에 이제는
할아버지 시중을 들던 할머니가 관절염으로 무릎이 아파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건강 상태가 좋아져서 기분까지 좋아진 할아버지는 수시로 ‘승리는 내 것일세, 축복은 내 것일세’ 라고 찬양을 하시다가 어느 때는 할머니를 위로할 양으로 가사를 바꿔서 ‘당신은 내 것일세’라고 부르는 소리가 어린애처럼 애교스러워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구원하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지금도 할아버지 방에서는 찬송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은 다 있는데 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고 울면서 기도하던 N자매의 상처받은 여린 가슴의 아픔이 내 아픔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빛이 보이면서 실마리가 풀려 가는 모습 또한 내게는 기쁨입니다.
또 베풀고 섬기고 사랑하기를 저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할 정도로 생업을 해 나가는 중에도 교회 봉사와 신선한 해물로 먹거리를 제공하며 섬기는 H집사님 내외의 모습이 때로는 가슴 찡한 고마움으로 다가와 그분들이 갖는 기쁨의 몇 배가 바로 내 몫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 생활관 증축공사도 완료되고 조서방네가 이사를 들어와 점점 사람 사는 기운으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보람에는 부담도 따르는 법이기에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분 앞에 나갈 때면 그저 감사만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런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심이 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골짜기 없는 산봉우리가 무의미하듯이 고난의 질곡이 없는 승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일을 더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음은 내 어린 날과 젊은 날의 그 질곡처럼 깊고 어두웠던 절망의 시간들 때문입니다.
나는 거기에 상응(相應)하는 천국을 더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피어나는 삶이 내게 꽃과 같은 기쁨이듯이 작으나마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며 승리하는 나의 삶이 그분 앞에 꽃과 같은 기쁨이고 싶습니다.
빛을 볼 수 없는 미래로 인하여 절망하는 삶이 이미 지옥을 사는 거라는 사실은 확신을 가지고 천국을 소망하는 삶으로 하늘의 영광을 누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H집사님 내외의 사랑살이는 밭의 어린 모종들을 찬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정성껏 길러내더니 이제는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차광(遮光)망을 치느라 말뚝을 막고 검은 그물 같은 망으로 차일을 쳤습니다.
나는 그 차광막이 푸른 잎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모습을 보면서 풀잎같이 연약한 우리의 영(靈)도 적당히 차광을 해 주는 그늘이 없으면 메마르고 강퍅해질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밝은 햇볕이라고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라 그늘이 있어야 이완(弛緩)되고 안일한 영이 소성케 되어 햇살이 주는 유익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낮과 밤이 교차되는 자연의 조화로움처럼 어둠을 지나온 인생만이 빛의 찬연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역경과 고난, 그리고 아픔마저도 영혼을 소성시키는데 필요한 은총일 수가 있습니다.
그 은총 속에서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됨은 세상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리는 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한 날을 살아가다가 때로 쓸쓸한 날이더라도 나는 어둠이 내리기 전 성급하게 방에 불을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
어둠이 내리듯 내 가슴에 내리는 안식을 느끼며 그 황혼의 쓸쓸함 속에서 그리움만큼이나 큰 사랑을 키워 가고 싶습니다.
아, 나는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습니다.
꽃은 꽃으로 피고 물은 물로 흐르고 그리고 별은 별로 반짝이는 이곳에서 - .
- 2000. 6 - .
무더워도 행복한 여름입니다
한낮의 불볕더위는 의식이 몽롱해질 정도로 기력을 앗아가고, 매미 소리도 햇살만큼이나 따갑게 쏟아지는 여름입니다.
그러나 밭에서 익어 가는 열매들은 여름이 깊어 가고 있음을 기쁨으로 알려줍니다.
오이, 가지, 고추는 날마다 손으로 잡아 빼 놓은 듯이 쭉-욱 쭉 자라나고 토마토는 가지가 휘어지게 주렁주렁 달린 채 발그레하게 익어 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꽃이 떨어지면서 방울처럼 맺혔던 수박이 깔아 준 짚더미 위에서 새색시가 된 우리 지선이의 배처럼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있어 아침 경건회를 드릴 때, 지선의의 배를 볼 때면 수박을 보는 것 같고, 수박을 볼 때면 지선이의 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새신랑인 조서방은 오늘도 필리핀 농부처럼 가무잡잡한 얼굴에 밀짚모자를 쓰고 채소밭 등을 돌보고 있습니다.
검푸르고 무성하게 자라던 고추 모가 장마가 시작되자 이유도 없이 시들시들 죽어갔습니다. 원인을 모르다가 벌레가 생겼을 거리고 생각한 조서방은 약을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마 전에 고추밭에 넉넉하게 주었던 비료가 비가 오자 물이 차서 고추 모에 직접 닿았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포기 식물(植物)의 상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고추 모 몇 모는 안타깝게 죽었지만 조서방이 물이 빠지도록 밭고랑을 깊이 파주는 바람에 나머지는 다시 무성하게 살아났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크고 싱싱한 고추를 가득 따서 모두들 한 아름씩 가져갔습니다.
첫 열매라고 따다 준 참외는 생각보다 단 맛과 향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무더위는 예년보다 더 기증을 부리고 있지만 탐스럽게 열매를 맺어 가는 밭엘 가보면 꽃이 피는 것도 신기하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더욱 신기하고 기특합니다.
어린아이 머리통 만하게 커져 가고 있는 수박은 눈에 띄게 헤쳐 놓으면 누가 따 버릴까 불안하고, 잎사귀로 살짝 가리어 주자니 누가 모르고 밟아 버릴까 걱정됩니다.
일년생 밭작물 열매도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스럽고 소중한대 그분의 가지인 우리가 삶속에서 맺어 가는 열매야말로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겠습니까,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요15:8)이라는 말씀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희생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을 지으신 분에게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는 삶, 다시 말해서 그것은 최고의 인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 삶 가운데 진실하게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담장에 흐드러지게 피어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던 넝쿨 장미는 장마 비에도 시든 꽃잎이 떨어지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오동나무의 보랏빛 초롱 꽃잎도 시들기 전에 떨어졌고 밭작물의 희고 노란 꽃들도 시들기 전에 깨끗하게 떨어지는데 유난히 화려하게 피었던 장미는 왜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누군가 열매를 맺는 꽃은 시들기 전에 떨어지는데 열매를 안 맺는 꽃은 그렇게 시든 채 붙어 있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 놀라운 통찰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꽃은 무엇이고 열매는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는 열매 없는 꽃만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은 말리우고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富)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衰殘)하리라’(약1:11)
TV 드라마 ‘허준’ 을 보면서 신선한 느낌과 함께 사극 역사상 최고의 높은 시청률이 마음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정도(正道)를 가면 두려울 게 없소이다 천년만년 가는 권세도 아닌데 어찌 사리사욕(私利私慾)으로 정도를 거역하시옵니까’ 라든지
‘태양 아래에 이름을 빛내며 살기는 쉬운 법이다 어려운 것은 아무도 모르게 목마른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것이다’ 등의 대사들은 모든 이들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죽어 땅 속에 묻히고 흐르는 물이 되어 만난다면 그 때 그분도 나를 사랑하셨는지 여쭤 봐야겠다’ 는 대사는 소중한 사랑을 깨끗하게 간직하고 살아 온 여인의 그리움의 극치로 요즘처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시대에 주는 애정의 성구(聖句)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인간이 가진 본성을 악하다고 했으며 인간의 죄성만을 강조했습니까?
로마서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고 면서 그는 ‘두 개의 법’ 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칭했습니다.
김용옥 교수는 이것을 두 방향, 즉 entropy의 증가 방향과 entropy 증가를 거부하는 생명 현상으로 풀이, 이러한 생명 현상을 이성(理性)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신(神)을 현실에서 분리시키기 때문에 그의 강의가 교리적(?)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거부반응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성을 욕망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욕망을 넘어선 욕망’이라고 한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죄성을 갖기 이전에 창조 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내 속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는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낮에는 느낄 수 없는 수박과 참외와 토마토 등이 익어 가는 감미로운 향기가 행복처럼 나를 감싸고돕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분이 있음을 확신하는 기쁨이요, 당신을 만나지 못해도 당신을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내게는 보이는 한계보다 보지 못하고 느끼는 무한대의 세계가 더 행복합니다.
밤에는 밤으로, 낮에는 낮으로 항상 모든 것들이 생성(生成)하는 기운으로 다가오는 지금은 무더워도 행복한 여름입니다.
- 2000. 7월에 - .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언제부터인가 수련회가 내게는 여름을 보내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수련회 일정은 흔히 가장 무더운 기간으로 잡혀지기 마련이고, 더위 속에 토마토처럼 익은 채 마치고 나면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가 매미 소리보다 더 또렷해집니다.
2박 3일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뜻을 같이하여 더위 속에서 함께 익어 갔던 성도들의 모습은 그대로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며 나누었던 은혜의 교감(交感), 거의 만삭의 몸으로도 성경 알아맞히기를 열심히 준비하여 진행하던 심지선 성도,
한창 말썽을 부리는 둘째 녀석을 데리고 다니는 경황 중에도 찬양경연대회를 맡아서 재미있게 진행하던 최정숙 집사,
아, 열심히 찬양을 하던 모습들 모두가 인상적이었지만 항상 뒤로 빼기를 잘하는 노현수 형제가 그날도 역시 안 나오려고 기를 쓰다가 세 명의 형제들에게 동동 들림 받아 나오는 촌극을 벌였는데 막상 노래를 하고 들어갈 때는 자기 발로 잽싸게 들어가서 자기를 들고 나온 형제들을 쥐어박는 모습이 재미있었습니다.
생활공동체 가족인 할아버지 임권사님은 ‘승리는 내 것일세’ 찬양을 하다가 갑자기 할머니인 조권사님을 가리켜 ‘조양은 내 것일세’ 라고 불러 인기상을 받았고,
성악가 수준의 특별한 가창력을 가진 강 민 형제는 ‘친구의 고백’을 너무 잘 불러 1등 상과 동시에 프로로 인정을 받아 앞으로는 찬양경연대회 출전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특별 순서인 ‘체험 삶의 현장’은 내초도에서 조개잡이로 하려던 당초의 계획이 물놀이로 변경되었는데 이 순서를 책임 진 황현석 집사님 내외는 과연 완벽한 준비로 트럭에다가 샤워용 물 4통과 모래밭에다 설치할 차광(遮光)망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특별히 튜브까지 준비를 해 가지고 가서 처음에는 튜브에 담아 물위로 살살 띄워 주더니 끝내는 물속에 담가 버렸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모래밭, 바닷물에 잠겨 모두들 얼굴만 내놓고 물소나 물개처럼 떠다니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랑하는 이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 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님의 시(詩)는 기존의 이름을 타성적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이 가진 나름대로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해 주고 인정하며 스스로도 자각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꽃이 될 수 있었겠지요. 그러므로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상대를 살려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이름을 지어 주셨고, 아담은 하와의 이름과 모든 동물들의 이름도 지어 주었듯이, 귀를 기울여 봅시다. 지금, 그분이 부르시는 우리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너는 행복자로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성경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이요 영이신 그분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비가 흩뿌려지고 있는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라도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당신은 이 여름에도 설레임으로 다가오는 신선한 ‘첫눈’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삶을 고운 빛으로 물들여 주는 ‘노을’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항상 꽃으로 피어날 수 있듯이 강단에서 그 음성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 주는 게 ‘설교’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모두가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일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함을 물론이요. 우리가 하는 일도 잡은 사역이 아니고 놓은 사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초도 바닷물 속에서 중심을 못 잡고 발발 떠는 나에게 몸에 긴장을 풀고 물결에 몸을 맡겨야 물위로 뜰 수 있다고 했던 H집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그 말에 너무 긴장을 푼 나머지 몸이 뒤로 뒤집혀질 뻔하긴 했지만...)
삶이 어려운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뜻, 욕심, 계획 등을 힘겹게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그분께 갈 그 때처럼 손을 펴 모든 것을 놓고 내 안에 하늘이 들어 올 수 있도록 가슴을 열고 살아갑시다.
한 날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내 전용(?) 산책길은 이제 생활공동체 가족들의 산책길이 되었습니다.
저물녘이면 노부부(老夫婦), 젊은 부부, 등이 다정하게 휠체어를 타고, 밀어 주며 초록이 쓰르라미 소리로 지쳐 가는 속에서 정경(情景)을 이룹니다.
함께 하는 시간도 나름대로 좋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나는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요즘 새로운 산책길을 찾아냈습니다.
매 시간마다 오는 15번 버스의 종점(終點)인 내 산책길의 끝에서 작은 방죽을 끼고 좌측으로 난 샛길로 쭉- 올라가다 보면 숲으로 가려져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
한용운님의 시(詩)에서 봄직한 숲 사이로 난 하얗고 작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숲 그늘이 드리워 온몸에 숲의 정기(精氣)를 느낄 수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그 길은 다시 작은 논로(農路)로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대문도 없는 농가(農家)가 있는데 뒤로 돌아가 보면 아직도 흙벽이 그대로 있고 불을 때는 아궁이 위에는 검은 가마솥도 걸려 있었습니다.
흙벽, 가마솥이 걸려 있는 불 때는 아궁이, 그리고 진한 숲 내음을 나만이 아는 비밀처럼 가슴에 안고 돌아올 때면 그것은 당신과의 만남처럼 산소 같은 휴식이요, 내 속에서 나오는 날숨과 내 속에 들어가는 들숨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섬(島)으로 피어납니다.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날 때면 한 번쯤 세계 여행을 떠나 시야를 넓혀 보고 싶기도 하고,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면서 우주 안에 나의 실존을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그 가운데서 내 이름을 불러 주고 나를 잡아 주는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음은 얼마나 눈물겨운 감격입니까?
또 광활한 우주, 그 가운데 한 별인 이 지구의, 그것도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우리가 이렇게 삶의 아픈 구비 구비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2000. 8월에 - .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매미의 날개 끝에서 자지러지던 여름을 하얗게 일렁이는 은사시나무가 휘휘 걷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아쳐 온 늦장마 폭우가 마악 이삭이 패이기 시작하는 논과 밭을 강타(强打)하면서 뒷산이 무너지고 야트막한 블록 담도 함께 무너지면서 붉은 흙이 빗물에 쓸려 내려왔습니다.
그 속에서 어린애 주먹처럼 여리디 여린 고구마가 올망졸망한 모습을 드러내고, 늙은 호박이 될 양으로 품위 있게 달려 있던 호박들은 흙 위에 뒹굴고 있습니다.
다행히 바로 그 옆에 있는 오리집 쪽으로는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아 여전히 꽥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그 오리 두 마리의 생명이 새삼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평탄할 때보다 위기와 어려움,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존재의 소중함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 의 비유를 통하여 존재의 소중함을 새로운 측면에서 우리에게 각성시켜 준 것 같습니다.
L목사님,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고 오늘은 청소년기의 자녀 문제로 고심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게는 하나같이 건강하고 예쁘게 생긴 귀여운 조카 녀석들이 9명이나 되지만 그 중 한 녀석이 자폐증세로 네 살이 넘을 때까지 말을 못할 때 그 충격은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많이 호전되어 가고 있지만 지금도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그 녀석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오면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칩니다.
참으로 아픈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행동 하나 하나가 그렇게 눈물겹고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처럼 그냥 신기하고 대견한 차원이 아니라 기적이요, 눈물겨운 감사요, 기도를 응답하신 그분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런 아픔은 나로 하여금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어릴 적 가끔씩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을, 그리고 지금 나로 인하여 그분께 특별히 감사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듯합니다.
L목사님, 사실 나는 새벽마다 나를 기도의 첫 순서에 두고 기도하시는 우리 부모님의 기도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항상 강권적(?)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선배 목사님의 인도로 이번 여름에도 7월에는 임실 경각산 수련원에서,
8월에는 남원 동광원에서 두 차례나 은혜로운 기회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를 쓰는 이 목사님은 어디서든 나를 ‘지구의 보석’ 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를 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예쁘고 잘났다는 게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낸 삶이기에 보석처럼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L목사님, 선배 목사님의 이러한 표현은 내 소중한 인생의 정곡(正鵠)을 짚어 주는 것입니다.
나도 내 인생이 소중하고 감사한 이유는 그 절망과 어둠의 질곡을 헤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손을 뻗으면 다다르고, 붙들고, 쥘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을 나는 그 동안 수없이 놓쳐 왔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기도 했고 미칠 것 같은 분노에 떨었던, 그렇게 그냥 어둠 속에 묻어 버릴 수도 있었던 인생, 그냥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었던 삶이기에 더 감사하고 소중한 것이지요.
성도들 중에서도 절망적인 상태에서 변화된 성도는 잃어버렸던 양처럼 더 애착이 갑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실패한 성도는 항상 가슴에 못처럼 박혀 생각할 때마다 자책감과 함께 눈물이 납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목사는 실패한 성도를 가슴에 묻는가 봅니다.
여기에서 나는 죄인과 세리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가슴을 만납니다.
그들은 그분에게 ‘잃어버렸던 한 마리 양’이요,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며 ‘돌아온 탕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순간순간마다 이렇게 그분의 뜨거운 심장의 온기를, 그리고 못 자국을 눈물로 더듬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햇살이 드는 날, 모처럼 산책을 나가 보니 저쪽 농원에서 중장비가 흙을 파 올리며 한창 공사 중이었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50세 전후 아저씨에게 ‘주택을 지으시는 가요?’ 하고 물었더니 ‘예, 목사님이시죠?’ 하더니 ‘저도 목사님 옆에 와서 살고 싶어서요’ 하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초면인데도 참 대답을 다정하게 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솔숲 사이로 난 산책길로 들어섰습니다.
L목사님, 그런 말 한 마디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이유는 어디서 든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는 곳에서는 인근 주민들과의 마찰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 여 년 동안 두 군데 아파트를 전전할 때부터 이곳에 건축을 한 오늘날까지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곳의 지하수가 참 좋은 것처럼 인심도 좋아서 인근에 우리 교회를 향한 마음들이 항상 따뜻함을 느낍니다.
L목사님,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리움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항상 손에 닿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보므로 상대적 빈곤감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지요.
L목사님, 우리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부모가 있는 한 그 자녀는 결코 잘못되지 않을 것이며 훗날 오히려 그로 인하여 더 큰 감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새 전군간(全群間) 도로 가로수는 노란 잎들을 보도 위에 떨구고 있지만 비에 젖은 전주 천변로(川邊路) 버드나무 가로수는 감은 머리를 길게 풀고 서 있는 여인처럼 아직도 싱그럽습니다.
L목사님, 우리가 오늘 잃어버린 것으로 가슴을 앓더라도 꽃이 지는 아픔은 열매가 여무는 결실의 기쁨으로 충분히 상쇄(相殺)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오늘, 가을이 오고 있는 이 소슬한 바람 속에서 항상 여유롭고 솔직하며 다정다감하여 편안함을 주는 당신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당신의 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도로 승화(昇華)시키렵니다.
- 2000. 9월에 - .
곡선(曲線)의 삶
이 가을, 당신이 내게 온다면 초록이 지쳐 간 고동빛 들녘에서 코스모스의 해맑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서늘해질수록 키 큰 코스모스들은 흰색, 진홍색, 보라색 꽃을 색색으로 피우며 이렇듯 허전한 가을날에 교회당 입구를 화사하게 장식해 주고 있습니다.
별처럼 새록새록 피어나는 꽃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꽃잎 하나하나마다 해맑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그 속에는 지난 봄, 따가운 봄볕 아래서 ‘내년에는 목사님 산책길 전체를 코스모스 길로 만들겠노라’며 코스모스 모종을 하던 집사님의 얼굴이 있고,
조금 전까지 꽃잎 사이로 잉잉거리며 모여드는 벌을 잡아다가 여기저기에다 벌침을 놓던, 늘 건강을 위해 정성을 드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권사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또 거기에는 항상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끓는 물에 소독까지 하면서 생활공동체 위생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박형제의 모습도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여 투 크러치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람한 체격 때문인지 마당에 모여 대화를 할 때에도 박형제의 우렁찬 소리는 산에 부딪쳐 메아리로 울려옵니다.
또 그 속에는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빨래를 할 때는 세면대 벽면에 설치된 봉(棒)에다가 한 번 감아서 물을 짜내는 김자매의 웃는 얼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새신랑 조서방의 얼굴도 있어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눈을 반짝 크게 뜨며 웃는데 그럴 때는 순간 잠자리의 눈처럼, 눈 속에 하이라이트(highlight)가 여러 개로 반짝거리면서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또 그 속에는 만삭의 몸으로 휠체어를 사용하면서 내가 음식을 만들어 줄 때마다 맛있다고 고마워하는 심자매의 밝은 얼굴도 있습니다.
외에도 그 속에는 우리 성도들의 곱고 맑은 얼굴들이 한 잎 한 잎 꽃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습니다.
우리 베데스다 생활공동체는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랑하고 행복할 권리를 누리는 그룹 홈 형태로 삶의 재창조(recreation)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자신의 삶에 의미와 긍지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TV드라마에서 전문 도둑이 자신의 절도 행위에 나름대로 당위성을 만들기 위하여 일지매 운운하다가 자식 앞에서 하는 말,
‘내가 도둑질을 하는 게 나만 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에서 잇또오 히로부미를 쏠 때 자기만 살려고 했겠느냐’는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전과 12범으로 양심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는 그가 수십 년 동안 도둑질을 할 수 있었던 그 저력(底力)은 어쩌면 그런 안쓰럽도록 궁색한 억지 의미, 억지 긍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즉, 삶에 있어서 의미와 긍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해줬습니다.
심지어 도둑도 그런 억지로 버티고 살아가는데 비록 열악한 여건에 있더라도 부도덕하거나 꺼리는 삶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나름대로 의미와 긍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은혜 안에 있음을 감사하지 못할 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럴 때 우리의 삶 자체는 균형을 잃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안개가 걷혀 가는 초가을 아침 들녘에는 키 큰 수숫대가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가을의 정취를 더 해 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여물어 허허로운 가을 하늘에 크게 반원을 그리며 내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영적으로 무르익어서 성령 충만한 모습처럼 은혜롭습니다.
숙여지는 각도와 믿음의 성숙도는 저렇듯 정비례한 것을,
나는 손을 내밀어 이삭을 잡고 흔들면서 그렇게 휘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그 탄력(彈力)의 신비를,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꺾어지지 않는 그 아름다운 강인함을 느껴 봅니다.
노자의 사상은 강(强)을 유(柔)로 이기는 것이라지만 그보다 앞서 ‘악(惡)을 선(善)으로 갚으라’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고 하신 그 분은 연한 순(사53:2) 같은 모습이었으며 고난의 사역을 감당하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셨음은 그 연한 순(旬) 속에는 만민을 구원하는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善)은 부드럽고, 악(惡)은 강퍅한 느낌으로 옵니다. 곡선(曲線)은 원시적(原始的)인 여유로움이지만 직선(直線)은 근시안적(近視眼的)으로 왠지 꺾어질 것만 같은 불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그것은 일개 종교가 주는 나름대로의 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의 이치야말로 순리(順理)요, 섭리(攝理)이며, 이치나 섭리는 또한 흐름이요, 흐름은 곡선이며 곡선은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은 평안입니다. 가을 산책길에서 숲의 맑은 기운을 온 몸으로 마시고 있노라면 자연으로부터 오는 평안으로 가슴과 동공(瞳孔)이 열리며 거미줄처럼 마음을 얽어매는 잡념의 열기가 사라집니다.
이 가을, 들녘의 모든 것들이 직선의 과정을 지나 성숙으로 익어져 곡선을 이루어 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나도 이제는 그렇게 성숙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만날 때마다 찬바람 속에서 웃는 코스모스처럼 그렇게 항상 화사하게 피어나고 싶습니다.
- 2000년 10월에 - .
하루를 지나고 저물녘 숲 속 산책길에서 나는 사랑스러운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참으로 행복임을 느끼게 됩니다.
발톱이 없는 아이
지선아, 저물녘 가을 숲에는 스산한 바람이 가득하고, 서늘해진 대기 속에 눈을 들어보니 밤이슬이 어둠과 함께 뿌옇게 내리는 것이 보이는구나.
그 작은 물 알맹이들이 산뜻하게 와 닿는 신선함 속에서 오늘밤은 왠지 나도 대기와 함께 흠뻑 젖어버리고 싶구나.
내가 이슬이 되고 이슬이 내가 되므로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 속에 용해가 잘되면 내 속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뭉치고 응고된 것들이 풀어지고 녹아지면서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고 등등 얽어매어 놓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지?
그리하여 사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저 무수한 물 알맹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평화로운 상념으로 떠돌고 싶다.
지선아, 열다섯 살 때, 아기는 어떻게 해서 생기냐고 묻던 네가 어느새 자라서 이 가을에 애 엄마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구나.
분만 수술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을 때만 해도 내 마음은 아기보다는 몸이 약한 네가 걱정이 되어 누운 채 수술실에 들어가는 네 모습이 안쓰럽고 애처롭기만 했단다.
잠시 후에 수술실에서 핏덩이처럼 빨갛고 물처럼 말랑거리는 아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환호를 지르며 달려들어 흥분했던 것도 잠깐,
아빠로부터 받은 유전(遺傳)으로 발톱이 없다는 말을 듣고 착잡해진 마음 때문에 잠시 후 신음을 하며 깨어나는 너를 볼 때에도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단다.
그 후로 줄곳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진하 자매와 산책을 하다가도 샌들 밖으로 나온 진하의 발톱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아서 “진하야, 네가 만일 발톱이 없다면 샌들을 신고 다닐 수 있겠니?” 하고 물어 보기도 하고 문득 민영이가 서너 너 댓살 되었을 때 아이는 답답하니까 양말을 벗으려고 하고 엄마인 너는 한사코 신기려고 실랑이하는 광경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발톱이 없는 아이의 발을 가려주려고 한다면 그 때부터 아이의 마음에는 그늘이 드리워지리라 생각한다.
우리도 몸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우리 스스로 보다는 다른 사람이 수치스럽게 여기고 가려주려고 할 때 더 비참해지지 않았니?
훌륭한 부모는 결코 자식에게 그런 그늘을 주지 않을 것이다.
지선아,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발톱이 있음을 감사하거나 소중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실(事實)의 세계에서 보면 발톱은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있어야 된다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조서방을 보더라도 발톱이 없어서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해(害)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처럼 그것은 그냥 발톱이 없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지금도 그분은 인간이 만든 편견이나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의 세계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그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때만이 진정 그분의 자녀일 수 있으며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든 천국이 되리라 생각한다.
옛날, 나도 한 때 장애에 대한 컴플렉스로 꽤 민감했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 때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작가 고(古) 선우 휘(鮮于 輝)님의 칼럼을 읽고 편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그 다음 주 칼럼으로 내게 답장을 했었고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옛날에 일본 국회에서 한쪽 눈이 없는 어느 의원이 반대당 의원과 논쟁을 하다가 반대당 의원으로부터 “외눈깔로 세상이 제대로 보이느냐”는 야유를 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순, 의회장 안이 무겁게 긴장했을 때 야유를 당한 의원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딱 한 마디, “일목요연(一目瞭然)!!” 이라고 대답하자 의회장 안에는 환호성과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고 한다.
악의적인 야유까지도 너그럽게 받아넘길 수 있는 자신감!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그렇게 의연하고 멋진 삶을 살라는 그분의 충고였다.
지선아, 이 글의 제목이 혹 네게는 아프게 느껴질지 몰라도 민영이가 발톱이 없다는 사실을 꺼리거나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나의 마음으로 받아 주기를 바란다.
‘아이의 상태에 대해 불만 갖지 않고 건강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잘 기르겠노라’고 내게 말했듯이 어릴 적부터 아이답지 않게 사려가 깊던 너는 민영이를 훌륭하게 양육시킬 만큼 넉넉한 ‘품’을 가졌음을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 민영이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아빠 조서방처럼 착하고 겸허한 성품과, 엄마처럼 지혜롭고 사려 깊은 인격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이름을 지어 준 민영이를 가슴에 꼭 안고 있노라면 스러질 듯이 가녀린 숨소리,
우유를 먹일 때면 젖을 빨아 넘기는, 가슴 저리도록 애틋한 생명의 소리가 마치 또 하나의 작은 너를 보는 양 사랑스럽구나.
이렇게 예쁜 손녀를 갖게 된 흐뭇함으로 늦가을 대기가 밤이슬에 젖고 있듯이 나는 지금 하늘이 내리시는 평안으로 젖고 있단다.
- 2000년 11월에 - .
날개가 있고 기어 다니는 곤충
아직도 모를 것은/한 송이 꽃으로 피우지 못할 것을/공연히 씨를 뿌려 움을 틔우셨나요/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르지 못할 바엔/괜한 불씨 당겨/뜨거움을 알게 했나요/지워지지 않는 파일들은/기억 속에 저장된 채/시멘트처럼 굳어/해마다 이맘때면/병처럼 도집니다/한 줄기 강물로 흐르지 못할 바엔/소용돌이 폭포는 왜 만드셨나요/가을은 소매 끝에 맴돌고/추억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휘청거리기만 합니다/부질없는 옛 맹세는 싸늘한 주검인 듯/찢어진 낙엽 마냥/골짜기를 헤매는데/한 조각 아쉬움은/옹이처럼 멍들어/아물지도 않은 상처를/자꾸만 스칩니다/그래도 아직까지 궁금한 것은/싫다는 인연을 억지로 묶어 놓은 까닭입니다.
차가운 바람결을 타고 속울음을 삭이는 목 메인 소리가 들려옵니까? 겨울 유리창에 낀 성에처럼 뿌옇게 서린 한(恨)이 보입니까?
PC통신에서 누가 이런 소리와 빛깔을 내고 있는지를 알아봤더니 시각장애를 가진 ‘신성철’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가슴이 찡 했습니다. 그러나 표현할 수 있음은 이미 자유이며 그 자유는 행복의 시작입니다.
지난 추수감사주일 오후에는 전주 온누리 교회 초청으로 청년대학부의 찬양축제에 우리교회 청년들 10여명이 찬양 순서를 맡았습니다.
큰 교회, 전국에서도 유명하다는 청년대학부가 주최하는 찬양축제에는 젊은 감각이 톡톡 튀는 청년대학부 담당 장승우 목사님을 비롯하여 한창 젊음을 뿜어내는 발랄한 학생들의 율동과 찬양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순서가 바뀔 때마다 조명과 함께 무대 바닥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청년대학부원들의 활동을 담은 필름들이 신세대들의 감각에 맞게 돌아가고 있는 분위기는 공기는 탁해서 기침이 나왔지만 마치 싱싱한 물고기들과 함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신선했습니다.
그 속에서 초청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연습도 부족한데다가 휠체어와 클러치를 사용하는 불편한 몸을 가졌기에 조금은 위축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나가서 찬양을 했지만 많은 박수와 갈채를 받고 그런 대로 은혜로웠습니다.
밤에 돌아오는 차 속에서 강민승 형제는 태어나서 오늘밤처럼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라면서 너무 좋아서 잠도 안 올 것 같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이유는 수많은 여학생들의 발랄한 율동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노총각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함께 웃었는데 장승우 목사님은 전화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한 가지 우려가 되는 것은 우리 교회가 온누리 교회와 비교가 되어서 마음에 상처나 입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까지 섬세하게 우려해 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솔직하게 그런 말까지 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한 목사님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혀~”라고 대답하자 “목사님이야 주안에서 자유로우시지만 성도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뭐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이 유쾌하지만은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 역시 아직도 주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은 까닭인지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을 말하기도 전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나를 단정해버리는 행동들이 때로 힘들고 불쾌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장승우 목사님 말대로 그런 생각이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는 것이 참 자유가 아닌가 아닐까요?
다음날 아침 경건회에서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바울은 궁핍이나 비천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그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여건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깨달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알(卵)에서 깨어나 하늘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느낄 수 없어서 편안한 것이야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형제들의 차원이지만 느끼면서도 편안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하늘을 보는 자의 참 자유가 아닐까요?
예수의 십자가 사역도 무통분만(無痛分娩)처럼 이룬 것이 아니라 낱낱이 느끼면서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어렵고 힘든 여건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도 그분 안에서의 소중한 사역일 것입니다.
좋은 여건이 나쁜 여건보다는 편하고 좋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 생의 목표가 분명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절대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가증하다’<레11:20>는 말씀처럼 우리가 영의 사람이라는 날개를 달고 있으면서도 항상 육신의 무게로 주저앉아 있음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제 또 한 해가 갑니다. 새로운 해를 맞기 전에 우리가 한 해 동안 무엇으로 자신들을 묶어 놨는지 꺼내놓고 바라보면서 ‘겨울마음 모으기’에서 마음을 녹여봤으면 좋겠습니다.
위에 ‘아직도 모를 것은’이라는 시를 쓴 서울에 사는 신성철님은 전날 익산에 와서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참여하겠노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진솔한 시와 영혼의 노래들로 엮어지는 베데스다 시낭송회 ‘겨울마음나누기’는 이번에도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참 따뜻하고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움츠렸던 날개를 활짝 펴고 또 한 해를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우리 모두 참 자유의 사람으로 새롭게 회복되는 12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2000년 12월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