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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작가협회 편>2002년 올해의 베스트 추리소설 '예전엔 미쳐서 몰랐어요' 및
<한국경우문예회 편>'파도와 등대' 제 4집에 수록되었던 <추리소설>입니다.
모처럼의 일요일이었다. MM흥산 경비계장 손주태는 간밤에 잠들기 전, 일요일인 이튿날 아침만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리라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마침 1주일간의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날이라 좀더 느긋하고 싶었다.
그런데 늦잠은커녕 신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깬 다음에는 볼 일을 마치고 다시 누웠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손주태는 잠자리에 누운 채 뒹굴거리면서 까닭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손주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 쪽에서는 도마에 칼날 부딪는 소음이 들려왔다. 아내가 평일과 다름없이 아침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손주태는 그의 옆에서 자고 있는 큰아들 찬호를 살펴본 다음 큰딸 진호의 방을 드려다 보았다. 식구들에게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 아무래도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가령 회사 소유 빌딩이나 점포에 화재사건이라던가 혹은 다른 어떤 사고가 발생했다면 간밤에 숙직을 한 정준수 총무과장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다. 전화를 걸어오던 직접 달려오던 신속히 연락을 해 왔을 것이다.
- 대관절 무슨 일일까?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이 불안감, 2년여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2년전 경찰에 재직하고 있던 시절, 걸핏하면 사건사고에 쫓겨 비상소집과 비상출동을 밥먹듯 하던 때에 느끼던 그런 초조감과도 같은 불안감이었다.
- 하지만 별 일이야 있을라구….
손주태는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힘주어 거실쪽 창문을 열어 제꼈다. 새벽 다섯시. 해뜨는 6시경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비라도 올려는 지 하늘은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다.
손주태는 이번 휴가동안 가족과 함께 이름난 음식점에라도 가서 외식을 하던가, 아이들과 함께 하루쯤 가까운 수영장에라도 가리라 마음먹고 어제 저녁 가족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펼치며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가장의 선심플랜에 환성을 터뜨리는 아이들까지 도매끔으로 싸잡아 면박을 준 것은 아내 한영주였다.
고3인 큰딸 진호와 중3인 큰아들 찬호는 각각 대입과 고입을 앞두고 있었다.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공부를 해야 할 아이들과 한가롭게 수영장 놀이가 당키나 하며, 큰딸의 대학등록금이며 큰아들의 고교진학자금이 만만치 않은 판에 우리 형편이 이름난 음식점에 가서 턱없이 비싼 음식이나 먹을 처지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체모가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 신새벽에 출근하면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돌아오고 또 사흘이 멀다하고 숙직을 하게 되어 한 자리에서 가족의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싶은 것이 가장인 손주태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딴은 아내의 말도 옳았다. 가장의 체모고 뭐고 오늘과 같은 가정의 평화는 순전히 아내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손주태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래…그래, 다음에 하자, 다음에 하자구, 어허허허.}
아버지 손주태가 백기를 들자, 큰아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넉아웃! 아버지의 케이오 패!}
공처가여서 꼬리를 내린 것은 결코 아니다. 2년전, 남편인 자신이 경찰의 제복을 벗고 실직을 했을 때 아내며 자식들이며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살았던가. 더구나 퇴직하는 막판에는 연금도 거부당하고 당장 네식구의 식생활이 암담하던 때에 과감하게 두팔 걷고 생활전선에 나섰던 아내 한영주가 없었던들 오늘과 같은 가정의 단란이 있을 리 없었다.
남편 손주태가 의욕을 잃고 밖으로 나돌 때 아내 한영주는 그녀 독단으로 최신 미용법을 덤으로 얹은 화장품 외판에 나섰다. 결혼전 화장품회사 메이크업 부서에 근무했던 전력이 그녀의 투지에 불을 당겼던 것이다. 다행히 3개월 정도의 공백이 있은 뒤 남편도 MM흥산에 취업이 되어 가정의 안정은 되찾았지만 한번 있었던 일 두 번 없으란 법 없다는 옛말을 새기고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끝을 보리라 결심한 아내는 지난 2년 동안 줄기차게 정진, 최근에 와서는 제법 고정 단골도 확보되고 여기저기서 그녀가 개발한 독특한 미용법 강습회에 초청강의를 나가는 등 잘나가는 인기여성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여보! 오늘 낮 동기생 모임은 당신이 호스트였죠?}
{동기생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사는 게 꼭 2년만이군. 이제야 사람 구실 좀 하게 되나봐 허허허.}
그랬다. 아내의 일깨움이 아니었더라도 일요일인 오늘 정오에는 경찰종합학교 간부후보생 출신 동기생들의 모임인 창공회의 오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오늘의 모든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호스트였다.
- 모두 어떻게들 변했을까?
손주태는 그동안 적조했던 동기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산가족이라도 만나는 것 같은 야릇한 흥분에 들떴다. 드디어 오늘 그 그리운 얼굴들과 만나는 것이다.
경찰에서 퇴직한 뒤 2년 동안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동기생 모임에 얼굴 한번 비치지 못했다. 어제 낮 간사를 맡고 있는 시경 수사과 오경석 경감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 실로 오랜만에 듣는 오경감의 음성을 듣고는 그만 목이 메어버리고 만 손주태였다. 오경석 경감은 이날 모임에 꼭 참석하라고 당부를 했다. 역시 동기생들은 소식을 끊고 살아온 자신에게 여전히 너그러웠다. 오경석 경감의 전화를 받으면서 손주태는 내일 모임의 호스트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간청을 했고 오경감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2년 동안 참석 못한 미안감도 미안감이지만 직업을 잃고 방황하던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 동기생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를 아직까지 못하고 지내온 것이 늘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푸른 하늘처럼 확 트인 공활한 마음으로 우리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
그렇게 해서 모임의 이름은 창공회로 지어지고, 이름에 걸맞게 동기생들은 푸른 하늘 아래 도처에서 나름대로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범죄를 솎아내고 비리를 다스리고 정의를 바로 세우면서 인간적인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파면이라는 너울을 뒤집어쓰고 제복을 벗고 당장 노두를 방황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살길을 터준 것은 다름 아닌 창공회 모임이었다. 그런 고마운 모임에 2년 동안이나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손주태가 둘러댔던 표면상 이유는 새로 취업한 직장이 바쁘다는 핑계였다. 그러나 손주태의 진짜 속내는 경찰 퇴직사유가 총기관리 소홀과 감독불충분이 이유가 된 징계처분 결과가 [파면]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상사는 물론 특히 같은 동기생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누구도 [살인자]니 [살인방조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려 비난을 하거나 지탄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소지한 45구경 권총 때문에 4명의 인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2년 전 한 여름의 어느 날, 파출소 직원들이 관내를 순찰하면서 기록하는 순찰함을 통해 직원들의 근무상황을 확인하는 감독순시를 마치고 파출소에 돌아온 손주태 경위는 제복과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케이스를 그가 혼자 사용하는 2층 개실에 벗어 놓고 찌는 듯한 더위를 식히려고 샤워장에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2층 개실로 돌아온 손주태 경위는 제복은 갈아입었지만 실탄이 장전된 권총과 그 권총을 집어넣은 권총집이 매달린 총띠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무심히 옷거리에 걸어놓은 채 사무실에 나왔었다. 특별한 상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옷거리에 걸어놓아도 누가 권총에 손을 대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심한 부주의가 뜻하지 않은 큰 사건으로 발전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다시 사무실로 나온 손주태 경위는 감독순시로 파출소를 비운 사이에 있었던 민원처리사항을 확인하는 등 몇몇 업무를 처리하며 한 3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한 시민의 비상신고를 받은 112지령실로부터 긴급출동명령이 내려왔다. 손주태 경위의 파출소 소속 순경 한 사람이 권총으로 시민 3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손주태 경위는 직원 2명을 인솔하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시민의 신고 그대로 현장은 피바다였다. 가해자는 파출소 소속 지영하 순경이었고 결국 시민 3명 등 도합 4명이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누워 있었다.
그런데 지영하 순경이 사용한 흉기가 뜻밖에도 자신이 몇 시간 전까지 차고 다녔던 바로 그 45구경 권총이었다. 잘못 본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살펴보았으나 어김없는 손주태 경위 자신의 권총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입안이 바작바작 마르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상부기관인 경찰서와 경찰청에서 형사진이 달려나오고 경찰관에 의한 총격사건이라 하여 상부기관 감찰부서에서도 관계관이 뛰어나왔다. 뿐만 아니라 장안의 매스컴도 그 센세이셔날 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은 기자들로 북새통이었다.
조사결과 확인된 사건의 전모는 너무도 놀라웠다. 손주태 경위가 감독순시를 마치고 파출소에 돌아왔을 때 지영하 순경은 술에 만취되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얼마후 손주태 경위가 샤워장에 들어갔을 무렵, 대기실에서 나온 지영하 순경은 샤워실 옆 파출소장이 사용하는 2층 개실에 들어가 옷걸이에 걸렸던 45구경 권총을 빼어 들고 애인의 집으로 달렸다.
아무튼 지영하 순경은 손주태 경위의 권총으로 그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애인과 애인의 부모를 위협하다 못해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어 버렸다. 이 비극 앞에 손주태 경위는 망연자실 넋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비록 장소가 파출소 내부의 2층 개실이라고 해도 그곳은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간수자 없는 개방된 장소였고 인마 살상을 목적으로 제조된 권총을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은 큰 실책이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시간시간 속보를 통해 사건전모를 보도했고 신문과 방송 보도를 보고 듣는 시민들은 혀를 차며 죽은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무리 감독자의 위치에 있다곤 하지만 무려 20명이나 되는 직원을 감독자 한 사람이 어떻게 하루 24시간을 시시콜콜 감독할 수 있을 것이냐는 불가항력론을 펴서 손주태 경위의 처지를 변호하는 움직임도 없지 않았지만 권총 관리를 소홀히 한 파출소장 손주태 경위의 실책은 돌이킬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시민의 비난과 날카로운 시선이 따가웠지만 손주태 경위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지영하 순경의 청춘이 너무나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연로한 노모를 편안히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애인과의 결혼을 서둘렀던 지영하 순경, 그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것도 결점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경찰관이라는 직업을 혐오하는 여자쪽 부모의 반대 때문에 애인과의 결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지막 수단으로 살인의 길을 선택했던 지영하 순경의 못다 핀 청춘이 애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어찌 하랴.
마지막 구제 수단이었던 소청(訴請)에서도 내려진 손주태 경위에 대한 최종 판단은 [파면]이었다. 말이 쉬워 파면이지 [파면]이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연금의 지급도 중단되었다. [파면]이라는 징계사유 때문에 공직은 물론 제대로 틀이 갖춰진 직장에는 감히 취직이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당장 일가족 4명의 호구지책이 암담했다. 이것은 공직추방 뿐 아니라 사회추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총기 관리 소홀이라는 한번 잘못 때문에 내일의 기약이 여지가 없게 된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허망했다.
몸에 익힌 기술도 없었다. 안다는 것이 단순한 행정사무였고, 대서업을 하자해도 그나마 행정사 자격도 취득하지 못했었다. 고작 내밀 수 있다는 것이 막노동밖에 할 수 없는 40대 중년의 부실한 체력이 전부였다. 그 막노동판도 그 나름대로 인력시장 등 유통과정에서 피나는 생존경쟁을 거쳐야 날품도 팔 수가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구조 속에 내던져진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손주태는 매일 매일 거리를 방황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꿈틀거리는 노숙자들을 보며, 결국 자신도 하릴없이 그 대열에 끼어야 하는가 보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 길로 지하도를 벗어 나와 심호흡이라도 할 수 있는 남산으로 도망치듯 오르곤 했다.
그러는 한편 손주태는 자신의 총기 관리 소홀로 결과적으로 외톨이가 된 지영하 순경의 노모를 찾아다니며 무료양로원 입주를 주선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이런 선행이 또 기자의 눈에 띄어 신문가십으로 보도되었고 이 기사가 MM흥산 의 김장도 회장을 감동시켰다는 것을 손주태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됐던 것이다.
그렇게 3개월 남짓이 흘렀다. 그동안 집에 들어가면 창공회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왔었다고 아이들이 전해 주었으나 창공회에는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동기생들을 만난단 말인가? 안될 일이었다.
왜 그때 권총을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서랍에다 치워놓던가, 아니면 안전하게 무기고에라도 일단 격납해 둘 것이지 어쩌다 옷걸이에다 걸어놓았다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아갔을까? 가슴을 치며 통탄해 마지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창공회를 대표하는 동기생 몇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다. 재수가 없을 양이면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운이 나빠 결국 평생직장으로 삼았던 경찰에서 옷을 벗고 만 손주태의 처지가 안쓰럽던 차에 전화상으로 아이들이 전한 손주태의 비색(否塞)한 근황이 자극제가 되어 사발통문 끝에 손주태의 일자리가 마련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손주태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독지가는 시내에 대형 빌딩과 상가 점포 이십 여개를 보유하고 있는 주식회사 MM흥산의 김장도 회장이었다. 60고개를 넘어섰건만 매주 빠짐없이 산행을 즐길 정도로 왕성한 건강을 자랑하는 김회장은 얼마 전까지 임의단체인 경찰행정자문기구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그 지역사회에서는 제법 재력이 탄탄한 알짜배기 사업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 김회장이 마침 MM흥산의 사원 중 한 사람이 미국 이민을 가게 되어 그만 두었노라며 그 후임자 추천을 자문기구 소속 경찰에 의뢰해 옴으로써 창공회 회원의 소개로 손주태가 김회장에게 추천되었던 것이다.
면접이 있던 날. 손주태는 MM흥산에서 친경인사로 알려진 김장도 회장과 만났다.
{솔직히 말합시다. 나 얼마 전 까지 경찰행정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경찰행정에 협력해 온 사람이요. 지금은 자문위원을 그만 두었지만 경찰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시다. 그러나 난 내 사원으로 전직경찰관을 쓸 생각은 없었소. 왠줄 압니까?}
{……}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손주태에게 김장도 회장의 입에서는 참으로 뜻밖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언젠가 한번 전직경찰 한 사람을 써봤소. 한데 이 사람, 매사에 법, 법, 하면서 안하무인이란 말요.}
{……}
{뭐 근로기준법이 어떻고 성실납세가 어떻고 하면서 사사건건 경영진에 도전을 하는 거요! 그래 보다 못한 내가 이 녀석을 해고했지! 그랬더니 글쎄 퇴직금을 안 주느니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느니 어쩌고 하면서 당시 노동청에다 투서를 해서 경영진이 근로감독관 사무소에 불려가 얼마나 애를 먹었었는지 어이구우.}
김장도 회장은 고발당하던 때가 생각나는지 치를 떨었다.
{투서사건은 벌금 몇 푼 물고 끝냈지만 아무튼 손주태씨 당신, 신문에 난 기사도 봤지만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죽은 부하직원을 미워하지 않고 그 노모를 무료양로원에 입원시켜 드리는 등 여러 모로 마음을 쓴 당신의 그 휴머니즘에 나 정말 감동했소. 그래서 나도 내 평소의 지론을 접고 전직경찰인 당신을 맞이할 생각을 했던 거요.}
{고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밑에서 일하려면 첫째 너무 법, 법, 하면서 경영진을 도둑놈 취급을 하지 말란 말이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진짜란 말씀이야! 입사를 할 땐 누구나 순한 양이지.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늑대로 변하고 이리로 변해. 그리고 자신들에게 털끝 만한 불이익이 돌아오면 회사에서 탈세를 했느니, 부당한 처우를 했느니 하면서 법적 대응을 한답시고 경영진을 물어뜯는단 말씀이야!}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믿어도 될까?}
{네, 믿으십시오. 사나이 손주태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김장도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만족의 표시였다.
{그럼 한가지 다짐을 두자고!}
{네!}
{입사후 어떤 일이 있더라도 회사에서 시키는 일에만 전념할 뿐, 회사경영에는
일절 노터치!}
안경넘어로 손주태의 반응을 살피듯 두 눈을 번득이는 김장도 회장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둘째, 혼자 깨끗한 척, 혼자 정의의 돌쇠인 척 하지 말기!}
{알겠습니다!}
{그 두 가지만 약속할 수 있다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직함은 경비계장. 자세한 업무 내용은 사장과 상무가 설명해 줄 게야. 자 부탁하네.}
그렇게 해서 손주태는 MM흥산과 인연을 맺었다. 직함은 경비계장이었지만 MM흥산 소유 부동산의 부단한 안전 점검과 임대료 징수 독려가 주임무였다. MM흥산 소유 부동산 중 대형빌딩은 지하1·2층이 주차장, 1층부터 5층까지가 일반 점포와 사무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모텔과 나이트클럽, 사우나 등이 입주해 있었고, 그밖에 도심지에 분포되어 있는 상가 점포는 공구상을 비롯 여러 업종에 걸쳐 있었다. MM흥산 소유 부동산은 빌딩이건 점포건 자영하는 법 없이 모두가 임대였다. 따라서 직원은 그 빌딩과 점포 등 보유 부동산에 대한 안전 점검과 임대료 징수에 필요한 인력만 있으면 되었으므로 직원의 수는 김회장 까지 포함해서 총원 8명, 소수정예랄까, 한 점의 군살도 붙지 않는 빠듯한 인원구성이었다.
창공회의 동기생 대표들이 처음 손주태를 찾아왔을 때 동기생 한 사람이 우스개 삼아 김회장을 일컬어 [왕소금]이니 [왕노랭이]니 하며 픽픽 웃었었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었다. 그러나 MM흥산에 몸을 담은 뒤 빠듯한 인원으로 부동산 안전 점검과 임대료 징수 등 업무에 아등바등 발버둥을 쳐야 하는 격무에 시달려 보고 나서야 비로소 동기생의 말뜻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어느덧 이미 내달리는 차에 매달려 자칫 손잡이를 놓치면 떨어져 죽을까봐 목숨을 걸고 버둥거려야 하는 절박한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손주태는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고 한여름인데도 몸살 같은 오한을 느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고단한 나날이 거듭되었다. 입주자 중에는 인테리어를 바꾼다는 구실로 심지어 빌딩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조차 마구 뜯어내려고 들었다. 자칫 건물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공사현장을 발견하고 아연 실색한 손주태는 즉시 단호히 제동을 걸어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래도 입주자가 말을 안 듣고 작업을 강행하려 하면 손주태는 입주계약을 파기해 빌딩이나 점포에서 쫓겨나게 할 수도 있다고 엄포성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건물의 붕괴,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회사와 입주자 모두의 몰락과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것이 손주태의 확고한 신념이었던 것이다.
-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
손주태의 엄포에 찔끔한 입주자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금품과 주식을 제공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쳐 보았지만 권총 취급 소홀의 아픈 상처가 굳은살이 되어 가슴 깊숙히 박혀 있는 손주태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요 씨도 안 먹히는 멍청한 짓이었다.
끝내 손주태가 꺾이지 않자 거액의 보증금에다 다달이 비싼 임대료를 내고 있는 판에 기둥 하나쯤 마음대로 못하느냐며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입주자들이 회사로 몰려와 항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경영진이 한다는 소리가 기막혔다.
{이봐 손계장, 입주자를 살살 달래야지, 피의자 다루듯 해서 되냐고?}
또 전직경찰을 들먹였다. 손주태로서는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강약이 부동인데 어찌 하는가. 작은 참새도 짹하고 죽는다고 한마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상무님. 기둥 하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빌딩이 무너져요. 그땐 회사고 뭐고 하루아침에 모든 게 날아가 버린단 말입니다. 기업이란 사회적 책임도 크다는 걸 아셔야죠! 세상을 어디 혼자 삽니까?}
{뭐가 어째? 아니 당신 지금 누굴 가르치는 거야?}
막강한 경영진 앞에 사용자는 너무도 무력했다.
{죄송합니다.}
손주태의 사과로 사태는 일단 갈아앉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MM흥산은 손주태의 강경한 의지로 안전사고 없는 경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입주자 중에는 조명용 전기배선을 허가도 없는 전기재료상으로 하여금 시공하게 하고 불길에 약한 가연성 장식물을 마구 설치하는 등 손주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손주태에게 들키는 날엔 모조리 철거였다. 때문에 입주자들은 한 밤중에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나 입주자보다는 손주태의 눈썰미가 한수 위였다. 다음날 순찰을 도는 손주태의 눈에 하나같이 적발되어 모조리 철거되었다. 회사나 입주자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 앞에 아무도 손주태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그러나 뒷전에서 날아오는 한마디 야유.
{MM흥산, 똑똑한 셰파트 한 마리 잘 길렀네!}
- 셰파트라구? 흐흐흐.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살랬다. 왜!
손주태의 입에서 듣는 사람 없는 노여움이 사자의 포효처럼 터져나왔다.
한번 경찰에서 쓴잔을 마셨던 손주태였다. 사람 없는 방에 권총을 옷걸이에 걸어놓았다가 얼마나 큰 변을 당했던가.
그러기에 MM흥산에 근무하면서 건물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부정공사를 강력하게 중단시켰고 불량소화기나 불량전기배선도 단호히 철거시켰다. 건물의 붕괴나 화재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자기방어였다.
다시는 실수를 할 수 없다는 완벽주의, 그것은 경찰 퇴직후 새롭게 다져온 신조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입주자들은 빌딩과 점포의 안전상태를 점검하는 손주태의 강경한 태도를 원망했고 심지어 손주태에 대한 인사조치를 하도록 회사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익이 상반되지 않는 한 다툼이 없는 것이
고금의 진리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손주태에 대한 MM흥산 경영진의 신임도는 날로 높아 갔고, 손주태도 이악스런 경영진에 길들여져 사내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알고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살았다.
그러나 MM흥산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도처에서 시궁창 냄새가 풍겼다.
{아니, 우리가 무슨 무쇠야 뭐야, 신 새벽에 나와서 오밤중까지 사정없이 부려먹으려드니, 빌어먹을, 당장 때려치우고 노동부에 찔러버릴까부다!}
{한 달이면 입금액이 수천만 원이나 되는데 땅사고 점포사는데만 이골이 났지 사원들 복지에는 외눈 하나 깜짝을 안 하니! 죽갔구만 정?}
가뜩이나 적은 인원에 업무량은 많아 사규에 명시된 8시간 근무제는 있으나마나였다.
사원의 한 사람이었다는 어떤 전직경찰이 근로기준법을 들먹이며 경영진을 괴롭혔다던 김장도 회장의 지적이 괜한 이야기는 아닌 듯 싶었다.
물론 시간외 수당은 또박또박 지불되었다. 그러나 사원 쪽에서는 만성화된 초과근무에 과로가 겹쳤고 최근에는 시간외 수당도 마다하고 질병을 구실로 조퇴를 일삼거나 아예 결근을 떡먹듯이 했다.
이것이 선량한 독지가로 알려진 인물이 경영하는 회사의 실체였다.
그러나 손주태는 결코 불평불만을 일삼는 다른 사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 혼자 깨끗한 척, 혼자 정의의 돌쇠인 척 하지 말라!
김장도 회장과의 철석같은 약속을 스스로 파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인지 그가 있는 곳에서는 사원들도 되도록 불평불만이나 경영진에게 책잡힐 발언은 되도록 삼갔다. 사원들에 의한 왕따였다.
그런 근무상의 악조건은 손주태로 하여금 그의 존재룰 잊지 않고 늘 연락을 주는 창공회 모임에 벌써 2년 동안이나 나가지 못하게 발을 묶어 놓고 있었다.
옛날에 그 누가 말했다던가.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고. 직장에 충실하자니 친구들을 잃겠고 친구에게 충실하자니 직장에 소홀하겠고, 그래서 목구멍이 보두청(포도청)이라고 눈 딱 감고 직장에 충실해 왔는데 마침 회사 대표인 김장도 회장이 여름휴가차 동남아여행을 떠나고 없는 틈에 강만희 사장의 용단으로 경영진 3명과 여직원 1명을 제외한 4명의 직원들을 갑을 반으로 나누어 여름 휴가를 가게 했던 것이다. 모처럼 시행된 사원복지대책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아내 한영주가 출타하고 손주태도 외출차비를 했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강만희 사장이었다.
{웬일이십니까 사장님?}
{아 손계장, 집에 있었군. 큰일났네.}
수화기에서 울려나오는 강만희 사장의 음성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큰일이라뇨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회장 차가 박살이 났대. 운전하던 김회장도 중상이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김장도 회장은 며칠 전 동남아여행을 떠나지 않았는가. 외국여행을 떠나 국내에 없는 김회장이 어떻게 승용차는 운전하며 또 그 승용차가 박살이 나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아니 회장님은 언제 돌아오시고, 교통사고는 또 어떻게 된 겁니까?}
{이광규 상무와 운전기사 박종환이 두사람 다 오늘부터 휴가 아닌가. 연락해 보니 벌써 가족들과 바캉스를 떠나고 집에 없네. 핸드폰도 연결이 안 돼. 대전지역 고속도로순찰대의 연락을 받고 노호기 관리계장을 우선 김회장이 입원하고 있다는 대전의 장외과병원으로 급히 내려보내고 나서 지금 손계장에게 연락하는 길일세.}
회사 경리업무와 부동산 관리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노호기 관리계장이 먼저 떠났다니 그나마 한시름 놓였지만 사고경위며 김회장의 부상상태며 교통사고발생시의 보험처리며 그밖에 확인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회장의 교통사고발생장소는 어딘 데요?}
{부산과 대구 사이의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어디쯤이래. 연락을 준 그 지역 고속도로순찰대 담당관의 말로는 어젯밤 자정 무렵 김회장이 운전하는 그랜저 승용차를 앞지르려고 뒤쪽에서 달려오던 승합자동차 한 대가 추돌을 해서 김회장 차를 뎦쳤는데 운전기술이 미숙한 김회장이 핸들을 빼앗기고 가드레일을 부시고 돌진해서 45도 경사진 가파른 언덕에서 20여미터나 내리굴러 자동차는 박살이 나고 김회장은 치료기간을 가늠할 수 없는 중상을 입고 지금 의식불명상태라는 거야.}
{가해차량은요?}
{뺑소니라네!}
{뺑소니요? 아니 뺑소닌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마침 사고당시 현장 뒤쪽에서 상행선을 타고 달려오던 어떤 승용차 운전기사가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지나가는 고속도로순찰대원에게 신고를 해서 발견이 되었다는군. 그 목격자의 말로는 가해차량이 승합차같더라는건데 차체도 차량번호도 일절 모른다는 거야 글쎄.}
{그거 참, 큰일났군요. 쯧쯧.}
손주태가 혀를 차자 강만희 사장이 한 술 더떴다.
{큰일은 그뿐이 아냐!}
{네?}
{우리 회사 경리 미스 민 말야, 민수정이가 동승을 했대. 그 미스 민도 역시 중상을 입고 빈사상태라는 거지.}
{뭐라고요? 미스 민이 동승을 했다고요?}
{아무튼 회사로 좀 나오라고, 자네는 경찰출신이니까 여러 가지로 발이 넓을 게 아닌가. 나좀 도와서 수습 좀 하세나. 응?}
평소부터 경영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못하게 대못을 박아대던 사람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통사정이었다.
- 경영이 별거던가?
{알겠습니다. 아무튼 곧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강만희 사장의 전화를 끊은 손주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경찰재직시 얻은 상식에 의하면 가해차량이 뺑소니 일 때 수사는 초장부터 벽에 부딪친다. 손주태는 언제든 참고가 될 것같아 사 두었던 <교통사고처리 가이드>란 전문서적을 책장에서 꺼냈다.
그 책에는 교통사고처리에 관해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즉 원래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먼저 부상자에 대한 응급구호조치를 취하고 다음으로 사고의 책임소재에 따른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응급구호란 부상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인데 우선 부상자를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킨 후 응급구호기관이나 병원에 신속히 연락하고, 의식상태·호흡상태·출혈상태·구토상태 등에 따라 시각을 다투는 부상자부터 인공호흡·심장 마사지·지혈·기도 확보 등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응급구호에 앞서 사고현장에서 그 사고로 인해 다른 제2·제3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표지판이나 섬광신호로 다른 운전자들에게 알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고 이 같은 현장조치가 끝나고 부상자가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진 다음에는 인근 경찰관서에 사고사실을 신고하되, 경찰관서 소재지나 고속도로에서는 3시간, 기타 지역은 12시간을 초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고의무를 취한 다음에는 바로 가입한 보험회사에 차량번호, 소유자, 사고일시 및 장소, 사고경위, 피해자의 인적사항과 치료하는 병원 등을 알려줌으로써 보험회사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자기 차나 남의 차가 파손되어 정비공장에 들어간 경우에도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김장도 회장의 경우, 단순한 접촉사고가 아니라 뒤에서 덮쳤다고 했다. 더구나 피해차량은 대파, 운전자인 김장도 회장과 동승한 민수정이 중상이라면 누가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었으랴.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뒤에서 앞차를 추돌 했다면 이건 단순한 접촉사고가 아니다. 접촉사고라면 한 두 번 추돌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후방에서 자행한 강력한 추돌의 반복은 피해운전자가 사망할 수도 있는 중대한 고의, 즉 살인행위인 것이다. 더구나 45도 경사에서 추락, 20여미터나 되는 내리막을 굴러 내려서 차량은 대파되고 운전자는 중상을 입었다면 이건 분명한 살인인 것이다.
그런데 가해차량은 뺑소니를 쳤다고 한다.
문득 손주태의 머리 속에 2년전 입사하기 위해 김장도 회장과 처음으로 만났던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 첫째 너무 법, 법, 하면서 경영진을 도둑놈 취급하지 말라!
- 둘째 혼자 깨끗한 척, 혼자 정의의 돌쇠인 척 하지 말라!
사원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동남아여행을 떠난다고 속이고 자식벌 되는 어린 미혼처녀아이와 휴양지에서 육욕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니 열려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 후덕한 자선가로 알았더니 알고 보니 철면피가 아닌가.
잠시후 손주태는 오경석 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오경석 간사는 집에 있었다. 김장도 회장의 돌발적인 교통사고 때문에 오늘 모임에는 못나갈 것같다며 양해를 구한 다음 오늘 모임의 호스트인 자신이 부담할 비용은 총액만 알려주면 온라인으로 내일이라도 즉시 송금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경석 간사는 전화를 끊기 전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한 MM흥산측에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따뜻한 말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손주태는 곧바로 사무실로 달려나갔다.
강만희 사장은 정준수 총무과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의논을 하고 있다가 손주태가 사장실에 나타나자 반색을 했다.
{어서 나오게 손계장. 이리 와서 앉지}
손주태는 비로소 강만희 사장의 입을 통해 동남아여행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는 김장도 회장이 사실은 그동안 지방에 있는 휴양지 콘도에서 미리 휴가를 내고 내려와 합류했던 회사 여자 경리사원인 27세의 민수정과 정사를 즐기며 보내다가 휴가기간이 끝난 민수정이가 출근하기 위해 상경하게 되자 김회장이 자신의 그랜저 승용차에 태우고 올라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손주태의 표정이 소태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손계장 표정이 왜 그래?}
{아닙니다. 뭐…}
손주태가 어물어물 넘겨버리자 강만희 사장이 내뱉듯 한 마디 했다.
{남자란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뭘 그래! 영웅호걸이 열 계집을 마다할까 허허허.}
손주태는 쓴웃음을 지었다. 김장도 회장은 실직중인 자기에게 일자리를 준 고마운 사람이긴 하다. 또한 얼마전 까지는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기초질서를 확립하는 경찰행정 자문기구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유지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자식벌인 미혼의 젊은 여성, 아니 자신의 회사 여직원의 순결을 짓밟으며 육욕의 늪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니 세상에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울컥 화가 치밀었다.
- 하이에나 같은 놈.
오랜만에 손주태의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죽은 고기를 찾아 아프리카 평원을 헤매고 다니는 하이에나들. 다른 동물이 먹다 남긴 뼈도 으적으적 씹어 먹는 야행성 동물인 하이에나는 무리를 지어 다니며 사자의 먹이도 가로챈다. 사람의 웃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낸다는 사바나의 청소부 하이에나는 그 날카로운 주둥이로 닥치는 대로 죽은 고기를 먹어치운다.
그 때 손주태의 머리 속에는 TV다큐멘터리에서 본 하이에나의 생태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인간의 탈을 쓴 도시의 하이에나. MM흥산의 경영진 3인방이 마치 하이에나를 닮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그동안 김장도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 3인방은 이따위 더럽고 추잡한 애욕행각이나 벌이려고 행선지를 숨긴 채 모든 행동을 극비에 붙여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추잡한 애욕행각 말고 다른 비리는 또 얼마나 많이 저질러 왔을까?
하기사 MM흥산 소유 빌딩과 점포 입주자의 사용실태 점검을 주임무로 하는 사원 주제에 회사 최고경영자인 회장의 일정이나 거취야 알바 아니다. 하지만 공사간에 유사시에는 전 사원이 나서서 의논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 인간사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동안 김장도 회장이나 강만희 사장 그리고 이광규 상무 등 경영진 3인방이 평소 자신들을 제외한 사원 5명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아 온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비리를 은폐하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이날 따라 손주태는 고용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철저하게 무시당해 온 자신의 처지가 그럴 수 없이 비감하고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 여기가 바로 복마전이었구나!
어쨌든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한시바삐 손을 써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회장님 댁과 미스 민네 가족에게 알려야 하잖습니까?}
{글쎄 김회장네 사모님이 엔간한 분이라야지, 미스 민과 함께 휴양지 콘도에서 지냈다는 것이 드러나는 날에는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을 게야!}
{그럼 김회장 사모님은 회장님과 미스 민의 관계를 전혀 몰랐나요?}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 왔는데 알 까닭이 없지.}
- 나쁜 놈들!
손주태의 머리에 그런 고약한 단어가 떠올라 왔다.
{노호기 관리계장을 대전으로 내려보내면서 우선 미스 민을 그대로 두고 김회장만이라도 서울 병원으로 이송하도록 단단히 일러 놨다고.}
정준수 총무과장이 손을 내저으며 나섰다.
{그러심 안됩니다. 회장님만 서울로 이송해 오면 미스 민은 어떡하라고요. 회장님은 보험회사 직원이나 노호기 계장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돌봐 드릴 수도 있다지만 보호자도 없는 미스 민을 보험회사 직원이 따로 보살펴 주겠습니까? 김회장님 사모님도 무섭지만 나중에 미스 민네 가족에게 무슨 말을 들으려고 그러십니까?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게 됩니다!}
{그럼 어쩌면 좋지?}
손주태가 나섰다.
{아무튼 양가에 알리시죠. 매도 먼저 맞는 게 수월하댔는데요.}
{안 된다니까 그러네. 나중에야 어찌 됐던 우선 급한 불은 끄고 봐야 한다니까….}
손주태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정과장님 말씀에 일리 있습니다. 물론 교통사고말고도 김회장님과 미스 민의 동행은 어느 쪽이나 다 심각한 문제겠지요. 하지만 두 사람을 병실에서 격리했다고 해서 있던 사실이 없어질 수 있나요. 두 사람을 격리시키면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옹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손주태의 말에 강만희 사장이 주춤했다. 정준수 총무과장이 결정타를 날렸다.
{양쪽 가족이 내려가서 어떡헐겁니까? 당장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환자들을 앞에 놓고 한쪽에선 60넘은 늙은 영감쟁이가 젊은 시앗 보았다고 악을 쓰고 다른 한쪽에선 멀쩡한 미혼처녀 유혹해서 몸을 망쳐 놓았으니 혼인빙자 간음이라구 떠들어 댈거냐구요! }
강만희 사장이 수그러졌다.
{좋았어. 그럼 총무과장은 김회장댁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사모님과 따님 모시고 대전으로 떠나게. 그리고 손계장은 미스 민네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역시 대전으로 내려가라고. 그 다음 문제는 현지에서 알아서 대처해. 자동차는 각각 택시를 전세내도록 하구!}
이렇게 해서 정준수 총무과장은 김장도 회장의 부인 오연실 여사와 큰딸 김연자 여인과 함께 대전으로 출발하고 손주태는 민수정의 부모와 함께 대전으로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김장도 회장 부인 오연실 여사와 큰딸 김연자는 말할 것 없고 민수정의 가족도 처음 얼마간은 중상을 입고 누워있는 혈육의 참상에 얼이 빠져서 고 작 뺑소니차량을 못 잡는 경찰을 원망이나 하다가 시간이 지나가자 양쪽 다 김장도 회장과 민수정의 관계에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상을 입고 의식이 오락가락 하는 당사자의 해명을 듣지 못하게 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나 할까, 손주태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때 손주태는 주치의로부터 중대한 사실하나를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민수정이가 임신 3개월의 몸이었고 이번 사고로 이날 새벽녘에 유산을 했다는 것이었다. 미혼처녀의 임신과 유산. 햇빛도 못보고 사라져간 새생명 하나. 손주태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이건 살인이다!
손주태는 자신의 딸 진호와 몇 살 차이 안 되는 민수정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경찰의 조직에서 떠나게 한 지영하 순경의 권총 절취 사건을 떠올렸다.
- 물론 김장도 회장도 인간이요 남자인데 젊은 여자에게 호감을 갖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에도 수천만 원을 주무르는 그의 처지로 돈 받고 몸을 파는 여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경찰행정자문위원이란 전력의 소유자가 하필이면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 여자 경리사원을 고용주의 위력으로 유린을 해?
손주태는 보험회사 직원과 협의,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김장도 회장과 민수정을 노호기 관리계장이 동행하여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한 다음 홀로 교통사고 발생 현장으로 택시를 몰았다.
손주태는 교통사고현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찝찝한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교통사고가 났던 현장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다 못 해 차체에서 떨어진 도막편 한 개라도 찾아볼까 하구 눈에 불을 켜고 살폈지만 허사였다.
사고현장 경사지 아래 지점에 폐차장에 견인되기 직전인 대파된 그랜저 승용차의 잔해가 교통사고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듯 눈에 따가웠다.
아무런 증거물을 찾지 못하자 손주태는 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하며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 보따리를 쌀 때 싸더라도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그 길로 상경한 손주태는 교통사고소식을 궁굼해 하고 있을 창공회의 동기생들과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 창공회 회원 5명이 시내 음식점 별실에 모였다.
손주태가 김장도 회장의 교통사고 경위를 설명한 다음 민수정과의 불륜을 털어놓았다.
{영웅호걸 색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한 회원은 김회장의 호색행각을 그렇게 풀이하며 킥킥 웃었다.
{안되지! 적어도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자처하는 자가 제가 데리고 있는 딸 같은 여자아이를 건드리다 못해 아이까지 배게 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지. 게다가 불가항력이었겠지만 유산을 하게 만들어 한 생명을 죽였으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단호히 응징해야 해!}
정의감이 강한 다른 회원이 펄펄 뛰며 김회장의 패덕을 두들겼다.
{민수정 쪽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나?}
회원 한 사람이 물었다.
{민수정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더라구. 부모들이 아무리 다그쳐도 모르쇠야. 그런데 회사의 내부 분위기를 보면 김회장쪽에서는 이번 교통사고로 민수정이 유산하자 크게 안도하면서 돈으로 민수정을 무마할 생각인 것같았어.}
{그놈의 돈!}
인간생활에 없어서 안될 돈이지만 사회악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되고 있는 돈의 마력이 역겨워 던지는 공직자다운 한탄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손형의 생각 좀 들어보자고!}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 한 장 내던지고 뛰쳐나오고 싶어!}
{왜 안그러겠나. 하지만 취업 2년 만에 다시 실직자로 돌아갈 순 없지 않나!}
{하지만 옛말에 군자는 도둑의 샘물을 먹지 않는다고 했네.}
손주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내 한영주와 큰딸 진호, 큰아들 찬호의 파리한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손주태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아직 밝혀진 것은 없지만 손주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MM흥산을 도둑의 소굴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이야. 사정을 빤히 알면서 바른 소리를 안 하자니 답답해 죽겠고, 심한 말이라도 할라치면 내밥먹은 개가 주인을 문다느니 전직경찰은 다 그렇게 몰인정하다느니 등등 허튼 소리나 들을 게 뻔한 걸 허허허.}
갑론을박, 결론이 나지 않았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패덕의 주인공이지만, 창공회로서도 불우한 동기생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 독지가를 마냥 매도할 수만도 없었다.
- 또 짐보따리를 쌀 것이냐?
아니면,
- 제가 눈 똥 위에 주저앉아 뭉갤 것이냐?
진퇴양난이었다.
그때 회원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좌중을 향해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뺑소니 교통사고야! 석연치가 않아. 아무리 야간에 발생한 교통사고라지만 그랜저 승용차가 대파되도록 가드레일을 넘어서 추돌을 했다면 이건 고의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누구인가 김회장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김회장을 죽이려 한 건 아닐는지? 또 김회장과 민수정의 관계는 어땠는지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민수정이가 임신 3개월의 몸이었다는데 그 태아가 김회장의 자식이었다면 그것도 밝혀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달랑 딸 하나밖에 없는 김회장이 어쩌면 아들 하나 얻어볼까 하구 민수정에게 접근한 건지도 모르는데 말야.}
그제야 다시금 김장도 회장의 교통사고를 에워싼 저마다의 의견이 터져나왔다. 창공회는 각자 주어진 여건에 따라 수사정보를 수집하는 차원에서 김회장의 주변을 조사하되 수집된 정보는 열흘 후 다시 만나 교환하기로 하고 산회했다.
시간은 흘러 그로부터 열흘후, 창공회는 다시 모였다. 수집된 정보는 다양했다.
- 김장도 회장의 재산은 거의가 부인 오영실씨의 부친이 남겨준 유산이라는 것.
- 김장도 회장 내외 간에는 슬하에 출가한 30세 난 딸만 하나 있을 뿐 아들이 없지만 내주장과 투기심이 강한 부인이 원치 않아 본인도 굳이 아들을 소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 때문에 민수정의 임신은 어쩌면 김회장에게는 그의 목을 죄는 올가미일 수도 있다는 것.
- 김장도 회장은 민수정이 잉태한 생명을 자신의 자식으로 알고 있었단다.
- 그러나 기업체는 빌딩과 점포 임대료 처리에 있어서 회사 재산 횡령·배임 등 경영관리 비리 의혹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그 과정에서 김장도 회장은 자신의 유흥비와 사회사업비에 충당하기 위해 부인 몰래 비자금을 조성해 온 것같으며 특히 법인체는 세무대책인 듯 주식명부에는 온통 가족의 이름뿐이고 추측컨대 주식은 아마도 김회장이 멋대로 가장불입을 한 것같다는 것이었다.
- 김회장의 주변인물 중에서는 운전기사 박종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 교통사고가 발생하던 당시 휴가 중이던 박종환은 휴가가 끝나 회사에 출근한 다음 일요일이면 교외에 있는 폐차장 부근을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때로는 폐차장 관리인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무언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밤이면 변두리 호텔에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가 퇴원한 민수정과 만나 정사를 나누고 있는 현장이 포착되었다는 것 등등이었다.
속담에 털어서 먼지 안 나랴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선량한 독지가로 존경을 받아오던 김장도 회장이 비리와 부조리에 얼룩진 또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야말로 한국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였다.
뿐만 아니라 김회장의 그랜저 승용차 운전기사인 박종환과 민수정, 민수정과 김회장의 관계는 새로운 흥밋거리로 창공회 회원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창공회 회원을 중심으로 수사·형사 분야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김회장과 박종환, 민수정을 마크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김장도 회장과 민수정은 상처가 많이 치유되어 두 사람 다 퇴원을 했다. 김장도 회장은 며칠동안 자택요양을 하고 나서 다시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고 민수정은 일단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 민수정은 이따금 외출을 해서 쇼핑도 하고 저녁에는 변두리 호텔의 객실에서 누군가 만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민수정을 미행하던 형사에 의해 그것이 바로 김회장의 그랜저 운전기사 박종환임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박종환은 김장도 회장과도 시내에 있는 한 일식집에서 자주 만나고 있었다.
김장도 회장과 박종환, 그리고 민수정의 동정을 수사하고 있던 도심지경찰서 형사과 강력반 소속 형사대는 느낌이 이상했다.
김장도 회장과 민수정이 불륜의 관계였다면 민수정과 박종환은 어떤 관계인가?
다만 박종환이 폐차장의 관리인을 찾아다닌 것하며 호텔 방에서 민수정과 여러 시간 밀회를 한 것하며 의심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어떤 결정적 단서도 아직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도심지경찰서 형사계장 반대인 경감은 최종 마무리로 김장도 회장을 MM흥산 회장실에서 만났다. 반대인 경감은 창공회 회원이 아니었지만 창공회로부터 수사정보를 넘겨받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창공회 회원인 손주태가 중간간부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처신이 불편할 것을 감안해서 회장실을 직접 방문했던 것이다. 회장실에서는 주인공인 김장도 회장과 강만희 사장, 이광규 상무 등 경영진 3인방과 그리고 실무자로서 정준수 총무과장이 합석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회장님과 전 경리 담당 여사원 민수정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곤혹스러운 듯 김장도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저 단순히 경영주와 종업원의 관계일 뿐입니다. 허허허.}
정준수 총무과장은 끝까지 오리발 작전으로 나왔다.
{그렇군요.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다음 회사에 사표를 낸 민수정양에게 회사에서 퇴직금을 주셨는데 얼마를 주셨죠?}
{총무과장! 답변하시오.}
김장도 회장의 지명을 받은 정준수 총무과장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그게 그렇습니다. 근무기간이 1년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한달치 봉급을 지불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수표는요?}
반대인 경감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수표 한 장이 나왔다.
김장도 회장의 몸이 굳어졌다.
{이 수표는….}
{네. 민수정양이 사직하던 날, 한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과 함께 김회장께서 민수정에게 건네준 것입니다. 맞죠?}
김장도 회장의 안색은 사뭇 사색이었다.
{네, 그… 그렇습니다.}
{이건 무슨 돈입니까?}
{그냥 정표로…}
{정표로요? 아니 회사에 출근한지 1년밖에 안된 사원에게 5천만 원씩이나 말입니까?}
김장도 회장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후 반대인 경감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그랜저 운전기사 박종환과 민수정양은 어떤 사이입니까?}
정준수 총무과장이 말을 받았다.
{저희가 알기로는 이종사촌간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이종사촌간요?}
{민수정양은 어떻게 입사했나요?}
김장도 회장이 답변을 했다.
{마침 여자경리가 공석 중이었어요. 박종환 기사가 자기 일가친척 중에 경리사무경력이 있는 유능한 미혼 여성이 있다고 추천을 해왔기에 그래서 만나보니 적당하게 생각돼서 입사시켰습니다.}
그밖에 몇 가지 참고사항을 질문한 다음 반대인 경감은 MM흥산을 뒤로 했다. 이어 반대인 경감은 전화로 민수정을 그녀의 집 가까이에 있는 다방으로 불러냈다.
민수정은 뺑소니 가해차량 때문에 여러 번 경찰의 조사를 받은 일이 있어서인지 지정된 다방에 모습을 나타낸 그녀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이었다.
{민수정씨,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네. 물어보세요.}
{MM흥산 김장도 회장의 그랜저 승용차를 운전하는 박종환 기사가 민수정씨와 이종사촌간이라는데 맞나요?}
{……}
민수정은 입을 꽉 다문 채 대답을 못했다.
반대인 경감이 다그치듯 민수정의 이름을 불렀다.
{민수정씨!}
화들짝 놀란 민수정이 부인했다.
{아닙니다.}
{아니라니, 그럼 무슨 관계죠?}
그제야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민수정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저와 종환씨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비로소 드러나는 박종환과 민수정의 관계. 그리고 반대인 경감은 민수정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의 사정을 알 수가 있었다.
남녀공학의 고교 동창인 박종환과 민수정은 오래 전부터 결혼을 약속하고 사귀어 왔다. 그러나 박종환이 워낙 가난해 두 사람이 결혼을 해도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 박종환이 운전기사로 근무하는 MM흥산에 여자 경리사원의 공석이 생겨 박종환이 김장도 회장에게 간청을 해서 취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김장도 회장은 그의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는 박종환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민수정을 공석중인 여자경리의 후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경영진의 공동비서를 겸하고 있는 민수정은 경영진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해 하는 김장도 회장의 어깨를 주무르며 안마를 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김장도 회장과 민 수정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입사 6개월이 되던 어느 날 밤 두사람은 기어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렸다.
{그럼 박종환이가 민양과 김회장의 관계를 몰랐을까?}
{아뇨! 종환씨는 김회장과 내가 백주 대낮에 함께 자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어요.}
민수정은 담담하게 지난 일을 털어놓았다.
어느 날 낮, MM흥산 회장실에서 였다. 민수정을 회장실로 불러들인 김장도 회장은 그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 둔 별실에서 민수정과 백주의 밀회를 즐겼다. 한번 길을 트기가 어렵지 민수정의 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늙은 늑대와 젊은 암코양이가 한창 올가즘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김회장의 심부름을 나갔던 박종환이 무심코 회장실에 들어왔다가 별실에서 흘러나오는 남녀의 교성을 듣고는 벌컥 별실 문을 열었다. 알몸으로 엉켜있는 남녀의 흐트러진 모습이 거기 있었다.
느닷없는 틈입자에 놀란 김장도 회장과 민수정은 당황한 남어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못 볼 장면을 보고 기겁을 한 박종환은 황급히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박종환은 밤마다 민수정을 공원이나 후미진 장소로 끌고나가 욕설을 퍼
부으며 민수정의 배신을 공격했고 민수정은 눈물만 흘렸다.
박종환에게 밀회의 현장이 발각된 뒤에도 김장도 회장은 다이아반지 같은 귀금속이나 거액의 현금으로 금품공세를 펴며 민수정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고 박종환은 그런 민수정과 김장도 회장을 죽여버리겠고 길길이 날뛰었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는 동안, 민수정은 박종환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박종환과도 육체관계를 갖는 등 창녀 아닌 창녀생활에 길들여져 갔다. 벌레 먹은 청춘이었다.
3개월후 민수정은 박종환에게 임신사실을 알리며 결혼하자고 졸랐다.
{누구 새낀지 알게 뭐야. 뻔뻔스럽게 내새끼라니? 아가리 닥쳐! 두 연놈의 목줄을 끊어놓기 전에….}
민수정은 박종환의 아이라고 주장했고 박종환은 김장도의 자식이라고 악을 썼다.
그리고 다시 3개월후, 바캉스 시즌, 오랜만에 MM흥산에도 휴가제도가 시행되었다.
{종환씨, 김회장이 콘도에 내려가자는데 어떡해?}
{가! 가라고? 가서 늙은 놈과 마음껏 놀아보라구! 더러운 것들!}
{안갈테야, 안가! 안가면 되잖아!}
민수정이 앙탈을 부렸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박종환이 민수정을 달랬다.
{이별여행이라면 한번쯤 눈감아줄 수도 있어.}
{정말이야?}
민수정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알았어. 마지막이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김회장이 5천쯤 마련해준댔어. 내 결혼자금으로! 그 돈이면 우리 결혼할 수 있잖아?}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해서 민 수정은 김장도 회장과 이별여행 아닌 밀회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럼, 박종환이 김회장과 민양을 살해할 것이란 생각은 안 해봤나요?}
{그인 그런 강심장이 아니에요. 얼마나 마음이 여린 사람인데요.}
반대인 경감의 손길은 다시 박종환에게로 뻗쳤다.
이튿날 반대인 경감은 도심지경찰서 수사과 조사실에 출두한 박종환과 마주 앉았다.
{박종환씬 회사에다가 애인인 민수정을 이종사촌이라고 속였더군요.}
{그랬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민수정이 저와 장래를 약속한 애인사이라면 어떤 얼빠진 작자가 사원으로 채용해 준답니까?}
{딴은 그렇군요. 참 지난번 휴가는 부산 쪽으로 갔었다죠?}
{말씀 마십쇼. 그 바람에 김회장님 사모님한테 크게 오해를 받고 혼이 났었습니다.}
박종환이 밝힌 지난번 휴가 전후의 사정이야기는 얼추 다음과 같았다.
부산으로 휴가를 떠나기 전, 박종환은 김사장으로부터 특별지시를 받았다. 자신의 그랜저 승용차를 운전하고 갔다가 며칠후 휴양지 콘도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박종환은 김회장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리고 박종환은 다시 부산 집으로 돌아가 나머지 휴가를 마친 후 상경을 했고 회사에 출근하고 보니 그동안에 김회장과 민수정이 뺑소니차에 치어 죽다 살아난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수정과 동승했던 김회장은 부인 오연실 여사에게 민수정과의 관계를 끝까지 부인했고 그 증인으로서 운전기사 박종환을 내세워 대질을 시켰다.
{민수정이는 제 약혼잡니다. 저희는 머잖아 결혼할 몸입니다. 회장님과 어쩌고 저쩌고 그런 소문이 있다니 이거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그러나 김회장의 부인 오연실 여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서울에 있어야 할 그랜저가 부산 콘도에 갔지? 민수정은 또 어떻게 김회장과 동행을 했어?}
{아, 그랜저 승용차 말입니까? 그랜저 승용차는 제가 휴가가면서 고향 부산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머물고 계신 휴양지에는 회장님 모시고 상경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향집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며칠 더 묵어야 할 형편이었고요. 그때 회장님께서는 손수 운전을 해서라도 상경을 하신다기에 그럼 혼자 외롭게 올라가시느니 말벗이라도 하시라고 저와 함께 내려와 있던 민수정이를 동행해서 상경하도록 도와드렸던 거죠. 어떻습니까? 이래도 의심이 가십니까?}
이렇게 해서 김회장의 부인 오영실 여사는 미심쩍은대로 남편에 대한 의심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박종환은 휴양지 콘도에서 김장도 회장과 꾸민 각본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아직 김장도 회장과 사이에 마지막 청산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랜저 승용차를 가지고 휴양지 콘도에 갔을 때 김장도 회장이 먼저 박종환에게 살려달라고 손을 뻗쳐 왔다.
{박기사, 민수정이가 임신 3개월이야. 큰일났네. 민수정이는 기어이 아이를 낳겠다네. 그렇게 되는 날엔 나는 끝장일세. 이 사실을 집사람이 알아봐. 당장 우리 부부는 이혼이야. 나와 민수정이는 간통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될게고. 이래저래 나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돼. 무슨 좋은 방법 좀 없을까? 자넨 민수정이와 이총사촌간이라니까 나 좀 살려 주게! 이렇게 부탁하네.}
김장도 회장은 두손을 비볐다. 마지막 종말을 눈앞에 둔 늙어빠진 하이에나의 불쌍한 몰골이었다.
{민수정에게 위자료로 얼마나 주시렵니까?}
{처, 천만 원이면 어떨까?}
{천만원요?}
박종환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시큰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럼 이천!}
{……}
{듣자니 오천쯤 주신다고 했다던데요?}
{민수정이에게 벌써 얘기 다 들었구먼.}
{물론이죠. 오천이라면 수정이를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만 가지고는 안되지. 유산시킨다는 보장을 해야지!}
{유산까지 보장을 하라고요?}
{오천이 누구네 집 어린아이 이름인줄 알았나?}
{그렇다면 나도 싫습니다!}
박종환은 단호히 거절했다.
{제발 나 좀 살려 주게!}
여기서 박종환은 뺑소니를 가장한 교통사고극을 제의했다.
{이야말로 목숨을 건 대모험극이로군!}
{싫으시면 그만두구요!}
{아, 아니야. 하자고, 해 보자고!}
내친 김이었다. 박종환의 제의에 김장도 회장이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뒤에서 여러 번 사정없이 밀어붙이면 뱃속에 있는 태아쯤 유산시키는 건 식은 죽 먹깁니다.}
김장도 회장은 마음이 급했다.
{정말 자신 있나?}
{싫으면 그만이고요!}
박종환은 배짱을 퉁겼다.
{아니야, 하자고! 자네만 믿네. 그래 댓가는?}
{민수정에게 주실 5천만 원의 두배!}
{뭐 1억?}
{싫으면 그만입니다!}
박종환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아, 아니야. 주지 줘. 일만 성사시키라고. 부탁하네. 출발은 내일 밤 열한시.}
그렇게 해서 민수정 태아 유산 작전은 감행되었던 것이다.
박종환과 김장도 회장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을, 아무리 강력사건 해결의 명수인 반대인 경감도 그 내막만은 아직 알 길이 없었다.
박종환이 밝힌 바에 의하면 민수정은 강만희 사장이 가운데에 들어서 박종환이 김장도 회장에게 제시한 위자료 5천만 원을 받고 김장도 회장과 사이에 있었던 일체의 불륜관계를 청산했다고 했다.
반대인 경감은 형사 한 사람을 박종환의 부산 집으로 급히 파견했다. 휴가중 박종환의 행적을 수사하기 위해서였다.
탐문결과 그의 모친은 이미 수년 전에 작고한 뒤였고, 따라서 박종환이 모친의 병환 때문에 그랜저 승용차를 김회장에게 인계했다고 김회장의 부인 오여사에게 한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어 휴양지 콘도를 찾아간 형사는 콘도 관리인을 통해 김장도 회장이 민수정이 계속 콘도에 머물렀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 며칠 후 교외 폐차장으로 찾아간 형사는 박종환이 교통사고가 났던 날 오후 늦게 고물 승합차 한 대를 끌고 와서 폐차를 부탁했고 수고료로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폐차장 관리인으로부터 확인했다.
박종환에게서 뇌물을 받아먹은 폐차장 관리인은 후환이 있을까 겁을 먹고 승합차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해체해버려 증거물 확보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작업장 인부가 가까스로 찾아낸 승합차의 차량번호판은 뺑소니 운전자가 박종환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였다.
결정적 증거자료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형사는 다시 비행기로 부산으로 날아가 승합차의 전 소유자를 찾아냈고 친구사이인 박종환이 한달 후 결제하겠다는 말을 믿고 외상으로 판매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제 뺑소니 범인 박종환의 검거는 시간문제였다.
그 무렵의 어느 날, MM흥산 소유 빌딩에 있는 일식 음식점 한갓진 특실에 한 노신사와 청년이 대좌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살았네. 고마우이 박군!}
청년은 MM흥산 김장도 회장의 그랜저 운전기사 박종환이었고 홍안백발의 노신사는 김장도 회장이었다.
{별 말씀을요. 공짜로 한 것도 아닌데요 뭐.}
{이 사람아 박군! 자네, 그랜저 꽁무니만 조금 밀어서 가드레일넘어로 넘길 줄 알았더니 그런 경사진 위험한 장소에다 처박아서 곤두박질을 치게 만들어?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회장님이나 민수정이나 두 사람 다 무사할 리가 없는 거죠.}
{하…하여간 목숨을 건 일대모험이었네, 어휴우.}
박종환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어떤가? 그 승합차는 완전 폐차가 됐겠지!}
{안 그랬다가는 죽을려구요? 이제 물증은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회장님.}
두사람은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술잔을 나누며 킬킬거렸다. 그리고 얼마후,
{자, 약속한 1억짜리 수푤세.}
{1억? 네, 1억요, 하하하.}
김장도 회장은 박종환이앞에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박종환은 수표를 두손으로 받들듯 머리 위로 올렸다가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회장님께 알려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가?}
{민수정이와 저는 이종사촌간이 아니라 장래를 약속한 애인사이였습니다.}
{뭐라고? 아니 그럼 자네들,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해 가지구서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수정의 뱃속에 있던 생명은 어김없는 김회장의 씨였으니까요. 하여간 모든 게 끝이 났습니다. 전 며칠 후 이 땅을 영원히 떠납니다.}
{민수정이도 함께 말인가?}
{남이 뜯어먹은 고기를 더럽게 내가 왜 먹습니까? 내가 하이에납니까?}
그들이 마지막 결산을 하는 특실 옆방에 형사대가 잠복하면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을 줄은 귀신 아닌 그 두사람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후, 같은 빌딩 모텔에 나타난 박종환은 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 객실에는 얼마전 MM흥산 사무실에서 경리를 보던 민수정이 핑크빛 잠옷을 걸치고 박종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정은 박종환 앞에 손을 내밀었고 박종환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김장도 회장으로부터 받은 1억짜리 액면의 수표를 올려놓았다.
{수고했어 종환씨.}
{그런데 나 수정이에게 한가지 물어볼 게 있다.}
{뭘?}
{대전 장외과에서 유산했다는 그 아이, 진짜 누구 애야?}
{김회장 아이라니까 왜 못믿구 그래.}
{결국 우린 아이 하나 죽이고 1억5천 번 셈이로구나! 이 살인마야!}
암내 맡은 수컷 하이에나처럼 활활 옷을 벗어 던진 박종환의 몸둥이가 민수정의 몸을 짓눌렀다.
{오늘 밤 죽여 줄테다! 이 살인마야!}
{사돈 남 말 하시네!}
두 남녀는 그대로 부둥켜안고 침대 위에 쓰러져 뒹굴었다. 그 순간, 누구인지 요란하게 객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박종환의 퉁명스런 대답이 문 쪽을 향해 날아갔다.
다시 좀더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이 씨, 누구야? 기분 잡치게스리….}
남자가 객실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낯모를 사람들 여럿이 서있다가 구속영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도심지경찰서 형사과 강력계 형삽니다. 박종환씨, 민수정씨, 두 사람을 뺑소니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미수혐의로 체포합니다. 두분에게는 묵비권이 있으며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구 망했다!}
반벌거숭이가 된 박종환과 민수정은 항복하듯 두 손을 번쩍 들며 하이네나처럼 울부짖었다.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 사회면에는 {MM흥산, 부실기업으로 조사 착수}라는 큰 제목과 아울러 {뺑소니 가장 살인미수사건도 수사}라는 활자가 부제목으로 찍혀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