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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표절의 사진가 -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사진가는 이미지의 수집가(collector)이다.“라고 워커 에반스(Waker Evans)는 말했다. 신디 셔먼과 함께 가장 진보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바바라 크루거도 이미지의 수집가이다. 그러나 에반스와 크루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에반스가 빅토리아풍의 목조 가옥을 계속 촬영하면서 콜렉션하여 작품화하는 것에 비해 크루거는 여러 가지 인쇄물에서 망점 사진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 사진을 다시 구성해서 작품을 제작한다.
예를 들어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에서 창세기의 ‘아담의 창조’를 찍은 사진의 손부분만을 빌려서 작품화한다. 또 크루거의 작품 중 봉제인형 개구리 사진을 이용한 것에는 개구리라는 것을 겨우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트리밍하고, 하단에는 무엇이 찍혀 있는지 모를 정도로 흐려진 사진을 몽타주시켜 작품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크루거의 독창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특히 언어가 작품 속에 레이아웃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녀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언어는 등가성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의 사진에는 “당신은 명작의 신성함(神性)에 투자한다”라는 말이, 그리고 개구리 사진에는 “나를 사 주세요. 당신의 인생을 바꾸어 드리죠”라는 말이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미국 사진사에서 표현을 중시하는 사진의 창시자 중 한사람인 에반스가 말한 ‘이미지의 수집가’라는 것은 작가에게 호소해 오는 대상을 ‘사진’으로 찍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대해 우리들과 동시대의 크루거가 수집한 것은 사진을 사진 아닌 사진에 각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바라 크루거, 무제, 1982, 1983, 1983
가장 전투적이고 지적이며 독창적인 사진가인 크루거의 데뷔는 다른 구성 사진가들보다 다소 늦다. 그녀는 1945년 뉴저지 주에서 태어나 시라큐스 대학을 졸업한 후 퍼슨 스쿨 오브 디자인과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각각 일년씩 디자인과 미술을 배웠다. 사진 미디어의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이다. 이 사진의 개인전은 ‘아니나 소세이’화랑에서 3년 후인 83년에 개최되었다. 같은 시대의 신디 셔먼은 이미 77년부터 시작한 <무제 영화 스틸>을 완성시켰고, 80년대 들어와서는 포르노그래피의 문맥을 인용한 불가사의한 에로티시즘을 띤 작품을 제작하여 각광을 받았다. 또 83년에는 『보그』에 셀프 포트레이트에 의한 패션사진을 게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또 일군의 구성사진가들이 자신들의 스타일을 확립해 이미 대표작을 만들어낸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거의 개인전은 선명하고 강렬했다. 구성사진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필자는 이 전시회를 보면서 각성된 정신과 풍부한 감성으로 짜낸 독특한 작품세계에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미지와 언어가 대립하는 새로운 광맥이 발견되고 있었다. 더욱이 폭발하는 듯한 역동적인 힘에도 강렬한 감명을 받았다.
이 개인전에는 약 15점의 작품이 2개의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한 전시실에는 경제와 생활에 관계된 주제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 대부분의 작품에는 ‘머니(money)'라는 단어가 보였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그녀 작품의 대명제인 페미니즘이 주제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당신(You)'이라는 부름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 당신이라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은 보는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남자에 대한 선전(propaganda)이기도 하다. 결국 사회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다.
바바라 크루거, 무제, 1983, 1983, 1984
그렇지만 언어는 이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이미지는 언어의 일러스트가 아니다. 양자가 등가성을 갖고 대치하고 있다는 것은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지로부터 메시지로, 메시지로부터 이미지로, 이미지로부터 언어로, 언어로부터 이미지로 그 표층을 끝없이 미끄러져 간다. 크루거는 느슨하게 이 표층의 지적인 게임을 펼치고 있다.
크루거의 작품에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것은 그녀의 경력에 의한 것이 크다. 그녀는 오랫동안 미술잡지 『아트포럼(Artforum)』의 편집에 관계했고, 영화평론가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도 다양한 경험을 했다. 1980년부터 사진을 매체로 삼아 제작을 시작할 때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한 상태이고, 뇌리에 있는 확고한 개념에 따라서 사진을 수집하고 제작하고 있었다.
크루거의 작품은 컬러도 약간 있지만 대부분이 붉은 에나멜로 프레임된 흑백이다. 그리고 그 밖의 동시대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광고 등 문화적 상황을 인용하고 있다. 그 인용수법은 콜라주와 몽타주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이러한 고전적인 말로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차라리 미술가 로버트 라우젠버그가 말하는 ‘결합(combin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라우젠버그는 1954년경부터 추상표현주의 풍으로 칠해진 캔버스 위에 넥타이, 도로표지, 코카콜라 병 등 일상의 잡동사니들을 붙인 작품을 제작했고, 그 위에 타이어, 산양과 닭의 박제 등을 종합시킨 것들을 캔버스 안으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라우젠버그는 현실에 참여하고 열중하는 것으로 현재를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합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술과 생활의 결합인 것이다. “회화는 예술과 생활의 양방향에 걸쳐 있다. 나는 양자 사이에서 행동하려고 시도한다”라고 하는 그의 발언은 잘 알려져 있다.
크루거는 일상의 사물을 들여오지 않지만 그 대신에 사진과 언어라고 하는 서로 다른 매체를 가지고 동일선상에서 결합한다. 또 사진과 사진의 콜라주도 콜라주를 초월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있어서 콜라주는 무의식을 표출하기 위한 수법이지만, 크루거의 결합은 현재로의 돌파구인 것이다. 사진에 잠재하는 여러 가지 메시지를 집어 올려 그것을 결합시킴으로써 현재의 균열을 제시하고 있다.
언어와 사진이라고 하는 질(質)의 낙차가 강렬하게 불꽃을 일으켜 문화의 균열을 보다 선명하게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크루거 이전에 메시지와 언어를 보기좋게 결합해 작품화한 미술가가 있다. 팝아트의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이 바로 그다. 팝아티스트는 도시의 정보적 환경에 착안하여 대중 속에 자리잡은 대중적인 이미지를 도상(icon)으로써 작품화시켜 제시했다. 앤디 워홀(Andy Wahol)의 마릴린 몬로와 캠벨 스프를 병렬시킨 실크 스크린 작품은 잘 알려져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해서 캔버스에 그렸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확대된 작품은 원래 인쇄된 만화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작품화된 만화는 그의 눈에 의해 불필요한 선은 잘라졌고, 형체는 정리되어 명쾌한 통일을 이루고 있다. 또 그의 작품으로 확대된 만화는 1960년대 전반 당시의 만화가 아니고 195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십수년간 차이가 있다. 이것은 60년대 들어오면 만화가 크게 변모해 사람들이 도상으로서 갖고 있던 전형적인 만화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가 차용하고 싶은 것은 전형적인 만화였다. 그 때문에 십수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더욱이 리히텐슈타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선별한 한 장면의 만화의 질이다. 그것은 강렬한 감정적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는 애정, 증오, 전쟁을 주제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또 만화에 덧붙여진 대사도 중요하다.
바다에 빠진 여자의 그림에는 “브래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보다 빠져죽는 것이 좋아요.”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잠에서 깬 여자가 스타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에는 “굿모닝 달링”이라는 대사가 삽입되어 있다. 또 어떤 작품에는 “브래드, 이 그림 걸작이예요. 곧 당신의 작품은 뉴욕에서 인기를 휩쓸 거예요.”라는 대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들 일련의 만화에 있어서는 이야기 속의 단순한 대사에 지나지 않겠지만, 확대된 한 장의 그림이 되었을 때는 선명하고 강렬한 현대의 균열을 분출한다. 이것은 크루거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언어의 이질적인 결합과 다소 다르지만 그것에 가까운 감촉을 가지고 있다. 물론 리히텐슈타인의 언어의 도입은 만화라는 미디어가 갖는 특징을 그대로 집어넣은 것이고, 크루거의 언어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시각적, 언어적인 표상(表象) 시스템을 동렬화(同列化)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작품은 근접하고 있다.
이와 같이 크루거와 리히텐슈타인은 두 개의 표상 시스템을 병렬로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작품이 말하는 내용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리히텐슈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이미지의 만화를 선택해 확대하지만, 그 여성들은 만화가 그려진 50년대의 남성 지배사회를 반영해 남성의 시각으로부터 본 여성스러운 여성이다. 이에 반해 크루거의 작품이 종합적으로 호소해 오는 것은 확고한 페미니즘을 근거로 한 관점이기 때문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의도는 대중적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도상을 빌려서 현대의 이코노그래피(iconography)를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실체를 상실한 허상의 현실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70년대의 미술잡지의 편집자이자 영화평론가로서 페미니즘 운동에 관계해 온 크루거에게 있어 페미니즘 사상은 본질적으로 즐겨 다루는 주제이다.
바바라 크루거, 무제, 1984
50년대의 『여성 조각상 연감』에서 인용한 사진에 “당신의 시선이 나의 옆얼굴을 두드리고 있다”라는 말을 결합한 작품은 가장 단적으로 페미니즘을 표명한 예일 것이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에는 모두 페미니즘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신’은 남성이고, ‘우리들(We)'은 여성을 은유하고 있다. 크루거의 궁극의 목표는 페미니즘의 이야기의 장치를 통해서 여성의 입장으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예술을 탈구축해서 여성의 시각, ’타자(他者 ; l'Autre)의 진술(陳述 ; le discours)'로 예술의 지평을 열어 가려고 하는 것이다.
구성사진가의 대다수가 여성이다. 신디 셔먼을 비롯해 바바라 카스텐, 잰그루버, 로리 시몬스, 엘렌 브룩스, 샌디 스코글랜드 등 대표적인 작가의 대다수가 여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찍이 필자는 여성 작가가 많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들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인생의 사명감보다는 생활의 구가에, 강박관념보다도 순진한 환희에, 현실보다도 꿈이 우선하는 시대에 있다. 그리고 이 감성이야말로 여성의 감성이기 때문이다.” 상황론으로서 이 의견을 조금도 바꿀 생각은 없다. 이 여성의 감성이야말로 새로운 지평을 여는 ‘타자의 진술’인 것이다.
크루거의 스타일은 포스터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녀는 포스터의 은유인 것을 가리키기 위해 1985년에 대작을 미니아폴리스, 런던, 엣센의 거리에 빌보드로 전시했다. 그녀의 작품속에는 적은 수이지만 컬러 작품도 있다. 화려한 쇼트케이크(short cake) 속에 커다란 검은 케이크가 발기한 페니스를 연상시키듯이 놓여진 사진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에게 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작품은 현대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지만, 크루거의 다른 대부분의 작품은 애정어린 감촉으로 가득 차 넘쳐흐르고 있다. 그것은 1920년대부터 30년대의 고전적인 사진 몽타주와 소비에트 선전포스터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인 알렉산드르 로드첸코(Alexandre Rodchenko)의 포스터의 인용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깨어진 여성의 얼굴 영상에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작품, 중절모를 쓴 남자가 무언의 몸짓을 하고 있는 “당신의 기분좋음은 나의 침묵”이라는 작품, 또 탄피와 손을 클로즈업시킨 이미지 “당신은 공포의 실험이다”라고 씌어진 작품 등은 로드첸코가 1923년부터 25년에 걸쳐 제작한 포스터의 표절적 인용이다. 그러면 왜 그녀는 과거의 미술을 즐겨 인용하는 것인가? 그것은 스타일을 확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현대예술의 상황 속에서, 스타일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이 조류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극도로 감상적으로 되도록 허용되는 것은 과거에로의 몸짓뿐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모노그램, 1955-59
또 인용이라는 것은 현대 특유의 사회구조의 심층을 탐구하는 실천적 전략이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예술작품에서 중요한 아우라(aura)가 복제기술이 진보한 현대속에서 붕괴해 가는 것을 일찍이 지적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지금’, ‘여기에’밖에 없다고 하는 ‘오리지널’에서 성립하고 있다. 그곳에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고도소비사회의 문화적 상황은 ‘오리지널’을 배제하고 아우라를 상실해 버렸다. 여기에서 성립되는 예술은 인용과 기성의 이미지의 발췌인 것이다.
뉴욕의 화랑은 회원제로 되어있다. 하나의 화랑은 일반적으로 15명 전후의 예술가를 회원으로 확보하고 있고, 2년 정도의 주기로 회원의 개인전이 개최된다.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데 초일류급 화랑의 회원이 되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예를 들면 신디 셔먼은 메트로 픽쳐서, 샌디 스코글런드는 레오 캐스터리, 바바라 카스텐은 존 웨버 등으로 모두 일류 화랑의 회원이지만 크루거가 속해 있었던 아니나 소세이 화랑은 일류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마약 중독으로 죽은 흑인 미술가 바스키아를 데뷔시킨 실적은 있지만 이류 화랑에 불과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물에 빠진 소녀, 1963
1987년 메어리 분 화랑이 크루거를 끌어들여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메어리 분 화랑은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비드 살르를 시작으로 하는 80년대의 주류인 신표현주의의 아성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슈나벨은 베이스 화랑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모든 회원을 신표현주의로 단결시키고 있었다. 거기에 사진 매체를 구사해서 작업을 하는 크루거를 회원으로 가입시켜 개인전을 개최했다는 것은 메어리 분(Mary Boone)의 예술의 핵심부에 변화가 생긴 것을 뜻한다. 메어리 분은 신표현주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고 있듯이 이 주류를 형성시킨 사람이다.
메어리 분 화랑에서의 크루거의 회고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89년에 들어서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첫 번째 개인전에 비해 상당한 진전이 보여졌다. 주요한 작품은 86년부터 시작된 매직 밀러를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면 왼쪽에서 보면 전기톱 사진인데 오른쪽으로 돌아서 보면 사진은 사라지고 ‘이 영화는 전에 본 일이 있다“라는 문자로 변한다. 크루거는 이미지와 언어를 결합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직 밀러를 사용하여 더욱 스릴 넘치는 지적 게임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크루거는 가장 힘이 있는 작가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현대사진의 전개』, 고쿠보 아키라, 김남진 역, 눈빛