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중심축인 한수(漢水)는 두 물이 만나 형성된 강이다. 북쪽에서 흐른다하여 붙여진 북한강 그와 반대로 남쪽에서 흐른다하여 붙여진 남한강, 그 두물은 양수(두물머리)에서 합수가 된 후 조금 더 밑으로 흘러 팔당부근에사 또 다시 경안천과 합수 이뤄 한강이 된다. 한강은 유유히 흘러 황해로 바닷물에 들면서 강의 생명을 바다로 넘겨 준다. 이 한강의 원류는 강원도 산골이다. 그래서 강의 원류가 있다하여 옛부터 강원도(江原道)라 부른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임산물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수단으로 또는 한양과 그 부근 그리고 서해안에서 나는 새우젓 등등 해산물 나르는 동선으로 사용되던 뱃길이었으며 여주 이천 지방의 곡물도 운송하던 길이었다. 비교적 순탄하게 흐르던 강물이 두물머리를 지나 팔당에 이르면 물 살이 빨라지고 여울목이 많아 땟목 선주는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예봉산과 검단산이 좁은 협곡을 만들고 있고 강으로 인하여 산맥이 끊어진 관계로 강상, 강하에는 각종 암초들이 성하다. 그영향으로 여울목이 생겼으며 물살이 드셌다. 머나 먼 뱃길에 피로가 쌓인 뱃사공들에게 이곳은 마의 계곡이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이곳을 두미강이라 불렀다. 두물머리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가면 뱃길이 무척 순해지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두려움이 끝나는 의미로 불려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두미강 이 후에는 모래톱이 광활하게 발달한 미사리가 나오고 한양도성과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영월로 이어주는 국도로 연결되는 광나루가 나온다 이어서 , 뚝섬, 살굿이 다리에서 우마차로 도성으로 가는 문류의 길은 열렸던 것이다. 여울목이 많고 협곡이었던 두미강에서 사고가 너무 많이 발생하여 당집이 번성하였다. 나루가 있었고 객주 집도 번성하였으나 물류의 안전한 통행을 바라는 마음에서 제를 지내던 당집이 번성하던 곳이었다. 당집의 수가 여덟개나 있었다 하여 지명도 팔당(八堂)이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마재방향에서 팔당댐을 조망해 보면 한문으로 열덟 팔자(八) 형상이 지형임을 알 수 있다. 지형이 문명을 만들고 지세가 인문의 기초를 세운 후 인심이 소통의 순을 밟는 것이다. 이 고목은 바로 북한강이 우측으로 돌아 나가고 남한강이 강상면을 끼고 좌로 돌아 나가다 300m 전방 마재 전 조안에서 합수되는 지점에 사람들이 심은 고목이다. 이 나무를 통하여 뱃사람들은 한양도성에 거의 다달았음을 깨닫고 두미강을 헤쳐 나갈 궁리를 하였던 곳이다. 이곳에 나루가 있어 조안과 강상을 이어주며 문물교환이 번성하던 곳이다. 지금은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 두물머리 풍광을 즐기곤 한다.
첫댓글 우리가 다녀왔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