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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는 한민족이 모체
결론적으로
고증역사가 점차 발전하면서
이집트와 멕시코 문명등은 한국(환인)의 동이문화가 모체임이 위와같이 밝혀지고 있어
한민족으로 인한 범세계적 전파임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민족참역사의 삼우선생의 역사적 주장(인류 최의 민족으로써 인류역사 자체...)이
과학적이고 역사적 사실을 근본으으로한 실사임이 다시 확인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인류의 시원 한민족, 한반도 그 증명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는데 기원전 7세기경 신석시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전세계로 전파된 한민족문화유산이다.
동일한 유적의 분포지역은 역사학적으로 동일한 민족이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문화로 본다. 즉 고인돌을 통해 인류의 흐름을 보자면 기원전 7세기 시대부터 기원전 2세기시대까지의 세계적 유적으로써 한반도에서 인류가 시작되어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九州],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는 바,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나,한국의 고인돌과 유사한 형태로써 그 형태적의미를 볼때 한민족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가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고인돌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북방식과 남방식,개석식등으로 분류하는데 모두 한반도에 있다.
고인돌은 자세히 보자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볼때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보이며 이후에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가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요즘 학계의 일반적 판단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하는 놀라운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가히 한반도가 인류문명의 발생지라고 할수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는바,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증명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어 역시 모두 한민족의 유품이다.
고인돌의 축조에는 거대한 돌의 운반과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기때문에 이들이 족장(族長) 이나 지배자들의 묘(墓)라는 주장에 이견은 없다.
인류의 시원 한민족, 한반도 그 증명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는데 기원전 7세기경 신석시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전세계로 전파된 한민족문화유산이다.
동일한 유적의 분포지역은 역사학적으로 동일한 민족이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문화로 본다. 즉 고인돌을 통해 인류의 흐름을 보자면 기원전 7세기 시대부터 기원전 2세기시대까지의 세계적 유적으로써 한반도에서 인류가 시작되어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九州],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는 바,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나,한국의 고인돌과 유사한 형태로써 그 형태적의미를 볼때 한민족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가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고인돌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북방식과 남방식,개석식등으로 분류하는데 모두 한반도에 있다.
고인돌은 자세히 보자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볼때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보이며 이후에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가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요즘 학계의 일반적 판단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하는 놀라운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가히 한반도가 인류문명의 발생지라고 할수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는바,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증명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어 역시 모두 한민족의 유품이다.
고인돌의 축조에는 거대한 돌의 운반과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기때문에 이들이 족장(族長) 이나 지배자들의 묘(墓)라는 주장에 이견은 없다.
장백산은 지금의 평정산이다알
평정산 즉, 장백산은 '청과이조' 의 영역을 구분짖던 산 이었다.
참고사항 (아래 간도아리랑 비디오물에 다소 착오가 있어서 바로 잡습니다. 백두산정계비가 아니라 장백산정계비입니다. 이조와 청 영역의 기준이 되었던 산의 명칭이죠. 원래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임을 참고 바랍니다. 중국에서 장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이라고 우기고 있고, 이조시대때 장백산을 백두산이라고 덩달아 쓰고 있는데 착오의 포인트가 있다는점을 유념해주시고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계비의 문제에 있어서 아쉬운점은 신라와 백제의 영역을 가르는것과같이 같은 민족이었다는 점과 같은 고려후손인 만주인들이 만주국이 멸망된 이후, 지금의 중국에 흡수됨으로써 현재, 남의땅이 되어있다는 점 입니다)(참고: 연사, 도움 : 삼우선생, 해돋는산님,태백님)
주신의 영역과 주신을 계승한 구려의 영역은 지금의 중국을 포함하여 내몽고 만주 러시아 연해주 한반도까지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우리는 한민족의 강역을 지금 반토막되어버린 한반도만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최소한 만주지역은 고려시대까지만해도 우리민족의 영역이었으나 이조시대에 들어서는 아예 다른나라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간도는 일제와 청에 의해 강제로 넘어갔고 이조실록에서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성군이라고 배워온 이조세종때 그나마 4군6진 개척으로 넓혀놓은것이 지금의 한반도이다.
고려시대인구와 이조시대인구는 약 3배에 달 합니다. 반역의 전주이씨정권을 세운 이방원이가 위화도회군 후, 죽인 고려양민의 수는 20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 이유는 삼우선생의 대문글에도 있지만 이씨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만주와 반도가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농공상천시로 가난했던 이조는 농업만 중시하고 당파싸움이나 조장하면서 가난과 당파싸움을 일삼도록 하는 정책으로 정권유지만을 추구하는 교활하고도 야비한 정책을 500년동안 유지하였고 이조는 500년동안 한민족을 지배할수 있었습니다. 이조실록에서조차 때로 과거의 고려영역을 그리워하는 글들이 가끔 보이지만 워낙가난했고 정신이 잘못되어 한민족의 고토는 남의 땅이었고 지금도 그림의 떡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원래 강역은 흑룡강너머까지였고 지금의 백두산은 진정한 원래의 백두산이 아닌
제2의 백두산이며, 그 제1백두산은 만주의 평원 가운데있는 지금의 평정산이란것이란 주장입니다
따라서, 아무르강이 두만강이며 지금의 요하강이 압록강이란 내용입니다
각종 고서와 사서를 인용해
일제의 역사조작과 영토침탈로 만주간도를 잃어버린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0월 28일 백범기념관에서 '동아시아 영토문제'라는 주제로 간도학회 주최의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이 학술대회에서 관심을 끈 것이 하늘기록영화제작소의 역사물다큐멘터리 <간도아리랑>이다. 이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첨부하여 올립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을경우 삭제하겠습니다.
역사다큐멘터리 <간도아리랑> / 하늘기록영화제작소
다큐멘터리 <간도아리랑>은 이제까지 간도문제의 핵심적 쟁점이었던 토문강 논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역사물로써 다른 내용도 매우 귀중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간도아리랑>은 먼저, 청사고 열전과 만주원류고의 고사서를 인용하며 토문강이 백두산 동쪽 변경에서 흘러나와 동남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점, 정계비문에서 예로부터 분수령이라 하여 토문강이 조선과 중국을 구분하는 강이었던 점을 들며 정계비문상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틀림없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간도아리랑>은 여기에서 간도문제의 진실이 다른 데 있다고 말한다. 곧 정계비문상에 나타나 있는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이 현재의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라는 것이다.
▲ 1935년 하버드대학에서 출판한 중국역사부도집편의 1760년대의 중국과 주변 자치령의 지도
ⓒ2005 하늘기록영화제작소
<간도아리랑>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특히 세종실록지리지)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발문(=서문), 만주원류 지리고, 청사고 열전, 명통지, 1935년 하버드대학에서 출판한 중국역사부도집편의 1760년대의 중국과 주변 자치령의 지도, 1910년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의 인구현황' 등을 통해 간도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담당 PD는 "현행 국사교과서가 조선왕조실록에 무수히 많은 기록이 있는 북원(몽고)과 탈탈과의 외교관계, 혹은 북원과 국경을 접한 조선의 강역을, 조선사 편수위의 반도조선사관에 입각해 삭제하였다"고 말한다.
또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현재의 만주대륙 흑룡강 아래 송화강이 명나라 때 처음 이름 붙여졌으며 장백산에서 흘러나오는데 압록강과 두만강의 원류[압록강과 도문(圖們)강의 양원(兩源)]"이라고 말하며, 현재의 만주대륙 흑룡강 아래의 평정산 일대가 백두산이며, 백두산은 일개 산이 아니라 현재 한반도의 남쪽 크기의 거대한 산군(山群)이라고 지적하며,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백두산 관계사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서문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하늘기록영화제작소측은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해 조선의 역사와 강역은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위 <간도아리랑> 다큐멘터리를 통해 "학계의 심도깊은 논의와 연구를 기대한다"는 주문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돈수씨가 말하는 한국인의 우수성이란?
▲ 과학성과 창조성
서양과학 문명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과학성과 창조성이 뛰어난 과학유산들이 있다. 한글과 거북선, 온돌문화, 금속활자, 한지 제작기술, 도자기, 첨성대 등 그 예를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은 최근 1000년간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1위로 꼽혔다. 한글은 국내외 학계에서 그 과학성과 독창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한 외국 학자는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 장인정신
우리의 전통 가운데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퇴색해버린 부분이 바로 장인정신이다. 장인정신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전념하거나 한가지 기술에 정통하려고 하는 철저한 직업정신을 말한다.
한국인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들로는 도자기와 한지, 불상, 나전칠기, 방짜유기, 활, 자수 등 이 역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근현대사를 거치며 급속한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우리 민족의 장인정신은 '빨리 빨리 문화' 속에 퇴색됐다.
▲ 높은 교육열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는 문인을 더 높이 여겼던 선조의 사회인식과 가문을 중요시했던 유교적 세계관, 부모들의 아쉬움을 자식에게 배가시키는 동양적 가치관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높은 교육열이 우리 사회의 고속 경제성장을 이끈 원동력이라는 점은 확연한 사실이다.
다만 지나치게 늘어가는 사교육비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치맛바람,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에서 불거지는 성과주의, 입시와 취업만을 위한 지식편식 등은 우리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 높은 기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의 강인한 상무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이 우리의 진정한 민족정신이다”고 찬미했다. 우리 민족이 과거 드넓은 대륙을 넘나들며 용맹을 떨쳤던 것에 대한 자신감이다. 신라의 화랑정신도 이와 맞닿아 있는 면이 있다.
문(文)의 정신은 ‘선비정신’의 틀로 계승되고 있다. 선비정신은 ‘변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의리정신’이다. 우리나라에 파견된 최초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 미국인 앨런은 “선비는 남을 속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신의가 투철하며, 예의 바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뇌물을 받지 않고, 도박을 하지 않으며, 의롭지 않은 것과 불의한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선비사상은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당할 때마다 ‘항거’의 정신으로 드높게 나타났다.
한반도에 언제부터 인류가 살았는가?
오늘날 고고학적 연구에 의해 밝혀진바에 의하면
약 70만년전 구석기 시대부터 이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그 유적으로는 공룡발자국등..
충남 공주의 석장리, 평남 상원 검은모루, 전라도 등 여러 곳이 있는데
이들은 산과들에서 수렵과 강과 바다에서 어로를 주로하고 살았다.
기원전 6천년 경부터 마제석기와 토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로 발전했는데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덧무늬(융기문)와 빗살무늬(즐문)가 새겨진 것이다.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어로와 수렵에 종사하였고 특이한점은
농경생활을 이때부터 시작한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들 신석기인들은 신라지방에서 시작한 고아시아족으로써 후일 번성하여
여러갈래로 대륙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 갈래가 만주(중국)-몽고-헝가리-중국
시베리아로 이주해갔고 이후에도 아메리카 이스라엘 이집트 태국 베트남까지
5000년 세월에 거쳐 전세계로 배달(이동)되었다.
기원전 10세기 경, 만주와 몽고지역으로 진출한 이 민족은 그지역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예맥으로 나타나 있는 이들은 선주민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 오늘날 인류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들이 현재의 한국인들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기독교 성경에 예수탄생때 동방박사...를 언급한부분이 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사료의 기록으로써 그들 조상의 땅에서 축복의 사신이 온다는뜻이므로 유대인의 조상은 한국인이라는유럭한 증거다.
동방인....동이족...
이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손재주가 뛰어나 일찌기 인류최초로 청동제의 도구(무기)와
반달돌칼(반월형석도)와 같은 농기구를 사용하여 높은 농업생산력을 가졌고
고구마,감자,보리, 벼,조, 수수, 피, 기장등을 재배하면서 농경 과 수렵을 병행하여
부유하게 발전 번성하자 정치적 군장인 한(칸)이 등장하고 통치체제
(국가)를 구축하고, 제도를 만들었으며 각 단위별로 통솔하는 마립칸등으로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날로 번성하여 경제력을 축적하자, 청동제의 무기(비파형동검등)를 대량생산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며 주변을 정복하여 세력을 확산
하여 2천년이 되도록 단일 제국체제를 유지하였던 주신(조선)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들은 서서히 분열하면서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 한반도안으로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한국...이들이 인류의 조상이다.
단기고사,한단고기르 보면 단군조선 제 3대 단군인 가륵단제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고대 문자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제정 작업에 참여했던 정인지가 훈민정음 반포 서문에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 라고 밝혔는데 여기서 옛 전자가 바로 가림토문이라고 합니다. 」 「위당 정인보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도 단군이래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말하고 단전요의 라는 책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서 최치원이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일본 신대문자와 비슷한 이유는 당시 단군조선의 강역이 일본열도까지 미쳐서 그로 인해 일본이 가림토문을 모방하여 신대문자를 만들엇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림토문자는 현재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 퍼져 이들 지역에서는 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필린드의 언어학자로 알타이 비교언어학의 대가인 람스테드 교수는 한국어가 일찍이 4천년 전부터 알타이어족에서 독자적으로 분리되었다고 합니다. 4천년전이라면 바로 단군조선시대로 람스테드 교수의 말은 당시에 문자(가림토 문자)를 창제한 사실과 일관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분이 가림토문자를 만드신 가륵단제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도 옛전자를 모방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12000년전에 만들었다고 TV에나왔지만 절대 말도안됩니다 일본의 역사는 1만년전부터시작됐습니다.근데 12000년전이라고 주장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일본의역사]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일본역사에서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식토기[繩文式土器]의 보급에서 연유하여 조몬[繩文]시대라고 부른다. 조몬시대인은 수렵·어획 및 식용식물의 채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인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이 논쟁 끝에 인류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다. 그러나 제작된 조몬식토기에 현저한 지역차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전국토에 걸친 집단을 구성할 만한 결합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시시대하고도 2천년도 전에 -_-문자를 만들었다니 초딩같은 말도안됩니다. 또 하나 제가 밝혀낸사실은! 밑에는 일본 신대문자 위에서 보면 아시겠지만 나 사 하 같은 글자의 "ㅏ"가 의심 됩니다 "다"옆에 있는 "하" 라는 글자가 정말 의심되는군요 ㅅ ㅇㅏ이렇게 썼지만 -_-말도안됩니다 머리좋은분들은 눈치 채셨을 듯 그렇습니다.우리나라 훈민정음은 "하"를 쓸 때 나 ㅏ 짜를 표기할 때 ㅏ를 안쓰고 ㆍ을 붙였습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죠 -_- 일본놈들 순 사기 꾼입니다!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글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건너갔습니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르는데요. 이 무렵에 일본으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지요.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했는데요. 원래는 아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되었습니다.
@인도로 간 한글
가림 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에 인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송호수 교수님이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했지요.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습니다. 구자라트에는 주로 드라비다인(후술)들이 거주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하지요.
가림토 문자가 건너간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환단고기』「단군 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희안한 인종이라고 하지요.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드라비다인은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하는군요. 언어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등.... ^^;
여기서 쌀과 메디, 벼 등을 통해 농업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따라서 쌀과 메디, 벼는 우리말이 인도로 건너간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이 보인다는 군요. 고조선의 과하마가 건너간 모양입니다.
이처럼 고조선시대에 인도와 우리나라는 엄청난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고조선시대는 팍스 코리아시대였어요.(멋지다 ^^)
우리나라는 4천 년 전부터 국제화, 세계화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
가림토문 은 공용문자로 사용되었겠지요.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오해한 것이지요.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가야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왕옥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지요 . 이것이 그 가림토 문자입니다. 분명 "점"이 있습니다 일본 신대문자에는 없는. 일본놈들 순 사기 꾼이지요.
가림토 문자와 우주변화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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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3명) 나도 평가하기 mlks9k8j 조회: 2826 200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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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집일함삼 회삼귀일의 원리. 문자의 근원이 되는 수상(數象)의 이치에 대하여 환단고기에서는 함회집귀지의(含會執歸之義)를 이야기한다. 함(含)이란 집일함삼(執一含三)의 줄인 말로, 머금고 있다, 포함하고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음방(陰方)인 일기(一氣)가 분열발전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양원(陽圓)인 삼신(三神)을 머금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함이란 현재에는 음에 의하여 양이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앞으로 시간의 계기에 의하여 양이 음을 뚫고 탈출하여 분열 발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회(會)라는 것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줄인 말로, 모은다, 분열된 것을 모아서 통일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분열 발전된 양원(陽圓)인 삼신(三神)을 음방(陰方)인 일기(一氣)가 견제하여 성숙 통일하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회라는 것은 현재 삼라만상이 양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 선천에 분열된 양신이 앞으로 후천에 이르면 음기의 포위 작용에 의하여 성숙 통일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일컬어 함회집귀지의(含會執歸之義)라는 하는데, 함회집귀지의란 우주삼라만상이 음양적 체용(體用) 관계로 서로 떨어지지도 갈라지지도 않고 목화토금수로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순환하는 우주변화의 원리로 문자 창제의 근원이 되는 수상(數象)의 원리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또 이르기를 태초에 옛 것을 전함이 다만 입과 혀에만 의존하다가 오랜 후에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다시 그것을 변경하여 글자를 만들었으니, 대저 세계 모든 문자의 근원은 존귀하게 여기고 믿는 나라의 풍속을 근원하여 만들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 함회집귀지의는 한민족 고대 세계관의 중심인 우주 순환 변화원리의 핵을 이루는 너무도 중요한 말이기에 여기서 잠시 부연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이 함회집귀지의에 인류의 모든 종교의 뿌리로서의 신교와, 또한 그 신교의 맥을 중심으로 신교로부터 갈라진 모든 분열된 유 불 선 기타 모든 고등 종교의 진리 정수를 뽑아 모아 통일시키는 제3의 초종교의 정통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종교가 한뿌리인 신교에서 나온 것이 함(含)이고, 지구역사의 봄개벽의 시작과 함께 한뿌리인 신교에서 분열 발전되어 나온 세계의 유 불 선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종교가 다시금 지구역사의 가을 개벽기에 출현하는 제3의 초종교에 의하여 성숙 통일되는 것이 바로 회(會)이다. 그러므로 집일함삼이란 수리적으로 본 뿌리이자 씨앗인 신교의 존립근거이며, 회삼귀일이란 수의 이치로 본 열매맺어 결실된 제3의 신도의 존재 근거로, 이 둘은 서로 갈라지지도 떨어지지도 않고 다만 시간적 선후에 따라 서로 맞물고 순환하는 음양적 체용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함회집귀지의란 곧 원시반본의 다른 말인 것이다.
나. 가림토 11모음과 수토합덕 그럼 이제 회삼귀일 집일함삼의 이치를 담고 있는 가림토 모음의 11자 구성에 숨은 우주변화원리를 좀 더 찾아보도록 하자. 가림토 문자 모음의 11자는 창조개벽에 의해 출현한 만물이 양기운이 주동하는 선천 분열발전의 과정을 거치면, 필연적으로 음기운이 주정하는 후천통일과정에 이르러 술토에 의해 통일되는 이치와 부합한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3장 육기론(171쪽)> 소위 서북토의 내화작용이란 것은 금중에서 수축한 양(木)을 다시 통일할 때에 그것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술토(戌土)로써 우선 보호하며 조화하는 작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수식이 5+6=11이 되는데 이것은 곧 수토합덕(水土合德)하면 그 결과는 공(空)이 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가림토 정음 38자의 모음은 ? ㅣ ㅡ (3글자)와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8글자)를 합하여 11글자로 이루어 졌는데, 이것은 곧 수토합덕하여 공이 되는 술토의 수(數)와 같으며, 또한 술토(戌土)의 5체6용 합덕한 11수는 물(水)의 수(數)로 만물의 통일을 완결하고 만물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수이다. 다시 말하면 가림토 문자 3+8=11개의 모음은 만물의 처음 창조가 이루어지는 동방의 3.8목이, 시간적 계기에 따른 음양 변화에 따라 5토6수가 합덕하는 십십일일지공(十十一一之空)하는 자리, 술토(戌土)에 이르러 만물이 통일을 이루고 귀공(歸空)하는 이치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8장 우주의 본체 (389쪽)> 우주의 본체인 태극은 이와 같이 술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즉 술은 태극의 정신이며, 또한 무극의 진, 즉 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창조의 본체를 태극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태극의 핵심을 이룬 술오공(戌五空) 때문이다. 술이 공의 자격으로서 또는 우주본체의 자격으로서 수를 창조하여 놓게 되면 여기에서 만물이 창조되는 것이다. 우주의 본체를 물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태극을 일태극이라고 함으로써 수(水)의 수(數)와 같이 규정하는 것은 태극이 바로 물이며, 물이 또한 태극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6장 우주의 운동과 변화 (294쪽)> 그런데 이와 같이 변화한 기(氣)는 형(形)을 이루는 요소가 되므로 여기에서 기(氣)는 운(運)으로 성상(成象)한 인소(因素)를 내포하고 내외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물(物)로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물이 화성(化成)하는 것을 오륙합덕운동(五六合德運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삼팔목(三八木)은 왜 이와 같이 토금수합덕(土金水合德)으로써 이루어져야만 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한다.
다. 가림토 모음과 수의 성립 수상으로 본 가림토 문자 모음은 이것 외에 수열 생성의 법칙과도 일치한다.
<우주변화의원리 제4장 상과 수 (200쪽)> 만물이 생장한다는 말은 속에 있는 양이 표면에 있는 음형을 확장하면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서로 투쟁 상태 하에서 생장하는 것이므로 물의 역향(逆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수(數)의 발전상태에서 보면 만물의 발전이 바로 수의 발전, 즉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가 역향(늘어나가는 것)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예를 들면 가림토 문자 모음의 경우 3모음 ? ㅣ ㅡ 와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8모음으로 구분되는 것은, 생수3에 만물의 순수정기인 중수 5에 얽매여서 성수인 8이 자화되어 나온 수열생성의 법칙이 깃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4장 상과 수 (199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五)는 모든 생수(生數)의 순수정기다. 정기라는 개념은 생명과 정신을 얽어매는 요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수는 또다시 오에 얽어맬 수밖에 없다. 그런즉 소위 성수(成數)라는 것은 생수의 대표(즉 순수정기)인 오(토)에 의하여 유폐당한 생수의 상태다.
다시 말하면, 十의 각 끝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수화금목의 생수 1. 2. 3. 4에 해당하는 ㅏ ㅓ ㅜ ㅗ가, 모든 생수의 순수정기이며 모든 모음이 모여 이루는 十의 가운데에 위치한 중수 5토인 ? 에 얽어매여, 수화금목의 성수인 6. 7. 8. 9에 대비되는 ㅑ ㅕ ㅠ ㅛ로 자라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수인 세 개의 문자 ? ㅣ ㅡ가 순수정기 오토에 자화되어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의 여덟 문자로 성장한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 가림토 문자를 언급하는 서두에서, 문자는 함회집귀지의하는 수상의 원리를 따라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그 서두에 신시의 산가지와 치우의 투전목을 언급하여 가림토 문자는 다시 한 번 수상의 이치를 따랐음을 밝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알아본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수상의 이치가 가림토 문자 창제 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라. 가림토 삼모음과 삼극설 그리고 위에서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ㅣ ㅡ 가 십(十)자의 ㅣ ㅡ 이고, ? 가 십(十)자의 정중앙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4장 상과수(193쪽)> 시공간이란 의미는 시의 조절과 공의 수장작용이 간이라는 十자의 교차점의 작용에 의하여 비약할 수도 있으며 또는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4장 상과 수 (207쪽)> 이것이 바로 일(一)의 본체는 변화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즉 해자축(亥子丑)이 十數가 되는 것은 자의 작용 가치는 子(一)이면서 십(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축이 경사진 현실적인 조건에서 보면 해자축의 목적은 화(火)를 만들려는데 있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7장 정신론(319쪽)> 구궁팔풍과 태극의 핵심처가 십(十)자의 중(中)인 것을 밝혀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구궁의 중인 십자의 중심점은 태극의 정신이므로 이것이 팔방에서 운동하는 율려(律呂)의 주재지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좀더 부연하여 보면 주재지위인 십자의 중심일점, 즉 율려의 운동본체인 태극의 핵심처가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을 계고해 보면 그것이 바로 무극인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한동석 선생은 ㅣ ㅡ 가 구성하는 십(十)자가 무극을 상징하고, 십자의 중심점인 ? 가 십(十)자의 정중앙으로 태극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하였다. 이 말은 곧 가림토 문자는 창제과정에서 수상 외에 수상의 원리에 의해 뒷받침 되는 삼극인, 무극 태극 황극의 원리가 창제원리로 작용하였음을 뒷받침 해주는 글이라 하겠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일기(一氣)는 셋(三)으로 나누어지니 기(氣)는 즉 극(極)이며 극은 즉 무(無)이다. 무릇 천(天)의 근원한 바는 곧 삼극(三極)을 꿰어 허(虛)하고, 이어서 공(空)하니 이는 곧 안과 밖을 아우르니 그러한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8장 우주의 본체 (385쪽)> 이것이 바로 우주가 기(氣)를 분산하지 않았더라면 통일은 이루어지질 수가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일태극(一太極)과 십무극(十無極)을 신축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리켜서 합하면 토(土)라 거중(居中)이 오(五)니 황극(皇極)이라고 한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제7장 정신론 (319쪽)> 그런데 이것을 좀더 부연하여 보면 주재지위인 ‘十’‘자의 중심일점, 즉 율려(律呂)의 운동본체인 태극의 핵심처는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을 계고해 보면 그것은 바로 무극(無極)인 것이다. 무극이란 것은 태극(太極)이 음양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상을 말하는 것인 바, 그것은 바로 승부와 모순이 없는 십일합덕지토성(十一合德之土性)인 곤덕(坤德)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극의 핵심을 이룬 십자의 중(中)도 그 기원을 여기서 얻음으로써 율려의 핵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왕괘도의 곤(坤)의 위가 바로 무극의 위(位)인즉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한 바의 무(無)인 것이다. 또한 건(乾)의 위가 바로 태극이니 이것은 불교가 말하는 바의 공(空)인 것이다.
우리조상이 그때부터 과학적인 사고가 있었다는걸 보여주는... 우리가 옛날 <환국>을 세웠던 <환족>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들도 모르고 옛날 삼국시대도 확실한 자료가 없으니 (다 중국에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짜피 중국의 서쪽은 우리나라차지가 될 것이니까요. 믿어보세요.)
고구려가 자기네 땅이라고 설치는 중국을 막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자! 이제 가림토 문자에 대해 보십시오.
신시(神市: 배달국)시대에 자부(紫府)선생이 만든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7일 동안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 책력에 따라 첫 날에는 천신(天神)에게, 둘째 날에는 월신(月神)에게, 셋 째 날에는 수신(水神)에게, 네 번째 날에는 화신(火神)에게, 다섯 째 날에는 목신(木神)에게, 여섯 째 날에는 금신(金神)에게, 일곱 째 날에는 토신(土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이미 사용해 오던 옛 글(古篆)을 틀을 새로이 짜고,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문자 체계를 만들어 재 창제한 것이지, 처음으로 창제한 것은 아닌 것이다.
기원 전 2183년 고조선 제3대
기원 전 2183년 고조선 제3대 가륵단군이 당시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었지만 아직 나라의 풍속이 하나같지 않고 또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려,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가 어려워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 문자라 하였다.
〈태백일사〉 중 「신시본기」편을 보자.
신시(神市: 배달국)시대에 자부(紫府)선생이 만든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7일 동안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 책력에 따라 첫 날에는 천신(天神)에게, 둘째 날에는 월신(月神)에게, 셋 째 날에는 수신(水神)에게, 네 번째 날에는 화신(火神)에게, 다섯 째 날에는 목신(木神)에게, 여섯 째 날에는 금신(金神)에게, 일곱 째 날에는 토신(土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견갑골 유물에 새겨진 한글 모양의 문자는 당시 우리 겨레가 칠회제신 때마다 사용했던 '가림토(加臨土)문자'의 축문(祝文)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제상에 개고기를 올렸다. 상나라 유적지를 발굴하던 중 주거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개 뼈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주(周)나라 때의 국가행사를 기록한 《주례(周禮)》에도 제사상에 개고기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은 양자강 이남에서는 개고기를 먹지만, 이북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런데 양자강 북쪽에서는 개고기가 조선족들의 요리로 통하고 있다.
따라서 동(東)자와 가(家)자와 마찬가지로 그릇을 의미하는 '기(器)'자도 우리 민족이 개고기를 즐겨 먹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해 진다. 기(器)자는 개 한 마리를 중간에 두고 네명의 입(口)이 둘러싸고 있는 상형(象形)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녹도문외에도 가림토 또는 가림다(加臨多)로 불리는 문자가 또 있었다. 이 문자는 훈민정음의 고전(古篆)이다. 《세종실록》25년 계해 12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발표문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古篆)자를 모방하였다.
이것은 곧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새롭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옛 글자(古篆)를 본 떠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을 대표하던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만리(崔萬理)도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글자들이 비록 옛 전문(篆文)을 모방하고 글자를 합쳐서 소리를 내나 모두 다 옛 것과 반대이다.
신경준(申景濬:1712∼1781년)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에 옛적에 통속으로 쓰던 문자가 있었으나 그 수가 불비(不備) 하고 그 형틀이 무법하여 제대로 일반으로 쓰이지 못하더니… 우리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해례본(解例本)에 나오는 정인지의 글과 최만리의 글 등은 한결같이 훈민정음이 나오기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이미 사용해 오던 옛 글(古篆)을 틀을 새로이 짜고,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문자 체계를 만들어 재 창제한 것이지, 처음으로 창제한 것은 아닌 것이다. 〈단군세기〉에 창제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원 전 2183년 고조선 제3대 가륵단군이 당시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었지만 아직 나라의 풍속이 하나같지 않고 또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려,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가 어려워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 문자라 하였다.
당시 상상을 초월한 기동력으로
당대 강대국 로마제국군 40만을 단 한방에 전멸 시킨 '공포의 대상'
375년, 훈족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찬란한 로마 문명이 476년 게르만족인 오토아케르에게 멸망케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2004.3.2)으로 설명했다. 흉노(匈奴) 중 서천(西遷)한 훈족과 동천(東遷)한 한민족(가야신라)이 같은 민족의 일파임도 밝혔는데 이는 근래 많은 언론에서 신라는 기마민족 흉노의 일파라고 발표되는 논지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훈족이 갑자기 유럽 땅에 나타났고 100년도 안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지난 1500년 동안 서구 사람들은 편견으로 가득 찬 매우 적대적인 관점에서 훈족을 다루었다. 유럽인들은 야만인 훈족을 경멸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기독교인들은 훈족을 이교도 무리로, 그들의 지도자인 아틸라(395∼453)를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 보낸 도구로 보았다.
훈족의 기병을 묘사한 부조.
흉노, 훈, 한민족이 친연성(親緣性)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집단이 한민족이라는 것은 한민족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외침만 받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추위가 만든 서유럽과의 조우>
아시아 대륙에서 활약하던 흉노가 4차에 걸쳐 서천한 후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서쪽에 있는 고트족의 영지로 침공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만화 같은 사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훈족과 고트족은 크리미아 반도를 두고 오랜 세월을 가까운 데서 거주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훈족이 기르던 어린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쏘이자 놀라서 늪지대를 가로질러 먼 해변으로 달려갔다. 한 목동이 암소를 쫓아갔다 돌아와서 자기가 목격한 일을 부족민들에게 이야기했다. 6세기 고트족의 역사가로 게르만족에 대한 『게피다이 족의 기원과 관습』을 쓴 요르다네스(Jordanes)는 그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훈제국 강역도.
‘목동의 이야기를 듣고 훈족이 바다로 생각하여 건널 수 없다고 여겼던 메오티아 늪지대를 걸어갔다. 그러자 이제까지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던 스키타이 땅이 눈앞에 펼쳐졌다. 메오티아 늪지대 너머에 다른 땅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훈족은 스키타이 땅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보건데 훈족의 조상신인 악령들이 스키타이인들을 시샘하는 마음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훈족이 생각지도 못한 광대한 땅을 발견하였지만 곧바로 서방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훈족들의 서방 이주를 부채질한 것은 기후 탓으로 보인다. 훈족이 서방에 넓은 초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지 얼마 안되어 공교롭게도 혹독한 겨울이 닥쳐왔고 모든 강들이 얼자 새로운 땅으로 이동을 단행했던 것이다.
물론 훈족의 서방 진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우선 강을 건너자마자 광대한 초원지대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여러 민족과 부딪쳤다. 훈족과 부딪힌 민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알란족(Alans)이다. 알란인들은 훈족과 370년대에 큰 전투를 벌여 패배하자 훈족의 군대에 편입된다. 학자들은 이 알란족들을 이란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훈족이 서진하는 과정에서 맞부닥친 또 다른 민족은 유명한 사르마타이족(Sarmatians)으로 이들은 역사상 가장 용맹한 민족 중에 하나였다는 스키타이를 격파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인도유럽어 계통의 민족으로 알란족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훈족이 서방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는데 그 중 스키리족은 한때 남부 러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훈족의 주력 세력 중 하나였다.
훈족의 머리빗.
훈족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에 발견된 훈족의 유골들을 보면 훈족의 4분의 1 가량만이 순수한 아시아 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훈족’이란 용어는 원래의 훈족으로 불린 지배집단에 의해 지휘된 모든 부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거론할 때도 훈족 전체가 한민족과 같은 민족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틸라 등 핵심 지배집단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훈족은 ‘신의 징벌’을 위한 도구>
현재도 유럽인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정복했던 칭기스칸의 몽골족을 역사상 가장 야만스러운 민족이라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이 유목민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화를 기피하는데 그 중에서도 훈족에 대한 경멸감은 극심하다.
유럽인들이 훈족에 대해 특별히 심한 편견을 갖는 것은 야만인의 대명사인 훈족이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 세계이자 초강대국인 로마, 이란 등으로 침입해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럽인들은 아직도 훈족의 출현, 동기, 퇴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렇다면 야만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고대세계는 자신들의 생활이 어떠하든 자신과는 다른 풍습을 갖고 있는 민족을 야만인으로 불렀다. 켈트족은 오랫동안 로마인들로부터 야만인이었고, 게르만족은 갈리아인에게, 슬라브족은 게르만인들에게 야만인이었다. 중국은 아예 자신들의 변방에 살고 있는 민족 전체를 이적융만(夷狄戎蠻)이라 불렀다.
훈족 버클.
유목민들의 생활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가뭄이 들면 말라버린 우물을 찾아 황폐한 초원지대를 떠나 농경지대 부근, 즉 정주문명이 이룩한 도시들을 호시탐탐 노린다. 일반적으로 초원지대는 대략 10년∼12년마다(흔히 몽골에서는 원숭이띠 해에 가뭄이 든다고 한다) 가뭄을 비롯한 천연재해가 닥치므로 그들이 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정주문명을 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위 농경지역에 대한 유목민들의 주기적인 침투는 자연법칙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들은 혹독한 환경에 항시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경민족에 대해서는 비교적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서로마제국은 60만 명이나 되는 제국군이 상비군으로 있었음에도 단 몇 만이 되지 않는 야만족 즉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하였다. 유럽인들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으로 바로 야만족 게르만족을 몰아낸 장본인이 게르만족보다 더 야만족인 훈족이 아시아인이라는 점이다.
훈족은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변발이거나 한쪽을 빡빡 밀어낸 머리를 뒤흔들고 유목민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기마군단에 의해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이 위협 당하자 훈족은 인간이 아니라 마치 동물과 같다고 적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백전백승의 훈족>
훈족이 사상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유럽의 패자가 된 배경으로는 당시의 유럽 세계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신기술과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훈족이 사용한 말이다.
오늘날 사냥용 말보다 어깨 폭이 20센티미터 가량 더 좁은 훈족의 말들은 스피드와 지구력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가지 면에서 당대 서구의 말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했다. 그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제외하고는 매일 1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또한 말들이 눈밭에서도 풀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육하는데도 큰 힘이 들지 않았다.
훈족의 마상 전투. 달리는 말 위에서 뒤돌아 쏘는 훈족의 전투법(파르티아 기사법)은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훈족의 아이들은 걷는 법을 배우자마자 이내 말 타는 법을 배웠다. 훈족은 말을 탄 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용변을 보고, 심지어는 중요한 국사도 처리했다. 로마인들은 기마병과 말이 그렇게 혼연일체가 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반인반마(켄타우로스)의 괴물이라도 훈족만큼 말을 잘 탈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훈족의 전사는 한 명 당 말 6∼7마리를 가지고 다녔으므로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둘째 나무 안장이다. 유럽인들의 눈에 말과 기수가 한 몸으로 보이는 것은 안장 때문이었다. 훈족의 안장은 로마인의 안장처럼 말의 몸통에 가죽끈으로 잡아매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나무 버팀목이 있었다. 앞뒤로 높이 올려진 우뚝한 기둥과 안장머리는 말이 달릴 때에도 기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에 반해 로마의 기병은 전투 도중 균형을 잃고 낙마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셋째 등자이다. 훈족은 아시아에서 안장 외에도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등자를 도입했다. 훈족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안장에 부착했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사방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하는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사르마타이가 발명했다는 설도 있지만 훈족의 발명설이 더 신빙성있다고 추정한다(중국의 한(漢)대 부조에서는 등자가 보이지 않음).
넷째 복합궁(Composite Bow)과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을 사용했다.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연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활과 화살에 대해서는 「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2004.3.2)에서 이미 설명했다.
5세기경 훈족이 사용한 투구(『터키사』).
다섯째 훈족의 기동력이다. 훈족은 속전속결을 위주로 하는 기마민족인데다가 말 위에서 허리를 세우고 타면서도 자유자재로 위력적인 활을 사용했다. 그들은 멀리에서 적을 쏘아 맞추고 후퇴하면서 말 뒤로 몸을 돌려 활을 쏘기도 하는데 이를 ‘파르티아식 활쏘기(Parthian shaft)’라고 부른다. 이 기사법(騎射法)은 초원을 무대로 한 경장기병부대의 전법으로 기동력이 둔한 적을 만날 경우 여러 방면에서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면 갑자기 일제히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분산하면서 뒤돌아보듯이 좌후방으로 화살을 일제히 발사한 뒤 멀리 이탈해가기를 반복하여 적을 교란시킨 후 격멸하는 전투법이다. 고구려의 기마수렵도에 보이는 활쏘는 장면도 이런 기사법이다.
훈족의 공격군은 대략 500∼10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우선 300미터 거리에서 불화살을 날리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 다음에 물러나는 척하다가 다시 지그재그식으로 달려들었다. 훈족은 등자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활을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쏘았으므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일고 있는 먼지구름을 통해, 다음에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의해 잔뜩 공포심을 느끼다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면 정규육박전에 익숙한 유럽인들은 혼란에 빠지면서 훈족의 공격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화살을 피한 적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훈족 기병의 양날이 달린 긴 검이었다. 당시 훈족이 사용한 칼 역시 유럽의 칼을 능가했다. 훈족의 장검은 칼자루를 가로지르는 십자형 금속 칼 콧등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적의 몸을 깊숙이 찌를 때, 훈족 전사의 손을 보호했다.
훈족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전술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육박전을 피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규모 인원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훈족의 공격에 로마를 비롯한 유럽인들도 방어수단을 강구했다. 로마 군사들이 화살 공격에 다소간 대비할 수 있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기 시작했지만 매우 거추장스러워 오히려 전력을 떨어뜨렸다. 유럽에 번개와 같이 나타난 천하무적인 훈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으므로 훈족이 백전백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대의 이동속도이다.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군대가 나타나면 기습이 된다. 예상할 수 없는 수의 병력이 순간적으로 모이면 대항할 엄두도 못내고 지리멸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승전의 3대 요인을 집중·기동·기습으로 표현한다.
훈족 기마군단이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병과 보급병의 구별을 두지 않고 모두 전투병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한 병사가 6∼7 마리의 말을 몰고 다녔으므로 훈족 기마군단의 진격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농경민족의 군대는 전투병력과 보급병으로 나뉘어진다. 이런 군대의 전체 평균 이동속도는 가장 느림보인 보급병에 맞춰져야 한다. 전투병이 홀로 적진 속에 들어갔다가 보급선이 차단된다면 장기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섬멸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조갑제는 이런 상황을 물리학 공식으로 F(힘)= M(질량) V2(속도) 즉 군대의 파괴력은 규모(M)에 정비례하지만 이동속도에는 제곱에 비례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전투의 원리를 극대화한 것이 훈족의 기마군단이므로 이들에 의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는 일이다
요약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족(韓族)이 쓰는 언어. 남한·북한의 약 7000만 명이 공식 국어로 사용하며, 중국·일본·미국 등지의 약 350만 해외교포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
설명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족(韓族)이 쓰는 언어. 남한·북한의 약 7000만 명이 공식 국어로 사용하며, 중국·일본·미국 등지의 약 350만 해외교포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 전세계 6000여 개 언어 가운데 언어사용인구가 20위 안에 든다. 특히 고대로부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온 동아시아에서 한국어는 중국어·일본어와 함께 3대 문명어를 이루고 있다.
한국어의 계통
한국어의 기초적 요소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증명되지 못하였으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한국어 계통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에는 우랄알타이어족·일본어·중국어·아이누어·드라비다제어를 비롯, 인도유럽제어 등에 한국어를 결부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우랄알타이어족이 과학적 근거의 부족으로 20세기에 들어와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나뉜 뒤에는 알타이계통설로 발전하였다. 시베리아로부터 볼가강 유역에 걸친 퉁구스제어·몽골제어·터키제어는 19세기 이후 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되었는데, 알타이어족에 한국어가 첨가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공통적인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공통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모음조화: 알타이제어와 한국어는 기원적으로 후설모음(後舌母音)과 전설모음의 대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세부규칙에 이르기까지 일치를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 터키어와 몽골어의 모음조화 규칙은 비슷하고 퉁구스어와 한국어의 모음조화는 다른 것 같지만, 이는 역사적 변화 때문일 뿐 기원적으로는 같은 유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두음법칙: 어두 위치에 오는 자음에 가해지는 특수한 제약 규칙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유음(流音)과 자음군(子音群)이 어두에 오지 않는다는 규칙이다. 한국어에서의 유음 <ㄹ>과 알타이제어에서의 유음 <r·l>로 시작되는 단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세한국어에 어두자음군이 존재하긴 하였으나 곧 된소리로 변해간 일시적 현상으로 보인다.
③ 교착성: 언어를 형태적으로 분류하면 굴절어(屈折語)·교착어·고립어(孤立語)로 나뉘는데, 한국어와 알타이제어는 모든 단어의 파생과 굴절이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착어에 속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첫째 접미사의 연결이 매우 기계적이어서 이들 언어는 규칙적이고, 둘째 모든 접미사는 단일한 기능을 가져 인도유럽제어처럼 한 어미가 둘 이상의 기능을 가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④ 모음교체·자음교체가 없는 것: 교착어의 특징과 관련되는 것으로 접미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도유럽제어에서처럼 모음교체 및 자음교체가 문법적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
⑤ 관계대명사·접속사가 없는 것: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공통적 특징이며, 그것을 보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⑥ 부동사(副動詞)의 존재: 인도유럽제어에서 2개의 동사는 보통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에서는 선행동사가 부동사형을 취함으로써 접속사의 부재를 보충한다. 예를 들면 한국어의 <날아 가다> <먹고 가다> 등의 <아> <고>와 같은 어미가 그대로 접속사 구실을 하며, 몽골어의 경우 nis-un ire-be(날아 왔다), abu-ra ire-be(가지러 왔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디 접속사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어와 알타이제어는 접속사라 할 만한 것이 더러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이처럼 한국어·알타이제어 사이에는 공통적인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물론 구조적 특징은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만으로 친족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한국어·알타이제어처럼 여러 가지 매우 중요한 특징들이 일치하는 경우 친족관계일 개연성은 매우 높다. 한편 언어 비교방법의 기본이 되며 친족관계증명의 가장 높은 신빙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음운대응이 있다. 차용으로 들어온 단어가 아니면서 서로 공통되는 의미를 가지고 모음이나 자음의 대응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어와 알타이어 비교에 도움을 주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한국어 <아래>, 에벤키어 <alas(脚)>, 몽골어 <ala(사타구니)>, 고대터키어 <al(下面)>
② 중세한국어 < (馬)>, 만주어 <morin(馬)>, 몽골어 <morin(馬)>
③ 중세한국어 <믈(水)>, 만주어 <muke(水)>, 에벤키어 <m?(水)>, 몽골어 <moren(江)>
④ 중세한국어 < -(注)>, 만주어 <fusu-(물뿌리다)>, 몽구르어 <fuzuru-(붓다)>, 몽골어 <usur-(뿌리다)>, 터키어 <uskur-(입으로 뿜다)>
⑤ 한국어 <발(足)>, 골디어 <palgan(足)>, 에벤키어 <halgan(足)>
⑥ 중세한국어 <흙(土)>, 골디어 <siru(砂)>, 솔롱어 <siruktan(砂)>, 몽골어 <siru ai(土, 먼지)>,
⑦ 중세한국어 <(눈)보라>, 중세몽골어 <boro'an(눈보라)>, 야쿠트어 <burx?n(눈보라)>
⑧ 한국어 <-로(向格助詞)>, 고대터키어 <-ruu(ab-im-ru;내 집으로)>, 몽골어 <-ru(ina-ru;이쪽)> 등의 예들이 있다.
이 밖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 동명사의 어미가 있다. 알타이제어나 한국어에서 동명사는 거의 모든 동사형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알타이제어의 비교연구에서 밝혀진 동명사의 어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n, -r, -m> 등이다. 이들 반사형(反射形)들은 알타이제어에서 동명사의 어미나 동사파생명사를 형성하는 접미사로 쓰이고 있는데, 한국어에서도 바로 이러한 반사형들이 발견된다. 한국어의 예를 들어보면 현대문법에서 관형사형 어미인 <-(으)ㄴ>이나 <-(으)ㄹ>은 본래 동명사의 어미였던 것으로 보이며, 중세한국어에 분명한 증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용비어천가》 제11장에 <虞芮質成 로> <威化振旅 시 로>가 보이는데 이들은 각각 < · 신>이라는 동명사에 조사 < 로>가 붙은 것이다. 그리고 <-(으)ㅁ>은 중세한국어에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동명사의 어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제주도 방언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3개 어미는 과거(완료)·미래(추측)·현재(계속)의 의미를 보여주는데, 알타이제어의 <-n, -r, -m>의 용법도 이와 매우 가까운 의미를 지녔다. 이들 3개 어미가 모두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구조가 합치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치가 결코 우연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볼 때 한국어의 계통은 알타이제어에서 찾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형성과 시대구분
언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 자체의 역동성에 의하여 변화하며, 한국어도 그 예외는 아니다. 고대에 오늘날의 한반도와 만주(滿洲)를 연결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여러 언어들이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고대 사적의 막연한 기록에 의해서만 겨우 그 분포와 상호관계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에 의하면 동이(東夷;중국의 북동부지방)에는 숙신계(肅愼系)·부여계(扶餘系)·한계(韓系)의 3가지 어군이 있었으며 부여계제어로는 부여어·고구려어·옥저어(沃沮語)·예어 등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으로 보아 언어 등 여러 가지가 부여와 같고, 동옥저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으며 예도 언어가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다. 한편 읍루에 대해서는 사람 모습은 부여와 비슷하나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고 하였다. 숙신의 후신이 읍루이고 이로부터 물길(勿吉)·말갈로 계통이 이어지며 이들과 부여계제어의 구별이 중국 사적에 일관되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숙신족은 퉁구스족의 어느 선조로 보이며 이는 이미 고대에 한국어와 퉁구스제어가 확연히 구별되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한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쓰인 언어에 관해서는 자료가 매우 적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극심한 언어의 분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과 변한은 언어가 비슷하고 마한은 다르다고 기록되었으며, 《후한서》 동이전은 진한과 변한에 대해 언어와 풍속에 다름이 있다고 하였다. 상고시대 언어사에서 제기되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부여계제어와 한계(韓系)제어의 상호관계에 관한 것인데, 중국이나 한국의 사적 어디에도 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한국어는 대개 시기별로 고대한국어·중세한국어·근대한국어·현대한국어로 분류된다. 고대한국어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약 1000년 동안의 한국어를 가리키며, 신라어 말고는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어 그 전반적인 모습을 알기 어렵다. 중세한국어는 고려 건국(936)부터 16세기 말까지의 한국어를 가리킨다. 15세기 중엽(1446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한국어를 전반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중세한국어를 전기 중세한국어와 후기 중세한국어로 구분한다. 근대한국어는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의 한국어를 가리킨다. 다만 현재 쓰이는 한국어는 현대한국어라 하여 근대한국어와 구분하며, 그 시기는 멀리 잡으면 갑오개혁 이후부터이지만 대체로 8·15 전후부터로 본다.
고대한국어
고대 한반도 및 만주지역 일부에서는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가 연립해 있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로 한반도에서는 신라어가 통용되게 되었다. 이 언어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국내외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인명·지명 등의 표기와 이두문(吏讀文)의 표기 및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의 지명표기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살필 수 있는데, 연구대상으로 삼을 어휘수는 많지 않지만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비슷하고 고구려어는 이들과 뚜렷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신라어는 이들 자료 외에도 향가의 차자표기(借字表記) 자료, 고대일본어에 반영된 차용어 등에 나타나 그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어
고구려어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 등 고유명사의 표기에서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권37의 <買忽一云水城> <水谷城縣一云買旦忽>에서 <買·忽·旦>은 각각 <水·城·谷>을 뜻하는 고구려어 단어이며 물(水)의 고구려어는 mai나 mie(買), 城은 홀(忽), 골짜기(谷)는 tan(旦·呑·頓) 등으로 재구성된다. 고구려어는 분명히 알타이어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mie(水)는 에벤키어 m?(水), 중세몽골어 moren(江·海), 중세한국어 믈(水), 고대일본어 midu(水) 등과 매우 비슷하다. 한편 <王逢縣一云皆伯>에서 pak(逢)이란 동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만주어 baha-(得), 에벤키어 baka-(찾다), 터키어 bak(보다) 등과 일치하며 kai<皆(王)>는 부여 관명의 ka(加), 몽골어 qa an, qan, 신라어 관명의<翰, 干> 등과 일치한다. 특히 고구려어 어휘는 신라어 및 중세한국어·일본어·퉁구스어 등의 어휘와 공통요소가 많다. 예를 들면 고구려어의 奴·惱·內·那(土·壤)는 nua로 재구성되는데 이는 남방 퉁구스제어의 na(地), 신라어의 內(世), 중세한국어의 나랗(國, 랗은 접미사), 고대일본어의 na(地)와 비교된다. 중세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현저한 어휘의 일치가 보인다. 고구려어의 es 於斯(橫)는 중세한국어 엇(橫)과 일치하고 <k m r 今勿(黑) → 검-(黑)> <paxe 波兮, pa'i 波衣, 巴衣(巖)→ 바회(巖)> <suni 首泥(峰) → 수늙(嶺)> <?u 首(牛) → 쇼(牛)> 등은 서로 일치한다. 한편 고구려어는 일본어와도 많은 공통점이 있다. 고구려어의 tan·tuan <旦·呑·頓(谷)>, usaxam 烏斯含(兎), namer 乃勿(鉛) 등은 고대일본어의 tani(谷), usagi(兎), namari(鉛) 등과 음운에 있어 각각 대응한다. 특히 고구려어 수사로 mir 密(三)·uc 于次(五)·nan n 難隱(七)·t k 德(十)이 확인되는데, 이들과 고대일본어 mi(三)·itu(五)·nana(七)·towo(十)와의 유사함은 특기할 만하다. 알타이제어 사이에는 수사의 일치가 매우 드문데, 이 사실은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분화 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위의 예들을 종합해 볼 때 고구려어는 분명한 알타이계 언어로 퉁구스제어와 가까운 일면이 있으며, 신라어 및 일본어와 각별한 친족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어와 알타이제어, 특히 퉁구스제어의 관계는 신라어와 알타이제어의 관계보다 훨씬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고구려어가 알타이제어와 신라어의 사이에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신라어·일본어의 관점에서 보면 고구려어는 가장 가까운 친족관계를 보여주는 언어이다.
백제어
전하는 자료가 거의 없어 그 단편적인 모습만 추정할 수 있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대체로 같다(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고 하였는데 이는 백제의 지배계급인 부여족의 언어에 관한 것으로 짐작된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는 <임금의 성은 부여씨(夫餘氏)로 eraha(於羅瑕)라 이름하며 백성들은 kenkilci(?吉支)라 부른다>라고 하여 지배계급의 부여계 언어와 백성들이 쓴 한계(韓系)제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어는 신라어와 매우 가까웠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지배계급 언어가 피지배계급의 언어를 동화시키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어는 마한어(馬韓語)의 계속으로서 부여계 언어의 상층을 지닌 점을 특징으로 한다. 백제어 자료도 대부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남아 전하며, 지명의 특징으로 puri(夫里)를 들 수 있다. 이는 신라지명 p r(火)와 같은 것으로 고구려 지명 <忽>과 대조된다. 또한 백제어는 신라어와 달리 어말모음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그 밖에 곰을 고마(熊), 돌(石)을 turak(珍惡), 새(新)를 sa(沙), <맑->을 murke(勿居)라고 하여 백제어 어휘는 신라어 및 중세한국어와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신라어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어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라어 중심의 언어통일이기도 하였다. 중세한국어가 신라어의 기반 위에 성립된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날 전하는 신라어 자료는 고구려어·백제어 자료보다 풍부하나 그 음운·문법·어휘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신라어의 주요자료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향가(鄕歌)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인명·지명·관명 등과 금석문(金石文)에 나타난 이두(吏讀) 등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볼 때 신라어는 중세한국어와 전반적인 일치를 보인다. 이는 중세한국어가 신라어를 근간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한자를 받아들였으나 한자로 자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가장 발달하였다. 신라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차용하여 만든 표기법으로 이두와 향찰(鄕札)이 있었다. 이두는 문법형태 파악에 큰 구실을 하며, 향찰은 단어뿐 아니라 문장 모습까지 보여준다.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차자표기는 규칙적이어서 어떤 1음 표기에 동원되는 한자는 고유명사의 표기에서나 향찰에서나 거의 통일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a → 阿, i → 伊, na → 乃·奈·那, ra → 羅, ta → 多, ki → 己·只, ri → 利·理·里, ku → 古, tu → 刀·道, kan → 干, han → 翰, mil → 密 등이 있다. 한편 어떤 한자들을 음독(音讀)으로 읽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일정하게 어떤 1가지 음만 나타낸 것으로 良 → 라 (또는 아/어), → 며( 는 彌의 약자, <-며>는 연결어미), 遣 → -구(연결어미, 현대한국어의 -고), 尸 → ㄹ(받침, 尸의 발음은 <시>), 叱 → -ㅅ(받침, 사이시옷) 등이 있다. 신라어 표기법은 이처럼 음차(音借)에 의한 것 이외에 <쇠, 불(블)>을 (金, 火)로 표기하는 것과 같은 훈차(訓借)에 의한 것도 많았다. 그리고 이른바 말음첨기(末音添記)라 하여 훈차에 의한 표기법에 음차에 의한 글자 하나를 더 첨가하여 그 단어의 말음(末音)을 중복하여 표기하는 방식도 있었다. <밤, 날> 등을 각각 <夜音> <日尸>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음운면에서 정확히 어떤 음운체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자료 부족과 당시 한자음을 정확히 밝혀낼 수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대개 자음체계에 있어 평음과 유기음의 대립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居柒夫>의 <柒(漆)>이나 <佛體>의 <體>가 <ㅊ, ㅌ> 등의 유기음 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된소리계열은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에서는 중세한국어의 <ㅸ> <ㅿ>과 똑같은 음가를 갖지는 않았어도 이들이 <ㅂ> 및 <ㅅ>과 구별되는 음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 모음체계는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7모음체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중모음은 오히려 중세한국어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의 문법적 특징은 이두와 향찰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주격조사 <이(伊·是)>, 속격조사 <의/ (矣·衣) 및 <ㅅ(叱)>, 대격조사(對格助詞) <ㄹ(乙)>과 <홀>, 구격(具格)조사 <루(留)>가 쓰였다. 처격조사로 <中, 良中>이 쓰였는데, 이 가운데 <良中>은 근세의 이두 자료에서 <아 >로 읽고 있어 확실치 않으나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중세한국어와 현대한국어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수조사로 <ㄴ(隱), 두(置)> 등이 보이며, 역시 중세한국어와 일치한다. 활용어미로 관형사형어미 <-ㄴ(隱)>과 <-ㄹ(尸)>이 去隱春(간 봄), 慕理尸心 (그릴 ) 등에서 확인된다. 접속어미로 <-고(古·遺)> <-며( )> <-다가(如可)> 등이 확인되고, 종결어미로 평서문의 <-다(如)>와 의문문의 <-고(古)>가 확인되며, 모두 중세한국어 형태와 일치한다. 경어법의 선어말어미(先語末語尾)로 주체경어의 <-시-(賜)>와 객체경어의 <- -(白)>이 쓰였는데 모두 중세한국어 형태와 일치한다. 다만 중세한국어에서 쓰인 <- / / ->의 교체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대경어법의 어미는 어떤 것이 쓰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중세한국어
중세한국어는 10세기초 고려왕조가 건국된 때부터 16세기말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때까지의 한국어를 일컫는다. 이는 다시 14세기를 경계로 전기 중세한국어와 후기 중세한국어로 나뉜다. 전기 중세한국어에는 고구려어의 흔적도 조금 보이는데, 예를 들면 고구려어의 nam r <乃勿(鉛)>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鉛俗云 那勿>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3세기 <那勿(나 )>이라는 단어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러한 요소는 후기 중세한국어에서는 거의 소멸하였다. 후기 중세한국어는 훈민정음 창제로 그 전모를 거의 파악할 수 있다.
음운
전기 중세한국어의 모음체계는 고대한국어의 모음체계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 >가 < >로, <a>가 <e>로 이동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 전기의 단모음은 다음과 같은 7단모음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후기 중세한국어의 모음체계도 7단모음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15세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 모음추이를 겪어 전 시대와는 다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ㅓ>가 중설(中舌)의 <ㅡ>의 위치로 이동하면서 연쇄적으로 <ㅡ>가 <ㅜ>로, <ㅜ>가 <오>로, <오>가 < >으로 이동하여 막다른 곳에 밀려난 < >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5세기말 < >가 그 음가를 잃어버리는 < >ㅡ>로의 제1단계 비음운화(非音韻化)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5세기 단모음체계는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한국어에는 아직 <ㅐ, ㅔ, ㅚ, ㅟ>가 단모음화하지 않아 단모음은 위의 7개 뿐이었다. 그만큼 중세한국어에는 이중모음이 많았으며 그 체계는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처럼 후기 중세한국어에는 상향 이중모음으로 <y>가 앞선 <ya·y ·yo·yu> 등이 있어서 <ㅑ·ㅕ·ㅛ·ㅠ>로 표기되었다. <y ·y ·yi>에 대한 문자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당시의 중앙어에는 이런 이중모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w>가 앞선 상향 이중모음으로는 <wa·w ·wi>가 있었다. <wa·w >는 <ㅘ·ㅝ>로 표기되었으나 <wi>를 표기할 적절한 방법이 훈민정음에는 없었다. 15세기에 < >가 <wi>로 변화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위(uy)>로 표기되었던 것이다. 하향 이중모음으로는 <y>로 끝난 < y·ay· y·oy·uy> 등이 있어 각각 <ㅣ·ㅐ·ㅔ·ㅚ·ㅟ·ㅢ>로 표기되었다. 자료를 분석해 보면 <iy>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이것 역시 표기할 적절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2모음이 연결되면 ㅏ-ㅏ>ㅏ, ㅓ-ㅓ>ㅓ, -ㅏ>ㅏ, ㅡ-ㅓ>ㅓ, -ㅗ>ㅗ, ㅡ-ㅜ>ㅜ, ㅣ-ㅣ>ㅣ처럼 되는 규칙이 있었다. 중세한국어의 모음 연결규칙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모음조화였다. 물론 모음조화는 중세한국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지만, 특히 이 시기에 그 규칙이 잘 지켜졌다. 중세한국어의 모음조화는 모음이 양모음 < ·ㅗ·ㅏ(ㅛ·ㅑ· ·ㅚ·애)>, 음모음 <ㅡ·ㅜ·ㅓ(ㅠ·ㅕ·ㅢ·ㅝ·ㅔ)>, 중성모음 <ㅣ> 등의 3계열로 나뉘어 양모음은 양모음끼리, 음모음은 음모음끼리 결합하였으며 이때 중성모음은 어느 쪽 모음과도 결합할 수 있었다. 이 규칙은 1단어 안에서 뿐만 아니라 명사와 조사 또는 어간과 어미, 어기(語基;base)와 접미사 사이에도 나타나 그 적용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 >가 <ㅡ>와 대립하였기 때문인데 나중에 이 < >가 소실되면서 모음조화의 적용범위가 훨씬 줄어들었다. 전기 중세한국어의 자음체계는 된소리 계열의 등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된소리는 본래 단어나 형태소의 연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짐작되는데, 예를 들면 고대어에서도 속격의 <叱(ㅅ)>이나 동명사 어미의 <尸(ㄹ)> 뒤에 오는 단어의 두음 <ㅂ·ㄷ·ㅅ·ㅈ·ㄱ> 등이 된소리로 발음되었으리라 짐작되며 이것이 어두에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음운체계 속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어두에도 된소리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유사》에는 아직 어두 자음군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어 후기 중세한국어에 < (米)>로 기록된 어휘가 <菩薩>로, < (女兒)>로 기록된 어휘가 <寶?>으로 표기되어 있어 나중에 < → > < → >과 같이 자음들 사이에 있던 모음이 탈락하면서 점차 어두 자음군이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음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파찰음의 발음이다. 현대 한국어의 <ㅈ>은 [ ] [ ]로 발음되지만 13세기에는 이 발음이 [ts] [dz]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유사》와 《향약구급방》은 <ㅿ(z)>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주며, <새삼> <널삼>으로 읽혀야 할 것들이 후기 중세 문헌에 <새 > <너 >으로 읽혀 14세기 무렵 s>z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s>z의 변화는 이중모음의 부음(副音) y와 r, n과 모음 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일어났음이 확인된다. 한편 <ㅿ>은 음절 끝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ㅸ>은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한국 한자음(東音)에는 순중음과 순경음의 구별이 없어 <ㅸ>과 <ㅂ>을 구별하여 표기할 방법이 없었을 뿐 <ㅸ>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ㅸ>에 있어서도 <ㅿ>에 있어서처럼 확실하지는 않지만 <y> <ㄹ>과 모음 사이에서 [b]>[β]의 변화가 15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음절 끝에서의 자음들은 아직 내파화(內破化)가 일어나지 않아 대부분의 자음대립이 유지되었다. 13세기 중반에는 아마도 <ㅈ>과 <ㅊ>은 중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ㅅ>과 <ㅈ>의 중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ㅎ>도 발음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평음과 유기음이 중화되었던 것으로 가정하면 13세기 중반에 음절 끝 자음의 대립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ㅿ ㆁ ㅈ ㅎ> 등이 있었던 셈이다. 후기 중세한국어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났던 설음(舌音)과 치음 앞에서의 <ㄹ>탈락 현상은 이 시기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마도 15세기초 새로이 생겨난 음운현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한국어의 자음체계는 평음 <ㅂ ㄷ ㅈ ㄱ>과 유기음 <ㅍ ㅌ ㅊ ㅋ>의 대립을 특징으로 하였지만, 어휘에 있어 유기음의 출현, 특히 어두에 있어서는 평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었다. 한편 전기 중세한국어에는 어두에 새로이 나타났던 경음계열이 있었다. 어두의 경음은 <ㅆ>을 포함한 ㅅ계 합용병서와 <ㆅ>로 기록되었으나, 어중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 주로 동명사 어미 <-ㄹ> 밑에서만 쓰였던 각자병서 <ㄲ ㄸ ㅃ ㅉ> 등으로 기록되었다. <ㅎ>의 된소리 <ㆅ>은 본래 <ㅎ혀-(引)>라는 동사어간에만 존재한 것으로 <ㅅ바ㅎ혀-(拔)> <니르ㅎ혀-(起)> <도 ㅎ혀-(廻)>에서처럼 반모음 <j[j]> 앞에만 나타났다. 나중에 <ㆅ>이 <썰물>이나 <켜다>에서처럼 <ㅆ>이나 <ㅋ>으로 바뀐 것을 보면 <ㅎ>과는 구별되는 일종의 된소리였음이 분명하다. 한편 <ㅈ>의 된소리가 어두에 존재한 증거는 보이지 않으며, 특히 초성 합용병서에 <ㅾ>이 없었음이 주목된다. 15세기 문헌에 <ㆀ>이 있었으나 어두에는 없었고 하향 이중모음을 가진 일부 피동 및 사동 어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것도 < ㅇ여 니라> <괴ㅇ여>처럼 [j] 앞에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ㅇ>가 어떤 구체적인 음가를 가지기 어려웠던 만큼 이 각자병서가 어떤 된소리를 나타냈다기보다 모음이 긴장되어 발음되는 상태를 나타낸 정도로 추정된다. 15세기 중반 훈민정음 창제 당년에는 유성마찰음으로 <ㅸ> <ㅿ> <ㅇ>이 한 계열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매우 제한된 분포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 유성적 환경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이 얼마 뒤 소실되고 만 것은 이러한 편재로 구조적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ㅸ>은 《훈민정음》 제자해에서 <입술 가벼이 다물어 후성(喉聲)이 많이 섞인 소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ㅂ>음에 비하여 입술이 덜 다물어지는 양순마찰음 [β]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분포는 매우 제한되어 <사 > <글 > < 리>처럼 모음과 모음 사이, <ㄹ> 및 <ㅿ>과 모음 사이에서만 나타나던 소리였으며 실제로는 유성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ㅸ>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미 소멸되는 과정에 있었고 세조 때 문헌에서는 이미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글 >글왈, 더 >더워처럼 반모음 [w]로 변하였다. <ㅿ>은 < > <몸 > <한 > < 리> < 애(剪)>처럼 모음과 모음 사이, <ㄴ> 및 <ㅁ>과 모음 사이, 모음과 <ㅸ> 및 <ㅇ> 사이에서만 나타났다. 《훈민정음》에서 불청불탁(不淸不濁)의 반치음이라고 하였듯이 유성음으로써 음가는 [z]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ㅿ>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러 영(零;zero)으로 바뀌어 < > 이> <어버 >어버이> < > > 등에서처럼 아무 음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탈락하고 말았다. <ㅇ>은 기능에 따라 어두음이 모음임을 표시하거나 어중에서 두 모음 사이에 쓰여 서로 다른 음절에 속함을 표시하는 것과, 하나의 자음 역할을 한 것 등 2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ㅇ>의 소실은 먼저 <ㅿ ㅇ>에서 일어났다. 15세기 < 애> < 위> 등은 16세기 < > <거 > 등으로 나타나며, 이들은 <ㅇ>의 소실로 <ㅿ>이 제2음절의 두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ㄹ ㅇ>은 명사에 있어서는 16세기 말까지 변함이 없었으나 동사활용에 있어서는 <ㄹ ㄹ>로 변하였다. 위의 예들을 토대로 볼 때 15세기 자음체계는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한국어에 있어서도 폐쇄음과 파찰음은 어두에서 무성음 [p, t, k, ts]로, 모음 사이를 비롯한 유성적 환경에서는 유성음 [b, d, g, dz]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ㅇ>과 <ㄹ>이 어두에 올 수 없었음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어두에 2자음이 올 수 있었던 것은 후기 중세한국어의 특징적인 면으로, 그것은 <ㅂ>과 <ㅄ>계의 합용병서<ㅳ, ㅄ, ㅶ, ㅷ (ㅴ ㅵ)> 등으로 표기되었다. 예를 들면 (意), -(躍), (米), (種), (隻), -(彈), (蜜), (時) 등이 있었는데, <ㅂ>계는 <pt, ps> 등을 나타냈고 <ㅂㅅ>계의 <ㅂ>도 발음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 어두 자음군은 안정된 하나의 자음상태를 지향하여 17세기부터 점차 된소리로 바뀌어 갔다. 단자음의 경우 음절 끝 위치에서 완전히 내파적으로 발음되어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의 8자음이 발음될 수 있었다. 또한 <ㅿ>은 <ㅇ>이 선행한 위치에서는 제 음가대로 실현될 수 있었지만 16세기 초에는 <ㅿ>이 소멸하여 음가가 변하였고, 한편 <ㅅ>과 <ㄷ>이 중화되어 음절 끝 자음체계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ㅇ> 7자음만이 발음되었다. 복자음(複子音)의 경우 <ㄹ ㄴ ㅁ> 뒤에서는 다 발음된 듯 보이며, <ㄹㅌ·ㄹㅍ> <ㄴㅈ> <ㅁㅊ> 등의 2번째 자음 <ㅌ ㅍ ㅈ ㅊ> 등은 각각 <ㄷ ㅂ ㅅ ㅈ>으로 중화되어 발음되다가 음절 끝 위치에서 <ㅅ>과 <ㄷ>의 대립이 없어지면서 <ㅅ>이 <ㄷ>으로 발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순수자음과 비음이 연속될 때 앞의 순수자음이 비음으로 동화하는 현상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다. 현대한국어에서는 <ㅅ ㅈ ㅊ ㄴ ㄷ ㅌ>이 모음 <이>나 반모음 [j] 앞에 분포되는 일이 크게 제약받지만, 당시에는 <샤공> <셤> <쇼> <쟈 > <쳔> <쵸> <닢> <뉴월 뉵일에> 등처럼 이들 자음의 분포가 자유로왔다. 중세국어가 현대한국어와 크게 다른 점은 성조(聲調)를 음운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한글 문헌은 방점으로 성조를 나타내었는데 평성(平聲)에는 아무 표시도 하지 않고 거성(去聲)은 점 1개, 상성(上聲)은 점 2개로 표시하였다. 평성은 저조(低調), 거성은 고조(高調)로 추정되며 상성은 처음에 낮다가 나중에는 높은 소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저조와 고조가 복합된 성조로 인식된다. 특히 <부텨+이→ 부:톄>에서 보듯 평성과 거성이 결합하면 상성이 되는 현상에서 상성이 복합적인 성조라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이들 성조에 의하여 <손(客)/·손(手)> <가·지(種)/·가지(枝)/·가·지(種)> <솔(松)/:솔(刷)> <·발(足)/:발(簾)> 등에서처럼 어의(語意)가 분화된다. 한편 고유어의 입성은 종성이 <ㄱ ㄷ ㅂ ㅅ> 등일 때 촉급하게 발음되는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어서 성조상으로는 입성도 평성·상성·거성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였다. 그에 비해 한자어의 입성은 거성적인 것만 있었다. 15세기 한국어에서는 정연하던 성조체계는 16세기부터 문란해져 16세기말 이후 소멸하였다.
문법
전기 중세한국어 단계에는 용언의 어간과 어간이 직접 통합되어 복합어를 이루는 비통사적인 복합동사가 나타나고 있었다. 속격조사는 선행하는 명사구가 유정체언(有情體言)일 때는 <矣>, 무정체언(無情體言)일 때는 <叱>나 <之>가 쓰였으며, 후기 중세한국어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선어말어미 <-더->의 다른 형태로는 <-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정법(否定法)은 일종의 비통사적 복합어와 같은 구성을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부정을 담당하는 어사는 <-i>계와 <-이>계의 2종류가 있어 앞에 것은 주로 명사문 부정에, 후자는 주로 용언문 부정에 쓰였다. 후기 중세한국어에서는 전기에서처럼 용언의 어간끼리 결합한 복합어가 많았고,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현대한국어의 단일어인 <같->은 부사 < >과 < ->가 결합된 복합어였다는 점과 오늘날에는 접두사인 < , ?>이 명사로 쓰여 파생어인 <암 , 수 >이 당시에는 복합어였다는 점이다. 파생명사를 만드는 <- /음>은 오늘날의 <-음>과 그 기능이 같았으나 다만 이들 앞에 <-오/우->가 결합하면 명사가 아니라 명사형, 즉 동명사가 되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암/엄>은 이미 <구지람> <무덤> <주검> 등의 파생명사를 만들었고, <-이>도 역시 파생명사를 풍부하게 하였다. 현재는 관형사형의 어미로만 쓰이는 <-ㄴ> <-ㄹ>이 당시에는 동명사 어미로도 쓰였다. 사역동사를 파생시키는 접미사로는 <- -, -으-> 외에 <-이-, -히-, -기-, -리-, -오-, -우-> 등이 쓰였다. 피동형은 오늘날과 비슷한 방식으로 파생되었지만 [j]로 끝나는 어간의 피동형은 <- ->라는 독특한 접미사를 취하였다. 파생형용사를 형성하는 접미사로 주목할 만한 것은 <-ㅸ/ / /브->가 있었다. 접미사 <- / ->도 동사를 형용사로 바꾸는 기능을 하였으며, <- >과 <- / / ->는 이때에도 명사에 결합되어 형용사를 파생시켰다. 격조사로는 주격·대격·처격·속격조사 등이 있었는데 주격조사로 <이>가 쓰였고 <가>는 16세기 후반에야 나타났다. 대격조사로는 <ㄹ/ /을/ /를>이 쓰였고, 모음조화에 따른 이형태(異形態)가 있었던 이외에 현대한국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으며, 처격조사로는 < /애/의/에/예>가 쓰였다. 속격조사로는 < /의>및 <ㅅ>이 쓰였는데 < /의>는 처격조사와 형태상 구별되지 않는 점이 특이하며, < /의>는 유정명사(有情名詞)에만 연결되고 무정명사(無情名詞) 및 존칭(尊稱)의 유정명사에는 <ㅅ>이 연결되었다. 대명사 <나> <너>의 속격형은 주격형과 마찬가지로 <내> <네>였는데 이들은 성조에 의해 구별되었다. 현대의 여격조사에 해당되는 중세한국어의 조사는 속격 < > 및 <ㅅ>에 <게·그에·거긔·손 > 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복합격조사였다. 중세의 특수조사로 오늘날의 <부터>와 <조차>에 해당되는 <브터>와 <조차>는 <?-(附)>과 <좇-(隨)>의 부사형이 굳어진 것이며, 비교를 나타내는 <두고>는 <두-(置)>의 활용형이 굳어진 것이다. 중세한국어의 활용도 선어말어미와 어말어미에 의해 수행되었다. 선어말어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오/우->로 이 어미는 주어가 1인칭일 때만 결합되는 인칭어미로서 보통 말하는 사람이 자기 주관을 더하여 표현하는 의도법어미로 이해된다. 객체경어법을 담당하던 어미로 <- / / ->이 쓰였는데 어간말음이 <ㄱ ㅂ ㅅ ㅎ>이면 <- ->, <ㄷ ㅈ ㅊ>이면 <- ->, 그리고 모음이거나 <ㄴ ㅁ ㄹ>이면 <- ->이 분포되었다. 시제는 오늘날처럼 선어말어미에 의해 실현되었으며 <-리->는 미래 내지 추측을, <-거-/-아-/-어->는 과거를, <-더->는 회상시제를 나타내었다. 특히 <- ->는 현대 한국어의 <먹는다, 간다>의 <-ㄴ/는>의 전신(前身)으로 현대한국어에서는 현재 시제를 담당하는 이러한 형태소가 따로 분석되지 않는데 비해 당시에 이 <- ->는 현재시제를 활발히 담당하고 있었다. 의문문어미로는 <-가, -고, -녀, -뇨>가 쓰였고, 이 밖에 <-ㄴ다, -ㄹ다>가 있었다. 형태음소론적 측면에서 특수교체도 주목되는데 <나모> >과 같은 특수한 교체가 동사와 명사에서 함께 일어나고 있다.
어휘
전기 중세한국어 자료에는 고구려어의 흔적을 보이는 일부 어휘들이 있다. 한편 고려와 몽골의 접촉으로 말(馬)이나 매[鷹(응)]의 명칭, 군사어휘, 궁중어휘 등에 몽골 차용어가 많이 들어왔다. 특히 예를 들면 가 (黑馬)·아질게 (兒馬)·졀다 (赤馬)·보라매(秋鷹)·숑골(海靑)·빛(吏)·슈라(御飯) 등이다. 또한 함경도 지명에는 여진어(女眞語)로부터 차용된 어휘들이 많다. 이 시기부터 한자어가 많이 나타나며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후기 중세한국어의 어휘체계에서도 한자어가 많이 발견된다. 중국어로부터의 차용어는 당시 문헌에서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한국어화된 정도가 큰 것은 예외적으로 한글로 표기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가난·긔약(期約)· 답(對答)·뎌(笛)·부텨(佛體)·비단·? (衆生)·차(茶)·편안(便安) 등이 있다. 당시 널리 쓰이던 어휘로 중국어로부터의 차용어에 밀려 오늘날에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고유어들도 상당히 많다. 《훈민정음》의 <슈룹>은 《계림유사》에 <傘曰聚笠>, 《조선관역어》에 <傘 速路>라고 하여 오랫동안 쓰인 고유어였는데, 《훈몽자회》에서는 이미 <우산>으로 대체되었다. <온>과 <즈믄>도 16세기 말에는 <일 >과 <일쳔>으로 대체되었다. < 다가>도 16세기에 이미 <萬一>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그 밖에 < (江)>이나 <뫼(山)> 등 현대한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고유어들이 당시에는 활발히 쓰였다. 한국어 전반의 특징인 모음전환 현상에 의한 대립어들이 당시에도 많았다. 예를 들면 <곱다(曲)>와 <굽다(屈)>, < 다(古)>와 <늙다(老)>, < 다(淸)>와 < 다(淡)>, < 다(明)>와 <?다(赤)> 등이며, 비록 < →아>의 음운변화는 겪었지만 현대한국어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 (衆生)>이 <짐승>으로, <어엿브다(憐)>가 <예쁘다> 등으로 어형은 비슷하나 의미가 바뀐 단어들이 많고 <진지> <뫼> <겨시-> <좌시-> <자시-> 등과 같이 어휘적으로 경어법을 표현하는 어사(語辭)가 발달하였던 점도 주목된다.
근대한국어
근대한국어는 임진왜란 후인 17세기부터 현대한국어가 시작되는 시기(갑오개혁이나 8·15) 이전까지의 한국어를 말한다. 근대한국어에서는 중세한국어로부터 현대한국어로 넘어오는 여러 가지 과도기적 현상을 겪는다. 현대한국어가 지닌 특징은 이미 이 시기에 갖추어졌거나 그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인다.
음운
근대한국어에서 가장 큰 음운변화는 < >의 소실이다. 16세기 후반 < >는 먼저 제2음절 이하부터 소실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초부터는 제1음절에서도 < >가 <아> <오> <으> 등 다른 모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표기상으로는 20세기 초까지도 쓰였으나 이미 18세기 중반 < >의 음가(音價)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의 소실 다음으로 중요한 음운변화는 <애·에>의 단모음화이다. 중세국어에서 [ j] [ j]와 같은 이중모음으로 발음되던 이들이 [ε] [e]와 같은 단모음으로 바뀐 것은 18세기 말쯤으로 추정된다. < >의 소실로 < >는 일단 <애>로 바뀌었으므로 < >가 [ε]로 단모음화한 것도 같은 시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외>와 <위>의 단모음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18세기 말을 중심으로 근대국어의 모음체계는 대개 다음과 같은 8모음체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 >가 비어두(非語頭) 음절에서 <으>로 변한 것은 근대어의 모음조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두음절에서는 여전히 < >는 양모음, <으>는 음모음이었으나 비어두 음절에 있어서는 <으>만 나타났던 것이다. 이리하여 <으>는 부분적인 중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모음조화의 붕괴가 중립화 증가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 <으>의 부분 중립화는 한국어의 모음조화 붕괴를 결정적으로 촉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어두 음절에서의 <오>우>경향이 다시 추가되어 근대한국어는 어간의 모음조화나 어미의 모음조화를 막론하고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한편 17세기말 <ㅁ ㅂ ㅍ ㅃ>등의 순음 아래에서 평순모음 <으>의 원순모음 화가 일어나 <므, 브, 프> 등이 <무, 부, 푸> 등으로 바뀌었다. 자음에 있어서는 어두의 합용 병서 가운데 ㅄ계의 ㅴ과 ㅵ이 사라지고 각각 ㅲ과 ㅼ, 그리고 ㅳ과 ㅼ이 그것을 대신하였다. <ㅂ>계 합용병서와 <ㅅ>계 합용병서도 서로 혼란되게 쓰여 15세기 중반 이후 사라졌던 <ㄲ, ㅆ> 등의 각자병서가 다시 쓰여 경음표기는 3종류가 되었다. 15세기 <ㆅ>에 이어 17세기 초반 <ㅅㅎ>이 <ㅎ>의 된소리를 나타냈으나 17세기 후반 <ㅋ>으로 합류되었다. 이미 15세기말 이후 종성의 <ㅅ>과 <ㄷ>이 표기상 <ㅅ>으로 쓰는 경향이 많았지만 발음상 <ㄷ>으로 중화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음절 말 자음체계가 <ㄱ ㄴ ㄷ ㄹ ㅁ ㅂ ㅇ>의 7자음체계로 굳어졌음을 뜻한다. 어중의 <ㄹ ㅇ> 표기는 동사의 활용형 에서 뿐 아니라 17세기에는 <놀애(歌)>놀내, 놀래>로 표기되어 명사에 있어서도 <ㄹ ㄹ>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놀애>노래>라는 <ㄹ>형도 보이며 18세기에 와서 <ㄹ>형으로 일반화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것은 <ㅇ>의 유성마찰음이 소멸하였음을 뜻한다. 근대한국어의 초성 자음체계는 다음과 같이 중세한국어에 있던 유성마찰음 <ㅸ ㅿ ㅇ>이 소멸하고 <ㅈ>의 경음 <ㅾ>이 더 추가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자음에 있어 두드러진 음운변화로는 먼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구개음화를 들 수 있다. 먼저 <ㅈ·ㅊ> 등의 치경음이 <이>나 [j] 앞에서 경구개음으로 변하고, 다시 치경음의 음가를 유지하고 있던 <ㅈ·ㅊ> 등도 경구개음으로 중화되어 합류함으로써 <ㄷ ㅌ ㄸ> 등의 다른 치경음이나 <ㄱ ㅋ ㄲ> 등의 연구개음이 <이>나 [j] 앞에서 그 모음과 같은 위치에서 발음되는 <ㅈ, ㅊ, ㅉ> 등의 경구개음으로 변화하여 발음되었다. 구개음화와 관련된 현상으로 <ㅅ, ㅈ, ㅊ> 다음에서의 <야 여 요 유>가 <아 어 오 우>의 단모음으로 바뀌었으며 어두의 <니, 냐, 녀, 뇨, 뉴> 등에서 <ㄴ>이 탈락하는 현상도 나타났는데, 이는 위와 같은 환경에서의 <ㄴ>이 이 시기에 구개음화를 겪게 된 것으로 그 구개음화된 <ㄴ[ ]>을 어두에 허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편 곶다 → 다, 곳고리 →꾀꼬리, 닷 →탓, 블무 →풀무 등에서처럼 평음이던 것이 된소리 및 유기음으로 바뀐 것이 많다.
문법
이 시기에는 중세한국어의 잡다한 형태가 단순화된 것이 특징이다. 16세기 문헌에서도 주격조사 <가>가 나타난 예가 없지 않지만 17세기에 들어와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났다. 존칭의 주격조사 < 셔( 셔)>가 이미 이 시기에 등장하였는데, 이는 존칭여격조사 < >에 <-셔>가 결합한 형태이다. 조사 가운데 중세에 구별되던 것이 단일화하여 그 기능이 달라진 것이 많이 있는데 < >의 소멸로 < /을> < /의>의 구별이 없어졌으며, 속격조사로 쓰이던 <ㅅ>은 복합어를 형성하는 사이시옷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여격조사로는 존칭의 < > 이외에 <의게>가 쓰였다. 활용어미 가운데 두드러진 변화로는 중세에 <- ->로 통일되어 있던 현재시제의 선어말어미가 어간말음이 자음인가 모음인가에 따라 <-ㄴ-/-는( )->으로 갈린 현상이다. <- ->는 먼저 모음 뒤에서 <-ㄴ->으로 축약되었다가 나중에 그 짝으로 <-는( )->이 나타났는데 이 변화는 처음에 내포문에만 나타났다. 과거시제의 선어말어미로는 <-앗/엇->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부사형어미 <-아/-어>에 <잇-(有)>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객체경어법의 선어말어미 <- ->이 근대한국어에 와서 그 기능을 잃은 것도 큰 변화로, 이에 의하여 한국어 경어법은 거의 주체경어법과 상대경어법으로 2원화되고 객체경어법은 화석화된 몇몇 단어들에 의해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 ->의 변화형 <- ->은 이 시기에 와서 <- 이다, - 이다> 등의 형태로서 상대경어법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어휘
근대한국어는 고유어가 한자어로 대체된 것이 많았고 중세한국어의 어의 변화 가운데 많은 것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한편 중세한국어에 쓰이던 단어 가운데 쓰이지 않게 된 것도 많아 예를 들면 < 랑 다>가 <愛>의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애초 이 의미로 쓰이던 < 다>가 없어졌고, <괴다(寵)>도 역시 사어(死語)가 되었다. 중국어의 차용은 여전히 활발하였지만 중세와 달리 서양어로부터의 차용어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대개 중국을 통해서였지만, 이는 한국어 역사에서 새로운 장(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 당시 차용어로는 포르투갈어 타바코(tabacco)를 차용한 <담배> 등이 있다.
현대한국어
음운
음운의 분류
① 자음: 자음은 〔표 1〕과 같이 조음위치(調音位置) 및 조음방식(調音方式)에 따라 분류된다. 조음위치에 의한 자음 종류는 양순음(兩脣音)·치음(齒音)·구개음(口蓋音)·연구개음(軟口蓋音)·후음(喉音)이 있고, 조음방식에 의한 자음 종류는 폐쇄음(閉鎖音)·파찰음(破擦音)·마찰음(摩擦音)·비음(鼻音)·유음(流音)이 있다.
② 모음: 모음은 〔표 2〕와 같이 혀의 위치 및 입술의 모양으로 분류되며, 혀의 위치는 다시 위치의 높낮이와 전후(前後)로 나뉘어 분류된다. 혀의 높낮이에 의해 고모음(高母音)·반고모음(半高母音)·반저모음(半低母音)·저모음(低母音)으로, 혀의 전후에 따라 전설모음(前舌母音)·중설모음(中舌母音)·후설모음(後舌母音)으로 분류된다. 입술의 모양으로 나눌 때는 원순모음(成脣母音)·비원순모음(非成脣母音)으로 분류된다.
음운의 체계
현대한국어의 자음체계는 폐쇄음과 파찰음이 평음(平音;예삿소리)·경음(硬音;된소리)·격음(激音;거센소리)으로 변별되는 질서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게 특징이다. 평음 <ㄱ ㄷ ㅂ ㅈ>은 약한 기(氣)를 수반한 무성음이며 모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실현되고, 경음 <ㄲ ㄸ ㅃ ㅉ>은 성문(聲門) 폐쇄를 수반한 무성음이며, 격음 <ㅋ ㅌ ㅍ ㅊ>은 강한 기를 수반한 무성음으로 실현된다. 격음과 경음은 모음 사이에서도 유음화하지 않는다. 마찰음의 평음 <ㅅ>과 경음 <ㅆ>은 격음이 없고 언제나 무성음으로 실현되며, <ㅎ>은 그것에 대응하는 경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음은 〔표 2〕의 단모음 음소 이외에 반모음 음소 [w]와 [j]가 더 있다. 그리고 이들과 단모음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이중모음들로 <와 워 왜 웨 야 여 요 유 얘 예 의> 등이 있다. 이 중 <의>는 특이한 이중모음이다. 다른 [j]계 이중모음은 모두 [j]가 모음 앞에 결합하는데 <의>만은 그 반대이다. 운소(韻素)체계에 있어 음장(音長)은 하나의 음소자격을 가지며, 이 음장은 제1음절에서만 변별적이라는 제약을 갖는다.
음운의 규칙
음소들이 모여서 음절을 이루고 나아가 단어를 형성하여 문장이 될 때, 음소가 놓이는 자리에 따라 어떤 제약과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을 음운규칙이라고 한다. 음소에 따라서는 그 놓이는 자리가 크게 제약을 받아 [ŋ]은 어두, 더 나아가 음절 첫머리에는 분포될 수 없다. <ㄹ>도 어두에 분포되기 어려운 두음법칙 현상이 있으나, 오늘날 영어권에서 들어온 외래어의 영향으로 <ㄹ>을 발음하는 현상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는데 <라디오> <로켓> 등이 그 좋은 예이다. <ㄴ>도 <이 야 여 요 유> 등의 모음이 있을 때 어두에 오기 어렵다. 현대한국어는 어두에 자음이 하나밖에 허용되지 않고 음절 끝에서도 표기상 자음이 2개 오더라도 발음에 있어서는 하나로밖에 실현될 수 없으며, 그 자리에 올 수 있는 자음도 <ㄱ ㄴ ㄷ ㄹ ㅁ ㅂ ㅇ> 등 7개 뿐이다. 음절 끝에 올 수 있는 7개 자음 다음에 비음 <ㄴ ㅁ>이 오면 <ㄱ ㄷ ㅂ>은 각각 <ㅇ ㄴ ㅁ>으로 실현되어 폐쇄음이 비음 앞에 이웃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뒤에 오는 자음이 <ㄹ>일 때는 <ㄹ> 이외의 어떠한 음절말 자음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중모음 <얘 예 의> 앞에는 자음이 잘 분포하지 않으며 <계산, 희망, 무늬> 등의 예가 있으나, 실제로는 <예 →에> <의 →이>로 실현되며 <얘>의 경우 <걔, 쟤> 정도가 있을 뿐이고 그나마 이중모음의 실현은 그리 명백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음절 끝에 올 수 있는 7개 자음 외에 다른 자음이 오면 그 7자음 가운데 어느 하나로 바뀌어 <ㅅ ㅆ ㅈ ㅊ ㅌ> 등은 <ㄷ>으로, <ㅍ>은 <ㅂ>으로, <ㅋ>은 <ㄱ>으로 발음된다. 이처럼 처음에 대립되던 음소들이 특정 환경에서 대립을 상실하는 현상을 중화라고 한다. 그러나 음절 끝의 <ㅅ ㅈ ㅊ ㄷ ㅌ>은 <디귿이 →디그시> <꽃이 →꼬시> <젖이 →저시> <밭이 →바치> 등에서처럼 점차 <ㅅ>으로 단일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처럼 성질이 먼 2개 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같아지거나 비슷해지는 현상을 동화(同化)라 한다. 동화에는 <칼날 →칼랄>처럼 앞음의 잔영(殘影)이 남아 있다가 뒤에 오는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순행동화가 있고, 구개음화·움라우트·비음화 등의 역행동화가 있다. 구개음화는 <밭이 →바치> <같이 →가치> <굳이 →구지> 등이나 일부 방언에서 <길>질, 기름>지름, 키(箕)>치, 끼다>찌다> 등과 같이 구개음이 아닌 자음이 뒤에 오는 모음 <이>나 반모음 [j]의 영향을 받아서 구개음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움라우트란 <아비 →애비> <손잡이 →손잽이> <죽이다 →쥑이다> <학교 →핵교> <구경 →귀경> 등에서처럼 뒤에 오는 모음 <이>나 반모음 [j]의 영향으로 그 앞의 모음 <아 어 오 우>등이 <애 에 외 위>로 바뀌는 현상이다. 비음화란 폐쇄음이 뒤에 오는 비음에 동화되어 비음으로 바뀌는 현상으로 <독립 →독닙 →동닙> <십리 →십니 →심니> 등에서처럼 뒤에 오는 자음이 <ㄹ>이던 것이 일단 <ㄴ>으로 바뀐 다음에 일어나기도 한다. 앞의 비음화와 비슷한 동화로 <천리 →철리> <논리 →놀리> <칼날 →칼랄> 등에서처럼 <ㄹ>과 <ㄴ>이 만났을 때 <ㄹ>의 영향으로 <ㄴ>이 <ㄹ>로 바뀌는 설측음화도 있다. 모음조화도 일종의 동화로 앞의 것들과 다른 점은 기본형이 주위 환경에 의하여 동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양모음계열은 양모음끼리, 음모음계열은 음모음끼리 짝지어 만난 것이다. 이것은 특히 <보아라> <보았다> <주어라> <그었다> <피었다> 등의 활용이나 <팔팔-펄펄> <찰찰-철철> <알록달록-얼룩덜룩> 등의 의성어·의태어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지만 중세한국어에 비하여 엄격하지는 못하다.
어휘
한국어 어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의성어·의태어의 발달이다. 모음조화에서의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대립, 폐쇄음에서의 평음·유기음·된소리의 대립에서 오는 표현가치를 최대한 이용하여 어감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낸다. 여기에 1음절이나 2음절·3음절의 반복이 색다른 효과를 더한다. 한국어 어휘는 고유어와 한자어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한자어는 한국어 어휘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대체적으로 일상생활에 관한 것은 고유어가 많고, 추상적이고 지적(知的)인 개념은 대부분 한자어로 이루어졌다. 같은 사물이나 개념에 대하여 고유어와 한자어가 함께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이>와 <치아(齒牙)>에서처럼 한자어는 경어의 뜻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한문이 한국의 문자생활을 지배해온 결과 많은 고유어가 사멸하였으며 이른바 기초어휘에 속하는 단어들까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일찍이 고대한국어에서부터 지명·인명 등 고유명사의 한자화가 시작되어 인명에서는 고유의 요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 지명에서는 아직도 한자지명과 고유지명의 이중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 많다. 20세기에 들어와 한국어 어휘에서 일어난 주목할 만한 현상은 고유어휘재료에 의한 신어(新語)가 많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한편 현대에는 약어(略語)가 대량 생성되고 그 자체로는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려운데, 이런 현상은 고유어·한자어·외래어·외국어 등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방언
한국어의 방언권은 보통 6개로 나뉘며 필요에 따라 더 세분할 수 있다.
동북방언
함경북도·함경남도·양강도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속하며 고저(高低)와 억양에 특색이 있고, 음운면에서는 동남방언과 비슷하다.
서북방언
평안북도·평안남도·자강도가 이에 속하며 황해도 북부지역이 해당된다.
동남방언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및 그 주변지역이 해당되며 성조(聲調)를 가지고 있다. 이들 방언은 단모음 <애>와 <에>의 대립과 <의>와 <으>의 대립이 없으며 자음 가운데 <ㅅㅅ>을 된소리로 발음하지 못하고 <ㅅ>으로 발음한다. 한편 어미에는 중세한국어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서남방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가 이에 해당되며 중세의 <ㅿ, ㅸ>이 <ㅅ, ㅂ>으로 살아 있다.
제주방언
제주도와 그 부속도서가 이에 속하며 한국어 방언 가운데 가장 동떨어진 방언이다. 가장 큰 특징은 중세한국어의 < >가 독립된 음운으로 살아 있는 점이며, 그 밖에 많은 고어들이 살아 있다.
중부방언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강원도·황해도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강원도의 명주(溟州)·삼척(三陟)·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지역은 성조에 있어 동남방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고려 이후로 중앙어가 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