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의 『달의 지평선』은 한 편의 서사라기보다는 정교하고 세련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읽힌다. 그 조합에는 달, 태양, 별 등의 천체어와 안개, 바람 등의 기상어가 교묘히 섞여들어가 환각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분위기에 소설의 서사가 가물가물 꿈결처럼 이어진다.
운동권 출신인 남창우, 철하, 은빈이 있다. 남창우는 은빈과 결혼했다. 철하가 감옥에 있었던 관계로 창우와 은빈은 철하에게 부채의식이 있다. 이 부채의식은 질투심과 맞물려 그들을 이혼하게 만든다. 은빈은 이탈리아에, 철하는 제주도에, 각각 자신을 유폐시키고 창우는 탤런트가 되어 텔레비전 속에 자신을 가둔다. 그 다음의 소설의 진행은 창우의 연애담으로 이어진다. 서주미, 김혜정, 나수연, 이명숙, 다시 은빈으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각각의 이미지로 자신을 연출한다. 서주미는 달과 어둠을 표상하는 여인이다. 정체불명의 낚시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남창우와 심각한 연애를 하고 상처받는다. 나수연은 사라반드라는 장미와 햇볕과 하얀 자전거로 표징되는 빛의 여인이다. 몹시도 몽환적인 이 여자는 이 소설에서 님프 혹은 모신(母神)과도 같은 존재로 자기 희생을 통해 남창우에게 삶의 계시를 던져준다. 이명숙은 무주의 설천과 형천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여인이다. 이 여인은 창우와 은빈의 재결합을 감질나게 하기 위해 설치된 소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남창우는 은빈과 재결합한다. 이렇듯 이 소설은 80년대의 후일담에다 90년대 한 남자의 여성 편력이, 주된 서사적 골격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고 싶은 인물은 주미의 어머니와 나수연이다. 주미의 어머니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버린 낚시꾼에 대한 복수를 남창우에게 감행한다. 그러니까 남창우는 처녀성을 훼손한 모든 남자의 대표가 되는 셈이다. 남창우 입장에서 본다면 주미의 어머니는 악녀 그 자체다. 그녀는 남성성의 행사를 방해하고 동침의 책임을 요구하는 훼방꾼이며, 나쁜 장모의 표본이다. 다른 말로 「춘향전」에서의 월매의 현대적 변용이다. 반대로 나수연은 자신의 처녀를 제 손으로 찔러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면서까지 남창우의 홀로 서기를 돕는다. 그녀는 평강공주이면서 조해일의 『겨울여자』의 ‘이화’여서, 남자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천사 그 자체다. 이 둘은 이 소설의 종착역인 남창우와 은빈의 재결합에 역기능과 순기능을 각각 수행한다. 바로 이런 여인의 성격으로부터 윤대녕 소설의 한 특징을 꺼낼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제적으로 본다면 ‘타인을 사랑하기’일 것이다. 남창우와 은빈이 이혼한 것은 철하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철하라는 존재를 의식하는 남창우의 마음 때문이었다. 남창우는 있는 그대로의 은빈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남창우가 나르시시스트였기 때문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수동적이다. 설혹 관계를 맺는다 해도 자기 연민으로 인해 적극적인 사랑이나 원만한 애정관계가 불가능하다. 『달의 지평선』에서 남창우는 인연을 맺는 모든 여자에게 수동적이다. 설혹 여자를 유혹하고 싶다 하더라도 여자가 먼저 몸짓이나 신호를 보내게 만든다. 나수연은 이 년째 엽서를 보내다가 그를 찾아오고, 김혜정은 혼수 상태의 남창우와 일방적으로 성행위를 시도한다. 이명숙에게 다가감도 그녀가 늘 앉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녀가 먼저 술을 보내게 하여 가능해진다. 이렇게 주인공을 나르시시스트적인 성격으로 설정한 것은 윤대녕이라는 작가의 민감한 감수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감수성으로 인해 소설의 주인공은 상처에 약하며, 그 상처를 두려워해서 자신을 더욱 유폐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 나르시시즘은 완전한 것이 아니어서 외부에 대한 사랑에의 갈망은 내면에서 오히려 증폭된다. 타인에게 가고 싶지만 자신 있게 가지 못하는 이 딜레마가 바로 남창우의 본질적인 문제이며, 윤대녕의 소설이 타인을 마음대로 사랑하기 힘든 이유이다. 용기 있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윤대녕은 천사와 악녀를, 그리고 철하와 송해란과 강익수와 김혜정을 등장시켜, 어렵게 어렵게 은빈에게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