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誌文)에 기록(記錄)된 동래(東萊) 정(鄭)씨의 세계(世系)
근래 우리 족보상에 나타난 1세(世)부터의 기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관한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는 것 같아 여기에 그 기록을 쉽게 풀이하여 밝혀 두고자 한다.
1. 동래(東萊) 관향에 대하여
우리나라 성씨의 관향은 나라에서 정해 준 성(姓)을 사성(賜姓)이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신라 때는 별도이지만 직접 사성하면서 본관을 정해 준 성(姓)이 있는가 하면, 그 외의 본관이 정해 진 시기는 대개 고려 광종9년(958)부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시행 되면서 사는 곳과 父 祖 曾祖 高祖의 성함(姓銜)이나 휘함(諱啣)을 적게 되는데, 이때에 사는 곳을 적은 것이 본관(本貫)으로 정착된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우리 동래정씨의 관향은 복야공(僕射公) 휘(諱) 목(穆) 선조(先祖)께서 고려 문종20년(1066) 병오(丙午)에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할 때 동래에서 온 사람이라 쓴 것이 동래(東萊) 관향(貫鄕)을 쓰게 된 시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2. 기세조(起世祖)를 지원(之遠)으로 기록한 연유(緣由)
우리 동래정씨의 현전하는 최초의 족보(族譜)인 을미보(乙未譜:1655)에 시조 휘(諱) 회문(繪文) 공이 1세(世), 2세(世) 지원(之遠), 3세(世) 문도(文道)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1650년(효종1)에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송림산에서 당시 대제학(大提學) 윤순지(尹順之)의 모상(母喪)때 광중(壙中)에서 발현된 문안(文安)공 휘(諱) 항(沆) 선조의 묘지에 아버지는 섭태부경(攝太府卿) 벼슬을 지낸 휘(諱) 목(穆)이시고, 할아버지는 휘(諱) 문도(文道)이시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지원(之遠)이신데, 모두 호장(戶長)이시다.
…考諱穆攝太府卿祖諱文道曾祖諱之遠皆爲本府戶長…
의 기록에 의한 수록이었다. 그러나 시조 공과 1세(世) 지원(之遠) 선조 사이의 계대가 분명하지 못하여 숙종 42년(1716) 병신년에 발간된 병신보(丙申譜)부터 안일호장(安逸戶長) 휘(諱) 회문(繪文)을 별록(別錄)하고 보윤호장(甫尹戶長) 휘(諱) 지원(之遠)을 1세(世)로 2세 문도(文道) 3세 목(穆)으로 고쳐 편술(編述)하였다.
3. 5세(世)까지의 가계(家系)
1925년 3월에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대덕산에서 발현된 3세(世) 복야공(僕射公) 휘(諱) 목(穆) 선조(先祖)의 지석(誌石)에 의하면 목(穆) 선조께서 18세 때(고려문종11년.1057)에 18세의 나이로 개성에 가서, 상당고씨(上黨高氏)의 시조이자 장인이 될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 고익공(高益恭)의 보살핌에 힘입어 문종20년(1066)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고, 1071년(문종25)에 고익공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이듬해(1072년) 친임문과(文科親臨)에 병과급제(丙科及第)하여 비서성교서랑동정(秘書省 校書郞同正)에 오른 다음 누진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고 가는 곳 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숙종10년(1105) 5월 19일 용흥사(龍興寺) 덕해원(德海院)에서 세상을 뜨셨으니 향수(享壽) 66세였고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시호를 칭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복야공(僕射公)이라 칭호(稱號)한다. 그 이유는 그 아드님 항(沆)께서도 시호(諡號)를 임금님 친필로 같은 문안(文安)으로 받았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복야공(僕射公) 묘지(墓誌)에 의하면 4세(世)인 아들이 4형제인데, 장남 제(濟)는 행정수완이 탁월하여 위위주부(魏尉主簿)로 영광군통판(靈光郡通判)이고, 차남 점(漸)은 위위주부동정(魏尉主簿同正)이며, 셋째 택(澤)은 내시부의 잡직서승(雜織署丞)이며, 넷째 항(沆)은 상주목사록(尙州牧司祿)으로 서기를 겸하는 위위주부(魏尉主簿)이다. 또 점(漸)이하 세 아들이 모두 진사(進士)로 등과하여 현달(顯達)하게 되었으니 덕이 있는 사람은 뒤가 아름답다는 말이 참으로 사실이다 하였다.
또 문안공(文安公) 항(沆)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제(濟)는 일찍 죽고, 점(漸)과 택(澤)은 문장과 재주와 능력으로 조정에 이름이 드높았고, 항(沆)은 23세인 고려 숙종7년(1101)에 진사에 급제 했으며, 숙종이 친임(親臨)하신 복시(覆試)에서 2등으로 뽑히어 여러 요직을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지제고(知制誥)를 겸하여 조서를 내리자 졸(卒)하니 소흥6년(1136)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또 이르기를 어사잡잔(御史雜端)인 점(漸)과 급사중태자찬선대부(給事中太子贊善大夫) 택(澤)과 항(沆)이 모두 57세에 졸(卒)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안공(文安公) 항(沆)이 졸(卒)한 후에 그의 집에는 초상을 치룰 한 섬의 곡식조차 없었는데, 왕이 그의 청빈(淸貧)함에 놀라 “30년 동안 근시(近侍)의 직위에 있었고, 11년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하여 부조로 쌀1백 섬과 베2백 필을 하사하고 친필로 시호(諡號)를 “文安”이라 써서 내렸으니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청백리(淸白吏)가 아닌가 한다.
5세(世)의 기록은 제(濟)와 점(漸)은 후사(後嗣)가 없고 택(澤)은 아드님 형제를 두었는데, 자가(子家)는 전옥서령(典獄署令)을 지내셨고, 아드님으로 교서랑(校書朗)인 보(輔)와 첨사(詹事)인 필(弼)을 두셨고, 둘째 자야(子野)는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후사(後嗣)가 전하지 않는다.
항(沆)은 세 따님과 아드님 한분을 두셨는데, 아드님의 초휘(初諱)는 사문(嗣文)이고 뒤에 서(敍)로 고쳐 썼으니, 유명한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써서 궁중전악(宮中典樂)으로 또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로 불려지며, 고려 가요로 작가가 밝혀져 있는 유일한 가요로 우리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 3세(世) 복야공 목(穆)의 아우 되시는 송재공(松齋公) 휘(諱) 선조(先祚)는 고향인 동래에 남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호장(戶長)을 지내셨고, 4세(世) 추(秋) 5세(世) 명해(命海) 6세(世) 진성(振成)이 모두 호장(戶長)이시다. 위에 기록된 1세(世)부터 6세(世)까지는 모두 부산 화지산(華池山) 추원사(追遠祠)에 14위(位)가 배향(配享)되어 매년 동지(冬至) 때 전국의 많은 종인(宗人)들이 참제(參祭)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