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관찰자인 작중 '나'와 나의 아내인 '베라'가 어떤 성에서 열리는 곤충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그 광적인 모임이 파한 후 다시 아내와 차를 타고 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런 구조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고향인 霧津으로 여행하고 돌아온다는 설정과 같다. 장면은 무척 다양하지만 장소는 매우 제한된 공간 속에 설정되어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 작가는 마치 실험실에서 신물질을 발명하는 과학자처럼 자신의 문제들을 그 속에서 실험한다. 김승옥은 기억과 망각에 대해서 실험했으며, 쿤데라는 속도와 기억에 대해서 실험한다.
'속도와 기억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작가가 소설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되물어보면 '현대에 있어서의 속도 맹신은 무엇 때문일까?'라고 물을 수 있다.
작가는 속도와 기억에 대한 두 가지의 실존 수학 방정식을 각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상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함으로써 그의 주제를 논증하며, 예시한다. 그가 말한 실존수학의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방정식 1 - 실존 수학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48쪽) :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이제 더 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158쪽)
방정식 2 - 실존이 갖는 각각의 새로운 가능성은, 비록 그것이 있음직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실존 전체를 탈바꿈시킨다.(51쪽)
첫 번째 방정식과 두 번째 방정식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선 두 번째 방정식을 살펴보자. 두 번째 방정식을 지탱하는 가장 큰 개념은 작중 인물 퐁트벵이 대중적지지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정치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춤꾼'으로 정의하였던 바로 그것이다. 이 춤꾼들은 언제나 구체적이지 않은, 실재하나 실제로는 안개에 가려진, 익명성에 뒤덮인 명예나 권위들을 좇아 자신의 인생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퐁트벵의 제자인 벵상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퐁트벵의 그러한 발상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춤꾼에 대한 모호한 경멸을 감추고 있다.
춤꾼을 지양하고 경멸하던 벵상은 막상 자신이 춤꾼이 아닌가는 의심을 타인에게서 받게되었을 때 그는 무척 괴상한 행위를 벌임으로써 그가 받은 경멸을 잊고자 한다.(도전적이면서, 완전히 익명에 싸인 섹스 행위를 통해) 방정식과 같이 그는, 스스로 되고자 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춤꾼일지도 몰랐기에 당황했으며, 그러한 '실존이 갖는 새로운 가능성은' 그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만용을 발휘하는 것으로 그의 실존에 영향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실존 전체를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벵상은 그의 일탈 행위를 통해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그는 그것이 더없이 부끄러워 마침내 절망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바로 벵상이 빠진 이 절망상태에서 쿤데라가 제시한 첫 번째 방정식이 다시 등장한다. 벵상은 그의 절망스러운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며, 오토바이의 빠른 속도는 벵상의 부끄러운 과거와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 미래에 대한 걱정을 불식시키고, 오직 현재의 실존에만 매몰되게 한다. 왜냐하면, 오토바이의 속도는 그 어떤 걱정도 잊게 할만큼 집중력 강한 현재현재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토바이의 속도가 빠를수록 벵상은 보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으며, 불결한 기억은 그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제거된다.
쿤데라는 벵상을 통해, 또 모임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낱낱이 파헤치는 것을 통해 그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지점을 발견하며, 발견된 바로 그 지점에 춤꾼과 춤꾼의 속성인 빠름이 존재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이 빠름에 대칭되는 느림이란(첫번째 방정식에 따라) '기억의 강도에 따라 정비례'하는 데, 물론 이때의 기억은 모든 불결한 기억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아름답고 찬란한 기억이다. 마치 첫사랑과의 첫키스같은.... 이러한 아름다운 기억은 늘 기억에서 반복되고, 재생되며, 재생될 때마다 기억의 필름은 가급적 느리게 상영되는데, 덧붙일 필요 없이, 찬란한 기억일수록 가슴 속에서 오래 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래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묻고나 있는 게 아닐까?
"저 옛날, 체코의 속담처럼, 하늘의 창을 관조하던, 그 낭만적인 방랑자들(이들은 바로 느림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지?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해간다고? 그래서 자신 역시 빠르게 흘러가고, 흘러간 것들에 대해 그렇게 쉽게 망각한다고? 아니지, 아니야. 원인은 세상 탓이 아니야. 그것은 오히려 망각하고 싶은 일을 너무 많이 저질러 버린 우리 탓 때문이지. 이미 우리가 망각을 전제해둔 행위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저 익명성 속에서 명예와 권위를 얻고, 저 익명성의 바다 속으로 언제든 잠수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춤꾼에 불과한 거야. 아아, 우리의 그 방랑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