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수원 교우회 略史
수원지부는 서울과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기타 통학을 하던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960년대 매사 활동적이던 (상학 62)교우 등을 중심으로 달호회(수원 팔달산의 ‘달’ 자와 호랑이 ‘호’자)가 조직 되어, 봄 ? 가을 두 차례 고?연전과 신입생 환영회를 가졌고, 행사 후 양교 교우들이 회식을 하고 수원 시내 한복판에 나와 응원가와 교호를 마음껏 외치곤 했다.
1970년대 초대 회장으로 수원고 교장을 지낸 최병갑(31상학?작고)교우, 제2대 회장으로 수원시장에 재직했던 남영우(37법학) 교우가 초창기 교우회를 이끌었다.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함께 하며 서호 제방에서 막걸리 잔도 기울이며 서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데모로 얼룩졌던 마음을 달랬던 추억들도 있었다. 또 동고동락했던 후배가 등록금을 못 내고 있을 때, 당시 신입 행원이던 이종일(종학64)교우는 선뜻 한달 봉급을 희사 할 정도로 그 정이 두터웠다. 그 동안 수원지부는 교우들의 작은 정성으로 장학금을 조성해(5천만원) 수원 출신 지난 3년간 재학생 5명에게 입학 격려금을 지급해 왔다.
그 후 변호사 활동을 하던 정원섭(31법학?작고) 교우가 3대 회장을, 황정효(농화60) 교우가 총무를 맡고 직장별로 간사를 임명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수원여고 교장을 지낸 정광우(36 법학?작고) 회장을 거쳐, 수원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서재웅(법학55) 교우가 1984년부터 약 10년간 회장직을 맡았으며, 94년 유두열(의예59)회장, 신입생 장학기금 2천만원을 마련한 95년 최상린(행정 55)회장, 96년 조용희(물리57)회장, 97년부터는 삼성전자대표이사였던 문병대(법학 60)회장을 거치며 교우회가 조직적 면모를 갖추고 활성화 됐다.
이곳에는 모교의 명예를 드높인 교우들도 많은데, 경기지사를 지낸 이해구(법학 53), 염보현(행정 55), 윤세달(정회55?작고)교우, 수원시장으로 훌륭한 목민관이라 칭송 받는 남영우(37법학), 유석보(법학53)교우를 꼽을 수 있다. 교육계의 최상린(행정55), 권종만(국문61), 기업인 조용이(물리57), 전문 경영인 문병대(법학60), 농진청의 이정운(농학60), 법조계의 고재정(행정71), 박충성(법학76), 최강호(법학86), 김덕환(법학87), 의료계의 장덕환(의학71), 사회복지 활동의 선두인 김궁자(교육65)등이 지역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기타 다른 교우들도 이 지역에서 맹활약하고 있어 고대의 교세를 과시하고 있다.
특히 2001년 말에는 학교법인 고운학원을 설립, 수원대와 수원과학대를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이종욱(37상학)총장이 지역 교우들을 위해 화성시 라비돌호텔에서 150여명의 교우들이 모여 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 각박한 세상에 많은 교우들이 선배의 고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01년부터 직장별로 지회(경기도청, 농촌진흥청, 삼성전자, 수원대학교, 검찰청, 법원, 변호사회, 의사회, 교사회, 금융계, 달호회 등)를 두고 소모임 활성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수원시내 각 기관장급의 30여명 중진교우들이 격월로 모이며, 봄?가을로는 광교산 산행 및 바둑모임을 갖고, 격년제로 가을 운동회도 개최한다.
그 중 전국 각지의 산행으로 다져진 베테랑 권종만(국문61)교우는 젊은 교우들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 운동 부족에 시달리는 후배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